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느라기', 시부모, 며느리 그리고 딸로 이어지는 차별의 연대기

 

기혼 여성 시청자들 중에는 카카오TV 드라마 <며느라기>를 못 보겠다는 분들이 적지 않다. 이유는 너무 '열 받아서'다. 그 안에 담겨진 이야기들이 너무나 리얼해서 그걸 굳이 다시 드라마를 통해 확인하는 게 짜증이 난다는 것. 특히 실제 현실에서는 부딪쳐봐야 분란만 일어날 게 뻔해서 속으로 참고 포기하고 회피하며 아예 깊게 생각하는 것 자체를 하지 않으며 넘겼던 그 문제들을 다시 적나라하게 꺼내놓는 <며느라기>를 보는 일이 너무나 힘겹다는 것이다.

 

실제로 <며느라기>는 굉장히 극화된 막장드라마식의 시월드가 아니라, 너무나 예의 바른 척 하면서 사실은 속을 긁어대고 뒤통수를 치고 모멸감을 주는 마치 미세먼지 같은 차별의 공기가 당연한 듯 흘러 다니는 시월드를 보여준다. 추석 명절의 시월드 풍경은 너무나 익숙한 것이지만, 며느리로 처음 그걸 대하게된 민사린(박하선)의 시선으로 다시 들여다보면 숨이 턱턱 막히는 광경들로 다가온다.

 

"네가 뭘 할 줄 아냐"며 "남자가-" 운운하면서 무구영(권율)이 음식 만드는 걸 도와줄라치면 손사래를 치며 "자기가 하겠다" 나서는 시어머니 박기동(문희경)은 본인도 힘들면서 스스로 나서 명절 남녀 사이에 선을 긋는다. 밥을 먹어도 남자들끼리는 저 큰 상에 편하게 앉아 먹고 여자들끼리 작은 상에 옹기종기 모여 먹는 그 풍경은 민사린의 시선을 통해 시청자들에게도 해도 너무 한다는 느낌을 준다.

 

게다가 이 시어머니는 작은 집 손녀에게 밥상머리부터 "여자는 예쁜 걸 먹어야 예쁜 아기 낳는다"는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를 꺼낸다. 그런 이야기를 들은 아이는 그 차별을 당연한 듯 습득하게 된다. 남자들이 식사 후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을 때 상을 닦고 있는 것. 그걸 본 아이 엄마는 더 이상 참지 못한다. 자신이 받는 차별은 그래도 꾹꾹 눌러 참고 있었지만, 아이도 그걸 그대로 받는다 생각하니 울화통이 터질밖에.

 

하지만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대하는 모습과 딸 무미영(최윤라)을 대하는 모습은 너무나 다르다. 다른 집에서 며느리로서의 그 차별을 겪고 친정에 온 딸을 박기동은 살갑게도 챙기면서 당연하다는 듯 며느리 민사린에게는 음식을 차리라고 말한다. 그리고 심지어 친정에 가야된다며 일어나려는 민사린에게 그렇게 서두를 거면 명절 일주일 전에 친정에 먼저 다녀오라는 몰상식한 말까지 꺼내놓는다. 그 말에 무미영은 뜨악해 한다. 자신도 며느리로서 겪는 일을 엄마도 며느리에게 하고 있으니.

 

시아버지 무남천(김종구)은 툭툭 던지는 말 한 마디,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빌런'이라고 해도 될 법한 뒷목 잡게 하는 것들 투성이다. 명절 상차림을 "늘 하던 거 뭘 대단한 거라고" 비아냥대고, 음식 준비하느라 고생한 아내가 저녁은 뭐 시켜먹자는 말에 "집에 음식이 넘치는데 뭘 시켜 먹냐"고 툴툴댄다. 그는 소파에 등짝이 딱 붙어버린 사람마냥 그 자리에 앉아서 집안 여자들에게 시켜먹을 궁리만 하는 빌런이다. 그들이 어떤 모멸감을 느낄 지는 생각조차 않은 채.

 

어린 아이에게 "여자는" 어쩌고 하는 이야기를 하고, 그런 성차별을 당연한 공기처럼 여기는 박기동과 무남천의 이런 말과 행동들 속에는 은연중에 '안 사람', '바깥양반'으로 지칭되는 막연한 성역할 고정관념과 거기서 비롯되는 뿌리 깊은 성차별이 깔려 있다. 그런데 그런 성차별이 만든 결과는 참혹하다. 답답해 집밖에 잠깐 나왔다가 딸 무미영이 사위 김철수(최태환)와 말다툼을 하고, 급기야 사위가 딸의 뺨을 때리는 광경을 박기동이 목격하게 되는 것.

