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로 와서 우리들로 끝난 ‘그사세’의 긍정론

‘그들이 사는 세상’에서 ‘그들’이 의미하는 것은 무얼까. 어찌 보면 그 답이 명징해보이는 이 질문에 이 드라마의 묘미가 숨겨져 있다. 드라마가 시작되기 전, 노희경 작가와 표민수 PD, 그리고 송혜교와 현빈이라는 연기자들이 만들어 가는 이 드라마에 관심이 쏠렸을 때, 우리는 그 제목 속 ‘그들’이 방송가, 특히 드라마를 만드는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드라마를 만드는 그들의 이야기?
그것은 사실이었다. 준영(송혜교)은 펑크가 나버린 드라마 촬영 분을 채워 넣기 위해 현장에서 자동차 질주 신을 찍고 있었고, 지오(현빈)는 그 날 방영 분을 급하게 편집하고 있었다. 까칠하지만 시청률로 인정받는 손규호(엄기준)는 현장에서 소리를 버럭버럭 질렀고, 양수경(최다니엘)은 그 욕을 다 먹어가며 현장에서 굴렀다. 김민철(김갑수)은 데스크에 틀어 앉아 시청률표를 보고 있었고, 윤영(배종옥)은 촬영장 자신의 차량에서 로드 매니저에게 호통을 치고 있었다.

또 그들은 자신만의 세계로 돌아와 준영과 지오처럼 헤어졌다 다시 만나 사랑에 빠지기도 하고, 또 각자만의 이유로 갑작스런 이별을 통보하기도 하며, 양수경처럼 저 혼자 사랑하다 상처받기도 하고, 윤영과 민철처럼 나이 들어서도 여전히 순정 어린 사랑에 빠지기도 하며, 손규호와 장해진(서효림)처럼 어느 날 갑자기 사랑에 빠지기도 한다. 이것은 그들이 사는 세상이었다.

그들의 이야기가 우리들의 이야기가 되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들이 드라마와 현실을 비교하며 의견충돌을 할 때다. 그들은 삶이 드라마 같을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드라마 속에서처럼 쿨한 사랑과 쿨한 이별을 하지 못하고 구질구질하며 때로는 신파가 되고 때로는 상투적인 대사로 가득 채워지는 현실을 비교하면서 드라마 속 삶과 현실의 삶은 다르다는 것을 관조해낸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상상하는 판타지로 가득한 사랑이 현실적인 사랑과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해주기도 한다. 이 드라마와 현실을 관조하는 상황 속에서 그들의 이야기는 이제 조금씩 우리들의 이야기가 되어간다.

이러한 관조적 입장을 취하게 해주는 것은 두 주인공의 나레이션이다. 지오와 준영이 자신들이 만드는 드라마 속 주인공들을 바라보며 자신들의 삶을 관조한다면, 이 나레이션은 바로 한 차원 더 위에서 지오와 준영이 서로 만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는 그 과정들을 내려다본다. 즉 이것은 외부적인 시선이거나, 작가의 시선이거나, 어쩌면 모든 걸 다 겪고 난 지오와 준영이 후에 그 때의 상황을 돌아보는 시선 같은 것이다. ‘그사세’에서 지오와 준영은 드라마 밖에서 자신들이 삶을 관조한다 생각하지만, 이 나레이션으로 대변되는 외부의 시선은, 그들을 결국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끌어들인다. 따라서 바로 이 지점은 드라마 밖과 드라마 안이 만나는 곳이 된다.

