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블과 종편은 되는데 지상파는 안 되는 것

 

한 때 지상파는 특권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이제 점점 옛말이 되어가고 있다. 거대 자본을 가진 케이블 방송들이 콘텐츠 경쟁력을 갖고 지상파를 위협하고 있으며, 종편들도 조금씩 자신들에게 최적화된 콘텐츠들을 생산해내고 있는 상황이다. 반면 지상파의 대응은 굼뜨기 이를 데 없다. 다양한 뉴미디어가 TV라는 올드미디어를 밀어내고, 케이블, 종편이 콘텐츠 경쟁력으로 압박해오면서 지상파의 시청률은 이미 반 토막이 난 상태가 아닌가.

 

'1박2일(사진출처:KBS)'

사극 하면 무조건 50% 시청률은 나오는 줄만 알았던 시절은 지나갔다. 사극도 20% 넘기가 쉽지 않은 지금 현대극은 15%만 넘어도 그럭저럭 괜찮은 성적이라고 여겨질 판이다. 그래도 30%를 넘기는 주말극들이 있지만 자극적인 설정의 막장드라마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른바 욕하면서 보는 드라마. 이런 드라마의 시청률을 정상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예능 프로그램은 사정이 더 안 좋다. 주중 11시대에 포진한 예능 프로그램들은 시청률 10% 넘기기도 힘든 실정이다. <놀러와> 같은 장수 프로그램이 폐지되었고, 한때 새로운 토크쇼로 각광받았던 <무릎팍도사>는 강호동이 돌아왔어도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가장 치열한 격전지라고 할 수 있는 주말 예능 프로그램들은 무려 두 시간에 가까운 파격편성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15% 시청률을 내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반면 tvN이나 Mnet 같은 CJ 계열의 케이블 채널과 JTBC 같은 종편의 성장은 점점 눈에 띈다. <슈퍼스타K>로 Mnet이 지상파를 포함해 동시간대 최고 시청률을 기록하며 지상파와 케이블 사이에 어떤 벽을 허문 이후, <보이스 코리아>, <응답하라 1997>, <푸른 거탑>, <SNL코리아> 같은 프로그램들은 끊임없이 지상파 프로그램과 비교되었다. JTBC는 <무자식 상팔자>가 무려 10%를 넘는 시청률을 기록한 데 이어 <썰전>이 좋은 반응을 얻고 있고 <히든싱어>는 4%대의 좋은 시청률을 내고 있다. MBN의 <황금알> 같은 집단 토크쇼는 2%대 시청률을 유지하고 있어 유사한 토크쇼들이 종편에서 우후죽순 생기고 있다.

 

중요한 것은 콘텐츠를 바라보는 대중들의 시선이다. 대중들은 지상파가 어딘지 새로운 시도를 하지 못하고 있다고 여기고 있는 반면, 그 틈새를 파고 들어오는 케이블 같은 지상파 이외의 채널들이 끊임없는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다고 여긴다. 이것은 실제로도 그렇다. 새로운 시도라는 것이 결국은 무언가 위기 상황이나 절실함을 바탕으로 해서 생겨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 때 잘 나가던 <1박2일> 같은 예능 프로그램이 10% 시청률로 곤두박질 쳐도 지상파는 이를 과감히 폐지하고 새로운 예능을 시도하기가 쉽지 않다. 그것은 그 포맷이 아깝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시도가 제작 책임자들에게는 자신들의 실적에 모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도 자체를 기피하게 된다. 지상파가 유명 MC를 잡는데 혈안이 되어 있는 이유는 고작 리스크를 줄이는 것을 새로운 시도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안전하다 여기는 것이고, 문제가 생겨도 유명 MC 책임으로 몰아가는 경향도 있다. 결국 이런 복지부동의 자세는 제작진의 의욕을 꺾기도 한다.

