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트하우스', 어떤 일이 벌어져도 놀랍지 않은 가짜 판타지

 

예상했던 대로지만 SBS 월화드라마 <펜트하우스>는 벌써부터 20% 시청률을 목전에 두고 있다. 9.2%(닐슨 코리아)로 시작한 드라마는 매회 1% 남짓 시청률을 끌어올리다, 11회에 이르러 19.6%를 기록하며 시청률이 껑충 뛰었다. 시청률이 모든 걸 증명해주는 바로미터가 되지는 않지만, 적어도 이렇게 갑자기 시청률이 뛰어오른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건 개연성 없이 자극적인 설정과 복수극을 통한 고구마와 사이다만을 담음으로써 막장이라는 비판이 쏟아졌지만, 이제는 그 단계를 넘어서 생겨나는 이상한 관전 포인트가 그 이유다.

 

이상한 관전 포인트라는 건, '욕하면서 본다'는 우리가 흔히 막장을 지칭할 때 쓰는 표현에 이미 들어가 있다. 욕한다는 건, 개연성이 없어서이지만, 그러면서도 보는 건 또 왜일까. 그것도 그냥 보는 게 아니라 찾아보게 되는 건. 자극도 자극이지만, 개연성을 더 이상 기대하지 않는 단계에 이르면 이제 드라마는 더 이상 사실성을 생각하지 않고 가짜라는 게 분명한 일종의 치고받는 게임을 보듯 편해지는 지점에 도달한다. 전혀 사실성이 없어 강 건너 불구경을 하는 것인데, 그 불도 가짜라는 걸 알고 본다.

 

<펜트하우스>에서 삼성동 어디쯤에 세워진 주상복합 헤라팰리스나 그곳 자녀들이 다닌다는 청아예고 같은 공간은, 현실의 부동산과 교육을 은유하는 것처럼 등장하지만 그 곳에서 벌어지는 개연성 없는 사건들의 연속은 그것이 가짜 판타지라는 걸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제아무리 특권의식을 가진 천민자본주의를 표상하는 부자들이 사는 주상복합이라고 해도, 주민대표 투표로 계속 살지 말지를 결정하는 그런 곳이 어디 있을까. 제아무리 부정한 일들이 벌어지는 예고라고 해도 노골적으로 불공정한 일들이 벌어지는 학교가 존재할까.

 

그래서 처음 <펜트하우스>를 보는 시청자는 개연성이 부족한 이 세계를 접하면서도 살인, 유기, 불륜, 학대, 폭력 같은 자극적인 코드들에 시선을 빼앗기다가 어느 순간 개연성을 포기하고 폭주하는 그 이야기 속에 저도 모르게 빠져든다. 개연성이 없고 아예 추구하지도 않기 때문에 그 곳에는 말 그대로 무슨 일이든 벌어질 수 있다. 개연성이 붙잡고 있는 작품이 요구하는 최소한의 족쇄를 풀어버리면 남는 건 막장의 자유다.

 

이 단계에 가면 개연성 부족의 상황들은 시청자들에게 불편함을 주는 게 아니라 실소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헤라팰리스에 거주하고 있는 강마리(신은경)가 사실은 과거 목욕탕 세신사였고 그 때 인연을 맺은 큰손들 덕분에 인생역전을 한 인물이며, 심지어 지금도 그 큰손들을 모시고 때를 밀어주는 상황 같은 게 가능하다. 물론 거기에는 풍자 코미디적 요소들이 담겨 있지만 이런 일들이 실제로 벌어질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다.

 

또 학생들도 마음대로 들어오지 못하는 청아예고 같은 곳에 구호동(박은석) 같은 선생이 들어왔다는 사실도 개연성이 없고, 심지어 그 인물이 엄청난 재력을 가진 로건 리이며 사망한 민설아(조수민)의 양오빠라는 사실도 그렇다. 거기에는 개연성이 있는 게 아니라, 뭐든 원하는 대로 설정하고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는 작가 마음대로의 선택이 있다.

