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청자들이 목말라하는 스펙타클, 그 의미

주말 밤, 시계를 과거로 되돌려놓던 대하사극의 힘은 무엇이었을까. ‘대왕세종’의 부진을 떨쳐버린 ‘천추태후’의 초반 상승세는 이 질문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대왕세종’은 여러모로 실험적인 사극이었다. 스펙타클보다는 심리사극에 가까웠고, 따라서 드라마는 영상보다는 대사가 중심이었다. 정치적 상황에 따라 인물들이 변화하는 과정은, 그 심리를 드러내는 대사를 주의 깊게 듣지 못하면 따라잡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한 마디로 너무 어려웠던 것이다.

하지만 ‘천추태후’는 초반부터 사극의 진면모라 할 수 있는 전투 장면을 내세워 시청자들이 목말라하던 볼거리를 충족시켜주었다. 그러나 만일 이 전투 장면이 늘 사극 속에서 보아왔던 그런 것이었다면 시청자들은 첫 회에서부터 식상해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거기에는 지금껏 보지 못했던 장면들(예를 들어 곰이 전장에 나오는 것)과 남성들의 전유물이라 생각되었던 전장을 누비는 여걸들의 모습들이 들어가면서 신선함을 던져주었다. 특히 훗날 천추태후가 되는 황보수(채시라)의, 활을 무기로 하는 전투장면은 '반지의 제왕'의 레골라스를 연상시킬 정도로 흥미진진함을 던져주었다.

전투장면의 연출에 있어서도 저 ‘추격자’가 보여주었던 리얼 액션의 긴박감을 부여해주는데 성공했다.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전투장면의 연속은 보는 이의 심장박동을 캐릭터들의 그것에 맞춰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빠져서 보다보면 어느새 끝날 시간이 다 되어버리는 이 스펙타클의 시간은 드라마에 있어서 사극만이 가진 장점이 아닐 수 없다.

사극은 일단 그 과거의 시간대로 돌아가는 것만으로도 시각적인 즐거움을 준다. 우리는 현대와 다른 시간과 공간 속을 보면서 그들의 다른 삶이 주는 재미에 빠져든다. 사실 자동차가 도로를 가득 메우는 세상에 말을 타고 달리고, 기관총에 미사일이 날아가는 시대에 활을 쏘고 칼을 휘두르는 백병전의 묘미는 그 색다름에서 오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지금과는 다른 사회체계의 모습이 존재한다. 왕이 있고 신하가 있고 백성들이 있으며 눈에 보이는 적이 있다. 이 단순화되어 보이는 사회체계 속에서 그들이 부딪치고 싸우고 생존해 살아남는 과정 자체는 조금은 유아적이지만 분명 재미있는 볼거리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다른 시간과 공간대에서 벌어지는 사극이 바로 현대의 상황들과 조우하는 순간이다. ‘대왕 세종’이 세종이라는 성군을 통해 현대와 접목하려 했던 메시지는 백성과 직접적으로 소통하려는 왕과, 그 중간 지점에 서서 소통을 끊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왕을 움직이려는 신하들의 대결구도를 통해 보여주려는 진정한 정치의 길이었다. 현대인들의 성군을 희구하는 마음을 세종이라는 영웅을 통해 끌어내려던 의도였다. 실제로 이 작품은 놀라울 만큼 치밀한 대사와 심리묘사로 그 주제에 근접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 정치적 주제의식을 정치적인 방법, 즉 말로서 시청자들에게 보여주려 한 것은 이 사극이 대중성을 얻지 못한 이유가 된다.

‘천추태후’가 잡아내려는 것은 현대여성들의 달라진 사회적 위치와 그럼에도 여전한 남성중심사회에 대한 도발이다. 거기에는 전쟁에서 화친을 먼저 생각하는 왕이 있고, 그 왕 앞에 비겁하다 소리치는 여걸, 황보수가 있다. 많은 사극들이 지금껏 영웅적인 여성들을 그려내지 않은 것은 아니다. ‘대장금’의 장금이(이영애)가 그렇고, ‘이산’의 성송연(한지민)이 그러하다. 하지만 이들과 본질적으로 황보수가 다른 것은 말이 아닌 행동하는 여성이라는 점이다. 황보수는 저 남성이었던 '대왕 세종'조차 보여주지 못했던 스펙타클을 보여주는 여성 영웅인 셈이다.

