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건물 밑이 원래 하천이야. 야 봐봐. 물길 따라 지어가지고 이렇게 휘었잖아. 복개천 위에 지어가지고 재건축도 못하고. 그냥 이렇게 있다가 수명 다하면 없어지는 거야. 터를 잘못 잡았어... 그것도 나랑 같아. 나도 터를 잘못 잡았어. 지구에 태어나는 게 아닌데...”- '나의 아저씨' 중에서
나의 아저씨
'나의 아저씨'가 방영될 때 내 나이도 오십을 막 넘기고 있었다. 87학번인 나의 대학시절만 해도 최영미 시인이 '서른, 잔치는 끝났다'고 할 정도로 서른만 넘으면 인생이 꺾어지는 줄 알았다. '또 하루 멀어져 간다'로 시작하는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도 그렇다. 지금은 달라졌다. 서른에 결혼하는 이들은 거의 없어졌고 마흔이 넘어야 이제 중년에 들어선다고 여긴다. 중년과 노년의 나이 개념이 달라져서 오십을 넘겼는데도 여전히 중년이란다. 몸은 여기저기 고장나 삐걱대는 소리를 내고 있는데. 한국인들의 중년은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도 갖지 않으려는 현 세태와 맞물려 점점 뒤로 늦춰지는 것처럼 보인다. '영피프티'라는 말이 나오고 있지만 그건 피프티도 영했으면 하는 오십대 당사자들의 마음과, 중년에도 일을 더 해야 사회가 돌아가게 된 현 한국의 인구구성의 절박함이 만나 생겨난 말이 아닐까 싶다. 실로 오십대 중반을 넘어가기 시작하면 얼굴에 주름이 생겨나고 허리는 구부러지기 시작하고 기력도 예전같지 않아 조금만 움직여도 피곤해지는게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나이 들어도 독립하려 하지 않으려는 청춘들의 모습이 점점 자연스러운 일이 되어가는 현 한국사회에서 오십대 가장이 쉰다는 건 언감생심이다. 거북목에 오십견을 달고 살면서도 아픈 몸을 이끌고 컴퓨터 앞에 앉아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예외는 아니다.
박해영 작가의 '나의 아저씨(4회)'에는 박동훈 부장(이선균)이 회사 동료들과 퇴근 후 한 잔 걸친 후 대폿집을 나서 나란히 걸어가며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나온다. 그 장면에 보여지고 언급되는 곳이 바로 서소문 아파트다. 서대문구 미근동에 지금도 현존하는 아파트. 1972년에 지어진 이 낡고 오래된 아파트는 앞뒤로 세워진 현대식 건물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서 있는데, 마치과거의 한 부분이 담긴 이물질처럼 보여 이색적인 느낌을 준다. 후배가 "우리 부장님 이 건물 진짜 좋아해"라며 "이 낡은 데를 왜 이렇게 좋아하세요?"라고 묻자 박동훈은 이렇게 말한다. "나랑 같애." 그리고 박동훈은 그 아파트가 바나나처럼 살짝 휘어져 있는 이유를 설명한다. 하천 위에 지어져 그 흐르는 물길을 따라 짓다 보니 그렇게 됐다든 것. 그래서 재건축도 할 수 없단다. 실제로 이 아파트는 그간 노후되어 끊임없이 재건축 이야기가 나왔지만 무산된 곳이다(현행법 상 하천 위에는 건물을 지을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이대로 두면 박동훈 말대로 수명 다하면 없어질 처지다.
