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많아진 추격전 예능 이젠 패가 보인다

 

사실 추격전은 <무한도전>의 전매특허나 다름없었다. ‘여드름 브레이크’나 ‘돈을 갖고 튀어라’ 같은 특집들은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보기 드물게 실전에 가까운 긴박감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특히 ‘여드름 브레이크’처럼 추격전 속에 독특한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는 건 <무한도전>만이 할 수 있는 아이템으로 여겨졌다.

 

'무한도전(사진출처:MBC)'

하지만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너무 많은 추격전들이 예능에서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1박2일>은 여행 버라이어티이면서도 자주 추격전을 선보이기도 했다. 숨겨진 목적지까지 누가 더 빨리 도착하느냐는 미션은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되었다. <런닝맨>은 아예 추격전을 하나의 주된 형식으로 만든 예능 프로그램이다. 매주 조금씩 다른 소재를 가져오지만 그 밑바탕에는 역시 추격전이 깔려 있다.

 

사실상 프로그램을 이끌어가고 있는 유재석이 <런닝맨>과 <무한도전>을 같이 하고 있다는 것은 추격전을 아이템으로 삼았을 때 곤란한 상황을 만들어낸다. 너무 비슷한 상황이 연출되기 때문이다. <무한도전>의 이번 ‘100 빡빡이 특집’ 같은 경우, <런닝맨>이 예전에 건물 하나를 빌려 유사한 복장을 입은 사람들 속에서 게스트를 찾는 미션을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여기에 유재석과 하하가 양 프로그램에 동시에 들어가 있고 이들의 캐릭터가 두 프로그램에서 거의 같기 때문에(이것은 리얼 버라이어티이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다) 더더욱 변별력을 찾기가 어렵게 된다. 게다가 다른 출연자라고 해도 추격전에 들어가면 비슷한 캐릭터가 나오는 것도 스토리가 뻔해지는 이유로 작용한다.

 

흔히 등장하는 배신의 아이콘이나 카이저 소제 캐릭터는 대표적이다. <무한도전>에서 노홍철이 배신의 아이콘이라면 <런닝맨>에서는 이광수가 그 역할을 맡고 있다. 이번 <무한도전> ‘100 빡빡이 특집’에서 맹활약한 카이저 흑채 박명수 캐릭터는 이미 추격전에서는 그다지 새로운 캐릭터가 아니다. <무한도전>에도 여러 차례 주도면밀한 두뇌싸움을 벌이는 카이저 소제 캐릭터가 등장했었고 <런닝맨>에서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1박2일>에서도 은지원이 지니어스 원 캐릭터로 이 역할을 소화하기도 했다.

 

캐릭터가 유사하고 추격전이라는 형식이 같기 때문에 스토리가 새롭기가 어렵다. 결국 추격전이란 시청자와 제작진의 두뇌 싸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시청자가 대충 이런 흐름으로 흘러 갈거야 라고 생각할 때 그 뒤통수를 치는 스토리 전개가 나와야 추격전의 진짜 묘미가 생길 수 있다. <무한도전>의 ‘100 빡빡이 특집’은 이제 전반부를 보여줬을 뿐이지만 100명의 빡빡이가 동시에 출연하는 스펙터클 이외에 새로운 이야기는 그다지 보여주지 못했다.

 

이렇게 <무한도전>의 추격전이 예전만큼 참신하게 여겨지지 않는 것은 너무 많은 추격전들이 쏟아져 나와 그 패턴이 읽혔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무한도전>만이 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여겨졌지만 지금은 다른 버라이어티에서 누구나 사용하는 하나의 예능 형식으로 자리잡았다. <무한도전>처럼 무언가 새로운 것을 늘 추구하는 예능으로서는 더 복잡한 심리전과 게임을 선보여야 하지만 주말 저녁 시간대 보편적 시청층을 생각한다면 이런 시도는 자치 마니아적인 도전으로 흘러갈 위험성도 있다.

