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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드라마, 그 임신 권하는 세상이 말해주는 것

드라마 ‘미워도 다시 한번’의 가계도는 실로 복잡하다. 명진그룹 회장인 한명인(최명길)은 같은 회사 부회장인 이정훈(박상원)과 부부이고 그 사이에 아들 이민수(정겨운)를 두고 있다. 그런데 이민수는 이정훈의 친아들이 아니다. 한명인의 첫사랑의 소산이다. 한편 이정훈과 내연관계에 있는 은혜정(전인화)은 그와의 사이에 딸 수진(한예인)을 두고 있는데, 사실은 숨겨진 딸 최윤희(박예진)이 하나 더 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녀가 한명인의 며느리로 들어오면서 관계가 복잡해진다. 이정훈을 사이에 두고 한명인과 은혜정은 서로 치열한 대결을 벌이고 있는데, 최윤희의 존재는 이 둘 관계를 나락에 빠뜨린다. 최윤희의 시어머니인 한명인이 죽기살기로 대결을 벌이는 이가 자신의 친어머니(은혜정)가 되고, 시아버지가 된 이정훈은 갑자기 친아버지가 된다....

이 가계도는 사실 정리하면서도 헷갈릴 정도다. 그런데 이 관계의 거미줄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 지나치게 엮여져 있는 관계들의 기저에는 자식문제가 지뢰처럼 놓여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극단적인 드라마 구조 속에서는 제 자리에 서 있는 자식이 거의 없다. 이민수는 자신의 친아버지가 죽었다 생각하며 살아오고, 최윤희는 자신이 은혜정의 딸인 줄도 모르고 살아온다. 흔히들 식상한 표현으로 ‘출생의 비밀’이라는 코드는 이 드라마의 중심 모티브가 된다. 그런데 나이가 지긋이 든 중년들이고 이제 사회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성공한 인물들이라 가려져 있는 문제가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미혼모의 문제다. 한명인은 젊은 시절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첫사랑과 사랑의 도피행각을 벌였고 그 사이에 아이까지 가지게 되었고, 은혜정은 미혼이면서도 내연관계인 이정훈과 두 명의 딸이나 둔 셈이다.

희한한 일이지만 이들의 미혼모 문제가 도드라져 보이지 않는 것은 이들이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우리에게 미혼모의 문제는 주로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비춰지곤 한다. 상대적으로 윤리적인 문제나 도덕적인 문제는 회피되어 있다. 이것은 이 미혼모의 문제가 여전히 여성들의 문제라는 가부장적 사고관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드라마 속에서 물론 남성들은 입만 열만 “미안하오. 잘못했소.”를 연발하지만 그 뿐이다. 이 저질러진 상황 속에서 허우적대고 악다구니를 하며 싸우고 있는 건 여성들이기 때문이다.

미혼모 문제에 대한 이런 시각은 1968년 정소영 감독이 동명의 원작 영화에서 보여준 시각에서 그다지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인다. 유부남인 줄 모르고 사랑에 빠지고 아이까지 갖게 된 혜영(문희)이 후에 그 사실을 알고 홀로 아이를 낳아 기르다가 아이가 성장하자 아버지에게 아이를 보낸다는 이 모성을 자극하는 신파적인 이야기는 미혼모의 문제를 가부장적인 시각으로 다루고 있다. 무책임한 신호보다는 불쌍한 혜영에 더 집중해 신파적 감성을 이끌어냈던 것이다. 40여 년이 지났지만 달라진 것은 별로 없어 보인다.

당연한 것인지 모르지만 우리네 드라마에서 임신이란 당연히 해야만 하는 어떤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있다. 결혼한 신혼부부에게 부모들은 임신을 지상과제처럼 강권하고, 만일 피임이라도 하다가 들키는 날에는 마치 아이라도 지운 것 마냥 지탄을 받는다. 그래도 결혼한 사이라면 그나마 이런 설정들은 그럭저럭 받아들일 수 있겠다. 하지만 결혼을 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종종 드라마들은 피임이라는 문제를 회피하기 일쑤다. 과감한 성담론을 다루어 화제를 모았던 2006년 작 ‘여우야 뭐하니’에서 콘돔이 등장하고 솔직한 피임의 이야기들이 나왔을 때, 선정성 논란이 불거졌던 것은 대표적인 사례다. 도대체 피임이 왜 선정적인가.

