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하는 시골정보프로그램 속 한결같은 '6시 내고향'의 가치

하루의 바쁜 일과가 끝나가는 저녁 6시. 뜨끈한 국물이나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 한 그릇만 봐도 허기에 식욕이 도는 그 시간 우리의 눈은 자꾸만 TV 화면에 머문다. 오늘은 또 어느 곳의 구수한 이야기가 우리의 식욕을 돋울까. 저녁 상 차리는 주부와 밥상을 두고 둘러앉은 식구의 눈도, 고향 떠나와 타향에서 홀로 저녁 상 앞에 앉은 외로운 자취생의 눈도, 이제 막 퇴근해 돌아와 구수한 밥 냄새를 맡는 가장의 눈도 TV에 머무는 데는 이유가 있다. 살맛 없는 세상, 살맛나는 고향의 이야기가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회차만도 무려 4400회. '6시 내고향'은 18년 간이나 저녁 6시면 어김없이 우리를 고향으로 데려다준 프로그램이다. 그 정도면 거의 안 지나친 곳이 없으련만 매번 보고 듣게 되는 고향이야기가 늘 새롭게 다가오는 건 왜일까. 그것은 아마도 그만큼 우리네 고향의 이야기는 화수분처럼 마르지 않기 때문일 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우리가 매일 겪는 다른 하루하루가 늘 변함없는 고향 이야기를 매번 새롭게 느껴지게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하루의 끝에 돌아갈 집처럼 늘 변함없이 우리를 기다리는 고향이 되어버린 프로그램, 바로 '6시 내고향'이다.

이 프로그램의 8%에서 9%대를 유지하는 한결같은 시청률이 가능한 이유는 프로그램명이 표방하듯 저녁 6시라는 시간대를 고향으로 가는 시간으로 만들어버린 그 채널 선점효과 때문이다. 특별한 편성상의 변수가 없다면 우리는 습관적으로 이 프로그램을 틀어놓고 저녁 시간대를 맞이한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프로그램의 오랜 성공이 그저 관성적인 시청에 의한 것만은 아니다. 타 방송국의 같은 시간대의 프로그램들이 비슷한 소재로 늘 경쟁을 벌여왔지만 그 아성을 넘어서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6시 내고향'이 갖는 정보의 질적 차이에서 비롯된다. 지역 네트워크를 백분 활용해 날마다 생생한 날 것의 고향 이야기가 배달되는 그 정보의 힘을 넘어서기란 실로 어려운 일일 것이다. MBC는 98년부터 무려 10년에 걸쳐 '생방송 화제집중'이라는 코너를 운영했지만 작년 코너를 접었고, 지금은 저녁 6시 대에 뉴스를 방영하고 있다. 한편 SBS는 30분 일찍 '생방송 투데이'를 편성하고 이어서 저녁 드라마를 방영하는 것으로 차별화를 꾀하고 있다. '6시 내고향'이 선점하고 있는 6시라는 시간대에 방송사별로 나름의 고민을 하고 있는 흔적들이다.

'6시 내고향'의 제작방침은 세 가지로 나눠진다. 그 첫 번째는 사라져 가는 고향의 의미와 정서를 느끼게 하는 것(과거지향)이고 두 번째는 도시와 농촌을 연결시켜주는 정보를 제공하는 것(현재지향)이며, 세 번째는 농어촌이 앞으로 발전적으로 변해가는 그 방향을 제시하는 것(미래지향)이다. 하지만 이러한 제작방침보다 중요한 것은 이 프로그램이 늘 보여주는 고향에 대한 아련한 향수 같은 감성적인 부분이다. 세월이 바뀌어도, 점점 첨단화되는 세상이 되어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더욱 고향을 찾는다.

'1박2일'의 이명한 PD가 자신들이 지향하는 바가 "'6시 내고향'의 예능 버전"이라고 말했듯이 고향을 조명하는 프로그램으로서 '6시 내고향'이 타 방송프로그램에 미친 영향은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영향은 거꾸로 부메랑으로 돌아와 변함없는 '6시 내고향'의 아성에 도전하고 있다. 정보 프로그램의 예능화가 그것인데, SBS의 최양락, 정형돈이 메인MC로 자리한 '괜찮아U' 같은 프로그램이 등장했고, 정보 프로그램에 쇼적인 측면을 접목시킨 KBS2의 '리빙쇼 당신의 6시' 같은 프로그램이 그것이다. 시사교양 프로그램의 전반적인 인포테인먼트화와 최근 부상하고 있는 시골이라는 소재가 맞아떨어지면서 생겨난 현상이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어도 여전히 우리의 눈이 '6시 내고향'에 머무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우리가 고향을 찾는 마음이 한결같듯이 이 프로그램이 한결같은 모습으로 우리를 푸근한 저녁시간으로 인도한다는데 있다. 고향을 떠나와 각박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늘 저 편에 고향이 존재한다는 따뜻함을 전해주는 '6시 내고향'. 바로 그 모습 때문에 우리는 저녁 6시가 되면 늘 고향으로 달려간다.