 

중요한 건 이런 개연성 없는 세계를 통해 핍박받던 약자들이 저 세상의 가해자들에게 피의 복수를 하는 과정들을 작가와 시청자들이 공모하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개연성은 없어도 저들을 처절히 응징해달라고 시청자들은 요구하고 작가는 그걸 실현시킨다. 그래서 세상에 저런 일은 벌어지지 않아 하면서 때론 실소를 터트리게 하는 개연성 없는 상황들이 전개돼도 시청자들은 그걸 그다지 불편해하지 않게 된다. 어차피 개연성은 기대하지 않는 것이고 대신 가짜 판타지로서의 사이다를 원하게 되기 때문이다.

 

드라마는 결국 허구이고 현실이 아닌 판타지를 담고 있기 마련이 아니냐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도 어떤 최소한의 개연성이라는 룰이 있다. 그걸 깨뜨리는 건 이 한 작품만의 문제가 아니다. 심지어 개연성을 기대하지 않게 되고 그래서 심지어 무슨 일이 벌어져도 놀랍지 않은 상황은 자칫 작품을 고구마와 사이다로만 단순하게 소비하는 방식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다.(사진:SBS)

'펜트하우스'가 개연성 없는 막장에 시청자를 중독시키는 방식

 

SBS 월화드라마 <펜트하우스>는 사실 뻔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 틀은 전형적인 권선징악의 복수극이다. 김순옥 작가가 늘 해왔던 방식의 반복. 사회적 공분을 일으킬 만큼 추악한 악당들의 갖가지 행태들이 먼저 공개되고, 그렇게 당하던 이들이 저들에게 처절한 응징을 해주는 방식이 그것이다.

 

<펜트하우스>라는 제목은 이 드라마가 지목하고 있는 공분의 대상을 명확히 보여준다. 이미 JTBC 드라마 <SKY 캐슬>이 끄집어냈던 것이기도 하지만 거기에는 이른바 대한민국 0.1%의 부를 차지한 이들이 갖고 있는 천박한 선민의식과 갑질 그리고 그것을 핏줄로 이어받는 자식 교육의 문제다. 물론 <SKY 캐슬>은 그 문제의식을 가져와 완성도 높은 작품으로 만들어냈지만, <펜트하우스>는 완성도보다는 그 소재의 자극성만을 끌어왔다. 완성도? 자극과 당장의 사이다를 위해서라면 그런 건 별 중요하지도 않다 여겨지는 대본과 연출이 <펜트하우스>에서는 곳곳에서 발견된다.

 

게다가 천민자본주의의 갑질과 대물림되는 불공정한 교육의 문제에 <펜트하우스>는 '부동산'이라는 뇌관까지 더했다. 현재 한정 없이 치솟는 부동산 시장으로 인해 가뜩이나 신경이 곤두서있는 대중들은 <펜트하우스>가 꺼내놓은 부동산을 통한 일확천금의 소재에 양가적인 감정을 갖는다. 그것을 하나의 로망처럼 여기면서도, 그것이 저들 가진 자들만이 가능한 일이라는 점에서 상대적 박탈감을 갖는다.

 

드라마는 이 양가감정을 끌어와 헤라팰리스라는 국내 최고가의 부동산에 입주한 이들에 대한 분노를 끌어내고, 이들과 대적해 나가는 오윤희(유진) 같은 서민이 복수를 꿈꾸는 심수련(이지아)과 공조해 부동산 사업에 뛰어들고 그래서 부동산 재개발을 통해 서민들의 피눈물을 자신들의 주머니 속 돈으로 만들어내던 악당들 주단태(엄기준), 이규진(봉태규), 하윤철(윤종훈)을 곤경에 처하게 만드는 이야기를 통해 사이다를 던진다. 오윤희는 결국 이 부동산을 통한 복수(?)로 헤라팰리스에 입주한다.

 

드라마는 매회 공분의 대상들이 하는 악행들을 마치 불길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던져 넣는 장작처럼 제공한다. 주단태는 불륜에 불법적인 일들을 자행하고, 이규진은 이를 위해 폭력까지도 스스럼없이 쓰는 악마의 모습을 드러낸다. 헤라팰리스에 사는 아이들 역시 악마들처럼 그려진다. 오윤희의 딸 배로나(김현수)를 지속적으로 괴롭히는 주석훈(김영대), 주석경(한지현), 하은별(최예빈), 유제니(진지희) 같은 아이들은 학생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운 악마의 모습을 드러낸다.

