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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덤' 김은희 작가의 조선 좀비 캐릭터 특별한 이유

김은희 작가의 신작 드라마 <킹덤>에 대한 반응은 호불호가 엇갈린다. 넷플릭스를 통한 전 세계 동시 방영. 해외 반응은 폭발적이지만 우리네 반응은 이와는 조금 다르다. 그 이유는 지역적 차이에서 비롯된다. 


김은희 작가는 누가 뭐래도 국내 드라마 작가 중 누구나 기대할 수밖에 없는 최고의 작가다. <시그널>로 그 기대감은 최고조에 달했다. 국내 드라마 하면 떠올리는 멜로드라마나 가족드라마가 아니라 장르물로서 이만한 성취를 만들어내는 작가를 찾기가 어려웠던 게 사실이다, 

대부분의 한류 드라마라고 하면 늘상 떠올리는 게 멜로 아니면 가족이다. 그런데 장르드라마로도 확실한 우리만의 색깔을 지니면서 미드와 비교해도 손색이 전혀 없는 완성도를 갖는 드라마. 그 새로운 장르극의 가능성을 보여준 작가가 다름 아닌 김은희 작가다. 

그러니 그가 새롭게 시작한 <킹덤>이라는 드라마에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다. 그것도 국내 플랫폼이 아니라 넷플릭스라는 글로벌 플랫폼에 몸을 실었다는 사실은 더더욱 기대를 높이는 이유가 된다. 게다가 <킹덤>은 국내 드라마들처럼 기획단계에서 제작이 완료되고 방영되는 그 기간이 결코 짧지 않았다. 사실 어찌 보면 국내 드라마들이 너무 완성도가 아니라 시의성에 맞춰 재빨리 기획되고 편성되는 느낌마저 새삼 확인시켜준 드라마가 바로 <킹덤>이었다. <킹덤>은 기획단계가 거론된 이후 거의 2년이나 지난 후에 첫 시즌, 그것도 6회 분량을 내보냈다. 

그러니 기대감이 한층 높이진 국내의 시청자들이 이제 도입 부분에 불과한 6회분을 보고 그만한 기대감을 맞춘다는 건 애초부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여기서 드는 생각은 과연 우리네 제작 풍토와 그 제작의 속도가 과연 글로벌 시장에 우리도 진입한 현 드라마 환경에서 적절한가 싶은 부분이다. 조금 속도가 느려도 제대로 한 편씩을 만들어내고 그런 완성도가 더 오래도록 또 더 폭넓은 나라에서 소비될 수 있게 하려는 넷플릭스의 전략을 우리도 어느 정도는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킹덤>을 보며 느끼는, 뭐 별다를 것 없어 보이는 사극의 틀은 외국에서 보면 새롭게 느껴질 수 있다, 우리는 워낙 현실을 반영하는 사극을 하면서 힘없는 왕과 조정을 농단하는 신하의 이야기를 너무나 많이 본 바 있다, 그러니 그 틀을 가져온 <킹덤>이 어딘가 새롭게 느껴지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킹덤>은 그 사극적 틀만이 아니라 거기에 좀비라는 장르물의 특성을 섞어낸 새로운 작품이다. 만일 좀비 장르의 특성을 이해하고 우리네 사극의 틀에 익숙하지 않는 이들이라면 <킹덤>은 지금까지의 좀비 장르와는 색다른 해석이 담겨있다는 것에 놀라울 수 있다. <킹덤>이 다루는 조선 좀비는 서구에서 만들어낸 그것과는 확연히 다른 면모들이 있기 때문이다.

서구의 좀비들은 대부분 위협적이어서 ‘박멸해야할 대상’으로 그려진다. 그래서 대부분 액션 장르로 구현되면서 무차별적으로 살육되는 좀비들이 그려지곤 했다. 물론 <웜바디스> 같은 영화에서 좀비는 ‘공감의 대상’으로 바뀌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멜로의 대상으로서 그려진 새로운 해석이다. 하지만 <킹덤>에서 등장하는 조선 좀비는 확연히 다르다. 그것은 ‘춥고 배고픈 민초’로 해석된다. 이것은 대단히 새로운 우리식의 해석이다. 다닥다닥 붙어 잠이 들고, 깨어나면 누군가의 살을 물어 뜯으려하는 욕망으로 그려지는 조선 좀비는 그래서 그 어느 좀비 장르에서도 발견하기 힘든 새로운 해석이 더해진 좀비가 아닐 수 없다. 

<부산행>의 좀비가 ‘다이내믹’을 특징으로 삼았다면 <킹덤>의 좀비는 배고픔에 굶주려 있어 다이내믹함을 보여줄 만큼 폼 나는 그런 특징을 보여주지 않는다. 어딘가 배가 고파 무언가를 먹고 싶어 달려드는 좀비의 색채를 <킹덤>은 새롭게 그려낸다. 한편 좀비 창궐의 근원이 되는 왕은 이와는 다른 느낌을 준다. 마치 욕망을 위해 누군가를 덮치는 모습으로 그려지는 것. <킹덤>의 이런 색다른 해석이 가능한 건 다름 아닌 좀비 장르를 가져오면서도 이를 우리 식으로 해석한 김은희 작가가 있어서다.(사진:넷플릭스)


Posted by 더키앙

'킹덤'이 열어놓은 조선판 좀비세상, 시즌1은 시작일 뿐

(본문 중 드라마 내용에 대한 누설이 있습니다. 드라마를 시청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죽은 왕을 되살리려는 욕망에서부터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킹덤>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죽은 자를 살릴 수도 있다는 생사초. 그걸로 살아난 왕은 그러나 괴물이 되어버린다. 죽었지만 살아난 왕. 그리고 살아났지만 죽은 왕. <킹덤>의 전제가 되는 이 설정은 그 자체가 상징적이다. 한 나라의 운명을 쥐고 있는 자가 살아있어도 산 자의 역할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그 나라 전체를 얼마나 피폐하게 만드는가 하는 건 굳이 조선이 아니어도, 또 좀비라는 특이한 존재들이 아니어도 우리는 근현대사를 통해 알고 있지 않은가.