 

사실상 가장 역할을 하고 있는 무미영이 무능한 남편과 차별적인 시댁에 지쳐 이혼을 이야기하고, 그 말에 격분한 김철수가 뺨을 때리는 이 모습은 마치 그간 박기동이 해온 성차별적인 말과 행동들이 부메랑처럼 돌아와 자신의 뺨을 올려 부치는 듯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대했던 그런 성차별적 행동들이, 자신의 딸에게도 고스란히 돌아가고 있고, 그 딸의 딸에게도 이어지는 차별의 연대기라니. 그건 결국 돌고 돌아 딸이 이혼을 결심하고 뺨을 맞는 광경으로 자신의 뒤통수를 치고 있지 않은가.

 

여성시청자들은 <며느라기>가 보기 힘겹다고 말한다. 그건 너무 리얼해서 그렇다. 보다보면 애써 꾹꾹 누르며 없는 일처럼 치부하고 넘기려 했던 시월드에서 겪었던 모멸감이 다시 떠오른다는 것. 하지만 그래서 더더욱 그걸 들여다봐야 한다. 그건 그저 없는 일이 아니고, 타인에게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며 드라마 속에나 등장하는 그런 일은 더더욱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저들의 이야기'로 치부하며 남 일처럼 봤던 남성들이라면 더더욱 들여다봐야 한다. 그것이 사랑하는 아내와 딸 그리고 어머니에게 현재도 가해지는 아픈 차별들이고, 그런 차별 속에서 가족 모두가 행복한 관계를 계속 유지한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사진:카카오TV)

기레기는 어떻게 탄생하나, '허쉬'의 시스템 고발이 변명이 안 되려면

 

기자가 주인공인 드라마는 잘 안 된다는 통설이 있다. 거기에는 현실과 판타지 사이에 서 있는 드라마의 위치가 작용한다. 즉 너무 현실감 있게 기자의 세계를 그리면 고구마 가득한 이야기와 더불어 그들도 그럴 수밖에 없다는 푸념과 변명처럼 다가오게 되고, 그렇다고 진실만을 추구하는 기자를 판타지를 섞어 그리면 너무나 다른 현실과의 부조화 때문에 공감이 안 되는 지점이 있다는 것. 

 

JTBC 새 금토드라마 <허쉬>는 이 중 전자를 선택한다. 섣불리 정의감 넘치고 그 어떤 외압 앞에서도 진실만을 추구하는 기자라는 판타지를 그리지 않는다. 대신 정반대로 이른바 '기레기'로 전락해버린 기자들이 어쩌다 그렇게 되어버렸는가를 찾아간다. 매일한국의 12년차 베테랑 기자지만 이 신문사의 실패자들을 모아놓은 유배지나 다름없는 디지털 뉴스팀으로 출근해 보도자료를 '복붙' 하며 낚시성 제목으로 조회 수를 끌어올리는 일을 하는 한준혁(황정민)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펜대보다 큐대를 더 많이 잡으며 빈둥빈둥 시간을 때우고, 새로 들어온 인턴들을 교육하면서도 기자로서의 사명감 같은 이야기는 거의 꺼내놓지 않는 인물. 매일한국의 디지턴 뉴스부 기자들의 모습도 한준혁과 그리 다르지 않다. 디지털뉴스팀 정세준(김원해) 팀장은 기사는 잘 썼지만 사내 정치는 몰라 부장 승진에서 계속 누락된 '똥차' 취급을 받고, 김기하(이승준) 기자는 결코 속내를 드러내지 않으며 하루하루를 가늘고 길게 살아간다. 엄성한 디지털 뉴스부장은 나름 사내 정치를 하지만 어딘가 '엉성한' 직장인에 가까운 인물이고, 그가 눈치보며 비벼대는 나성원(손병호) 매일한국 편집국장은 기자정신보다 조직의 이익이 우선인 인물이다. 

 

새로 들어온 인턴이라고 해도 기자로서의 패기 같은 게 엿보이진 않는다. 지방대 출신이라는 이유로 무수히 많은 인턴 경험을 가진 오수연(경수진)은 '기자는 시민의 마지막 보루'라고 말하지만 현실은 정직원이 되기 위해 목매는 인물이고, 이지수(윤아)는 '밥은 펜보다 강하다'며 생존이 우선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말하는 인물이다. 즉 기자가 되려하는 젊은 인물들 역시 취업 전선에서 기자정신보다는 생존이 우선인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는 걸 이들 인물들은 잘 보여준다. 