 

드라마를 보는 내내 시청자들은 그래서 이들의 악다구니에 거슬리지만 자극을 받고, 공분을 일으키는 악역들에 뒷목을 잡으면서 동시에 이들과 대적해가며 조금씩 돈을 벌어 부유해지고 하나씩 복수를 해나가는 심수련과 오윤희의 공조에 빠져든다. 그래서 마치 드라마는 누구나 이야기만 들어도 속이 퍽퍽해지는 고구마 현실(부동산, 교육문제)을 끌어와 죽 나열해 보여주고 거기에 사이다 한 잔씩을 주는 방식으로 시청자들을 조금씩 그 세계에 중독시킨다.

 

이런 전형적인 권선징악의 방식이 잘못된 건 없다. 게다가 대중들이 공분을 일으키는 특권층들의 불공평한 부동산이나 교육문제를 밑그림으로 끌어온 건, 드라마가 현실의 결핍을 가져와 판타지로 채워주는 그 기능에 부합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드라마를 막장이라고 부르며 마치 발암물질 보듯 하게 되는 건 이런 이야기의 소재나 틀거리 때문만이 아니다.

 

이 뻔한 막장의 중독이 위험한 건, 이런 고구마와 사이다가 존재한다면 드라마의 개연성이나 완성도 따위는 상관없다는 식의 접근방식에서 나온다. 도대체 저런 일이 가능할까 싶은 엉터리 개연성으로 당장의 사이다를 던져주는 건 전혀 현실성과는 거리가 있다는 점에서 시청자들에게는 오히려 더 큰 허탈감을 줄뿐이다. 그건 마치 당장 목이 말라 바닷물을 들이키는 것이나 마찬가지니 말이다.

 

드라마가 현실에 어떤 의미를 제시하는 건 중요한 목적 중 하나지만, 반드시 꼭 의미만을 지향할 필요는 없을 게다. 하지만 적어도 개연성 자체를 무시하고 내놓는 사이다란 오히려 현실에서 돈을 가진 자들이 마음껏 갑질 하는 삶이 당연하다는 식의 의식을 드러낼 뿐이다. 권선징악의 막장드라마들이 맨 마지막에 가서야 비로소 악당들이 무너지는 결말로 끝을 내지만, 그 과정의 대부분을 악당들의 세상으로 채워 넣음으로써 오히려 그들의 행태를 정당화하거나 당연하게 내세우는 듯한 불편함을 안기는 건 그런 이유 때문이다.

 

이건 일종의 공해하고, 문제의식을 드러내기보다는 세상은 본래 그렇다는 걸 정당화하는 또 다른 방식이 아닐까. 이건 드라마일뿐이야 라고 말하지만, 거기 담겨진 부동산이나 교육문제는 결코 드라마로만 치부될 일이 아니다. 그래서 그런 개연성 없는 이야기들은 마치 현실에 있는 부동산이나 교육문제가 가진 심각함을 너무나 단순화하는 방식으로 가려버린다. 간간히 던지는 바닷물을 사이다인양 던져주고, 그걸 마셔봐야 갈증만 더할 뿐이라는 걸 마치 알고 있다는 듯 드라마는 영악한 미소를 짓고 있는데.(사진:SBS)

