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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쓸신잡2’와 유홍준·윤선도·정약용·하멜의 평행이론

그들이 이 땅의 끄트머리 해남과 강진에서 발견한 건 뭐였을까. tvN <알쓸신잡2>가 해남과 강진에서 벌인 지식 수다의 향연은 그 어느 때보다 흥미진진했다. 그것은 이 곳에 특히 유명한 분들의 삶의 족적이 남아 있어서다. 가까이는 유홍준 교수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의 첫 장을 연 곳이고, 조선으로 가면 윤선도, 정약용이 유배를 갔던 곳이다. 심지어 조선에 표류되어 들어온 네델란드인 하멜이 유배되어 지낸 곳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익숙한 그 유명한 이름들이 모두 이 한 곳에 머물러 있으니 얼마나 이야깃거리도 많을 것인가.

그런데 이게 우연이 아니다. 해남과 강진에 이렇게 유명인사들의 족적이 남게 된 건 아이러니하게도 그 곳이 이 땅의 끄트머리에 위치해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유홍준 교수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이 곳에서 시작한 이유로 ‘서울 중심’, ‘도시 중심’의 사고방식을 벗어나기 위해 변방을 선택했다고 했다. 물론 그 변방 중에서도 해남과 강진을 택한 건 그 곳에 윤선도, 정약용, 김정희 같은 분들의 삶의 흔적이 문화로 남아있어서다. 윤선도나 정약용 그리고 하멜의 흔적이 남은 것도 그 곳이 땅의 끄트머리로서 유배지를 상징하는 최적지였기 때문이다.

즉 이처럼 해남과 강진은 어찌 보면 중심에서 밀려난 이들이 그 절망을 안고 내려오게 된 소외의 지역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곳에서 윤선도도 정약용도 저마다 삶의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황교익은 직접 들어가 본 보길도를 통해 윤선도가 당대의 ‘욜로’였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정치에 환멸을 느낀 그는 오히려 유배된 그 곳에서 무릉도원 같은 이상향을 만들며 유유자적했던 것. 우리가 교과서를 통해 알고 있는 어부사시사 같은 절창은 이러한 땅끝의 유배지가 오히려 제공하는 변방의 자유가 아니었다면 나올 수 있었던 게 아니었다. 

정조의 든든한 힘이 되어주었던 조선의 다빈치 정약용은 서학을 했다는 이유로 이 곳으로 유배되지만 그 역시 다산초당에서 제자들과 함께 500여권에 달하는 저작을 남겼다. 만일 그가 중앙에서 정치 관료로서 승승장구의 길을 걸어갔다면 어땠을까. 과연 이런 빛나는 지식의 보고들을 쏟아낼 수 있었을까. 

이것은 나가사키를 가려다 표류되어 조선에 들어와 13년 간을 머물다 간 하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제주도에 표류해 들어왔지만, 억류되어 지낸 곳은 바로 강진이었다. 그 곳에서 동네주민들과 교류했던 그 경험들은 고스란히 훗날 하멜표류기 속에 녹아들었다. 그들에게는 이 끄트머리 동네에서 가졌던 절망적인 삶의 순간들이 훗날 빛나는 저작의 자양분이 되었다는 것.

<알쓸신잡2>에 기꺼이 전화통화를 통해 해남과 강진에 대한 남다른 소회를 얘기한 유홍준 교수 역시 이 곳이 가진 땅끝이라는 상징성이 오히려 그의 발길을 잡아 끈 것이었고, 그것은 <알쓸신잡2>가 그 곳을 찾아 느낀 것과 다른 게 아니었다. 그들은 해남 땅끝마을에 서 있는 봉수대에서 저 아래 펼쳐져 있는 바다를 바라보며 저마다 다른 시각의 생각들을 가졌을 것이다. 

봉수대를 다녀온 유현준 교수는 우리네 삶의 마디를 떠올리며 대나무의 마디 구조가 어째서 튼튼하고 가장 높이 올라갈 수 있는 구조인가를 설명한다. 우리네 삶이 사실은 끊김 없이 이어져 있지만 매해 새로움을 다지는 마디를 설정해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을 대나무의 건축구조학을 통해 설명한 것.

