새롭게 주목받는 그들의 까칠 훈훈 리더십

'하얀거탑'에서 장준혁 역할의 김명민은 성공을 위해 뭐든 할 수 있다며 욕망을 불태우는 인물이었고, 최도영 역할의 이선균은 착하기는 하지만 어딘지 칼바람 나는 세상에서 버텨내기에는 연약한 인물이었다. 그 후 김명민은 '베토벤 바이러스'의 강마에로 오합지졸 오케스트라를 이끌어내는 까칠하지만 그 속에 훈훈함을 숨긴 인물로 돌아왔다. 이선균은 '커피 프린스 1호점'과 '트리플'에서 특유의 훈훈함을 강화하더니, '파스타'에서는 까칠함까지 더한 최현욱 셰프로 돌아왔다.

강마에와 최현욱은 여러 모로 비슷한 점이 많다. 강마에가 마이너 냄새가 물씬 풍기는 인물들에게 "똥덩어리"라고 말하면서도 뒤에서는 그들을 지원하고 챙겨주는 것처럼, 최현욱도 주방에만 들어오면 요리사들을 잡아먹을 듯이 요리(?)하면서도 그들을 스스로 생존하게 해준다. 주방에서의 최현욱이 손님의 주문 폭풍 앞에서 요리사들에게 일사분란하게 주문을 하는 장면은 마치 강마에가 오케스트라 단원들을 이끌어 하나의 하모니를 만들어내는 장면을 연상시키곤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두 캐릭터가 비슷한 것은 그 리더십이다. 그들은 좀체 자신들의 팀원들을 친절하게 대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오히려 욕을 해대고 모욕을 주면서 그들을 강하게 담금질한다. '파스타'의 최현욱은 부주방장이 스카우트 제의를 받은 사실을 알면서도 그를 회유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더 강하게 밀어붙인다. 그는 "부주방장에서 쉐프가 되는 그 시기가 가장 어려운 시기"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레스토랑 사장과 쉐프라는 자리는 건설적인 긴장관계가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도 잘 안다. 그래서 그를 직접 도와주기 보다는 그 스스로 자신을 넘어서라고 말한다. 결국 부주방장을 강하게 밀어붙이는 것은 그 줄다리기를 가르치기 위함이다.

주방 보조인 막내가 그만두겠다고 하자, 겉으로는 그러라고 하지만 그는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주방 보조란 자리가 하루에도 몇 번씩 사표를 쓰는 자리라는 걸 그도 경험을 통해 알고 있기 때문이다. 새롭게 셰프로 온 오세영(이하늬)이 개발해낸 육수가 훨씬 괜찮다는 것을 알면서도 무조건 반대만 해온 이태리파 요리사들을 그는 옥상으로 데려다가 벌을 준다. 자신이 스카우트한 요리사들이지만, 요리 앞에서는 정직해야 한다는 원칙을 지키는 것이다.

이들의 까칠 훈훈한 리더십은 멜로를 통해서도 나타나는데 그 멜로의 양상 또한 두 드라마가 비슷하다. '베토벤 바이러스'의 강마에는 단원으로서의 두루미(이지아)를 혹독하게 이끌지만, 멜로의 대상으로서 그녀를 알게 모르게 돕는다. '파스타'는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주방에서는 쉐프와 요리사의 관계로 있다가 주방 밖으로 나오면 연인관계로 돌아간다. 최현욱은 일을 할 때는 아무리 연인이라도 모질게 대하고, 욕을 먹으면서도 그것을 서유경(공효진)은 웃으며 받아들인다. 일과 사랑에 있어서 이들은 그만큼 쿨하다.

재미있는 것은 최근 들어 까칠 훈훈한 리더십이 드라마 속에 자리하면서 어떤 공감을 일으키고 있다는 점이다. 이 새로운 리더십을 보여주는 캐릭터는 '외과의사 봉달희'의 안중근(이범수)이 이른바 버럭 범수로 주목받을 때부터 지금까지 진화를 거듭해오고 있다. 무엇이 이처럼 까칠하면서도 훈훈한 캐릭터의 리더십에 주목하게 만드는 걸까. 그것은 아마도 그만큼 사회생활이 혹독해졌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일 것이다. '외과의사 봉달희'의 병원이나, '베토벤 바이러스'의 공연장, 그리고 '파스타'의 라스페라라는 공간은 모두 현실 사회의 축소판으로서 그려진다.

