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예능에 가득한 경합, 그것이 말해주는 것

‘식객’의 초반부 긴장감을 탄탄히 만들어주고 있는 것은 단연 운암정 후계자 자리를 놓고 벌이는 성찬(김래원)과 봉주(권오중)의 요리 경합이다. ‘스포트라이트’에서는 이미 앵커 자리를 놓고 한 차례 경합을 벌였던 서우진(손예진)과 채명은(조윤희)이 이제 심층리포트의 진행자 자리를 놓고 또 경합을 벌이고 있다. ‘대왕 세종’에서도 드라마 초반에는 충녕대군과 양녕대군이 국본의 자리를 놓고 치열한 정치적 경합을 벌이며 시청자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드라마 속의 경합, 공정하지 못한 사회
드라마들이 이렇듯 한 자리를 놓고 치열한 경합을 벌이는 이야기를 활용하는 것은 당연하다. 드라마는 갈등을 기본으로 하고 있는데, 바로 이 대결구도를 가장 쉽게 가시화시킬 수 있는 방법이 경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합의 양상들을 좀더 들여다보면 그렇게 간단하지도 않다. 거기에는 사회가 가진 서열 구조와 그것을 뛰어넘으려는 욕구들이 드라마 속에 환타지의 형태로 드러난다.

성찬과 봉주의 경합에서 봉주가 상처를 받는 것은 그가 적자의식을 갖고 있어서다. 그는 운암정 최고권위자인 오숙수(최불암)의 아들이니 당연히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서우진과 채명은의 경합에 있어서도 이 적자와 서자의식은 똑같이 드러난다. 선배인 채명은은 서열상 자신이 적자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대왕 세종’같은 사극 속에서의 장남이거나 적자인 이들은 당연히 자신에게 권력과 부가 승계될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드라마들은 대부분 이 적자들의 바람을 들어주지 않는다. 지금 사회는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적자나 서자의식이 통용되는 사회가 아니라 능력 위주의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당당히 실력을 갖춘 이가 적자의식에만 가득한 인물을 무너뜨리고 제 자리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은 경합뿐이다. 이것은 점점 능력 중심으로 변해가는 사회를 반영하는 것일까. 거꾸로 여전히 실력보다는 서열이나 관계에 의해 움직이는 사회의 불합리함을 드라마에서나마 위안을 얻으려는 환타지일까.

그것은 아마도 후자일 가능성이 높다. 능력 위주의 사회는 바람일 뿐, 우리 사회는 심지어 그 탄생에서부터 미래가 결정되는 경향이 있다. 부잣집에서 태어난 이들이 고등교육을 받을 확률이 훨씬 높다는 것은 이제 상식에 속한다. 갖춘 자들의 적자의식은 시대가 흘렀지만 여전하다. 드라마 속에 이렇듯 빈번하게 경합이 활용되는 것은 그만큼 치열해진 경쟁사회이면서도, 그 경쟁 자체는 그다지 공정하지 않은 우리네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예능 속의 경합, 경쟁 사회에 대한 희화화
한편 경합에 빠진 건 드라마뿐만이 아니다. 예능 프로그램들은 거의 모든 것들이 바로 이 경합의 틀을 갖고 있다. ‘1박2일’의 잠자리나 식사 한 끼를 두고 벌이는 복불복 게임이 그렇고, ‘무한도전’의 끝없는 과제 속에서의 이기적인 출연진들의 대결이 그러하며, ‘해피투게더’의 사우나 안에서 벌어지는 도전 암기송이나, ‘패밀리가 떴다’의 유재석이 툭하면 제안하는 게임이 그렇다.

이 예능 프로그램들 속에서의 경합은 얼토당토않은 목표를 갖고 있다. 바로 이 얼토당토않다는 부분에서, 우리가 스포츠경기 같은 것을 통해 느끼게 되는 진지한 긴장감 같은 것은 사라진다. 만일 진지한 목표가 설정된다면 긴장감은 생기겠지만 웃음은 좀체 나오지 않을 것이다. 복불복 게임은 말 그대로 게임일 뿐 현실 사회가 보여주는 진짜 경쟁과는 다르다. 경쟁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에 목숨을 걸고 경쟁을 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이들 예능 프로그램들은 웃음을 유발한다. 이것은 경쟁 사회에 대한 희화화다.

