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찾사’의 웃음, 공감포인트가 아쉽다

‘웃음을 찾는 사람들’의 ‘노래박사 강박사’에서 강성범은 과거 수다맨에서의 수다 실력을 이어받아 노래선생으로 변신한다. 노래를 부르는 감정을 구수한 사투리를 섞어 쏟아내다가 트로트풍으로 불러 제끼는 맛이 일품. 견습생 역할로 나오는 신인 개그우먼 유은의 엉뚱한 틈입도 볼거리다. 하지만 그 뿐. 코너가 끝날 때쯤이면 무언가를 빼놓은 듯한 부족함을 느끼게 된다.

“핫! 핫! 댓스 베리 핫!”을 반복하는 ‘초코보이’는 마치 후크 송을 패러디한 것처럼 중독성이 강하다. 성적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특정 동작에서 이 노래가 반복되며 이어지는 야릇한 몸 동작은 자칫 선정적으로까지 보인다. 선정적인 세상을 풍자할 수도 있었던 이 발군의 아이디어를 가진 코너가 왜 선정적인 몸 동작에 그치고 마는 것일까. 그것은 몸 동작과 반복되는 후렴구와 함께 어떤 의미 망이 형성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웃찾사’의 대표주자였던 ‘웅이 아버지’는 여전히 그 캐릭터가 재미있지만 너무 오래도록 지속한 결과 이제는 웃음의 강도가 약해졌다. 그나마 현재 이 코너가 유지되는 것은 게스트의 카메오 출연과 ‘스타킹’같은 프로그램을 코너 속으로 끌어들이는 외부요인들 덕분이다.

‘공공의 적’을 패러디한 ‘공공의 편’은 공분을 자아내게 하는 상황을 콩트로 보여준 후, 그것을 응징하는 구조로 통쾌한 웃음을 선사한다. 신문을 보고 있던 이가 신문을 던지거나 신문으로 때리는 설정은 이 코너가 마치 신문 속의 갑갑한 뉴스가 주는 그 공분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그저 소리치고 분노하는 장면으로는 어딘가 부족한 면이 있다. ‘개그콘서트’의 유사한 포맷인 ‘도움상회’가 가진 다채로운 재미(각종 패러디들 같은)와는 비교되는 지점이다.

‘묵언수행’은 초기 그 말을 하지 않는다는 설정이 꽤 기대감을 자아내게 했던 코너였다. 코미디언에서 개그맨으로 이름이 바뀌었을 때 거기 중심으로 선 것은 연기보다는 말 재주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코너의 말을 지워버린다는 설정은 역발상이다. 하지만 그것이 지금처럼 ‘물에 얼굴 담그고 숨 오래 참기’같은 무의미한 몸 개그에 머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역시 웃음의 포인트는 약할 수밖에 없다. 좀더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사회적 함의를 갖는 말 못하는 상황을 발굴해낼 필요가 있다.

‘믿거나 말거나’ 역시 초기에는 ‘웃찾사’를 새롭게 끌어올릴 수 있는 코너로 주목되었지만 현재는 그저 그 유행어의 반복 포인트만을 찾고 있는 느낌이다. 이 코너가 가진 힘은 바로 그 ‘믿기 힘든 세상’에서 나올 것이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모두 덤 앤 더머처럼 살아간다면’같은 개그 주제로는 공감을 끌어내기가 어려워진다. “믿기 어려우시다고요? 믿으세요!”하는 이 마지막 멘트가 힘이 빠지게 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웃찾사’는 전체적으로 코너가 주는 임팩트와 여운이 부족하다. 그렇기 때문에 코너가 끝나고 나서 캐릭터나 형식에 대한 인상이 깊게 남지를 않는다. 이렇게 된 것은 코너들이 어떤 순간적인 상황의 아이디어에서 웃음의 포인트를 잡아내고는 있지만, 그것을 사회적인 맥락과 연결시키는 부분이 취약하기 때문이다. ‘불황에 개그 코너는 호황’이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이것은 그저 모든 개그를 대상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개그가 불황의 사회적 맥락을 담보하고 있을 때 그렇다는 말이다. ‘웃찾사’의 부족한 2%가 바로 그것이다.

