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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웃거나 분노하거나

요즘 시청자들의 욕구는 두 가지인 것 같다. 그것은 ‘웃고싶거나, 분노하고싶다는 것’. 멜로드라마의 퇴조는 바로 그 정조가 지금의 세태와 잘 맞지 않는다는 반증이다. 완성도를 떠나서 그 주인공이 질질 짜는 영상 자체에 시청자들은 그다지 공감하지 않는 것 같다. 그것은 실제 현실에서 ‘눈물의 가치’가 과거에 비해 현저하게 평가절하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쿨(Cool)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눈물은 혼자 숨겨야할 어떤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TV 속에서 ‘눈물 흘리는 자’보다는 ‘힘겨워도 웃고 있는 자’를 더 리얼하게 생각한다. 그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각박해져만 가는 현실 속에서 매달 은행이자에 생활비에 아이들 학원비에 시달리고, 회사에서 구조조정의 칼날을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오로지 입시를 위해 공부기계처럼 살아가고, 그렇게 들어간 대학에서조차 취업하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멜로드라마가 보여주는 ‘사랑의 좌절로 인한 눈물’은 그다지 리얼한 공감을 일으키기가 어렵다. 그래서 그들은 차라리 이런 눈물보다는 ‘잠깐 동안의 도피’를 꿈꾼다. 케쎄라 쎄라. 눈물은 내일로 미루고 당장은 웃고 싶은 것이다.

웃고싶다, 생각하지 않고
공개개그 프로그램의 전성시대는 바로 이런 현실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공개개그가 지향하는 호흡이 그다지 길지 않은 몇 분, 몇 초라는 것은, ‘잠시 생각은 접어두고 웃고싶은’ 시청자들의 입맛에 잘 맞아떨어진다. 게다가 이 촌천살인의 개그 속에는 현실에서 억압된 감정을 순간적으로 터뜨리는 폭발력이 있다. 마빡이의 단순한 동작 속에는 복잡한 현실을 무화시키는 강력한 웃음폭탄이 내재되어 있고, 죄민수의 막가파식 개그 속에는 사회와 권위의 억압을 해체하는 묘한 힘이 있다.

한편 이 마빡이나 죄민수 같은 소외되고 비천한 인물들은, 웃음을 찾는 시청자들 자신의 처지를 동일시시키기에 딱 알맞은 캐릭터들이다.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무한도전’의 힘은 바로 그런 캐릭터들에서 나온다. ‘리얼 버라이어티 개그’를 지향하고 있지만 ‘무한도전’이 주는 웃음의 원천은 연출되지 않은 리얼한 상황에 있다기보다는, 그 상황 속에 있는 캐릭터들의 힘에 있다. 소심하고 비굴하면서도 정이 가는 유재석, 호통을 치지만 어딘지 연민이 느껴지는 박명수, 쉴 새없이 떠들어대지만 순수함이 느껴지는 노홍철, 덩치만 큰 곰 같은 우직함의 정준하, 장난기 많은 막내 같은 하하, 방송에 적응 못한 듯해 연민을 일으키는 정형돈. 이 소외된 캐릭터들이 엮어 가는 실제상황이라서 공감이 가는 것이다.

분노하고 싶다, 거침없이
하지만 이 웃음은 그냥 웃음이 아니다. 웃는 게 웃는 게 아니란 말이다. 개그의 두 가지 웃음 촉발인자는 이제 ‘굴욕과 풍자’가 되었다. 굴욕이 자신을 한없이 무너뜨리는 데서 웃음을 만든다면, 풍자는 상대방을 조롱하고 깎아 내리는 데서 웃음을 촉발한다. 그런데 이 두 가지는 나타난 양태가 다를 뿐, 그 근본 유발인자는 한 가지에서 나온다. 바로 ‘분노’이다. 굴욕이 타인이 아닌 내 자신에게 분노를 폭발시키는 것(자학)이라면, 풍자는 바로 그 타인에게 분노를 폭발시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그 분노를 마빡이는 자기 자신에게, 죄민수는 타인에게 터트리는 형태로 웃음을 유발시킨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이 풍자가 개그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요인이다. ‘형님뉴스’는 “∼가 ∼다워야 ∼지’하는 유행어를 흩뿌리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가 ∼답지 않은” 세태를 꼬집는 말이다. 죄민수의 “아무 이유 없어!”, “이 MC계의 쓰레기!”같은 말 역시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는 권위에 대한 조롱이 아닐 수 없다. 우아한 자태의 사모님이 하는 일련의 ‘무뇌형 발언’은 ‘돈은 많으나 생각은 없는’ ‘노블리스 오블리제 제로’의 졸부들을 비꼬는 말들이다. 웃음 속에는 이다지도 많은 분노의 칼날들이 숨어 있다. 그 칼이 정확히 시청자들의 가슴에 꽂히는 순간, 카타르시스와 함께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이다.

