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일지매’, 그 모성 부재의 세계

‘돌아온 일지매’에서 심마니의 딸로 살아가던 달이(윤진서)는 우연히 만나게 된 일지매(정일우)에게 대뜸 이렇게 말한다. “자식. 너 예쁘게 생겼다. 계집애 같애... 일지매. 무슨 이름이 계집애 같애... 눈썹이랑 코, 입 모두 여자 애 같애.” 그녀의 아찔한 도발에 일지매는 진짜 계집애(?)처럼 답한다. “놔라. 부끄럽다. 멋쩍다.” 그런데 다음 시퀀스로 일지매는 아예 달이의 옷을 입고는 마을로 내려가 닭을 훔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여장한 일지매는 어찌 보면 이 사극에서 생뚱맞아 보인다. 왜 굳이 여장까지 해 보일까. 재미있어서? 일지매가 본래 꽃미남의 원조라서?

고우영 원작의 ‘일지매’를 보면 그 얼굴은 고우영 화백이 즐겨 그리던 여성 캐릭터의 얼굴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달이가 지적한 것처럼 ‘일지매’라는 이름 또한 여성적이다. 훗날 일지매가 일을 치르고 나서(?) 사라지며 남겨놓는 매화 한 가지도 이 활극에 어울리지 않게 자못 여성적이다 못해 미적이기까지 하다. 왜 일지매라는 특별한 영웅은 굳이 여성의 얼굴을 고집하고 있는 것일까.

일지매, 그 모성부재의 세계
‘돌아온 일지매’가 그리는 세계에는 모성이 삭제되어 있다. 일지매는 태어나자마자 어머니와 생이별을 하고, 결국 버려지게 되었다. 저자거리의 걸인인 걸치(이계인)는 버려진 일지매를 데려다 젖동냥을 해가며 키운다. 이 모성 없는 세상에 버려진 일지매와, 그를 키워낸 걸인 아버지 걸치라는 설정은 이 드라마가 그리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모습을 압축한다.

모성 부재의 세계 속에는 두 개의 아버지 모습이 중첩되어 있다. 하나는 아들을 눈앞에서 부정해버리는 비정한 아버지이고 다른 하나는 피 한 방울 안 섞였어도 간 쓸개까지 다 내어줄 정도로 지극 정성인 걸치라는 아버지다. 비정한 아버지는 어머니를 내치면서(혹은 방조했고) 일지매 앞에 모성부재의 세계를 만들어냈다. 일지매는 그 부재한 모성을 야성처럼 품고 있는 달이를 만나지만 그녀 역시 아버지들의 세계 앞에 목이 떨어진다.

일지매가 찾는 것은 바로 그 아버지로 인해 잃어버린 모성의 세계다. 반 미쳐 짐승이 되어버린 일지매를 굴(이 드라마 속에는 굴, 즉 자궁의 이미지를 많이 사용한다. 달이와 만나던 동굴 같은)에 가둬버리며 열공스님은 “그 곳이 바로 네 어미 뱃속이다”라고 말한다. 열공스님은 일지매를 가둔 것이 아니라, 그가 그토록 원하던 모성의 세계로 되돌려 다시 태어나게 한 것이다. 그가 밖으로 나오게 될 즈음, “너는 누구냐”고 묻는 열공스님의 질문에 일지매는 말한다. “저는 이입니다. 어미를 찾아 옷섶을 헤매던 더러운 이.”

모성부재의 세계, 서민 아버지들의 모습은?
이 사극에는 모성을 빼앗아버린 아버지와 상반되는 걸치와 열공스님 이외에도 또 존재하는 아버지들이 있다. 그것은 구자명(김민종), 배선달(강남길) 같은 서민적인 인물들이다. 이들은 권력의 핵심에는 근접하지 못하지만 그럭저럭 살아가며 문득문득 부성애를 끄집어낸다. 구자명은 포도청의 냉철한 수사관이지만 또 한 편으로는 힘없는 이들에게 손을 내밀어주는 따뜻함을 가진 인물이기도 하다. 일지매 앞에서 그는 마치 아버지와 같은 걱정을 해준다.

