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파와 비지상파의 드라마 혈전, 시청자들에겐 복

 

명품드라마를 넘어 인생의 드라마라고까지 얘기됐던 <시그널> 효과였던가. <시그널>이 끝나자 tvN 드라마들 거침없던 질주는 주춤해진 느낌이다. 그 바톤을 이어받은 <기억>3.8% 시청률(닐슨 코리아)에서 시작했지만 지금은 2.9%까지 떨어졌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치즈 인 더 트랩>tvN 월화드라마로서는 이례적으로 6.8%까지 시청률을 냈던 것에 비해 그 바톤을 이어받은 <피리부는 사나이>3.3%에서 시작해서 1.4%까지 곤두박질쳤다.

 


'대박(사진출처:SBS)'

<시그널><치즈 인 더 트랩>의 놀라운 선전, 또 지난해 주목받은 <두번째 스무살><오 나의 귀신님> 같은 작품들을 떠올려보면 이제 tvN 드라마는 지상파를 위협하는 존재로 급부상한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한 채널의 드라마의 위상은 한두 드라마의 성공도 중요하지만 일관된 흐름이 있어야 비로소 만들어지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기억><피리부는 사나이>의 성적은 아쉽다.

 

물론 시청률이 모든 걸 말해주는 건 아니라는 걸 잘 보여주는 드라마가 <기억>이다. 이 드라마는 완성도와 디테일이 놀랍고 드라마가 보여주려는 메시지도 상당히 진중하다. 최근 들어 이만큼의 성취도를 보여주는 드라마를 찾기가 쉽지 않을 정도다. 하지만 한 채널의 드라마가 제대로 존재를 드러내려면 대중성 또한 무시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기억>은 아쉬운 작품이다.

 

<피리부는 사나이>는 드라마보다는 영화가 어울리는 작품이다. 드라마가 갖고 있는 현실적인 정서 같은 것들이 이 작품에서는 잘 느껴지지 않는다. 폭탄이 터지고 총알이 날아다니는 상황들을 다루고 있지만 그게 현실적이란 느낌이 들지 않기 때문에 시청자들을 몰입시키지 못하고 있다. 볼거리가 아닌 정서적인 몰입이 드라마의 관건이라는 점을 두고 보면 <피리부는 사나이>의 추락은 당연해 보인다.

 

tvN 드라마처럼 비지상파의 약진 때문에 지상파가 위기감을 느낀 건 분명하다. 이 사실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지상파 주말드라마들의 토요일 시청률은 뚝 떨어졌다가 일요일에는 다시 오르는 이른바 퐁당퐁당(?)’ 시청률이다. 김수현 작가의 SBS 주말드라마 <그래 그런거야>의 시청률표를 보면 <시그널>의 영향이 얼마나 극적인가를 잘 확인할 수 있다. <그래 그런거야><시그널>이 방영됐던 토요일 시청률에서는 뚝 떨어졌지만 일요일 시청률에 피치를 올리면서 서서히 회복했다. <시그널>이 끝난 후 <그래 그런거야>는 이제 10% 시청률을 넘겼다. 물론 여기에는 야외활동이 많아지는 봄철의 토요일이 지상파 콘텐츠들에게는 춘궁기가 된다는 요인도 섞여 있지만 tvN 드라마들의 약진도 빼놓을 수 없는 요인이다.

 

하지만 <시그널> 종영 후 주춤하는 사이, 지상파 드라마들이 반격을 시도하고 있다. KBS <태양의 후예>가 주중드라마로서는 예외적으로 30% 시청률을 훌쩍 넘겨버렸고, 월화드라마들의 대전이 새롭게 시작되면서 새삼 지상파 드라마에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육룡이 나르샤>에 이어 연달아 사극을 편성한 SBS <대박>과 박신양 캐스팅으로 화제가 되고 있는 KBS <동네변호사 조들호> 그리고 <대조영>에서부터 <자이언트>, <기황후> 같은 대작드라마로 기대감을 한껏 높이는 장영철, 정경순 작가의 50부작 <몬스터>가 동시에 시작되는 것.