 

그나마 기자로서의 근성과 정신을 보여주는 인물은 매일한국 사회부 차장 양윤경(유선)이지만 그 역시 비판적인 기사들이 번번이 광고주와 정치권의 눈치를 보는 데스크에 까이는 현실을 마주하며 이제 그만 둘까를 고민한다. 예전보다 많이 꺾였다는 그는 현실을 이렇게 개탄한다. "기자? 여기 기자가 어딨냐? 그냥 다 먹고 살겠다고 붙어있는 월급쟁이들이지." 기자로서 해야 할 일들과 직업정신 같은 게 있지만 이들은 어쩌다 기자가 아닌 회사원이 되어 있다고 자조한다. 

 

하지만 기자가 회사원이 되면 안되는 이유가 한준혁과 이지수가 겪은 사건으로 드러난다. 즉 2013년 방송노조위원장 이용민 PD가 뇌물을 받았다는 의혹을 담은 가짜뉴스를 한준혁의 이름을 내게 만든 나성원 국장 때문에 결국 이용민 PD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 것. 당시 한준혁은 나성원을 찾아가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며 항변했지만 사장이 직접 지시해 자신은 힘이 없다며 사장도 정부처에서 찍어 눌러 어쩔 수 없었다 말한다. 그러면서 다른 이슈가 나오면 금세 잊혀질 거라 변명했지만 그렇게 벌어진 비극으로 한준혁은 사실상 스스로를 죄인처럼 유배시켜 살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지수는 다름 아닌 바로 사망한 PD의 딸이었다.

 

생계를 위해 누구나 밥이 중요한 회사원이라는 건 공감할 수 있는 일이지만, 기자가 그저 회사원이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를 잘 보여주는 이 사건은 <허쉬>가 무엇을 담으려 하는가를 잘 보여준다. 섣부른 돈키호테 기자 판타지를 담기보다는 "허라면 허고 쉿 하라면 쉿 하면 되는 것"이라 말하는 데스크들 속에서 우리가 쉽게 기레기라고 치부함으로써 그런 가짜뉴스가 개인적 일탈에 의해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돈과 권력과의 관계로 얽힌 시스템의 문제라는 걸 이 드라마는 말하고 있다. 

 

그런데 <허쉬>의 이런 시스템 고발이 그저 기레기의 현실 한탄이나 변명에 머물지 않기 위해서는 이야기를 통해 어떤 대안의 제시가 필요하지 않을까. 기레기로 자조하며 살아가기보다는 무언가 이들의 연대가 만들어내는 반전이 필요한 이유다. 과연 <허쉬>의 한준혁과 이지수는 밥벌이 그 이상의 가치를 이 부조리한 시스템 안에서도 보여줄 수 있을까.(사진:JTBC)

'청춘기록', 가난하다고 꿈도 사랑도 가난할까

 

"나 지금 하고 싶은 거 있는데 허락이 필요해." 사혜준(박보검)은 안정하(박소담)에게 그렇게 키스의 허락을 구한다. "허락할게." 안정하는 선선히 허락하고 두 사람은 키스를 한다. 그리고 안정하가 말한다. "생각해 봤는데 언제든 해도 돼. 나도 그래도 돼?" 그 말은 그가 얼마나 사혜준을 사랑하는가를 담아낸다. 그러자 화답이라도 하듯 사혜준 또한 자신의 사랑을 담아 이렇게 말한다. "넌 뭐든 돼."

 

tvN 월화드라마 <청춘기록>에서 사혜준과 안정하가 나누는 이 키스신은 가슴을 몽글몽글하게 만든다. 그런데 그 설렘과 기쁨 속에는 어딘가 슬픔 같은 것들이 느껴진다. 그건 뭐랄까 뭐 하나 제 맘대로 되는 게 없는 세상에서, 그들이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서로에게만큼은 모든 걸 허락해주는 마음이 느껴져서다. 그들의 사랑은 거창한 프러포즈도 아니고 화려한 장소나 심지어 좋은 차 안에서도 아니다. 아버지가 일하러 다닐 때 끌고 다니던 승합차에서 그들은 그렇게 말하고 키스를 나눈다. 마치 서로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허락'뿐인 것처럼.

