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장’과 ‘국민’이라는 용어, 남용되고 있다

막장. ‘갱도의 막다른 끝’. 흔히 ‘갈 데까지 갔다’는 뜻으로 사용되는 말이다. 최근 드라마들이 불륜과 자극적인 설정과 식상할 정도로 반복되는 스토리를 반복하면서, 이 말은 그런 드라마들을 지칭하는 접두어가 되어버렸다. 이 ‘갈 데까지 간’ 드라마에 대한 반발심이 ‘막장’이라는 극단적인 표현을 불러온 것이다.

현재 ‘막장’이라는 용어는 실로 전염병처럼 창궐하고 있다. 오히려 ‘막장’ 아닌 것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다. 일찌감치 막장의 전염병을 터뜨리고 화려한 시청률로 사라진 ‘너는 내 운명’을 비롯해, 현재 그 스피디한 전개로 실험성까지 바라보게 되는 ‘아내의 유혹’이 그 대표주자. 이제 이 전염병은 일일드라마나 가족드라마에 머물지 않고 ‘에덴의 동쪽’이나 ‘꽃보다 남자’같은 미니시리즈 같은 프라임 타임까지 퍼져나가고 있다.

문제는 마구 사용되는 ‘막장’이란 용어의 남용이다. 자극적인 설정과 개연성 없는 스토리를 지적하는 ‘막장’이라는 극단적 표현은 지나치게 남용되다 보니 이제는 오히려 시청자들을 ‘막장’에 익숙해지게 만들고 있다. 게다가 일부 세대가 극단적으로 욕하지만 여전히 그 수요층(그것도 강력한 충성도를 가진)이 존재하는 이들 드라마들의 상업성은, 익숙해진 막장을 더욱 양산할 가능성이 있다. 이제 막장드라마는 그 본질인 조악함을 그 상업적으로 변모한 용어 아래 숨기게 되었다는 말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막장’이라는 용어는 또 다른 차원으로 남용되던 ‘국민’이라는 용어와 만나 웃지 못할 상황을 만들어낸다. 막장드라마가 국민드라마로도 불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시청률 때문이다. 어느 순간에서부턴가 국민드라마라는 호칭은 질적인 판단이 아니라 양적인 판단(시청률)에 의해 불려지기 시작했고, 막장드라마가 그 시청률에 도달하게 되자 ‘국민’과 ‘막장’이 동거하게 되었다. ‘아내의 유혹’에 혹자는 이렇게 이름 붙였다. ‘국민막장드라마.’

‘국민’이라는 질적인 판단으로 불려져야할 용어가 어느 순간부터 양적인 판단으로 그 의미를 남용하게 되면서 그것이 양적인 팽창(시청률 확보)을 목적으로 수행하는 ‘막장’이라는 단어와 만나고, 그렇게 되자 ‘국민’과 ‘막장’이라는 본래는 먼 거리에 떨어져 있어야할 용어가 아주 가깝게 다가와 하나로 붙어버린 것이다. 이렇게 되자 ‘막장’이라는 용어는 이제 그 부정적인 질을 질타하는 용어에서 양적인 성공을 상찬하는 용어로 변질되고 있다.

‘국민’이나 ‘막장’과 같은 드라마에 붙는 말들은 둘 다 모두 질적 판단으로 등장한 용어이다. 전자가 그 질의 긍정적 측면을 지칭한다면, 후자는 그 부정적 측면을 지칭한다. 하지만 이 두 용어는 지금 모두 양적인 의미로 변질되고 있다. ‘막장’이라 아무리 불러도 그것이 부정적인 의미로 들리지 않고(오히려 상업적으로 성공한 드라마로 보이게 된다), ‘국민’이라 아무리 불러도 그 질적인 가치를 느끼지 못하게 되는 상황. 이것이 바로 시청률이란 잣대가 가진 진짜 무서운 얼굴이 아닐까. 이제 이들 막다른 길을 달리는 드라마들에 대한 비판은 용어의 차원을 넘어 좀더 섬세해질 필요가 있다.