직장생활 같은 경쟁적 삶 속에서 살다가 빠져나온 경험이 있는 분들이라면 때론 왜 그렇게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며 살았을까 하고 생각하기도 한다. 예능 프로그램 속에서의 경합은 따라서 사회 풍자적인 요소가 있다. 그 얼토당토않은 경합을 보면서 웃음이 터져 나오는 순간, 이미 우스꽝스런 경쟁적 삶에 대한 긴장감이 풀어지게 된다.

드라마나 예능이 점점 이 경합이라는 코드를 보편적으로 활용하고, 거기서 충분한 효과를 얻어내는 것은 여러모로 지금 우리 사회가 가진 불공정한 구조와 그 속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살아야 하는 현대인들의 피곤함과 관련이 있다. 드라마는 이 경쟁의 피곤함을 환타지의 형태로 해결하려는 것이며, 예능은 경쟁 자체를 비웃음으로써 그것에서 벗어나려는 것이다. 그 무엇도 실제적인 해결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어떠랴. 그 경합의 재미 속에서 현실의 경쟁적 삶을 잊어버리는 것은. 잠시만이라도 말이다.


퓨전사극시대, 작가로 즐기는 사극

최근 드라마 중 사극만큼 다양성을 확보하고 있는 건 없을 것이다. 이것은 과거 정사 위주의 정통사극의 틀에서 벗어나면서 가능해진 일. 이른바 퓨전사극은 역사적 사실, 혹은 역사적 텍스트에 상상력을 덧대, 사극의 외연을 넓히는 역할을 했다. 이제 사극은 어떤 역사적 시점을 다룰 것인가 보다 어떻게 다룰 것인가가 더 중요해졌다. 사극의 작가주의가 거론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제 사극은 작가들의 상상력과 감독의 연출력에 의해 그 색채를 달리하게 되었다.

이병훈표 성장 사극, ‘이산’
월화의 밤을 평정한 MBC 사극 ‘이산’은 이병훈표 사극의 정석을 보여주고 있다. 매 2회 정도 분량으로 주어지는 미션과 해결을 통한 캐릭터의 성장을 그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전형적인 선악구도가 극명한 대결구도를 이루고 있다는 점도 이병훈 PD의 색채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정조라는 왕을 주인공으로 세운 점이 과거 주로 평민이었던 주인공과 다른 점이지만, 차라리 평민으로 살아가는 게 나을 법 싶은 정조의 상황을 보면 그다지 달라진 것도 아니다. 절대적인 지지자가 되는 영조 캐릭터 또한 ‘대장금’의 왕과 오버랩되며, 묵묵히 뒤에서 주인공을 돕는 성송연(한지민) 역시, ‘대장금’의 민정호(지진희)를 빼닮았다.

이렇게 비슷한 구조에 비슷한 캐릭터들이 등장하지만 여전히 힘을 발하는 것은 이병훈표 성장 사극의 틀이 내포하고 있는 저력을 말해주는 것이다. 과거의 역사적 시점을 다루지만 거기에는 여전히 현대인들의 욕망들이 다양하게 투영되어 있다. 성군을 바라는 백성들의 마음이나, 신분과 남녀 차별을 뛰어넘는 성공담은 지금 시대의 환타지와 맥을 같이 하기 때문이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제 왕으로 서게 될 정조 이산(이서진)이 나갈 방향성이다. 지금까지 이병훈표 성장 사극 속의 주인공들은 그 꼭대기에 서는 순간 미션 완료하며 끝났지만 ‘이산’은 앞으로도 한참 더 길을 가야하기 때문이다.