판타지보다는 꿈꿀 수 있는 현실을 선택하다
마지막회에서 준영의 나레이션은 지오가 했던 “모든 드라마는 해피엔딩이어야 한다”는 말을 얘기하면서 “희망이 아니면 그 어떤 것도 말할 가치가 없다”고 말한다. 이것은 작가의 다짐과 같다. ‘그사세’의 주인공들을 통해 알게 되었듯이 삶은 드라마처럼 달콤하고 쿨하지 않지만 어떤 희망을 얘기해야 한다는 노희경 작가의 다짐. 노희경 작가는 이 드라마를 통해 판타지와는 다른, 현실의 모습을 보여주려 했고, 그리고 그 뒤틀린 현실 속에서도 어떤 희망을 얘기하려 했다. 함께 싸우고 만나면서 드라마와 현실의 괴리를 체험한 지오와 준영이 함께 드라마를 찍으며 그 드라마 속 주인공들의 키스신에서 자신들의 키스를 상상하는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드라마 밖에서 여전히 현실에 치이지만 드라마 속의 세상을 꿈꾸는 그들, 이것은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우리가 아름다운 드라마를 만든다해도 우리가 사는 이 세상만큼 아름다운 드라마는 만들 수 없을 거다.” 이 나레이션처럼 노희경 작가가 선택한 것은 결국 현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판타지로 가장된 현실도 아니고, 그저 상투적이고 신파적인 쿨하지 못한 삶 속에서 허우적되는 그런 현실도 아니다. 그것은 어려워도 꿈꿀 수 있는 현실이다. 매일 밤샘촬영에 추위와 싸워가며 버텨내는 현실이지만 그 속에서 아름다운 드라마를 꿈꾸는 그들처럼, 실제는 7%의 시청률이 나온 드라마지만, 그 속에서 27%의 시청률을 받아 쥔 주인공들이 킥킥대며 웃게 해주는 그 꿈꿀 수 있는 현실. 우리가 이 드라마를 보며 어떤 따뜻한 위안 같은 것을 받았다면 바로 이 노희경 작가가 우리에게 전해준, ‘어려워도 꿈꿀 수 있는 현실’을 그 속에서 발견했기 때문이 아닐까.

어딜 보나 다 불황이다. 거의 모든 경제지표들이 곤두박질치고 있는 상황. 이 상황에서 TV는 어떤 존재로 각인되고 있을까. 1,2년 전만 해도 TV의 화두는 리얼리티였다. 드라마에서 트렌디를 벗어나 좀 더 디테일과 현장감을 살린 전문직 장르 드라마가 꽃을 피웠고, 예능에서는 버라이어티 쇼 앞에 '리얼'이라는 수식어가 붙기 시작했다. 발빠른 케이블TV에서는 리얼리티쇼들을 서둘러 수입하거나 자체적으로 제작하기 시작했고, 심지어 '막돼먹은 영애씨' 같은 다큐드라마가 나왔으며, 가짜를 진짜처럼 만들어낸 페이크 다큐가 하나의 대세처럼 우후죽순 쏟아져 나왔다. 채널을 어느 쪽으로 돌리든 프로그램이 하는 얘기는 이랬다. "이거 리얼입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리얼이라는 수식어는 과거에 비해 서서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실정이다. 아직까지 과거의 수식어 그대로 전문직 장르 드라마, 리얼 버라이어티쇼 같은 용어들을 사용하고는 있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이게 진짜 리얼이 맞는가 싶은 의구심이 생길 정도다. 먼저 드라마쪽을 보면 올 한 해 드라마의 한 경향으로 보였던 방송가 소재 드라마들의 경우, 리얼리티보다는 판타지쪽의 손을 들어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을 비교할 수 있는 두 드라마는 '온에어'와 '그들이 사는 세상'이다. '온에어'는 방송가의 뒷얘기를 리얼하게 다룰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이른바 스타들의 화려하고 다이내믹한 삶에 대한 대중들의 판타지를 자극하는 드라마로 그려졌다. 결과는 20%에 달하는 시청률이 말해줬다. 하지만 너무 리얼해 그들이 사는 세상이 우리가 사는 모습과 그다지 다를 것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그들이 사는 세상'의 경우, 시청률은 좀체 10%를 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이 사는 세상'과 맞붙은 '에덴의 동쪽'은 시대극을 표방했지만 사실은 욕망과 복수를 그리는 판타지극을 선보이면서 30%대에 이르는 시청률로 월화를 평정했다. 그래서인지 최근 드라마들은 점점 리얼리티보다는 판타지쪽으로 힘을 실어주는 양상이다. SBS에서 새로 시작한 '떼루아'는 그 전문적인 세계보다는 트렌디한 남녀 관계에 더 몰두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으며, '바람의 화원'이 끝나고 시작할 '스타의 연인'은 본격 트렌디 드라마의 부활을 예고하고 있다.