TV, 웃거나 분노하거나
이것은 단지 개그 프로그램의 얘기만이 아니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멜로드라마가 어려운 것은 바로 눈물이 이 사회에서 리얼한 해결방식이 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오히려 그것보다는 이제 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된 ‘웃음과 분노’가 하나의 쿨한 해결방식으로 자리잡는다. 그래서 멜로드라마가 손잡은 것은 코미디다. 따라서 작년에 코믹한 설정으로 호평을 얻었던 ‘돌아와요 순애씨’의 연장선 위에 ‘달자의 봄’이 있는 것이고, ‘환상의 커플’에 대한 열렬한 애정이 여전한 것이다. 일일드라마에 도전장을 내민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의 성공은 바로 이 웃음 코드를 공감 가고 리얼한 캐릭터들을 통해 잘 살린 데 있다. 눈물에 각박해진 시대에 드라마들은 웃어야 성공한다. 늘 웃을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질질 짜지는 않아야 된다.

반면, 분노를 부추기는 드라마, 혹은 프로그램들이 TV의 또 한 축을 차지한다. 자극과 선정성을 무기로 들고 나오는 ‘논란드라마들’은 그 가장 강력한 무기로 ‘분노’를 사용한다. 폭력에 가까운 말들과 장면들이 오가는 화면을 보면서 시청자들은 일종의 전이된 카타르시스를 경험하는 것 같다. 또한 사회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명분으로 지나치게 자극적인 장면들을 포착하는 사회고발프로그램들의 영상 또한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해결이 가진 문제점은 중독이다. 자극을 통한 문제의 해결은 더 큰 자극을 필요로 한다.

살기 어려운 시기에 웃음이 그 어려움을 위무해주는 코드로 나타난다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자칫 분노로 일관되는 감정의 형태를 웃음이라는 긍정적인 형태로 변환시켜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쉽게 느껴지는 것은 점점 떨어져만 가는 ‘눈물의 가치’이다. 삶에 있어서 웃음만큼 중요한 것이 ‘건강한 눈물’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단순한 최루성이나 구태의연한 설정으로 유발되는 눈물이 아닌, 이 시대의 감성코드와 공감할 수 있는 눈물이 어느 때보다 기다려지는 이유다.

Posted by 더키앙

토크쇼에서도 호흡 척척 맞는 마빡이와 갈빡이

‘상상플러스’에 출연한 마빡이 정종철과 갈갈이 박준형. 무를 갈고 이마를 때리는 몸 개그의 시조이자 달인인 이들은 무대가 아닌 토크쇼에서 개그맨의 진면목을 보여주었다. 옥동자에서 마빡이로 한없이 망가지며 시청자들을 즐겁게 해주었던 정종철. 그리고 갈갈이에서부터 시작해 현재의 갈빡이까지 수많은 캐릭터로 웃음을 주었던 박준형. 그러나 인생 자체도 웃음이 떠나지 않을 것 같은 이들이 입을 연 것은 자신들의 실패담이었다.

“차마 스스로는 얘기하기 그럴 것”이라며 대신 박준형이 말해준 정종철의 외모에 얽힌 수난과 성공은 그것 자체가 개그맨의 존재를 말해준다. 외모 때문에 초등시절에는 짝에게, 중등시절에는 교회의 누나에게 수모를 겪고 심지어는 음식점에서도 외모 때문에 채용되지 않았던 사연을 공개했다. 결국 주방에서만 일한다는 조건으로 채용된 냉면집에서, 주방장이 되는 이야기는 악조건을 웃음으로 한 바탕 뒤집는 정종철의 타고난 개그맨 기질을 말해주었다.

