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시청에 있어서 기분이 차지하는 것들

세상에 저렇게 불쾌한 드라마가 시청률은 왜 저리도 높을까. 어쩜 이렇게 유쾌한데도 왜 시청률은 도무지 오르지 않을까. 물론 불쾌와 유쾌란 기분의 차원이지만, 누구나 드라마를 보며 이런 의문을 품어보지 않은 분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심지어 자신의 취향이 대중들의 취향과는 다르다는 조급한 결론에 도달하는 분들도 있다. 도대체 왜 이럴까.

그 이유는 시청률에 영향을 주는 것은, 이 불쾌와 유쾌를 나누는 기분의 차원뿐만 아니라, 그 위에 시청자와의 현실적인 공감대, 그리고 드라마의 완성도 같은 기준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떤 드라마가 유쾌한데도 불구하고 시청률이 낮다는 것은 다른 측면이 부족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또 반대로 불쾌함에도 불구하고 시청률이 높다는 것은 다른 측면이 그 부족함을 채워주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유쾌한 드라마, '천하무적 이평강'
‘천하무적 이평강’이나 종영한 ‘미남이시네요’ 같은 드라마는 대표적인 유쾌한 드라마다. 경쟁작에 밀려 시청률은 낮지만, 이들 드라마들은 시종일관 그 유쾌한 시간 속으로 대중들을 인도한다. 이들 드라마들은 현실적이라기보다는 판타지에 가깝지만 특유의 긍정적인 시선으로 보는 이들을 흐뭇하게 만든다. 이들 드라마들이 코미디의 특징을 가져가는 것은 바로 이런 긍정적인 극의 분위기를 코미디라는 장르를 통해 가장 잘 풀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현실 자체가 잘 느껴지지 않는 긍정적인 분위기의 드라마는 바로 그 현실 바깥에 서 있는 듯한 위치 때문에 모든 세대의 호응을 가져가지 못하는 단점이 있다. 즉 중장년층의 시선에서 보면 이 지나친 긍정론은 그들 세대에서 생각해왔던 ‘드라마는 그래도 현실적’이라는 기대치에서 멀어지기 때문이다. 반면 이 판타지는 만화의 세례를 받고 자라난 젊은 세대들에게는 오히려 열광하는 이유가 된다. 이들 드라마들이 시청률이 낮은 것은 작금의 지상파 TV 리모콘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세대가 중장년층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 완성도 높은 드라마들이 유쾌함에도 불구하고 시청률이 낮은 것은 주시청층과의 현실적 공감대가 잘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유쾌함에 풍자가 깃든 '그대 웃어요'와 '히어로'
하지만 ‘그대 웃어요’ 같은 드라마는 상황이 다르다. 이 드라마는 코미디라는 장르적 성격을 갖고 있으며 또한 유쾌하고 훈훈한 분위기를 유지하면서도 시청률까지 사로잡고 있다. 처음 10% 초반에서 시작한 이 드라마는 현재 20%에 육박하는 시청률을 향해 가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이 드라마가 사용하는 코미디가 지극히 현실과 맞닿은 풍자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그대 웃어요’는 웃음 뒤에 빈부의 문제나 소통의 문제 같은 현 사회의 현실을 떠올리게 하는 요소들이 있다. 이 현실까지도 껴안고 있는 판타지는 중장년층에게 편안한 장르인 가족드라마 속에 녹여지면서 더 힘을 발하게 된다.

이러한 양상은 '히어로'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드라마는 코미디가 갖는 과장된 상황들이 과장된 캐릭터들을 통해 그려지지만, 그 속에는 날카로운 현실 풍자가 들어 있다. 정의와 진실이 사라진 세상에서 작지만 그것을 지켜내려는 신념을 가진 자들의 안간힘은 이들 평범한 인물들을 '히어로'라고 부르는 이유가 된다. 물론 현재 이 작품은 '아이리스'라는 대작에 밀려 낮은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지만, 이 웃음 뒤에 남는 통쾌한 현실의 전복은 보다 폭넓은 시청층을 확보할 수 있는 가능성이 된다.

유쾌함과 불쾌함을 오가는 '수상한 삼형제'
반면 ‘수상한 삼형제’는 불쾌함과 유쾌함이 왔다 갔다 하는 냉탕온탕의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어떤 부분은 지극히 희화화되어 있지만, 어떤 부분은 불쾌할 정도로 자극적이다. 민폐형 캐릭터, 김건강(안내상)과 그 가족들이 지지고 볶는 이야기는 시청자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지만, 한편으로 늘 밝음을 유지하려는 김이상(이준혁)이 그래도 형제라며 함께 모여 우애를 과시하는 장면에서는 훈훈함도 느껴진다. 바로 이 지나치게 극적으로 그려지는 현실의 불쾌함과, 그래도 때론 어떤 긍정을 보여주는 유쾌함의 반복은 이 드라마가 그 아슬아슬한 줄타기 위에서 시청률을 끌어 올리는 요소로 작용한다.