과거 어느 때보다도 어려워진 그 현실에서 팀원들이 살아나가게 할 수 있는 방법은 그들의 아픔을 위로해주는 소극적인 방식이 아니다. 오히려 그 팀원들이 더욱 강하게 만들어 자신이 없어도 스스로 버텨낼 수 있는 자생력을 키우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일과 사랑을 동시에 그려내는 우리식의 전문직 장르 드라마들의 새로운 선택이기도 하다. 일에 있어서는 까칠함을 그리고 사랑에 있어서는 훈훈함을 전하는 것이 드라마가 현실의 빈자리를 채워 넣는 방법인 이상, 그것을 동시에 할 수 있는 캐릭터로서 까칠 훈훈한 인물이 창조되고 있는 것. '베토벤 바이러스'의 강마에, '파스타'의 최셰프는 어쩌면 지금 우리가 혹독해진 현실이 새롭게 요구하는 리더십의 한 단면일 수 있다.

강호동이 강마에가 된 사연

‘강심장’이 처음 기획 될 때만 해도 관계자들은 그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 하고 의문을 표했다고 한다. 게스트만 스무 명이라면 섭외하는 것도 문제겠지만 그들을 한 자리에 앉혀 놓고 토크쇼를 진행한다는 게 만만찮은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현실로도 드러났다. 초기 ‘강심장’은 이른바 ‘병풍 게스트’로 논란이 일어났다. 아무리 바쁘게 카메라가 움직이고 이야기를 이쪽저쪽으로 토스한다고 해도 그 많은 인원을 모두 비춰낸다는 건 실로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차츰 ‘강심장’이 자리를 잡아가면서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즉 병렬적으로 저마다의 주제를 하나씩 피켓에 적어놓고 순서에 따라 얘기하는 방식으로는 ‘병풍 게스트’는 피할 수 없는 한계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여기에 ‘강심장’은 ‘스타킹’식의 ‘조연 시스템’을 도입한다. 즉 한 명이 주연(?)으로서 자기의 이야기를 할 때, 주변에서 몇몇이 조연으로서 그것을 받쳐주는 형식이다.

이것은 ‘스타킹’에서는 일반인이 출연할 때 그들을 중심에 세워두고 연예인들이 조연역할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스타킹’에서는 그 조연역할이 주로 몸개그에 가까운 것인 반면, ‘강심장’은 토크를 통한 것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그 주연을 받쳐주는 ‘조연시스템’을 운용하는 MC, 강호동이다. ‘스타킹’에서 그는 일반인을 주연으로 세우기 위해 무대에서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다해 보여준다. 무릎을 꿇거나 바닥에 드러눕는 것은 보통 일이 되어 버렸다.

그러다 보니 강호동의 솔선수범(?)을 보는 게스트로 출연한 다른 연예인들도 적극적으로 리액션에 가담할 수밖에 없다. ‘스타킹’은 사실상 ‘리액션의 예능’이라고 할 수 있는데, 거기에는 이러한 일반인을 주연으로 세워두고 강호동의 진두지휘에 따라 조연역할을 자처하는 연예인들이 만들어내는 시스템이 자리하고 있다. 한편 ‘강심장’은 기본적으로 토크쇼이기 때문에 ‘스타킹’처럼 몸으로 보여주는 리액션보다 좀 더 복잡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강호동은 마에스트로 같은 강력한 토크의 지휘자 역할을 자처한다. ‘강심장’에는 다양한 톤의 목소리(?)가 존재한다. 즉 김영철 같은 개인기로 똘똘 뭉쳐 있는 목소리가 있는 반면, 김효진처럼 이승기를 추종하는 뒷배(?)를 갖고 강호동에게 호통치는 목소리도 있다. 정주리처럼 부담스러울 정도로 무조건 들이대는 목소리도 있고, 데니안처럼 옛 아이돌로서 지금의 아이돌과의 비교점을 세워주는 목소리도 있다. 물론 강호동 옆에 자리한 이승기는 마치 오케스트라 협연에서 지휘자 옆에 서는 메인 악기 연주자 같은 듣기만 해도 기분좋은 목소리를 낸다.