좀비는 ‘죽었지만 살아 움직이는 존재’라고 볼 수도 있지만 반대로 ‘살아있지만 죽은 거나 마찬가지인 존재’라고도 볼 수 있다. <킹덤>이 죽은 왕을 통해 담은 좀비의 의미는 후자에 가깝다. 나라의 중심을 잡아줘야 할 존재가 ‘죽은 거나 마찬가지’로 전락했을 때, 그 비어있는 권력에 대한 비뚤어진 욕망들이 창궐한다. 혜원 조씨의 수장으로 조선을 쥐락펴락하는 영의정 조학주(류승룡)의 욕망이 그것이다. 그는 죽은 왕을 살려서라도 자신의 욕망을 더 이어가려 한다. 그의 딸인 중전(김혜준)이 가진 복중태아를 통해 왕좌를 이어가려는 것. 조학주는 ‘비선실세’로 왕과 중전을 대신해 모든 권력을 손아귀에 쥔다.

흥미로운 건 괴물이 되어버린 왕으로부터 ‘좀비로 변하는 역병’이 민초들에게 퍼져나가는 그 과정이다. 죽은 왕을 살려낸 의원과 함께 갔던 소년이 습격을 받아 죽음을 맞이하고, 의원이 동래 지휼현으로 그 시신을 데려오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극심한 굶주림에 시달리는 병자들에게 의문의 남자 영신(김성규)이 그 시신을 요리해 먹이고, 이로써 좀비로 변하는 역병이 창궐하는 것. 역병의 과정은 그래서 왕의 부재와, 그로인해 굶주리는 백성들이라는 ‘통치의 문제’를 그대로 담아낸다. 결과는 이렇게 탄생한 좀비들이 마치 세상을 뒤집기라도 할 것처럼 쏟아져 나와 피와 살점이 튀기는 아비규환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김은희 작가가 <킹덤>을 ‘배고픔’에 대한 이야기로 했던 것처럼, 이 드라마는 가진 자들이 배불리 먹는 장면들과 배고픈 민초들을 대비해 보여준다. 이를테면 백성들이 먹을 게 없어 초근목피는 물론 벌레까지 다 잡아먹는 상황 속에서도 동래부사 조범팔(전석호)이 주연을 벌이고 떨어뜨린 음식을 버리는 장면이 그렇다. 이러한 대비효과 때문에, 지휼현에서 나온 시체들이 어둑어둑해지자 하나둘 깨어나 동래부사 조범팔과 그 무리들을 공격하는 장면은, 수탈하는 저들과 그래서 배고픈 민초들의 대결처럼 읽히는 면이 있다.

<킹덤>은 물론 조선시대라는 배경에 역병을 좀비로 해석했다는 새로움이 더해져 신선함을 주지만, 그것보다 더 흥미로운 건 그 ‘배고픈 좀비’라는 존재들을 민초로 해석하면서 권력과 정치의 문제를 담아내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사극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왕의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왕이나, 그래서 권력을 쥐고 흔드는 비선실세 신하의 이야기는 그리 새롭다 말하긴 어렵다. 하지만 이를 ‘좀비’라는 존재를 통해 정치 권력의 문제로 풀어낸 점은 확실히 주목할 만하다. 넷플릭스라는 글로벌 플랫폼의 특성을 염두에 두고 보면 사극이 상대적으로 덜 익숙한 해외팬들에게 더 큰 흥미를 줄 수 있는 지점이다.

<킹덤> 시즌1은 김은희 작가의 야심이 엿보이기도 한다. 사실 6회로 마무리되는 시즌1은 이 거대하게 펼쳐질 수 있는 이야기의 겨우 도입부분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결국 시즌1은 무언가 왕에게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직감한 왕세자 이창(주지훈)이 의원을 찾아 동래 지휼현까지 갔다가 역병의 실체를 보게 되고, 그의 호위무사인 무영(김상호)과 함께 이 병이 전국적으로 퍼져나가는 걸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게 되는 그 모험담을 담고 있다. 그는 조학주에 의해 역모로 몰려 금군과도 대적해야 하는 상황이다.

시즌2가 더욱 궁금해지는 건 시즌1이 깔아놓은 인물들이 어딘가 비밀스럽고 저마다의 욕망들을 숨기고 있어 향후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다는 점 때문이다. 왕세자 이창은 조학주처럼 백성을 절대 버리지는 않는다며 그들을 위해 위험한 상황 속에도 뛰어들지만, 그건 어찌 보면 조학주에 대한 철저한 증오에서 비롯되는 행동처럼도 보인다. 그는 실제로 왕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려는 역모의 연판장에 스스로 이름을 적어 넣었던 인물이기도 하다. 그 역시 자기만의 욕망을 숨기고 있다.

조학주는 딸 중전을 통해 비선실세의 욕망을 보이지만, 그렇다고 조학주와 중전이 서로를 돕는 위치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권력의 왕좌를 두고 조학주와 중전 또한 팽팽한 대립을 보이고 있는 것. 또 이창이 의탁한 상주의 안현대감(허준호)은 왕세자의 어린 시절 스승으로 그를 돕는 충신처럼 보이지만, 의문의 인물 영신이 살던 마을이 수몰된 일과 어떤 관련이 있는 인물이다. 그는 어딘가 제2의 조학주 같은 느낌을 준다. 이처럼 시즌1에 깔아놓은 인물들은 향후 저마다의 욕망을 드러냄으로써 이야기의 변주를 만들어낼 거라는 기대감을 갖게 만든다.