 

최근의 이런 드라마 라인업들은 지상파 드라마들의 반격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화려해졌다. 물론 tvN 드라마들이 가진 마치 영화를 보는 듯한 높은 완성도의 장르 드라마들이 늘 비슷비슷한 소재와 장르들만 반복해온 것처럼 여겨지는 지상파드라마와 비교되며 긍정적인 성취를 거두고 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변화에 맞대응하듯 지상파드라마들 역시 기대할만한 작품들이 쏟아져 나온다는 건 시청자들로서는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결과적으로 보면 이런 지상파와 비지상파의 혈전은 우리네 드라마의 체질을 더 튼튼하게 해줄 것이니.

<치즈인더트랩>, 박해진의 대체불가 이중적 매력

 

박해진에게 이런 매력이 있었나. tvN 월화드라마 <치즈인더트랩>이 심상찮다. 첫 회 3.5%(닐슨 코리아)의 괜찮은 시청률로 시작한 이 드라마는 2회에 4.8%를 찍었다. 이런 흐름이라면 tvN 드라마의 새로운 기록을 만들 가능성이 충분하다.

 


'치즈인더트랩(사진출처:tvN)'

놀라운 건 이제 이 드라마가 겨우 시작일 뿐이라는 점이다. 홍설(김고은)과 유정(박해진)의 밀고 당기는 관계가 이제 막 피어나고 있는 상황. 특히 유정이라는 캐릭터는 이 드라마의 가장 강력한 힘이다. 무표정하게 누군가를 바라볼 때는 마치 사이코패스 같은 섬뜩함이 느껴질 정도다. 하지만 그 무표정이 홍설을 향해 살짝 미소를 내비칠 때 섬뜩함은 거꾸로 눈 녹듯 녹아버리는 달달함으로 변한다.

 

홍설의 시선을 따라가면 그 섬뜩한 존재로만 보였던 유정 선배가 점점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에 두려움과 관심이 교차한다. 무언가 사람을 이용하는 듯한 모습이 자신의 오해였다고 믿게 되면서 홍설은 조금씩 마음을 열지만, 그것은 단지 오해만은 아니다.

 

상철(문지윤)이 회비를 횡령했다는 사실을 영수증을 증거로 내세워 폭로했던 이가 유정이 아니라 재우(오희준)였다는 걸 알게 된 홍설은 자신이 유정을 의심했던 것을 미안해하지만, 알고보면 그 재우에게 영수증을 건넨 이가 실제로 유정이었다는 것이 밝혀진다. 바로 이 알쏭달쏭하고 미스테리한 유정이란 캐릭터는 그래서 홍설의 시선에 빙의되기 마련인 시청자들에게 기묘한 매력으로 다가온다.

 

어딘지 상처가 있을 것 같은, 그래서 마음이 뒤틀어진 듯한 그 이중성은 밝은 성격의 홍설과 흥미로운 화학작용을 일으킬 것 같은 기대감을 갖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미 웹툰으로 유명한 작품이긴 하지만, 또 그래서 캐스팅 과정에서도 원작의 캐릭터와의 싱크로율을 갖고 잡음들이 나왔던 작품이긴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잘 된 캐스팅에 잘 만들어진 드라마임에는 틀림없다.