그러자 장동선 박사는 봉수대를 보며 자신이 떠올린 또 다른 ‘마디’를 이야기한다. 그것이 인간의 신경세포가 가진 마디 구조와 똑같다는 것. 그러한 마디 구조가 가장 빨리 신호를 전달할 수 있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그러자 유현준 교수는 봉수대가 최초의 텔레커뮤니케이션 체계라고 했다. 이러한 소통체계가 문명의 발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며 로마의 수로체계와 파리의 상하수도체계 그리고 뉴욕의 전화체계가 생명체 진화와 같다고 말한다. 로마가 동맥 네트워크라면 파리는 정맥네트워크 그리고 뉴욕은 신경세포 네트워크라는 것. 

땅끝마을에서 봉수대를 통해 소통체계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대목은 이 끄트머리 마을에서 느껴졌을 절망감을 희망으로 바꿔준다. 결국 변방과 중심을 나누는 그런 기준들은 이러한 네트워크를 통해 무화될 수밖에 없다. 제 아무리 멀리 있어도 빠른 소통체계가 있다면 공간의 의미는 그다지 큰 장애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알쓸신잡2>가 해남과 강진에서 나눈 일련의 이야기들이 신비롭게 다가온 건, 그 지역이 가진 이러한 특징과 그래서 그 곳에 가게 된 사람들이 남긴 위대한 삶의 행적들, 그리고 그것들이 그렇게 멀리 와 있다는 자신들의 고립감을 뛰어넘기 위한 노력들이라는 게 모든 이야기, 여행을 통해 일관되게 보여졌기 때문이다. 마치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가 그 오지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그 곳에 많은 사람들을 다시 오게 만들었던 것처럼. 

그래서 이번 해남과 강진에서의 <알쓸신잡2>는 이 프로그램이 어떤 지역과 그 곳으로부터 끄집어내지는 지식의 수다가 어떻게 ‘신비로운 느낌을 주는가’하는 걸 가장 잘 보여줬다. 지역은 결국 사람이 사는 곳이고, 그 사람들의 삶이 지역에 묻어나기 마련이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가지만 지역은 그대로 남아있다. 그러니 이 프로그램은 공간을 매개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연결시키는 수다가 가능해진다. 이 땅끝마을에서 <알쓸신잡2>와 유홍준, 윤선도, 정약용, 하멜의 평행이론 같은 게 느껴지는 건 그래서다.


Posted by 더키앙

<무도> 빼고 다? 정형돈의 행보 이해하려면

 

<무한도전> ‘무한상사에 깜짝 출연한 이후 정형돈의 행보는 하루가 짧은 정도다. <무한도전>이 아닌 MBC 에브리원 <주간아이돌>로의 복귀를 선언했고, 연달아 100억대 규모의 한중 합작 웹 영화의 시나리오 작가로 데뷔한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오는 22일 형돈이와 대준이의 신곡이 발매될 예정이라고 밝혔다.

 

'무한도전(사진출처:MBC)'

한 마디로 열일 하는 정형돈이다. 그런데 그럴수록 의구심이 드는 건 왜 다 돼도 <무한도전> 복귀는 피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 그것은 아무래도 <무한도전>이 주는 부담감이 여타의 행보들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심각한 공황장애로 갑자기 모든 행보를 접었던 것의 진원지에 <무한도전>이라는 큰 부담이 있었다는 것이다.

 

정형돈의 이런 행보는 <무한도전>이라는 이제는 국민예능이 되어버린 프로그램이 갖고 있는 특징을 이해한다면 쉽게 수긍할 수 있는 일이다. <무한도전>은 그 안과 밖이 투명한 프로그램이다. 즉 프로그램 바깥에서 일어난 일거수일투족이 프로그램 안에서도 그대로 캐릭터화되어 회자되고 심지어는 아이템이 되기도 한다. 이것은 거꾸로 <무한도전> 안에서의 캐릭터가 바깥으로 나와서도 그대로 유지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형돈이와 대준이라는 조합이 가능하게 된 건 역시 <무한도전> 가요제를 통해 만들어진 캐릭터와 이야기들이 있어서가 아닌가.

 

이 안과 밖이 투명한 <무한도전>의 구조는 출연자들이 부담을 갖게 되는 가장 큰 이유로 작용한다. 프로그램 바깥으로 나와서 일상으로 돌아가면 다른 삶을 살 수 있어야 하지만, <무한도전>의 출연자들은 그 안과 밖이 일치하기를 요구받는다. 그것을 온전히 받아내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유재석이다. 그가 프로그램 안에서 보여주는 모습들은 연기가 아니라 실제다. 그는 일상에서도 똑같은 <무한도전>의 유재석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내 대중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곤 했다.

