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촌구석의 따뜻함과 위로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아

“나 회사 안가.” 출근과 퇴근을 반복하며 매일 아무 생각 없이 살던 어느 날, 문득 바람결에 날아온 벚꽃 잎을 발견하고 여름(설현)은 충동적으로 일탈을 선언한다. 모두가 서울로 출근하는 길, 그 정반대로 가는 전철을 타자 늘 지옥 같던 출근길과는 너무나 다른 마법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바쁜 사람 하나 없는 한가한 전철을 타고 목적지 없이 낯선 곳을 향해 가는 발걸음. 번아웃이 일상이 되어버린 도시인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상상해봤을 일이 아닐 수 없다. ENA 월화드라마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는 그 도발적인 제목이 먼저 지친 마음을 툭툭 건드리며 시작하는 작품이다. 

 

마음의 양식이라는 책을 만드는 출판사지만, 사람의 영혼을 갉아먹는 얌체 상사가 어떻게든 부려먹고 갈취하고 심지어 성희롱을 일삼는 그런 곳에서 여름은 탈출한다. 그리고 그것이 누군가 만들어놓은 기준(이를 테면 직장을 다녀야 하고 승진을 해야 하고 돈을 벌어야 하는 식의) 속에서 모두가 한 방향으로만 달리게 되어 있는 사회 시스템이 작동하며 벌어지는 일이라는 걸 체감하게 된 여름은 모든 걸 정리해 배낭 하나에 꼭 필요한 것들만 담아 그 시스템 바깥으로 빠져나온다. 

 

그리고 도착한 곳이 어느 한적한 시골마을 안곡마을이다. 살 집도 집을 구할 돈도 변변찮은 상황, 부동산 아저씨는 그 곳에 오래도록 방치되어 있는 당구장 건물을 여름에게 월세 5만원에 내준다. 건물에 사람 온기를 만들어 집주인이 원하는 괜찮은 가격에 매매를 하기 위함이지만 어쨌든 여름에게는 월세 5만원이면 연세를 내고 1년 간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도’ 살 수 있는 곳이다. 여름은 그 곳에 머물며, 그 마을에 있는 도서관을 다니며 소일한다. 도시에서는 출판사에서 지옥 같은 삶을 살았던 여름이지만, 이 시골에서는 도서관에서 한가로이 소일하는 삶을 산다. 똑같은 책이지만 팔기 위해 애쓰는 도시의 계산과는 너무나 다른 시골의 풍경이다. 

 

제목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지만, 드라마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건 아니다. 여기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선언은 ‘남들의 기준에 맞춰 사는 삶’을 살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러니 그 바깥으로 나온 삶을 또 다른 세계에서 진정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삶을 그려낸다. 혼자 순댓국 하나를 시켜놓고 낮술을 마시고 거나하게 취해 시골을 돌아다니거나, 하릴없이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길에서 만난 할머니를 도와주거나 길 잃은 강아지를 챙겨 보살펴 준다. 

 

또 안곡마을이라는 촌구석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 속으로 들어간다. 도서관에서 만난 남다른 따뜻함을 가진 사서 대범(임시완)과 실수로 얽히며 가까워지고, 도서관에서 만난 여고생 봄이(신은수)와 갈등과 화해를 거쳐 자매처럼 친해진다. 건물을 팔고 싶어 했지만 여름 때문에 못팔게 된 건물주의 아들 성민(곽민규)은 여름과 갈등하지만 결국 세상 마음 착하고 여린 인물이라는 게 드러나고 여름이 살고 있는 그 살풍경한 당구장에 중고물품들을 가져와 살만한 공간으로 만들어준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에서 도드라지는 관전 포인트는 ‘돈’으로 계산되는 세상과 마치 대결하는 것처럼 보이는 ‘마음’으로 연결된 사람들의 따뜻한 면면이다. 술에 취해 전 재산 450만원을 찾아 비닐봉지에 들고 다니다 잃어버린 여름을 위해 대범은 마치 제 일처럼 쓰레기더미들을 뒤져 돈을 찾으려 해주고, 성민의 아들이 주워 가지려 했다가 갖다 준 그 돈을 대범은 자신이 마치 챙긴 것처럼 거짓말을 하며 여름에게 돌려준다. 성민의 아들을 챙기기 위함이다. 그런 사실을 알게 된 성민은 여름을 찾아와 아들의 일을 사과하고 그 마음을 담아 당구장을 살만한 공간으로 꾸며준다. 