‘천추태후’의 선전은 바로 그 사극만이 가진 볼거리와 거기에 버무려지는 현대적인 코드들에 충실했던 데서 찾을 수 있다. KBS 대하사극의 오랜 역사가 가진 경험은 이러한 스펙타클의 구현을 용이하게 만든다. ‘대왕 세종’의 부진과 ‘천추태후’를 통한 주말 대하사극의 부활이 한편으로 말해주는 것은 대중들의 말, 정치에 대한 식상함과 볼거리에 대한 목마름이다. ‘천추태후’는 그 영웅이 여성이라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현재적인 뉘앙스를 의미로 포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오히려 말보다는 행동하는 여걸 그 자체가 현재적 의미를 갖게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 ‘천추태후’가 가진 위험성도 존재한다. 현재의 사회에서 말의 홍수가 지긋지긋한 것은 사실이지만, 현재 사회를 움직이는 것 또한 칼이 아닌 그 말의 힘이라는 것을 자칫, 행동하는 여걸의 판타지를 통해 지워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정치적 무관심과 스펙타클에 대한 환호는 늘 그 탄탄한 공조관계를 유지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물론 지금의 ‘천추태후’가 정치적 무관심을 추구할 것이라는 걸 예단할 수는 없다. 실제로 정치적인 사건들은 스펙타클과 함께 이 사극이 굴러가는 두 바퀴가 되고 있다. 대하사극이 처한 딜레마는 정치적으로 진지해지면 깊이를 얻지만 한편으로 어려워지고, 스펙타클로 흐르면 자극적이지만 대중성을 얻는다는 점이다. 이것이 말의 힘만을 믿었던 '대왕 세종'이 안 되고, 사극이 가진 본태적인 스펙타클의 힘을 동시에 가져가는 ‘천추태후’가 되는 이유다.

볼거리, 멜로, 적과 아군이 없는 ‘대왕 세종’

이제 종영을 앞두고 있는 ‘대왕 세종’은 독특한 사극이다. 사극이라면 응당 있어야 할 것으로 생각되던 흥행요소들이 빠져있는 사극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시청률이 아마도 10% 초반대에서 종영하는 KBS 사극은 ‘대왕 세종’이 거의 유일할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시간대와 채널 이동이 영향을 주기도 했지만, 그 근간에는 ‘대왕 세종’만이 가진 이 같은 도전이 깔려있다. 어찌 보면 무모한 도전처럼 보이는 ‘대왕 세종’의 행보, 그것은 무엇이었고, 또 어떤 의미가 있나.

볼거리가 없다? 스펙타클보다는 심리사극으로
‘대왕 세종’의 가장 큰 특징이자 난점은 여타의 사극들에 비해 볼거리가 없었다는 점이다. 물론 볼거리에도 여러 가지가 존재한다. 하지만 시청자들이 그간 대하사극하면 기대하게 하던 전쟁, 전투신의 그 스펙타클한 영상이 ‘대왕 세종’에는 없었다는 말이다. 어린 충녕대군이 대왕 세종이 되어가는 그 과정에서 오히려 부각되는 것은 정치다. 즉 칼의 싸움이 아닌 말의 싸움이 사극의 중심에 서게 된다.

스펙타클한 영상을 기대한 시청자라면 인물들의 심리에 천착하는 ‘대왕 세종’의 이런 면모는 낯선 것이 아닐 수 없다. 눈과 귀를 열어두기만 하면 쉽게 상황이 파악되면서 역사적 인물들이 그 속에 살아 움직였던 과거의 사극들에 비해, ‘대왕 세종’은 자세하게 인물들의 대사를 읽어나가야 하는 곤혹스러움이 있다. 대사 또한 정치적 언변이 그러하듯이 직설적이라기보다는 중의적이고 다의적이다. 만일 그 대사가 주는 특별한 재미를 찾아내지 못한다면, ‘대왕 세종’은 자칫 ‘말만 번지르르한 사극’으로 비칠 수 있었다.

적도 아군도 없다? 독특한 대결구도
정치 사극을 지향하는 ‘대왕 세종’에는 전투나 전쟁이 중심이 되는 사극들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적과 아군의 선명한 대비가 없다. 영원한 적도 없고 영원한 동지도 없는 이 정치판에서 때론 강력한 대립자였던 양녕대군(박상민)과 황희(김갑수)는 후에는 가장 든든한 지원군이 된다. 이것은 권력에의 욕망을 드러내며 사사건건 세종과 대립하던 박은(박영지)도 마찬가지다. 또한 초기 세종의 지원자였던 최만리(이성민)는 뒤로 가면 원칙주의자로서 세종의 한글 창제에 반대하는 강력한 적이 된다.