 

리얼 버라이어티에서 관찰 예능으로 가고 있는 요즘 트렌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패턴을 읽히지 않는 것이다. 관찰 예능에 대한 시청자의 요구는 어떤 일이 벌어질 지 전혀 모르는 상황에 대한 기대감이다. 그런 점에서 <무한도전>을 포함한 많은 예능 프로그램들이 시도하려는 추격전은 더 많은 과제를 안게 되었다. 패턴을 넘어 반전을 만들어내면서도 너무 복잡하지는 않은 형태를 찾아야 하는 것.

 

이러한 고충은 추격전 형식만이 아니라 <무한도전>의 다른 형식들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예를 들어 여행을 소재로 했을 때 이제는 <1박2일> 같은 무수히 많은 여행 버라이어티들이 했던 패턴들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것. 사실상 국내의 모든 예능 프로그램들이 <무한도전>에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이 거의 없는 현실에서 <무한도전>의 새로운 예능 형식 도전은 더 큰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패턴화된 추격전은 바로 이 어려움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다.

조급증과 성과주의가 <스플래시>의 비극을 낳았다

 

요즘 <우리동네 예체능>의 이예지 PD는 방송하는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프로그램이 다뤘던 종목들, 즉 탁구, 볼링, 배드민턴이 세간에 화제가 되면서 해당 스포츠 동호인들이 눈에 띄게 늘고 있기 때문이란다. 스포츠 협회들의 프로그램에 대한 관심도 어느 때보다 뜨겁다고 한다. 자신의 종목을 소재로 해달라는 요청이 끊이지 않는다고.

 

'우리동네 예체능(사진출처:KBS)'

이예지 PD는 “엘리트 스포츠 중심으로 되어있는 우리네 스포츠를 선진국들이 그렇듯이 생활 스포츠 중심으로 바꿔나가는 것에 자신들이 일조하고 있다는 걸 가장 큰 보람으로 여긴다”고 말했다. 방송의 힘은 실로 커서 실제로 해당 스포츠용품의 판매량이 급증했다고 한다. G마켓에 의하면 올 상반기 탁구용품은 28%, 배드민턴 용품은 20%, 그리고 볼링용품도 지난해에 비해 12%나 판매량이 늘었다고 한다.

 

<우리동네 예체능>의 사례는 스포츠 예능 프로그램의 정답처럼 다가온다. 과거 스포츠 소재 콘텐츠라는 것은 대중들이 직접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수동적으로 보고 응원하는 것 중심이었다. 스포츠 중계는 이러한 후진국형 관중 스포츠 문화를 가장 잘 보여주는 스포츠 프로그램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대신 선진국형 참여 스포츠 문화를 이끌어내는 프로그램은 그리 많지 않았다.

 

<날아라 슛돌이>나 <천하무적 야구단>이 생활 스포츠를 정면에서 다룬 거의 유일한 프로그램들이었고 기껏해야 <무한도전> 같은 예능 프로그램에서 기획성으로 비인기종목을 조명했던 것이 대부분이었다. 반면 <우리동네 예체능>은 아예 생활 스포츠 육성을 그 목표로 세우고 있는 프로그램이라는 점에서 다양성의 측면에서나 또 집중도에 있어서나 훨씬 진일보한 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들어 참여형 생활 스포츠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고, 리얼 예능의 소재로서 스포츠 같은 ‘각본 없는 드라마’가 각광을 받으면서 스포츠 소재 예능이 생기고 있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우리동네 예체능>처럼 성공적인 것은 아니다. 최근 논란으로 촬영이 중지된 MBC <스타 다이빙쇼 스플래시>는 똑같이 스포츠를 다뤘지만 오히려 역효과를 본 대표적인 사례가 되었다. 다이빙 국제심판 민석홍 감독은 모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스플래시>로 다이빙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생길 것으로 기대했지만 오히려 ‘위험한 스포츠’라는 인식이 만들어진 것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렇게 된 데는 프로그램의 지향점과 목표가 달랐던 데서 비롯된 바가 크다. <스플래시>의 경우 스포츠 자체를 조명했다기보다는 다이빙이라는 종목이 가진 스펙터클에 더 집착한 바가 크다. 공중에서 두려움을 극복하고 뛰어내린다는 점과 그 사이에 회전을 하는 등 기술을 선보인다는 점 그리고 입수의 공포를 짜릿한 쾌감으로 바꾼다는 점에서 다이빙이라는 소재는 확실히 자극적인 맛이 있다. 여기에 맨 몸을 드러내는 스포츠가 갖는 원초적인 끌림까지 더하면 이 프로그램의 성공은 그 기획만으로도 따 놓은 당상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실제는 달랐다. 결국 전문 프로 선수가 하는 경기가 아니라 아마추어들이 도전하는 경기라는 점에서 생활 스포츠일 수밖에 없는 이 경기에서 프로처럼 보이려는 과욕은 부상 논란의 시발점이 되었다. 같은 프로그램에서 해외의 경우 6개월 이상의 준비기간을 주는 반면 지난 5월부터 갑자기 준비한 프로그램의 무리수는 결국 촬영 중단이라는 결과로 이어졌다. 빠르게 어떤 결과를 보이려는 조급증과 성과주의가 무리수가 되었던 것.