이어진 박준형의 이야기는 8번 개그맨 시험에서 떨어진 사연. 모기 먹는 들쥐를 준비해간 박준형 앞에는 수달을 해버린 심현섭이 있었고, 수다맨 강성범의 수다를 이길 방법이 없었다고 박준형은 토로했다. 그러면서 그는 정종철이 단 한 번에 시험을 통과한 것이 억울하다며 “그 시험을 볼 때 정종철이 문 열고 들어오자 심사위원들이 웃었다”는 사연을 털어놓기도 했다. 외모 이야기에서 눈물을 글썽이기까지 한 정종철과 그런 정종철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개그로 풀어낸 박준형은 그들의 개그가 저 힘겨운 눈물과 노력에서부터 비롯된다는 걸 보여준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이 둘이 보여준 환상의 호흡. 토크쇼에서 흔히 그러하듯이 주로 자신의 이야기를 저 혼자 떠들고 듣는 것이 아니라, 마치 무대개그처럼 호흡을 맞춰 얘기했다는 것이다. ‘갈갈이 패밀리와 드라큐라’의 남기남 감독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는 마치 입을 맞춘 것처럼 척척 대화로 이야기를 재연해 보였다. 박준형의 상황 제시에 반사적으로 정종철의 성대모사를 통한 완벽재연이 척척 맞아떨어진 것. 왠만한 호흡이 아니면 맞추기 어려운 걸 마치 입에 붙은 것처럼 해나가는 이들에게서 무대개그에서 비롯된 팀워크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방학특집으로 기획된 이 날 ‘세대공감 읽기’게임에 들어가서도 이런 호흡은 여전했다. 초등학교 교과서에 게재된 시를 정확한 발음에 따라 끝까지 먼저 읽는 이가 이기는 이 게임에서 정종철이 한 구절 한 구절 읽어나갈 때마다, 마치 버릇처럼 나오는 박준형의 “좋아, 좋아”하는 추임새는 이들 개그맨들이 최고 위치에 오르게 된 이유를 설명하기에 충분했다. 정종철은 박준형 특유의 너스레가 만들어놓는 상황 속에서 무한히 자신의 기량을 만끽하고, 박준형은 끊임없이 거기에 힘을 실어주는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완벽한 호흡은 또한 무대개그가 갖는 어려운 현실을 반증하는 결과다. 칼날 같은 무대 위에서 혼자 서기보다는 함께 서로를 북돋으며 세우는 것은 어쩌면 개그맨이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인지도 모른다. “처음 마빡이를 할 때 2회 째가 더 부담이었다. 그것은 이 코너가 단명할 거라는 예상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때 준형이 형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렇게 말하는 정종철의 눈이 축축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 아닐까.

마빡이와 갈빡이의 꿈은 어린이들을 위한 영화를 만드는 회사를 차리는 것. ‘옥동캅’을 준비하다가 ‘마빡이’가 뜨는 바람에 ‘마빡캅’을 생각하고 있다는 이들에게서 그 꿈이 멀지 많은 않게 느껴지는 건, 어려움을 오히려 장점으로 바꾸는 개그맨 특유의 기질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모쪼록 꿈이 이루어져 웃음에도 철학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었으면 하는 기대가 크다.

Posted by 더키앙

공개개그삼국지, 마빡이, ‘왕의 남자’

‘왕의 남자’의 장생과 공길이 가진 것이라고는 멀쩡한 사지와 세 치 혀였다. 그들이 생존할 수 있는 길은 사람들에게 그 몸을 놀려 즐거움을 주고, 세 치 혀를 놀려 웃기는 일이었다. 이 시대의 개그맨들은 장생과 공길이 그랬던 것 같은 다양한 기예와 놀라운 순발력을 가져야만 살아남는다. 그들이 저 살 판과 죽을 판을 가르는 줄 위에서 한 판 걸판지게 놀았다면, 이 시대 개그맨들은 공개무대라는 칼날 위에서 편집과 벌이는 ‘몇 분 간의 승부’를 벌인다.

공개개그삼국지
KBS ‘개그콘서트’에 이어, SBS의 ‘웃음을 찾는 사람들’ 그리고 MBC의 ‘개그야’가 등장하면서 국내 개그 프로그램들은 안정적인 ‘공개개그삼국지’의 형세로 들어간다. 그 바탕은 저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재인들이 웃지 않는 왕(시청자들)을 웃기기 위해 왕의 마당에서 벌이는 연희처럼, 끝없는 경쟁과 아이디어의 결과였다. 이른바 ‘개그의 인해전술’을 방불케 하는 이 시스템 속에서 당연히 시청률은 상승했다. 동시에 이루어진 것은 개그맨의 단명. 캐릭터라는 탈을 만들어야 하는 개그맨들에게 있어 그 탈의 유통기간이 줄어들었다는 건,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결과적으로 어느 정도 뜬 개그맨들은 하나둘 그 아이디어 전쟁에서 밀려나 새로운 분야(방송진행, 드라마, 영화, 연극, 뮤지컬 등)로 떠날 수밖에 없다. 이들 공개 개그 프로그램들의 성공은 어찌 보면 개그맨들의 살을 깎는 경쟁과 대전을 통해 이룬 것이다. 어쨌거나 장생과 공길처럼 ‘라스트 맨 스탠딩’의 마지막 생존자가 된 사람에게는 갈채가 집중된다. 대중이라는 지엄한 왕 앞에서 개그맨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 정점에 있는 인물이 바로 마빡이다.