중요한 것은 불쾌함만을 이끌어내면서도 시청률이 높았던 이른바 '욕하면서 보는 드라마'가 최근 들어서는 차츰 줄어들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여전히 논란의 소지를 갖고 있는 드라마들이 포진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들 드라마들의 시청률은 과거에 비해 그다지 높은 편은 아니다. 막장의 논란을 야기하면서도 시청률이 나오지 않은 '밥줘'라는 드라마는, 이제 제 아무리 시선을 받아도, 불쾌하기만 한 드라마를 이제는 대중들이 외면하고 있다는 것을 징후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드라마를 보는 관점은 다양하다. 어떤 이들은 작품성을 위주로 보고, 어떤 이들은 그저 심심풀이로 보기도 하며, 어떤 이들은 즐겁기 위해서 보기도 한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이 지극히 기능적인 관점, 즉 드라마가 우리를 즐겁게 해주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는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지금은 어떤 드라마의 특정 인물이나 상황에 대한 대중들의 즉각적인 반응이 그 어느 때보다 민감해지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아직도 여전히 이것이 시청률과 비례하지는 않는다는 데 제작자들의 고민이 있다. 일정한 작품성도 가지면서, 현실이 갖는 불쾌함과 판타지가 갖는 유쾌함을 어떻게 잘 엮는가의 문제는, 이제 대중들의 반응이 보이지 않는 제3의 제작자로 떠오르는 시대에 드라마의 성패로 자리하고 있다.

'아이리스', 드라마와 영화사이 길을 찾다

'아이리스'의 대중적 인기는 이례적이다. HD나 대형화 되어가는 TV로 인해 안방극장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졌지만, 여전히 드라마는 영화와는 확연히 다른 장르이기 때문이다. 그간 시도되었던 일련의 블록버스터 드라마들, 예를 들면 '로비스트'나 '태양을 삼켜라' 같은 드라마들이 실패한 것은 그 때문이다. 그 실패는 영화적인 볼거리를 드라마적인 스토리가 따라가지 못한 데서 비롯됐다. 그렇다면 '아이리스'의 선택은 볼거리가 아닌 스토리였을까. 그렇지 않다. 이 드라마의 스토리는 새롭지 않다. 우리는 이 드라마 속에서 수많은 영화들과 드라마들에서 보았던 익숙한 설정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아이리스'의 대중적인 성공을 가져왔던 것일까.

'아이리스'의 성공은 장르적인 공식에 충실한 스토리와 그 스토리를 가장 효과적으로 구현해낸 연출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드라마는 그런 점에서 세련된 장르 영화에 가깝다. 이미 반복되어 하나의 형식이 굳어져 있지만, 색다른 연출을 통해 여전히 보는 이에게 쾌감을 주는 장르 영화. '태양을 삼켜라' 같은 블록버스터 드라마 역시 장르의 법칙을 따르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태양을 삼켜라'의 스토리나 연출은 영화적이라기보다는 지극히 드라마적이다. 영화 같은 장면들이 존재하지만 그것은 볼거리가 그렇다는 것이지, 영화처럼 장면이 주는 심리적인 효과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다. 스토리 또한 영화처럼 압축되어 있지 않고 상당히 느슨하게 풀어져 있다.

하지만 '아이리스'는 '태양을 삼켜라'와는 다른 방향을 선택했다. 장면 하나하나가 영화적인 볼거리를 주면서도 그 감각적인 영상이 주는 심리적 효과를 영화적인 차원에서 고민한 흔적이 보인다. 현장성을 부각하기 위해 끝없이 흔들리는 카메라나, 짧게 압축적으로 보여지는 장면들의 연결, 인물의 심리를 포착해내는 섬세한 카메라 앵글 등은 '아이리스'가 그간 보아왔던 블록버스터 드라마들의 영상과 확실히 차별되는 지점이다. 게다가 이 드라마는 스토리 또한 대단히 압축적이다. 첫 회의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벌어지는 김현준(이병헌)의 암살과 탈출의 장면들은 4회에서 반복되는데, 이 1회에서 4회 사이의 거리는 대단히 좁다. 그리고 4회에서 5회까지 이어지는 헝가리 시퀀스 역시 그 속도감은 여전하다.