이것은 사실 사극에서 이제껏 잘 보여주지 않던 독특한 대결구도이다. 선명한 대결구도가 갖는 복수극의 구조는 사극이 가진 흥행의 핵심요소. ‘대왕 세종’은 그 비현실적인 대결구도를 리얼리티가 살아있는 복마전의 세계로 끄집어낸다. 이것은 또한 세종의 정치철학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는 오히려 가장 강력한 대립자인 조말생(정동환)을 가장 측근에 두면서 자신이 엇나가지 않도록 균형자 역할을 하게 만든다. 즉 정치란 상명하복의 과정이 아니라 다른 생각들의 부딪침을 통해 보다 나은 것으로의 타협의 과정이라는 것을 ‘대왕 세종’은 보여준다.

멜로가 없다? 인간애를 다루다
대결구도나 전쟁신 같은 스펙타클을 버리고 나면 사극에서 흥행요소로 남는 것은 멜로이다. 현대극이 식상한 것으로 그리는 운명적인 사랑은 아직도 사극 속에서는 유효한 코드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왕 세종’에는 그 흔하디 흔한 멜로가 없다. 초반부에 후궁으로 들어와 세종과 사랑을 나누며 후일 신빈 김씨가 되는 역할을 맡았던 이정현은 성대결절을 이유로 하차하자 그나마 있던 이렇다할 멜로 구도는 사라져버렸다.

대신 ‘대왕 세종’이 천착하는 것은 세종의 무한한 백성들에 대한 사랑, 즉 인간애이다. 조선 백성들의 삶을 위해 조선의 역법과 천문을 연구하고, 한글 창제를 해나가는 그 과정은 한 인간이 어떻게 인간을 사랑하는가를 실천적으로 보여준다. 독특한 것은 그 과정에서 ‘대왕 세종’만의 재미를 구축했다는 점이다. 그것은 백성들을 위해 끊임없이 추구하는 발명의 과정과 그 발명을 제지하려는 세력 간의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두뇌 싸움이다. 물론 이 재미 역시 보통의 사극을 기대하던 시청자들에게는 낯선 것으로 비쳐질 수 있었다.

‘대왕 세종’은 결과적으로 이 사극의 세 가지 흥행코드를 버림으로써 시청률에서 실패한 사극이 되었다. 주말 밤, 아직까지는 도전적인 새로움보다는 익숙함이 통한다는 반증인 셈이다. 그렇지만 ‘대왕 세종’이 그린 그 독특한 세계 자체가 시청률이라는 양적 판단에 재단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 낯선 사극의 구조는 훗날 어쩌면 새로운 대중적인 사극의 구조 속으로 편입될 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도 하지 않지만 해야하는 길을 걸어갔다는 점에서 ‘대왕 세종’은 그 드라마의 주인공을 닮았다.

드라마, 아버지 부재의 시대를 말하다

아버지는 죽었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말한 것처럼.

‘엄마가 뿔났다’에서 엄마가 뿔을 내는 동안, 아버지 나일석(백일섭)은 늘 그 엄마 주변을 빙빙 돌며 눈치를 보거나 혼자 씩 웃고 있거나 가족 대소사에서 한 걸음 뒤편에 서 있었다. 그러면서 엄마가 내는 뿔을 거의 다 받아주었다. 심지어 ‘1년 간의 휴가’를 달라고 했을 때, 아버지는 자신이 나서서 엄마가 살 전셋집을 구하러 다닐 정도였다.

‘엄뿔’이 보여준 아버지의 존재감
이 가족드라마에서, 그것도 가족의 변화형태를 가장 잘 포착한다는 주말 저녁 드라마가 보여주는 아버지의 모습은 과거의 권위를 잃어버린 지 오래다. 주말 드라마의 주 시청층이 중장년 여성이란 점이 영향을 끼친 결과이겠지만, ‘엄마가 뿔났다’에서 남성들은 거의 대부분이 여성의 시점으로 타자화되어 그려진다.

엄마, 김한자(김혜자)의 독백으로 설명되는 가족의 이야기는 그 자체가 엄마의 시선으로만 채워진다. 장남은 어딘지 부족한 인물이며, 맏사위는 이혼남이고, 둘째 사위는 어딘지 부모의 치맛폭에 사는 듯한 엄친아다. 반면 맏며느리는 생활력 강한 여성이고, 장녀는 능력 있는 커리어 우먼이며, 차녀는 성격 좋고 늘 밝고 솔직한 여성이다.

이것이 엄마의 시선이기 때문에 여성을 좀더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시선 속에서 제외되어 있는 인물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아버지 나일석이다. 한없이 열려진 마음을 가진 시아버지 나충복(이순재)은 아직까지 집안의 어르신으로 서 있는 반면, 나일석은 늘 그 바깥에 존재한다. 김한자가 집을 나가겠다고 선언할 때, 그 허락을 구하는 당사자는 나일석이 아니고 나충복이다.