시즌1은 시작일 뿐이다. 김은희 작가가 <킹덤>으로 열어놓은 조선판 좀비세상은 앞으로도 여러 시즌을 통해 풀어나가야 할 이야기가 적지 않다고 보인다. 결국은 권력을 가진 자들의 욕망과 무고한 민초들의 배고픔이 좀비라는 존재로 창궐하여 부딪치는 이야기이고, 좀비들보다 더 좀비가 되어가는 욕망에 눈 먼 이들의 이야기가 결국 이 거대한 <킹덤>이라는 제국이 그려내려는 세계가 아닐까. 도입 부분만으로도 앞으로 펼쳐질 세계가 기대되고 궁금해지는 이유다.(사진:넷플릭스)

Posted by 더키앙

'창궐', 시도는 참신하지만 남는 아쉬움들

넥스트엔터테인먼트월드(NEW)가 내놓은 영화 <창궐>과 <부산행>은 닮은 점이 있다. 우리 식으로 해석한 좀비 장르라는 점이 그 첫 번째다. <부산행>은 좀비 장르의 마니아적인 특성을 훌쩍 뛰어넘어 1천만 관객을 넘어서는 놀라운 흥행을 기록했다. 두 번째로 비슷한 건 다소 폐쇄적인 특정 공간에 집중된 좀비 장르라는 점이다. <부산행>은 영화의 대부분이 부산까지 가는 KTX와 몇몇 역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고, <창궐>은 제물포항과 궁이라는 두 공간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하지만 이런 점보다 더 흥미롭게 보이는 유사점은 서구의 좀비 장르와 사뭇 다른 좀비라는 존재에 대한 해석이 들어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좀비가 바로 민초라는 시선이다. <부산행>에서는 가족이 좀비로 변화해 결국 어쩔 수 없이 싸우게 되는 그 과정을 통해, 또 집단적으로 몰려다니며 공격하는 좀비들을 통해, 우리네 집단주의적인 문화와(나아가 군사문화가 더해진) 그로 인해 대립과 갈등이 가족 내에서도 존재하는 우리네 상황을 에둘러 담아낸 바 있다. 

<창궐>은 좀비를 ‘들에 있다고 하는 귀신’을 뜻하는 야귀로 해석했다. 그런데 야귀떼들이 보이는 습성이 흥미롭다. 야귀떼들은 갈증과 배고픔을 호소하며 눈이 시뻘개지고 결국은 가족을 포함한 사람을 습격한다. 굶주린 민초들의 생존본능이 이 야귀라는 존재의 특징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 

이들이 이렇게 된 건 영화가 처음부터 특별한 설명 없이 보여준 ‘헬조선’의 풍경들 때문이다. 왕 이조(김의성)는 힘이 없고 대신 권력을 농단하는 김자준(장동건)에 의해 휘둘린다. 그래서 그의 간계 속에서 심지어 자식마저도 역모로 몰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발생한다. 왕이 관심을 갖는 건 자신의 왕좌뿐이다. 그래서 야귀떼가 창궐하고 있는 제물포의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인다. 

하지만 야귀가 궁으로 들어오고 왕의 측근으로 있던 조씨(서지혜)가 야귀로 변하게 되면서 궁에도 암운이 드리우기 시작한다. 조씨에게 물린 왕이 조금씩 야귀로 변해가고, 또 이런 상황들을 이용하는 김자준의 눈빛이 점점 벌겋게 물들어가면서 야귀에 대한 또 다른 관점이 만들어진다. 굶주린 민초들의 생존본능으로서의 야귀가 조선을 위협하는 존재들로 보였지만, 알고 보면 그들을 그렇게 만든 건 왕좌의 권력에만 혈안이 되어있는 ‘진짜 야귀들’이 궁안에 있었다는 것. 

이렇게 권력욕이 탄생시킨 야귀와 그로인해 굶주린 민초들이 변한 야귀를 구분해서 보면 이 영화가 하려는 이야기가 ‘헬조선’과 ‘국정농단’ 같은 최근 몇 년 전 우리네 현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걸 쉽게 읽어낼 수 있다. 청에서 돌아온 왕자 이청(현빈)이 조선 땅에 발을 딛고 민초들이 사는 모습을 보면서 “이게 나라냐”하고 묻는 대목은 영화가 하려는 이야기를 더욱 명쾌하게 드러낸다. 

사실 이런 이야기 구조와 좀비라는 상징의 우리 식 해석, 게다가 조선시대라는 시대적 배경 속에 좀비 장르를 엮어 보여주는 액션이라는 기획 포인트들은 이 작품이 우리는 물론이고 해외에서도 주목하게 만든 요인들이다. 하지만 기획과 상징적 메시지만으로 영화가 되는 건 아니다. 영화가 주는 재미는 이러한 시대적 정서를 이야기와 액션 속에 응축했다 폭발시키는 그런 섬세한 장치들을 통해서다.

하지만 아쉽게도 <창궐>은 이런 영화적 재미를 장르적으로 구현해내는데 있어서 많은 허점들을 드러낸다. 그 첫 번째는 민초들의 피폐해진 삶에 대한 공감대를 충분히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점이다. 대신 좀비 장르의 특징들인 충격적인 장면들과 액션들이 채워진다. 주인공인 이청의 성장담은 이런 이야기들과 유기적으로 이어지지 않고 있어 본래부터 엄청난 무공을 지닌 ‘슈퍼히어로’의 밋밋한 이야기로 흘러간다.

“왕이 있어야 백성도 있다”는 이야기를 뒤집어 “백성이 있어야 왕도 있다”는 결론에 이르는 그 메시지는 결코 유통기한이 지난 것이 아니지만, 이청이라는 인물이 그런 깨달음에 도달하는 과정이 너무 급작스러워 큰 감흥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물론 170억 원에 달하는 제작비, 그리고 현빈과 장동건 캐스팅이 화제를 모았고, 조금 색다른 좀비 영화를 보겠다는 그 호기심이 관객들의 발길을 잡아끄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입소문이 창궐할 지는 미지수다.(사진:영화'창궐')

Posted by 더키앙

‘미스터 션샤인’의 진짜 주역들은 아무개 민초들이므로

tvN 주말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은 주연만큼 조연이나 단역들에 대한 반응이 뜨겁다. 첫 회 등장과 함께 죽음을 맞이하고 사라진 유진 초이(이병헌)의 엄마 역할을 한 이시아나, 의병활동을 하다 장렬한 죽음을 맞이한 고애신(김태리)의 부모 역할을 한 김지원과 진구, 의병으로 미군과 싸우다 죽은 장승구(최무성)의 부친 역할의 윤경호는 그 짧은 출연해도 강렬한 반응을 일으켰다. 