이 속도감 위에 현준과 승희(김태희)가 아키타현으로 여행을 떠나서 보여준 멜로는 팽팽한 긴장감 속에 휴식처처럼 존재하는 이완감으로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이 매력적인 멜로구도는 이어지는 속도의 액션 위에 인물들이 감정을 싣게 해주는 힘이 된다. 이미 공식화된 장르적인 스토리는 오히려 이 감정과 아드레날린의 속도 위로 달려 나가는 쾌감을 방해하지 않는다. 이것은 마치 너무 복잡한 스토리의 영화보다 단순한 스토리 위에 현란한 장면들로 펼쳐지는 영화가 보다 관객을 몰입시키는 것과 같다.

이처럼 '아이리스'는 드라마라는 틀로 들어오면서 장르 영화적인 선택을 함으로써 초반부 폭발적인 몰입을 이끌어내면서 대중들의 마음 속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부터다. 드라마는 영화와는 달리, 몇 시간 내에 끝이 나는 결과물이 아니다. 따라서 속도감 넘치는 장면들이 주는 몰입감은 시간이 지나면서 둔감해지기 마련이고, 그 때는 이제 점점 새로울 것 없는 스토리가 드러나게 된다. 즉 새로운 스토리의 부재는 이제 이 몰입감을 더 이상 끌어올리지 못하는 이유로 작용한다.

게다가 초반부 이 드라마는 영화적인 연출에 몰두하면서 중요한 시퀀스 하나를 버리는 실수를 했다. 그것은 현준과 선화(김소연) 사이에 벌어지게 되는 멜로를, 압축하는 과정에서 편집해 버린 것이다. 이 드라마에서 멜로는 끝없는 긴장감 속에 이완감을 준다는 점에서 중요한데, 현준과 승희가 서로를 죽은 것으로 생각하며 갈라져 있는 시간에, 이를 대체할 수 있는 현준과 선화의 멜로가 잘 연결되지 않는 것은 실로 아쉬운 부분이다.

'아이리스'가 후반부로 가면서 점차 액션의 반복이 지루한 감을 주는 것은 여기에 얹어지는 적절한 새로운 스토리가 보이지 않는데다가, 그 속도를 어느 정도 제어해줄 수 있는 장치(이를테면 멜로나 코믹적인 인물 같은) 또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영화적 선택을 하면서 드라마적 고려를 잘 하지 못한 이 작품의 모순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드라마를 매력적으로 만드는 것은 이병헌 같은 배우들의 호연이 있기 때문이다. 반복적인 액션 속에서도 이병헌의 감정 연기는 이 복잡하고 정신없이 달려 나가는 드라마를 중장년층 여성들마저 바라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

'아이리스'는 드라마와 영화 사이에서 길을 모색하고 있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그 모색이 일정 부분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시행착오는 여전히 존재한다. 하지만 어쨌든 앞으로 매체적인 변화는 드라마와 영화 사이의 거리를 상당부분 좁혀놓을 것이 확실하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이 거두고 있는 일련의 성과들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 될 것이다.

 병풍이거나, 민폐거나 어쩌다 아버지들은?

드라마 세상이 바로 현실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현실을 어느 정도는 반영한다. 언제부턴가 드라마 속에 아버지들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은 현실에서 자꾸만 좁아져가는 아버지라는 위상을 가늠하게 한다.

아버지는 집 담보까지 집어넣었지만 결국 망한 회사 앞에서 망연자실해 하고, 그 회사를 버리고 야반도주해버린 사장 앞에서 쓰러져버린다(SBS '천만번 사랑해). 이혼하고 다른 남자에게 간 어머니를, 수선집을 하는 아버지는 "자기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어서" 보냈다며 그래도 여전히 생각이 난다고 쓸쓸하게 말한다(SBS '스타일').

이것은 전통적으로 남성 시청자들의 몫이었던 사극에서도 마찬가지다. '선덕여왕'에서 덕만(이요원)과 천명(박예진)의 아버지인 진평왕(조민기)은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하는 무능력한 왕이자 아버지다. 그는 미실(고현정)의 권력 앞에 딸을 버리고, 심지어 명백히 살해된 천명의 죽음 앞에서도 그 죽음이 사고였다고 말하는 인물이다.