서소문 아파트
기억이 가물가물해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1980년 즈음 나는 그 서소문 아파트에서 살았다. 초등학교 3학년 겨울방학 때 덕수초등학교로 전학을 온 후 두번째 거처다. 고향인 경기도 안성을 떠나 처음 서울살이를 시작한 곳은 광화문 신문로2가 뒷골목에 있던 단칸방이었다. 지금은 재개발되어 빌딩이 들어섰지만 당시만 해도 집을 나서면 오밀조밀 모여있던 집들과 절벽처럼 높은 담벼락 사이에 놓여 있던 길다란 골목길이 학교가는 길이었다. 매일 그 길을 오갔고, 가끔은 친구들과 그 골목길에서 놀았다. 차도처럼 똑바로 난 길이 아니라 사람들이 걸어다니는 구부러진 길. 그래서 공놀이를 하다 놓치기라도 하면 공이 자꾸 시야에서 사라지기도 했지만, 그 구부러진 길은 당시 쉽지만은 않았을 시골 소년의 서울살이에도 아늑함과 편안함을 줬다.약 2년 후 우리는서소문 아파트로 이사를 갔다. 학교까지는 버스로 세 정거장 정도를 걸어가야 하는 거리였지만 그 아파트에도 구부러진 골목길이 있어 집으로 돌아오는 나를 안심시키곤 했다. 아파트 앞쪽의 골목길에는 돼지머리가 놓여져있던 대폿집들이 죽 늘어서서 하루의 고단함을 소주 한 잔으로 풀어내는 아저씨들을 반기곤 했는데, 늘 특유의 쿰쿰한 냄새가 가득 채워져 있었다. 대폿집에서 누군가와 함께 술 한 잔을 할 때면 그래서 그 냄새를 따라 그 때의 그 구부러진 골목길이 기억 속으로 떠오르곤 한다. 나는 당시 7동 7층에 살았는데, 지금도 7동과 8동 사이에 있는 비밀통로(?)를 통과해 있는 서서갈비집에서 가끔 누군가를 만나곤 한다. 고기 한 점에 소주를 기울이다 보면 그 때의 기억이 아련하다."나랑같애"라는 박동훈의 말이 남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는다.
'나의 아저씨'에서 박동훈이 굳이 서소문 아파트를 자신과 동일시하며 말하는 대목은 우연히 나온 게 아니다. 이 드라마는 이제 중년의 위기를 맞이한 박동훈의 이야기를 그의 직업에 빗대 은유하는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박동훈은 구조기술사로 건물의 안전을 진단하는 일을 한다. 그는 "모든 건물은 외력과 내력의 싸움"이라며바람, 하중, 진동 같은외력들을 계산하고 그 힘에 건물이 버텨낼 수 있는 내력이 있는가를 판단하는 게 그의 일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 일에서 인생을 은유한다. "인생도 어떻게 보면 외력과 내력의 싸움이고. 무슨 일이 있어도 내력이 있으면 버티는 거야." 그래서 자신이 맞이한 중년의 위기들도 애써 버텨보려 하지만, 그것이 정답인지가 헷갈린다. 중년의 위기를 건물에 빗대서 꺼내놓은 이 대목은 그래서 한국사회가 헌재 맞이하게 된 중년의 시간을 떠올리게 한다.
나의 아저씨
70년대 개발시대를 거칠 때만 해도 한국사회는 팔팔했던 청년의 시간을 구가하고 있었다. 서소문 아파트도 지금은 낡고 오래되어 초라해 보이지만 1972년 처음 지어질 때만 해도 연예인과 부자들이 좋아하던 아파트였다. 1층에 상가가 있는 주상복합아파트로 편의성이 좋았고, 무엇보다 서울 한복판에 위치해 있어서다. 하지만 그렇게 세간의 주목을 받던 당대의 잘 나가던 건물들도 낡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개발시대의 관성이 남은 한국사회에서 낡는다는 건 재개발되어야 한다는 걸 의미했다. 그래서 낡은 건 사라지고 새로운 건 계속 세워졌다. 먹고 살려는 욕망이 펄펄 끓던 청년의 시절을 그렇게 지나왔고 이제는 중년을 맞이했지만 여전히 그 욕망은 꺼지지 않는다. 개발시대를 거치며 한국이 이른바 '빈티지'의 멋을 잃어버린 건 안타까운 사실이다. 낡은 건 버려야 하는 것이고 새로운 것이 좋은 것이라는 인식이 그 시대의 휩쓸림 속에서 탄생했다.지금도 매일 세워지고 있는 아파트들은바로 그 여전한 개발시대의 관성을 잘 보여주는 상징물들이다. 그건 마치 외력에 의해 조금씩 낡아지고, 흔들리고, 결국은 무너지는 것이 당연한 자연법칙을 애써 거스르려는 욕망처럼 보인다.