이 시대 드라마가 향수하는 아버지
최근 이 같은 아버지 부재의 신호들은 ‘엄마가 뿔났다’에서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드라마에서 드러난다. ‘에덴의 동쪽’은 아버지 부재의 시대에, 그 빈자리에 대한 향수를 그 바탕에 깔고 있다. 이 비극적인 가족의 탄생은 시대가 살해한 아버지 이기철(이종원)에서부터 비롯된다. 여기서부터 강한 엄마, 양춘희(이미숙)가 탄생하고, 그 빈자리를 채우고 해체된 가족을 묶어두려 안간힘을 쓰는 이동철(송승헌)이 자리한다. 이 드라마의 힘은 시대를 과거로 돌려 현재에는 시대착오가 되어버린 강력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끌어내는 데 있다.

이렇게 강력한 아버지를 찾는 드라마들이 거의 시간대를 과거로 되돌리고 있는 점은 주목할만한 사실이다. 주말 저녁을 오랜 시간 점유하던 KBS 사극은 바로 이 아버지의 시간대였던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지금 이 시간대 역시 흔들리고 있다. 주말 밤에 대거 포진되어 점차 사세를 넓히고 있는 엄마들의 드라마(이것은 엄마들이 주인공인 드라마를 말할 뿐이다. 사실 이 드라마는 이제 아버지들도 즐기는 드라마가 되었다)가 그걸 말해준다.

사극이 그리는 왕은 이제 아버지로서의 역할과 왕으로서의 역할을 나누게 되었다. ‘대왕 세종’은 물론 신하들과의 우여곡절이 많지만 왕으로서 자신의 뜻을 강력하게 펼쳐나가는 카리스마를 보여주는 반면, 아버지로서는 한없이 약한 존재로 자리한다. 주중 드라마 ‘바람의 나라’에서 유리왕(정진영)은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왕이지만, 국가의 존폐를 위해 자식을 버려야 하는 비운의 아버지다. 즉 사극 속에서 아버지라는 위치는 왕이라는 직능과 늘 부딪치는 거추장스런 옷이 되고 있다.

나일석의 어깨가 쓸쓸해보이는 이유
이것은 가족드라마가 아닌 현대물에서도 마찬가지다. ‘베토벤 바이러스’에서 주인공들에게는 가족이라는 짐이 부여되지 않는다. 강마에(김명민), 두루미(이지아), 강건우(장근석)의 가족들은 드라마를 위해서 거세되었다. 반면 아버지의 모습은 ‘똥 덩어리’라 모욕을 당한 정희연(송옥숙)의 남편 박진만(이봉규)이나, 가족을 위해 오케스트라의 꿈을 접고 후배에게까지 고개를 숙이며 사회생활을 해온 박혁권(정석용)을 통해 드러난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아버지를 찾기 위해 뒤돌아보지는 않는다. 그저 지금 현실이 그렇다는 걸 말해주고는 꿈을 향해 달려간다.

‘타짜’에서 아버지는 도박 때문에 돈도 다 날리고 결국엔 죽음을 당하는 존재다. 고니(장혁)가 잡으려고 하는 욕망은 어쩌면 아버지를 죽음으로 내몬 그 돈을 가지려는 것이며, 따라서 도박판은 이 시대 아버지들의 생사를 건 생존경쟁의 축소판이 된다. 속고 속이는 현실 속에서 늘 손모가지든 목이든 걸어야 하는 힘겨운 아버지들의 상황, 그것이 바로 ‘타짜’의 세계다.

드라마 속 이 시대의 아버지는 죽었다. 삶은 아버지에게 그만큼 팍팍해졌고, 그 속에서 여성들은 아버지가 짊어졌던 현실의 짐을 나누기 시작했다. 하지만 권위의 시대가 가버린 그 자리에 남겨져 아내에게 구박을 들어도 뭐가 그리 좋은 지 킥킥 혼자 웃는 나일석의 어깨가 가끔씩 쓸쓸해 보이는 건 왜일까. 이것은 아마도 “신은 죽었다”라고 말했을 때, 우리가 갖게되는 상반된 두 감정, 즉 해방감과 함께 솟아나는 어떤 안타까움 때문이 아닐까.