불황기, 삶을 성찰하는 다섯 편의 영화들

불황기여서일까. 유난히 삶을 돌아보는 영화들이 눈에 띈다. 이미 독립다큐영화로서는 상상못할 대성공을 거둔 '워낭소리'는 물론이고, 또다른 독립영화의 맛을 보여주는 '낮술', 미키 루크라는 배우와 떨어져서 생각할 수 없는 '더 레슬러', 나이를 거꾸로 먹어가는 한 인물을 통해 시간과 삶을 성찰하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그리고 심지어 슈퍼히어로 영화지만 정의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왓치맨'까지. 답답한 현실을 벗어나 그 현실을 관조하게 해주는 이 영화들이 가진 삶에 대한 각기다른 시선들은 무엇이었을까.

'워낭소리', 당신의 노동은 숭고하다
'워낭소리'의 그 잔잔한 울림은 소가 한 걸음 한 걸음을 걸어나가는 그 노동으로부터 울려퍼진다. 때론 바보처럼 우직하게 숨쉬듯 해온 노동이 달라진 세상 속에서 무화되는 어느 순간은 늘 아련한 노동의 아우라가 피어오르기 마련. '워낭소리'는 우리네 아버지들이 해왔던 노동이자, 이제는 사라져버린 진짜 노동을 소 걸음으로 찬찬히 되새겨보게 해주는 영화다. 영화가 전하는 말, "당신의 노동은 숭고하다"는 그 말은 불황을 살아가는 작금의 사람들의 가슴을 울릴만 하다.

'낮술', 기대와 배반의 삶 그래도 웃는다
'낮술'은 우리네 삶에 존재하는 욕망의 아이러니를 낮에 마시는 술의 그 분위기에서 포착해내는 영화다. 삶의 욕망이 가지게 마련인 기대감은 곧 배반감으로 돌아오게 마련. 낮술에 취해 한바탕 유쾌한 웃음을 던지고 난 후에 남는 것은 이 끝없이 반복되는 삶에 대한 관조다. 기대와 배반의 반복은 그러나 그 과정을 이어나가는 유머감각으로 인해 절망에 빠지지 않게 된다. '낮술'은 낮술 한 잔이 주는 쓰디쓴 현실을 웃음으로 전화시키고 그것을 통해 우리네 일상이 그 한바탕 낮술과 다르지 않다는 얘기를 해준다.

'더 레슬러', 육체는 슬프다 하지만 연민은 사절이다
'더 레슬러'는 한때 잘 나가던 프로레슬러였으나 이제는 남루해진 육신이 버거운 랜디(미키 루크)의 이야기면서, 한때 섹스심볼의 아이콘이었던 배우였으나 이제는 망가진 육체를 던져 연기하는 미키 루크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물론 프로레슬링은 그들이 말하는 '작전'에 의해 짜여진 쇼이지만 살과 살이 부딪치고, 피와 살점이 튀기는 링 위에서의 쇼는 리얼이다. 이것은 연기자의 상황과 정확히 일치하고, 더 확장해서 보통 사람들이 해나가는 노동과 다르지 않다. 그 노동 속에서 나이들어가는 육체는 슬프다. 하지만 이 영화가 대단한 것은 그 슬픈 육체에 보내는 연민마저 헤드락 한 판으로 날려버리는 그 쿨함에 있다.

