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작, 캐스팅, 막장을 넘어선 '찬란한 유산'

시청률 40%를 돌파한 '찬란한 유산'의 성공은 신드롬에 가깝다. 드라마에 대한 관심에서부터 이승기, 한효주, 배수빈 같은 출연 배우들에 대한 관심도 가히 신드롬급이다. 그런데 '찬란한 유산'의 성공 요인들을 들여다보면 지금껏 통상적으로 우리가 생각해왔던 공식들에서 빗겨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먼저 '찬란한 유산'은 흔히 말하는 대작드라마가 아니다. 어찌 보면 지나칠 정도로 평범한 가족드라마의 틀을 벗어나지 않고, 로케이션이라고 해봐야 멀리 간 곳이 동해안 정도일 정도로 소박한 드라마다. 이것은 툭하면 해외 로케이션이 범람하는 작금의 드라마 공식 속에서 이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찬란한 유산'은 그 소박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40% 시청률을 넘기는 국민드라마가 될 수 있었을까.

그것은 대작드라마가 가진 한계를 오히려 '찬란한 유산'이 벗어나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블록버스터 드라마라고 부르는 대작드라마들은 그만큼 화려한 볼거리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바로 이 점이 오히려 약점이 되기도 한다. '거대한 그림'에 집착하다가 디테일한 이야기에 소홀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찬란한 유산'은 그 외형보다는 내실이 탄탄한 드라마다. 유산과 핏줄이라는 사회적 이슈가 될 만한 보편적인 주제로 공감을 이끌어내면서도, 드라마가 보여주어야 하는 극적인 갈등구조를 균형 있게 병치시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다. 따라서 드라마는 극적인 힘을 가지면서도 세대를 넘어서는 공감대를 가져갈 수 있었다.

이러한 스토리와 연출에 대한 자신감은 흔히 대작드라마들이 가져오는 스타마케팅의 함정도 벗어나게 했다. 이 드라마의 이승기와 한효주는 한류스타도 아니고, 그렇다고 중견배우도 아니다. 이승기는 가수출신으로 '소문난 칠공주'에서 첫 연기 신고식을 치른 후, 이 드라마가 두 번째 작품이 되는 셈으로 연기자로서는 이제 막 시작한 새내기라고 할 수 있다. 한효주는 상대적으로 이승기보다는 많은 작품에 등장했지만, 그간 제대로 된 캐릭터를 만나지 못해 빛을 보지 못했던 배우다.

그러니 캐스팅만을 두고 보면 이 드라마의 기대치는 낮아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러한 낮은 기대치를 비웃기라도 하듯, 이 드라마는 성공적인 캐릭터를 구축해냄으로써 이 두 배우들을 스타덤에 올렸다. 이승기는 이로써 가수, 예능인, 배우로서의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했고, 한효주는 드디어 자신의 몸에 맞는 캐릭터를 만나 비상했다. 이밖에도 배수빈, 문채원, 김미숙, 반효정 등 많은 배우들이 주목받을 수 있었던 것은 이 드라마가 그만큼 좋은 캐릭터들을 많이 보유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찬란한 유산'이 깬 대박공식 중 가장 큰 의미를 둘 수 있는 것은 '착한 드라마는 안된다'는 편견이었다. 이 드라마는 막장드라마들이 할거하는 드라마 세상에서 진심과 진정성에 호소하는 것으로 국민드라마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실증해 보여주었다. '찬란한 유산'은 이처럼 흔히 말하는 대작이어야 한다거나, 대스타들이 캐스팅되어야 한다거나, 자극적이야 한다는 그 대박드라마의 공식들을 보기 좋게 깨버렸다. '찬란한 유산'의 성공이 시사하는 점이 크다는 것은 바로 이 깨져버린 공식들 너머에 어쩌면 우리 드라마의 미래가 있을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막장을 씻어주는 명품드라마, ‘남자이야기’

진정 막장 아니면 안 통하는 시대인가. KBS 월화드라마 ‘남자이야기’는 이른바 막장드라마 시대에 섬처럼 존재하는 드라마다. ‘아내의 유혹’이 공공연히 막장드라마를 내세우며 그 도화선에 불을 지폈다면, ‘에덴의 동쪽’은 초반에는 숨기다 차츰 본색을 드러냈고, ‘꽃보다 남자’는 강력한 판타지로서 막장의 흔적들을 감췄으며, ‘미워도 다시 한번’은 아예 명품 드라마로 시작하다가 방향을 선회하기 시작했다(어쩌면 본래부터 그랬는지도 모른다).