홍자매표 패러디 사극, ‘쾌도 홍길동’
수목의 밤을 웃게 만드는 홍미란, 홍정은 작가의 ‘쾌도 홍길동’은 패러디 사극이다. 그간 여러 작품들을 통해 다양한 패러디를 통한 웃음을 선사했던 홍자매는 ‘쾌도 홍길동’에 와서는 고전인 ‘홍길동’ 자체를 패러디 한다. 사극이라 하기엔 역사적 시공간이 부재한 이 드라마는 따라서 ‘홍길동’이란 고전의 현대적 해석으로 볼 수 있다. 사극 속에서 웨이브춤과 골프 장면은 물론이고 주인공들의 펑키한 패션 스타일을 볼 수 있는 것은 이 드라마가 사극 자체를 패러디해 현재를 풍자하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는 무협지의 틀과 만화적 상상력이 홍길동이란 텍스트 위에서 작가들의 상상력과 만난다. 작가에 의해 새롭게 재해석된 등장인물들은 저 마다 현대인들의 그것을 표상하는 기성세대의 가치관(운명론이나 태생적 결정론 같은)과 부딪치면서 그 전복을 꿈꾼다. 나라를 훔친 도적과 맞서 그들의 재물을 훔치는 도적, 홍길동은 이 시대의 가치관들과 조우하면서 새로운 수퍼히어로로 부각된다. 홍자매의 발칙한 상상력이 사극에서도 고스란히 발현되는 순간이다.

윤선주표 본격 정치사극, ‘대왕 세종’
주말 밤을 장악한 ‘대왕 세종’은 본격 정치사극의 가능성을 엿보게 만든다. 그 원동력은 다름 아닌 윤선주라는 작가에서 나온다. ‘불멸의 이순신’으로 주목을 받고 ‘황진이’로 자기 색깔을 굳혀온 윤선주는 ‘대왕 세종’에서 본격적인 정치의 세계로 뛰어든다. 윤선주 작가가 써온 작품의 특징은 그 주인공의 행보에서 일관되게 발견할 수 있다. 작가는 신분이나 서열로 인해 내적인 한계 상황을 가진 주인공이 그 열등감과 차별을 이기고 가장 높은 자리에 서는 과정을 그린다.

이순신은 우리가 위인전에서 보아왔던 완벽한 인물로 등장하지 않는다. 그는 깊은 열등감을 갖고 있는 인물이며 그럼에도 그것을 뛰어넘어 불멸로 달려가는 실전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국어 교과서에 등장하는 시조 몇 편으로 기억되는 황진이 역시 드라마 속으로 들어와서는 끝없는 자기와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여성으로 그려진다. 이것은 ‘대왕 세종’에서도 마찬가지다. 그저 한글 창제로서 각인된 세종대왕은 이 작품을 통해 치열한 정치세계 속에서 생존해나가는 현실 정치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작가의 이러한 주인공의 내적 갈등에 대한 탐구는 역사적 사실에만 박제되어 있던 위인을 생생하게 살아있는 인물로 재탄생시킨다. 윤선주 작가의 이 같은 인물 탐구를 통한 치밀한 심리묘사는 ‘대왕 세종’이 그리고 있는 다양한 인물들의 정치적 입장을 다각적으로 표현하면서 거기서 발생하는 화학반응의 재미를 만들어낸다. 때로는 그 정치적 입장이 너무나 다양하고 대사의 중의적인 의미들이 너무 깊어 이해가 쉽지 않은 단점이 있지만, 그래도 그 어려움이 진짜 복잡한 정치의 세계라는 점은 누구나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 혹은 연출자들의 역량이 더 중요해진 퓨전사극 시대에, 물론 역사왜곡의 문제는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하지만 사극은 기본적으로 역사 자체가 아니라 창작의 산물인 드라마라는 점에서 이러한 작가의 탄생은 환영받을 만한 일이다. 오히려 ‘사극은 역사 자체’라는 사고방식을 뒤집어 ‘사극은 드라마’일 뿐이라는 점을 명백히 한 후, 사극의 좀더 자유로운 실험이 이루어지고, 한 편으로는 그로 인해 환기된 진짜 역사에 대한 논의들이 병렬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작가가 사극을 말해주는 사극의 작가주의 시대는 이미 도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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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호세대 다른 드라마와 시청률