그 욕망이 헛된 일이라는 건 나이 오십을 넘어보면 다 알게 된다. 몸이 예전같지가 않다. 처음에는 그걸 어떻게든 이겨내보려 애쓰지만 세월에는 장사가 없다. 젊어서는 아무 일도 아니었던 먹고 자고 싸고 하는 일들이 나이가 들어가면 하나하나 쉽지만은 않은 일들이 된다. 많이 먹어서 괴롭고 적게 먹어서 괴로우며, 잠을 잘 수수 없어서 괴롭고 너무 쉽게 피로해져 저도 모르게 잠이 들어 괴롭다. 또 먹으면 나오는 게 당연한 그 일조차 갈수록 쉽지가 않다. 그걸 욕망으로 버티다가는 더 괴로워진다. 그럴 때는 그러려니 해야 편안해진다. 이처럼 나이 들면 쾌락의 욕망보다 더 커지는 게 편안함에 이르는 일이 된다.
나의 아저씨
한국사회는 이제 청년기를 지나 중년기에 접어들고 있는 중이다. 인구구성도 그렇고 사회의 성장 곡선도 그렇다. 중년의 나이에 청년을 고집하는 일은 헛된 일이다. '나의 아저씨'에서 박동훈은"아무 것도 갖지 않은 인간이 되어 보겠다"며 스님이 되어버린 그 친구 이야기를 한다. 어떻게든 버텨내려 고생고생하고 아등바등하며 사는 자신의 삶이 과연 맞는지 모르겠다고 털어놓는다. "나를 안전하게 만들어준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나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금이 가기 시작하면 못 견디고 무너지고, 나라고 생각했던 것들, 나를 지탱하는 기둥인 줄 알았던 것들이 사실은 내 진정한 내력이 아닌 것 같고. 그냥, 다 아닌 것 같다고..." 그 지글지글한 중년의 버텨내기 위한 안간힘을 통과해, 박동훈은 더이상 버텨내기보다는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편안해지기를 선택한다. 낡고 오래되었지만 여전히 재개발 이야기가 솔솔 피어났다 사라지곤 하는 서소문 아파트도 좀 편안해졌으면 한다. 조만간 서서갈비에서 옛친구들과 만나 소주라도 기울여야겠다. 낡고 오래됐지만 더할 나위 없이 편안한 그 친구들과.
JTBC 토일드라마 <나의 해방일지>가 화제다. “날 추앙해요”라는 비일상적인 대사가 일종의 밈이 되어 유행처럼 번져나가고 있을 정도다. 예사롭지 않은 <나의 해방일지>는 무슨 이야기고, 이 작품을 쓴 박해영 작가가 일관되게 그리고 있는 세계는 무엇일까.
나의 해방일지
<나의 해방일지>와 <나의 아저씨>의 평행이론
박해영 작가의 드라마 속 인물들은 자주 길을 걷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 길은 출퇴근길이다. <나의 아저씨>에서는 주로 퇴근길 풍경이 담겨졌다. 하루 종일 직장에서 시달리고 스트레스에 쩔은 박동훈(이선균)은 그렇게 퇴근길에 정희네 선술집에 들러 그 곳에 모인 사람들과 술 한 잔으로 피로를 푼다. 그 곳에는 한때는 이사님 소리도 들었지만 지금은 퇴직해 아파트 경비나 청소 같은 일을 하게 된 중년의 아저씨들이 모여든다. 아저씨들은 한바탕 술자리 후 얼콰해진 얼굴로 술집을 나와 골목길을 걸어 저마다의 집으로 돌아간다.
<나의 해방일지>에서는 그 길이 훨씬 멀어졌다. 경기도 수원 근처 산포시의 외진 곳에 사는 삼남매는 매일 시골길을 걷고 마을버스를 타고 나가 전철을 타고 서울로 간다. 그리고 하루 종일 일터에서 지긋지긋한 스트레스를 버텨내고 퇴근 후 술을 마시다가도 전철 막차 시간에 맞춰 일어나 그 먼 길을 돌아온다. 하루 종일 출퇴근만으로도 피곤하지만, 주말에도 아버지를 도와 밭일을 해야 하는 이들에게 전원생활의 낭만 따위는 없다.