 

여기에 다이빙이 단체 스포츠가 아니라 개인 경쟁이라는 점과 <스플래시>가 일종의 오디션 형식을 갖고 있어 서바이벌의 갈급함이 더해졌다는 점도 문제를 키운 원인의 하나다. 생활 스포츠는 경기 그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동호인들 간의 친목이다. 다이빙을 생활 스포츠의 하나로 포착하려 했다면 바로 이 친목을 만들어내는 팀워크에 더 집중했어야 하지 않을까. 화려함보다는 동호인 특유의 정 같은 것이 더 중요한 정서였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우리동네 예체능>이 만들어가고 있는 방송 출연자들 그 이상의 끈끈한 팀워크는 생활 스포츠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전국의 동호인들을 상대로 벌인 배드민턴 대결에서 예체능 팀은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경기가 끝나고 나서 펑펑 울기도 하고 자책하기도 하면서 아쉬움을 토로한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이런 얘기를 한다고 한다. “저 분들은 몇 년 간을 하신 분들인데 고작 두 달 남짓 한 우리가 지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무리하지 않고 소걸음으로 다가가는 것. 또 경쟁 그 자체보다는 그 사이에 쌓여지는 친목과 단합을 도모하는 것. 이것이 생활 스포츠를 다루는 방송의 기본이다. 보는 시대는 지났고 이제 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여전히 스포츠를 엘리트의 영역으로 세워두고 그 도전 자체를 프로에 도전하는 것처럼 그려내는 것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거기에는 여전히 엘리트 스포츠 중심적인 사고방식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생활 스포츠로 관심이 바뀌고 있는 요즘, <스플래시> 같은 불상사가 다시 발생하지 않으려면 철저히 생활 스포츠적인 관점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걸 <우리동네 예체능>은 보여주고 있다.

<무도>에 대한 호불호, 점점 골이 깊어지는 이유

 

역시 <무한도전>은 대단했다. 사실 일반인에게 온전히 메가폰을 맡기고 한 회 분량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보통 자신감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무도를 부탁해’에서는 ‘거장 이예준’이라는 캐릭터를 만들어 부족한 기획과 진행경험 자체를 웃음의 소재로 만들어냈고, 지난 ‘간다간다 뿅간다’ 특집에 잠깐 나와 화제가 됐던 김해소녀들과의 화학작용을 통해 빵빵 터지는 웃음을 선사했다.

 

'무한도전(사진출처:MBC)'

즉 이예준 군이 만드는 예능 자체(논두렁에서 미꾸라지 잡기)는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런 미숙하고 불완전한 프로그램 제작에(그것도 초등학생에게!) 베테랑 MC들과 제작진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것 자체가 웃음의 포인트라는 점이다. 일이 생각만큼 풀리질 않아 고민하고 또 점점 의기소침해지는 이예준 군이 오히려 큰 웃음을 줄 수 있었던 건 부족한 것조차 오히려 하나의 재미있는 이야기로 풀어내는 김태호 PD의 능력 덕분이다.