방송 3사 드라마의 나이는 어떻게 될까. 이것은 물론 각 방송사별로 성공하는 드라마를 만든 주력 세대가 누구냐는 질문이다. 천편일률적으로 세대를 나눌 수는 없지만 대체로 MBC는 3,40대가 주 시청세대이며, SBS는 4,50대로 그보다 시청세대가 높다. 반면 KBS는 3,40대에서부터 5,60대까지 고른 시청층을 보유하고 있다. 어느 방송사의 드라마이건 10대와 20대는 이제 TV 시청률에서 그 중요성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이른바 ‘닥본사’보다는 TV 이외의 다른 매체를 통해 보는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이들 현재 방송사별 드라마들의 나이에 따라 주중과 주말에서 시청률의 희비쌍곡선이 만들어진다는 점이다. 주중에는 주로 3,40대의 시청층이 드라마 시청률을 좌우하고 있는 반면, 주말에는 그 보다는 윗세대인 4,50대의 시청층이 그 역할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 주중에 ‘이산’이나 ‘뉴하트’ 같은 MBC 드라마들이 인기를 끌고, 반면 주말에는 SBS ‘황금신부’나 KBS ‘대왕 세종’같은 드라마들이 인기를 끄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주중 드라마 3,40대가 좌우
주중 드라마의 수위를 차지하고 있는 MBC 드라마들의 최근 특징은 그 타깃을 3,40대 여성에 맞추고 있다는 점이다. AGB 닐슨의 세대별 시청률 백분율 자료(1월1일∼1월20일)에 의하면 주중 드라마를 이끌고 있는 ‘이산’과 ‘뉴하트’ 모두 3,40대 여성의 분포도가 가장 높았다. ‘이산’은 3,40대 여성이 30%(30대 16%, 40대 14%)였고, ‘뉴하트’는 31%(30대 17%, 40대 14%)였다. 여기에 같은 세대 남성들까지 포함하면 ‘이산’은 총 51%(30대 남성 11%, 40대 남성 10% = 21%), 즉 반 이상의 시청자가 3,40대라는 얘기가 된다. 마찬가지로 ‘뉴하트’도 총 48%(30대 남성 9%, 40대 남성 8% = 17%)로 반 수에 육박한다.

SBS의 ‘왕과 나’는 이에 비해 시청층이 더 높은데, 최근 들어 완성도에 대한 비판이 높아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시청률이 14% 내외를 유지하는 비결은 이 드라마가 사극이라는 점도 있지만 장년층 시청자들의 충성도가 그만큼 높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한 SBS의 ‘불한당’ 역시 주 시청층이 4,5,60대 여성으로 이 시청세대가 41%(남성까지 포함하면 무려 61%다)나 되는 반면, 30대는 10%(남성 포함해도 16%)에 불과했다. 역시 주중 드라마를 이끄는 주 시청층이 3,40대라는 걸 말해주는 대목이다.

한편 주중 드라마로서 MBC의 아성을 공략하는 유일한 드라마는 KBS의 ‘쾌도 홍길동’이다. 이 사극의 세대별 시청률은 특이한데, 남성 시청층은 적은 반면(40대 10%가 최고치), 여성 시청층은 30대부터 60대까지 고루 분포(30대 12%, 40대 12%, 50대 9%, 60대 9%)하고 있다. 여러 모로 사극의 진화와 맞물려 시청층이 다양해지고 있다는 반증인 셈이다.

주말 드라마 4, 50대 이상이 좌우
주중 드라마에서 3,40대 시청자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수위를 차지한 MBC 드라마. 하지만 주말 드라마의 성적표는 그다지 좋지 않다. 주말에 예능 프로그램으로서 ‘무한도전’이 드라마만큼의 시청률을 얻고 있는 것에 반해, 정작 드라마는 시청률 경쟁에서 멀어져 있다. 과거에 주말 드라마 하면 MBC를 떠올릴 정도로 강세였지만 그것은 옛말이 되었다. ‘깍두기’가 종영한 ‘며느리 전성시대’에 눌려 빛을 보지 못했고, ‘겨울새’는 조기종영 얘기까지 흘러나오고 있을 정도다.

