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 존재감의 시대, 미친 존재감의 개그맨, 정형돈

'무한도전'(사진출처:MBC)

'보고 있나... 소녀시대.' 조인성이 군 제대하는 자리에서 "걸 그룹보다 '무한도전'이 좋았다"는 말에 이런 자막 하나가 붙었다. 소녀시대 팬들이라면 자못 도발적으로 여겨질 수 있는 이 자막은, 그러나 '무한도전'을 통해 맥락을 이해하는 분들이라면 귀엽고 심지어 유쾌하게까지 느꼈을 것이다. 어떻게 무례하게까지 보이는 이런 말이 웃음으로 전화될 수 있었을까. 거기에 '미존개오(미친 존재감 개화동 오렌지족)'로 불리는 정형돈이 있다.

조인성을 조정 특집에 영입하기 위해 벌어진 테스트에도 여지없이 정형돈이 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것은 '어색함을 이겨내라'는 테스트. 어색함을 캐릭터로 갖고 있는 정형돈의 전화번호를 얻는 것이 조인성의 미션이 되는 이 테스트는 애초에 정형돈이라는 캐릭터가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조인성이라면 연예인들마저도 서로 전화번호를 알려고 난리를 치는 상황이 아닌가. 거꾸로 정형돈이 조인성에게 "정말 내 전화번호를 원하면..."이라고 단서를 달면서 번호를 알려주지 않는 상황은 그 자체로 웃음을 준다.

식사시간에 "자꾸만 몸이 부는 것 같다"며 먹지 않는 조인성에게 여지없이 정형돈은 '조언'을 해댄다. 보기에도 호리호리한 조인성에게 "화면에 살찐 모습이 나오는 건 부담스럽다"고 하는 뚱뚱한 정형돈의 멘트는 조인성마저 포복절도하게 만든다. 뚱뚱하고 못난 자신의 몸을 인식하지 못하고 타인을 지적질 하는 모습이 큰 웃음을 주는 것. 그것도 대상이 조인성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이 정형돈의 자신의 '무존재감' 캐릭터를 역이용한 '지적질(?)' 개그는 이미 지드래곤을 향해 던져진 적이 있다. 몇 차례 '무한도전'에 출연하기도 했던 누가 뭐래도 가요계의 패션 리더 지드래곤에게 정형돈이 던지는 "지드래곤 보고 있나? 이게 패션이다."라는 도발적인 반전개그는 폭발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이것은 최근 '무한도전'에서 정형돈과 짝을 이뤄 서해안 고속도로 가요제에 나갔던 정재형에게도 이어졌다. 정형돈의 개그를 그대로 이용해 "유희열은 나부랭이, 김동률은 조무래기, 자신은 신"이라고 표현한 정재형은 후에 유희열 팬 페이지에 "유희열 보고 있나..."라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이른바 '보고 있나'식 개그가 자못 도발적임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에게 폭발적인 지지를 얻는 이유는 이른바 존재감 넘치는 잘난 이들의 세상의 그늘에 가려져 존재감 없는 이들의 억눌린 감정을 유머를 통해 풀어내기 때문이다. 정형돈이 그 중심에 서게 된 것은 당연하다. 그는 '무한도전'에서 이미 '웃기지 못하는 개그맨', '무존재감'을 캐릭터로 갖고 있는 개그맨이기 때문이다. 즉 '무존재감'을 캐릭터로 만들어 오히려 웃음을 주는 역발상을 보여주던 정형돈은 이제 그 '무존재감'을 거꾸로 무기 삼아 존재감 있는 이들을 도발하는 것으로 한 차원 더 나간 웃음을 선사하고 있다.

어찌 보면 이것은 이 변화된 시대의 요구인지도 모른다. 주연이 중심에 서고 조연들은 그 그늘에 가려지던 과거에서 이제는 조연들도 각각의 미친 존재감으로 주연 이상의 주목을 끄는 시대가 아닌가. 그러니 정형돈의 조금은 과장된 자신감은 웃음을 주면서도 한편으로는 통쾌함을 준다.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을 것 같은 존재감의 소유자들 앞에 당당하게(어찌 보면 무모하게) 자신을 내세우는 모습이 웃음 이상의 공감을 주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정형돈은 이 미친 존재감의 시대가 요구하는 역발상의 개그맨이다.


