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와 임성한 작가, 그 밀월의 끝

 

임성한 작가는 은퇴한 걸까 퇴출된 걸까. 임성한 작가의 소속사인 명성당엔터테인먼트 이호열 대표는 23일 임성한 작가의 은퇴를 공식화했다. “은퇴가 맞으며, 복귀 가능성은 없다고 한 것. 그는 임 작가가 예전부터 10작품을 끝으로 은퇴를 계획하고 있었다고 했다.

 

'압구정 백야(사진출처:MBC)'

하지만 이러한 은퇴선언이 나오게 된 계기는 장근수 MBC 드라마본부장이 방송심의소위원회(방심위)에서 다시는 임성한 작가와 작품을 하지 않겠다고 밝힌 데서 비롯됐다. 그는 드라마 작가들은 현재작이 끝날 때 차기작 계약을 하는데 (임성한 작가와) 현재 계약을 하지 않았다약속한 주제대로 진행되지 않아 당혹스럽다고 말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 얘기가 기사화되어 일파만파 퍼져가자 임성한 작가의 소속사측에서 은퇴를 공식화한 것. 물론 수순은 이렇게 됐지만 소속사 말대로 임성한 작가가 본래부터 <압구정백야>를 끝으로 은퇴를 계획하고 있었을 수 있다. MBC 장근수 본부장의 발언은 이런 임성한 작가의 행보를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상황에서 나온 얘기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작가에게 있어서 은퇴선언이라는 말이 합당한 지, 또 굳이 이렇게까지 공식화할 필요가 있는지는 의문이다. 작가는 절필을 한다면 모를까 은퇴라는 개념이 애매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안 쓰면 은퇴가 되는 셈이다. 그런데도 굳이 은퇴라는 표현을 쓰는 데는 그만한 내막이 있는 게 아니냐는 얘기도 나온다.

 

MBC는 임성한 작가의 드라마가 해온 파행이 이제는 시청률로 덮고 가기에는 그 임계치를 넘어섰다고 느끼는 상황이다. 막장드라마도 시청률을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 감수할 수 있다 여겼지만 지난 <오로라 공주>처럼 이른바 데스노트가 나오는 정도의 파행을 겪고, 또 작가 퇴출 여론까지 생겨난 상황은 MBC로서도 큰 부담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자칫 MBC 드라마국 전체의 이미지를 깎아먹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임성한 작가는 시청률을 위해 막장의 끝까지 밀고 나갔다가 결국은 제 살 깎기를 한 셈이 되었다. 즉 제아무리 막장이라도 드라마를 파괴하는 수준으로는 가지 않았어야 한다. 제왕적인 작가가 자기가 만든 인물들이라고 자극을 위해 제 멋대로 유린하는 파행에 이제는 그나마 있던 시청자들조차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지경에 이르렀다. 해도 너무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극은 더 큰 자극으로만 유지될 수 있을 뿐이다. 결국 죽어가는 인물들의 문제는 부메랑처럼 임성한 작가에게도 부담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임성한 작가가 스스로 은퇴를 한 것인지, 아니면 방송사에 의해 퇴출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최근 벌어졌던 임성한 작가를 둘러싼 그 많은 잡음들과 논란들을 떠올려 보면 이런 결과는 당연히 예상될 수 있는 것이었다. 상식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방송사라면 굳이 이런 논란까지 부담으로 가져가면서 드라마를 만들 이유가 있을까. 부정적인 이미지 때문에 광고 수익과 연결되지도 못하는 그런 시청률도 이제는 그리 효용가치가 없다 여겨질 것이다.

 

하여간 MBC와 임성한 작가의 밀월은 이걸로 끝장이 났다. 그 많은 캐릭터들이 어느 날 갑자기 픽 쓰러져 죽어버렸던 것처럼, 임성한 작가의 은퇴선언은 그렇게 갑작스럽게 튀어나왔다. 물론 이것으로 국내에 막장드라마가 사라지거나 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막장이라는 드라마의 결말이 어떻게 된다는 것은 이제 어느 정도 알게 되지 않았나 싶다. 이것이 은퇴를 공식 선언해도 퇴출이 아닐까 대중들이 생각하는 이유일 것이다.