반면 주중에서 별다른 힘을 쓰지 못했던 SBS는 주말 드라마에서 활짝 웃고 있다. 대표적인 드라마가 ‘황금신부’. 이 드라마의 주 시청층은 4,5,60대(전체의 38%)여성으로 이 세대의 남성 시청자까지 합치면 59%나 된다. 한편 전통적으로 강세를 보이고 있는 KBS 대하사극 ‘대왕 세종’은 주 시청층이 40대 이상 남성(33%)으로 여성 시청층까지 합치면 61%를 차지하고 있다. ‘대왕 세종’ 의 특이한 점은 시청률의 미세한 차이가 있지만 60대 시청자들의 높은 지지를 얻고 있다는 점(남 11%, 여 10%)이다.

시청률과 달라진 생활 패턴의 상관관계
이처럼 주중 드라마와 주말 드라마의 선호 세대가 다르고, 각 방송사별 드라마의 나이가 다른데서 현재의 시청률 등락을 이해할 수 있다. 주중 드라마를 이끄는 3,40대 시청층과 잘 맞아떨어진 주중 MBC 드라마들의 나이는 시청률 수위를 차지하게 하는 힘이며, 상대적으로 드라마 나이가 높은 주중 SBS 드라마들이 고전하는 이유가 된다. 반면 이런 상황은 주말에 와서는 역전된다. 그만큼 달라진 주말 생활 패턴과 맞물려 주말 드라마 시청층의 주 세대가 장년층이 되었다는 걸, SBS 드라마나 KBS 사극이 말해준다.

방송사의 드라마 성격이 특정 세대를 공략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드라마는 그 방송사의 이미지를 만들기도 하는 상황에서 이렇게 한 세대에 국한되는 이미지를 형성하는 것은 그다지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다. 이것은 어떤 면으로 보면 특정 세대에 대한 쏠림 현상을 말해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타깃 세대가 고정되면 당장은 시청률을 확보할 수 있겠지만 향후에는 비슷비슷한 톤의 드라마들이 등장할 것이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한 방송사에서도 여러 세대들이 향유할 수 있는 다채로운 프로그램과 드라마가 다양하게 포진되길 기대한다.

‘대왕 세종’과 ‘이산’, 닮았다

KBS ‘대왕 세종’과 MBC ‘이산’은 서로 닮았다. 먼저 사극에서 주로 다루었던 전쟁이 없다는 점이다. 대신 그 자리는 정치가 차지했다. 이것은 이제 전쟁과 같은 거대담론보다는 현실정치가 피부에 더 와 닿기 때문이다. 어디서 어떤 국지전이 벌어지고 있다고 해도 당장 목구멍이 포도청인 세상에서, 그것도 살얼음판 같은 사회 생활에 지쳐 돌아와 이제 TV 앞에 앉은 시청자에게는 남의 나라 얘기 같은 전쟁 영웅의 환타지보다 성군에 대한 희구가 더 간절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대왕 세종’과 ‘이산’이 그리고 있는 성군은 도대체 어떻게 탄생하는 것일까.

태평성대? 피 바람 부는 난세!
우리는 흔히 태평성대의 전형처럼 일컫는 세종 시대와 영ㆍ정조 시대를 생각하며 그 시대를 연 왕들 또한 평탄한 삶을 살았으리라 착각하곤 한다. 하지만 우리가 두 드라마를 통해 포착하는 것은 그들의 삶이 한 발 잘못 내디디면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생존의 삶이었음을 알게 된다. 물론 드라마로서 극화된 부분이겠지만, 이산(이서진)은 노론벽파의 끝없는 암살의 위협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고, 훗날 세종이 되는 충녕대군 역시 어린 시절 양녕대군 추종세력의 자신을 제거하려는 위협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이산 정조가 그 상황에 몰리게 되는 것은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노론벽파들의 무고로 인해 죽게 되기 때문이다. 정조는 실로 비극적인 가족관계를 갖게 되는데 그것은 할아버지인 영조(이순재)가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게 했고, 그것의 배후세력이었던 고모인 화완옹주(성현아)와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김여진)가 자신까지 제거하려 들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은 ‘대왕 세종’에서도 유사하다. 왕자의 난으로 형제의 피를 묻히고 등극한 태종 이방원은 왕이란 대의를 위해 자기 아들이나 형제까지도 죽일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게다가 양녕대군의 추종세력들은 충녕대군을 호시탐탐 죽음으로 몰아넣으려 하며, 거기에는 충녕대군의 외척인 민씨 형제도 포함되어 있다.