마빡이가 말해주는 개그현실
요즘의 개그가 점점 기예의 모습을 띈다는 점에서 그것은 저 조선시대 남사당패들의 연희를 닮아가고 있다. 다른 사람들을 웃기기 위해서는 죽음을 불사하는 죽을 판에도 뛰어드는 것이다. 개그 무대 위에서는 시선을 잡아끌기 위해 무인들처럼 몸을 날리는 액션은 물론이고, 온 몸에 물을 끼얹고 크림에 범벅을 하며, 바닥에 떨어진 것을 주워먹기도 한다. 마빡이는 가장 단순하게 현재 개그의 본질을 보여주었다.

‘마빡이’는 그 설정이 단순하여 마치 개그맨들을 위한 퍼포먼스를 보는 듯하다. 특별한 스토리도 없이 그저 몇몇 개그맨들이 차례로 무대에 나와 이마를 치는 동작을 반복하는 것. 하지만 이 단순함이 가진 웃음의 파괴력은 크다. 그 공감의 기저에는 복잡다단한 우리네 삶에 대한 어려움을 단순화시키는 명쾌함이 자리잡고 있으며, 자학적 동작이 가진 우스꽝스런 모습을 통해 자신이 겪고 있던 힘겨움을 웃음으로 털어 버리게 하는 힘이 있다. 줄 위라는 죽을 수도 있는 현실의 무거움 위에 올라선 장생과 공길이(현대인들) 오히려 그 줄의 탄성을 이용해 하늘로 치고 오르는 것. 마빡이는 개그맨의 현실을 오히려 이용해 몸으로 보여줌으로써 공감을 얻고 있었다.

무대개그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시도들
아무리 그 정점에 오른 장생과 공길이라 하더라도, 결국 연희가 끝나면 무대 밑으로 내려와야 하는 것. 이것이 무대개그가 가진 한계이다. 몇 분 간의 승부가 끝나면 그 힘으로 한 주를 이어가고, 이것이 반복되다가 결국에는 쉬 사라져버리는 것 말이다. 따라서 무대 밖으로 개그를 옮기려는 시도가 일어난다. ‘웃음충전소’는 스튜디오와 현장을 오가며 그 간극에서 벌어지는 웃음을 잡아낸다. 패러디에 기반한 이 프로그램은 일상을 패러디하고(막무가내중창단), 전원드라마를 패러디하며(지친다 지쳐), 고발프로그램을 패러디하고(진실이 알고싶다), 오락프로그램을 패러디한다(계층공감 올드&형님).

하지만 여전히 무대개그의 경쟁형식에 시청자들은 익숙한 것 같다. 웃음충전소의 간판이라 할 수 있는 ‘타짱’은 영화 ‘타짜’의 형식을 빌어 몸 개그 대전을 벌이는 코너로 기반은 바로 이 대결구도에 있다. 또한 그 대전 형식의 밑바탕에는 여전히 마빡이의 유령이 떠다닌다. ‘웃기면 이기고 웃으면 진다’는 이 개그맨의 숙명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것이다. 인터넷에서 검색순위 1위를 꼽는 ‘타짱’이지만, 실제 ‘웃음충전소’의 시청률이 많이 오르지 않는 것은 역시나 무대개그의 경쟁형식에 익숙한 시청자들의 골라보기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장생과 공길’이 저 몸뚱어리 하나로 왕의 눈과 귀를 먹게 했듯이 우리네 개그맨들 역시 올 한해 열심히 몸을 놀려 시청자들을 즐겁게 했다. 몸 개그가 대세인 세상, 어찌 그 몸짓이 슬프지 않을까. 각종 시상식에서 그제야 눈물을 흘리는 개그맨들을 보면서 그들의 슬픈 몸짓이 그렇게도 아름다운 것이었던가를 새삼 깨닫게 된다.