피임의 문제가 이처럼 은근히 회피되면서 드라마 속에 문제의식으로 드러나는 것은 낙태의 문제다. 낙태는 종종 공포의 하나로 취급되는데, 그것은 은폐하려 했던(그래서 여성들만이 그것을 대면하는) 끔찍한 결과를 그대로 드러내놓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드라마가 1994년도에 제작되었던 ‘M’이다. 낙태된 아기의 영혼이 낙태에 직면한 여성의 몸 속으로 들어와 복수를 한다는 이 이야기는 ‘전설의 고향’에서부터 변주되던 소재들이다. 이 드라마는 최근 ‘아내의 유혹’의 제작사인 신영이앤씨에서 올 여름 리메이크할 것이라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낙태의 문제 역시 과거와 달라진 점이 별로 없다는 걸 말해주는 대목이다.

우리 드라마가 여성들을 다루고 있는 방식은 ‘아내의 유혹’처럼 첫 회부터 교빈(변우민)이 은재(장서희)를 강제로 아이를 갖게 해 결혼을 하고 내연녀를 낙태시키고 비서를 성희롱 하는 것처럼 직설적인 면도 있지만, 도무지 누가 누구의 자식인지 종잡을 수 없게 만드는 ‘미워도 다시 한번’처럼 그 이면에 왜곡된 시각을 숨겨 두는 경우도 있다. 그것은 주로 임신 권하는 사회(혹은 피임을 죄로 취급하는)의 모습으로 드러나거나, 낙태를 여성의 고통스런 문제로만 내면화하는 형태를 띄기도 한다.

만일 드라마 속에서 한 주부가 6개월 치씩 피임약을 사서 먹는 에피소드가 등장하고, 그것도 이유가 몸매 때문에 아이를 원치 않아서(물론 섹스는 좋아하지만) 결혼 후 몇 년 동안 계속 피임을 해온 것이라면 그 사실을 알게된 가족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이것은 ‘위기의 주부들’이라는 미드의 한 에피소드이다. 이 드라마에서는 남편이 피임약을 버리고 대신 비타민약을 넣어두어 결국 임신을 하게 되는데, 그것을 알게된 부인에게 남편이 한바탕 혼이 나는 장면이 나온다. 또 ‘프렌즈’에는 한 집 살이 하는 두 여자친구가 각각 남자친구를 데려왔는데 콘돔이 하나밖에 남아있지 않아 콘돔내기(?)에 진 여자가 “오늘은 안되겠다”고 말하는 에피소드가 나온다. 물론 우리네 정서하고는 거리가 먼 얘기지만 적어도 임신에 대한 남녀의 동등한 시선만큼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다. 임신 권하고 피임을 죄악시하는 남성적 시각이 만들어낸 ‘미워도 다시 한번’의 그물 같은 가족관계를 언제까지나 미워도 다시 한번 봐야하는 걸까.


Posted by 더키앙

자매애로 보여지는 동지의식

참 이상한 일이다. 인터넷사전에 ‘형제애’라고 치면 ‘형이나 아우 또는 동기(同氣)에 대한 사랑’이라고 명시되어 있는 반면, 왜 ‘자매애’라는 단어는 없는 것일까. 신데렐라와 못된 언니들 혹은 콩쥐와 팥쥐 같은 고전들 속 캐릭터들의 잔재가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틀에 박힌 텍스트 공식들이 만들어낸 결과일까.