물론 이들이야 주인공들의 전사를 그려내는 역할이기 때문에 주목받은 면이 있지만, 그 외의 단역 혹은 조연들에 대한 반응들이 뜨거운 건 다른 이유들이 있다고 보인다. 이를 테면 과거에는 추노꾼을 했었지만 개화된 세상에서 전당포를 차려 살아가는 일식이(김병철)와 춘식이(배정남)나, 고애신의 유모로 못하는 게 없는 여걸 함안댁(이정은) 또 그와 짝패를 이뤄 고애신을 돕는 행랑아범(신정근), 유진 초이의 보좌 역할을 하는 여관 임관수(조우진) 같은 인물들이 그렇다. 

이들은 <미스터 션샤인>이라는 의병들의 투쟁을 보여주는 주인공들인 유진 초이나 고애신처럼 전면에 나선 역할을 보여주지는 않지만, 그들 뒤편에서 보이지 않게 그 활동을 지지하고 지원하는 역할이다. 예를 들면 추노꾼이던 일식이와 춘식이는 유진 초이가 상자 속에 숨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척 했다. 그렇게 살아남기를 바랐던 것. 그래서 유진 초이는 미국으로 갔다가 군인이 되어 조선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들은 유진 초이와의 인연 때문에 그 전당포에 고종의 러시아 은행 비자금 문건을 보관하게 된다. 

함안댁과 행랑아범은 그저 ‘애기씨’ 고애신을 수행하는 이들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가 밤이면 친일하는 자들을 저격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고 또 그걸 돕는 인물들이다. 총에 맞아 다친 고애신을 도와 상처를 치료해주고 포위망을 빠져나오는데 동행한다. 그들은 애기씨를 위해 충성을 다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행위는 무의식중에 의병활동과 그리 다르지 않게 된다. 임관수는 유진 초이의 역관이지만, 의병 활동을 숨어서 하다 발각되어 조선을 떠나려는 여인을 도망치게 해주는데 앞장선다. 왜 그렇게 하냐는 유진 초이의 질문에 그는 답한다. 자신이 조선인이기 때문이라고. 그 한 마디는 가볍게 만 보였던 임관수가 가진 조선인으로서의 마음을 드러낸다. 

<미스터 션샤인>은 이처럼 주연들만큼 조연들의 활약에 시청자들이 열광을 보낸다. 그것은 그 역할을 맡은 배우들의 호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드라마가 궁극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바로 그 ‘아무개’로 불리는 의병들의 투쟁사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상 전면에 드러난 이들보다 드러나지 않고 저 마다의 위치에서 싸우다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채 스러진 이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그래서 장승구(최무성)는 다소 쓸쓸하게 자신들의 운명에 대해 말한다. “그들은 그저 아무개다. 그 아무개들의 모든 이름이 의병이다. 이름도 얼굴도 없이 살겠지만 다행히 조선이 훗날까지 살아남는다면 역사에 그 이름 한 줄이면 된다.” 이런 의미로 보면 <미스터 션샤인>의 진짜 주역들은 살짝 뒤편으로 물러나 있는 이들이 아닐까 싶다. 아무개로 남을 수많은 민초들.(사진:tvN)

Posted by 더키앙

'역적' 김상중이 미친 듯이 연기해낸 한 노비의 초상

“우리 길현 어매, 길동이는 손가락 빨렸어도 도련님한테는 젖 물렸고, 우리 길현이는 도련님 대신해 숱하게 매 맞으면서 커들 않았서라. 내는 이날 이때까지 나리 모시느라고 허리 한 번 못 펴봤고, 우리 아버지,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까지 이 집에 뼈며 살이며 힘줄까지 발라 바쳤는데... 아녀 아녀 나리 잘못이 아녀. 다 내 탓이여. 나리가 뭔 잘못이 있겄어. 온통 노비들은 인간이 아니라고들 하는데 나리라고 무슨 뾰족한 수가 있었겄어... 어째서 그 때는 이런 생각을 못했을까잉. 인간 같지 않은 것들 싹 다 죽여뿔고 새로 태어날 생각을 워째 못했을까잉.”

'역적(사진출처:MBC)'

MBC 월화드라마 <역적>에서 아내의 죽음에 아모개(김상중)는 드디어 사태를 깨닫고 각성한다. 자신이 제 아무리 노력해도 이 지옥 같은 노비의 삶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걸 그는 새삼 깨닫는다. 그래서 자신의 주인인 조참봉(손종학)을 향해 낫을 든다. 그에게 ‘아모개’라는 이름을 지어준 조참봉에게 그는 “이름을 고 따위로 지어 놓으니께 아모개는 아무케나 살아도 되는 줄 알았냐”며 끝내 분노를 터트린다. 

남다른 힘을 가지고 태어난 길동이(이로운)에게 절대 어떤 일이 있어도 힘을 보이지 말라고 당부하는 아모개는 결국 자신 역시 화나고 억울한 일이 있어도 참아왔던 그 힘을 꺼내 보인다. 그는 길동에게 애기 장수 이야기를 해주며 천인이 힘을 보이면 자신은 물론이고 가족까지 모두 죽게 된다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그렇게 억누르고 누르며 살아왔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그들은 노비를 아모개라 이름지어버리고 아무렇게나 부려도 된다고 생각하는 인간 같지 않은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역적>이 그리고 있는 세상은 두 개의 세계로 나뉘어진다. 그 하나는 노비들을 착취하고 수탈하며 심지어 그럴 듯한 이유를 내세워 목숨을 거둬가도 아무런 죄가 되지 않는 양반들의 세계다. 그들은 노비들이 가진 것들을 죄다 빼앗는 도적들이지만 이 이상한 세상에서는 그것이 전혀 죄가 아니고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그 양반들은 좀 더 높은 신분에 오르기 위해 수탈한 것들을 더 높은 이들에게 상납한다. 이 수직적 수탈 체계의 끝은 왕이다. 왕의 뒤에 서서 권세를 잡기 위한 줄서기는 그래서 끝없이 아래쪽을 착취하는 일로 이뤄진다. 