Posted by 더키앙

개그 삼국지 정착이 가져온 개그맨의 어려움

‘개그 콘서트’의 간판 프로그램, ‘마빡이’는 그 설정이 단순하다. 그저 몇몇 개그맨들이 차례로 무대에 나와 이마를 치는 동작을 반복하는 것이다. 특별한 스토리도 없다. 있는 스토리라고는 고작 ‘그 이마를 치는 동작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가’에 대한 항변 정도다. 하지만 이 단순함이 가진 웃음의 파괴력은 크다. 그 공감의 기저에는 복잡다단한 우리네 삶에 대한 어려움을 단순화시키는 명쾌함이 자리잡고 있으며, 자학적 동작이 가진 우스꽝스런 모습을 통해 자신이 겪고 있던 힘겨움을 웃음으로 털어 버리게 하는 힘이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러한 현실에 공감을 느낄 이들이 있다. 바로 개그맨 자신들이다.

정착 단계에 들어간 공개 개그 프로그램
‘개그콘서트’로 촉발된 국내 개그 프로그램들의 변화는 이제 방송 3사가 모두 같은 색깔의 옷을 입음으로써 그 형식이 이 시대의 대세임을 증명했다. , 스탠딩 개그, 무한정 투입되는 아이디어, 새로운 얼굴들, 끊임없는 경쟁체제... 이 파고를 넘어 이제 이러한 형식의 개그 프로그램은 정착단계에 들어선 것 같다. KBS ‘개그콘서트’에 도전장을 내밀며 등장한 SBS의 ‘웃음을 찾는 사람들’이 양대 산맥으로 가르던 개그전쟁에 뒤늦게 제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MBC의 ‘개그야’가 등장해 ‘개그 삼국지’의 안정적인 형세를 이루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들 공개 방송류의 개그 프로그램들의 끝없는 경쟁와 아이디어 산출이 가져온 것은 시청률 상승과 함께, 개그맨의 단명이다. 이런 류의 프로그램들은 한 마디로 엄청난 개그의 인해전술을 방불케 한다. 양이 많아지면 그만큼 주의력은 흩어지게 마련. 결과적으로 어느 정도 뜬 개그맨들은 하나둘 그 아이디어 전쟁에서 밀려나 새로운 분야(방송진행, 드라마, 영화, 연극, 뮤지컬 등을 보라!)로 떠날 수밖에 없다. 이들 공개 개그 프로그램들의 성공은 어찌 보면 개그맨들의 살을 깎는 경쟁과 대전을 통해 이룬 것이다.

짧은 개그만큼 짧아지는 개그맨의 수명
‘개그 삼국지’가 전성기를 맞은 것은 이제 공개 개그 프로그램이 하나의 시스템을 온전히 갖추었다는 걸 의미한다. 그 시스템은 우리가 벗어나려 해도 벗어나기 힘든 이 사회의 경쟁 시스템과 유사하다. 제작자들에 의해 걸러진 개그가 바로 TV에 담기던 과거 가족 경영식의 개그시대는 지났다. 한번 방송사에 소속되면 평생직장이 보장되던 요순시절은 갔다. 이제 그들은 밀폐된 세트를 빠져나와 무대 위에 올려지고 그 즉시 관객들에게 판정을 받는다. 좋은 반응을 얻지 못하면 그들은 자동 퇴출 된다. 편집에 의해 TV에 담기지 조차 못하는 것이다. 개그는 독해졌고 처절해졌다. 짧은 시간 내에 관객을 사로잡아야 하는 그들의 개그는 분명 촌철살인의 번뜩임과 아이디어로 충만한 것이 사실이었지만, 그만큼 웃음의 파장은 짧아졌다. 그들은 그 짧은 웃음을 위해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만 되는 상황에 직면했다.

이러한 경쟁 시스템 속에서 부속화된 개그맨들은 스스로를 처절한 개그전쟁 속으로 몰아넣었다. 편집에서 살아남기 위해 개그맨들은 스스로를 한없이 무너뜨렸다. 갈갈이는 무를 갈았고, 옥동자는 바보짓을 했으며, 세바스찬은 바닥에 떨어진 음식을 주워먹었다. 그렇게 생존하려 했지만 지금 그들의 형편이 나아졌을까. 여전히 갈갈이는 괴상한 복장의 옷을 입고 나와 스스로를 무너뜨리고, 옥동자는 마빡이로 등장해 시종일관 자신의 이마를 때리며, 세바스찬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그 전쟁 속에서 처절하게 생존하거나 퇴출 되는 것이 그들의 운명이다.