 

<은교>, <협녀, 칼의 기억>, <몬스터>, <차이나타운> 같은 전작들이 모두 강렬한 캐릭터들이어서 잘 어울리지 않을 것만 같았던 김고은이었지만 역시 다양한 연기의 결을 갖고 있는 배우라는 게 이 작품을 통해 잘 보여지고 있다. 종잡을 수 없는 유정선배 앞에서 그 밀고 당김에 쩔쩔 매는 모습은 김고은의 귀여운 매력을 드러내준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작품의 중심에 서 있는 연기자는 역시 박해진이다. 이미 <나쁜 녀석들>에서 사이코패스 역할을 통해 차가운 이미지를 충분히 보여줬던 그는 이 작품에서는 차가움과 따뜻함을 오가는 이중적 매력을 통해 드라마의 긴장감을 만들어주고 있다. 그러고 보면 눈을 가늘게 뜨고 무심한 듯 누군가를 바라보고 있는 박해진의 얼굴에는 냉정함과 함께 어떤 우수 같은 것이 느껴진다.

 

많은 멜로드라마들의 남자 주인공들이 처음에는 까칠하게 버럭 대며 등장했다가 차츰 여자 주인공과의 만남으로 달달해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런데 <치즈인더트랩>의 유정이라는 남자주인공은 그 차가움이 무서울 정도다. 그러니 그와는 대조적인 달달해지는 과정의 힘이 더 강렬해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박해진의 밀당 하나만을 이제 겨우 보였을 뿐이다. 그런데 이 정도의 반응들이 나오고 있다니. 실로 놀라운 일이다



<몬스터>, 동화와 스릴러의 흥미진진한 대결

 

독특하다. 아마도 <몬스터>라는 영화가 주는 인상을 한 마디로 표현하라면 이렇게 말할 것 같다. 물론 아직 거칠지만 그 파격적인 면모는 마치 박찬욱 감독을 떠올리게 하고 단단한 장르 해석 능력은 봉준호 감독을 생각나게 한다. 확실히 <시실리 2km>, <도마뱀>의 시나리오를 쓰고 <오싹한 연애>로 메가폰을 잡았던 황인호 감독은 분명한 자기만의 색깔을 이번 작품 <몬스터>에서도 여지없이 보여주었다. 장르물에 대한 이해가 있는 관객이라면 이 놀라운 이종장르물의 경험에 환호할 것이다.

 

'몬스터(사진출처:상상필름)'

어떻게 피가 철철 흐르는 스릴러 속에서 동화 같은 이야기가 가능할까. 어떻게 연쇄살인범이 다가오는 긴장감 넘치는 장면에서 폭소가 터지는 게 가능할까. 긴장과 이완은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두 축이 분명하지만 이를 동시에 병치시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유치한 B급 장르에서 종종 시도되곤 하지만 흔히 평가되듯 B급 정서를 가진 황인호 감독의 작품이 그렇다고 B급은 아니다.

 

그래서 <몬스터>는 장르 파괴물이면서 결코 B급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장르의 재창조물 같은 느낌을 준다. ‘살인마 vs 미친 여자라고 적힌 포스터 문구는 이 두 이질적인 장르와 감성의 대결을 보여주는 <몬스터>를 가장 잘 표현하는 면이 있다. 사람 죽이는 일을 마치 손톱에 낀 때 빼듯이 저지르는 살인마 태수(이민기). 그리고 돌아가신 할머니가 물려주신 노점상 자리를 제 것이라 여기며 동생 하나만을 바라보는 조금 모자란 미친 여자 복순(김고은). 살인마 태수가 스릴러의 전형을 보여준다면, 복순은 동화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래서 이 영화는 마치 스릴러와 동화가 병치된 독특한 느낌을 전한다. 앞부분에 일찌감치 복순의 할머니 회상 장면에서 보여준 마치 텔레토비 동산의 햇님을 보는 듯한 할머니의 모습은 복순이 살아가는 동화적 세계를 압축한다. 반면 산 속에 위치한 공포 영화의 한 장면에 나올 듯한 외딴 가마터에서 살해한 이들을 구워 도자기를 빚어내는 공간은 태수가 살아가는 스릴러의 세계를 보여준다. 그리고 어느 날 이 이질적인 두 세계는 한 꼬마의 틈입으로 이어진다.