아버지가 실종된 드라마 세상은 어느새 여자들의 세상이 되었다. 그 세상 속에서 남자들은 여성들의 간택을 받는 인물로 등장하거나, 향수어린 과거의 가치에서 허우적대는 인물로 그려진다. '꽃보다 남자' 이후 하나의 트렌드가 되어버린 '내조의 여왕', '아가씨를 부탁해' 같은 드라마 속에서 남자들은 하나 같이 부자에 꽃미남으로 등장하지만, 그것은 대부분 여성들의 취향이 반영된 것이다.

한편 남자의 세상을 그리고 있는 '드림'이나 '태양을 삼켜라', 그리고 종영한 '친구' 같은 작품 속에서 거친 남자는 지금 시대와는 아무런 공감을 일으키지 않는 향수로 그려진다. 그들은 여전히 성공에 목말라 하고 있고, 그 성공을 위해 사투를 벌인다. 미래의 성공보다 현재의 행복을 추구하는 작금의 가치관에서 보면, 그들의 사투는 안쓰럽게만 보일 뿐이다. 도대체 왜 그들이 그렇게 아등바등 살아가는지 잘 공감이 가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다.

젊은 남자들조차 여성의 대상이 되거나, 과거의 향수 속으로 숨고 있는 이 상황 속에서, 이제는 나이 들어 고개 숙인 아버지라는 존재는 더더욱 자리할 곳이 없어졌다. 아버지는 드라마 세상 속에서 병풍으로 존재하거나, 혹은 젊은이들의 민폐로서 기능한다. 드라마는 본질적으로 그 시대의 감정이입할 대상을 나이와 성별을 넘어 포진시키는 경향이 있다. 아버지의 실종과 그 실종된 아버지에 대한 무관심은, 현실의 아버지들이 서 있는 위치를 가늠하게 한다.

이제는 한발 물러나 가족들 틈에서도 늘 뒷전에 앉아계시는 아버지들은, 그나마 소일거리로 찾아보는 드라마 속에서조차 감정이입할 대상을 찾기 어려운 상황이다. 시대는 달라졌고, 남성성보다는 여성성의 사회로 변모하고 있다. 그 달라진 사회를 반영하는 드라마가 과거 억압되었던 여성들을 살려내고, 마초적이기만 하던 남성들을 여성성 가득한 남성들로 그려내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고 바람직한 일이다. 하지만 과거의 세계에 던져놓거나, 현실의 패배자로서만 그려지는 아버지의 존재는 문제가 있다. 지금 시대에 맞는 아버지 상은 도대체 없는 것일까.

볼거리만 있고 스토리는 없는 '태삼'의 문제

'태양을 삼켜라'는 애초에 기대만큼 불안감도 컸던 드라마다. 그리고 그 기대와 불안감은 같은 한 가지 이유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대작, 이른바 블록버스터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블록버스터가 기대만큼 불안감이 큰 이유는 그것이 볼거리에 지나치게 치우칠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볼거리가 왜 위험성을 내포할까. 그것은 드라마라는 장르와, 그 드라마가 방영되는 TV라는 매체를 이해한다면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드라마는 영화처럼 볼거리가 주는 영상체험보다는 스토리에 더 치중되는 장르다. 우리가 과거 연속극이라고 불렀던 것처럼 드라마는 그 끊임없이 찾아보게 만드는 스토리의 연결고리가 그만큼 중요하다. 끊임없이 다음 이야기를 기대하게 만들고, 캐릭터의 내면에 집중시키는 것은 따라서 드라마가 가진 책무이자 가장 큰 재미요소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영화와 비교해 상대적으로 볼거리가 드라마에 만들어주는 힘은 그다지 크지 않다. TV라는 매체 자체가 집중보다는 분산을 특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겉으로 보여지는 영상만으로는 영화만큼의 몰입도를 가져오기가 어렵다. 폐쇄된 공간에 불이 꺼진 채 대형 화면과 실감 음향을 통해 온 몸으로 전해지는 극장의 볼거리는 같은 영상이라고 해도 TV의 그것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니 드라마의 몰입을 만들어주는 것은 볼거리가 아니라 스토리(그 속의 캐릭터들)가 만들어내는 감정이입으로서의 몰입이다.

물론 스토리도 충분히 감정이입할 수 있을 만큼 매력적이면서 볼거리까지 있다면 그보다 좋을 수는 없다. 하지만 이것은 경제적인 선택은 아닐 수 있다. 차라리 볼거리는 조금 차치하고라도 일단 스토리가 탄탄해 보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 더 경제적인 방법이다. '찬란한 유산'은 특별한 볼거리는 없었지만, 스토리가 매번 시청자들의 눈을 홀리게 만들었다. 결과는 47%라는 경이적인 시청률로 나타났다.