거리를 둘수록 더 커지는 '무한도전'의 감동, 왜?

'무한도전'(사진출처:MBC)

최근 들어 ‘감동’은 TV 콘텐츠의 한 트렌드가 되었다. 과거 이 용어는 드라마에 주로 등장했었지만 이제는 다큐멘터리, 예능까지 그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예능이 웃음을 넘어서 감동을 추구하는 경향은 특히 두드러진다. 웃음을 전하기 위해 슬픔이나 고통조차 숨기고 있는 그들이 어느 순간 갑자기 눈물을 흘리는 모습은 과거라면 용납되지 않는 장면이다. 심지어 부친상을 당한 사실을 알면서도 광대 분장을 한 채 무대에 섰던 코미디언들의 일화는 지금도 전설처럼 내려오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차라리 눈물을 흘리거나 상황을 토로하거나 아니면 아예 양해를 구하고 무대에 서지 않는 게 상식적인 게 되어 있다. 이른바 ‘리얼’을 추구하는 예능은 이제 눈물 또한 숨길 이유가 없게 된 것(어쩌면 숨기면 안 되는 것)이다.

예능 프로그램의 감동이나 눈물은 물론 나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리얼한 것이다. 하지만 이 지점에는 위험한 함정도 도사리고 있다. 즉 어떤 감동은 때론 지나치게 교조적이며 계몽적으로 흘러갈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흔히 이것을 '억지 감동'이라고 표현한다. 때론 '병맛'이라고도 하고 '오글거린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억지 감동'. 감동이라는 단어가 붙어 있어서 그런지 그게 무슨 큰 문제일까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실체를 들여다보면 이 '억지 감동'이 가져오는 재미의 반감은 실로 작지 않다. 왜 그럴까. 그것이 특정한 목적을 갖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경관을 화면으로 보여주면서 '아름답다!'고 자막을 붙이는 것이 무슨 차이일까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장면을 그냥 내보내는 것과 자막이 붙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그것은 경관 자체를 보는 이들이 저마다의 감흥으로 받아들이게 하느냐와 굳이 한 방향으로 감상하게 하느냐의 차이다.

'1박2일'이 주는 감동과 '무한도전'이 주는 감동의 차이는 근본적으로 이 지점에서 발견된다. '1박2일'은 조연특집의 마무리에 계속해서 후기를 달아놓는다. 그들이 다시 자신들의 일상으로 돌아간 모습을 조명하면서 그들의 삶을 상찬한다. '명품조연'이 갖는 의미는 물론 상찬할만한 일이다. 하지만 거기에 끝없이 자막을 달아가면서 그 의미를 풀어내는 일은 때론 과잉처럼 여겨진다. 반면 '무한도전'의 자막은 대부분(물론 어떤 경우에는 '무한도전' 역시 과잉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대상과의 거리감을 유지한다. 특히 게스트가 출연했을 때 그 거리감은 더 철저히 지켜진다. '서해안 고속도로 가요제'에서 그 많은 게스트들이 등장하면서도 그들을 상찬하는 자막이나 연출을 발견하기 어려운 것은 그 때문이다.

물론 '1박2일'의 자막을 통해 드러나는 일종의 과잉은 TV라는 대중매체를 타는 프로그램이 갖는 어쩔 수 없는 한계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TV 프로그램은 시청률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시청률은 특수성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보편성에서 나오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 지나치게 친절한 자막은 바로 그 보편성에 대한 강박인 셈이다. '우리는 이렇게 감동했다. 그러니 여러분도 그 감동을 느끼시라.' '1박2일'은 그렇게 프로그램을 통해 말하고 있다.