난세 속에서 만난 백성들
그러니 이산과 충녕대군은 태생에서부터 가시밭길을 걸을 운명을 타고 난 인물들. 하지만 그 난세 속에서 친인척마저 믿을 수 없는 이들의 눈이 당도한 곳은 다름 아닌 백성들이다. ‘이산’의 성송연(한지민)과 박대수(이종수)는 바로 그 백성이란 이름의 상징적인 인물들인 셈이다. 그 운명적인 혹은 어찌 보면 당연한 만남 속에서 이산은 그들과 동무의 관계를 가진다. 즉 만 백성의 어버이인 왕이 되기 이전까지, 이산은 백성들의 동무처럼 한껏 시선을 낮추고 있었다는 말이다.

‘대왕 세종’에서 백성의 상징처럼 대변되는 인물은 장원(조재완)이라는 충녕대군의 내관이다. “나는 너의 왕자야. 너는 나의 백성이고. 왕자가 백성을 지키는 거다.”라는 대사가 그걸 말해준다. 하지만 1,2회를 통해 보여준 충녕대군과 장원의 관계는 주종의 관계이면서도 형제 같은 끈끈함을 보인다. 장원의 아버지가 해수병으로 고생한다 하자 약을 손수 지어 주고, 자신 때문에 매맞아 죽게 된 장원 앞에서 피눈물을 흘린다. 충녕대군은 단 한 명의 백성도 귀하게 여길 줄 아는 훗날의 세종대왕의 면모를 그 때부터 갖게된 셈이다.

순수한 정치를 실현시키다
그 때 만났던 백성들 앞에서 무엇 하나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던 이산과 충녕대군이 훗날 성군이 된 것은 바로 그 초심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드라마 상에서 그려지는 정치 대결은 극명하게 두 축으로 나뉘어진다. 한 축은 이상적인 정치, 즉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펼치는 정치의 세계이고, 반대 축은 권력과 세도를 잡기 위한 현실 정치의 세계이다. 이상적인 정치는 궁극적으로 가야할 정치의 길이지만, 현실 정치의 힘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공염불이 되고 만다. 어린 시절, 순수한 뜻만 갖고 펼치던 이산의 금난전권 철폐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는 이유가 그 때문이고, 충녕대군의 의기에만 기댄 태종 앞에서의 충언이 거꾸로 억울한 자들을 물고 나게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니 이 순수하기만 한 두 학구파가 자신의 순수정치를 실현시키기 위한 방법은 오로지 철두철미한 준비를 통한 다양한 인물등용에서 비롯될 수밖에 없다. 이 난세 속에서 가장 많은 인물들이 배출되게 된 것은 권력을 위해 자신을 죽음의 위기에 몰아넣은 조정의 썩은 물보다, 저 바깥 세상 가장 낮은 백성들이 사는 곳에서조차 반짝반짝 빛나는 옥석을 찾아내는 왕들의 초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발탁된 인물들은 가장 많은 업적들을 남겼고 그것은 훗날 이 시대를 태평성대로 부르게 만드는 이유가 되었다. 난세 속에서도 백성을 가장 높은 자리에 위치시킨다는 애초의 초심을 잃지 않고, 그 순수한 마음을 철저한 준비와 끈기로 실현시킨 것, 성군의 탄생은 거기에서 비롯된다. 비록 본래 역사와 다른 점이 있지만 그 드라마 안에서라도 이러한 성군을 찾는 마음은 조선시대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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