 

이런 점에서 보면 박명수처럼 대놓고 버럭 대는 캐릭터나 정준하처럼 조금은 모자란 듯한 바보 캐릭터는 훨씬 유리하다고 볼 수 있다. 무언가 실제 잘못을 저지른다고 하더라도 캐릭터와의 차이가 상대적으로 적게 보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상꼬맹이 캐릭터를 가진 하하도 마찬가지다.

 

정형돈이 <무한도전>에서 가진 캐릭터는 보통의 미친 존재감이었다. 그는 보통이지만 항상 자신이 대단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으로 오히려 좌중을 압도시켰다. 그것이 단지 웃음을 주는 정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정형돈이라는 인물을 미친 존재감으로 만들어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조금은 과장될 수밖에 없는 이런 캐릭터는 실제와의 괴리감도 클 수밖에 없다. 물론 다른 멤버들도 마찬가지의 부담을 가질 수 있지만, 정형돈은 아마도 그 부담감을 더 크게 느꼈었던 모양이다.

 

<무한도전>은 자타공인 국내 최고의 예능 프로그램이지만 그만큼 왕관을 짓누르는 무게도 클 수밖에 없다. 정형돈의 복귀와 그 행보를 보면 아직까지는 중심이 아닌 변방에서 조금씩 시작하려는 모습이 읽혀진다. 지상파도 아니고 케이블에서 방송을 하는 것이 그렇고, 카메라 앞에 아니라 작가로서 카메라 뒤에 서려는 모습이 그렇다. 물론 음악 활동은 그 성격상 본인이 원하는 만큼, 원하는 방식으로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아직까지 완전히 정신적인 부담을 털어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무한도전> 빼고 다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찌 보면 조금씩 주변부부터 일을 시작하며 다시 방송에 적응해가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무엇보다 무한상사에서 그가 했던 대사들이 새삼 떠오른다. “빨리 회복하셔서 다 같이 웃으면서 꼭 꼭 다시 만나요.” 언젠가는.

Posted by 더키앙

<픽셀>, 덕후도 일반인도 재밌어질 수 있었던 까닭

 

<픽셀>80년대 아케이드 게임에 푹 빠졌던 이들에게는 대단히 특별한 영화다. 그들은 PC 게임 이전, 오락실에서 동전을 넣어가며 했던 갤러그나 동키콩, 팩맨을 기억할 것이다. 50원 짜리 동전을 집어넣고 한 시간 넘게 게임을 하면 마치 구경이라도 난 듯 아이들이 모여 감탄사를 흘리고, 주인아저씨는 동전을 되돌려주며 다신 오지 말라고 했던 그 기억. <픽셀>은 그 기억을 회고하는 것을 넘어서 그 게임 속으로 들어가는 영화다. 어찌 열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사진:영화<픽셀>

물론 이 영화의 장르는 코미디다. 홍보용 영상을 보면 마치 <인디펜던스 데이>같은 외계인 침공의 액션 블록버스터처럼 오인될 소지가 있다. 만일 그런 영화를 기대했다면 <픽셀>은 실망감만 안겨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80년대 아케이드 게임의 감성을 자극하는 가벼운 코미디 영화라고 본다면 빵빵 터지는 웃음 코드와 함께 꽤 유쾌한 시간을 가질 수 있다.

 

물론 <픽셀>이 그리고 상상하는 세계는 꽤 철학적이다. 현실 세계로 게임 캐릭터들이 쏟아져 나오고 그 캐릭터들에 의해 도시가 파괴된다는 이야기는 얼토당토않은 유치한 상상처럼 받아들여질 수 있지만, 거기에는 현실과 가상의 경계가 점점 희미해져가는 작금의 디지털 세계의 단면이 들어가 있다. 이미 현실 위에 가상의 이모티콘과 표식들을 집어넣는 증강현실은 점점 우리의 실제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가상과 현실의 차이는 진짜냐 가짜냐 같은 질적인 차이가 아니라, 실제에 가까운가 아닌가 하는 양적인 차이(픽셀의 차이)라고 얘기한 빌렘 플루서의 이야기를 <픽셀>은 농담처럼 던지고 있는 느낌을 준다.