<나의 아저씨>나 <나의 해방일지> 속 길을 걷는 인물들은 자신의 일상 속에 갇혀 흔들리고 괴로워한다. 그런데 그 일상을 틈입하는 이질적인 인물이 등장한다. 그들은 범죄의 냄새를 풍긴다. <나의 아저씨>의 이지안(이지은)이 그렇고 <나의 해방일지>의 구씨(손석구)가 그렇다. 이지안은 박동훈이 일하는 회사의 사무보조고, 구씨는 어쩌다 이 외진 곳까지 들어와 삼남매네 아버지가 운영하는 싱크대 공장에서 일하는 미스테리한 인물이다. 이지안은 사채 빚 때문에 시달리며 박동훈에게 들어온 뇌물을 훔치는 것으로 그의 삶 속으로 들어오고, 구씨는 매일 알코올중독자처럼 술만 마시는 그에게 삶이 답답해 미치겠던 삼남매 중 둘째 염미정(김지원)이 뜬금없이 “날 추앙해요”라고 요구하면서 그와의 관계가 시작된다. 박동훈과 이지안 그리고 염미정과 구씨는 각각 다른 세계에서 살아가지만 서로 얽히면서 서로의 세계에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 이들의 관계는 ‘사랑’이라는 단어로는 채워질 수 없는 그 이상의 무엇이다. 박동훈과 이지안이 40대와 20대의 세대 차이를 뛰어넘는 ‘인간애’에 가까운 휴머니즘의 관계를 그렸다면, 염미정과 구씨는 시작부터 사랑으론 부족하다며 ‘추앙하는’ 관계로 그려진다. 이처럼 <나의 해방일지>와 <나의 아저씨>는 그 구도가 평행이론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닮아 있다. 하지만 이 두 작품이 진짜 닮은 건 박해영 작가가 보여주는 태도다. 그는 마치 구도자처럼 화두를 던진다. 벗어날 수 없는 욕망의 번뇌가 왜 생겨나고, 그것으로부터 어떻게 하면 탈주할 수 있을까를 질문한다.
편안함과 해방을 꿈꾸는 <나의 아저씨>와 <나의 해방일지>
사실 박해영 작가는 <나의 아저씨>부터 이런 구도자 같은 태도가 생겼다. 물론 직장생활의 만만찮은 현실이나, 풍자적인 코미디 같은 요소들은 <올드미스 다이어리>부터 <청담동 살아요>, <또 오해영>으로도 이어지는 일관된 면모들이었지만, 이들 작품은 시트콤이나 로맨틱 코미디 같은 장르적 색깔과 재미에 충실한 면이 있었다. 하지만 <나의 아저씨>부터 <나의 해방일지>로 이어지면서는 코미디에 페이소스가 깊어졌고, 장르적 틀에 안주하기보다는 그 바깥으로 튀어나가 말하고픈 메시지를 좀 더 과감하게 풀어내는 방식을 취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살아가는 삶 속에서 끝없이 관계의 피곤 속에서 번뇌하는 현대인들에게 다분히 종교적인 느낌까지 묻어나는 초월적 관점이나 해법들을 던진다.
<나의 아저씨>가 던진 화두는 애써 버티며 살아가는 삶으로부터 ‘편안함에 이르는 길’에 대한 질문이었다. 건물의 안전진단을 하는 건축구조기술사 박동훈은 “모든 건물은 외력과 내력의 싸움”이라며 인생도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즉 무슨 일이 있어도 내력이 세면 이긴다는 것. 하지만 이렇게 내력으로 외력을 버텨내는 삶은 고단하고 힘겨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의 아저씨>는 버텨내는 걸 포기함으로써 편안함에 이르는 길이 있다는 걸 보여준다. 어떻게든 회사에 붙어 살아남으려 안간힘을 쓰던 박동훈이 결국 회사를 나와 새로운 길을 찾는 모습이 그렇다. 정희네 술집에 퇴역한 아저씨들이 여전히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 망가져도 더 이상 버티려는 욕망을 버림으로써 오히려 편안해질 수 있다는 다소 불교적인 화두를 던진 것.