시스템 밖으로 나온 개그맨들은 나을까
이러한 시스템에서 벗어난 개그맨들은 버라이어티쇼, 토크쇼 같은 예능프로그램으로 편입되었다. 몇몇 개그맨들은 그 프로그램의 MC로서 자리잡았으나 게스트도 아니고 MC도 아닌 장기출연자들(그들은 그렇게 고정되어 있지 않기에 고정출연자란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의 상황은 저 시스템 속의 그것과 별반 다를 게 없다. 프리랜서의 어려움은 그것이 안정적이지 않으며, 자칫 소속 밖에서 섭외가 안 들어오는 고립의 위험성이 존재한다는 데 있다.

또한 이들 버라이어티쇼나 토크쇼 자체가 가진 ‘출연자 중심의 방송’ 특성상 개그맨들은 자신들의 입지를 넓히기가 쉽지 않다. 그들이 부여받은 임무는 출연자를 띄워주면서 쇼를 재밌게 만들라는 것이다. 이 상황은 ‘무너지기 개그’의 기본 전제를 깔아준다. 초기 상상플러스 고정출연자들의 ‘바보놀음(?)’이나, 각종 짝짓기 프로그램에서 개그맨들의 무너지기 설정은 바로 거기서 비롯된다. 유재석의 성공은 바로 스스로를 낮추고 상대방을 높이는 프로그램의 특성과 자신의 개그스타일이 잘 맞아떨어진 결과이다. 이것은 진화에 진화를 거쳐 ‘무한도전’까지 오게 되는데 이 상황이 되면 이제는 시청자와 출연자 사이의 암묵적인 동의 하에 ‘누가 더 심하게 무너지며, 심지어 굴욕을 느끼는가’의 재미를 추구한다.

이렇게 점점 제 살을 깎아야 타인을 웃길 수 있는 상황에 몰리는 개그맨들에게, 그들 보다 더 웃기는 가수, 영화배우, 탤런트들의 출연은 심지어 위기의식까지 느끼게 만든다. 쇼 프로그램의 특성이 그들 출연자에게 맞춰져 있다는 점에서 개그맨들은 스스로의 입지를 좁혀 가는 작업을 하고 있는 셈이 된다. 이 좁혀진 입지 속에서 저 시스템 밖으로 나와 쇼 프로그램에 편입된 개그맨들은 똑같은 시스템에 직면한다. 자신에게 오는 짧은 순간 순간의 촌철살인의 순발력이 없다면 역시 마찬가지의 편집이란 칼에 난자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차마 쳐다보기 민망한 처절함
가끔 예능프로그램을 보면서 너무나 보기가 껄끄러워 고개를 돌리곤 하는 것은 그 처절함을 순간 느끼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개그맨들은 슬프다. 무너지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나, 그것이 여러 갈래길 중 하나가 아닌 오직 한 가지 길일 때 비극이 발생한다. ‘개그콘서트’와 ‘웃음을 찾는 사람들’ 그리고 ‘개그야’의 정착은 프로그램 제작자나 방송사의 입장에서는 환영할 일이나, 개그맨들에게 더 많은 어려움을 예고한다. 개그 코너와 개그 프로그램은 남아도 개그맨은 남지 않는 시스템 속에서, 그들의 입지는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다. 시스템이 강화되면 개인들의 자유는 줄어들 수밖에 없듯이 말이다.

도저히 웃음이 나오지 않는 부조리한 사회 속에서 웃음을 만들어내는 개그맨들은 그 어느 정치인들보다, 경제인들보다, 의사보다, 더 존경받을 만하다(물론 가끔 개그맨들을 능가하는 정치인들이 나오기도 하지만). 마빡이의 고단함이 마치 개그맨들을 위한 퍼포먼스처럼 느껴지는 요즘의 개그계에, 그네들의 건전한 살판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 처절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은 개그맨들을 안정적으로 포용할 수 있는 새로운 시스템이 요구된다. 그것은 또한 신인 개그맨의 발굴보다 이미 발굴된 개그맨의 보다 효과적인 활용이 경제적이라는 측면에서도 방송사에 결국 유리한 길이 될 것이다.

Posted by 더키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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