'벤자민 버튼...', 거꾸로 돌려도 시간은 흐른다
시간을 거꾸로 돌려 원래대로 돌아갔으면, 하는 인간의 욕망. 전쟁에서 죽어 돌아온 자식을 앞에 둔 부모의 마음이 그러할 것이고, 시간에 종속되어 늙어가다 이제는 죽음만을 눈앞에 기다리는 노인의 마음이 그러할 것이다. 이 영화는 거꾸로 나이를 먹어가는 벤자민 버튼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그러한 욕망이 실현됐을 때 과연 우리는 시간을 넘을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던진다. 원작소설이 가진 유쾌함은 데이빗 핀처 특유의 진지함으로 바뀌어 영화는 오히려 시간에 종속되어버리는 벤자민 버튼의 상황을 보여준다. 거꾸로 돌려도 시간은 흐른다는 이 영화가 보여주는 시간의 무차별성은, 아마도 이 영화의 초반부 전쟁터에서 전사한 이 땅의 아들들을 다시 고향으로 되돌리기 위해 거꾸로 돌아가는 영상을 끼워넣은 데이빗 핀처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였을 것이다. 영화 또한 아무리 거꾸로 돌려도 시간에 종속되기 마련이니까.

'왓치맨', 세상은 구원할만큼 가치가 있는가
그래픽 노블의 정수라고 불려온 '왓치맨'은 세계를 위협하는 적과 그 세계를 구원하는 신적 존재가 등장하는 수퍼히어로 등식 속에 끼워넣어지는 영화가 아니다. 이 영화에서 적은 악당이 아니라 바로 인류이고, 수퍼히어로는 구원자라기보다는 고뇌하는 인간에 가깝다. 유일한 초월적 존재(신은 아니고 초인에 가깝다) 닥터 맨해튼은 왜 자신들이 인간을 구원해야 하는가 하는 의구심에 빠진다. 세상을 구원할 수는 있어도 인간의 본성을 바꿀 수는 없다는 슈퍼히어로의 비관적 고민은 그간 선과 악으로 간단하게 판단해왔던 정의의 개념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왓치맨'은 슈퍼히어로 영화로서 진지한 질문을 던졌던 '다크나이트'의 계보를 잇는 영화다.

불황이 가져온 불안은 자신의 삶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성찰을 욕망하게 만든다. 가벼운 주머니로 짧게 나마 현실을 빠져나와 그 현실을 되돌아보게 해주는 이들 영화들이 가치를 갖는 이유다.

불황 속에 더욱 빛난 ‘경숙이, 경숙아버지’

‘경숙이, 경숙아버지’에는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이해되기가 어려운 인물들의 관계들이 등장한다. 경숙아버지인 조재수(정보석)와 악연으로 얽힌 박남식(정성화)은 경숙(심은경)의 집에서 기거하며 경숙모와 사랑에 빠지게 되고 결국 둘 사이에 아이까지 갖게 된다.

가난보다는 그 속에 피어나는 정에 주목하다
그런데 이 상황을 알게된 경숙아버지는 화를 내기는커녕 쾌재를 부르며 아예 집밖으로 나와 이화자(채민희)와 함께 지낸다. 후에는 이 네 사람이 한 집에서 나란히 살기까지 하는데, 경숙이는 아버지가 둘인 이 상황 속에서 자기만 생각하는 아버지보다 가족들을 위해 헌신하는 남식을 더 따르기도 한다. 그리고 이것은 경숙이네 가족들 모두의 정서이기도 하다.

친아버지보다 타인인 남식을 더 따르는 가족이라는 비범한(?) 관계에 깔려있는 전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가난이나 전쟁 같은 극단적으로 어려운 상황이다. 당장 배가 고파 먹을 걸 구해야 하는 상황에서 마음이 가는 사람은 단지 피붙이라는 관계에는 있지만 타인만도 못한 삶을 살아가는 인물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도움으로 주고 정을 주는 타인이다.

그런데 이야기가 여기에서 끝난다면 이 드라마가 전하는 메시지는 그저 가난이 파괴한 한 가족의 이야기에서 머물렀을 지도 모른다. 드라마 말미에 경숙아버지가 빨갱이 누명을 쓰고 경찰서에 잡혀간 박남식을 구하기 위해 장구채를 들고 시위를 이끄는 장면은 이 이야기를 가난에서 정으로 위치 이동시킨다. 경숙아버지 조재수는 자신의 아내와 바람난 박남식을 구하려 나서면서 이런 얘기를 남긴다. “사람이 어려운 일을 당하면 싸우다가도 돕는 게 인지상정이다.”