‘돈꽃’, 연출·연기·대본 뭐하나 빠지는 게 없는 보기 드문 수작

MBC 주말드라마가 그간 방영해왔던 드라마들의 선입견 때문이었을까. <돈꽃>은 시작부터 막장드라마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받았다. 여기에는 제목도 한 몫을 했다. ‘돈’이라는 단어를 직설적으로 붙여 ‘돈꽃’이라 붙인 제목은 이 드라마에 ‘속물적인 뉘앙스’를 선입견으로 갖게 만들었다. 그리고 실제 방영되면서 초반부터 등장하는 기업극화적 분위기와 복수극의 틀은 그런 선입견을 확증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얘기하면 이건 완벽한 선입견으로 인한 오해다. <돈꽃>은 막장드라마가 아니고 오히려 촘촘하게 얼개가 짜여진 완성도 높은 드라마이며, 특히 놀라운 연출력과 배우들의 연기가 돋보이는 드라마다. 물론 이 드라마 속에는 우리가 막장드라마에서 흔히 봐왔던 출생의 비밀이나 성공을 위한 이전투구와 복수극 코드가 들어있다. 하지만 <돈꽃>이 이런 소재들을 담는 방식은 실로 진지해 막장과는 너무나 다른 깊이를 획득하고 있다. 마치 같은 코드들을 썼어도 삶의 비의를 담아내곤 했던 그리스 비극 같은 느낌을 줄 정도로.

<돈꽃>의 주인공인 강필주(장혁)는 친구이자 보스인 장부천(장승조)을 청아그룹 회장에 앉히려는 인물. 그래서 그는 차기 대통령감으로 지목되는 나기철(박지일) 의원의 딸 나모현(박세영) 모르게 모든 걸 꾸며 장부천과 정략결혼시킨다. 하지만 청아그룹 회장 자리를 노리는 장여천(임강성)과의 대결과정에서 청아그룹과 나기철 의원의 유착이 폭로되면서 청아그룹의 실권자인 장국환(이순재) 명예회장의 권유에 의해 나기철 의원이 자살을 시도하면서 쉽게 흘러갈 것 같은 상황들은 모두 뒤집어진다. 

강필주는 사실 장부천의 모친인 정말란(이미숙)에 의해 강물에 던져졌던 장씨 가문 후처의 아들 장은천이다. 그래서 그는 복수를 위해 정말란이 욕망하는 것처럼 장부천을 회장에 앉힌 후 그 꼭대기에서 밀어내버리려 한다. 그것이 가장 처절한 복수가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부천 역시 출생의 비밀이 있다. 그는 자신에게 장씨 가문의 피가 흐르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 정말란의 운전기사인 오기평(박정학)이 그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모르는 그는 강필주가 사실 장은천으로 장씨 가문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는 걸 알고는 자신이 그의 꼭두각시였다는 걸 알아차린다. 

<돈꽃>은 굉장히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고, 그 인물들은 저마다의 비밀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 인물의 내면과 심리를 들여다보지 않으면 그 진짜 맛을 느끼기가 쉽지 않다. 대사도 굉장히 절제되어 있고, 오히려 영상 언어를 통해 인물의 내적 감정을 표현해내는 방식을 쓰고 있다. 하지만 이런 자못 어려운 드라마의 선택을 효과적으로 만드는 건 놀라운 연출력이다. 

막장드라마의 연출들이 빠른 속도에 집착하고 기관총처럼 쏘아대는 대사에 기댄다면, <돈꽃>의 연출은 그와는 정반대 방향으로 나간다. 속도는 유려하게 흐르는 클래식 배경음악에 맞게 아주 천천히 움직이고, 대사도 쏟아내기 보다는 한 마디 한 마디를 음미하듯이 끊어서 전달한다. 어떤 경우에는 그것이 마치 연극대사처럼 느껴질 정도다. 하지만 이러한 유려함과 절제미 그리고 여유 있게 움직이는 영상들은 시청자들이 충분히 그 장면과 대사를 음미할 시간을 준다. 깊이는 그래서 만들어진다. 

또한 이 작품이 마치 그리스 비극을 보듯 비장미를 갖게 되는 건, 여기 등장하는 인물들의 감정 선이 굉장히 복합적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주인공인 강필주만 봐도 그렇다. 그는 다름 아닌 정말란에게 복수하기 위해 이 가문의 개를 자청한 것이지만, 오랜 세월 함께 지내오면서 그들 사이에 다른 끈끈한 관계들이 이어진다. 즉 정말란과는 애증이 결합된 내연관계의 모습을 보이고, 장부천에게도 친구로서의 우정 같은 것들이 슬쩍슬쩍 드러난다. 