 

유명 PD들이 지상파에서 케이블로 이적하는 것은 이러한 회사 시스템의 문제 때문이다. <해피선데이>에서 이명한 PD, 나영석 PD, 신원호 PD, 그리고 이우정 작가가 모두 CJ에서활동하고 있는 건 우연이 아니다. 그들은 KBS 같은 지상파 조직이 가진 한계를 일찌감치 본 것이다. 그래서 조금 리스크가 있어도 무언가 새로운 걸 시도할 수 있는 케이블로 옮겨간 것. 실제로 신원호 PD 같은 경우, 본래 영화를 전공했던 경력을 살려 <응답하라 1997> 같은 드라마를 시도해 큰 성공을 일궈내기도 했다. 이러한 인력의 유출은 지상파의 위기를 더욱 가속화시킨다.

 

최근에는 지상파에는 불가능하지만 종편이나 케이블이기 때문에 가능한 콘텐츠들이 나오고 있다. JTBC의 <썰전>이 하고 있는 정치 시사 토크쇼나 예능 비평 토크쇼는 종편이라는 위치에 서 있기 때문에 가능한 형식이다. 또 19금과 정치 시사를 묶어서 라이브 콩트 코미디로 풀어내고 있는 tvN의 <SNL코리아>도 마찬가지다. 이런 프로그램을 지상파에서 했다면 당장 공영성 논란을 일으킬 소지가 크다. 하지만 종편이나 케이블은 으레 그런 것인 양 넘어가는 경향도 있다. 이것은 어찌 보면 역차별이라고도 볼 수 있다. 지상파에 대해 상대적으로 엄격한 잣대는 지상파 콘텐츠의 경쟁력 하락으로도 이어진다는 점이다.

 

지상파 콘텐츠의 경쟁력 저하는 잘못된 시청률 추산방식이 야기하는 면도 크다. 지금처럼 모집단의 TV 본방만이 시청률 추산에 들어가는 방식은 시대에 맞지 않는다. 프로그램을 TV 앞에서 그 시간대에 맞춰 보는 이들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대신 이동 중에 스마트폰으로 보고, 또 지나간 방송을 IPTV를 통해 자신이 원하는 시간대에 자유롭게 보는 시청 패턴이 늘고 있다. 이런 변화에 적극적인 젊은 세대들의 시청 패턴을 반영하지 못하는 지금의 시청률 추산은 지상파의 콘텐츠를 기형적으로 만들 수 있다. 즉 지금의 시청률이 주로 기록하는 중장년 세대에 맞춰진 콘텐츠들이 양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 지상파 드라마에서는 이런 경향이 짙게 나타나고 있다.

 

지상파 프리미엄이 있던 시대는 지나갔다. 오히려 지금은 지상파이기 때문에 못하는 것들이 있는 시대다. 결국 다매체 시대에 접어든 이상, 지상파는 콘텐츠 경쟁력을 이 변화된 환경에 맞게 높여야 한다. 그러려면 먼저 지금의 시청률 추산 방식이나 지상파라는 안온한 시스템에 여전히 취해 있어서는 곤란하다. 위기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점이다. 오히려 지상파이기 때문에 역차별이 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지상파만이 할 수 있는 콘텐츠를 적극적으로 개발해나가는 노력이 없다면, 앞으로 지상파의 입지는 점점 좁아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장윤정 가족을 난도질한 <쾌도난마>, 과연 적절했을까

 

갈수록 가관이다. 채널A <박종진의 쾌도난마>는 전혀 게이트키핑이 되지 않는 프로그램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이 프로그램의 소개란에 들어가면 ‘쾌도난마(快刀亂麻)’의 뜻을 이렇게 풀어놓았다. ‘헝클어진 삼을 잘 드는 칼로 자른다. 얽힌 사물이나 비꼬인 문제들을 솜씨 있게 처리한다는 뜻. 그 칼을 손에 들고 나선 인물이 박종진이다. 문제를 해결하자고 나선 프로그램이 아니다. 인상 쓰게 만드는 사회적인 모순과 행태들에 대해 풋 하고 웃어버릴 수 있는 그런 솔직한 대담, 신개념 시사토크를 박종진이 이끈다.’