한편 배선달과 차돌이(이현우)는 일지매의 모성부재 상황을 또 다른 버전으로 반복한다. 차돌이는 부모가 없는 천애고아에 동네 왈패들에게 약취를 당하던 아이. 배선달은 차돌이를 자신이 데려다 키우겠다며 아버지의 정을 보인다. 그런데 이 아버지의 상을 보이는 구자명과 배선달 같은 캐릭터는 어딘지 고개 숙인 모습들이다. 구자명은 법을 집행하는 위치에 있지만 법보다 우위에 있는 권력 앞에서 무기력하고, 배선달은 화려한 무예의 세계에 빠져있지만 자신 하나 지켜낼 힘이 없는 소시민이다.

일지매, 여성의 얼굴로 서민들을 품에 안다
모성이 삭제되어있고, 자궁의 이미지가 강조되며, 일지매라는 캐릭터가 여성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만 보더라도 이 사극이 지향하는 세계가 어떤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부재한 모성의 회복이다. 일지매는 바로 여성의 얼굴로 굶주린 서민들에게 먹을 것을 챙겨다 주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다. 그러니 이 일찌감치 어머니 없는 세계에 내던져진 일지매가 그 먼 길을 돌아 스스로 품게 되는 것이 바로 모성이다.

국가를 흔히 어머니에 비유하는 것은 그 백성들을 자식으로 여기는 마음을 꿈꾸기 때문이다. 하지만 ‘돌아온 일지매’의 세계 속에서 국가는 백성을 착취하는 아버지(당대 가부장적 사회 속에서 아버지는 종종 권력을 좇는 욕망의 화신으로 그려진다)의 이미지로 표상된다. 그 아버지는 일찍이 어머니(의 마음)를 몰아내고 그 자리에 앉아 있으며, 따라서 일지매는 소년기 그 어머니를 찾아다니다 결국에는 서민들의 어머니를 자처하게 되는 것이다.

반면 가부장적 세계와는 거리가 먼, 서민들의 아버지들은 그저 고개를 숙인 채 측은한 마음으로 서민들의 삶을 바라본다. 그들에게 어머니는 이미 살해된 존재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지매를 통해 그 모성 회복의 가능성을 확인한 그들도 변하게 된다. 이것은 일지매가 왜 여성의 얼굴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실마리를 전해준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모성을 형상화한 영웅 일지매가 여타의 영웅들과는 다른 특별한 존재인 이유이기도 하다.

동화(同化)를 버리고 이화(異化)를 선택한 책녀, 그 효과는?

‘돌아온 일지매’는 기존 사극과 달리 이른바 책녀라 불리는 내레이션이 극 중간에 끼여든다. 드라마에서 내레이션은 여러 기능을 갖고 있다. 등장인물의 내면적 독백을 드러내는 일인칭 시점의 내레이션은 극에 대한 몰입을 더욱 강화시키는 힘을 발휘한다. 하지만 책녀처럼 등장인물 밖에서 극을 설명하듯 개입하는 전지적 작가 시점의 내레이션은 몰입을 통한 동화(同化)보다는 이화(異化)의 기능을 위한 것이다.