 

<풍문>, 드라마에 조명이 왜 필요한가를 묻다

 

조명이 너무 어두워 답답하다? SBS 수목드라마 <풍문으로 들었소>의 화면이 너무 어둡다는 시청자 의견이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드라마의 전체적인 조도는 여타의 드라마들과 비교해볼 때 확실히 낮다. 무언가 명확하게 보고자 하는 시청자들에게는 이처럼 조도를 낮춰 피사체를 불명확하게 만들어내는 조명이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풍문으로 들었소(사진출처:SBS)'

하지만 이 조명을 단지 어둡다라고만 치부하기에는 거기에 담겨진 많은 미학적 의미들이 상쇄되는 느낌이다. 그것은 제작진이 밝힌 것처럼 어둡다기보다는 실제 우리의 일상에서 느껴지는 조명에 가깝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 것이다. 적당히 밝고 적당히 어두운 게 우리가 실제로 현실에서 느끼는 밤의 풍경이다. <풍문으로 들었소>의 조명은 리얼리티를 추구할 뿐, 그저 어둡게 보이려고 하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이 명확하게 보여주지 않는 조명에는 그만한 작품의 의도가 담겨져 있다. <풍문으로 들었소>는 대부분 그 이야기가 한정호(유준상)의 집에서 전개된다. 그러니 이 집이 가진 흡인력이 드라마의 중요한 요소가 되기도 한다. 즉 모든 걸 다 드러내 보여주는 집은 더 이상 흡인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점이다. 잘 드러나지 않고 문으로 겹겹이 막혀 있어 그 안에서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가 계속 궁금하게 여겨질 때 이 집은 계속 시청자들의 시선을 잡아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다소 흐릿한 조명이 주는 효과는 지대하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수군대고 벌어지고 있는 듯한 그 느낌이 자연스럽게 나타나게 된다. 드라마가 8회를 지났지만 한정호의 집이 여전히 머릿속에 완벽하게 그려지지 않는다는 건 그래서 의도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집은 마치 RPG게임의 던전처럼 저 앞으로 걸어 나가야 비로소 거기 무언가가 있는가를 확인할 수 있는 긴장감을 유발하는 공간이어야 한다. 흐릿한 조명은 그 던전 효과(?)’를 만들어낸다.

 

<풍문으로 들었소>의 이러한 보통 드라마들과는 사뭇 달라 보이는 조명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들은 사실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지금 현재 우리네 드라마가 처한 현실과 맞닿아 있다. 사실 조명이 이렇게 화제가 되는 건 거꾸로 말하면 그간 드라마에서 조명은 그다지 중요한 것으로조차 생각되지 않았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신기한 일이지만 드라마 제작에는 조명 감독이 있기 마련이다. 조명 감독이라면 단순히 빛을 쏘아 피사체들을 잘 보이도록 하는 것만이 그 역할일 수는 없을 것이다. 영화든 드라마든 결국은 빛의 예술이다. 그 빛이 어떻게 음영을 만들고 그 음영이 입체감을 만들어내 작품의 이야기와 맞닿게 하는가는 조명감독이라면 고민해야할 부분이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말하는 막장드라마들을 보라. 거기 어디 조명이 존재하는가. 그저 노출 과다처럼 보일 정도로 확연히 드러내는 조명만 있을 뿐, 무언가를 가리거나 감추거나 음영을 만들어 그것이 하나의 영상을 통한 이야기가 되는 조명은 발견하기가 어렵다. 이런 조명은 마치 포르노처럼 피사체의 구석구석을 드러내기만 할 뿐 거기에 빛의 언어를 담아내지 못한다. 막장드라마에서 조명은 사실상 불필요하다. 그저 환하게 비추기만 하면 되는 것이니까.

 

안타까운 건 이러한 막장드라마의 포르노적인 조명에 점점 시청자들이 적응되어 간다는 점이다. 뭐든 잘 안보이면 답답하게 느껴지는 정도라면 막장드라마의 조명이 얼마나 우리의 성급한 감각을 자극해왔는가를 미루어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풍문으로 들었소>의 다소 흐릿한 조명에 대한 반응들은 그래서 지금 현재 막장드라마들이 얼마나 드라마 전반에 미치는 악영향이 큰가를 에둘러 말해주기도 한다.

 

사실 막장드라마는 조명뿐만 아니라 스토리도 포르노적이다. 그 안에 어떤 문학적인 뉘앙스나 상징적인 의미 같은 걸 담아내려 하지 않는다. 그저 자극적인 대사들만 오갈 뿐이다. 결국 막장드라마의 시퀀스란 만나면 드잡이하듯 한 판 붙는 것이 대부분이 아닌가. 가려지거나 에둘러 표현하는 것이 사라지고 그저 직설적으로 툭툭 뱉어내기만 하는 대사들의 연속은 그 포르노적 속성으로 시청자들의 조급증만 점점 키워놓는다. 빠른 전개에 대한 강박은 바로 거기서 생기기 마련이다.