'1박2일'이 시청률이 높은 것은 바로 이 점 때문이다. 이 프로그램은 보편성을 추구한다. 대중들의 마음을 따라간다. 자신들이 느낀 감동을 고스란히 대중들이 느끼기를 바라며, 또 그 전달에 있어서 능숙하다. 하지만 '무한도전'은 다르다. '무한도전'은 보편성이 아니라, 그 특정한 한 지점을 그대로 뚝 떼어내서 되도록 그 자체로 보여주려 애쓴다. 물론 자막은 여기서 다른 기능을 담당한다. 자신들이 느낀 감동을 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리를 두고 객관화시키려는 의도가 더 짙다.

'무한도전'이 마니아 예능 같은 느낌을 주는 건 바로 이 때문이다. 뭔가 설명이 없기 때문에 대중들은 좀 더 적극적으로 프로그램에 참여해 자신들만의 해석을 달아야 한다. 일반적인 TV 시청자들에게는 수고스럽기 그지없는 일이다. 그래서 '무한도전'이 주는 감동은 주어진다기보다는 스스로 발견하는 것이다. 자막을 통해 어떤 의미도 전하지 않았지만 시청자들이 그 조각들을 맞춰서 저마다의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침묵할수록 더 커지는 의미와 감동. 그 역설을 보여주는 게 바로 '무한도전'이다.


'무한도전'이 보여준 진정한 음악의 즐거움

'무한도전'(사진출처:MBC)

오디션 프로그램 열풍이 가져온 부작용일까. 언제부턴가 음악은 마치 무기 같은 것이 되어버렸다. 잘 부르면 합격이고 못 부르면 탈락이 되어버리는 상황에서 과연 진정으로 음악을 즐길 수 있을까. 아무리 감성을 담아서 부른다고 해도 엄청난 성량으로 폭탄처럼 대중을 정신없게 만드는 노래에 묻혀버리는 무대. 그 위기감에 거의 한풀이하듯 끝없이 질러대는 목소리는 처음에는 감동이었으나 차츰 피로감으로 변해갔던 것도 사실이다.

'나 원래 이렇게 잘 부르는 사람이야.' 혹은 '이렇게 부르는데도 감동하지 않을 거야?' 이 살벌한 무대 위에서 음악은 자꾸 처절해진다. 물론 그것도 하나의 음악이 주는 감동이겠지만, 어디 그것만이 전부일까. 음악은 언제든 편안하고 즐겁고 감동적인 것이 아니었던가. 부르는 자와 함께 부르는 자가, 또 부르는 자와 듣는 자가, 또 듣는 자와 듣는 자가 서로 교감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것이 아니었던가. '무한도전' 서해안 가요제 특집 그 첫 번째 이야기가 전해준 것은 오디션 열풍에 잠시 묻혀있던 '음악으로 나누는 교감'의 즐거움이다.

10cm의 노래, '사랑은 은하수다방에서'의 그 장소 은하수다방에서 벌어진 하하와의 즉석 콘서트는 음악이 주는 자유가 무엇인지를 느끼게 해주었다. 유쾌하게 '아메리카노' 한 잔을 엎는 것으로 첫 만남을 가진 이들은 조금씩 음악으로 교감하며 어우러졌다. 제이슨 므라즈의 'I'm Yours'는 권정열의 미성에 하하의 '쎄-'가 섞이면서 절묘한 하모니를 만들어냈다. 무엇보다 긴장감이 감도는 무대가 아닌 카페에서 또 지나치다 악기 한 대 들고 언제든 끼어서 부르는 그 장면은 칼 같은 오디션 무대에 피곤해진 음악을 즐길 수 있게 해주었다.