하지만 드라마들은 꽤 여러 번 자매애의 가능성을 포착한 바 있다. ‘여우야 뭐하니’의 병희(고현정)와 준희(김은주), ‘연애시대’의 은호(손예진)와 지호(이하나), ‘내 남자의 여자’의 지수(배종옥)와 은수(하유미)가 대표적이다. 이들의 자매애는 모두 늘 만나면 서로를 못 잡아먹어 한이라는 듯 으르렁대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 사실은 서로를 깊이 배려하고 있는 속내를 내보인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이렇게 자매들이 드라마 속에서 서로 의견충돌을 일으키는 것은, 여성들의 서로 다른 입장(애정관, 결혼관 등등)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각자 캐릭터들의 개성은 더 살리고, 공감의 폭은 더 넓어진다. 재미있는 것은 애정관, 결혼관이 달라 싸우던 이들이 결국에는 자매라는 끈으로 묶여지면서 묘한 동지의식을 끌어내기도 한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여성들의 연대의식 같은 것이다. 그 대표주자로 꼽을 수 있는 건 역시 ‘내 남자의 여자’의 지수와 은수다.

“이런 언니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이들의 자매애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여성이라는 연대의식 속에서 피어났다. 이 드라마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드라마 자체가 추구하는 것이 멜로가 아닌, 결혼제도나 남녀문제 같은 사회성 짙은 메시지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으로 보면, ‘여우야 뭐하니’나 ‘연애시대’ 역시 기존 관습에 던지는 사회성 짙은 질문들이 있었다는 걸 발견할 수 있다.

‘여우야 뭐하니’가 사회 통념으로 생각되는 나이와 결혼의 문제에 있어서 병희와 준희란 캐릭터를 통해 연령차를 극복하려 했다면, ‘연애시대’는 은호와 지호를 통해 결혼이란 사회적 관습에 연애라는 잣대를 들고 질문을 던졌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멜로가 가진 틀이 강했기에 ‘내 남자의 여자’처럼 그것이 전면에 부각되진 않았지만 그 속에서 이들 자매들이 보여주는 은근한 서로에 대한 애정은 바로 이런 동일한 적(?)을 앞에 두고 있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자매애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아도 자매들 간의 동지의식이 드라마 자체로 드러나는 캐릭터들이 있다. 그것은 ‘막돼먹은 영애씨’의 영애와 영채다. 둘은 서로 다른 외모로 똑같은 외모지상주의의 사회를 살아가고 있지만, 결국 비슷한 결론에 다다른다. 막돼먹은 영애씨가 살기 어려운 만큼, 잘 빠진 영채씨의 삶도 어렵다는 것. 결국 이 드라마는 이 둘의 대비와 거기서 얻어지는 한 가지 결론, 즉 ‘이 사회에서 여자로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한다. 영애와 영채가 굳이 자매애를 강조하지 않아도 한 가닥의 끈으로 연결되는 것은 그들이 이 시대를 사는 여성이라는 동지의식이다.

멜로 드라마들이 보여주었던 연애에 시청자들이 식상해했던 것은 어쩌면 그 연애 밑바닥에 공유되어 있는 남성중심의 사고방식이나 사회체계에 더 이상 공감하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현대의 여성들에게 참신하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아예 남성중심의 사고방식을 제거해버린 여성들만의 환타지(커피 프린스 1호점)를 그리거나, 그런 사고방식과 싸우는 여성들의 이야기(막돼먹은 영애씨)가 유리하다. 만일 드라마 속 자매들의 끈끈한 정에 마음을 빼앗겼거나, 자매들이 좀더 자매애를 보여줬으면 하는 생각이 든 적이 있다면, 그것은 당신도 그들과 한때 암묵적인 동지였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 시대, 연애보다 애틋한 것은 어쩌면 자매애다.