 

또 봄의 아버지가 술에 취해 봄과 실랑이를 벌이다 칼로 찌르는 사고가 발생하고, 아버지가 감옥에 가는 걸 막기 위해 봄이 스스로 찔렀다고 증언함으로써 보험 적용을 받을 수 없게 되자 그 병원비를 챙기기 위해 나서는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도 그렇다. 여름은 보증금을 빼서 병원비를 내려하고, 성민은 아버지 카드를 훔쳐 가져온다. 누가 그 병원비를 냈는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아마도 그건 대범이 아닐까 싶다. 물리학 천재지만 이 시골마을의 사서로 지내고 있는 대범은 그 천재성으로 이론을 발표해 이름을 알리고픈 교수의 제안을 계속 거절해왔다. 하지만 결국 그 교수를 찾아간 건 당장 병원비가 필요하게 된 상황 때문이었다. 

 

돈은 어디든 필요하지만 그것이 나의 욕망을 위해서라기보다는 누군가를 위한 마음에서라는 게 이 안곡마을이라는 촌구석에서 다른 점이다. 거의 폐가에 가까운 당구장이 여름이 오고 나서 봄도 오고 또 겨울이라는 강아지도 살게 되면서 온기를 갖게 되고, 그 곳에 성민과 봄을 짝사랑하는 재훈(장재민)이 옥상을 예쁘게 꾸며 봄의 퇴원을 축하하는 파티를 열어주는 장면과, 교수를 만나고 나서 더 빨리 이 촌구석으로 돌아가려 하는 대범의 모습을 통해 이 드라마는 말하고 있다. 이것저것 하라고 하는 세상에서 벗어나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은 이들의 항변은 실상 저 돈으로만 환산되어 달려가는 세상 바깥에서 사람의 온기로 가득한 진짜 삶을 마주하고 싶은 목소리라는 것을. 

 

아쉽게도 안곡마을이라는 변방의 삶처럼 ENA라는 채널에 묶여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는 0%대 시청률에 머물러 있다. 혹자는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무려 최고시청률 17.5%를 냈다는 사실을 들어 이런 시청률이 채널의 인지도와는 상관없는 작품의 문제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성공은 넷플릭스라는 OTT가 공조하면서 그 저변이 만들어지고 자연스럽게 ENA 본방을 찾게 되는 선순환 속에서 이뤄진 것이기 때문이다.

 

시즌이 티빙과 합병되고 그래서 이제 티빙을 통해 이 드라마를 접할 수 있게 된 상황은 그래서 이 작아 보이지만 한없이 가슴을 몽글몽글하게 만드는 드라마의 반등을 기대하게 만든다. 안곡마을이 보여주는 그 위로와 따뜻함을 더 많은 이들이 느끼기를. 저 여름과 대범이 애써 살고 싶어 하는 그 촌구석의 따뜻함을 더 많은 이들이 발견하기를 기대한다.(사진:ENA)

 ‘나의 해방일지’, 망가진 이들은 과연 진짜 행복해질 수 있을까

나의 해방일지

“사람들은 천둥번개가 치면 무서워하는데 전 이상하게 차분해져요. 드디어 세상이 끝나는구나. 바라는 바다. 갇힌 거 같은데 어딜 어떻게 뚫어야 될지 모르겠어서 그냥 다 같이 끝나길 바라는 것 같아요. 불행하지 않지만 행복하지도 않다. 이대로 끝나도 상관없다. 다 무덤으로 가는 길인데 뭐 그렇게 신나고 좋을까. 어쩔 땐 아무렇지 않게 잘 사는 사람들보다 망가진 사람들이 더 정직한 사람들 아닐까 그래요.”