다른 한 세계는 양반들에게 재물을 눈앞에서 빼앗겨도 그게 전부 “주인님 것”이라고 피눈물을 토하며 얘기해야 하는 세계다. 아모개 역시 양반들의 재물을 도적질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도적질이 된다. 분노해야 할 상황에서도 분노하지 못하고, 자신에게 어떤 힘이 있다면 그것 때문에 온 가족이 죽을 위기에까지 처하게 되는 이 이상한 세상. <역적>은 이 두 개의 세계가 부딪치며 누가 진짜 도적이고 역적인가를 묻는 드라마다. 

단 2회를 보여준 것뿐이지만 <역적>이 갖고 있는 이 부조리한 세상을 온 몸으로 연기해 보여준 김상중의 존재감은 칭찬 받을 만하다. 사실상 그의 역할은 <역적>에서 힘을 갖고 있지만 힘을 드러내지 못하는 길동이 그의 비극을 들여다보게 함으로써 각성하게 만드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 사극이 앞으로 나가는데 있어서 그 밑바탕이 되는 민초들의 분노 같은 정서를 깔아두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의 역할이 중요했던 건 이 시대를 훌쩍 뛰어넘은 이야기를 왜 지금 우리가 들여다봐야 하는가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미친 듯이 연기해낸 아모개라는 한 노비의 초상은, 가족들을 위해 몸이 부서져라 일을 하지만 돈과 권력을 가진 이들이 그들끼리 벌이는 ‘도적질’에 의해 나라는 갈수록 피폐되고 서민들의 삶은 더더욱 힘들어진 현재에 더 큰 울림을 줄 수밖에 없다. 그래서 현실을 각성한 아모개의 절규는 이름 없이 묵묵히 성실하게만 살아왔던 많은 대중들을 공감시킨다. 바로 이 아모개의 연기를 통해 김상중은 단 2회 만에 <역적>을 기대작으로 만들었다.

Posted by 더키앙

김은숙 작가의 <도깨비>, 어떤 정서를 건드리고 있나

 

시간과 공간, 이승과 저승, 현실과 비현실 같은 경계들을 모두 뛰어넘었다. 고려시대 무신 김신(공유)은 자신이 지키던 주군의 칼날에 쓰러지지만 그를 지지하는 민초들의 염원에 의해 되살아나 영원히 살아가는 축복이자 저주를 받게 된다. 완전한 무()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도깨비 신부가 그의 가슴에 박힌 검을 뽑아야 한다는 신탁을 받은 채.

 

'도깨비(사진출처:tvN)'

tvN <쓸쓸하고 찬란하-도깨비(이하 도깨비)>는 우리네 전설과 야담에 등장하는 도깨비라는 특이한 존재를 소재로 담았다. 신성성을 가진 존재로서 민간신앙의 대상이었던 도깨비는 민담 형태로 구전되면서 인간적인 면면들이 깃든 존재로 그려져 왔다. 신앙의 대상인 신에서부터 인간에게 당하기도 하는 모습으로 인간적인 면모를 가진 그런 존재.

 

<도깨비>는 그래서 그 특이한 존재적 특성 때문에 고려시대부터 현재까지 시간적 한계를 훌쩍 뛰어넘었고, 죽음을 뛰어넘어 불사하는 존재로서 그려졌으며, 서울의 한 복판에서 문 하나를 열고 캐나다의 거리로 나가는 공간적 한계도 뛰어넘는 존재이다. 드라마가 이런 주인공을 세운다는 건 그간 복작복작대던 드라마 특유의 이야기의 한계 또한 뛰어넘어야 함을 뜻한다.

 

<도깨비>는 그래서 동서를 뛰어넘어 다양한 이야기들을 끌어안았다. 사극에서부터 전형적인 신데렐라 구성의 가족이야기, 마치 <전설의 고향>을 현대식으로 해석한 듯한 도깨비와 저승사자의 이야기와 북유럽 하이랜더의 죽지 않는 불사의 존재에 대한 판타지 장르까지 이 한 작품에 담겨졌다. 김은숙 작가 같은 베테랑이 아니면 시도하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서 그 중심구도는 김은숙 작가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할 수 있는 멜로가 자리했다. 도깨비 김신과 그에 의해 죽지 않고 태어나 자라게 된 지은탁(김고은)의 사랑이야기가 그것이다. 불사의 존재인 김신은 드라마 제목에 깃들어 있는 것처럼 쓸쓸하고 찬란한인물이다. 그가 바라는 지향점이 결국 무()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는 쓸쓸하다. 그런 그가 귀신을 보는 것 때문에 왕따 당하는 지은탁이라는 소녀를 만난다. 스스로가 도깨비 신부라는 그녀는 스스럼없이 김신에게 시집가겠다고 말하며 해맑게 웃는다.

 

드라마는 인물의 욕망에 의해 굴러가기 마련이란 점에서 보면 도깨비라는 존재가 가진 무()에 대한 욕망은 인간적인 욕망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이 드라마가 현재의 시청자들의 욕망을 이끌어내는 존재는 지은탁이라는 소녀다. 그녀를 처음 보게 된 김신이 특이하게도 그녀에게서 미래가 읽히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농담처럼 던지고, 그녀가 다름 아닌 김신에 의해 되살려져 덤으로 사는 인생이라는 걸 확인해주는 대목은 그래서 중요하다.

 

누군가에 의해 죽음을 맞게 된 엄마와 그 죽기 직전 간절한 기도를 하라고 얘기해줬던 삼신할매(이엘), 그래서 도깨비에 의해 살 수 있게 되어 얹혀 지내며 구박 받는 신데렐라의 삶을 살아가는 그녀. 어찌 보면 절망적일 수 있는 청춘이지만 그녀에게도 어느 한 순간의 찬란한 빛처럼 신이 깃든다. 바다 앞에서 절망적인 그녀가 읊조리듯 소원을 비는 그 순간에 신과 조우하며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민간 설화의 이야기를 통해 구전되며 만들어진 도깨비라는 존재는 어쩌면 당대의 힘겨웠던 민초들의 절망의 끝에서 기대게 되는 구복의 존재였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도깨비>가 가진 이야기는 단지 남녀 간의 판타지 멜로라기보다는 우리 시대에 억눌린 어떤 정서 같은 것들이 절망적인 순간 기대게 되는 이야기처럼 보인다. 시간과 공간, 이승과 저승 그리고 현실과 비현실을 훌쩍 뛰어넘는 이야기. 결국 그건 실체가 없는 판타지로서 쓸쓸하기 그지없는 것이지만 그 판타지가 누군가를 살아가게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찬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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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룡>, 민초들의 대변자 신세경의 일갈