 

'박종진의 쾌도난마(사진출처:채널A)'

과연 이 프로그램은 설명처럼 헝클어진 문제를 솜씨 있게 처리했을까. 오히려 손에 든 방송이라는 칼로 한 사람의 가족사를 난도질한 것은 아니었을까. 과연 생방송으로 장윤정의 남동생과 어머니를 출연시킨 방송을 보고 시청자들이 ‘풋 하고 웃어버릴 수’ 있었을까. 먼저 시사 프로그램에서 왜 장윤정의 가족사를 소재로 삼았는가가 의문이다. 그것이 과연 그토록 시사적인 이야기였을까. 혹 그저 자극적인 소재로서 장윤정의 가족사를 방송에 올렸던 것은 아니었을까.

 

장윤정이 <힐링캠프>에서 인정한 것들에 대해서 그 남동생과 어머니가 조목조목 반박하는 내용은 마치 막장드라마의 한 대목을 보는 것처럼 자극적이었다. 남동생 장경영씨는 “장윤정의 억대 빚은 자신의 사업 때문이 아니다”라고 주장했고, 차트로 지난 10년 간의 지출내역과 통장내역을 공개하기도 했다. “장윤정이 어머니를 정신병원에 집어넣으려 했고, 사람을 시켜 죽여야 엄마와 관계를 끝낼 수 있다고 말했다"는 장경영씨의 대목이나, "딸을 위해 내가 스스로 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장윤정 어머니의 말은 한 가족으로서는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심지어 한쪽의 입장만을 대변할 수 있는 카카오톡 내용의 공개는 실로 이 프로그램이 자극을 위해서는 한 개인의 프라이버시조차 별 거리낌 없이 노출시킨다는 점에서 심지어 공포스럽기까지 했다. 장윤정과 장윤정 남동생 그리고 어머니 사이에 놓여진 갈등은 누가 잘했고 잘못 했고를 떠나 그저 개인의 가족사일 뿐이다. 가족 간의 갈등에서 어떻게 누구 한 사람의 잘못만을 지적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누군가의 손을 들어준다 해도 그것은 결국 그 가족을 파탄으로 만들 뿐이다.

 

한 가족의 내밀한 갈등을 서로 부추기고 끄집어내 그 끝장을 보는 행태를 우리는 이른바 막장드라마를 통해 보곤 한다. 심지어 드라마 같은 허구에도 대중들이 손가락질을 하는 것은 그것이 결국 가족의 파탄을 바라보게 만드는 가학성 때문일 것이다. 하물며 진실을 다뤄야 할 시사 프로그램이 굳이 파헤치지 않아도 될 누군가의 가족사를 난도질하는 것이 막장드라마와 다를 게 뭐가 있겠는가.

 

물론 이 프로그램은 장윤정 또한 출연시키려고 했다며 편파방송이 아니었다고 주장했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건 굳이 가족 간의 싸움을 생방송 무대에 올리려 했다는 그 선정성이다. “전화주면 언제든 출연시키겠다”는 말에 대중들이 분노하는 건 그 때문이다. 특히 방송 마무리에 박종진 진행자가 던진 멘트는 이 프로그램의 기막힌 성격을 드러내준다. “오늘 어머님하고 동생 이야기를 들으셨는데 이 얘기가 사실이 아니다 싶으면 장윤정 씨 언제든지 연락 주십시오.” 이 말은 애초부터 방송 내용이 사실인지 아닌지에 대한 검증 절차 자체가 없었다는 자기고백인 셈이다. 과연 이게 방송이 할 일인가.