 

JTBC 토일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염미정(김지원)은 이른바 해방클럽에 들어온 이유를 묻는 질문에 그렇게 답한다. 그 해방클럽은 직원들의 복지를 위해 만들어진 행복지원센터에서 하도 동호회에 가입을 권유받지만 도무지 동호회에 들어가고픈 마음이 없는 세 사람, 염미정, 조태훈(이기우), 박상민(박수영)이 더 이상의 강권을 피하고자 만든 클럽이다. ‘행복지원센터’라는 지칭에 담긴 ‘행복’이라는 단어가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이게 정말 행복일까. 이게 정말 제대로 사는 걸까.

 

<나의 해방일지>는 경기도민으로 살아 서울 중심으로 삶으로부터 비껴가고 소외된 이들의 이야기로 시작했지만, 서울에서 살면서 짐짓 웃으며 살아가는 삶이 과연 진짜 행복인가를 묻는다. 하루하루 힘겹게 회사생활을 하면서도 휴가 때 어디 놀러갈까, 놀러가서 수영복은 뭘 입을까, 비키니는 무슨 색으로 입을까를 이야기하며 버텨내는 삶. 맞을 가능성이 거의 없는 로또 몇 장을 마치 행복전도사나 되는 듯 나눠주는 이사와 그것조차 받지 못해 “왜 나만 건너 뛰냐”고 하소연하는 삶. 언제 넘어질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아슬아슬한 하이힐을 신고, 시술만 하면 예뻐진다는 말에 되지도 않는 시술을 받고는 더 나빠진 상태를 애써 나아질 거라 위안하며 사는 삶.... 

 

기정(이엘)은 이런 삶을 계란 흰자 같은 삶이라 농담하지만 너무 힘든데 쓰러지지도 않고 코피도 안 난다며 로또 열장을 사과하듯 챙겨주는 이사에게 그 답답함을 털어놓는다. 그런데 이 이사는 기정에게 심호흡을 해보라 권한다. “힘들 때 잠깐 심호흡하면 그것도 휴식이라고 괜찮아져요.” 과연 이래서 진짜 괜찮아질까. 기정은 뜬금없이 머리를 밀어버리고 싶다고 말한다. 머리카락이 붙어 있는 것조차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것이다. 

 

그런 그에게 이사는 끝없이 긍정을 얘기한다. “그래서 제가 쉬지 않고 사랑하는 겁니다. 사랑하는 한 지칠 수 없거든요.” 긍정한다고 불행이 행복으로 바뀔까. 삶의 본질의 문제에서 오는 답답함이 심호흡 한 번으로 괜찮아질까. 퇴근 길 전철 안에서 저 편에 보이는 ‘오늘 당신에게 좋은 일이 있을 겁니다’ 같은 긍정의 문구가 진짜 좋은 일을 만들어줄까. 

 

<나의 해방일지>가 보여주는 인물들은 정확히 두 부류로 나뉜다. 너무 망가져 아슬아슬하게 버텨내는 사람들과 망가졌지만 아무렇지도 않는 척 잘 사는 사람들. 점주를 고객으로 상대하는 창희(이민기)는 퇴근해서도 1시간 넘게 전화 응대를 해줘야 하고, 그런 아들을 아버지 염제호(천호진)는 계획 없이 살아서 그렇게 사는 거라 답답해한다. 그런 아버지에게 아들은 아버지의 삶 역시 계획을 잘 세워서 농사에 싱크대 설치 투잡 뛰며 사느냐고 비수를 꽂는다. 일해주고 정당한 대가를 받는 상황에서도 자기가 잘못한 것처럼 주눅 들며 살아가는 아버지가 아닌가. 