TV의 판타지 편향은 드라마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리얼 버라이어티쇼의 새 강자로 등장한 '패밀리가 떴다'는 바로 그 리얼리티보다는 판타지 설정에 힘을 실어주면서 부상한 경우다. '패밀리가 떴다' 속의 캐릭터나 상황은 대부분 설정이다. 초반부터 관계를 만들어내며 그 관계 속의 상황을 통해 웃음을 주었던 이 쇼는 다른 시각으로 보면 거의 시트콤에 가까운 성격을 쉽게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1박2일'이 가졌던 야생의 리얼리티와는 상반되는 것이다. 즉 '1박2일'은 날것의 것을 그대로 보여주려 하지만, '패밀리가 떴다'는 대중들이 보고 싶은 것을 보여주려 한다는 점이다. 바로 이것은 이 쇼가 판타지에 기반하고 있다는 걸 말해준다.

'우리 결혼했어요' 같은 가상설정 버라이어티 쇼가 점점 많아지고 있는 것도 예능의 판타지 편향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가상 부부, 가상 가족 같은 개념은 사실 우리가 드라마를 보면서 늘 상 빠지게 되는 판타지의 하나이다. 우리는 트렌디 드라마를 보면서 그 주인공들에게 감정이입 되는 판타지를 경험하고, 가족 드라마를 보면서 거기 있는 가족을 또 하나의 나의 가족으로 여기는 경험을 하게 된다. 가상 버라이어티 쇼는 바로 이런 드라마적 설정과 예능의 웃음코드를 연결시킨 것이다.

이처럼 TV의 판타지 편향이 일어나는 이유는 무얼까. 이것은 힘겨워진 현실에서 TV는 정보와 의미를 통해 말 그대로 멀리 있는(tele) 것을 가까이 보여주는(vision)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현실을 잊게 해주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는 방증이다. TV 앞에서나마 현실을 잊고 싶어 하는 대중들의 마음, 너무나 이해되고 공감 가는 것이지만 안타까운 현실이기도 하다.
(이 글은 스포츠칸에 기고된 칼럼입니다.)

SBS‘온에어’ vs MBC‘스포트라이트’ vs KBS‘그사세’

2008년 드라마의 특징 중 가장 도드라지는 것은 방송국을 소재로 한 드라마들이다. 그 첫 포문을 연 것은 SBS의 ‘온에어’이며 이어서 MBC의 ‘스포트라이트’가 방영되었고, 지금 현재 KBS에서 ‘그들이 사는 세상’이 방영되고 있다. 같은 방송가를 소재로 한 드라마들이지만 이들 3사의 드라마들은 약간씩 결을 달리했다. 어떤 점들이 달랐고 그것은 또 어떤 결과로 이어졌을까.

‘온에어’, 판타지를 리얼리티로 뒤바꾼 영리한 전략
SBS의 ‘온에어’는 전략적으로 우수한 드라마였다. 이 드라마가 포착한 곳은 대중들의 관심이 집중되는 방송가의 맨 얼굴(리얼)이면서도 여전히 판타지를 놓치지 않는 그 지점이었다. 드라마(온에어) 속에 드라마(티켓 투 더 문)를 배치함으로써 ‘온에어’는 그것이 리얼이라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즉 드라마라는 허구를 찍는 장면을 보여줌으로써 거꾸로는 진짜라고 강변하는 식이다.

하지만 바로 이 리얼로 포장된 ‘온에어’라는 드라마는 사실 판타지를 그려낸다. 여전히 드라마를 찍는 배우나 매니저, PD, 작가의 세계가 여느 보통사람들과 같은 그런 세계가 아니라는 것을 그 안에서 보여주고, 배우와 매니저와의 멜로, 작가와 PD와의 멜로를 그려내면서 판타지를 극대화시킨다. 드라마 속의 드라마를 끼워 넣어 한편에서는 리얼리티를 강변하면서도 동시에 판타지를 배치하는 이 전략으로 ‘온에어’는 더 큰 판타지성을 갖게 되었다. 즉 ‘사실 같은 판타지’가 구축된 것이다. 이를 통해 ‘온에어’는 시청률을 확보하면서도 완성도에 대한 비판을 비껴나갈 수 있었다. 방송가라는 소재를 적절히 이용한 영리한 선택이었다고 볼 수 있다.

