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도전> 탐정특집에 담긴 결코 작지 않은 의미

 

영국드라마 <셜록>은 대단히 매력적이다. 마치 스캐너를 두뇌 속에 내장하고 있는 듯 한 번 훑어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했는가 까지 척척 알아내는 셜록의 거의 편집증에 가까운 그 능력만으로도 충분하다. 아마도 사건의 진실을 알고픈 욕망은 시대와 장소가 바뀌어도 달라지지 않는 인간의 본능일 게다. 그러니 19세기 말 영국을 배경으로 등장한 이 인물에 대한 관심이 100년도 훌쩍 지난 현재 우리에게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

 

'무한도전(사진출처:MBC)'

<무한도전>처럼 트렌디한 예능 프로그램이 이 셜록 열풍을 그냥 넘길 리 없다. 그래서 탐정 특집이라는 새로운 도전과제에 뛰어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역시 <무한도전>은 그 먼 나라의 킬러 콘텐츠에 매몰되기 보다는 우리 식의 재해석에 더 초점을 맞췄다. 표창원 전 경찰대 교수를 굳이 출연시켜 탐정 수업을 시킨 데는 영국 드라마 <셜록>에는 빠져 있을 수밖에 없는 우리네 정서를 부여하기 위함이다.

 

표창원에 대해 대중들은 권력에 대해서도 쓴 소리를 서슴지 않는 이미지로 기억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벌어진 많은 사건들에 대해 대중들은 의혹을 제기하고 있지만 그것에 대한 썩 속 시원한 답변들이 나오지 않고, 때로는 지극히 상식적인 것들마저 덮여지고 부정되는 현실 속에서 표창원에 대중들이 지지를 보내는 이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잘못된 것은 잘못됐다 말하고, 명쾌하지 않은 것은 명쾌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 때문일 것이다.

 

사실 많은 의혹을 남기는 사건들이 우리 사회에도 벌어지지만 그것은 그 사건이 풀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권력에 의해 덮여지고 있으며 또 거기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즉 우리에게 필요한 건 셜록 같은 존재가 가진 명석한 두뇌가 아니라 오히려 지극히 상식적인 질문을 아무런 선입견 없이 던질 수 있는 차가운 두뇌와 뜨거운 가슴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표창원이란 존재는 셜록보다 더 대중들의 마음을 건드리는 면이 있다.

 

표창원이 이른바 탐정 아카데미에서 유재석에게 확신할 수 있나?”하고 버럭 호통을 친 사실이 화제가 되는 것은 감히(?) 유재석에게 호통을 쳤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사건과 범죄를 다루는 일이 얼마나 진지하고 누군가의 삶을 송두리째 바꿀 수 있는 중대함을 담고 있는 지를 일갈을 통해 보여줬기 때문이다. ‘어린이처럼 질문하고 백지처럼 선입견 없이 추리하며 엄한 처처럼 샅샅이 캐물어라고 하는 표창원 교수의 탐정 수사 법칙은 그래서 우리네 세상에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에 대해 대중들이 어떤 자세로 바라봐야 하는가를 말해주는 것처럼 느껴진다.

 

<수사반장>의 최불암을 흉내 낸 박불암박명수, <CSI>의 길 그리섬을 따라한준 그리섬정준하, <명탐정 코난>하코난하하, <살인의 추억>돈강호정형돈, <형사 가제트>노제트노홍철 그리고 유셜록까지. <무한도전>이 탐정특집으로 패러디한 다양한 캐릭터들을 들여다보면 우리네 형사가 가진 독특한 특징을 알아챌 수 있다. 외국의 캐릭터들이 명석한 두뇌와 과학적인 수사력을 바탕으로 사건을 수사한다면 우리네 캐릭터들은 그것과는 사뭇 다른 특징을 갖고 있다는 것.