칼보다 말을 선택한 정치사극, ‘대왕 세종’

대중들에게 사극이란 어떤 이미지로 자리하고 있을까. ‘조선왕조실록’으로 상징되는 과거의 정통사극은 그 중심이 대사에 있었다. 주로 편전에 모여 갑론을박을 하거나 누군가의 방에 모여 모의를 하고, 때로는 여인네들의 암투가 벌어지는 그 중심에는 늘 말이 자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하사극, 퓨전사극들이 등장하면서 말의 자리만큼 위상이 높아진 건 볼거리다. 이런 시점에 ‘대왕 세종’같은 칼보다는 말의 힘을 더 믿은 성군을 다룬다는 것은 어찌 보면 도전이 아닐 수 없다.

볼거리의 시대에 말의 사극이 갖는 한계
그렇지 않아도 현실에서의 정치는 마치 탁상공론처럼 허망하게만 느껴질 때가 많다. 그러니 가뜩이나 정치인들의 정치에 대한 혐오와 무관심이 팽배한 상황에서 본격적인 정치사극이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은 많지 않다. 오히려 정치사극을 표방하면서 정치에 대한 환타지를 심어주는 ‘이산’같은 선택이 성공 확률은 더 높을 것이다. 거기에는 적어도 현실에서 정치를 혐오하게 만드는 명명백백한 진실의 승리나 선한 선택의 존중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왕 세종’이 선택한 진짜 정치의 세계 속에서 이런 배려는 나약함과 동일시된다.

‘대왕 세종’에서 선악구도는 순진한 어린아이들의 장난처럼 취급된다. 세종(김상경)은 오히려 자신을 견제하라며 정적이었던 박은(박영지)을 집현전의 수장으로 세우고, 양녕대군(박상민)을 왕재로 세우려했던 황희(김갑수)를 최측근으로 끌어들인다. 때론 적으로 판단되었던 허조(김하균)는 결정적인 순간에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으면서 세종에게 유리한 입장이 되기도 한다. 그러니 이 ‘대왕 세종’이라는 드라마의 판은 칼 하나로 반을 나눌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각자 자신들의 입장을 가진 정치인들이 존재하면서, 특정한 사안에 대해 각자의 입장을 갖는데 이 미묘한 입장 차가 정치사극의 묘미를 만들어낸다.

인물의 선악구도가 아닌 정치의 대결구도
이 사극의 진짜 재미는 그 독특한 구도에 있다. 주인공인 세종의 마음은 늘 민심을 향해 있으나 아군이든 적군이든 자신의 밑에서 실제적인 정치를 수행하는 신하들은 민심 자체보다는 정책의 명분에 더 휩싸인다. 조선만의 역법을 갖겠다는 세종의 마음은 그것이 민초들의 궁핍한 삶을 해결해줄 것이라 믿는 반면, 이를 반대하는 조말생(정동환)은 ‘조선의 하늘은 조선인의 것’이라는 그 발상이 중국의 반발을 일으켜 결과적으로 망국으로 가는 길이라 판단한다. 한편 세종을 지지하는 신하들은 세종의 이상을 실현시켜줄 현실적인 명분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이 구도는 또한 르네상스맨으로서의 세종이 가진 과학에 근거한 민생정치와 신하들이 가진 비과학에 근거한 명분정치의 대결구도이기도 하다. ‘대왕 세종’에서 장영실(이천희)이 갖는 존재감은 바로 이 인물이 세종이 꿈꾸는 정치세계의 밑거름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르네상스가 중세의 비이성의 어둠을 물리치는 이성의 빛이 되었던 것처럼, 세종은 물난리로 인한 자연재해를 하늘에 제를 올리는 것보다는 과학의 힘으로 이겨내려 한다. ‘민심은 천심’이라는 말은 입장 차에 따라 다르게 해석된다. 반대하는 신하들이 이 말을 ‘민심처럼 하늘마저 등을 돌렸다’고 결과론적으로 활용하는 반면, 세종은 바로 그 ‘민심을 잡기 위해 천심을 바꾸겠다’는 보다 적극적인 인간중심의 철학을 내보인다.

‘대왕 세종’은 칼의 현란함을 추구하는 시대에 말의 대결을 보여주는 정치사극이다. 이 사극이 그다지 시청률에서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단순히 시간대와 방송사를 옮겼다는 것에 이유가 있는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 이유는 이 사극이 정치의 너무 적나라한 부분을 보여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현실 정치가 우리가 생각한대로 바람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면 이 진창을 그대로 보여주는 정치사극의 묘미는 더욱 깊었을 지도 모른다. 반대로 현실 정치가 진창으로 비춰지고 있었기에 이 본격적인 정치사극은 그 반복으로 느껴지지 않았을까. 하지만 실제 정치의 세계에서든, 아니면 정치사극 속에서든 그 본질은 말(대사, 대화, 협상)이지 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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