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이

왜 럭비는 점수를 낼 때 '골'이라 부르지 않고 '트라이'라고 하는지 궁금했다.

그건 점수를 낸 골 자체가 아니라

무수히 여러 변수들을 뚫고 지나간 과정 자체를

이 스포츠는 더 중요한 가치로 삼기 때문이다.

트라이

무언가를 얼마나 얻었는가가 그 사람의 가치를 평가하는 시대에

각각에게 매겨진 점수들이 오롯이 자신의 능력 때문이었다고 착각하는 시대에

<트라이 : 우리는 기적이 된다>는 그것이 그저 운이 조금 좋았을 뿐이라고 말한다. 

트라이

물론 그 운도 어디로 튈 지 알 수 없는 삶의 과정 속에서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노력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지만

설사 점수를 내지 못한 삶이라도 

매번 노력하고 도전한(트라이한) 삶이라면 

그 자체로 가치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동백꽃’은 어떻게 기적을 만들었을까

 

결국은 작품인가. 넷플릭스 같은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 업체들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드라마의 규모는 성공과 직결되는 요소로 꼽히기 시작했다. 몇 백 억이 들어간 드라마들이 이제 우리에게도 익숙해지기 시작했던 것. 하지만 기적 같은 성공을 거둔 KBS 수목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을 보면 역시 작품이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화려한 외형이나 규모가 아니라.

 

옹산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동백(공효진)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벌어진 이야기를 다룬 <동백꽃 필 무렵>은 멜로드라마와 코미디로 경쾌하게 시작하지만, 까불이라는 희대의 연쇄살인범이 등장하면서 추리극과 스릴러 장르를 껴안았고 그를 잡기 위한 반전의 반전 스토리가 이어졌다. 여기에 어린 시절 동백을 버리고 떠났다 다시 찾아온 엄마 정숙(이정은)의 이야기는 가슴 먹먹한 가족드라마를 보여줬고, 동백과 그 엄마를 챙기고 지키려는 옹산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는 휴먼드라마의 면면을 더해줬다.

 

사실 장르가 뭐 그리 중요할까 싶지만 이처럼 다양한 장르적 요소를 갖고 있다는 건 드라마가 끝까지 긴장감을 잃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달달한 멜로와 빵빵 터지는 웃음 뒤에 소름끼치는 스릴러와 호기심을 자극하는 추리가 적절히 섞였고, 가족과 이웃의 이야기는 보는 이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결국 <동백꽃 필 무렵>이 한 이야기는 사회적 잣대에 의해 편견어린 시선 때문에 위축된 삶을 살아가는 그 어떤 존재들도 모두 저마다 그 존재 자체로 사랑받아왔고 사랑받을 가치가 충분하다는 것이었다. 동백과 그 엄마 정숙이 행복하게 다시 살 수 있기를 시청자들을 바랐고 옹산 사람들도 바랐다. 이 두 지점이 맞닿은 곳에서 이 드라마의 커다란 공감대가 만들어졌다.

 

화려한 도시의 이야기도 아니고, 눈 돌아가게 모든 걸 갖춘 멋들어진 캐릭터들의 이야기도 아닌 시골 마을의 촌스러운 캐릭터와 그들이 엮어가는 이야기가 이토록 큰 반향을 일으켰다는 건 기적 같은 일이다. 하지만 드라마가 말했듯이 그저 일어나는 기적은 없다. 그 기적은 잘 들여다보면 사람들의 마음 하나하나가 겹쳐져 일어나는 결과일 뿐이다.

 

그 기적의 중심점에 있는 인물은 단연 이 작품을 쓴 임상춘 작가다. 이미 <쌈, 마이웨이>에서부터 남다른 감수성으로 시청자들을 울리고 웃겼던 이 작가는 <동백꽃 필 무렵>을 통해 확고한 자기 세계를 드러냈다. 소외되어 시선조차 닿지 않는 곳에 있는 이들을 향한 작가의 따뜻한 시선은 어느 들가에 피어난 이름 모를 동백꽃을 피워내는 볕 같았다.

 

그렇게 볕을 받아 연기자들의 연기가 피어났다. 동백 역할로 모든 이들의 사랑을 받은 공효진과 ‘촌므파탈’이란 신조어에 걸맞는 연기를 보여준 강하늘, 엄마 역할로 시청자들의 눈물샘을 자극했던 이정은과 고두심, ‘옹벤져스’라 불린 옹산 아주머니 역할을 맛깔나게 연기해낸 김선영, 김미화, 이선희, 백현주, 찌질한 남편과 걸크러시 아내 케미로 사랑받은 오정세, 염혜란, 인생캐릭터 만난 손담비에 시골 파출소장으로 큰 웃음을 줬던 전배수, 미워할 수 없는 아빠 역할의 김지석과 관종 역할의 지이수 그리고 이 드라마의 빼놓을 수 없는 미친 존재감 필구 역할의 김강훈과 마지막 부분에 빛을 발했던 까불이 이규성과 그 아버지 신문성까지 누구 하나 빠지지 않는 존재감을 보여줬다. 어디 하나 치우치지 않고 내려 쬐는 공평한 볕처럼 작가의 손길이 구석구석 닿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많은 옹산 사람들의 마음들이 모여 까불이를 잡고 동백의 어머니를 살려내는 기적을 만들었듯이, 작가를 위시해 연출자, 연기자와 스텝들까지 그 마음이 하나가 되어 드라마를 살려내는 기적을 만들었다. 사실 KBS 드라마는 그간 너무 깊은 부진을 겪었고 그래서 좀 더 강한 대작들의 지지를 받아야 회생할 수 있을 것 같은 위치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동백을 지킨 건 동백 자신이었던 것처럼, KBS 드라마는 KBS적인(작가도 연출자도 또 스토리까지도) 힘으로 자신을 지켜냈다. 기적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지만, 그 기적은 결국 화려한 외형이나 외부의 힘이나 규모가 아닌 사람이 만들어낸다는 걸 <동백꽃 필 무렵>은 보여줬다.(사진:KBS)