 

사실이 아니면 방송을 내지 말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실 여부를 판단했어야 한다. 설혹 사실이라고 해도 방송 프로그램의 힘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그것이 윤리적으로 방송에 적합한가를 고민했어야 한다. 뭐든 시선을 잡아끌어 화제가 될 수 있으면 일단 던지고 보는 방송 행태는 카더라 통신과 전혀 다를 게 없을 것이다. 이런 막장드라마식의 방송으로 왜 대중들이 피로를 느껴야 하는가. <쾌도난마>는 시청률을 위해서라면 심지어 한 개인의 가족사에까지 칼을 휘두르는 막장드라마를 재연해 보여주었다.

<내 딸 서영이>, 그 막장과 국민드라마 사이

 

<내 딸 서영이>가 시청률 40%를 넘겼다고 난리들이다. 하긴 그럴 만도 하다. 최근 들어 40% 시청률이라는 것은 거의 경이적인 수치가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하지만 시청률 40%를 넘겼다고 섣불리 국민드라마 운운하던 시절은 지나갔다. 작년 <추적자>는 20% 안팎의 시청률에 머물렀지만 국민드라마로 칭송되었다. 이제 국민드라마라는 칭호가 시청률이 아니라 대중들의 공감대에 의해 결정되고 있다는 반증이다.

 

'내 딸 서영이'(사진출처:KBS)

그렇다면 <내 딸 서영이>는 과연 이런 의미에서의 국민드라마가 될 가능성이 있을까. 항간에는 막장드라마라는 비판이 있지만, 그래도 그 가능성만은 충분한 드라마라 여겨진다. 먼저 이서영(이보영)이라는 젊은 세대가 생각하는 가족에 대한 관점과 이삼재(천호진) 같은 아버지로 대변되는 나이든 세대가 생각하는 가족에 대한 관점이 갈등하고 부딪치면서 어떤 교집합을 찾아가는 면모가 대단히 참신하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좋은 기획의도와 설정이 존재하는 것과 동시에, 이 드라마는 자칫 잘못하면 막장으로 흘러갈 자극적인 포인트들도 갖고 있다. 즉 서영이 아버지를 부정했던 그 과거의 비밀이 그렇고, 초반부터 이미 복선으로 제시되었던 강성재(이정신)의 출생의 비밀이 그렇다. 이 비밀들은 흔히 그러하듯이 자극으로만 치닫게 되면 막장이 될 수도 있지만, 잘만 균형점을 잡으면 드라마가 굴러가게 하는 적절한 동력이 될 수도 있다.

 

초반에는 이 균형이 잘 유지되었다. 이삼재의 입장에서 보여준 절절한 부성애가 시청자들의 마음을 울렸고, 동시에 아버지를 부정하고 난 후 가시방석에 살아가는 이서영의 마음도 시청자들을 아프게 했다. 또한 이서영을 위해 모든 걸 배려하는 강우재의 모습은 훈훈하면서도 극에 긴장감을 주기에 충분했고, 이상우(박해진) 역시 강미경(박정아)과 풋풋한 연인관계를 이어가면서 후에 드러날 이서영과의 얽힌 관계가 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이 많은 비밀들이 풀어져 나가는 단계에 이르러 <내 딸 서영이>는 균형점을 잃고 그 흔한 막장드라마들이 쓰던 자극 코드들을 반복하고 있다. 강미경의 오빠가 서영이의 남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상우가 강미경과 헤어지는 것도 모자라 최호정(최윤영)과 결혼까지 하는 것은 과도해 보이고, 강우재가 서영이의 비밀을 알아채고도 직접 소통하려 하지 않고 끊임없이 변죽만 때리는 행동도 그다지 개연성 있다 여겨지지 않는다.