Posted by 더키앙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포스트 트렌디 드라마들
올해는 사극은 약진하고 현대극들은 주춤했던 한 해였다. 처음에는 월화 드라마를 ‘주몽’이 잠식하더니, 주말 드라마에 ‘연개소문’과 ‘대조영’이 포진하고, 수목 드라마마저 ‘황진이’가 장악하면서 현대극들은 설 자리를 잃었다. 이런 환경 속에서 과거 형태의 구태의연한 답습을 거듭하는 트렌디 드라마는 더더욱 살아남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꿋꿋이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은 드라마들이 있다. 시청률과는 무관하게 특별한 시도와 보다 높은 완성도를 무기로 이들은 우리네 머릿속에 깊이 각인되었다. 시청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며 ‘포스트 트렌디 드라마’의 징후를 읽게 해준 그 드라마들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웰 메이드 드라마, ‘연애시대’
‘연애시대’가 끝난 지 꽤 되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그 금단증상을 이야기한다. ‘연애시대’를 축으로 그 이전의 드라마가 있고, 그 이후의 드라마가 있다고 할 정도로, 스토리면 스토리, 연기면 연기, 연출이면 연출 어느 하나 군더더기 없는 이 드라마로 인해 여타의 드라마들이 어딘지 시시해 보인다는 것. 영화인들이 참여해 만들어낸 이 드라마는 드라마 제작에 있어서 사전제작에 대한 논의가 일어날 정도로 완성도를 높였다. 감우성, 손예진의 감칠맛 나는 연기에 주연만큼 빛났던 공형진, 이하나는 물론이고 김갑수, 서태화, 오윤아, 문정희까지 어느 조연하나 뺄 수 없이 드라마의 독특한 감미료가 되어주었다. 이러한 연기자들의 호연을 바탕으로 악역이 없는 대신 내적 갈등을 만들어 상황을 관조하게 하는 설정과, 충분한 공감을 일으키면서도 도발적인 ‘이혼 후 시작된 연애’라는 소재, 시간의 씨줄과 날줄을 엮는 연출력이 잘 어우러졌다. 이로써 ‘연애시대’는 지금까지 드라마가 해온 그 이상을 만들어내며 ‘웰 메이드 드라마’의 성공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새로운 내러티브의 실험, ‘굿바이 솔로’
최근 들어 종종 볼 수 있는 새로운 내러티브로서 다중스토리 구조를 들 수 있다. 하나 혹은 둘의 주인공 캐릭터가 나와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전통적인 스토리 구조가 아닌 여러 인물들이 똑같은 비중으로 각자의 이야기를 해나가면서 어떤 울림을 만들어가는 내러티브 방식이다. ‘러브 액추얼리’와 ‘숏컷’ 그리고 ‘크래쉬’라는 영화를 통해 우리는 그 현상을 목도한 적이 있다. 노희경 작가가 ‘굿바이 솔로’를 통해 무려 10여 명에 달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하게 된 것은 개인화되고 파편화되는 현대인들의 드라마 구조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전통적 스토리 구조가 역부족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해체된 가족으로부터 상처받은 이들 캐릭터들은 하나둘 카메라 속으로 모여들어 유사가족을 만들어낸다. 카메라 안으로 들어온 인물들은 서로 아파서 부둥켜안으면서 상처를 핥아준다. 노희경 작가는 이들 여러 인물들과 그들의 어우러짐을 주관 개입을 극도로 절제하면서 카메라 속에 넣는데 성공함으로써 이 시대 가족드라마(가족보다 이웃이 낫다)의 새로운 형식을 보여주었다.

드라마에 대한 만화적 접근, ‘환상의 커플’
만화적 감수성이 하나의 장르적 틀로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는 걸 보여준 드라마가 ‘환상의 커플’이다. 원작만화를 드라마화한 게 아니지만 만화만큼 재미있는 ‘환상의 커플’의 성공요인은 ‘만화 같은 이야기’가 더 이상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었다. 이제 더 이상 그 말은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라던가, 완성도가 떨어진다던가 하는 의미가 아니다. 이 드라마를 통해서 그것은 상상력과 캐릭터가 독특하며, 이야기 진행이 유쾌하면서도 나름대로의 진지성이 있는 긍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게 되었다. 특히 만화적 캐릭터를 제대로 소화해낸 한예슬은 수많은 유행어를 남길 만큼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 코믹 드라마는 기존 트렌디 드라마들의 상투적인 진지함을 벗어나 만화적 편안함과 유쾌함을 만들어주었다.