'선덕여왕'은 대작으로서 볼거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나치게 볼거리에 치중하지는 않는 영리함을 보이고 있다. 백제와의 전쟁 신에서는 훌륭한 볼거리를 보여주었지만, 그 외에는 캐릭터들이 만들어가는 스토리에 집중하고 있다. 시청자들은 왜 전쟁 같은 스펙타클이 또 안 나오냐고 불평하기보다는, 덕만(이요원)이 자신의 존재를 알아가는 그 스토리나 비담(김남길)처럼 스토리성을 그 안에 갖고 있는 캐릭터의 등장이 주는 몰입감에 열광하고 있다. 결과는 시청률 30%를 넘어 40%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중이다.

반면 '태양을 삼켜라'는 수목드라마들이 모두 주춤하는 사이에 시청률 1위를 여전히 기록하고는 있지만 대작이라는 점을 감안해보면 그 1위는 오히려 부끄러운 수준이다. 이유는 자명하다. 스토리가 눈에 띄도록 매력적이지가 않기 때문이다. 간단한 예를 들어서 이 드라마는 초반부에 반드시 살아나야 하는, 주인공을 움직이는 강력한 동기마저 잘 부여하지 않았다. 이것은 거의 기초적인 것이다.

주인공 김정우(지성)의 탄생배경을 보여준 초반 1,2부의 스토리는, 말 그대로 현란함의 극치였다. 하지만 그 초반 스토리를 장악했던 정우의 아버지 일환(진구)의 모험담은, 다만 정우와 혈연적 관계를 말해줄 뿐, 스토리로는 아무런 연결고리를 보여주지 못한다. 즉 주인공 정우가 앞으로 가야할 길이나 목적, 욕망과는 상관없는 드라마의 볼거리만을 나열한 셈이다.

이것은 그나마 드라마 초반에 있어서 시청자들의 시선을 잡아끌기 위한 방법적인 선택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어떨까. 정우는 일환과의 연결고리 없이 그저 가난하고 거친 삶을 살았다는 뉘앙스로 불쑥 등장하고, 갑작스레 장민호 회장(전광렬)의 휘하로 들어간다. 정우가 그렇게 행동한 이유는?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성공에 대한 욕망 같은 상투적인 이유에 불과하다.

수현(성유리)이 갑자기 서커스 공연을 기획한다고 라스베이거스로 가는 것과 정우와 그 친구들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아프리카에서 망명한 갑부의 경호팀으로 역시 라스베이거스로 가는 것은 그 둘은 라스베이거스라는 공간에서 만나게 하겠다는 의지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설정 자체가 지나치게 무리한 감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이 드라마의 애초 기획의도에 들어가 있는 해외로케의 정당성마저 찾아내기가 어려워진다. 그 곳에서 잭슨리(유오성)가 도박을 하고 동시에 교차편집되어 보여지는 그의 여자가 선정적인 스트립쇼를 하는 장면은 도박과 섹스를 연결한 자극을 보여주지만, 스토리의 맥락과는 역시 떨어져 있다.

스토리가 잘 구축되지 않는 볼거리란 때론. 캐릭터가 스토리를 만들어가는 게 아니라 볼거리를 위해 캐릭터가 움직이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다. 맥락 없이 돌아가는 라스베이거스의 풍광들이나, 비키니 입은 여인들, 그리고 가끔씩 등장하는 폭력적인 장면들은 자극적이기는 하지만 캐릭터의 심리와 깊게 와 닿지 않을 때, 그저 지나치는 파편적인 영상으로 전락한다. 계속 반복적으로 이미지가 삽입되는 '태양의 서커스'는 물론 볼거리로서는 압도적일지 몰라도, 왜 그게 그렇게 등장하는지 드라마는 잘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이런 경우, 캐릭터는 당연히 살아나기가 어렵다. 모든 행동이 맥락을 찾지 못하는 캐릭터에 어떻게 시청자가 감정이입을 할 수 있을까. 엄청난 물량이 투입되는 미국 드라마에서도 볼거리는 스토리보다 중요하지 않다. 치밀한 스토리가 있고 그 위에 볼거리는 덧씌워질 뿐이다. 블록버스터 드라마를 지향했던 '로비스트'가 스토리는 없이 볼거리만 나열하고 추락했던 것처럼, '태양을 삼켜라' 역시 마찬가지 길을 가고 있다. 볼거리는 나쁜 것이 아니지만, 볼거리에만 치중하고 스토리에 소홀하게 되면 상황은 나빠질 수밖에 없다. 볼거리가 드라마를 잡아먹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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