 

게다가 강우재와 서영이의 비밀을 둘러싼 냉전이 해소되지도 않은 채, 갑자기 드러난 강성재의 출생의 비밀 역시 너무 전형적인 자극 코드로 풀어내짐으로써 <내 딸 서영이>는 마치 갑자기 막장드라마가 된 듯한 장면들을 연달아 보여주었다. 분노에 미친 듯이 고함을 지르고, 누군가의 뺨을 때리고, 어제까지 그토록 아끼던 자식을 하루아침에 원수 보듯 하는 모습이 그렇다. 물론 이 비밀들이 얼마나 엄청난 사건인지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을 풀어내는 방식이 조금만 달랐다면 <내 딸 서영이>는 더 큰 감동을 시청자들에게 전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우리가 흔히 통칭해서 부르는 막장드라마라는 수식은 참 애매한 표현이다. 그저 출생의 비밀이 들어간다고 해서 모두가 막장드라마가 되는 것도 아니고, 그게 없다고 해서 막장드라마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건 공감대와 자극의 문제다. 공감대가 없이 자극으로 자꾸 흘러가게 되면 같은 소재를 사용한다고 해도 대중들은 막장으로 드라마를 인식하게 된다. 그만큼 그 자극 코드들이 너무 많이 사용되면서 대중들을 학습시켰기 때문이다.

 

시청률 40%가 넘었다고, 단지 그 수치적인 것에 호들갑을 떨 필요는 없다. 그것이 그대로 드라마의 공감대가 높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니까. 대신 <내 딸 서영이>가 그 시청률이라는 수치를 위해 더 멀리 가기 전에 빨리 본래의 좋은 의도, 즉 세대와 계층과 성별이 서로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그런 드라마로 돌아오길 바란다. 시청률 높은 막장드라마가 되느니 차라리 조금 시청률이 낮은 국민드라마가 되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

개연성 잃어가는 <메이퀸>, 문제는?

 

만일 막장드라마를 의도된 막장드라마와 의도치 않은 막장드라마로 나눌 수 있다면 <메이퀸>은 후자에 해당할 것이다. <메이퀸>은 물론 초반부에 어린 해주(김유정)를 아동학대에 가깝게 핍박하는 계모 달순(금보라)의 에피소드가 과한 면이 있었던 게 사실이지만 그 과한 설정에 나름대로의 개연성이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중반을 넘겨온 <메이퀸>은 본래 하려던 이야기를 잃어버린 채 이리저리 자극적인 상황만 쫓는 꼴이 되어버렸다.

 

'메이퀸'(사진출처:MBC)

해주(한지혜)와 창희, 그리고 강산(김재원)과 인화(손은서)의 멜로 라인의 변화를 보면 이는 단박에 드러난다. 자신의 아버지가 해주(한지혜)를 키워준 천홍철(안내상)을 죽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창희(재희)가 해주와 헤어지고 갑자기 인화와 가까워지는 얘기는 그럴듯한 이유와 근거가 제시되어 있지 않다. 심지어 인화는 어렸을 때부터 강산을 쫓아다니던 인물이 아닌가. 그런 인화가 어느 날 갑자기 자신에게 다가오는 창희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데는 어떤 계기가 필요할 텐데 그런 면도 전혀 드러나 있지 않다.

 

어느 날 갑자기 다가온 창희 앞에서 인화가 두근거리는 가슴을 느끼고는 “내가 왜 이러지?”하는 장면으로 그 관계의 변화를 설명한다는 것은 작가로서는 직무유기에 해당한다. 사실 이런 합당한 이유 없이 돌변하는 심경의 변화는 캐릭터를 아주 우습게 만들어버린다. 창희야 복수를 위해 인화에게 의도적으로 다가갔다는 심증을 가질 수 있지만 당사자인 인화는 다르다. 인화라는 캐릭터는 여기서 어떤 성격을 품고 스스로 움직이는 인물이 아니라 작가에 의해 조종되는 인형으로 전락한다.