 

하지만 그렇다고 <픽셀>이 굉장히 무거운 주제를 메시지로 던지는 영화는 아니라는 점이다. 다만 이러한 가상과 현실에 금을 긋고 있는 관객들에게 그걸 사정없이 깨는 장면을 보여줌으로써 자연스럽게 코미디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게 이 영화의 묘미다. 즉 팩맨이 도시를 갉아먹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대통령서부터 국방부 장관까지 심각해지는 상황들이나, 무수한 훈련으로 단련된 군인들이 지네게임의 지네들이 쏟아져 내려오는 것이 어쩔 줄 몰라 할 때, 이 한때는 아케이드 덕후로 살다 이제는 루저가 된 이들이 광선총으로 지네들을 일망타진하는 상황이 그렇다. 우습지 않은가. 한 도시와 국가의 미래가 게임 덕후이자 루저들의 손에 달려있다는 사실이.

 

이것은 게임 같은 것을 가상으로 여기며 쓸데없는 짓으로 치부해온 기성세대들의 뒤통수를 때린다. 가상이 더 이상 가상이 아니라 현실로 들어왔을 때 그 달라진 현실의 영웅은 다름 아닌 가상에서의 영웅들이다. 게임을 좋아하고, 인터넷에 푹 빠져 현실보다 더 그 가상의 세계가 익숙한 중년들은 물론이고 디지털 네이티브인 젊은 세대들이라면 이 이야기가 주는 풍자적인 웃음이 통쾌함마저 줄 수 있는 이유다.

 

<픽셀>은 그러나 굳이 게임 덕후가 아니라도 즐거울 수 있는 보편적인 이야기 틀을 갖고 있다. 즉 루저들의 성공기가 그것이다. 한때는 잘 나갔었지만 성장하며 변방으로 밀려난 그들이 어떤 계기를 맞아 영웅이 된다는 이야기는 누구나 공감하고 몰입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즉 루저가 되는 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 그들이 어떤 계기를 만나지 못하게 하는 시스템의 문제라는 것.

 

또한 이 영화는 아케이드 게임을 즐겼던 중년들이 이제 앱 게임에 빠져있는 아이들과 함께 보며 어떤 덕후적(?) 공감대를 가질 수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픽셀>은 한때는 모두가 그랬을 덕후들을 추억하는 영화면서 동시에 어딘지 소외되어 변방으로 밀려난 이들을 한바탕 웃게 해주는 영화다



Posted by 더키앙

‘라디오 스타’ 변방에서 중심을 치다

‘왕의 남자’에서 광대들이 시대를 갖고 걸판지게 한 마당을 놀았다면, ‘라디오 스타’에서 이준익 감독은 이제 한물 간 스타를 매개로 이 시대의 주변인들을 끌어 모아 라디오라는 마당 위에 펼쳐놓는다. ‘왕의 남자’에서 장생과 공길이 저 왕궁이라는 본진으로 들어가 스스로 민중의 입이 되어주었다면, ‘라디오 스타’의 최곤(박중훈 분)은 영월이라는 변방으로 날아가 DJ의 마이크를 고단한 민중들에게 넘긴다. 한 예술인의 삶으로서 장생과 공길이 왕 앞에서도 거침없이 사설을 늘어놓았다면, ‘라디오 스타’에서 최곤은 라디오 방송이라는 규범적 공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솔직한 이야기들을 엮어낸다. 그리고 ‘왕의 남자’가 그러했던 것처럼 ‘라디오 스타’ 역시 변방의 민중들을 끌어안는다. 조금은 구닥다리 같은 영화, ‘라디오 스타’가 주는 어찌할 수 없는 감동은 바로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88년 가수왕 최곤, 그가 가진 유일한 것
그는 ‘왕년에’ 가수왕이었다. 지금은? ‘왕년에 가수왕’이었다는 사실을 팔며 살아가는 소위 말하는 한물 간 가수다. 그러니 그를 가수왕으로 대접해주는 사람은 없다. 사람들은 대마초 사건과 폭행 사건으로 문화면이 아닌 사회면에 등장한 그의 존재를 간신히 기억할 뿐이다. 모든 걸 잃은 그이지만 그를 진짜 괴롭히는 것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진다’는 것이다. 그런 그를 가수왕 대접해주는 사람이 있다. 20여 년 간 일편단심으로 그의 매니저를 해온 박민수(안성기 분)다. 박민수는 여전히 최곤의 담배를 챙기고 불을 붙여준다.