남자의 눈물을 보여준 ‘투명인간 최장수’
이른바 ‘남성신파시대’라고 불릴 정도로 극중에서 남자들은 눈물을 흘리고 있다. 이것은 과거와는 달라진 남녀의 사회적 위상이 반영된 결과. 드라마를 보는 주 시청자는 여성이지만 그들은 더 이상 우는 여성을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 따라서 하나의 현상처럼 나타난 것이 남자의 눈물이다. ‘투명인간 최장수’는 이 시대에 가족에게 있어 ‘투명인간’이 되어버린 가장의 이야기. 알츠하이머에 걸린 최장수를 통해 가족들에게 소중한 기억으로 남고싶은 아버지의 모습을 제대로 담아냈다. 이 사나이 울리는 신파 드라마는 그러나 웃으면서 우는 연기가 물에 오른 유오성으로 인해 아버지의 초상을 제대로 그려낸 신파 이상의 의미를 만들어냈다. 새로운 드라마 시청층의 가능성을 보여준 드라마이다.

장르의 폭을 넓힌 ‘돌아와요 순애씨’
‘투명인간 최장수’의 정반대편에 선 ‘돌아와요 순애씨’는 아줌마들의 웃음을 공략하며 인기를 끌었다. 이 40대 아줌마와 20대 처녀의 영혼이 바뀐다는 황당한 설정의 드라마는 그러나 그 전하려는 메시지에 있어서 아줌마들의 감성을 매료시켰다. 시트콤에나 가능할 것 같은 이러한 설정이 수목드라마에서 제대로 시청자들에게 소구한 것은 장르적으로 선택한 코미디에 진한 페이소스를 달아놓았기 때문이다. 드라마는 여자들의 연대에서부터, 생활력에서부터 만들어진 아줌마 속성에 대한 웃지 못할 풍자, 젊은 여자에 대해 갖는 남자들의 속물근성 등등 남녀 관계에 대한 다양한 시각들을 다룬다. 40대 아줌마에서 20대 처녀로 탈바꿈한 순애씨의 거침없는 비판과, 욕망의 분출은 TV 앞에 앉은 수많은 우리 시대의 아줌마들에게 커다란 카타르시스를 주었다. 새로운 시도에 대한 진지함이 시청자에게 얼마나 공감을 줄 수 있는가를 보여준 드라마다.

상큼발랄 아줌마 트렌디, ‘발칙한 여자들’
우리네 드라마 세상에서 아줌마들이란 ‘불륜’과 ‘신파’를 오가며 살아왔다. 하지만 ‘발칙한 여자들’이 꿈꾸는 세상은 끈적임 없는 상큼 발랄 경쾌한 세상이다. 과거 아줌마 이미지에서 기름기와 물기를 쪽 빼내 비로소 ‘여자’를 보기 시작한 드라마, 바로 ‘발칙한 여자들’이다. 이 질척하지 않은 발칙한 여자의 복수극이 상큼했던 것은 ‘스스로를 사랑할 줄 알고 경제적으로도 독립했고, 혼자서도 충분히 행복한 아줌마’ 캐릭터로부터 가능해진다. 자신을 사랑할 줄 알게된 여자는 이제 다른 남자들에게 사랑 받을 자격이 갖춰진 셈이다. 이로써 ‘발칙한 여자들’은 ‘아줌마의 사랑 = 불륜’이라는 악의적인 등식을 깨고 당당한 ‘중년여성의 사랑’을 보여준 드라마다.

사회적 편견과 맞선 진짜 트렌디, ‘여우야 뭐하니’
‘여우야 뭐하니’는 과거와는 달라진 사랑방정식으로 보여준 트렌디 드라마다. 이 드라마는 먼저 재벌집 아들도 아니고 신데렐라를 꿈꾸는 여자도 아닌 보통 남녀의 사랑으로 선회한다. 이 밋밋해 보이는 설정에 드라마성을 가미해주는 것은 최근의 결혼풍속도라 할 수 있는 연상연하 커플. 나이와 나이에 따른 현실 등이 사랑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사회적 편견과 맞선 트렌디라 할만하다. 결국 사랑이야기에, 그 사랑에서 선택해야할 것이 현실이 아닌 마음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드라마이지만 요즘의 트렌드를 제대로 읽어낸 진짜 ‘트렌디 드라마’라고 볼 수 있다.