 

그럼 전 뭘해요? 산다는 건 뭔가 한다는 거잖아요. 근데 전 아무 것도 할 게 없어요. 길을 잃었다고요. 그럼 그냥 이렇게 죽어요? 뭐라도 해야 사는 거잖아요.” SBS 월화사극 <육룡이 나르샤>에서 분이(신세경)는 정도전(김명민)에게 이렇게 토로한다. 그녀는 절망하고 있다. 아니 백성들이 그렇다. 자신들이 경작한 쌀의 무려 8할을 세금으로 뜯어가는 양반들이다. 그것도 모자라 9할로 세를 올렸다. 잦은 왜구들의 출몰로 백성들을 돌보기 위함이라는 미명하에.

 


'육룡이 나르샤(사진출처:SBS)'

<육룡이 나르샤>에서 민초들은 그들이 경작하는 땅을 고스란히 닮았다. 그들이 경작하는 땅이 그렇듯이 제 몸이 제 몸이 아니고 끊임없이 수탈당한다. 정도전은 절망에 빠진 분이에게 한 가지 희망을 전한다. 버려진 황무지를 개간해서 곡식을 경작해보라는 것. 하지만 이런 시도는 금세 들통이 나버린다. 한때는 성균관의 지식인이었으나 모진 고문 끝에 변절하고 이제는 앞장서 백성들을 수탈하는 홍인방(전노민)의 가노들이 들이닥쳐 민초들을 짓밟고 경작한 곡식을 빼앗는다. 그들은 말한다. “고려의 모든 땅은 다 나라 땅이야.”

 

분이와 살아남은 민초들을 구해준 이방원(유아인)은 굳이 관아에 가겠다는 그녀를 막아 세우며 결국 너희들이 국법을 어겨 이 사단이 난 것이 아니냐고 말한다. 그러자 누르고 눌렀던 분이의 분노가 폭발한다. 이방원의 뺨을 올려붙인 그녀는 당신 귀족 따위가 뭘 알아?”하고 쏘아붙인 후 그녀가 태어나서부터 지금껏 당해왔던 일들을 줄줄이 털어놓는다.

 

원래 우리 땅에서 한 해에 4백석의 곡식이 나왔어. 국법? 국법에 의하면 40석은 나라에 40석은 향리에 바쳐. 그게 바로 법이야. 하지만 난 태어나서 단 한 번도 그런 걸 본 적이 없어. 내가 태어나던 해 우린 240석을 바쳤대. 내가 여섯 살이 되던 해 320석을 바치고 그리고 얼마 전에 주인이라고 주장하는 여덟 명의 귀족에게 자그마치 360석을 바쳤어. 남아있는 40섬으로 일 년을 살아야 되는 인원은 200명이 넘어. 그게 어떤 숫자인지 모르겠지? 하루에 밥 두 숟가락씩만 먹고 살아야 된단 이야기야.”

 

9할의 세금. 물론 이건 여말선초의 극단적인 상황을 말하는 것일 게다. 하지만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샐러리맨들에게도 분명 울림이 있다. 매달 월급 명세서를 보면 어디로 어떻게 사용되는지도 모른 채 각종 보험료가 숭덩 잘려진 쥐꼬리만한 월급이 들어오고 치솟는 전세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무리해서 은행 빚 얻어 산 집은 집값은 뚝뚝 떨어지는데 이자는 따박따박 나간다. 아이들을 점점 커가고, 몇 년도 안 되어 계속 바뀌는 교육정책 때문에 이리저리 휘둘리며 여기 찔끔 저기 찔끔 보내는 학원비도 만만찮다. 결혼을 기피하고 출산율이 떨어지는 건 육아와 교육이 마치 사치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육룡이 나르샤>9할의 세금은 그래서 지금 현재 우리에게는 여러 명목으로 쪼개진 채 샐러리맨들을 압박하고 있는 중이다. 그나마 직장이 온전한 샐러리맨들은 사정이 괜찮은 편이지만 이제 사회에 나가야할 청춘들은 이미 대학교 때부터 지게 된 등록금 빚으로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살아간다. <육룡이 나르샤>의 백성들이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건 좀더 나은 세상을 원하는 그런 사치스런 일이 아니다. 그것은 생존이다. 삶이 삶이 아닌 현실에서의 생존.

 

그래도 우린 살아야 됐고 그래서 이 황무지를 파고 또 팠어. 올해 추수를 하는 그 첫 수확이었고 근데 사람을 죽이고 곡식은 다 빼앗아 갔어. 그래서 난 3년 동안 개간하고 낱알 하나 먹지 못하고 간 죽은 언년이를 위해서라도 뭐라도 할 거야. 살아있으면 뭐라도 해야 되는 거니까.” 분이의 일갈은 지금의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줄까. 그리고 9할의 세금이 상기시키는 것들은 무엇일까. <육룡이 나르샤>의 민초들을 보다보면 자꾸만 현재의 허리띠를 조이는 서민들과 샐러리맨들이 아른거린다. 국가는 도대체 무엇일까. 아니 어떤 것이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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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룡>의 시대, 진정한 역사 교육이란

 

SBS 사극 <육룡이 나르샤>에는 이성계, 이방원, 정도전이라는 실존 역사적 인물 이외에도 이방지, 무휼, 분이라는 가상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과거 같았으면 실제 역사의 왜곡이 아니냐는 질타를 받았을 수도 있는 인물설정이다. 하지만 지금의 대중들은 실제 역사와 가상을 구별할 줄 안다. 사극은 진짜 역사라기보다는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덧대 하나의 허구로 꾸며진 드라마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육룡이 나르샤(사진출처:SBS)'

대중들이 이렇게 역사적 사실에 허구의 틈입을 허용한 건 단지 재미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보다는 오히려 거기에 깔려 있는 의도의 진정성 때문이다. 역사라는 건 완벽한 팩트일 수 없다. 그것은 기록하는 자의 시선이 들어가기 마련이다. ‘조선왕조실록은 왕들의 역사다. 그들의 관점이 담겨진 편향된 역사일 수 있다.