'휴먼다큐 사랑' 승리커플 위대한 사랑, 처음엔 눈 의심했다

눈을 의심했다. 한쪽 팔과 한쪽 다리가 없다는 것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박항승씨가 수영을 하는 모습은. 4살 때 8톤 트럭에 치여 오른팔 오른 다리를 잃은 그였지만 그 얼굴에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활짝 웃고 있었고, 자신의 장애를 스스럼없이 얘기하며 농담까지 하고 있었다. 그 옆에는 역시 늘 웃으며 그를 바라봐주고 지지해주는 권주리씨가 있었다. 이름에서 한 자씩 따서 ‘승리 커플’로 불리는 이 부부는 정말 이름처럼 사는 것 같았다. 항상 승리하려 하는 항승씨와, 그에게 주고 또 주는 주리씨.

MBC <휴먼다큐 사랑>에서 우리가 더 많이 본 건 ‘눈물 가득한 사연들’이었다. 하지만 ‘당신은 나의 금메달!’편은 눈물보다 유쾌한 웃음이 가득했다. 물론 그들의 웃음 뒤에는 남다른 아픔과 상처가 가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 상처를 뛰어넘어 웃게 하고, 그 웃음을 통해 도저히 시도조차 할 수 없던 기적 같은 일들이 벌어지게 된 건 바로 ‘사랑’이었다.

첫 만남부터 30분이나 지각한 주제에 애프터 신청도 하지 않고 가버린 항승씨. 장애가 있다는 사실도 뒤늦게 알고 나갔던 주리씨는 장애사실보다 연락처조차 묻지 않았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고 했다. 그래서 주선자에게 항의를 했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친구로 지내다 연인이 되었다. 연애도 결혼도 모두 주리씨가 먼저 하자고 했다.

장애 사실 때문에 결혼 반대가 있었을 성 싶지만, 주리씨의 아버지는 “스스로 알아서 결정할 것”이라며 그의 선택을 믿어주었다고 한다. 아마도 장애를 갖고 있는 주리씨 동생을 통해 이 가족은 장애와 비장애 사이에 놓여진 현실의 벽을 일찌감치 느끼고 있었을 것이었다. 그래서 그것을 뛰어넘을 수도 있었을 것이었다.

승부욕이 강해 못하는 운동이 없다고 했지만 항승씨가 물이 두려워 도전조차 하지 못했던 수영을 할 수 있게 된 건 주리씨 때문이었다. 팔, 다리 없이도 수영을 할 수 있다는 걸 확신한 주리씨는 수영장에서 함께 데이트를 하며 항승씨에게 수영을 가르쳤다. 또 겨울이면 스노보드를 타야 한다는 주리씨의 말에 항승씨는 절단된 다리로 스노보드 타는 법을 배웠다. 그들은 스키장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항승씨는 스노보드 선수로 국가대표가 되었다.

사랑하기 때문에 배우자가 하고픈 것을 함께 하려 노력했던 것이 그가 도저히 할 수 없을 거라 여겼던 것들을 할 수 있게 해주고 나아가 기적 같은 일까지 만들었던 것. 이 이야기는 평범하게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큰 울림을 주는 것이었다. 사랑을 통해 얼마나 우리가 서로를 북돋워줄 수 있고 성장시킬 수 있는가를 보여준 것이니 말이다. 어찌 보면 스스로 한계를 긋고 넘어서려 하지 않는 마음이 진짜 장애가 아닐까 싶었다.