지금 ‘돌아온 일지매’의 책녀에 대해 쏟아지는 논란의 실체는 바로 이 동화와 이화의 부딪침이다. 드라마를 몰입으로 보는 시청자들에게(사실 대부분이 그럴 것이다) 동화를 방해하는 책녀의 틈입은 불편할 수밖에 없다. 책녀의 존재는 시청자들의 위치를 드라마 속이 아니라, 드라마 밖으로 늘 끄집어내게 만든다. “당신은 지금 드라마를 시청하고 있습니다”하고 책녀의 존재 자체가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아온 일지매’는 왜 책녀라는 이화의 장치를 사용한 것일까. 그 첫 번째는 고우영 원작에 충실하고자하는 노력으로 보인다. 고우영 원작 만화의 특징으로 작자의 목소리 개입은 절대적이라 할 수 있다. 조선시대의 상황을 그리면서 작자는 그 상황을 현대적인 문명의 이기에 빗대 설명하기도 한다. 등장인물들이 길을 찾는 대목에 갑자기 내레이션으로서의 지문이 ‘네비게이션’운운하는 것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바로 이 과거를 현대와 연결시키는 내레이션은 실로 작품에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게 된다. 그것은 과거의 이야기가 거기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현대적인 의미로 재해석되는 지점을 만들어내게 된다. 그것은 과거 속에서 찾아지는 현재적 역사의 의미뿐만 아니라, 단순히 재미 그 자체로서도 충분히 기능한다. 즉 해설이 주는 기능적 목적에 재미 또한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책녀의 또 다른 기능은 그 존재 자체가 이 사극을 역사적 사실과 별개로 구분 짓게 해준다는 데 있다. 소소한 에피소드들을 책녀가 설명해주는 과정에서 이것은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이야기라는 뉘앙스를 시청자들에게 전해준다. 책녀는 이 드라마의 재미가 역사적 사실의 드라마틱한 이야기에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작자의 끝간데 없이 뻗어나가는 상상력에 있다는 걸 은연중에 알려주고 시청자는 바로 그 부분은 어느 순간부터 기대하게 된다.

당연한 것이지만 책녀의 개입을 통해 이야기의 사실성을 통한 몰입을 포기하고 나면 오히려 그 마음대로 갈 수 있는 상상력을 얻게 된다. ‘돌아온 일지매’의 이야기 구조가 아주 소소한 엉뚱한 이야기에서 일지매 같은 중심인물로 위치이동하며 흥미진진해지는 것은 바로 이 시공을 넘나드는 책녀의 존재로 갖게된 무한상상의 가능함 때문이다. 왕횡보라는 매력적인 캐릭터는 이런 과정 속에서 빛을 발하게 된다.

‘돌아온 일지매’의 책녀는 몰입을 방해하지만, 거꾸로 무한한 상상력의 재미를 선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책녀의 내레이션이 얼마만큼 적절하고 촌철살인의 힘을 가졌느냐는 점일 것이다. 그저 책녀의 존재가 설명 그 이상이 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몰입만을 방해하는 방해꾼의 위치에 설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이상을 넘어선다면 이만큼 독특하고 재미있는 사극의 내레이션을 가져온 책녀의 존재에 대해 새로운 평가가 이루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꽃남’과 ‘돌아온 일지매’, 원작만화에 가까워진 드라마

물론 원작이 만화이지만 드라마 ‘꽃보다 남자’의 캐릭터들 역시 순정만화에서 막 빠져나온 듯한 인물들이다. 초부유층 자제들인 F4의 일상은 무대회, 별장, 파티 같은 순정만화 속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그들은 분명 고등학생이지만, 신화고등학교가 재학생들에게 주는 파격적인 특혜로 인해 수능시험을 준비하는 모습 따위는 발견할 수 없다. 왜? 만화 속에서 그런 이야기는 재미가 없으니까.

대신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은 멋진 꽃미남들의 판타지를 자극하는 비일상적인 모습들이다. F4의 리더인 구준표(이민호)와 스포츠카를 타고, 분위기 있는 꽃미남 윤지후(김현중)와 함께 말을 타고, 식사를 할 때도 하녀들의 시중을 받거나 주방장의 특별 서비스를 당연한 듯 받는다. 쇼핑을 할 때면, 한 백화점을 통째로 빌리기도 한다. 물론 그 백화점도 그 주인공의 것이다.