 

안양예고 친구들이 기획해 진행한 ‘무한MT’ 특집 역시 소재로서 특별할 것은 없었다. 그건 늘 <무한도전>에서 여행가면 했던 아이템의 반복이 아니던가. 하지만 안양예고 여고생들 특유의 디테일한 연출 과정을 김태호 PD는 귀엽고 풋풋한 느낌으로 잡아냈고, 베테랑 MC들은 이 아이템의 핵심이었던 김해소녀들과, 학생과 아저씨 콘셉트로 서로 가까워지는 과정을 통해 시청자들의 자연스러운 감정 이입을 만들어냈다.

 

즉 “잠깐 쉬어갈께요!”하고 말하며 슬레이트를 쳐도 그 슬레이트를 친 이예준 군이나 안양예고 친구들을 찍는 카메라는 계속 돌고 있었다는 것. 특집 소제목은 ‘무도를 부탁해’지만 사실은 그간 <무한도전>에 대한 무한 사랑을 보여준 팬들(그러니 아이템들을 줄줄이 외우고 어설퍼도 이런 제작에 뛰어들 수 있었을 게다)에 대한 일종의 감사를 표하는 자리였던 셈이다. 팬덤에 보답하는 자리.

 

그런데 이 팬덤이라는 것이 <무한도전>의 최대 장점인 것은 분명하지만 때로는 한계로서 지목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특히 지상파의 예능 프로그램인 <무한도전>이 특정 팬덤을 너무 의식하게 되면 정반대로 팬덤 바깥에 있는 일반 시청자들이 의도치 않은 소외를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이번 ‘무도를 부탁해’ 특집에 쏟아진 호불호는 그 단적인 사례다.

 

<무한도전>이 그간 해왔던 아이템들을 줄줄이 꿰고 있는 팬들에게 이런 기획은 그 자체로 즐거움을 주지만 그렇지 않은 일반 시청자들에게는 “왜 저들이 저럴까”하는 의구심을 주기도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팬들의 환호는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차원을 넘어서 일종의 반발심까지도 만들어낸다.

 

너무나 공고한 팬덤을 갖고 있기 때문에 심지어 애정어린 비판조차 허락지 않는 듯한(물론 이건 일부일 것이지만) 분위기 또한 <무한도전>을 폐쇄적인 일종의 성역으로 인식시킴으로서 부정적인 시선을 만드는 요인 중 하나다. 성역이란 것이 그 자체로 피아를 구분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이 만들어지면 그 내용이 무엇이든 공격과 방어가 오갈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런 상황이 되면 팬덤은 의도치 않게 프로그램의 발목을 잡는 한계로 작용하기도 한다.

 

국내 예능 프로그램에서 최초로 팬덤을 소유한 <무한도전>은 그만큼 공고한 지지층을 갖고 있다. 이것은 프로그램의 성장기에는 엄청난 도움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8년 넘게 지속된 프로그램에서 요구되는 것은 그 팬덤의 세계에 갇혀 <무한도전>의 역사를 반복적으로 추억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8년을 위해 좀 더 과감하게 그 문을 개방하는 자세가 아닐까.

 

‘무도를 부탁해’ 특집은 그래서 <무한도전> 팬덤을 확인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웃음을 만들어내는 베테랑들의 능력을 발견한 자리이면서, 동시에 새로움과 팬덤을 넘어서는 새로움에 대한 요구를 동시에 발견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무한도전>에게 앞으로도 주욱 주말의 웃음을 부탁할 수 있기를.