일본 콘서트 현장을 찾아간 박명수와 G드래곤의 만남은 음악을 통해 교감하는 신구세대의 풍경을 그려냈다. 세련된 G드래곤의 음악에 너무 따라잡기 힘들다고 투정을 부리기도 하고, 자신에게 익숙한 트로트풍을 강권하기도 하면서 접점을 찾아가는 모습이 시종일관 웃음을 주었던 이유는 그 구세대의 박명수의 투정이 오히려 귀엽게 느껴졌고, 그걸 받아주는 신세대 G드래곤의 아티스트적인 면모가 여유롭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싸이 콘서트에서 싸이와 함께 미친 에너지를 발산한 노홍철은 그 열정적인 무대를 통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공감하게 되었다. '연예인'을 부르며 온 몸을 흠뻑 땀으로 적시며 노래하는 싸이가 마지막 곡을 부르고 무대에 내려와 복잡한 회한에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가수의 또 다른 면을 보여주었다. 그러니 노홍철이 결국 싸이의 겨드랑이 땀(?)마저 공감하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게다.

예능프로그램을 통해 개그욕심을 드러내던 정재형은 음악작업에 있어서 진지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그와 만난 정형돈은 묘한 부조화를 통해 음악의 또 다른 즐거움을 예고했다. 그것은 바로 극과 극의 느낌이 음악 하나로 연결될 수 있다는 기대감이다. 그 어색함이 깊으면 깊을수록 그들이 함께 만들어낸 음악이 주는 감흥도 깊어질 수 있다는 반전의 기대감. 한편 늘 바보 캐릭터로만 보였던 정준하는 뮤지컬 무대의 음악을 통해 진지함을 보여주었고, 스윗 소로우는 그 감흥에 덧붙여 즉석 아카펠라로 교감하는 모습을 연출했다. 역시 반전이 주는 하모니의 공감은 더 컸다.

바다와 길은 자신들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통해 가슴 찡한 공감을 나누었다. 서로가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고개를 끄덕여주고 눈물을 흘려주고 토닥여주는 모습은 그 자체로 음악이었다. 거기에 곡만 붙이면 그대로 음악이 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으로 통한 그들의 음악이 기대되는 건 그 깊은 교감이 그대로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해질 수 있으리라는 예감 때문이다.

한편 유재석과 이적은 기타 하나 들고 떠나 이야기를 나누며 그것이 바로 음악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부른다기보다는 이야기하듯 노래하는 이적 특유의 즉흥음악은 유재석의 무명시절 일이 없어 제일 고민했던 게 '내일은 뭐 하지'라는 모티브에서 시작됐다. 아프지만 추억어린 이야기와 만나 특별한 감흥을 선사한 이 노래는, 노래가 아무리 좋아도 누가 부르느냐에 따라 그 맛이 달라진다는 것을 음악으로 들려주었다.

사실 음정이나 박자가 좀 불안하고 고음이 잘 올라가지 않으며 또 목소리가 미성이 아니라는 게 진정 음악을 즐기는데 장애가 될 수는 없다. 음악은 듣기 좋고 소름끼치게 부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자체를 장난치듯 만들고 갖고 놀며 즐길 때 더 가치를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무한도전' 서해안 가요제 특집은 '음악으로 나누는 교감'을 통해 이 진정한 음악의 즐거움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무한도전'은 어떻게 현실과의 거리를 유지했나

'무한도전'(사진출처:MBC)

과연 연애를 조작할 수 있을까. 불가능하진 않을 게다. 하지만 조작을 통해 성공했다고 해도 그건 진정한 성공이 아닐 지도 모른다. '시라노 연애조작단'을 패러디한 '무도 연애조작단'이 실패로 돌아간 것은 영화와 실제 상황은 그만큼 다르다는 걸 말해준다. 영화에서는 결과가 중요할 지 모르지만, '무한도전'에서는 과정이 더 중요하다. 본래 '무한도전'은 도전의 성공이 아니라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중요한 것 아닌가. 그런 점에서 보면 '무도 연애조작단'은 역시 '무한도전'다운 결과물을 선보인 셈이다.