 

<수사반장>은 형사물이 아니라고 말할 정도로 추리나 범인 검거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왜 범인이 사건을 저질렀는가 하는 그 휴먼스토리에 더 집중하는 드라마였다. “왜 그랬어?”하고 특유의 톤으로 묻는 최불암의 안타깝고 안쓰러운 인간적인 눈빛은 그래서 셜록의 화려한 추리와는 거리가 멀다. <살인의 추억>의 송강호가 보여준 캐릭터는 어떤가. ‘미칠 듯이 잡고 싶었다는 그 열정으로 오히려 더 기억되는 인물이 아닌가. 이들 캐릭터들은 사건 해결보다는 그 사건이 벌어졌던 당대 사회의 정서를 더 많이 보여주는 인물이다.

 

<무한도전>의 이 의미 있는 도전은 탐정이라는 아이템을 갖고 오면서도 거기에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진실에 대한 특별한 정서를 담아내고 있다. <셜록>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그래서 표창원 전 교수의 출연을 통해 우리네 현실감을 더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우리네 정서를 바탕에 깔아놓은 탐정 특집은 이제 저 이국의 셜록이라는 독특한 캐릭터에 대한 관심을 훌쩍 뛰어넘어 그저 탐정 놀이가 아닌 우리 사회를 들여다보는 시선으로 우리를 이끌어낸다.

 

실로 놀라운 접근이며 시도이고 도전이 아닌가. 탐정물이라는 장르가 가진 고유의 재미와 매력을 유지하면서도 그 안에 그 사건 해결의 의미가 단지 재미의 차원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 얼마나 현실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중대한 일인가를 자연스럽게 느끼게 해주는 일. <무한도전>이 아니면 도무지 시도조차 할 수 없는 일이 아닐까 싶다.

철거왕, 영화 같은 이야기? 끔찍한 현실이다

 

‘철거왕’. 마치 조폭영화 제목 같다. 실제로 무수한 조폭을 소재로 한 영화들이 재개발 현장에서 이른바 ‘용역’으로 활동하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그다지 낯선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것을 실제 현실로 실감하는 이들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각목과 쇠파이프와 화염방사기, 물대포차, 포크 레인 앞에서 뼈가 부서지고 살이 타면서도 터전을 지키려 안간힘을 썼던 주민들의 고통을 어찌 전부 알 수 있단 말인가.

 

'SBS스페셜(사진출처:SBS)'

<SBS스페셜>이 다룬 철거왕 이금열에 대한 이야기는 그래서 마치 조폭 영화의 한 장면처럼 드라마 타이즈된 연출로 시작된다. 성공에 대한 욕망과 가진 것은 몸뚱어리 하나밖에 없는 청년의 비뚤어진 야망 같은 것이 우리가 그들에게 갖고 있는 막연한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다큐가 다루려는 것은 그런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대신 그 이미지 밑에 숨겨져 있는 추악한 폭력의 실체를 끄집어내 보여주고 그 밑바탕에 깔린 우리 사회의 부조리를 말하기 위함이다.

 

1998년 천주교 인권위원회가 펴낸 ‘다원건설 철거범죄 보고서’에는 당시 적준이라 불렸던 철거업체의 끔찍한 폭력의 내용들이 들어가 있다. “임신 5개월 된 임산모를 때리고... 아주머니들에게 강제로 똥물을 먹이는 폭행”을 저지르기도 했으며, 심지어 “부녀자의 국부를 발로 밟는 성추행”도 빈번하게 했다고 한다. 방송에 나간 내용을 보면 한 여성의 옷을 갈기갈기 찢어서 반 실신시킨 사례까지 들어 있었다.

 

당시 전농동 주민이었던 피해자 송경란씨는 당시 적준이 아이가 혼자 있는 집에 불을 지르고 들어가지도 못하게 하자 “아이는 어떻게 하냐”며 바닥에 주저앉아 오열하기도 했다. 그녀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증언했다. “적준은 사람 죽이는 거 우습게 생각해요. 이렇게 하면 이 사람 다칠 거라는 생각 안하고 죽어도 괜찮다는 생각으로 철거를 해요. 그래서 사람들이 그 때 참 많이 죽었어요.”