 

거기에 삭제되어 있는 건 다름 아닌 민초들의 역사다. <육룡이 나르샤>에 허구로 들어간 세 인물, 이방지, 무휼, 분이는 그 삭제된 민초들을 대변하는 인물이 된다. 조선을 개국한 건 몇몇 왕들에 의한 것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속에는 민초들 또한 있었고 그들의 희생 또한 결코 무시할 수 없다는 것. 이것이 <육룡이 나르샤> 같은 팩션 사극의 허구를 허용하는 이유가 된다.

 

<육룡이 나르샤>가 과거처럼 한 인물을 중심으로 한 사극, 이를테면 <주몽>이나 <선덕여왕>, <태조 왕건> 등등의 사극과 달리 여러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세워 그 다양한 관점들을 포섭하려 하고 있는 데는 지금의 대중들이 생각하는 달라진 역사관이 반영되어 있다. 즉 역사는 몇몇 한두 사람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한 사람의 관점만이 투영된 사극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다른 관점들이 혼합된 사극을 요구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달라진 시대에 이제 대중들은 조선을 건국한 인물이 이성계다 라는 말을 더 이상 믿지 않게 됐다. 그 이면에는 이방원도 있었고 정도전도 있었다. 또 정몽주라는 다른 생각을 가졌던 인물도 있었고 역사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을 지도 모르지만 우리가 모른 채 스러져간 민초들도 무수히 있었을 것이다. 이제 역사는 그 다양한 관점들과 그걸 통한 토의 과정을 통해서만이 역사의식을 제대로 가질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니 이 시대의 역사를 다루는 교과서는 많은 사례들과 관점들을 하나의 재료로서 제공해주는 것이어야 한다. 다양한 관점들을 담은 다양한 교과서들이 담보되고 그것이 하나의 정답이 아니라 역사의식을 스스로 가질 수 있게 하는 단초이자 실마리가 되어야 진정한 역사 교육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국정교과서 논란이 갖고 있는 문제는 바로 이런 다양성을 해치고 한 가지 관점을 마치 정답처럼 제시함으로써 획일화의 길을 갈 수 있다는 점이다. 거기에 국가관이나 애국 같은 단어들이 덧붙여지지만 그것은 특정인들을 위해 역사를 호도하는 일이 된다.

 

본래 육룡이 나르샤는 조선창업을 노래한 용비어천가1장에 나오는 구절이다. 그것은 태조의 6대 선조를 한 마디로 찬양하는 노래다. 그런데 왜 사극 <육룡이 나르샤>는 그 육룡을 조선창업을 했다는 태조의 6대 선조에 대한 찬양이 아닌 민초들이 함께한 조선 건국의 이야기로 재탄생시켰을까. 그것은 역사 왜곡이 아니라 기록이 편향해 내놓았던 역사에 대한 재해석이다. 누군가 몇몇 사람들의 역사로 기록하려 한다 해도 시간이 지나면 이처럼 가려진 것들은 어차피 재해석되고 새롭게 가치매김 된다는 걸 하다못해 <육룡이 나르샤> 같은 사극도 보여주고 있다.

 

이른바 지금은 육룡의 시대. 역사의 주역은 왕만이 아니라 민초들도 함께 하는 시대. 이런 시대에 한 마리의 용의 관점을 정답처럼 제시하는 건 과연 옳은 일일까. 그건 과연 앞으로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올바른 일일까. 이러다 진짜 역사의식에 대한 공부는 교과서보다 <육룡이 나르샤> 같은 사극을 통해서나 배우는 지경에 이르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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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룡', 이방원만큼 무휼, 이방지가 기대되는 까닭

 

오늘 첫 방영되는 SBS 사극 <육룡이 나르샤>의 등장인물에는 반가운 이름이 들어가 있다. 바로 김영현, 박상연 작가의 전작이었던 <뿌리 깊은 나무>에서 세종 이도 옆을 든든히 지키고 있던 무사 무휼(조진웅)이다. 세종 이도가 글을 세운 문의 힘을 보여준 캐릭터라면 그런 그를 칼을 통한 무로써 지켜주는 인물이 무휼. 무휼은 한글 창제의 이면을 다룬 <뿌리 깊은 나무>가 사변적인 이야기에 머물지 않고 액션 활극으로서 시청자들의 시각적 쾌감을 줄 수 있게 해준 캐릭터이기도 하다.

 


'육룡이 나르샤(사진출처:SBS)'

그 무휼이 훨씬 젊어진 얼굴(윤균상)<육룡이 나르샤>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무휼 옆에는 또 한 명의 익숙한 이름이 있다. 바로 이 드라마에서 땅새(변요한)라고 불리는 이방지다. 이 캐릭터 역시 <뿌리 깊은 나무>에서 강채윤(장혁)의 무술스승으로 출상술의 대가로 미친 존재감을 드러냈던 그 인물(우현이 연기했다)이다. 무휼의 젊은 시절이 다뤄지는 만큼 이방지의 젊은 시절의 이야기 역시 <육룡이 나르샤>의 중요한 스토리 중 하나가 된다.

 

이처럼 <육룡이 나르샤><뿌리 깊은 나무>의 프리퀄에 해당하는 사극이다. 국내의 사극 중에서는 처음 시도되는 연작이지만 워낙 <뿌리 깊은 나무>가 남긴 강렬한 여운이 지금도 여전하다는 점에서 이 프리퀄에 대한 기대감은 그 어느 때보다 높다. <뿌리 깊은 나무>가 조선 건국 후 나라의 기틀이 마련되고 그 위에 세워진 세종 대의 찬란한 유산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면, <육룡이 나르샤>는 바로 그 세종이 훨훨 날 수 있었던 그 기반이 되는 여말선초의 육룡에 대한 이야기다.