그 밖의 다양한 시도들
이밖에도 저 김윤석이라는 배우의 가능성을 읽게 해주었던 ‘인생이여 고마워요’, 금요드라마는 불륜드라마라는 공식을 깬 ‘내 사랑 못난이’, 공백을 메꾸려 채워졌지만 호평을 받으며 사회드라마의 가능성을 보여준 ‘내 인생의 스페셜’, 최근 아직 종영하지 않았지만 불륜과 불치에 대한 새로운 공식을 써나가는 ‘90일 사랑할 시간’ 등등 열거하지 못한 많은 트렌디 드라마들의 시도가 있었다. 그것은 어찌 보면 주6일사극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으로 인해 더 치열했다고 말할 수 있다. 비록 시청률은 저 사극들의 빛에 가려졌지만, 보다 완성도를 높이려는 시도를 한 몇몇 드라마들이 있어 트렌디를 뛰어넘는 포스트 트렌디를 기대하게 만든다.

Posted by 더키앙

여우들은 그래도 마음가는 사랑을 한다

‘여우야 뭐하니’는 고현정의 파격적인 연기 변신과 함께 음지에 머물던 성을 드라마라는 장으로 끌어냈다는 데서 시작부터 호평과 비판이 잇따랐다. 그래서인지 이 드라마를 우리는 요즘 세대의 성 담론을 담은 드라마 정도로 생각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이제 드라마 종영에 와서 생각해보면 성 담론은 하나의 소재였을 뿐, 이 드라마가 하려는 이야기는 엉뚱한 곳에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그것은 요즘 30대 여성들의 일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33세 여성들의 고민
‘여자 서른, 자신있게 사랑하고 당당하게 결혼하라’의 저자이자, ‘노처녀 통신’ 운영자인 최재경씨는 현재 한국의 여성들은 노처녀의 연령대를 대체로 33세로 본다고 한다. 여성들이 결혼보다는 사회생활을 통한 자아성취에 더 가치를 두면서 ‘결혼은 서른 너머’라 생각하는 만혼이 무서운 속도로 증가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33세를 노처녀로 생각하는 걸 보면 서른을 넘으면서 나름대로 결혼에 대한 강박이 존재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최재경씨에 의하면 이 나이의 문제는 ‘괜찮은 총각들이 하나 둘 어린 여자들과 결혼을 해버려 결혼할 상대는 점점 줄어드는걸 알면서도 여자는 전혀 눈이 낮아지지 않는다는데 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당연하다. 자아성취를 위해 노력과 시간을 들여 얻은 지위와 재력, 학력 등으로 웬만한 평범한 남자로는 성에 차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우야 뭐하니’의 33살 고병희는 좀 ‘색다른’ 노처녀이다. 33살이지만 뭐 하나 이룬 것도 없고, 연애라는 걸 해본 적도 없다. 그렇다고 다른 여자들처럼 현실적으로 보이지도 않는다. 전작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작가는 그 ‘평범한’ 혹은 ‘평범 이하인’ 캐릭터가 가진 로망의 힘이 더 공감을 주고 설득력이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김삼순의 문제가 ‘뚱뚱함’과 ‘촌스러운 이름’에 있었다면, 고병희의 문제는 ‘나이’와 ‘현실적인 능력, 지위 따위’에 있다. 왜 작가는 하필이면 보통(?)의 노처녀가 아닌 이런 경쟁력 떨어지는 노처녀를 주인공으로 세운 걸까. 아마도 작가가 생각하는 33살이란 나이는 보통 여자들이 막연히 생각하는 그것과는 다른 모양이다.

나이가 무슨 상관이야
이 드라마가 마치 성 담론을 다루는 드라마처럼 보인 것은 나이에 늘 육체가 따라붙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면 몸도 늙기 마련이고 이것은 결혼이라는 문제에 봉착하면 더 구체화된다. 나이 차로 인해 결혼을 반대하는 것은 단지 그 숫자 때문이 아닌 ‘몸의 다름’ 때문이다. 직원인 오필교(박병선 분)가 어깨에 손을 얹자 ‘어머 주책이야’라고 조순남(윤여정 분)이 화들짝 놀라는 이유는 가장 큰 것이 외모에서 드러나는 나이 차에 대한 외부의 시선 때문이다. 이 드라마의 구도는 고병희와 박철수(천정명 분), 배희명(조연우 분)의 삼각관계와, 고준희(김은주 분)와 박병각(손현주 분)의 사랑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들의 사랑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벽은 바로 나이와 그 나이에 대한 주변의 시선들이다.