 

당시 초등학교 1학년생이었던 김현욱 군은 누가 제일 보고 싶냐는 질문에 “엄마 아빠”라고 답했다. 하지만 당시 엄마 아빠는 적준아저씨들하고 싸우고 있다는 것을 김현욱 군을 알고 있었다. 그가 기억하는 적준아저씨들에 대한 이야기는 어린 아이가 담고 있기에는 너무나 충격적인 것이었다. “적준아저씨들이 포클레인 갖다요. 막 뭐라고 하면서 집 부수려고 막 그러는데 한 사람은 막 쇠파이프로 갖다 막 때리고 그랬는데, 어떤 사람은 불 갖다 지르고..”

 

도대체 국가가 있고 시가 있고 경찰이 있는데 왜 이런 살인 방화가 자행되는 것을 먼 산 불구경하듯 바라보고만 있었을까. 여기에도 역시 우리가 그간 조폭 영화에서 많이 봐왔던 정치권이나 공권력과의 커넥션이 제기된다. 15년 전에 보고서가 나오고 다원의 불법행위에 대한 고발장이 제출되었을 때 실무를 주도한 박래군 소장에 따르면 “수사가 될 것 같더니 다원이 여당 실세의 비호를 받고 있다는 말이 나오면서 흐지부지 됐다”고 한다.

 

다원이나 철거왕 같은 도무지 상식적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 범법자들이 버젓이 벼락부자가 되어 살아가게 된 데는 그만한 우리사회의 아픈 현대사가 작용하고 있다. 중동경기가 끝나고 들어온 중장비들이 88서울올림픽을 명분으로 재개발쪽으로 이동했다는 것. 재개발을 국가가 민간으로 넘김으로써 폭력적인 철거를 사실상 방임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점이다.

 

최근 철거왕 이금열이 구속 기소됨으로써 그 이면에 놓여진 커넥션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억대 로비를 했다는 이야기는 물론이고 윗선에서 수사에 개입했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영화 같은 이야기로 치부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부끄러운 우리네 자화상이 아닐 수 없다.

 

서민들이 가진 아파트에 대한 소박한 꿈들은 어쩌면 그 밑에 이처럼 피와 눈물을 흘리며 쫓겨난 사람들의 이야기에 묻혀졌었는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끔찍한 건 사실상 철거왕이라는 괴물의 탄생을 국가가 만들어낸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점이다. 실로 너무나 살벌한 별명이 아닌가. ‘철거왕’이라니.

<안녕하세요>, 왜 비정상이라 비난받을까

 

초심을 잃어버린 걸까. 공영방송이 이래도 되나 싶다. 여동생에게 과도하게 집착하는 오빠가 <안녕하세요>에 출연한 후 인터넷은 이 오빠에 대한 비난 여론으로 들끓었다. ‘정신병자’이니 치료가 필요하다는 얘기부터 ‘스토커’라는 비난, 오빠가 여동생에게 툭하면 시키는 뽀뽀가 ‘성추행’이라는 얘기까지 나왔고, 심지어 ‘성적인 악플’까지 달리기 시작했다. 내용은 조금씩 다르지만 모두가 한 목소리로 내고 있는 건 정상이 아니라는 것.

 

'안녕하세요(사진출처:KBS)'

그도 그럴 것이 방송에 나간 이 여동생에 집착하는 오빠의 이야기는 실로 정상이라 볼 수가 없었다. 동생을 아끼는 마음에서 그랬다고는 해도, 남자친구와 데이트하는 여동생을 매일 따라다니며 관찰하고, 여행을 갈 때도 꼭 따라가고 심지어 신혼여행까지 같이 가자는 오빠를 어찌 정상으로 보겠는가. 늘 손을 잡고 다니고 툭하면 뽀뽀를 요구하는 것에다 ‘사랑해’라는 말을 안 하고 전화를 끊으면 다시 건다는 건 도에 지나치다고 밖에 볼 수 없다.