정말란은 자신의 아들인 장부천의 며느리로 들어온 나모현이 그의 아버지의 자살시도로 그 정략결혼 자체가 쓸모없어지자 아들에게 이혼을 하라고 종용하지만, 나모현이 강필주와 남다른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걸 알게 되자 자신이 준비하던 이혼서류를 찢어버린다. 아들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마음과 강필주에 대한 자신의 욕망이 혼재하는 그 복합적인 감정을 드러내는 것. 

겉으로는 인자한 경영자의 탈을 쓰고 있지만 실상은 살벌한 늑대의 실체를 숨기고 있는 장성만 회장(선우재덕)이나, 그저 자수성가해 뒷방으로 물러앉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말 한 마디로 사람을 죽이기도 하는 무서운 얼굴을 숨기고 있는 장국환 명예회장, 하다못해 그저 운전기사인줄 알았지만 알고 보니 강필주를 어린 시절 강물에 던진 해결사였고 또 장부천의 숨겨진 친아버지였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오기평조차 그 캐릭터가 복합적이다. 그래서 이런 복합적인 감정들을 섬세하게 연기해내는 연기자들이 새삼 돋보이게 되는 것도 이 작품의 큰 미덕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결국 <돈꽃>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걸까. 어째서 이런 속물적인 느낌마저 드는 제목을 달아놓은 걸까. 만일 특별한 주제의식이나 메시지가 부재하다면 이 작품은 그저 그런 기업극화 복수극에 머물렀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이 작품은 최근 들어 보기 드문 날카로운 주제의식을 담고 있다. 그것은 겉보기에 꽃처럼 화려하고 아름답게 보이는 자본의 세상이 사실 한 꺼풀을 열어보면 그 실체가 돈이라는 욕망의 자본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지거나 조작된 것들이라는 이야기다. 

이러한 주제의식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인물은 바로 나모현이다. 그는 장부천을 만나(물론 강필주가 뒤에서 조작한 것이지만) 사랑에 빠져 결혼하는 그 과정들을 스스로 피어난 ‘꽃’으로서의 진정한 사랑의 결실로 여겨왔다. 하지만 아버지의 죽음과 장부천이 결혼 전부터 알고 있던 여자와 아이까지 있다는 사실을 통해 그 ‘꽃’이 ‘돈꽃’이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이보다 강렬한 주제의식이 있을까. <돈꽃>은 우리가 지금껏 그 많은 자본의 환상을 판타지로 그려내던 드라마들에게 그게 ‘꽃’이 아닌 ‘돈꽃’이라 말하고 있는 중이다. 

<돈꽃>은 깊이와 심도를 만들어내는 놀라운 연출력과 복합적인 감정들이 교차되는 캐릭터를 내놓은 대본, 그리고 그런 인물들을 제대로 소화해내는 연기가 결합된 보기 드문 수작이다. MBC 주말드라마가 만들어냈던 ‘막장’의 이미지 때문에 늘 존재해왔던 그 선입견을 깨줄 만큼 충분히 완성도 높은.(사진:MBC)

‘피고인’, 아침드라마에서 흔히 사용하는 막장의 기술 

SBS 월화드라마 <피고인>에 대한 시청자들의 반응은 ‘답답하다’는 것이다. 아니 ‘답답하다’는 걸 넘어서 ‘해도 너무한다’는 것. 이런 반응이 나오는 건 드라마 전개가 끝없는 도돌이표를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껏 흘러온 구성을 보면 지독하게 당하는 박정우(지성)가 그걸 벗어나려 안간힘을 쓰지만 번번이 차민호(엄기준)에 의해 그게 좌절되는 상황의 무한반복이다. 

'피고인(사진출처:SBS)'

잃어버린 기억 속에서 자신이 아내를 죽인 범인이 아닌가 하는 그 충격적인 상황에서 간신히 기억을 찾아 벗어나고, 차민호에 대한 복수를 꿈꾸며 딸이 살아있다는 걸 알고는 스스로 칼에 맞아 병원으로 이송되어 딸을 만나게 되지만 어쩔 수 없이 다시 감옥으로 돌아오고, 그래서 결국 탈옥한 후에는 어렵게 딸을 만나 자수함으로서 반전의 기회를 갖지만 차민호가 결정적 증거를 조작하고 심지어 박정우를 돕기 위해 자수한 성규(김민석)마저 죽음을 맞이하면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다. 