현재 방영중인 드라마들을 모두 막장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막장의 위험성(불륜, 출생의 비밀, 불치 같은)을 한두 가지 정도는 갖고 있다. 그것은 아무리 주제의식에 투철하다 하더라도 여전히 시청률을 의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남자이야기’에는 그런 혐의를 지울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 본격적인 사회극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 이 드라마는 그 결을 유지함으로써 사회적인 메시지를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흥미진진한 대결구도를 놓치지 않는다.

‘남자이야기’는 분명 제목처럼 남자들의 세계를 다룬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이야기가 남성들만이 공감할 수 있는 그런 이야기라는 것은 아니다. 결국 이 드라마가 하려는 이야기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돈이라는 감정 없는 괴물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악역으로서 사이코 패스처럼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채도우(김강우)는 바로 이 괴물을 그대로 캐릭터화한 인물이다. 그는 늘 모니터 위에 떠있는 숫자들을 보고 그 숫자를 갖고 놀지만, 정작 그 숫자가 의미하는 사람들에게는 무감정하다. 그는 자본의 시스템 그대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니 그 숫자 밑에서 한 인생의 파탄을 경험하는 김신(박용하)은 바로 그 시스템에 대항하는 인물이 된다. 전형적인 복수극이지만 그렇다고 지나치게 처절함 속으로 침잠하는 그런 복수극은 아니다. 자본의 시스템과 대항하는 그의 방식이 역시 그 시스템의 방식을 이용하는 것이기에 이야기는 ‘스팅’ 같은 게임의 느낌이 강하다. 김신을 돕는 한 무리들이 하나씩 모여 채도우와의 대결을 벌인다는 점 역시 드라마를 경쾌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어떤 질척함보다는 쿨한 면모가 보인다는 얘기다.

드라마를 명품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보다 연기자들이다. 그 중 드라마의 기본 축을 세워주고 있는 채도우의 바늘로 찔러 피 한 방울 안나올 것 같은 악역은 실로 백미라 할 수 있고, 거친 남자로 변신한 박용하, 팜므파탈과 순수함을 오가는 박시연의 연기도 드라마의 각을 세워준다. 말이 필요 없는 이문식과 김형범 그리고 김뢰하의 명품조연연기와 모 광고 맺돌춤으로 더 유명했던 박기웅의 연기변신도 놀랍다. 또 각각의 연기들에 조화를 만들어주는 안정된 영상연출도 이 드라마를 빛내주는 요인이다.

‘남자이야기’는 송지나 특유의 촘촘하고 신뢰가 가는 대본과 그걸 100% 소화해내는 연기자들과 연출이 삼박자를 이룬 요즘 보기 드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작금의 막장의 요소들을 가진 드라마들 속에서 눈이 피곤했다면, 그 피곤을 풀어줄만한 드라마다. 하지만 이미 너무 많은 막장에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일까. 이 잘 만들어진 드라마의 시청률이 좀체 오르지 않는 것은. 이 드라마에 명품이라는 호칭을 쓰는 것조차 조심스러워지는 것은 이제 명품이라 이름붙이면 오히려 더 외면 받는 시대인 것만 같아서다.

저녁 시간 그저 무심코 채널을 돌리다 ‘아내의 유혹’의 낚시질 영상에 걸려든 적이 있다. 그 장면에서 누군가는 소리를 지르고 있었고, 그 누군가의 눈빛은 정상인의 것이 아니었다. 매번 챙겨보는 드라마가 아닌지라(이걸 왜 챙겨봐야 하는 지도 모르겠지만), 그 상황의 내용은 알 수 없다. 하지만 내용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중요한 것은 그 상황의 풍경이 전하는 ‘이거 뭔가 벌어졌구나’하는 느낌이다. 때마침 흘러나오는 긴박한 효과음은 그 느낌이 맞았다는 것을 새삼 확인시켜주면서 그 벌어진 뭔가에 시선을 돌리게 만든다. 하지만 드라마가 끝나고 나면 대부분 드는 생각은 ‘왜 내가 이걸 보고 있지’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길을 가다가 우연히 사람들이 모여 웅성대는 것을 보고는 호기심에 이끌리는 것과 같다. 누군가 싸움을 벌이고 있다면 십중팔구 지나던 사람들은 가던 길을 멈추고 구경을 하려 들것이다. 누가 이길 것인가 하는 점이나, 그들이 왜 싸우는가 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던 평온한 일상에 갑자기 틈입으로 들어온 싸움이라는 풍경이 주는 날선 느낌이다. 그 풍경을 보면서 혹자는 일상 속에 침묵해왔던 내면의 억압을 대리해보기도 할 것이며, 혹자는 백주대낮에 웬 쌈질이라며 혀를 끌끌 찰지도 모른다. 내용도 없고 감동도 없지만 일단 사람들은 모였다. 질은 사라지고 양만 남는 것, 이른바 막장의 본색이다.