 

결혼하기로 한 예비신랑과 이 오빠가 썼다는 계약서에는 동생은 평생 자기 것이며 같이 살 것이고 언제든 데리고 놀러 갈 수 있다는 식의 내용까지 들어 있었다. 오빠가 아니라 부모도 이렇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결국 동생은 울먹거리며 오빠가 자신이 아니라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서 자신의 미래를 꾸려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서 오빠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관객의 투표에서 150명 중 132명이 ‘고민이다’를 눌러 우승자가 됐을 때 오빠의 표정은 심지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물론 남의 가족 일에 우리가 알 수 없는 내막이 있을 수도 있으니 가타부타 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이미 방송을 통해 방영되었다는 것은 사실상 이 사적인 이야기를 공론화하겠다는 의도가 들어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 정상으로 보이지 않는 오빠에 대해 비난을 쏟아내는 대중들은 하등 잘못된 것이 없다. 정상인이라면 이런 식으로 방송에서 보여진 인물에 대해 비난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니까.

 

따라서 이것은 방송이 아예 내놓고 한 사람을 전 국민적인 비난 앞에 내놓는 행위나 다를 바가 없다. 그 사람이 제 아무리 비정상적이고 잘못됐다 해도 그 어찌 보면 사적인 문제들을 온 국민의 도마 위에 올려놓는다는 것은 실로 방송이 할 짓이 아니다. 흔히 인터넷에서 누군가 찍은 동영상이 올라와 ‘○○녀’, ‘○○남’이라 불리며 집중적인 공격을 받는 일과 이것이 무에 다를 게 있을까.

 

물론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사람들을 다양성의 차원에서 보여주고, 그들과 관계된 사람들의 고민을 들어주며, 그들 사이에 어떤 화해와 소통의 물꼬를 터주자는 <안녕하세요> 애초의 기획의도는 잘못된 것이 없다. 하지만 이 기획의도대로 하려면 좀 더 신중한 접근과 편집이 필요하다. <안녕하세요> 같은 특이한 일반인들이 출연하는 프로그램은 자칫 자극적으로 경도되기 쉬운 위험에 대한 충분한 안전장치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안녕하세요>가 그나마 안전하다 여겨졌던 것은 가족이 출연해 가족애라는 틀 안으로 특이한 이들을 껴안는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때로는 비난받을 만한 이들도 뒤늦은 참회의 모습으로 오히려 소통의 감동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여동생에 집착하는 오빠의 이야기에는 그런 부분이 전혀 등장하지 않았다. 소통은커녕 오히려 자신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관객들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 오빠가 여동생에게 보여준 리액션의 전부였다. 그러니 이 편집된 방송에서 대중들의 비난여론이 쏟아지는 건 당연한 결과가 아닐까.

 

이 날 방영된 또 다른 사연 중 중학교 2학년 여학생을 마치 하인처럼 시키는 부모 이야기 역시 자극적인 소재였지만 그나마 비난여론이 덜했던 것은 마지막에 엄마가 딸의 고충을 이해하고 울컥하는 모습을 통해 둘 사이의 간극이 좁혀지는 걸 보여줬기 때문이다. 물론 소재적인 차이도 있겠지만 도무지 소통이 이뤄지지 않는 불편한 내용들은 그대로 방영되면 당사자들을 공론의 질타 속에 던져놓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고민을 들어준다는 빌미로 어쩌면 내밀하고 사적인 이야기를 공론의 장으로 가져와 마구 풀어헤침으로써 결국 그 당사자들의 비난을 먹고 자라는 프로그램이라면 실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것은 방송이 시청률을 위해 일반인들을 이용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다른 것’을 인정하고 이해하려는 좋은 기획의도는 자칫 잘못된 방송을 통해 ‘다른 것’이기 때문에 비난받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안녕하세요> 제작진은 알아야할 필요가 있다.