 

미정의 가족들은 망가졌다. 그건 단지 서울 외곽 경기도에서 살아가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저 우리가 사는 삶이 불행하고, 그럼에도 가짜 행복으로 채워져 가짜 위로를 던지는 삶이기 때문이다. 고층 건물에 사는 사람들을 올려다보며 거기 사는 사람들이 한 번에 끝낼 수 있는 위험 속에 살아간다며 그래서 안전한 반지하에 산다고 스스로를 위안하는 삶이 우리가 사는 모양이다. 

 

그런데 이렇게 망가진 미정의 가족들보다 더 망가진 구씨(손석구) 같은 인물도 있다. 그는 이름도 밝히지 않고, 대화도 거의 없고, 밥도 잘 챙겨먹지 않은 채 매일 염제호의 일을 도와주며 살아간다. 거의 유일한 낙처럼 보이는 게 저녁에 홀로 평상에 앉아 깡소주는 마시는 일이다. 그의 존재는 그에게 말을 걸어오는 창희나 미정을 통해 그런 식으로 돌파구는 절대 없다고 외치는 듯하다. 심지어 이 사회 시스템 바깥의 삶을 스스로 선택한 듯 보이는 그에게 창희는 ‘로망’이라고까지 말하지만 그건 그가 선택한 삶이 아니다. 그저 ‘잘못 내린’ 밀려난 삶일 뿐. 

 

<나의 해방일지>는 거의 블랙 코미디에 가깝게 대사 하나하나 상황 하나하나가 빵빵 터지는 웃음을 준다. ‘추앙’ 같은 낯선 대사를 던질 때 그것이 너무 낯설어서 어색하고 그래서 헛웃음이 터진다. 하지만 동시에 이 인물이 얼마나 절망적이면 이런 잘 쓰지 않는 단어까지 꺼낼까 생각하게 만들면서 짠해진다. 그러면서 이 드라마는 이 답답한 가짜 행복들에 둘러싸여 사는 이곳의 삶을 뚫고 저기로 넘어갈 거라는 기대감을 준다. 

 

“어디에 갇힌 건지 모르겠지만 뚫고 나가고 싶어요. 진짜로 행복해서 진짜로 좋았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아 이게 인생이지 이게 사는 거지 그런 말을 해보고 싶어요.” 미정의 이 말은 그래서 박해영 작가가 이 작품을 통해 허위로 가득한 세상과 얼마나 날선 대결의식을 갖고 있는가를 드러낸다. 바람에 훅 날아간 모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빙 돌아 저편까지 갔다 와야 하는 상황 속에서 마치 넓이 뛰기 선수처럼 단번에 그걸 뛰어넘는 그런 통쾌한 비상을 그려낼 거라는 기대감. 

 

망가진 자들이 서로 연대해 넌 뭐든 할 수 있다, 뭐든 된다며 추앙함으로서 단 한 번이라도 가짜가 아닌 진짜 행복을 느끼는 걸 <나의 해방일지>가 보여주길 기대한다. 구씨가 마치 새처럼 날아오르는 그 순간의 비상이 될 지라도. 그것은 지금 현재 사실은 불행하지만 우린 행복하다고 애써 강변하는 가짜 세상의 허위를 잠시라도 깨칠 수 있는 길이 될 테니.(사진:JTBC)

‘나의 해방일지’, 흰자의 삶에 대한 박해영표 위로

나의 해방일지

“넌 그냥 딱 촌스러운 인간이고, 난 그 말이 상처가 될 수 있는 경계선 상의 인간이고. 걔가 경기도를 보고 뭐라는 줄 아냐? 경기도는 계란 흰자 같대. 서울을 감싸고 있는 계란 흰자.” JTBC 토일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창희(이민기)는 여자친구와 헤어지게 된 이유로 경기도에 살아가는 자기 삶의 환경을 이야기한다. 서울과 경기도를 계란 노른자와 흰자로 비유해 말하는 대목이 웃음을 준다. 그런데 그 뒤에 어딘가 짠한 페이소스 같은 게 남는다. 이건 대체 뭐지?