‘스포트라이트’, 좋은 소재, 하지만 미완의 드라마
반면 MBC의 ‘스포트라이트’는 보다 극화된 현장 속으로 시청자들을 이끌었다. 우리가 흔히 뉴스를 통해 보던 사건사고의 뒷얘기는 그 자체로 훌륭한 소재가 되었다. 게다가 ‘스포트라이트’는 초반부 이 특정상황, 즉 방송국 기자의 상황을 일반 조직상황의 이야기로 풀어내려는 노력을 보였다. 즉 방송국 내의 라이벌 구도나 서열 관계 같은 이야기를 통해 보통 사람들의 공감을 끌어내고, 한 편으로는 이들의 특화된 사건상황을 끄집어내 긴장감을 높이는 방식은 대단히 효과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이 드라마의 문제는 구성에 있었다. 초반부 희대의 살인범 장진규 에피소드에서 지나치게 하이라이트를 보여주자 그 후의 에피소드들이 상대적으로 잔잔해져 버렸다. 물론 후에도 여러 번 기회가 있었지만 드라마는 그 때마다 정치적인 해결을 도모한다. 대신 불필요해 보이는 사회부 내의 경합구도를 자꾸만 내세우면서 드라마는 방향성을 잃었다. 에피소드의 병렬적 구성이 갖는 장점만 취하지 못하고 오히려 약점을 취함으로써 이 드라마는 어떤 상승곡선을 타지 못하고 말았다. 멜로 조차 애매해진 이 드라마는 가장 뜨거운 아이템을 잡았지만 불필요한 것들을 킬하지 못함으로써 미완의 드라마가 되고 말았다.

‘그사세’, 의미와 가치를 가졌지만 대중성을 확보 못한 드라마
현재 방영되고 있는 ‘그들이 사는 세상’은 이 두 드라마와는 다르게 리얼리티쪽에 더 많은 무게중심을 취하고 있다. 방송가 뒤편을 보여주되 대중들이 보고 싶어하는 것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온에어’와는 다르게 ‘그사세’는 그저 담담한 시선을 유지한다. 거의 스케치에 가까운 영상들과 함께 ‘그사세’가 취하는 입장은 방송국의 드라마제작을 통해 우리네 인생을 은유하는 것이다. 즉 ‘그들이 사는 세상’을 통해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보여주려는 것.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 선택으로 인해 이 드라마는 거꾸로 그들이어야 제대로 알 수 있는 드라마가 되어버렸다. 즉 대중들의 입장, 그들이 보고 싶은 입장을 끌고 가면서 동시에 그걸 통해 우리의 세상을 은유해내는 작업이었어야 했지만, 이 드라마는 아쉽게도 대중들이 보고 싶은 것을 보여주는 그 입장을 취하고 있지는 않다. 노희경 작가로서는 너무나 잘 알고 당연한 리얼리티겠지만 대중들은 생소한, 그 거리감에서 폭발적인 대중의 반응까지 다가가지는 못하게 된 것이다. 어쩌면 방송가를 소재로 한 드라마 중 가장 의미로서는 가치가 있는 드라마인 ‘그사세’는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대중적인 호흡을 얻지는 못하고 있다.

2008년을 뜨겁게 달군 이 장르 드라마들은 저마다 각각의 새로운 시도들을 보였지만 그만큼 한계도 드러냈다. 멜로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이 세 드라마가 초반부의 의지와는 다르게 결구 멜로에 힘을 실어주고(혹은 실리고) 있다는 것은 장르 드라마로서의 시도들이 어느 지점에서부턴가 흐지부지해졌던가, 아니면 어려움에 봉착했던가 했기 때문이다. 방송을 캐스팅한 ‘온에어’는 초반부 화두처럼 드라마 제작의 문제점을 끄집어냈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대한 아무런 답도 제시하지 않는 한계를 보였고, ‘스포트라이트’는 한창 긴장감을 높여놓은 사건을 정치적 해결로 덮어버리는 한계를 보였다. 그리고 ‘그사세’는 그 좋은 의도와 작품에도 불구하고 대중들과 좀더 호흡하지 못하는 한계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첫술에 배부르랴. 방송가를 소재로 한 이들 드라마들의 성과와 한계는 앞으로 그 계보를 잇는 드라마들의 가능성을 더욱 높일 것으로 기대된다. 아쉬움이 많지만 흥미롭고 의미 있는 시도였다.

현실에서 드라마를 꿈꾸거나 드라마를 현실처럼 만들거나

드라마와 현실 사이에는 얼마만큼의 괴리가 있을까. ‘그들이 사는 세상’의 9,10회의 부제인 ‘드라마처럼 살아라’는 말은 정지오(현빈)가 주준영(송혜교)에게 무심코 했지만 현실은 전혀 달랐던 것처럼 그 사이에 커다란 간극을 두고 있다. 드라마 PD로서 무언가 멋지게 살아가고 싶지만 현실은 당장 초짜 작가와 함께 단막극을 만들어야 하는 정지오는 까칠하고 인간미 없지만 시청률로 인정받는 손규호(엄기준)에게 자격지심까지 느낀다.