 

물론 <청춘기록>은 드라마다. 하지만 이 드라마 속에는 사혜준이 그토록 하고 싶어 하는 드라마가 있다. 포기하지 않고 노력한 끝에 의학드라마 <게스트웨이>에 캐스팅된 사혜준은 그 드라마 속에서 선배 의사(서현진)에게 다가와 이렇게 말한다. "누나 사귈래요?" 사혜준이 선배에게 그렇게 마음을 드러내는 장면은 말 그대로 드라마 속 한 장면이다. 병원이고, 그는 의사다. 사혜준이 드라마 속에서 하는 사랑과 실제 현실에서의 사랑은 그만큼 다르다.

 

드라마 같은 허구 속 세계가 다르다는 건 사혜준과 진상 톱스타인 박도하(김건우)가 함께 영화를 찍는 장면에서도 등장한다. 현실에서는 박도하가 톱스타이고 사혜준은 무명배우지만, 그 영화 속에서 사혜준은 재벌집 자제로 박도하를 잡아다 사정없이 폭력을 가하는 그런 인물이다. 현실에서야 태생의 수저에 따라 살아가는 수저가 달라지지만, 허구 속에서는 정반대의 역할을 하게 되기도 한다.

 

<청춘기록>은 드라마 속에 드라마를 세움으로써 그 드라마는 현실이라고 강변한다. 즉 사혜준이 연기하는 드라마 속 세상과 그가 처한 현실은 다르다고 말하는 것. 이 트릭을 통해 <청춘기록>이 보여주는 현실은 '착하고 성실하게 노력하면 성공한다'는 그런 생각이 드라마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라고 말한다. 스스로 괴물이라고 말하고, 그래야 이 바닥에서 살 수 있다며 사혜준과 이민재(신동미)를 짓밟는 이태수(이창훈)는 그래서 오히려 승승장구한다.

 

골프장에서 우연히 그를 만난 김이영(신애라)은 이렇게 말한다. "세상에 인과응보는 없다." 착하고 성실하게 사는 이들이 성공하고, 나쁜 자들이 벌을 받는 그런 현실은 없다고 드라마는 김이영의 목소리를 통해 전한다. 현실은 가난해서 어떻게든 살아가려는 이들이 오히려 더 나쁜 상황에 처하는 일이 벌어진다. 잘난 척 해서 재수 없던 사경준(이재원)이 사기를 당한 후 하는 토로는 그래서 공감 가는 면이 있다. "야 남들 부러워하는 취직했어도 한 달 월급 부잣집 애들 명품가방 하나 값이야. 이 돈 모아 서울에 집을 살 수가 있냐? 부자가 될 수가 있겠냐. 그저 그렇게 살다가 죽겠지. 삶의 무게에 짓눌리면서."

 

물론 <청춘기록>은 흙수저의 현실을 갖고 있는 사혜준이 저 드라마 <게스트웨이> 속 인물처럼 성공하는 이야기를 담으려 한다. 그래서 드라마 속 허구를 현실로 만드는 이야기를 그려나간다. 그건 실제 현실에서는 좀체 벌어지지 않는 일이고, <청춘기록> 또한 하나의 드라마라는 걸 말해주는 대목이다.

 

드라마는 현실의 결핍을 다룬다. 현실에서는 벌어지지 않는 것을 드라마는 꿈꾸기 마련이다. <청춘기록>은 그래서 청춘들이 현실에서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을 꿈꾸고 그걸 실현해가는 과정을 담는다. 그런 판타지가 무슨 소용이 있냐고? 글쎄. 물론 현실은 척박하지만 그래도 꿈을 꾼다는 것. 그것이 청춘의 증거가 아닐까 싶다. 원하던 꿈대로 이뤄지지 않는다 해도 꿈꾼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어쩌면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으니까. "넌 뭐든 돼"라고 말한 사혜준처럼, 가난해도 사랑할 수 있고 꿈을 꿀 수 있으며 충분히 행복할 수도 있고 심지어 아름다울 수도 있는 것처럼.(사진:tvN)

‘슬의생’, 신원호 PD가 시트콤과 드라마 사이를 선택한 까닭

 

“미국 드라마 <프렌즈> 같은 느낌으로 만들고자 했다.” tvN 목요스페셜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신원호 PD는 제작발표회에서 그렇게 말했다. 어째서 미국의 장수 시트콤인 <프렌즈>를 거론했을까 싶었지만, 이제 보니 그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병원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코미디만이 아닌 가슴 먹먹해지는 이야기들을 담고 있지만 시트콤의 이야기 구조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의대 5인방이라는 캐릭터를 주축으로 율제병원의 다양한 인물들의 이야기가 특별한 지향성을 뚜렷이 드러내기보다는 에피소드별로 나열되는 형식이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첫 회에 안정원(유연석), 2회에 채송화(전미도), 3회에 이익준(조정석)과 김준완(정경호) 그리고 4회에 양석형(김대명)의 캐릭터를 소개하는 에피소드들을 차례로 담아냈다.