 

<나의 해방일지>는 경기도 남쪽 수원 근처 산포(가상의 지명이다)라는 곳에 살아가는 창희, 미정(김지원), 기정(이엘) 남매의 이야기를 가져왔다. 사실 어느 정도는 과장이 들어가 있는 것도 있고 어떤 건 너무나 공감가는 대목도 있지만, 서울의 변방에 살아가는 이들이 처한 상황들을 <나의 해방일지>는 빵빵 터지는 코미디로 먼저 채워 넣는다.

 

출퇴근만 했을 뿐인데 하루가 다 가는 이 흰자의 삶 때문에, 미정은 회사에서 지원하는 동호회 하나 들지 못하고 회식에 가서도 일찍 일어나야 한다. 이유는 하나. 집이 너무 멀어서다. 기정은 출퇴근 하다 인생이 끝장날 것 같은 답답한 삶을 토로한다. 만나자는 남자가 약속장소를 삼청동으로 잡는 것이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기정을 힘들게 한다. 경기도민이 주말에 서울 나오는 게 얼마나 힘든지 모르냐며 그런 인간을 소개시켜준 이를 질타한다. 

 

창희가 다른 남자가 생긴 여자친구와 헤어지면서 꺼내놓은 감정을 들여다보면 그 흰자의 삶이 준 고충이 담겨있다. 강북에 사는 여자친구 때문에 헤어지고 집에 가는데 매일 1시간 반이 걸렸다는 말이 툭 튀어나온다. 그러면서 갑자기 서울과 경기도, 도시와 촌스러움으로 나뉘는 노른자와 흰자의 삶이 애인과 남친이라는 지칭의 차이로까지 등장해 감정을 건드린다. 결국 창희는 “그 놈은 서울 사람이냐?”는 자격지심 가득한 말까지 터트린다. 

 

박해영 작가가 돌아왔다. 우리에게는 <또 오해영>과 <나의 아저씨>로 기억되는 작가. 그런데 박해영 작가가 코미디도 이렇게 잘 썼던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나의 해방일지>는 빵빵 터지는 웃음으로 채워진다. 그 웃음은 도시인들에게는 로망으로까지 여겨지는 전원생활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가져온 데서 비롯한 것들이다. 

 

서울에서 양복 챙겨 입고 멀쩡하게 일하던 이 삼남매가 택시비를 아끼려고 강남역에서 만나 같이 택시를 타는 광경이나, 집에 도착하자마자 마당 한 편에 있는 수돗가에서 웃통을 벗어던지고 물을 끼얹는 창희의 모습이 그렇다. 주말에 전원생활을 즐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버지가 하는 파 농사로 땀에 절어 일을 하는 모습은 또 어떻고. 박해영 작가는 코미디도 잘 쓴다. 

 

그런데 이러한 흰자의 삶을 전면에 내세운 건 단지 서울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상에서 경기도민이라는 지역이 가진 소외감이나 고충을 드러내기 위함만이 아니다. 그건 어떤 걸 중심으로 세워두고 그것이 마치 바람직한 인생인 양 내세워지는 세상에서 그 바깥에 놓여진 이들이 겪는 소외를 말하기 위함이다. 이들은 그 소외 속에서 답답하고 그렇게 살다 인생을 다 보낼 것 같은 불안감에 빠져 있다. 

 

그런 소외는 단지 지역적 차이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라(물론 우리나라는 지역이 그 사람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지만), 회사 생활에서 동호회 같은 것에는 관심 없는 아웃사이더이거나 남녀관계에 있어서도 모두가 거치는 걸 자신만 빼놓고 지나는 일을 겪는 누군가에게서도 생기는 일들이다. 즉 창희, 미정, 기정은 본인들이 경기도민으로 흰자의 삶을 살아가는 소외를 겪고 있다 느끼지만, 그 집에서 일을 해주며 살아가는 구씨(손석구)는 이들보다 더 바깥으로 밀려난 사람이다. 무슨 이유에선지 일을 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는 그는 할 일이 없을 때는 멍하니 깡소주를 까는 걸로 시간을 죽인다. 