항승씨와 주리씨가 함께 서로를 내조하며 살아가는 모습은 보통의 부부 사이에도 존재할 수 있는 마음의 장애가 이들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확인시켜줬다. 한 손으로 야채들을 잘라 아내를 위한 요리를 하는 항승씨나, 3년 간 자신이 생계를 책임지며 항승씨에게 도전할 수 있는 자유를 선사하고 그 후에는 90년 간 자신의 노예로 살라며 유쾌하게 웃는 주리씨에게서 부부 간의 흔한 역할 구분에 얽매인 마음의 장애는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휴먼다큐 사랑>이 전한 박항승씨와 권주리씨 부부의 이야기는 눈물보다는 유쾌한 웃음이 가득했다. 그 결코 쉽지만은 않은 삶의 편린들이 경기를 마치고 눈물을 흘리며 “사랑한다” 말하는 항승씨의 모습에서 묻어났지만, 그래도 더 이들을 가득 채워주는 건 행복 가득한 웃음이었다. 금메달은 따지 못했지만 당신은 나에게 금메달이라며 자신이 만든 종이 메달을 항승씨의 목에 걸어주며 환하게 웃는 주리씨의 모습에서 어떤 금메달로도 바꿀 수 없는 ‘위대한 사랑’이 느껴졌다.(사진:MBC)

‘우만기’, 김명민에 기대하는 약자 보호의 시선

KBS 월화드라마 <우리가 만난 기적>은 이른바 ‘영혼 바꾸기’라는 소재를 가져왔다. 사실 새로운 소재는 아니다. 몸과 영혼이 바뀐 인물들이 벌이는 한바탕 소동은 이미 남녀가 바뀌는 경우까지 나온 바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드라마 <시크릿 가든>이 그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만난 기적>의 ‘영혼 바꾸기’는 흥미롭다. 도대체 무엇이 이 흥미로움을 만드는 걸까.

그 핵심은 ‘영혼 바꾸기’라는 그 자체에 있는 게 아니라 바뀌어진 영혼이 만들어낼 ‘기적 같은 변화’에 있기 때문이다. 그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이 영혼이 바뀐 송현철(김명민)이다. 육체는 최연소 지점장에 탁월한 두뇌를 가진 고스펙의 소유자지만, 영혼은 정 많고 따뜻한 마음씨의 소유자다. 그러니 영혼이 바뀐 송현철은 모든 걸 가진 인물이 된다. 능력도 있지만 마음도 따뜻한.

물론 전혀 다른 영혼과 육체가 하나로 묶여졌으니 정체성의 혼돈에서 오는 정신적 충격이 없을 리 없다. 그래서 육체의 주인 지점장 송현철이 그간 해왔던 나쁜 짓들을 알게 된 주방장 송현철의 영혼은 이 육체의 주인공에 대해 분노를 느낀다. 은행 직원들을 모두 모아놓고 자신의 비리를 낱낱이 적어 자신에게 알려달라고 한다. 하지 말아야 할 짓들을 잔뜩 벌여놓은 육체의 주인을 대신해 그 잘못들을 되돌려놓으려 한다.

또 같은 학교에 다니는 자신의 친딸 지수(김환희)와 자신이 임대하고 있는(?) 육체의 아들 강호(서동현)가 싸움을 벌여 학교에 불려가자 송현철은 두 아이들 사이에서 정체성 혼란을 일으킨다. 친딸인 지수를 오히려 두둔하고 지수를 “못생겼다” 놀린 강호를 꾸짖는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선혜진(김현주)이 강호의 잘못을 알고는 지수에게 사과하며 일이 잘 마무리되자, 송현철은 강호에게 자신이 지수 편을 든 것에 대해 “미안하다”고 말한다. 제 자식만큼 타인의 자식 역시 소중하게 생각하는 송현철의 착한 영혼이 슬쩍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래서 이 착한 영혼 송현철에 대한 시청자들의 여러 가지 기대가 생겨난다. 그 하나는 악독한 지점장이었던 육체 송현철이 해왔던 비리들을 그가 되돌릴 거라는 기대다. 너무나 악독해 회사 나오는 게 지옥이라는 직원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그래서 조금씩 바뀌어질 이 은행의 풍경들은 바로 시청자들이 기대하는 기적이다. 

또 하나는 지금껏 도우미 취급을 하며 무시해왔던 아내 선혜진에게 송현철의 따뜻한 사과가 어떤 식으로든 보여지길 바라는 기대다. 영혼이 바뀌고 문득 송현철이 선혜진에게 물었던 “아침은 먹었어요?”라는 그 질문 하나가 그토록 뭉클하게 다가올 수 있었던 건 그간 지점장 송현철이 대했던 것과는 너무나 다른 기적 같은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시청자들이 기대하는 기적은 이 힘겨워도 가족 간의 사랑으로 버텨왔던 조연화(라미란) 가족이 육신은 죽었지만 송현철의 육신을 빌어 돌아온 아빠의 사랑이 온전히 전해지는 일이다. 그것은 가족애를 드러내는 것이지만, 동시에 가진 자가 된(육체 송현철로 다시 살아난) 송현철이 약자들을 그들의 입장에서 이해하고 바라보는 시선으로 보여지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에서 이런 일은 기적 같은 일이 된 지 오래다. 가진 자가 약자의 입장을 들여다보는 일.

영혼이 바뀌어 생긴 꼬이는 삼각관계 이야기보다, 그걸 무마하려고 신이 개입하여 무리하게 사랑을 엮는 이야기보다, 우리의 시선을 끄는 건 영혼이 바뀜으로 해서 벌어지는 기적 같은 일들이다. 바로 그 지점에 흔한 ‘영혼 바꾸기’ 설정을 가져온 이 드라마만의 특별한 감흥이 생겨나기 때문이다.(사진: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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