<나의 해방일지>의 화두는 모두가 ‘같은 욕망’을 꿈꾸게 함으로써 가짜 행복 속에서 살아가는 거짓 삶으로부터 ‘해방에 이르는 길’에 대한 질문이다. “날 추앙해요. 사랑으론 안돼. 추앙해요.” 미정이 구씨에게 어느 날 갑자기 ‘추앙’이라는 낯선 단어를 꺼낸 건 ‘사랑’이라는 표현이 얼마나 오염되어 본래의 의미를 잃어버렸는가를 말해준다. “고객님 사랑합니다” 같은 말들이 어디서나 쉽게 튀어나오는 세상이 아닌가. 행복도 마찬가지다. 미정이 다니는 회사의 ‘행복지원센터’는 직원들의 복지를 위해 동아리 모임을 지원하는 부서지만, 그런 지원이 과연 진정한 행복을 줄 것인지 미정은 믿지 못한다. 억지로 동아리를 만들라는 강권에 미정의 제안으로 만들어진 ‘해방클럽’에, 그 행복지원센터에서 일하는 상담사 소향기(이지혜)가 들어오며 하는 말은 의미심장하다. “해방되고 싶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닌데 일단은 이 표정. 무표정이 안돼요. 눈앞에 사람이 보이면 자동적으로 이런 표정이 돼요. 하나도 행복하지 않은데, 행복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고, 이렇게 웃을 정도로 좋지도 않은데 사람만 보면 자동적으로 이런 표정이 돼요. 그래서 상갓집 가는 게 너무 힘들어요. 상갓집 갈 때마다 억지로라도 무표정 해보려고 애쓰는데... 힘들어요.” 가짜 웃음, 가짜 행복, 가짜 사랑. 자본화된 사회가 제안하는 평범으로 포장된 같은 욕망들의 위선을 고발하는 이 드라마는 그것으로부터 해방되는 길을 모색한다. 그 해방클럽은 그래서 세 가지 강령을 제안한다. 첫째, 행복한 척 하지 않기. 둘째, 불행한 척 하지 않기. 셋째, 정직하게 보기.
뻔한 틀로부터의 해방을 꿈꾸는 드라마 작가
작품에 담긴 삶을 정직하게 바라보려는 박해영 작가의 이런 태도는, 그의 작품이 통상적인 작법과 뻔한 틀로 그려지는 여타의 드라마들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이유가 된다. 그는 염미정의 입을 빌려 상투적으로 드라마에서 쓰이곤 하는 “심장이 뛰게 좋다”는 통상적인 표현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난 그 말을 이해 못해. 심장 뛰게 좋다는 말.... 내가 심장이 막 뛸 때는 다 안 좋을 때던데. 당황했을 때, 화났을 때, 백 미터 달리기 전. 한 번도 좋아서 심장이 뛴 적이 없어. 정말 좋다 싶을 땐 반대로 심장이 느리게 가는 거 같던데? 뭔가 풀려난 것 같고. 처음으로 심장이 긴장을 안 한다는 느낌.” 즉 그에게 너무나 좋은 기분은 ‘두근거림’이 아니고 ‘편안함’이다. 따라서 <나의 해방일지>에서 염미정이 구씨와의 관계에서 기분이 좋아지는 건 어떤 갈망 때문에 심장이 뛰는 그런 순간들이 아니고, 어느 날 무심하게 구씨가 툭 던진 문자메시지로부터 확인되는 관계의 편안함이 느껴지는 순간이다. 특별한 말을 애써 하지 않아도 되거나, 혹은 이 말을 할까 말까 고심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막 튀어나오는 대로 말할 수 있는 그런 편안함의 순간. 당연히 이 드라마 속 염미정과 구씨 사이에 벌어지는 멜로의 전개도 통상적인 드라마들의 틀을 벗어날 수밖에 없다.