시골 버라이어티 전성시대, 그 의미는?

이른바 ‘시골 버라이어티’의 시대가 되었나. ‘무한도전’은 일찍이 2006년 농촌체험을 소재로 그 시골이라는 공간이 주는 리얼 버라이어티쇼의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2007년에는 ‘비(?) 특집’을 통해 비 내리는 논에서의 한바탕 몸 개그를 선보이며 농촌을 버라이어티쇼의 장으로 변모시켰다. 그리고 2009년 ‘무한도전’의 벼농사 특집은 1년이라는 긴 기간으로 기획되어 실제로 농사를 짓는 그 과정을 보여주었다.

‘6시 내고향’의 예능 버전이라고 불리는 ‘1박2일’은 전국 각지의 농촌과 어촌을 찾아다니며 벌어지는 하룻밤의 해프닝을 리얼로 다룬다. 이 프로그램을 ‘6시 내고향’과 비교하는 것은 그 방영 시간대가 주중에 하는 ‘6시 내고향’과 같은 6시대이면서, 동시에 프로그램 속에 담기는 것들도 그 시골의 특산품이나 명물, 명소들이기 때문이다.

시골에 대한 주목은 이후 등장한 ‘패밀리가 떴다’의 본격적인 시골 버라이어티쇼로 이어진다. ‘패밀리가 떴다’는 시골이라는 공간을 쇼의 공간으로 바꾸면서 다양한 게임들을 마당에서 펼쳐 보여주었다. 스튜디오를 벗어난 공간으로서의 시골은 현장의 지형지물을 이용하는 새로운 게임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시골에서 리얼로 벌어지는 1박2일 간의 해프닝을 다룬다는 점에서 이들 ‘시골 버라이어티쇼’는 주로 남성들만의 전유물처럼 여겨져 왔다. 하지만 ‘패밀리가 떴다’에서 여성 멤버를 투입하면서 독특한 심리관계가 주는 재미를 선보이자, 이제는 더 이상 ‘시골 버라이어티’에 성별은 중요한 것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여성들의 아낌없이 무너지는 그 모습은 ‘시골 버라이어티’ 특유의 시골스런 모습과 대비되면서 주목되었다. 이효리가 몸빼바지를 입고 눈곱 낀 생얼을 카메라에 가감 없이 보여주고, 박예진이 그 가녀린(?) 손으로 거침없이 닭을 잡는 모습은 시청자를 열광케 했다.

그러니 신비로운 소녀 이미지의 총아라고 할 수 있는 걸 그룹들이 시골에 가지 말란 법이 있을까. 새로이 시작된 ‘청춘불패’는 소녀시대의 유리, 써니, 카라의 구하라, 포미닛의 현아, 브라운 아이드 걸스의 나르샤, 티아라의 효민, 시크릿의 선화가 시골의 집에서 자급자족하며 살아가는 일종의 생존(?) 버라이어티쇼라고 볼 수 있다. 화장실조차 없어 스스로 화장실을 만들던 이들이 구덩이의 간격을 맞춰보기 위해 자세를 잡는(?) 장면은 ‘청춘불패’가 보여주는 시골 버라이어티의 지점을 정확히 그려낸다.

이처럼 버라이어티쇼가 시골로 가게 된 것에는 먼저 연예인 리얼리티쇼가 대세가 된 지점과 시골이라는 공간이 잘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던 연예인들이 몸빼 바지를 입고 시골에서 노동을 하는 모습은 그들의 불편한 모습 자체로 날 것의 웃음을 준다. 이른바 세련됨과 인공적인 치장을 걷어낸 뒤, 신비주의가 무너지는 그 지점에서 자연스러운 웃음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또한 시골이라는 야외공간이 갖는 장점 또한 무시할 수 없다. 리얼리티쇼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다수의 카메라의 동원을 통한 리얼한 순간의 포착은 이처럼 넓은 야외공간 속에서 빛을 발한다. 스튜디오가 갖는 좁은 공간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는 점이다. ‘1박2일’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시골의 야생 속으로 뛰어드는 강한 리얼리티를 선보인다. 즉 계곡이나 바닷물로 입수하거나 갯벌 속에서 진창에 뒹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시골이라는 공간은 의미를 창출하는데 있어서 유리하다. 버라이어티쇼는 점점 어떤 스토리성이 강조되는 시기에 도달해있고, 그 스토리는 이제 웃음의 차원을 넘어서 어떤 의미까지를 요구하고 있다. 시골은 도시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외된 지역이기 때문에 이 지역에서의 체험을 통한 조명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갖는다. 게다가 시골의 때 묻지 않은 환경(자연환경은 물론이고 그 곳을 사는 분들의 순박함까지)이 때 묻은 도시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도 적지 않다.