<천안함 프로젝트>, 그 완성은 관객이 만들었다

 

도대체 이게 뭐라고 이렇게 나라 전체를 들썩거리게 만들었을까. <천안함 프로젝트>는 한 마디로 말하면 천안함 사건에 대해 지극히 상식적인 질문을 던지는 그저 평범한 다큐멘터리였다. 이미 그간 보도된 것들도 많기 때문에 어쩌면 어떤 획기적이고 새로운 내용을 기대했던 이들에게는 심지어 실망감을 줄 수도 있을 정도로 지극히 평범한.

 

(사진출처:영화 '천안함 프로젝트')

다만 당시 너무 많은 보도와 말들이 쏟아져 나와 도무지 뭐가 뭔지 종을 잡을 수 없었던 상황을 생각해보면 이 다큐멘터리의 미덕은 그것을 아주 차분하게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일정의 거리를 두면서 하나하나 보여주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전문가들의 상세한 의견을 통해 국방부가 발표했던 일련의 자료들이 얼마나 신빙성 있는 것들이었나 하는 의문을 제기하는 정도.

 

천안함 사건이라는 민감한 소재였기 때문이었을 게다. 이 다큐멘터리는 과감한 연출방식을 의도적으로 자제했다. 다큐멘터리의 구조는 마치 백서를 보듯이 챕터1, 2 이런 식으로 지극히 담담하게 구성되었고 그 안에 담겨진 전문가나 관계자의 증언 역시 극도로 감정을 배제시키려고 애쓴 흔적이 역력했다. 그러니 심지어 밋밋하게까지 여겨지는 이 다큐멘터리가 메가박스에 상영되는 것을 저지하려 했다고 지목된 보수단체들조차 억울해했을 법하다.

 

보수단체들이 우려했던 것처럼 <천안함 프로젝트>는 메가박스의 상영중지 결정이 오히려 흥행의 도화선이 되어준 격이 되었다. 왜 원천적으로 볼 권리를 빼앗는 것인가 하는 대중의 분노는 영화의 내용이나 성취와 상관없이 영화관으로 대중들을 이끌었다. 영화 자체가 가진 콘텐츠적인 의미보다는 그 영화를 보는 행위 자체가 가진 의미가 더 컸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천안함 프로젝트>의 영화적 가치가 낮다는 얘기는 아니다. 이것은 영화의 콘텐츠적인 성취보다는 ‘천안함 사건’처럼 민감한 소재도 영화화할 수 있다는 그 과정과 행동 자체가 커다란 성과다. 그리고 결국 <천안함 프로젝트>라는 영화가 진짜 하고픈 이야기도 천안함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어떤 식으로든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더 중요하는 것. ‘의문이 소통의 시작’이라는 것이 이 영화의 메시지다.

 

즉 소통을 이야기하려던 <천안함 프로젝트>가 원천적으로 소통을 봉쇄하려는 움직임을 만난 것은 영화가 말하려는 것처럼 우리네 현실이 얼마나 소통되지 않고 있는가를 오히려 보여주었다. 그래서 어떤 면으로 보면 <천안함 프로젝트>는 영화 자체가 아니라 영화가 영화관에 걸리는 우여곡절과 힘들어도 애써 그 영화를 보러 온 관객들의 행동까지가 이 영화의 완성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즉 <천안함 프로젝트>처럼 지극히 상식적인 영화가 이토록 큰 파장을 일으킨 것은 거꾸로 우리네 현실이 얼마나 비상식적인가를 말해준다. 소통에 대한 작은 손짓마저 생각이 다르다며 묵살하려는 태도, 국민적인 관심과 의혹이 생긴 사안에 대해 끝까지 설명해주기는커녕 그 의혹을 제기하는 것 자체에 꼬리표를 다는 행위들, 그리하여 국민적인 불신감만 더 증폭시키는 이 현실이 <천안함 프로젝트> 속에는 들어있다. <천안함 프로젝트>라는 영화적 실험은 그래서 이런 현실 속에서도 영화관을 찾은 관객들에 의해 비로소 완성된 것처럼 보인다. 관객들은 이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처럼 막힐수록 더 갈증을 느끼게 되는 소통에 대한 갈망을 보여준 것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