 

<나의 해방일지>는 그래서 이렇게 소외된 이들이 그 답답한 일상을 버티다 버티다 드디어 폭발하고 그것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결국 모종의 무언가를 터트리는 이야기다. 2회의 마지막에 미정이 집으로 돌아가던 그 챗바퀴의 마지막 발길을 되돌려 갑자기 구씨(손석구)에게 다가가 “날 추앙해요”라고 어색한 단어까지 동원해 얼토당토한 제안을 하는 건 그래서 우스우면서도 짠하기 이를 데 없다. 그 누구도 자신을 사랑하거나 심지어 관심 갖지 않는 것 같은 소외 속에서 미정은 자기보다 더 바깥에서 살아가는 구씨에게 명령하듯 그런 말을 던지고 있는 것이니 말이다. 

 

웃음과 눈물, 희극과 비극은 종이 한 장 차이라고 했던가. <나의 해방일지>는 흰자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빵빵 터지는 웃음으로 문을 열었지만, 점점 다가가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그 웃음 뒤에 숨겨진 눈물이 왈칵 우리 앞에 쏟아진다. 과연 이 변방에서 흰자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은 그 곳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해방은 과연 노른자의 삶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진정한 해방은 어디서 찾아질 수 있는 걸까. 웃기지만 짠한 페이소스가 가득한 박해영표 희비극이 가진 매력이다.(사진:JTBC)

‘라켓소년단’, 변방으로 가 중심 강박을 털어버리다

라켓소년단

“저는 내일 어떻게 하면 될까요?” 뉴질랜드에서 열리는 배드민턴 국제대회에 나간 한세윤(이재인)은 코치에게 다음 날 경기를 어떻게 해야 할까를 묻는다. 다른 선수들에게는 일일이 조언을 해주는 코치가 단식대회에 나가는 한세윤에게는 아무런 얘기도 해주지 않아서다. 그러자 코치는 말한다. “하던 대로. 그냥 너 하던 대로. 하고 싶은 대로.”

 

물론 이런 말은 코치가 한세윤을 무시하거나 무관심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늘 대회에 나가기만 하면 무조건 이기는 선수. 그래서 이기는 게 ‘당연한’ 선수이기 때문에 뭐라 코치를 해줄 게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코치의 말에 한세윤은 어딘지 시무룩한 얼굴이다. 그 ‘당연한 우승’에 대한 기대가 만만찮은 부담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경기 전 잠도 못자고 두통으로 시달리던 선수였다. 

 

친구부터 코치, 동네 어르신들까지 모두가 영상으로 응원 메시지를 보내오지만, 그것이 기쁘면서도 불안감을 떨칠 수 없다. 그런데 그에게 의외의 영상 메시지 하나가 온다. 윤해강(탕준상)이 보낸 메시지다. “내 생각에 너는 누구보다 열심히 했고 최선을 다했어. 지금도 충분히 충분하고 대단히 대단하단 말이야. 그래서 내가 너한테 해주고 싶은 말은... 져도 돼. 한세윤. 꼭 이번이 아니더라도. 앞으로도. 그동안 고생했다.”

 

SBS 월화드라마 <라켓소년단>은 배드민턴이라는 스포츠의 세계를 다룬다. 뭐든 1등을 해야 알아주고 승자가 되어야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우리네 경쟁사회에서 스포츠의 세계만큼 ‘승자독식’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분야도 없다. 인기 종목이야 그나마 더 여지가 열려 있지만, 비인기 종목으로 국제대회에서 잠시 화제가 되었다가 끝나고 나면 잊히기 마련인 비인기종목은 더더욱 그렇다. 국내 1위가 아니라 세계 1위가 되어도 주목받지 못하는 종목도 있으니.