그 질이란 것을 살펴보면(그걸 살펴본다는 것 자체가 우스꽝스런 일이긴 하지만), 한 마디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복수의 연속이다. 자신의 친구이자 남편의 내연녀인 애리(김서형)가 남편과 함께 은재(장서희)를 죽음으로 내몬다. 그런데 죽은 줄 알았던(죽으면 이야기가 끝나므로 절대 죽을 수는 없다) 은재가 살아 돌아와 민여사(정애리)의 딸 민소희로 살아가며 남편 교빈(변우민)과 애리에게 복수를 한다. 여기까지는 전형적인 복수구도이기에 좀 어설프기는 해도 누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볼만하다.

그런데 더 이상 구경시킬 싸움이 없었던 지 갑자기 죽은 줄로 알았던 민소희가 살아서 돌아와 자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은재를 몰아붙인다. 한편 애리의 아들 니노(정윤석)의 출생의 비밀이 갑자기 불거져 나오면서 은재의 오빠 강재(최준용)는 혼란에 빠진다... 끝없는 관계의 반복 혹은 돌출. 이 드라마의 키를 쥐고 있는 악역 애리가 은재의 친구이자, 강재의 애인이자, 은재남편 교빈의 내연녀란 사실은 이 드라마가 캐릭터 하나를 두고 얼마나 많은 걸 빼먹고 있는 지를 말해주는 대목이다.

이 익숙한 코드의 반복이 주는 식상함을 상쇄시키기 위해 이 드라마가 내세운 것은 속도다. 이른바 ‘빠른 전개’. 말도 안 되는 상황들의 나열은 느린 속도로 전개될 때는 그만큼 욕먹을 소지도 많다. 하지만 빠르게 진행시키면 말이 달라진다. 기대효과는 과정이 아니라 결과에서 나온다. 말도 안 되는 과정의 빠른 진행은 충분히 자극적인 결과(대립 상황, 싸움풍경)로 보상받는다. 과정이 무시되고 결과에만 집착하는 형국. 막장의 또 다른 본색이다.

그러나 속도에 편승하면서 뭉개져 보이지 않던 그 과정의 풍경은 속도에 익숙해지거나, 그 종착역에 다다르면서 속도가 느려질 때가 되면 이제 그 진면목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드라마의 말미에 다다르자 ‘왜 내가 저걸 보고 있지’하는 그 마음이 고개를 쳐들기 시작한다. 물론 그 중독적인 속도에서 하차하기란 쉽지 않지만 적어도 비판적인 시선이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시청률이란 양적 잣대가 존재의 이유가 되는 이 드라마에서 요동치기 시작하는 시청률은 드라마를 더더욱 극단적으로 치닫게 만든다.

질적인 것보다 양적인 것에 몰두하는 것, 그리고 과정보다는 결과에 몰두하는 것은 우리가 개발의 시대에 이미 익숙하게 겪어왔던 것들이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작금의 정치경제 상황을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막장의 본색은 그 드라마를 파탄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 드라마 한 편의 파탄이 아니라는 점이다. 질적 실패와 양적 성공, 과정의 실패와 결과의 성공이 주는 추상적인 성공 방정식은 어쩌면 전염병처럼 번질 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불황이라는 호명은 때로는 이 모든 것들에 면죄부를 주기도 한다.

‘워낭소리’와 막장드라마, 그 불황기 영화와 드라마의 상반된 선택

이미 60만 관객을 넘어서 독립영화로서는 꿈의 100만 관객을 넘보고 있는 ‘워낭소리’. 소를 닮아버린 할아버지와 사람을 닮아버린 소가 함께 걸어가는 그 느린 걸음걸이에 사람들은 아낌없는 박수를 쳐주었다. 한편 수줍게 “좀 하는” 영화라며 지난 겨울 살며시 다가 온 ‘과속스캔들’은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현재 800만 관객을 넘어섰다. 블록버스터의 화려한 외관들 속에서 수수한 얼굴로 다가온 ‘과속스캔들’은 따뜻한 가족애를 그리며 불황기 찬바람에 서늘해진 관객들의 가슴을 적셨다.