물론 시골이라는 공간이 너무 쇼의 공간으로 전락하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의 소지도 없잖아 있다. 하지만 이들 버라이어티쇼들은 쇼가 갖는 재미의 측면과 함께 늘 이 시골이라는 공간에 대한 배려를 잊지 않는 모습을 연출한다. 그것이 이 공간에 빚져 인기를 얻고 있는 버라이어티쇼가 해야 할 최소한의 예의이기 때문이다.

거꾸로 생각해봐야 할 것은 버라이어티쇼가 주목하는 시골에 대한 가능성을 관계부처들은 얼마나 인식하고 있으며, 또 실제로 어떤 노력들이 이루어지고 있느냐는 것이다. 시골 버라이어티쇼가 물론 그 프로그램의 성격상 시골의 사정들을 모두 보여주고 있지는 못하지만, 최소한 대중들에게 시골이라는 공간이 주는 날것의 순박함이 넘치는 자연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렇다면 어쩌면 시골 버라이어티쇼는 그 쇼적인 기능 이상을 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촬영지 관광, 노동마저 상품화되는 세상

인디언들은 사진에 찍히면 영혼을 잃는다고 생각했다. 비합리적이라 생각될 수 있는 이 말은 그러나 지금 현실로 드러나고 있다. 경상북도가 관광상품화하겠다고 공식적으로 밝힌 ‘워낭소리’의 촬영지는 그 다큐멘터리 영화가 보여주었던 노동을 증발시키고, 전시되는 상품으로 변질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는 노동마저 상품화되는 세상에 살고 있는 지도 모른다.

‘워낭소리’가 대중들의 폭발적인 지지를 받았던 것은 그 영화가 주목했던 이제는 실종되어버린 진정한 노동의 발견 때문이었다. 소를 부려 짓는 농사를 고집하는 할아버지와, 그 할아버지와 함께 묵묵히 일생을 살아온 소는 그 노동을 증명해온 끊이지 않는 워낭소리만을 여운처럼 남긴 채 사라져 갔다. 그 워낭소리는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실종된 노동 속에서 소처럼 일하다 사라져버린 아버지를 떠올리게 하며 대중들의 가슴 속에도 울려 퍼졌다.

하지만 ‘워낭소리’가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며 신드롬이 되는 순간(어쩌면 카메라에 담겨 그 사적영역이 공적영역으로 노출되는 순간부터였는지도 모른다), 그 카메라가 포착한 공간의 아우라는 휘발되어 버렸다. 그 곳은 영화가 보여주었던 노동의 현장이기를 거부하고, 도시인들의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다. 이 시대의 카메라는 저 인디언들이 터부시하며 말했던 것처럼, 확실히 그 대상의 영혼을 빨아들이는 마법(?)을 발휘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이런 ‘워낭소리’의 사례는 그다지 새로운 일은 아니다. 우리는 이미 한 산골소녀가 미디어에 노출되는 순간, 그 상업적 물결에 휩싸여 고통받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맨발의 기봉이’의 실제 인물인 기봉씨는 영화화된 후, 유명세로 고통받다가 결국 그토록 사랑하던 어머니를 떠났고 그렇게 한참을 돌아서 이제 다시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왔다. 카메라가 포착한 시골의 그 순수함들은, 바로 그 카메라에 담기는 순간부터 사라지게 될 운명에 처했던 것이다.

이것은 현재 TV 속에서도 진행되는 현상이다. 시골이 가진 그 순박한 모습은 이제 도시인들의 향수의 공간이 되었고, TV는 이제 그 공간들을 안방으로 날라다 주고 있다. 흔히 여행 버라이어티 속에 잡혀진 시골들에서 그 본질적인 모습들은 찾아보기가 어렵다. 그 속에서 시골 노동의 현장은 그저 병풍처럼 배경이 되거나, 도시인들의 놀이공간으로 변해가고 있다. 카메라가 도시에서 떠난 자들의 하룻밤을 포착하는 그 버라이어티쇼의 공간들은 그 순간부터 도시의 논리에 복속되기 시작한다.

촬영지의 상품화는 이제 문명화의 끝단에 서서 그 골동품적 취향으로 변질되어 도시화 되어가는 현 시골의 상황을 보여준다. 도시화되어야 살아갈 수 있는 현재의 불균형한 경제조건 속에서 ‘워낭소리’ 촬영지의 관광상품화에 대해 동의해준 최 할아버지 가족들의 처지는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도시화의 물결 속에서 그 마지막처럼 보이는 공간을 포착해 대중들의 마음을 울려준 그 영화가 거꾸로 그 공간을 잡아먹는 상황이 달갑게 보이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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