 

스릴러와 동화의 연결고리는 실로 절묘하다. 꼬마를 산으로 데려간 살인마가 마치 동화 속에 등장하는 마녀 같은 느낌을 주고, 그 살인마로부터 도망친 꼬마가 복순과 함께 싸우는 이야기 역시 동화 같은 뉘앙스가 묻어난다. 꼬마와 복순이 살인마의 집을 찾아 산으로 오르는 장면은 그래서 마치 모험을 하기 위해 집을 떠난 동화 속 아이들의 모습처럼 연출된다.

 

하지만 이러한 복순과 꼬마가 만들어내는 동화적인 설정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시종일관 스릴러의 끈을 놓지 않는다. 복순이 아이의 지능을 갖고 있다는 것은 이 대결구도가 마치 살인마로 대변되는 어른들의 세계와 아이들의 세계의 대결처럼 여겨지게 만들기도 한다. 아이들은 동화 속에 머물고 싶어 하지만 세상은 그들을 가만두지 않는다.

 

느슨한 듯 풀어지다가도 순식간에 긴장감을 만들어내는 그 다이내믹한 힘은 아마도 여러 장르를 섭렵하면서 갖게 된 황인호 감독의 이력에서 비롯된 것일 게다. <시실리 2km>에서도 코미디와 스릴러를 엮어냈고, <도마뱀>에서는 UFO라는 소재에 멜로를 엮어냈으며, <오싹한 연애>에서는 공포와 멜로를 공존시켰다. 이질적인 장르의 결합을 꽤 자연스럽게 만들어내는 그 능력은 관객들로 하여금 색다른 장르 경험을 가능하게 해준다.

 

이 작품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건 김고은이라는 배우의 재발견이다. 영화 <은교>로 널리 알려진 김고은은 배우의 첫 단추로는 꽤 파격적인 연기를 보여준 인물이다. 본인 스스로도 말했듯이 이목구비가 흐리멍덩한건 어쩌면 배우로서는 오히려 장점이다. 마치 빈 도화지 같은 인상이랄까. 그래서 그녀는 별다른 선입견 없이 새로운 배역에 관객들이 몰입할 수 있게 해주는 힘이 있다.

 

복순이라는 이름에서 얼핏 느껴지는 것처럼(이건 마치 복수와 순이를 붙인 것 같다) 이 인물은 때로는 미친 여자 같은 광기를 뿜어내면서도 때로는 아이 같은 면을 동시에 보여준다. 그리고 이것은 어쩌면 우리가 한 면만을 보고 있는 아이의 또 다른 속성일 수 있다. 아이란 순수함을 대변하기도 하지만 사회에 있어서는 미성숙을 의미하기도 하지 않는가.

 

실로 이 이중적인 캐릭터를 소화하는 데 있어 김고은 만한 배우도 없었을 것이다. 바보 연기에서 살인마와 대적하는 광기를 끄집어내는 모습은 앞으로 이 배우의 행보를 기대하게 만든다. 뚜렷한 한 가지의 이미지가 아니라 다양한 이미지를 동시에 보여줄 수 있다는 걸 그녀는 확실하게 <몬스터>를 통해 각인시켜주었다.

 

늘 로맨틱한 분위기의 역할에서 살인마로 변신한 이민기나 미친 존재감을 보여주는 김뢰하, 김부선의 연기 또한 압권이다. 특히 마치 <넘버3>의 송강호를 보는 듯한 짧지만 굵게 자기 존재감을 드러낸 배성우, 남경읍 같은 배우들을 보는 것 역시 <몬스터>를 즐겁게 만드는 또 하나의 이유다. 스릴러와 동화를 병치시킨 <몬스터>라는 괴물은 그래서 그 둘을 한 몸으로 소화해낸 김고은 같은 괴물배우와 이 장르를 재창조시킨 황인호라는 괴물감독을 탄생시켰다. 조그은 낯설 수 있는 이 영화 여행이 실로 즐거울 수 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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