‘아내의 유혹’, 과정보다는 효과에 천착하는 드라마

‘아내의 유혹’을 막장드라마라고까지 부르는 이유가 뭘까. 막장이라면 도대체 뭐가 막장이라는 것일까. 이런 구체적인 이유를 대지 못한다면 막장드라마라는 호칭은 시청률이 지상과제가 된 작금의 드라마 시장 속에서는 발전적인 비판이 아닌 면죄부만을 제공할 뿐이다. 앞으로 막장드라마가 하나의 통속적인 장르로서 굳어져 쏟아져 나오지 않으면서도, 그 대안을 마련할 수 있는 방법은, 이 막장드라마라는 하나의 용액으로 뒤범벅되어있는 막장의 요소와 성공 포인트를 깔때기에 대고 걸러내는 것이다. ‘아내의 유혹’의 막장은 무엇이고, 또 성공 포인트는 무엇일까.

‘아내의 유혹’, 막장으로 불리는 이유는?
어찌 보면 ‘아내의 유혹’이 막장인 이유는 너무나 쉽게 찾아지는 것만 같다. 그 첫 번째는 가족들이 모여 볼 가능성이 높은 저녁시간대에 이 드라마가 보여주는 세계가 막장이다. 이 드라마의 관계설정을 드러내는 제목부터가 그렇다. 친구와 남편이 공조해 아내를 죽음으로 내몰고, 그럼에도 간신히 살아남은 아내가 복수를 하기 위해 다시 남편에게 접근해 그를 유혹한다는 이야기.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당한 만큼 돌려주는 전형적인 복수극이다.

시간대에 어울리지 않는 소재에 문제가 있는 것은 확실하지만, 이것이 드라마 내적인 비판으로 불려지는 막장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면이 있다. 만일 늦은 밤에 했다면 이런 소재도 그럭저럭 괜찮은 드라마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복수극이라는 장르적 형태에서 막장의 혐의를 찾기도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막장이란 말일까. 중요한 것은 이 드라마가 끌어온 소재와 지향하는 주제가 아니라, 그 소재와 주제를 다루어가는 과정에 있다.

‘아내의 유혹’은 이미 그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를 다 알면서 보는 드라마다. 은재(장서희)는 반드시 그를 죽음으로 내몬 교빈(변우민)과 애리(김서형)에게 당한 것과 똑같이 복수를 할 것이다. 하지만 파국적으로 치닫는 드라마 진행 끝에 그 복수의 궁극적인 결과가 해피엔딩으로 간다는 것은 넌센스에 가깝다. 이처럼 결과를 다 알면서 보는 드라마는 그 결과를 향해 가는 과정이 중요해진다.

‘아내의 유혹’은 그러나 이 과정이 온통 클리셰들로 가득 메워져 있다. 오밀조밀한 심리적인 관계들을 섬세하게 그려내기보다는 익숙한 설정을 숨쉴 틈 없이 빠르게 나열시킨다. 드라마의 과정은 이 클리셰들의 남발로 인해 휘발되어 버린다. 하지만 이 드라마가 주목하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이 무수히 쏟아지는 익숙한 과정 속에서 대면하게 되는 갈등의 효과에 집중하는 것이다. 과정은 어떻든, 시청자들이 원하는 그 대결장면을 재빠르게 구성해내고 그 지점에 집중시킨다.

애리가 마침 구해야만 하는 돈만큼의 금괴가 시댁 소파 밑에 숨겨져 있는 상황이나, 애리가 그걸 도둑질하는 상황에 마침 은재의 오빠가 그 집에 하늘(오영실)을 데려다줌으로써 누명을 쓰게 되고,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교빈 모(금보라)가 은재네 집을 찾아와 쑥대밭을 만들어버리는 것은 일련의 그럴 듯한 이야기 과정으로 보이지만 잘 뜯어보면 그 과정은 개연성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그럴 듯하게 보이는 이유는 과정을 재빠르게 처리한 점과 그 과정의 결과가 시청자들을 중독적인 분노의 감정에 빠지게 하거나, 혹은 그 분노를 터뜨려 카타르시스를 주었기 때문이다.

‘아내의 유혹’, 그 성공의 요인은?
이처럼 과정보다는 효과에 집중함으로써 자극적인 대결구도가 매번 등장한다고 해서 드라마가 성공할 수 있을까. 성공할 가능성은 높은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이 필요충분조건을 만족시키지는 못한다. 중요한 것은 이 드라마가 그래도 말하려는 가족 내에서의 아내가 가진 두 가지 얼굴에 대한 천착이다.