그의 현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아버지와 그 아버지를 그래도 사랑하는 역시 이해할 수 없는 어머니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것이다. 그 속에서 그는 오픈카를 타고 멋지게 차려입고는 어딘가로 주준영과 드라이브를 가는 그런 드라마 같은 장면을 떠올린다. 드라마와는 전혀 상관없는 초라한 현실을 갖고 있는 그는 갑자기 나타나 “저 건물이 내 거야”하고 말하는 주준영의 어머니를 만나고는 심지어 자신이 만나고 있는 주준영 마저 현실이 아닌 것처럼 생각한다.

이것은 주준영에게도 마찬가지다. 겉으로 보기엔 감정이 메마른 것처럼 보이는 그녀는 그 속을 들여다보면 만신창이의 상처를 가지고 있다. 드라마 같이 쿨해 보이던 그녀의 삶은 사실은 참 구질구질한 어머니와 아버지의 외도로 점철되어 있다. 그녀가 당장 발을 디디고 철야를 밥먹듯 하며 링거를 맞아가며 촬영을 해야하는 현장과, 그 속에서도 “보고 싶어 미치겠다”면서 찍어놓은 동영상으로 마음을 달래는 애인 정지오 사이에 놓여진 거리는 바로 드라마와 현실 사이의 거리이기도 하다.

이 드라마 속에 등장하는 드라마(판타지)와 현실의 괴리감은 또한 좋은 드라마와 인기 있는 드라마 사이의 거리이기도 하다. 정지오와 손규호로 대립되는 이 시청률은 낮아도 좋은 드라마와 시청률이 높아도 늘 그게 그거 같은 드라마는, 드라마를 제작하는 이들이 주인공인 이들에게는 드라마 같은 삶과 현실의 삶과의 괴리감을 드러내주는 대목이다. 정지오가 “드라마처럼 살라고 했지만 자신에게 드라마는 도피처”라고 말하는 것처럼, 판타지를 끄집어내는 드라마와, 리얼리티를 담보하는 드라마 사이에서 사람들은 현실이 아닌 환상을 선택한다. 이것은 드라마를 제작하는 이들의 현실이다.

그렇다면 이렇듯 드라마 같은 삶과 현실의 삶에 대해 한 편의 드라마를 쓸 정도로 잘 알고 있는 노희경 작가의 선택은 무엇일까. 표민수 PD가 인터뷰를 통해 말한 것처럼 이 드라마는 반(半)다큐멘터리적인 드라마다. 즉 판타지를 자극하기보다는 리얼리티를 끄집어내려 노력했다는 말이다. 만일 이 드라마가 판타지를 만들려 했다면, 드라마 제작현장은 좀더 치열하게 극화되었어야 한다. 그래야 그만큼 먼 거리에 위치한 애인 정지오에 대한 주준영의 그리움이 절절할 테니까. 하지만 이 드라마는 이러한 ‘온에어’적인 선택을 하지 않았다. 제작현장의 장면이 담담할 정도로 스케치에 머무는 것은 이 드라마의 ‘판타지보다는 현실 선택’을 드러내주는 대목이다.

그런데 드라마를 만드는 것이 현실인 그들이 전혀 드라마처럼 살아가지 못하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까. 그래서 노희경 작가가 선택한 것은 드라마(환상) 같은 드라마가 아닌 현실 같은 드라마가 아니었을까. 드라마와 현실 사이의 괴리감은 어쩌면 거꾸로 현실성보다는 판타지에 몰두하는 드라마들의 유행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만일 현실 같은 드라마가 세상에 가득하게 된다면 “드라마처럼 산다”는 말은 더 이상 현실의 반대말이 아닐 것이다. 그렇게 보면 우리가 적어도 이 현실 가득한 드라마를 보는 동안은 ‘드라마처럼 사는’ 셈이다. 노희경의 드라마는 판타지보다는 현실을 그리며, 이것은 노희경 작가가 자신은 물론이고 그 드라마를 보는 이들까지 드라마처럼 살게 하는 자신만의 노하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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