최곤과 박민수의 관계는 어찌 보면 주종관계 같다. 하지만 그건 겉으로 드러난 것일 뿐, 박민수는 최곤을 “담배 하나도 혼자 피우질 못하는” 인간으로, 그래서 자기가 보살펴줘야만 하는 불쌍한 존재로 인식하며, “우리 같이 물에 확 빠져죽자”고 하는 박민수의 말에 “그러면 우리 둘이 사귀는 줄 알어”라고 말할 정도로 둘의 관계는 밀착되어 있다.

주종관계에는 일종의 암묵적 동의가 숨어 있다. 그것은 그들이 공동운명체이며 현재의 어려움을 겨우겨우 버틸 수 있는 힘은, 최곤이 안간힘을 쓰며 지키려는 마지막 남은 자존심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이 그 관계를 이상하게 생각하게 되는 것은 그만큼 서로를 기대 사람 인(人)자를 만들며 그 균형으로 겨우 서 있는 그들이 절박하다는 반증이다. 그들은 ‘88년 가수왕’이라는 이제는 허울뿐인 과거의 영광에라도 기대 살아가야 하는 인생이다.

변방에서 중심을 치다
그래서 그들이 흘러흘러 밀려난 곳은 강원도 영월 동강이다. “동강은 동쪽에서 흘러서 동강일까? 아니면 동쪽으로 흘러서 동강일까”라고 박민수는 자신들이 서 있는 위치가 변방인지 중심인지를 묻는다. 서울이라는, 가수왕이라는, 전국방송라디오라는 중심은 최곤과 박민수를 영월이라는, 라디오DJ라는, 지방방송라디오라는 변방으로 몰아낸다.

그런데 변방으로 밀려난 이들은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같은 처지의 동지들을 만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아무도 스포트라이트를 주지 않았던 영월의 주민들이다. 최곤과 그들의 만남은 예고된 것이다. 첫방송에서부터 시작되는 방송사고. 하지만 그 방송사고는 이제 노골적인 최곤의 저항으로 이어진다. 방송의 권위를 없애고 마이크를 저 낮은 곳으로, 변방으로 넘겨준 것.

최곤에 의해 마당에 멍석이 깔리자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다방 여종업원 김양의 멘트는 이 영화가 보듬고 싶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잘 말해준다. 처음에는 “차 마시고 달아놓은 돈 갚으라”는 멘트로 김양에 대한 우리네 선입견을 드러내더니, 잠시 후에는 김양의 어머니에 대한 회한을 드러내며 그런 우리의 선입견을 부수어버린다. 그 순간 김양은 우리의 이미지 속에 있던 다방레지가 아닌, 저마다 반짝반짝 빛나는 한 인간으로 부각된다.

최곤은 사랑의 마음을 전하지 못하는 꽃집 청년을 위해 주민들에게 꽃을 그녀에게 배달해달라고 하고, 집나간 아비를 향해 울먹이는 한 소년을 대신해 최곤은 “당장 돌아오라”고 욕을 해댄다. 라디오 방송은 이제 아무 것도 아니었던, 아무런 기획의 대상이 되지 않는 사람들의 일상사로까지 파고든다. 백수아저씨의 취직상담을 해주고, 하다 못해 화투를 치며 ‘막판 쌍피’를 두고 옥신각신하는 할머니들에게 ‘판정’을 해주기도 한다. 이들이 목소리를 내자 방송은 사람들의 주관심사가 된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모두 그저 우연으로 벌어진 일이 아니다. 이것은 노골적인 최곤식의 저항이며, 이준익 감독이 담고자 한 변방의 목소리들이다.