이들은 반고정된 출연자들인데, 새로 들어온 게스트들의 목소리를 하나의 합주로 만들어내는 역할을 해낸다. 강호동은 게스트의 이야기가 조금 재미없다 싶으면 확실하게 웃음을 보장하는 김영철 같은 개그맨에게 바톤을 넘기고 잠깐 한숨을 돌리고 나서 다시 게스트에게로 돌아온다. 그러면 이야기가 좀 더 매끄러워지기 때문이다. 게스트의 이야기가 좀 밋밋하다 싶으면 ‘야심만만’ 시절에 했던 것처럼 슬쩍 슬쩍 넘겨짚기로 게스트의 숨겨진 비밀을 캐내기도 하는 데, 그것이 좀 부담스러운 아이템이라면 자신이 하지 않고 좀 더 편안한 질문자(?)를 내세운다. 과거에 붐은 바로 이 역할을 하는 목소리였다. 이렇게 하면 수위가 좀 높은 질문도 질문자의 캐릭터로 인해 부드럽게 넘어가게 된다.

자신이 좀 오버했다 싶으면 김효진의 일침을 허용하고, 때로는 바른생활 청년 같은 이승기에게 자신을 내어줘 분위기를 반전시킨다. 이승기는 박상혁 PD의 말대로 “미소가 좋은 청년”이다. 그 기분 좋은 리액션 한 방이면 조금 썰렁해진 분위기도 금세 일소된다. 물론 이러한 다양한 소리들의 조합은 어느 정도의 가이드 라인으로서의 대본이 역할을 하게 마련이지만, 순간순간 치고 빠지는 토크의 조화는 MC인 강호동이 만들어간다. 박상혁 PD는 “강호동의 진행을 보면서 깜짝깜짝 놀랄 때가 많다”며 게스트의 토크 중간 중간에 카메라 밖에서 손짓 발짓으로 출연자들의 리액션을 요구하는 강호동의 진두지휘를 보는 건 흔한 일이라고 말한다.

버라이어티 쇼가 집단 체제화 되면서 그 많은 인원들의 행동이나 말을 조화롭게 만들어내는 역할은 이제 MC에게 요구되는 가장 중요한 자질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런 면에서 ‘스타킹’에서는 일반인을 상대로, ‘강심장’에서는 연예인을 상대로 거기에 맞는 ‘리액션의 예능’을 선보이는 강호동이 이 시대의 대표적인 MC로 부상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제 그는 그 범주를 넓혀, 예능이라는 오케스트라를 진두지휘하는 강마에가 되어가고 있다. 그가 메인MC로 자리한 버라이어티 쇼가 하나의 오케스트라 같은 느낌을 주는 건 그 때문이다.

현실을 잊고픈 판타지 vs 현실 속에서도 꿈꾸게 하는 판타지

지금 캐릭터로 가장 화제를 누리고 있는 것은 단연 ‘꽃보다 남자’의 구준표(이민호)다. 이 캐릭터를 통해 이민호는 ‘벼락스타’의 반열에 올랐다. 여성들은 자기 여자친구를 위해 백화점을 통째로 빌려 옷을 사주고, 전용비행기를 태워 뉴칼레도니아까지 날아가 주말을 보내며, 그러면서도 여자친구의 서민적 삶(?)까지 끌어 안아주는 이 만화 속에서 막 나온 듯한 꽃미남 캐릭터에 빠져들고 있다. 

구준표에 대한 반응, 왜 여성과 남성이 다를까
이상한 것은 이 구준표라는 캐릭터에 대한 남녀 간의 반응이 상반된다는 점이다. 여성들이 열광하는 반면, 남성들은 그다지 이 캐릭터를 매력적으로 여기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이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여성들을 꿈꾸게 만드는 그 만화 속의 캐릭터와, 자신을 비교한다는 것이 지금 현실 앞에 잔뜩 주눅 들어가는 남성들에게는 여러 모로 억울한 점이 많기 때문이다. 

구준표는 집이나 학교에서나 일상 생활 자체가 귀족들의 그것이다. 무도회를 즐기고 휴양지의 별장으로 여행을 떠나고 하녀들이 시중드는 식사를 하는 그 모습은 만화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중세 귀족의 모습이다. 무엇하나 남부러울 것 없는 귀족생활을 즐기는 구준표는 그다지 착한 캐릭터도 아니다. 돈이면 뭐든 다 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고 서민들의 힘겨운 일상을 찌질함으로 바라보기까지 하는 전형적인 무개념 캐릭터다.