여민정 노출, 의도냐 아니냐보다 중요한 것

 

의도적인가 아니면 단순 사고인가. 지난 부천국제영화제 레드카펫에서 벌어진 가슴 노출 사건으로 화제가 된 여민정은 요즘 그 덕분인지 방송가에 부쩍 자주 보인다. <한밤의 TV연예>에 나와 당시의 노출이 의도가 아닌 갑자기 벌어진 해프닝이었다고 밝히는가 하면 <컬투의 베란다쇼>에서는 스튜디오에 당시 문제의 드레스를 갖고 출연해 의도적인 노출이 아니었다는 것을 재삼 강조하기도 했다.

 

'컬투의 베란다쇼(사진출처:MBC)'

여민정의 노출 사고를 풍자하는 패러디도 쏟아져 나왔다. <무한도전>의 ‘소문난 7공주’ 특집에서는 정형돈이 드레스를 입고 워킹을 하다가 어깨 끈을 내리며 “어머 어머”하는 모습을 연출했다. 그러자 기자들인 듯한 이들이 일제히 플래시를 터트리며 사진을 찍어댔다. 그 장면에는 ‘티나게 대놓고 무리수 노출’이라는 자막이 붙었다. <SNL코리아>에서도 서유리가 가슴을 노출하는 장면으로 여민정을 패러디하기도 했다.

 

노출이 화제가 된 것은 사실이고 그만한 효과로 드러나고 있는 상황이다. 적어도 이 단 한 번의 노출 사건으로 인해 신인 여배우 여민정이 누구인지는 알게 된 것이니 말이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레드카펫이 여배우들의 노출의 장으로 변질되고 있을 게다. 2011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겨우 가슴을 가린 아슬아슬한 드레스를 입고 레드카펫에 올라 화제가 되었던 오인혜, 2012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등을 거의 다 드러낸 의상을 입었던 이소은, 그리고 2012년 청룡영화상에서 가슴 부분을 다 드러낸 하나경은 워킹도중 꽈당 넘어지는 사고로 더 화제가 되었다.

 

이러니 여민정의 가슴 노출이 사고가 아니라 의도라는 의혹까지 제기될 것이다. 이제 과감한 의상 정도로는 화제가 되기 어려운 상황이다. 그러니 거기에 어떤 ‘의도된 사고(?)’를 연출하는 것이 아니냐는 시선이 생기는 것.

 

하지만 본질적으로 얘기하면 의도냐 아니냐는 것은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이미 레드카펫에 실로 보기 민망할 정도로 과감한 노출의 의상을 입고 오르는 순간부터 사고는 예정된 것이나 마찬가지니 말이다. 무수한 카메라의 시선이 집중된 레드카펫이라는 공간의 특성 상 노출은 인지도가 없는 여배우들에게는 어쩌면 자신을 알릴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인지도 모른다.

 

문제는 이러한 노출 드레스로 점철되면서 레드카펫의 본질이 흐려지고 있다는 점이다. 레드카펫이 무언가. 영화배우에게 레드카펫이란 하나의 꿈이자 로망이 아니었던가. 영화인의 한 사람으로서 영화라는 판타지 속으로 당당하게 걸어 들어가는 그 길이 바로 레드카펫의 진정한 의미다. 아무나 밟을 수 없는 길이고 한번 밟는 것만으로도 평생 기억에 남는 그런 길이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레드카펫은 노출의 경연장으로 전락하고 있다. 물론 자신이 출연한 영화를 적극적으로 홍보하겠다는 의도는 비난받을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몇몇 여배우들의 지나친 노출은 영화제에 나온 다른 동료 배우들이나 심지어 영화 자체에도 민폐라는 점을 알아야 하지 않을까. 이번 여민정 노출로 인해 부천국제영화제에 이병헌이나 전지현 같은 국제적인 스타가 참석했다는 것은 묻혀 버렸다.

 

지금의 레드카펫은 언제 ‘의도된’ 돌발이 벌어질 지 알 수 없는 도발의 공간이 되었다. 순식간에 영화제를 19금으로 만들어버리는 이 놀라운 마력에서 벗어나 이제 레드카펫은 좀 더 본질로 돌아갈 필요가 있지 않을까. 거기 서는 것만으로도 빛이 나는 멋진 영화인의 얼굴은 결국 스스로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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