 

<메이퀸>에서 이렇게 조종되는 캐릭터들은 의외로 많다. 또 하나의 불운의 캐릭터가 장일문(윤종화)이다. 일문은 전형적인 민폐 캐릭터로서 그가 나오는 장면은 하나의 클리쉐로 처리된다. 즉 그는 어떤 잘못을 저지르고는(늘 그렇다) 아버지인 장도현(이덕화)에게 두드려 맞거나, 해주를 “너 까짓 게” 식의 안하무인격으로 대하거나 어머니인 이금희(양미경)에게 분노를 드러내고 때론 읍소를 가장하는 식의 역할로 고정되어 있다. 그는 성장이 멈춰진 인형처럼 보인다.

 

이것은 장도현이나 늘 해주에게 민폐를 끼치는 천상태(문지윤), 또 아들만을 생각한다는 명분으로 갖은 악행을 제 손으로 저지르는 어리석은 박기출(김규철)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너무나 전형화되어 있어 그들이 등장하면 앞으로 전개될 일들이 거의 예측 가능한 그런 인물들이다. 물론 이런 캐릭터들도 드라마에 필요하다. 하지만 작품이 중반을 넘어가면서 그렇지 않아야할 중심인물들도 자꾸만 작가에 의해 휘둘리는 모습이 등장한다. 이금희는 그 대표적인 사례다.

 

처음에는 인화와 창희의 결혼에 대해서 그다지 반대하는 입장이 아니었다가 어느 날 일문이 찾아와 창희가 검찰에 있을 때 아버지를 잡으려 했었다는 얘기를 듣고는 그녀는 돌변한다. 그리고 창희를 찾아와 결혼을 반대한다고 말하지만, 이러한 입장은 또 단 한 회만에 바뀐다. 인화가 결혼을 반대하면 죽어버리겠다고 엄포를 놓자, 결혼을 허락하겠다고 바뀌게 된 것. 사실 이런 캐릭터의 입장 변화는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드라마에서 캐릭터의 심경변화에는 그만한 심리적인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결국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캐릭터를 이리저리 작가 자의적으로 바꾼다는 건, 개연성을 포기한다는 얘기나 마찬가지다.

 

또한 <메이퀸>은 너무 인물의 죽음이 너무 흔하다. 특히 장도현이라는 인물은 이 드라마에서 마치 킬러처럼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죽일 수 있는 인물이 되어 있다. 그는 해주의 친 아버지인 윤학수(선우재덕)와 강산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강대평(고인범)까지 죽게 만든 인물이다. 역시 인물의 죽음은 언제든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어떤 사건이 벌어졌을 때 그것을 무마하는 방식으로 살인이 자행되는 것은 너무 쉬운 방편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이 모든 것이 작가의 의도적인 막장 전개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메이퀸>은 작가의 역량의 한계가 드러나면서 결국 개연성과 본래 의도를 잃어버리게 된 막장드라마의 경우라고 생각된다. 가족드라마로서의 가족에 대한 의미도 제대로 담지 못했고, 시대극으로서의 시대적인 상황을 잘 조명해내지도 못했으며, 조선업이라는 특정 전문 분야에 대한 본격적인 전개도 잘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남은 건 뭘까. 뻔한 복수극과 출생의 비밀을 놓고 벌어지는 신파밖에 없다.

 

이 드라마가 본래 갖고 있던 기획의도를 다시 살펴보자. ‘이 드라마는 광활한 바다에서 꿈을 꾸는 젊은이들의 이야기이다. 이 나라 조선업이 발전하던 시기에 태어난 그들이 부모 세대의 원한과 어둠을 청산하고 새로운 시대의 해양으로 진출하려는 이야기이다. 그리하여 오늘 고단하게 살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고자 한다.’ 이 드라마 어디에 젊은이들이 용기와 희망을 갖게 되는 이야기가 있는가. 도대체 어디에 우리나라 조선업의 성장과정이 담겨있는가. 부모 세대의 원한과 어둠을 청산하기는커녕 그 원한과 어둠을 동력으로 삼아 굴러가고 있는 게 바로 <메이퀸>이 아닌가. 다른 게 막장드라마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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