중요한 것은 이 전형적인 귀족주의에 빠진 나쁜 남자가 평범한 서민 금잔디(구혜선)를 사랑하게 되고 그로 인해 자신도 조금씩 변화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점이다. 이것은 이 나쁜 캐릭터를 오히려 매력적으로 만든다. 능력 있는(뭐든 다해줄 수 있는) 나쁜 남자(다른 사람에겐 나쁘지만 나에게만은 잘해주는)가 한 사람만을(시청자 입장에서는 나만을!) 사랑하는 모습은 늘 드라마 속 버럭 캐릭터의 형태로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곤 했다. ‘외과의사 봉달희’의 버럭범수, ‘베토벤 바이러스’의 강마에처럼 구준표도 그 버럭 캐릭터의 연장선상에 있는 캐릭터다.

하지만 구준표가 다른 버럭 캐릭터들과 다른 점이 있다. 그것은 그의 능력이 어떤 노력에 의해 생겨난 것이 아니라 태생적으로 주어진 것이라는 점이다. 물론 드라마에서는 바로 이 주어진 능력이 그의 유년시절을 불행하게 했다는 식으로 설정되어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설정일 뿐이다. 만일 그가 똑같은 서민에서 시작해 귀족의 반열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라면 아마도 남성들 또한 이 캐릭터에 열광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태생적으로 주어진 능력은 일반 서민으로서는 도무지 불가능한 도달지점이다. 구준표라는 만화적 캐릭터에 여성들이 열광하는 그 모습을 보는 보통의 남성들이 씁쓸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현실을 잊게 하는 판타지, 현실에서도 꿈꾸게 하는 판타지
하지만 똑같이 까탈스럽고 늘 귀족주의를 입에 달고 다니는 능력 있는 남성이었던 ‘베토벤 바이러스’의 강마에(김명민)는 구준표와는 다릅니다. 강마에라는 캐릭터는 극심한 가난을 겪고 그 속에서 음악의 꿈을 이뤄온 입지전적인 인물이기에, 남성들은 그를 통해 꿈을 꿀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 그것은 비단 남성들뿐이 아니다. 강마에가 ‘베바’를 통해 우리에게 던져준 것은 서민들이라도, 따라서 꿈을 이루기에는 버거운 현실이라도 꿈이라도 꿔보라는 그 희망이었다. 똑같이 판타지를 그리고 있지만 ‘베바’의 판타지는 ‘꽃남’의 판타지와는 이렇게 다르다. ‘베바’의 판타지는 드라마 밖으로 나와 현실로 돌아온 사람들을 여전히 꿈꾸게 하는 반면, ‘꽃남’의 판타지는 현실 자체를 잊고싶게 만든다.

물론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다. 따라서 그 잠깐 동안의 일탈적인 판타지가 뭐가 나쁘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드라마를 보는 기본적인 욕망 속에 잠시 현실을 잊고픈 욕구가 있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똑같은 판타지 속에서라도 구준표보다는 강마에를 더 꿈꾸게 되는 건 왜일까. 그것은 아마도 꿈 속에서 꿈꾸는 것보다는 현실 속에서도 꿈을 꾸고 싶은 욕구가 더 크기 때문일 것이다.

'베바' 강마에, 문화현실과 맞서다

정치인이 바뀌면 문화도 다른 길을 걷게 된다는 건 우리나라 문화계의 비극이다. 문화적 소양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어느 한 구획을 책임지게 될 정치인에게는 실로 중요한 문제다. ‘베토벤 바이러스’에서 강마에(김명민)는 문화적 소양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새로 취임한 시장을 불러 자신이 들려주는 음악의 느낌을 다섯 가지 말하라고 한다. 시장은 아름답다, 좋다는 식으로 그것을 단순히 표현한다. 강마에는 거기에 대해 수많은 표현들이 가능한 그 음악을 그런 식으로 표현하는 건 본인의 자유지만, 그걸 모든 시민들에게 강요하지는 말라고 말한다. 문화에 대해 모를 수는 있지만 그것을 자기 식으로 마음대로 재단하지는 말라는 말이다.