 

우리가 드라마를 보는 건 단지 포르노적인 자극만을 얻기 위함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거기서 무언가 세계를 발견하고 싶어 하고 또 우리가 사는 삶과 현실을 공감하고 싶어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노출만이 아닌 감춤의 미학도 당연히 있어야 한다. 사실 막장드라마 같은 노출증 양상을 보이는 드라마에는 조명이 필요 없다. <풍문으로 들었소>의 다소 흐릿한 조명은 그래서 거꾸로 조명이 왜 드라마에 필요한가를 잘 말해주고 있다.

 

욕먹어도 보면 그만? 임성한 월드의 참상

 

이제 임성한 월드는 더 이상 욕하는 것도 지겹다는 대중들의 반응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항간에는 아예 임성한 월드에 대한 기사가 나오는 것조차 불편해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런 비판 기사는 사실상 임성환 월드가 먹고 자라나는 자양분(?)이 되기 때문이다.

 

'압구정백야(사진출처:MBC)'

임성한 월드는 논란을 먹고 자란다. 도무지 나올 수 없는 칭찬은 당연히 논란으로 이어지고, 당연한 비판 역시 그 논란을 부추긴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와중에도 이것이 임성한 월드에 일조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고민이 생기는 건 그래서다. 무관심이 답일 수 있지만 그래도 최근 들어 조금 오른 시청률 때문에 자꾸만 임성한 월드에 대한 재조명 기사들까지 나오는 건 이해하기가 어렵다.

 

시청률은 작정하면 나올 수밖에 없다. 가장 쉬운 것은 룰을 깨는 것이다. 드라마라는 창작의 공간에도 정해진 룰이라는 게 있다. 그러니 이걸 깨버리면 당연히 시끄러워진다. 그리고 그 시끄러움은 임성한 월드가 목적하는 것이다. 욕하면서 보는 드라마? 여기서 함정은 방점이 욕하면서에 찍히는 게 아니라 보는에 찍힌다는 점이다.

 

이렇게 찍힌 방점은 본말을 전도시킨다. 보게 하기 위해 욕먹기를 자초하는 상황이 생기는 것이다. 등장인물(그것도 주인공급)의 어이없는 죽음은 욕먹기가장 좋은 수단이다. 물론 거기에는 작가의 욕망이 들어 있다. 이 세계에는 작가가 신이다. 그는 인물과 인물을 이어붙이는 것에서 장애물이 있다면 거침없이 제거해낸다. 그 세계가 작가만의 것이 아니라 이미 시청자들의 것이기도 하지만, 그런데서 나오는 잡음들은 오히려 을 통한 시청률로 이어진다.

 

죽었던 인물이 다시 유령이나 환시로 재등장하는 건 그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한 인물에 대한 대중들의 뜨거운 논란의 불씨를 끄기 보다는 오히려 계속 끌고 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보여 섬뜩해진다. 마치 길거리에서 드잡이 싸움이 벌어지면 그 내용과 상관없이 시선을 집중시키는 것처럼 임성한 월드는 무관심이나 비판조차도 가만두지 않고 오히려 키워버린다.

 

당연히 작품을 일관적으로 통과하는 메시지 같은 건 찾아보기 어렵다. 대신 그 지극히 이상한 임성한 월드가 마치 보편적인 세계인 양 매일 같이 대중들에게 노출되는 끔찍한 악영향만이 거기에는 존재한다. 현실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놀라운 장면들이 주는 황당함과 어이없음은 그 강도가 너무 강해서 비판조차 허탈하게 만든다. 그러니 작품성 자체는 일찌감치 포기한 채 황당한 웃음을 지으며 자극만을 쳐다보는 지경에 이를 수밖에 없다. 자조적이고 자기 파괴적인 시청패턴이다.

 

이 황당한 세계가 매일처럼 대중들에게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보여진다는 건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아무런 이유 없이 죽어나가는 등장인물을 의심 없이 바라보다보면 마치 사람을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대하는 것이 당연한 듯한 세계관을 내면화하게 될 수도 있다. 룰 자체는 아랑곳없이 제멋대로 방향을 틀어버리는 이야기에 익숙해지다 보면 마치 그런 임기웅변식의 삶이 우리가 지향해도 무방한 삶의 본질이라는 것에 승복하게 될 수도 있다.

 

이러한 임성한 월드보다 더 큰 문제는 이 세계를 매일 매일 보여주는 방송사의 윤리 부재의 현실이다. 시청률만 되면 뭐든 받아들인다는 이런 식의 태도는 모든 가치들을 경제적인 논리 아래 굴복시킨다. 일부 기자들을 비판하는 기레기라는 말을 끌어와 작레기라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는 상황을 방송사는 왜 좌시하고만 있는 걸까.