이 한 마디는 이 드라마의 주제를 압축한다. 전쟁통에서도 적군인 부상 인민군을 총탄이 날아오는 상황에서도 버리지 못하고, 죽은 후에는 땅에 묻어주기도 하는 박남식의 캐릭터는 이 드라마의 핵심적 재미를 만들어낸다. 착하고 순해 빠져 늘 당하는 캐릭터로서의 박남식은 늘 누군가를 이용하거나 골탕먹이며 살아가는 경숙아버지와는 상반된다.

가난을 냉소가 아닌 따뜻한 웃음으로 바꾸다
자기 자식보다 자기 남편보다 자기 아버지보다 더 박남식을 따르는 가족들의 면면은 이 드라마의 경쾌한 리듬과 함께 폭소를 자아내게 만든다. 경숙네 집에 경숙아버지가 훔쳐간 돈을 받으러 찾아와 그들의 가난을 지나치지 못하고 투덜대면서도 그들을 돕는 그 모습에서 비롯되는 폭소는 따라서 냉소와는 다른 따뜻한 웃음을 선사한다.

이 가난을 다루면서 냉소와 풍자의 칼날을 들이대기보다는 따뜻한 웃음을 짓게 만드는 것은 이 드라마가 작금의 불황 상황에 대해 던지는 긍정론이기도 하다. 전쟁과 궁핍의 극단적 상황 속에서도 일상적 삶은 계속되고 그 속에서도 여전히 따뜻한 정은 남아있다는 전언이다.

 국가적으로 암울한 시기를 절망적인 비장감으로 그려내기보다는 동화적 시점을 끌어들여 새롭게 조명하는 것은 ‘웰컴 투 동막골’과 궤를 같이 한다. 아이의 눈으로 그려지는 이 경쾌한 시선이 지향하는 것은 바로 그 냉엄한 현실 속에서도 여전히 한 인간으로서 발현되는 인지상정의 위대함이다.

작금의 불황 상황 속에서 이 드라마가 빛을 발하는 이유는 바로 이 차디찬 현실 위에 유쾌한 정의 세계를 복원해 보여주기 때문이다. 생생하게 살아있는 캐릭터들은 저마다 투덜대면서도 사랑하고, 사랑하면서도 투덜대는 모습들을 보여줌으로써 어려운 현실적 상황 자체를 관조하게 해준다.

이 대단한 주제의식의 드라마가 4부작이라는 것 또한 곱씹어 볼만한 점이다. 드라마 역시 불황을 맞아 상업적으로 취약할 수 있는 단편 혹은 중편이 설 자리를 점점 잃고 있는 상황. 그러나 이 짧은 가난한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작금의 장편 부유한 드라마들 틈바구니에서 전하는 감동은 그 여운을 더 깊게 만든다. 어려울수록 그 희망을 바로 사람들의 진정성에서 찾는 이 드라마의 태도는 작금의 불황상황이나 드라마 제작상황 모두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할 것이다.