이 드라마의 제목은 아이러니가 있다. 흔히 정상적인 가정 속에서 아내와 유혹은 그다지 내놓고 얘기할 만큼 어울리는 단어는 아니다. 이 도발적인 제목의 목적은 “아내가 남편을 유혹한다구? 왜?”하는 그 궁금증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중심이 아내에 맞춰져 있다는 점은 비슷한 시댁의 경험을 해본 이 땅의 아내들에게는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이 드라마는 아내라는 이름으로 이야기를 새롭게 환기시킬 수 있다. 즉 요조숙녀인 아내로 있던 은재는 요부 같은 애리에 의해 그 자리를 빼앗기고 다시 그 아내의 자리를 되찾으려 하며, 아내의 자리를 빼앗은 애리 역시 은재로 인해 그 자리를 빼앗길 위험에 처하게 된다. 따라서 이 드라마는 아내라는 자리를 두고 벌어지는 두 여자의 쟁탈전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들이 왜 그렇게 아내의 자리에 집착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면 그다지 그럴듯한 이유를 찾기가 어려워진다. 그렇다면 혹시 아내라는 한 자리에서 동시적으로 보여질 수 있는 두 얼굴로서의 은재와 애리의 모습 그 자체가 중요해지는 건 아닐까. 요조숙녀와 요부는 은재와 애리가 상황이 바뀌면서 서로 얼굴을 바꿔가며 취하게 되는 입장이다.

조금은 자학적인 시청이 되겠지만 요조숙녀로서 겪는 시댁에서의 구박은 시청자들에게 어떤 막연한 공감을 주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또 요부는 바로 그런 상황을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해체시키는 역할이 된다. 즉 구박받는 요조숙녀와 그걸 깨뜨려버리는 요부는 남성중심사회에 의해 강요된 아내라는 입장의 삶 속에서 그녀들이 실행에 옮기지는 못해도 마음 한 구석에 트라우마처럼 남겨진 아픔이다. ‘아내의 유혹’은 바로 이 두 얼굴을 은재와 애리라는 인물로 캐릭터화시켜 분노와 해소의 두 코드로 시청자들을 사로잡는다.

이러한 아내라는 자리가 갖는 비극적 상황을 전제하면서도, 심각하게 그 상황에 가라앉지 않게 만들어주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휘발되듯 달려나가는 어설픈 과정에서 비롯된다. 과정이 치밀해지면 이 드라마는 마치 ‘에덴의 동쪽’처럼 그 무거움에 가라앉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과정에 멈추지 않는다. 끝없이 부딪치는 그 효과적인 장면들을 보여줌으로써 마치 이 모든 상황을 게임처럼 만들어버린다.

상대적으로 부부라는 관계경험을 해보지 못한 젊은 층들까지 이 드라마에 빠져들게 되는 이유는 바로 이 대전게임처럼 반복되는 장면들의 재미에서 비롯된다. 악다구니를 쓰며 머리채를 휘어잡는 인물들의 막가는 게임 같은 드라마 진행은 또한 나이든 시청층들을 적절한 거리를 두게 만들어 심각하게 만들지 않으면서도 극에 몰입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아내의 유혹’이 막장드라마로 떴다고 해서, 모든 막장드라마가 뜬다는 보장은 없다. 만일 그런 생각을 가진다면 이것은 “시청자들이 막장을 좋아한다”는 섣부른 결론에 도달할 뿐이다. ‘아내의 유혹’은 드라마 과정이 막장이지만, 그 효과적인 측면에서 보면 그 게임적인 드라마 진행으로 인해 적절한 거리감을 갖게 만들면서 동시에 공감을 일으키는 성공 포인트에 도달할 수 있다. ‘아내의 유혹’은 막장으로 뜬 것이 아니라, 그 막장으로 보일 정도로 과정보다 효과에 집중한 데서 뜬 것이다.

만화를 보는 눈과 드라마를 보는 눈

부유층에서도 초부유층에 속하는 이른바 F4의 리더인 구준표(이민호)는 자신이 사랑하게된 서민 금잔디(구혜선)의 집을 찾아간다. 보통의 드라마였다면, 구준표가 제아무리 부잣집 자제라 해도 여자친구의 부모 앞에 고개를 숙여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꽃보다 남자’라는 세계 속에서는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진다.