자본주의에 대한 맹렬한 질타
그런데 그것은 무엇에 대한 저항일까. 여기에는 많은 은유와 해석이 가능하지만 분명한 것은 중심에 대한 저항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중심의 무엇이 잘못되었다는 말일까. 최곤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음악에 대한 것이다. ‘제대로 음악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며, ‘음악은 이제 상품처럼 기획되어 팔린다’는 것이다. 80년대에서 90년대로 넘어오며 사라진 음악과 기획사들의 대거출연은 우연이 아니다. 당장의 시류에 맞는 음악의 기획생산과 여기에 맞물린 비디오 시대의 도래는 음악인을 죽이고(Video kill the radio star), 상품으로 판매되는 음악인의 이미지들만 만들어냈다. 현 우리 가요계가 처한 문제들(음반시장의 위축, 가수들의 탤런트화)은 자본주의가 음악이라는 예술을 쥐게 되면서 생겨난 문제들이다(과거에는 예술을 하면 돈이 뒤따랐는데, 요즘은 돈을 벌려고 예술을 한다). 강석영PD(최정윤 분)가 술에 취해 “내가 왜 청취율에 목매는데... 당신들 같이 되지 않기 위해서야”라고 하는 말은 자본주의가 주는 공포(중심에서 밀려나면 끝이라는)를 잘 드러내고 있다.

이렇게 되자 본 상품은 사라지고 상품의 이미지, 즉 껍데기만 난무하는 세상이 열린다. 그런데 이것은 비단 가요계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또한 현 자본주의가 갖고 있는 문제, 즉 생산의 주체와 소비의 주체 간의 괴리에 대한 은유로도 읽힌다. 이 영화는 이러한 괴리로 인해 늘 노동의 현장에 있으나 가난하게 살아가는 농민들, 도시빈민노동자들, 샐러리맨들, 비정규직노동자들의 이야기가 된다.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고 만들어내는 노동은 본래 예술에 가까운 것이었으나 여기에 돈의 논리가 개입되자 처절한 현실로 돌변한다. 그리고 이것은 최곤이 지금 시대에 소외된 이유이기도 하다. 돈을 벌어야 하는 시점에 예술 운운하며 가난하지만 고집스레 살아가는 것이 그의 죄다.

영화는 바로 그 점을 끄집어내 최곤과 박민수 사이에 기획사 사장을 끼워 넣는다. 돈의 논리로 무장한 기획사 사장은 박민수에게 “지금까지 매니저로서 해준 게 뭐가 있냐”며 떠날 것을 요구한다. 박민수가 “해준 게 없어 떠난다”며 돌아간 자리는 아내가 혼자 버텨내고 있는 노동의 현장(김밥장사)이다. 사람 인(人)자에 한 획이 떠나가니 나머지 한 획은 홀로 설 수가 없다. 사실 박민수는 그의 아내가 자신을 위해 그랬듯, 최곤의 현실을 대신 버텨준 인물이다. 최곤이 벌인 사건들을 해결하려 밖으로 뛰어다니고, 안으로는 최곤의 종이 되어 그의 자존심을 지켜준 박민수는 그저 매니저라는 직함보다는 형이 더 어울린다.

별은 혼자 빛나지 않는다
그래서 최곤은 가수로서의 재기를 얘기하는 기획사 사장에게 분노한다. 기획사 사장이 한 짓, 자신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형에 대한 무례에 분개한다. 형과 동생의 관계를 하루아침에 돈의 관계로 전락시켜버린 기획사 사장의 논리에 분개한다. 자신을 마지막까지 버티게 해준 진정한 음악인이라는 자존심을 뭉개고 기획된 가수라는 상품으로 그를 짜 맞추려는 기획사 사장의 의도에 분개한다. “다시 가수하고 싶어질까봐” 선선히 무대에 서지 못할 정도로 사랑하는 음악에 대한 모독에 분개한다.

그는 ‘중심의 논리’에 구토를 느끼며 변방에 남기로 한다. 그리고 박민수를 향해 라디오 메시지를 날린다. “형이 그랬잖아. 별은 혼자 빛나는 게 아니라고. 얼른 와서 나 좀 빛내줘. 같이 반짝반짝 빛나 보자구.” 최곤은 이제 알게되었다. 무엇이 진정으로 자신을 빛나게 해준 것인지를. 저 변방에서 묵묵히 살아가고 있는, 노동의 현장에서 삶을 버텨내고 있는, 자신의 옆에서 늘 자신을 지켜봐 주는 그들이 자신에게 빛을 주었기 때문에 자신이 빛날 수 있었다는 것을. 여기서 상황은 다시 역전되어 이제 최곤의 빛은 박민수에게 날아간다. 다시 돌아온 박민수에게, 숨기듯 고개를 돌리고는 감동에 겨워 미소를 날리는 최곤에게 강한 동감을 느낄 즈음, 우리네 가슴속에도 자신을 빛내주었던 많은 주변의 빛들이 별처럼 떠오르는 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

Posted by 더키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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