사실 '무도 연애조작단'이라는 소재는 자칫 잘못하면 자극적인 엿보기가 될 수도 있었다. 마치 '치터스' 같은 타인의 사생활을 숨어서 바라보며, 그 사생활에 개입하는 것은 윤리적인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다. 리얼 버라이어티쇼는 영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도 연애조작단'은 만만한 아이템이 아니다. 성공시키기 위해 지나치게 MC들이 개입했다가는 큰 논란을 만들 수 있다는 얘기다. 그것은 현실조작이 되는 셈이니까.

하지만 '무한도전'은 모든 과정에서 리얼 버라이어티쇼의 베테랑다운 절제력을 보여주었다. 강복씨가 의뢰한(?) 여성이 남자친구가 있다는 얘기를 듣게 된 멤버들이 그 사실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바로 그 여성을 찾아가 이 모든 걸 다 밝힐 것인지 아니면 일단 강복씨에게 그 의사를 물어볼 것인지 고민하는 장면은 대표적이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질질 끌지 말고 속전속결로 결과를 알아보자는 박명수와 달리, 정형돈은 강복씨와 그 여성의 입장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고 맞섰던 것. 만일 여기서 고민 없이 행동했다면 그 결과는 의외의 파장을 만들었을 공산이 크다.

중요한 건 이 기대와는 다른 결과들에 대해서 멤버들이 개입하기 보다는 저들끼리 의견 충돌을 일으키는 과정 자체를 '무한도전'은 웃음으로 바꾸었다는 점이다. 귀가 얇은 정준하는 박명수와 정형돈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상황을 보여주었고, 박명수가 유재석에게 "넌 어떻게 할 거냐"고 묻자 정준하는 결국 유재석의 결정에 따르려는 박명수를 비꼬면서 큰 웃음을 주었다. 이로써 며칠 후 강복씨에게 이 모든 사실을 알리고, 그녀에게 전화통화를 통해 이 상황을 전한 '무한도전' 멤버들은 오히려 강복씨를 걱정하는 그녀의 따뜻한 마음을 확인하는 훈훈함을 보여줄 수 있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그 순수한 마음이 드러났고, 또 그 사랑을 받을 수 없는 이의 따뜻한 마음도 드러난 셈. 결과는 실패였지만 과정은 성공이었던 셈이다.

한편 오랜 친구로 지내오면서 속마음을 표현하지 못했던 은정씨는 무심한 척 보이는 남자친구 바울씨의 질투심을 유발하기 위해 애인인 척 연기자를 투입하기도 했다. 마치 숨어서 명령을 내리는 아바타 소개팅 같은 느낌을 주었지만, '무한도전'은 여기서도 그 이상의 선을 넘지 않았다. 박명수는 엉뚱한 명령을 내려 웃음을 주려고 했지만, 주변 멤버들이 만류한 것. 오히려 프로그램은 박명수를 '아바타 중독자'로 캐릭터화해서 웃음을 주었다.

영화관에서 모든 걸 밝히고 은정씨의 속마음을 얘기하는 장면도 편집을 통해 몰래카메라의 자극을 상쇄시켰다. 결국 친구로 남기로 함으로써 '연애조작(?)'이 실패했다는 것을 미리 보여준 후, 마지막에 후일담처럼 이 몰래카메라의 상황을 살짝 보여준 것. 흔쾌히 이 상황을 받아들인 바울씨의 사전 허락을 통해 이 모든 영상들이 방영되고 있다는 것을 그 편집을 통해 보여준 것이다.

만일 방송이 좀 더 이들의 상황에 개입을 했다면 어쩌면 이 '연애조작'은 성공이라는 결과를 만들어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리얼이 아니고 말 그대로 조작이 된다. 따라서 '무한도전'은 '조작'이라는 단어를 소재에 붙였지만 실제 상황에서는 적절한 현실과의 거리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모두가 바라는 판타지가 아니라 결국 실제 현실대로의 실패라는 결과가 나온 것은 다행스럽게도 지극히 '무한도전'다운 선택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결과에 집착하지 않아도 과정만으로 충분히 즐거울 수 있다는 것을 '무한도전'은 '연애조작단'을 통해서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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