진정성을 선택한 영화, 막장을 선택한 드라마
어찌 보면 이 두 영화의 성공은 지금껏 주목받지 못했던 작은 영화들의 반란이라는 점에서 이례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입에서 입으로 타고 전해진 따뜻한 이야기에 대한 대중들의 열광적인 반응은 불황기 영화의 새로운 대안으로까지 보여진다. 극장 밖에서 세파에 흔들리며 버티던 관객들은 극장 속 몇 천 원의 도피처 속에서 위안과 성찰을 요구했다. ‘과속스캔들’은 이제 한물 갔다고 생각하는 소시민들에게 “아직 당신은 꽤 하는 사람”이라고 어깨를 두드려주었고, ‘워낭소리’는 먹고살기 급급한 현재, 오히려 그로 인해 사라져가고 있는 노동의 신성함을 성찰하게 해주는 감동의 시간을 선사했다. 실로 진정성의 성공이었다.

반면 같은 불황기 속, 안방극장은 이와는 정반대의 얼굴을 보여주고 있어 주목된다. 지난 2월9일자 일일 시청률표를 보면 그 1위가 SBS의 ‘아내의 유혹(34.3% AGB닐슨 자료)’, 2위가 KBS의 ‘꽃보다 남자(26.2%)’, 3위가 MBC의 ‘에덴의 동쪽(23.3%)’이다. 이것은 지난 한 주의 주간 시청률과 거의 같은 결과(주간시청률에는 SBS의 주말극장 ‘유리의 성’이 하나 떠 끼어있을 뿐이다). 이 시청률표가 말해주는 것은 지금 현재 방송3사의 대표주자가 바로 드라마라는 점이며, 그 드라마들은 막장이라 불려지거나, 각종 논란 속에 허우적대는 것들이라는 점이다.

느리게 걷는 ‘워낭소리’와 속도에만 편승한 ‘아내의 유혹’
영화가 선택한 진정성, 드라마가 선택한 막장. 불황에 대한 이 상반된 선택이 말해주는 것은 무얼까. 이것은 영화와 드라마에 대한 서로 다른 매체성에서 비롯되는 바가 크다. 이것은 두 매체의 과금 체계를 보면 알 수 있다. 영화는 순수하게 관객이 돈을 지불함으로써 수익을 얻는 매체인 반면, 드라마는 시청률이라는 간접적인 잣대를 통해 광고로 수익을 얻는 매체다. 작품성이나 완성도에 대한 요구는 당연히 영화에 더 무게중심을 둘 수밖에 없다(그것이 오락을 위한 것이라 할 지라도).

반면 드라마는 작품성보다는 화제성에 더 치중하게 된다. 즉 완성도가 떨어져 욕을 먹으면 영화로서는 사형선고가 될 수 있지만, 드라마로서는 오히려 논란을 통한 시청률 상승이라는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완성도에 대한 이러한 상반된 태도는 ‘워낭소리’와 ‘아내의 유혹’의 상반된 속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워낭소리’의 속도는 말 그대로 소걸음에 가깝다. 그 느린 걸음을 따라 걸으며 하나하나 이야기를 담담히 쌓아놓은 것이 ‘워낭소리’의 미덕이다. 반면 ‘아내의 유혹’은 작품의 개연성이나 인물의 일관성 같은 것마저 휘발시킬 정도의 속력으로 자극에만 몰두한다. 여기서 속도감은 지속적인 자극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완성도의 구멍을 메워주는 장치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은 영화처럼 불황기 속에서 어떤 진정성을 갈구하지 않는다는 말일까. 그렇지 않다. 4부작이었지만 호평을 받았던 ‘경숙이, 경숙아버지’에 쏟아진 찬사는 여전히 시청자들이 드라마를 통해서도 어쩐 진실된 감동에 갈증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 완성도나 작품성과는 상관없는 시청률의 양적 판단에만 의존하는 작금의 드라마 시스템은, 드라마를 시청자들의 바람과는 상관없이 움직이는 괴물로 만들어가고 있다. 언제까지 욕하면서 보는 이 병적인 시청으로 휘둘려야 할까. ‘워낭소리’처럼 그 따뜻한 울림이 대중성으로까지 이어지는 것을 드라마에서도 바라는 것은 무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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