드라마로 보면 황당할 수 있는 이야기지만 만화로 보면 당연한 이 판타지의 세계는 따라서 드라마 속으로 틈입한 만화 보는 재미를 선사한다. 만화의 흐름과 드라마의 흐름은 호흡이 다르지만, 판타지라는 접점을 공유하는 순간, 시청자들의 시선 자체를 돌려놓는다. 젊은 세대들은 상대적으로 이러한 만화적 감성에 익숙하지만, 나이든 세대라도 ‘꽃보다 남자’를 보며 그 판타지에 푹 빠질 수 있는 시청자라면, 적어도 소싯적 ‘캔디’나 ‘베르사이유의 장미’같은 순정만화 한두 편쯤은 빠져서 본 적이 있는 분일 것이다.

‘꽃보다 남자’가 순정만화를 드라마 속으로 끌어들였다면, 최근 방영되며 그 독특한 연출이 화제가 된 ‘돌아온 일지매’는 고 고우영 화백의 그 독자적인 만화 세계를 사극 속으로 들어들였다. 고우영 화백의 만화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는데, 그 중 제일 중요한 것은 작자의 개입이 들어가는 내레이션의 활용이다. 그림 속의 인물들은 저들끼리 만나고 부딪치며 대사를 주고받지만, 그 위에 그들을 내려다보는 작자의 해설이 고우영 만화의 특별한 재미를 선사한다.

그것은 ‘삼국지’나 ‘수호지’, ‘초한지’같은 원전들이 있는 작품들을 자기 식으로 해석하면서 만화화해온 고우영 화백 나름의 노하우가 깃들여져 있는 것이다. 사극 ‘돌아온 일지매’에서 작품 몰입을 방해한다는 논란을 일으킨 책녀의 존재는 바로 그 내레이션을 드라마화한 데서 나온 것이다. 이 책녀라는 내레이션은 조금 낯선 존재이기는 하지만 바로 그 점이 고우영 만화의 진짜 재미에 접근하게 해준다는 데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고우영 화백의 또 한 가지의 특징은 이야기를 중심인물에서 시작하기보다는 주변인물에서부터 서서히 중심인물 쪽으로 끌어간다는 점이다. 발차기의 고수로 옆으로 걷게 된 왕횡보(박철민)같은 매력적인 캐릭터가 이야기의 화두로서 등장하고 그 인물이 주인공과 얽히면서 이야기를 발전시켜나가는 구조가 고우영 만화의 또다른 재미이다. 이러한 주변에서부터 중심으로 가는 이야기 구조는 ‘일지매’같은 서민들의 영웅을 다루는 콘텐츠에서 특히 빛을 발할 수 있다.

이러한 이야기 구조는 일지매를 다루지만 주변부 인물들 예를 들면 구자명(김민종) 같은 인물 또한 빛나게 됨으로써 한 영웅만의 이야기가 아닌, 서민들 각각이 자신만의 영웅적인 이야기를 가진 인물로 조명되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일지매라는 원전 해석이 아닌 고우영 화백 자신만의 작품이 특별히 빛나고 여러 차례 타 장르에서 재해석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꽃보다 남자’나 ‘돌아온 일지매’는 모두 원전 만화를 드라마화한 것이 아니라, 만화 그 자체를 보는 재미를 드라마 속으로 끌어들였다. 우리는 이미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모두 인지하면서 적극적으로 그 판타지의 세계로 인도하는 순정만화 그 자체인 드라마와, 책장을 넘기듯 몇 편으로 제목 지어진 고전이 되어버린 일지매라는 고우영 만화를 드라마를 통해 보는 새로운 재미를 경험하고 있다.

혹자는 만화 같아서 유치하고, 몰입이 안 된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드라마가 만화와 동거한 지는 꽤 오래되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드라마를 꼭 리얼리티만으로 보려고 하는 것 자체가 그다지 의미가 없을 지도 모른다. 만화에서도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것과 판타지 그 세계 자체를 여행하는 것이 자유롭게 공존하듯이 이제는 드라마도 여러 형태들을 껴안을 만큼 충분히 진화해오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만화 같은 ‘꽃보다 남자’와 ‘돌아온 일지매’. 진짜 만화의 묘미를 아는 시청자라면 그것이 오히려 만화 같아서 더 재미있게 볼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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