 

그러면서 이들을 중심으로 하는 매력적인 주변인물들을 채워 넣는 데도 소홀하지 않았다. 러브라인은 그 관계의 주요 촉매제로 등장한다. 안정원을 짝사랑하는 장겨울(신현빈), 김준완의 고백에 ‘오늘부터 1일’을 선언한 익준의 동생 익순(곽선영), 채송화에게 좋아한다 고백하는 후배의사 안치홍(김준한), 양석형의 환자를 배려하는 모습에 반해버린 추민하(안은진) 게다가 황혼에도 우정과 애정을 넘나드는 정로사(김해숙)와 주종수(김갑수)까지 달달한 관계들이 줄줄이 이어진다.

 

러브라인을 넘어서는 우정이나 부모 자식 간의 관계, 남매애, 동료애도 빠지지 않는다. 양석형의 어머니에 대한 남다른 효심이 그렇고, 싱글대디가 된 이익준과 아들 이우주(김준)의 찐 부자애, 친구처럼 유쾌하지만 진한 애정이 느껴지는 이익준과 익순의 남매애, 채송화를 좋아했지만 그에게 고백했다 거절당한 양석형과 그 때문에 고백을 포기했던 익준의 우정 등등이 그것이다.

 

이렇게 무언가 하나의 목표를 향해가는 메인 스토리가 있다기보다는 캐릭터들이 세워지고 그들이 서로 관계를 이어가는 다양한 에피소드들이 나열되는 구조인지라, 본격 드라마를 좋아하는 시청자들에게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어딘지 무게감이 덜한 드라마로 보일 수 있다. 당연한 일이다. 목표가 있어야 극의 긴장감과 속도감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응답하라> 시리즈에서는 항상 목표가 정해져 있었다. 그것은 누가 누구의 남편이 될 것인가가 그 목표 지점이었다. 그래서 산발적인 에피소드들도 그 하나의 목표를 향해 귀결될 수 있었다. 하지만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그런 목표 지점을 세워두지 않는다. 병원 내에서의 권력을 추구하는 인물도 없고, 게다가 이들을 외적으로 위협하는 어떤 압력이나 세력도 없다. 악역이 보이지 않는다는 건 거꾸로 말하면 목표가 제시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 한 줄기의 목표 대신,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자잘한 일상에서 부딪치는 작은 갈등들과 선택들을 다룬다. 그러니 특정 시추에이션을 가져와 캐릭터들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시트콤을 닮은 느낌을 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드라마는 우리가 통상적으로 이야기하는 시트콤은 아니다. 그런 자잘한 일상 소재 속에서도 웃음만큼 감동적인 메시지들이 담긴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이 어딘지 무게감이 떨어진다 여겨지는 건 어쩌면 우리가 드라마라고 하면 하나의 메시지를 향해 달려 나가는 ‘본격 드라마’를 떠올리는 경향과 무관하지 않을 수 있다. 또 시트콤은 드라마가 아니며 심지어 본격 드라마보다 낮게 바라보는 시선과도 연결되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시트콤은 그렇게 취급받을 장르가 아니고, 드라마에도 다양한 결들이 있기 마련이다.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본격 드라마만이 진짜 드라마라는 생각에서 살짝 벗어나보면, 다소 시트콤적이고 때론 예능 프로그램을 드라마화한 것 같은(캐릭터를 세우고 매회 관계의 스토리를 보여주는) 이 드라마의 편안한 매력을 충분히 즐길 수 있다. 생각해보면 신원호 PD와 이우정 작가는 <슬기로운 의사생활>에 예능적인 접근방식을 제대로 실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응답하라> 시리즈가 그 앞선 실험들이었지만,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형식적으로도 편성적으로도 좀 더 시스템화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만일 이 작품이 드라마지만 마치 시즌제 예능 프로그램처럼 캐릭터를 공고해 세워 매 시즌마다 새로운 에피소드들을 장착해 돌아오는 그런 드라마로 서게 된다면 그건 우리네 드라마에서 색다른 지대를 여는 일이 될 것이다. 그것은 또한 너무나 어려운 편성이나 제작방식 때문에 이제는 점점 사라져가고 있는 시트콤 형식의 가치를 세워주는 일이기도 하다. 과연 이런 실험은 훗날 신원호 PD와 이우정 작가가 기획한대로 ‘슬기로운’ 선택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궁금해지는 대목이다.(사진: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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