 

장 보드리야르는 시뮬라크르를 디즈니랜드에 비유해 설명하며, “디즈니랜드는 미국 자체가 거대한 디즈니랜드라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함이라고 말한 바 있다. 임성한 월드가 갖는 정치적 위험성은 바로 이 점에 있다. 이 극단의 막장의 세계는 어떤 면에서는 지독한 현실의 막장을 은폐하는 힘을 발휘한다. 이것은 <펀치> 같은 작품들이 오히려 막장의 현실들을 환기시키는 것과는 정반대의 흐름이다.

 

임성한 월드는 그래서 세상의 모든 막장에 쏟아지는 욕들을 마치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며 성장하는 괴물처럼 보인다. 이 룰도 없고 삶과 죽음의 예의도 없는 세상을 들여다보면서 혀를 차고 있는 순간, 저 바깥세상에서 돌아가는 막장의 현실은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마비된다. 과연 욕먹어도 그만일까. 이런 세계를 방치하는 것은.

 

시청률의 늪에 빠진 MBC드라마, 문제는?

 

또다시 임성한 작가다. 이번 <압구정백야>에서는 잠잠하다 싶었는데 데스노트 논란이 터져 나오고 있다. 백야(박하나)와 결혼식을 올리자마자 조직폭력배와의 실랑이 끝에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한 조나단(김민수)이 그 주인공이다. 물론 드라마에서 상황에 따라 인물이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임성한 작가 드라마의 죽음은 너무 갑작스럽고 허무한 느낌마저 준다는 점에서 전작인 <오로라공주>의 데스노트의 시작이 아니냐는 우려를 낳고 있다.

 

'압구정백야(사진출처:MBC)'

<오로라공주> 때 연달아 죽음을 맞이한 등장인물들이 만들어낸 논란은 작가의 하차 운동까지 벌어질 정도로 그 파장이 컸다. 그걸 의식했는지 MBC 측은 부랴부랴 또 해명에 나섰다. 애초에 조나단의 죽음은 예고되어 있었다는 것. 하지만 그것이 이미 예정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어쨌든 갑작스런 죽음을 지켜봐야 하는 시청자들에게는 충격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갑작스런 죽음은 아니더라도 이번 <압구정백야> 역시 자극적인 장면들의 연속으로 시청자들의 구설수에 오른 적이 있다. 수영장 격투신은 이 드라마를 보지 않는 사람들에게까지 화제가 되었다. 물속에서 상대방의 허벅지를 꼬집는 장면은 역시 임성한 작가라는 얘기를 만들었다. 친모인 서은하(이보희)에게 복수하기 위해 접근한 백야가 그녀에게 시어머니인지 친정어머니인지를 묻는 장면은 거의 한 회를 다 채울 정도의 치열한 육박전을 통해 보여줬다. 설정도 설정이지만 그걸 보여주는 방식 또한 보는 이들의 혀를 내두르게 만든 장면들이었다.

 

드라마를 하면서 방송사가 나서 해명을 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유독 임성한 작가의 작품을 할 때면 방송사의 해명이 이어지는 건 그 작품이 가진 논란과 파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반증이다. 그런데 이렇게 큰 논란이 벌어지는 작가의 작품을 계속해서 그것도 일일극으로 편성하는 MBC의 저의는 뭘까.

 

작년 MBC 드라마의 얼굴이 된 건 <왔다 장보리>였다. 물론 임성한 작가와는 다르다고 할 수 있지만 여전히 막장 논란이 제기된 김순옥 작가의 작품이었다. 그나마 긍정적인 가족애를 그리려 노력했다고는 하지만 연민정(이유리)이라는 캐릭터의 악행은 상식 이하로 자극적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결국 이 드라마가 막장 논란을 벗어난 것은 35%를 넘는 시청률 덕분이었다.

 

임성한 작가나 김순옥 작가 같은 자극적인 드라마를 그리는 작가의 작품을 선택하는 이유는 당연히 시청률이다. 실제로 이들 작가들은 논란은 일으키지만 확실히 시청률 제조기라는 표현이 틀리지 않는 작가들이다. 하지만 과연 시청률이 모든 걸 용서할 수 있을까. 그렇게 시청률을 가져가는 사이에 MBC드라마의 이미지가 점점 자극으로 점철되어가고 있다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과거 드라마 공화국이라고 부르던 시절 MBC드라마를 떠올려보라. MBC에서 만들어진 <여명의 눈동자> 같은 대하드라마에서부터 <전원일기> 같은 장수 드라마, <허준>이나 <대장금> 같은 도전적인 퓨전사극들이 전체 드라마업계를 견인하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어떤가. 물론 작품성으로 승부하는 작품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너무나 시끄럽고 시청률에 경도된 임성한 작가나 김순옥 작가가 만든 드라마들이 마치 MBC드라마의 얼굴이 된 듯한 인상이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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