 

<라켓소년단>은 스포츠의 세계를 가져와 승자 독식 강박에 빠져있는 우리네 현실을 에둘러 끄집어낸다. 선수들은 저마다 배드민턴이 즐거워서 하다가도 우승하지 못하면 계속 그 운동을 할 수 없는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늘 이겨서 우승이 당연하다 생각되는 선수는 한 번 지면 그 충격이 더 크게 다가온다. 그러니 우승은커녕 소년 체전을 앞두고 같은 팀에서 나갈 3명을 뽑기 위해 한 명의 탈락자를 뽑는 평가전마저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다. 운동은 즐거워서 하는 게 아니라 미래를 위한 절박한 선택이다. 

 

나우찬(최현욱)은 늘 배드민턴을 하는 자신을 못마땅해 하는 아버지 때문에 힘겨웠지만, 갑자기 “잘 해보라”는 말에 불안감을 느낀다. 스스로도 팀 내에서 자신이 가장 뒤쳐진다 여기고 있는데다, 그 잘 해보라는 아버지의 달라진 태도에 신경이 곤두선다. 그의 불안감은 그리고 사실 그대로다. 아버지는 이제 곧 고1이 될 아들이 더 이상 배드민턴에 길이 보이지 않으면 포기시키려고 하는 마음을 드러낸다. 이기지 못하면 할 수 없는 것. 그것이 우리네 승자 독식 사회의 풍경이다. 

 

<라켓소년단>이 굳이 도시가 아닌 땅끝마을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도시로부터 소외된 ‘변방’을 은유하기 때문이다. 도시를 중심으로 세워두고, 마치 그 곳으로 입성해야 ‘승자’가 되는 사회, 그 곳에서 어느 곳에 몇 평짜리 아파트를 가져야 성공으로 여기는 사회, 그런 지표들이 그는 물론이고 그 자녀들의 삶에까지 고스란히 영향을 미치는 그런 사회에서 변방의 소외는 폭력적이다. 하나의 중심을 세우면 그 주변이 모두 소외된다는 점에서, 승자로 돈으로 지위로 중심이 세워지는 사회는 그 자체로 폭력적이다.

 

<라켓소년단>을 그래서 그 땅끝마을로 간 소년이(그것도 하고 싶은 야구를 잠시 접어두고) 그 곳에서 팀원이 없어 팀 자체가 와해될 위기에 놓여 있는 배드민턴부에 들어가 함께 소년 체전을 향해 가는 이야기 속에, ‘승자 독식 강박’과는 정반대의 ‘망할 권리’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 놓는다. 윤해강은 만만찮은 승부욕의 소유자지만, 그렇다고 승부에 집착하지는 않는다. 한세윤에게 “져도 돼”라고 말하면서 열심히 했고 최선을 다한 것만으로도 충분하고 대단하다 말한다. 

 

그 누구도 우리 사회에서는 “져도 돼”라는 말을 해주지 않는다. 심지어 가족마저도 꼭 이기고 합격하고 성공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니 이 승자 독식의 강박 속에서 우리는 좀체 즐겁게 무언가를 하지 못한다. 이겨야 비로소 즐거울 수 있는 사회니 말이다. 하지만 누군가 이긴다면 누군가는 지게 마련이다. 게다가 꼭짓점 위에 서 있는 한 명의 승자는 더 많은 패자들을 낳는다. 이런 사회가 과연 행복해질 수 있을까. 

 

윤해강이 툭 던지는 “져도 돼”라는 말을 듣고는 어딘가 가슴이 먹먹해지는 건 그래서 저 경기를 앞두고 잔뜩 신경이 곤두서 있는 한세윤만이 아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매일 한세윤이 마주한 그런 경기를 앞두고 살아가는 처지가 아닌가. 져도 망해도 그 과정의 최선을 누군가 알아봐주고 기꺼이 박수 쳐주는 그런 사회에 대한 열망이 이 땅끝마을로 간 소년소녀들의 이야기 속에 담겨 있다.(사진:SBS)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