밥상을 앞에 두고 구준표는 높다란 의자 위에 앉아 콩자반을 들고는 “이런 걸 먹느냐”고 묻고 심지어 멸치를 보고는 ‘이건 무슨 벌레냐’고 묻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잔디의 부모는 무릎꿇고 앉아서 구준표가 반찬 중 갈치를 알아 봐준 것에 대해 감탄하고 고마워한다. 물론 이 장면이 어른들의 속물근성을 풍자하기 위한 것이라면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그런 목적 자체가 없다. 매일 매일의 힘겨운 세탁 일 같은 것으로 점철된 어른들의 세계는 찌질한 그 무엇으로 치부되는 곳이 ‘꽃보다 남자’의 세계다. 이 곳은 돈이 있으면 자신의 그룹의 백화점에서 여자친구와 단둘이 쇼핑을 즐기기 위해 비상벨을 깨 손님들을 내쫓을 수 있고, 부모에게 간단히 통보하고 해외로 그 딸을 데려갈 수 있는 세계다.

구준표는 입만 열면 구질구질한 서민들의 생활을 하찮은 눈빛으로 내려다보지만, 이 드라마 속의 그는 늘 추앙 받는다. 이유는 단순하다. 잘생긴데다가 돈이 있는 그가 서민인 금잔디를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전형적인 신데렐라 이야기지만, ‘꽃보다 남자’는 이 상황을 좀더 양극단으로 표현한다. 즉 금잔디에게 쏟아지는 극단적 이지메 상황을 먼저 보여준 후, F4라는 판타지적 인물들이 그녀를 구하는 식이다. 지나치게 자극적이어서 논란까지 일기도 하지만 극에서 극으로 갈 때, 판타지는 더 커진다.

‘꽃보다 남자’가 요즘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막장드라마의 하나라고 비판받는데는 바로 이 극에서 극으로 오가는 판타지와, 판타지라고 해도 어떤 일정 부분 현실과 맞닿는 지점에서 발생하기 마련인 비현실성의 노출 때문이다. 극단적인 부자의 행동은 판타지 속에서는 오히려 매력적인 욕망의 하나로 받아들여지지만, 현실과 만날 때는 언뜻 그 금전만능주의의 속살을 드러내게 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막장드라마라고 비판받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그 상황을 너무나 쉽게 이해해버린다는 점이다. 도대체 무엇이 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이해하게 만드는 것일까. 그것은 드라마가 주는 것이라기보다는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의 눈이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거기에는 ‘꽃보다 남자’를 우리가 익숙히 보아왔던 드라마로 보는 시선과, 전혀 다른 만화의 드라마 버전으로 보는 시선이 나뉘어져 있다.

물론 드라마 자체가 판타지를 가진 것이지만, 그래도 현실적인 상황을 어느 정도는 반영하는 드라마의 하나로 ‘꽃보다 남자’를 본다면 이 드라마는 도무지 이해하기가 어려운 작품이 된다. 이 세계 속에서는 오로지 판타지만 존재할 뿐, 현실적인 배려는 전혀 찾아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화를 보는 시선, 즉 잠시 현실을 잊고 판타지 속으로 끝없이 빠져 들어가는 그런 시선으로 본다면 이 드라마는 충분히 고개가 끄덕여질 수도 있다.

‘꽃보다 남자’를 바라보는 극단적인 두 시선이 이처럼 공존하는 이유는 이 드라마가 만화적 요소와 드라마적 요소의 결합된 형태이기 때문이다. 만화의 판타지가 주는 재미에 깊이 빠져 TV속으로 빨려 들어가던 시청자가 그 드라마 속에서 현실적인 모습들 예를 들어 이지메 상황이나 사생활 노출 같은 범죄에 가까운 장면을 보았을 때 잠깐 현실로 돌아오는 그 지점이 두 시선이 교차하는 순간이다.

‘너는 내 운명’종영에 생각해봐야 할 것들

말도 많고 탈도 많아 막장드라마라고까지 불렸던 ‘너는 내 운명’이 종영했다. 종영에 즈음에 이 막장드라마의 성공방정식을 분석하는 글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개중에는 욕을 먹었어도 성공은 성공이라는 생각들이 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그 판단의 기저에는 사회 전반에 퍼져있는 불황에 즈음한 관대함(?) 같은 것이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분위기는 ‘너는 내 운명’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TV의 시청률 지상주의는 늘 있어왔던 것이지만, 이처럼 노골적으로 시청률만을 겨냥한 막장드라마들이 창궐한 적은 없었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설정과 캐릭터들을 극단적인 감정대립으로 몰고 가는 방식으로 시청자들을 중독시키는 이 막장드라마들은 이제 창피해하기는커녕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다니는 실정이다. 이유는? 40%에 육박하는 시청률 때문이다. 시청률에서 성공했으니 욕을 먹어도 그만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연실 TV는 불황을 외친다. 불황이니까 이런 극단적인 상업적인 선택을 이해하라는 듯이.