어딜 보나 다 불황이다. 거의 모든 경제지표들이 곤두박질치고 있는 상황. 이 상황에서 TV는 어떤 존재로 각인되고 있을까. 1,2년 전만 해도 TV의 화두는 리얼리티였다. 드라마에서 트렌디를 벗어나 좀 더 디테일과 현장감을 살린 전문직 장르 드라마가 꽃을 피웠고, 예능에서는 버라이어티 쇼 앞에 '리얼'이라는 수식어가 붙기 시작했다. 발빠른 케이블TV에서는 리얼리티쇼들을 서둘러 수입하거나 자체적으로 제작하기 시작했고, 심지어 '막돼먹은 영애씨' 같은 다큐드라마가 나왔으며, 가짜를 진짜처럼 만들어낸 페이크 다큐가 하나의 대세처럼 우후죽순 쏟아져 나왔다. 채널을 어느 쪽으로 돌리든 프로그램이 하는 얘기는 이랬다. "이거 리얼입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리얼이라는 수식어는 과거에 비해 서서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실정이다. 아직까지 과거의 수식어 그대로 전문직 장르 드라마, 리얼 버라이어티쇼 같은 용어들을 사용하고는 있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이게 진짜 리얼이 맞는가 싶은 의구심이 생길 정도다. 먼저 드라마쪽을 보면 올 한 해 드라마의 한 경향으로 보였던 방송가 소재 드라마들의 경우, 리얼리티보다는 판타지쪽의 손을 들어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을 비교할 수 있는 두 드라마는 '온에어'와 '그들이 사는 세상'이다. '온에어'는 방송가의 뒷얘기를 리얼하게 다룰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이른바 스타들의 화려하고 다이내믹한 삶에 대한 대중들의 판타지를 자극하는 드라마로 그려졌다. 결과는 20%에 달하는 시청률이 말해줬다. 하지만 너무 리얼해 그들이 사는 세상이 우리가 사는 모습과 그다지 다를 것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그들이 사는 세상'의 경우, 시청률은 좀체 10%를 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이 사는 세상'과 맞붙은 '에덴의 동쪽'은 시대극을 표방했지만 사실은 욕망과 복수를 그리는 판타지극을 선보이면서 30%대에 이르는 시청률로 월화를 평정했다. 그래서인지 최근 드라마들은 점점 리얼리티보다는 판타지쪽으로 힘을 실어주는 양상이다. SBS에서 새로 시작한 '떼루아'는 그 전문적인 세계보다는 트렌디한 남녀 관계에 더 몰두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으며, '바람의 화원'이 끝나고 시작할 '스타의 연인'은 본격 트렌디 드라마의 부활을 예고하고 있다.

TV의 판타지 편향은 드라마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리얼 버라이어티쇼의 새 강자로 등장한 '패밀리가 떴다'는 바로 그 리얼리티보다는 판타지 설정에 힘을 실어주면서 부상한 경우다. '패밀리가 떴다' 속의 캐릭터나 상황은 대부분 설정이다. 초반부터 관계를 만들어내며 그 관계 속의 상황을 통해 웃음을 주었던 이 쇼는 다른 시각으로 보면 거의 시트콤에 가까운 성격을 쉽게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1박2일'이 가졌던 야생의 리얼리티와는 상반되는 것이다. 즉 '1박2일'은 날것의 것을 그대로 보여주려 하지만, '패밀리가 떴다'는 대중들이 보고 싶은 것을 보여주려 한다는 점이다. 바로 이것은 이 쇼가 판타지에 기반하고 있다는 걸 말해준다.

'우리 결혼했어요' 같은 가상설정 버라이어티 쇼가 점점 많아지고 있는 것도 예능의 판타지 편향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가상 부부, 가상 가족 같은 개념은 사실 우리가 드라마를 보면서 늘 상 빠지게 되는 판타지의 하나이다. 우리는 트렌디 드라마를 보면서 그 주인공들에게 감정이입 되는 판타지를 경험하고, 가족 드라마를 보면서 거기 있는 가족을 또 하나의 나의 가족으로 여기는 경험을 하게 된다. 가상 버라이어티 쇼는 바로 이런 드라마적 설정과 예능의 웃음코드를 연결시킨 것이다.

이처럼 TV의 판타지 편향이 일어나는 이유는 무얼까. 이것은 힘겨워진 현실에서 TV는 정보와 의미를 통해 말 그대로 멀리 있는(tele) 것을 가까이 보여주는(vision)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현실을 잊게 해주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는 방증이다. TV 앞에서나마 현실을 잊고 싶어 하는 대중들의 마음, 너무나 이해되고 공감 가는 것이지만 안타까운 현실이기도 하다.
(이 글은 스포츠칸에 기고된 칼럼입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