물론 박해영 작가 역시 아직까지 뻔한 드라마의 공식들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처럼 끝없는 구도의 관점으로 세상의 부조리를 정직하게 보려는 노력과, 오염된 일상어로는 표현할 길이 없어 문학적 서사와 은유를 동원하는 방식은 그가 사유에서나 작품을 통해서나 뻔한 틀로부터 해방을 꿈꾸고 있다는 걸 말해준다. 모든 게 기획되고 효과와 결과로서 평가되는 시대에, 이런 자세와 태도를 꿋꿋이 밀어붙이는 작가가 있다는 건 실로 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건 어쩌면 틀에 박힌 우리의 허위로 가득한 삶과 그걸 반복하는 그렇고 그런 드라마들을 해방시켜주는 선구적 역할을 할 테니.(글:시사인, 사진:JTBC)
까불이라는 연쇄살인범의 위협 때문에 결국 옹산을 떠나려는 동백(공효진)이는 이삿짐을 싸기 위한 박스가 있냐고 조심스레 떡집 아주머니 김재영(김미화)에게 묻는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아주머니는 얼굴이 어둡다. 돌아가려 하는데 아주머니가 동백을 부르고 무언가 한 가득 채워진 박스를 건넨다. “언니 여기 뭐가 많이 들었는데...” 아주머니는 퉁명스럽게 말한다. “여기 뭐가 들었다고 그랴. 그냥 아무 소리 말고 그냥 가져가. 그 홍화씨는 관절에 좋아.”
박스를 들고 가는 동백에게 준기네 엄마인 박찬숙(김선영)도 슬쩍 박스에 담은 마음을 전한다. “동백아 우리집서도 어 박스 가져가.” 야채가게 아줌마 오지현(백현주)도 박스를 잔뜩 들고 오더니 말한다. “동백아! 박스는 배추박스가 제일 커.” 저마다 박스를 챙겨들고 나타나는 옹산 동네사람들을 보며 동백의 눈가가 촉촉해진다. 그간 자신을 편견어린 시선을 바라봐 힘겹게 만들기도 했지만, 대놓고 욕을 하면서도 “김치는 가져가라”고 말하는 옹산 사람들에게서 동백은 따뜻한 정을 느낀다. 문짝에 떡하니 붙여놓은 ‘옹산 이웃 여러분 지난 6년간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라는 글귀에 동백의 진심이 담기는 이유다.
KBS 수목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을 보다보면 까불이라는 희대의 연쇄살인범이 있어 불안감을 느낄 수밖에 없지만, 어쩐지 옹산 같은 곳에서라면 살고 싶은 마음까지 든다. 어딘지 시골마을이 갖는 편견과 선입견 게다가 금세 구설수에 오르게 만드는 소문들이 살기에 불편하게 느껴지긴 하지만, 그래도 뒤끝 없고 무엇보다 없는 삶을 너무나 잘 알아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이해하려는 순박하고 따뜻한 사람들이 있어 특히 그렇다.
이 부분은 <동백꽃 필 무렵>이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중요한 요인이 아닐까 싶다. 주인공들에게만 집중된 이야기가 아니라, 거기 함께 살아가는 단역들의 삶들 또한 주인공처럼 따뜻하게 그려내는 시선. 그래서 결국은 그 동네가 가진 훈훈함이 전해지고, 드라마를 보는 일이 마치 그런 동네에서의 한 시간을 보내며 힐링하는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 이 드라마가 가진 강력한 매력의 원천이 아닐까.
그러고 보면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남는 드라마들의 대부분은 이상하게도 그 동네가 떠오른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 많은 시청자들을 웃고 울게 만들었던 JTBC <눈이 부시게>의 동네 사람들이 모여들어 수다를 떨던 혜자네 행복미용실이 있던 동네가 그렇고, tvN <나의 아저씨>의 퇴근 후 술 한 잔에 하루의 피로와 스트레스를 날리고 무엇보다 약자를 위해 모두가 출동하는 따뜻한 정을 느끼게 했던 후계동이란 가상의 동네가 그렇다.
이렇게 동네 자체가 먼저 떠오르는 드라마란 결국 거기 사는 여러 사람들의 훈훈한 온기들이 소외되지 않고 전해졌다는 뜻이다. <동백꽃 필 무렵>은 그래서 이 훈훈함과 더불어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이야기가 어우러져 훨씬 더 입체적인 드라마가 되고 있다. 주인공 한두 명의 존재감만을 집중하는 드라마가 아니라, 거기 등장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모두 집중하게 만드는 그런 드라마.(사진:KB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