 

물론 용비어천가에서 나오는 육룡이란 조선을 개국한 세종의 여섯 선조들을 일컫는 것이지만 이 사극의 육룡은 그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육룡이 나르샤>에서 육룡은 이성계, 이방원, 정도전이라는 실존 역사적 인물들과 무휼, 땅새, 분이(신세경)라는 가상 인물 여섯을 통칭하는 것이다. <육룡이 나르샤>는 실존 인물들의 역사적 이야기와 그들과 공조하고 대결하는 그 이면의 가상 인물들의 이야기를 합쳐놓은 팩션이다.

 

역사적 사건이 있다면 그 뒤안길에 그 사건들에 의해 한 시대를 이름 없이 살아낸 민초들의 이야기도 있다는 것이 <육룡이 나르샤>가 갖는 이야기 구조의 의미다. 따라서 이 사극의 재미는 젊은 이방원(유아인)과 정도전(김명민)의 권력을 향한 욕망과 백성을 위한 혁명 사이에서 부딪치는 대결에서도 찾아낼 수 있지만 그들과 함께 하는 무휼과 땅새, 분이 같은 민초들의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역사적 사실이야 이미 우리가 역사적 기록을 통해 이미 아는 사실의 재연이라고 본다면 실제로 이 사극의 새로움은 무휼 같은 가상인물에서 나온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결국 <육룡이 나르샤>에 들어간 무휼 같은 존재들은 현재의 욕망이 투영된 캐릭터일 수밖에 없다. 사극이 과거의 재현이 아니고 현재의 결핍을 과거의 역사를 통해 채워주려는 욕망이라고 본다면, 왜 무휼이나 이방지 같은 가상의 존재들이 이방원이나 정도전, 이성계 같은 실제 역사적 인물만큼 기대감을 갖게 하는지를 이해할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왕들의 기록으로 남겨진 용비어천가의 육룡과는 다른 민초들의 기록으로서 다시 쓰는 용비어천가를 말해주는 건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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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이 노출을 쓰는 방식은 에로티즘이 아니다

 

파격. 아마도 영화 <간신>을 한 단어로 표현하라면 그것은 파격이 될 것이다. 지금껏 연산군의 폭정을 다룬 사극들이 그토록 많이 쏟아져 나왔어도 이처럼 폭력적이고 광기에 휩싸인 연산군은 심지어 낯설게 다가올 정도다. 갑자사화를 짧게 묘사하면서 시작하는 방식은 마치 <글래디에이터><300>의 한 장면처럼 핏빛 폭력을 심지어 경쾌한 터치로 그려낸다. 연산군은 발가벗은 궁녀들이 기묘한 포즈를 취하게 하면서 그걸 그림으로 담아놓는다. 목이 날아가고 팔이 잘려지는 폭력은 살벌할 정도로 리얼하고, 음부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노출은 놀라울 정도로 과감하다.

 

사진출처: 영화 <간신>

거의 끝까지 밀어붙이는 듯한 폭력과 노출은 그래서 서로 그 살을 뒤섞으며 기묘한 긴장과 이완을 만들어낸다. 육체와 살은 이 두 감정을 하나로 보여주는 오브제가 되어 피를 튀기거나 흥건한 땀에 젖는다. 때로는 고통의 원천으로도 보이고 때로는 쾌락의 끝으로도 보이는 이 살들은 그래서 어느 비등점을 넘어서면 기묘한 슬픔 같은 걸 드러내기도 한다.

 

연산군이 채홍사를 통해 1만 명의 궁녀들을 끌어 모아 실제로 꾸렸다는 흥청이 망청이 되어가는 과정은 육체에 쓰여진 쾌락과 고통의 기록처럼 보인다. 채워지지 않는 모성에 대한 결핍을 1만 명의 여성들의 살을 통해 채워 넣으려는 연산군의 광기. 그 폭정에 휘둘려 억지로 끌려오거나, 채홍사의 사적 복수에 의해 끌려온 누군가의 여식들, 그리고 가난한 부모가 먹고 살기 위해 팔아치운 자식들은 이 광기 아래 살아가는 백성들의 분신들처럼 보인다. 연산군에 의해 자행되는 육체의 유린은 그래서 권력이 착취하고 유린하는 백성들의 고혈을 떠올리게 한다.

 

흥미로운 건 폭력과 노출이 거의 끝까지 밀고 나갈 정도로 파격적이지만 그것이 그리 야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들은 파격적인 성행위를 선보이지만 그것은 마치 현대무용의 한 장면처럼 육체의 퍼포먼스로 보이고, 실제로 이런 장면들 앞에서 연산군은 그것을 화포에 그림으로 담아내는 예술적 행위에서 오히려 더 쾌감을 느낀다. 즉 이들의 성적 행위들은 에로틱하다기보다는 무언가 예술적인 표현을 위해 구성된 행동처럼 다뤄진다.

 

그래서 그 동작들은 힘겨운 백성들의 삶을 표현해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권력자 앞에서 피를 튀기며 싸울 수밖에 없었던 검투사들처럼, 온 몸으로 상대방을 공격하는 파이널 매치 같은 느낌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래서 왕의 여자가 되려 싸우는 여자들의 육박전은 슬픔이 묻어나고 때로는 그들을 각성시키기도 한다. 검투사들이 그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과정을 거치며 반란을 꿈꾸게 되듯이.

 

<간신>은 그래서 폭력과 노출 수위만을 두고 보자면 대단히 자극적이고 상업적인 영화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들여다보면 그 폭력과 노출이 에로티즘을 향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그리 상업적인 영화라고 보기가 힘들어진다. 19금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생각보다 야하지 않았다는 느낌은 그래서 두 갈래 평가로 나눠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별로였다거나 그래서 오히려 좋았다는. 어쨌든 <간신>은 그런 점에서 독특한 작품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토록 강렬한 폭력과 노출을 보여주면서도 그리 자극적으로만 치닫지 않는 그런 작품. 그래서 나아가 누군가의 쾌락을 위해 바쳐지는 고통의 몸들이 지금의 민초들과 겹쳐지는 어떤 지점에 이르게 하는 그런 기묘한 작품.

 

Posted by 더키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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