그런데 과연 시청률이 되기에 욕먹어도 그만이고, 또 불황이어서 이 선택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 합리적인 생각일까. 시청률이란 양적인 잣대로서 TV가 시청자를 호명하는 도구로 활용하는 것이다. 즉 시청률에는 대중들 개개인의 성향이나 그 프로그램을 보는 각각의 이유 같은 질적인 판단기준은 빠져있고 그저 뭉뚱그린 수치만이 존재한다. 시청률 40%라고 얘기할 때 그것은 실로 애매한 수치가 아닐 수 없다. “많이 봤다”는 그 수치의 의미는 “어떻게 봤다”는 의미 따위는 상쇄되어 있다.

그러니 가치판단이 빠진 이 시청률의 세계에 들어가면 욕을 먹든, 중독적이든, 자극적이든, 상관이 없다. 수치만 높으면 그만인 것이다. 수치를 높이는 방법은 간단할 수도 있고 꽤 어려울 수도 있다. 만일 프로그램을 만드는 이가 프로그램의 질을 생각하면서 수치를 생각한다면 이것은 쉽지 않은 문제다. 하지만 오로지 양적인 수치만 높이겠다고 마음을 먹는다면 그것은 의외로 쉽다. 욕먹는 것까지 감수한다면 사실 못할 게 없어진다.

드라마는 꽤 오랜 경험들이 축적되어 있는 장르다. 따라서 과거 시청률에 영향을 미쳤던 공식적인 설정들을 그저 끌어오는 것만으로 일단 기본을 만들 수 있다. 그 기본 위에 좀더 극단적인 인물들 간의 대립구도를 만들어낸다면 시청률은 더 치솟아 오른다. 막장드라마의 기본 구조가 가족극에 복수극을 끼워 넣는 것은 이것이 용이하기 때문이다. 우리네 드라마에서 가족극 만큼 오랜 노하우를 갖고 있는 분야는 없다. 이미 신파극에서부터 우리는 그 가족극의 성공 코드들을 갖고 있었고, 이것은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까지도 가족극의 ‘기본’을 만들어준다.

가족극에 붙여지는 복수극은 가족극의 상황을 극단으로 만들어내는 장치가 된다. 유치하게 보일지 몰라도 권선징악의 이야기 속에는 늘 가족과 복수가 근간을 이룬다. 가족극의 틀 속에서 남녀 간의 사랑과 배신 혹은 가족 간의 대립구도가 점차 발전해나가서 끝장까지 이르게 되면 복수극의 형태로 발전하게 된다. 이 가족극과 복수극을 이어주는 것은 다름 아닌 핏줄의식이다. 따라서 이 극단적인 대립이 보여주는 것은 결국 가족 이기주의의 극단에 불과하다. 주제의식 같은 것은 애초에 없고, 오로지 시청률을 끌어 모으기 위한 클리셰들의 반복만이 거기에는 존재한다.

그런데 왜 보냐구? 그게 거기 있으니까 보는 것이다. TV는 이제 우리의 일상이 되었고 어떤 식으로든 한 구석에서 틀어져 보여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매체가 되었다. 그러니 왜 보냐고 묻지 말고, 왜 그게 거기 있느냐고 물어봐야 한다. 왜 꼭 그렇게 노골적이고 막장으로 가는 드라마가 거기 자리하고 있어 무심코 바라보던 시청자의 눈을 중독시키는가를 물어봐야 하는 것이다.

막장드라마가 시청률 고공행진을 하고 있고, 욕하면서도 본다는 기사가 나올 때마다 기분이 나빠지는 것은, 그 시청률이라는 잣대가 자꾸만 아무 상관없는 시청자들까지 호명하기 때문이다. 시청률 40%를 내세워 마치 시청자들 대부분이 그것을 인정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는 순간, 그 시청률에 포함되는 시청자들이라는 익명의 덩어리들 속에 자신까지 갑자기 불려지는 그 불쾌한 기분. 불황이라는 말을 마치 주문처럼 읊어대며 막장을 정당화시키려는 그 당당하지 못한 태도는 막장드라마의 유혹을 뿌리치고 어려운 길을 걷고 있는 장차 미래의 TV를 책임질 많은 이들을 절망에 빠뜨리기도 한다. 불황이니까 막장드라마도 된다고? 아니다. 막장드라마가 가진 당장의 달콤함은 계속 되어질 더 큰 불황을 가져올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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