그 새 시장은 자신의 취임식을 빛나게 할 목적으로 시향을 불러 자신의 애창곡인 ‘마이 웨이’를 연주하라고 했다. 이것은 아주 오래 전 군부독재 시절을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자기 취향을 위해 문화를 굴종시키려는 것. 거기에 대해 강마에가 한 것은 존 케이지의 ‘4분33초’다. 이 전위음악은 4분33초 동안 침묵함으로써 그 즉흥적인 반응으로 들려지는 소리들을 음악으로 전화시킨 곡이다. 즉 이 4분33초 간의 침묵 속에서의 자신의 반응은 자신 스스로 연주한 음악이 되는 셈. 새 시장은 침묵으로 꺾어지는 자신의 욕망에 화를 냄으로써 자신의 음악, 즉 음악적 소양의 조야함을 드러낸다. 여기서 강마에의 선택이 보여주는 것은 문화 그 자체가 어떤 잘못된 정치적 선택에 대한 저항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새 시장이 시향의 존폐를 결정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에서 한 정치인은 이렇게 말한다. “먹고살기가 힘든데 그깟 시향이 뭔 소용입니까 그 돈으로 길이나 하나 더 내세요.” 경제가 어려운데 문화가 다 무슨 소용이냐는 말이다. 그러자 반박이 날아든다. “아무리 어려워도 밥만 먹고삽니까? 향기가 있어야죠.” 그 논박이 오고가는 자리에서 강마에는 귀에 헤드셋을 끼고 클래식을 듣는다. 이 말 저 말 다 듣기 싫다는 무언의 반항인 셈이다. 이 돈을 벌어주는 것도 아니고, 길을 내주는 것도 아닌 음악의 무모성에 대한 시퀀스는 이미 희망을 잃어버린 수재민들에게 아무 소용이 없을 것만 같은 베토벤의 합창교향곡이 진짜 희망을 줄 수 있다는 에피소드에서 이미 나왔던 대목이다. 클래식으로 대변되는 문화는 불황에는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는 고상한 취미처럼 여겨져 왔지만, 실상은 그것이 오히려 힘겨움에 빠진 서민들을 위무하고 희망을 주는 존재라는 걸 말해준다.

강마에는 이 가녀리고 우리의 현실과 유리되어 보이는 문화(클래식으로 대변되는)가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가 하고 계속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러니 석란시향의 지휘자를 그저 5급 공무원으로 생각하는 새 시장과 맞설 수밖에. 이러한 인식은 강마에가 이 오합지졸 오케스트라를 끝까지 마음 한 구석에 세워두고 보이지 않게 도움을 주게 하는 힘이기도 하다. 적어도 이 오합지졸 오케스트라들은 이 어려운 경기와 현실 속에서도 희망과 꿈을 잃지 않는 존재이며, 그래서 실제 현실과는 아무 상관없어 보이는 오케스트라 연주를 위해 밤잠도 설쳐가며 연습을 하는 이들이다.

이들의 모습은 경제를 내세워 문화나 생태 같은 것은 아무 소용도 없다는 식의 경제 강박증을 가진 정치인들보다 훨씬 건전하고 건설적이다. 이들은 백도 없고 학벌도 별로 없는 보통 사람들이다. 특히 클래식이라는 세계에서 보면 애송이들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이 애송이들은 클래식 즉, 문화의 힘이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그 꿈은 우리네 서민들의 꿈과 맞닿아 있다. 전문가 입네 하면서 꿈은 이미 버린 지 오래인 그들과는 대립되는. 강마에가 그들을 보며 안타깝게 생각하고 또 지켜주고 싶어하는 것은 바로 그 꿈이다. 그 꿈을 이루게 하기 위해서 강마에는 저 스스로도 그러했듯 때로는 냉혹한 현실이 되어주기도 하고, 때로는 굳건한 버팀목이 되어주기도 한다.

그래서 그는 재능도 있고 열정도 넘치며 근성도 있는 강건우(장근석)를 현실 앞에 몰아세우면서도 “독해져라”하고 조언을 해준다. 또 클래식계에 아무런 프로필도 없는 강건우가 더 이상 연주할 수 없는 상황에 몰려 “죄송해요. 제가 너무 못나서”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그를 껴안아주며 “아니야. 넌 훌륭해. 대단해.”하고 말해주기도 한다. 그런데 그 강건우에게 하는 강마에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 울림은 고스란히 어려운 시기를 마치 단원들이나 강건우처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도 전달된다. 강마에가 껴안은 건 강건우뿐만이 아니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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