무한 도돌이표. 게다가 그 이야기 전개는 거의 막장에 가깝다. 차민호의 부친인 차영운 회장(장광)이 힘을 써서 박정우의 무고를 증명할 결정적 증거인 칼에 대한 국과수의 조사를 조작하는 이야기는 그게 어떻게 이뤄진 것인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 그저 차회장은 그런 것 정도는 쉽게 할 수 있는 인물이라는 게 이 드라마가 던지는 설명이다. 또한 자수한 후 진실을 밝히려던 성규가 구치소에서 살해당한다는 것에도 그다지 그럴 듯한 개연성 있는 설명은 없다. 다만 차민호라면 그 정도 힘은 당연히 발휘할 수 있다는 식으로 처리되어 있을 뿐이다. 

즉 이런 개연성 없는 마구잡이식의 반전을 노리는 전개는 사실 시청자들을 낚기 위한 작가의 의도라고밖에 볼 수 없다. 끊임없이 박정우의 반격을 저지시키고 지연시킴으로써 시청자들을 답답하게 만들고 그래서 뒷부분에 이어질 사이다에 대한 갈망을 증폭시키려는 의도. 이건 아침드라마에서 흔히 사용하는 막장의 기술이다. 

하지만 이렇게 막장 전개가 가속화될수록 <피고인>의 시청률은 갈수록 치솟는다. 25% 시청률을 넘긴 이 드라마는 이제 30%를 넘기지 않을까 조심스런 예측을 내놓고 있다. 시청자들은 어째서 이런 막장드라마가 이렇게 시청률이 높을까 이야기하지만, 해답은 그것이 바로 막장드라마이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개연성을 무시하고 드라마의 충실한 이야기 전개보다는 시청자들을 잡아끌기 위한 낚시에 몰두함으로써 당연히 가져가는 수치. 그게 막장드라마의 유일한 존재의미가 아닌가. 

<피고인>은 여기에 일종의 위장술 같은 걸 사용한다. 그건 실체인 막장드라마를 가리기 위한 방법이다. 그 첫 번째는 연기에 있어서 믿고 보는 연기자인 지성을 주인공으로 세워 몰입도를 높여놓았다는 점이다. 설마 지성이 저런 놀라운 연기를 보여주는데 막장이겠어, 하는 착시효과가 이 드라마의 초반 몰입을 만들어주었다고 볼 수 있다. 그만큼 지성의 존재감이 드라마에서는 결정적으로 중요했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기존의 막장드라마들이 흔한 가족드라마의 변형으로서 불륜과 출생의 비밀이 덧붙여진 가족복수극을 그려냈던 것과는 달리, <피고인>은 장르물에 막장드라마의 기술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시청자들로서는 미드에서나 많이 봐왔던 소재인 감옥이야기라는 장르적 외피를 보며 이 드라마가 주는 몰입감이 막장드라마의 기술 때문이라는 걸 부인했을지 모른다. 

<피고인>이 만들어낸 막장 장르극이라는 새로운 형태는 그래서 시청층의 외연을 넓혀놓았다. 막장드라마의 주 시청층이었던 중년 여성들에게는 익숙한 전개를 제공하면서도 이 드라마는 그간 막장드라마에 시큰둥했던 중년 남성시청자들마저 장르의 외피로 위장된 막장드라마로 끌어들였다는 것이다. 

여러모로 <피고인>의 성공은 막장드라마와 장르극의 혼합이라는 새로운 막장드라마의 시대를 예고하게 한다. 장르물이 갖는 미드적인 세련됨에 막장드라마가 갖는 빠른 전개, 그리고 반전에 반전을 거듭함으로써 몰입감을 높이는 방식. 그래서 높은 시청률을 가져가지만 시청자들로서는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보다는 어딘가 작가가 쳐놓은 거미줄에 걸려 있는 듯한 불편함을 주는 드라마. 과연 이러한 변칙적인 드라마의 탄생은 괜찮은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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