그러나 주책이라고 여기던 고병희가 드라마 중반 이후부터 박철수를 향해 ‘마음가는 대로하자’고 말하는 대목부터 드라마는 육체에서 마음으로 선회하며, 나이 따윈 중요하지 않다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이것은 고준희와 박병각도 마찬가지다. 드라마 상으로는 실제로 결혼과 같은 구체적인 결론은 나지 않았지만 이 드라마는 분명 나이가 아닌 마음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작가는 이들 캐릭터들의 몸의 나이와 마음의 나이가 다르다는 것을 통해 마음가는 대로해야 하는 확고한 이유를 보여준다. 고병희는 숫자로서의 나이가 주는 중압감에 사로잡혀 있을 뿐, 그 마음은 여전히 풋풋한 소녀이며, 박병각 역시 소년 같은 면모를 불쑥불쑥 보여준다. 심지어는 고병희의 엄마인 조순남은 아직도 오드리 햅번이 나오는 영화를 보며 소녀처럼 가슴이 설렌다.

현실 따위도 중요치 않아
아무리 소녀의 마음을 갖고 있어도 나이에서 오는 불안감은 여전하다. 그래서 배희명이라는 캐릭터는 이 불안한 마음을 파고드는 ‘현실과 안정’을 상징한다. 고병희가 처한 상황은 어찌 보면 ‘배부른 노처녀의 갈등’같지만, 거기서 그녀가 안정된 현실을 선택하기보다는 불안하지만 마음이 가는 사랑을 선택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 부분에서 ‘여우야 뭐하니’라는 생뚱 맞은 이 드라마의 제목을 이해할 수 있다.

우리 삶에서 33세 살 먹은 노처녀들을 여우에 비유하는 것은 그들이 고병희처럼 용기 있게 마음가는 사랑을 선택하지 않고, 사실은 나이, 현실, 조건 사람을 선택한다는 데 있다. 그런데 그것은 그녀들의 잘못이라기보다는 그 숫자에 대한 사회의 시선과 무언의 압력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먼저 스스로 나이가 주는 강박을 버리고, 마음을 직시하라고 한다. 그들에게 ‘여우야 뭐하니’하고 묻는 것이다.

사랑과 마음을 선택해야한다는 이 당연한 질문에도 불구하고 드라마의 긴장감이 흐트러지지 않은 것은 작가가 구축한 탄탄한 캐릭터와, 어디선가 보았던 인물처럼 느껴질 정도로 리얼한 연기를 해낸 주연에서부터 조연까지의 출연진들 몫일 것이다. 그러나 이 보다 더 큰 공감의 이유는 이 당연한 질문에 당연하지 않게 살아가게 되는 우리사회의 나이에 대한 편견이 그만큼 깊기 때문이 아닐까. 이 드라마는 나이, 현실, 조건을 자꾸 따지게 만드는 사회 속에서 여우들에게 용기를 내라며 등을 토닥여주는 드라마다.

Posted by 더키앙

너무 착해서 개성이 잘 안보이는 arboleda merlot


요즘은 착한 것보다는 개성 넘치는 것, 차라리 욕을 먹을 지라도 무언가 특색이 있는 것이 더 추앙 받는 시대입니다. 이미 착하다는 것은 그 어떠한 가치도 상실한 그 마지막에 겨우 꺼낼 수 있는 카드 같은 것이 되어버렸나 봅니다.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캐릭터들을 보면 알 수 있죠. 관심을 끄는 캐릭터들은 ‘싸가지가 없거나(환상의 커플의 한예슬)’, ‘막말을 한다거나(여우야 뭐하니의 고현정)’, 심지어는 ‘매력 가득한 악마(타짜의 김혜수)’같은 그런 캐릭터들입니다.

와인에도 그런 것들이 있습니다. 이른바 맛은 그런대로 괜찮은데 그다지 특징이 잘 보이지 않는 그런 와인 말입니다. Arboleda 시리즈 중에서 멜로가 그렇습니다. 칠레 와인의 명문가인 Errazuriz社와 미국의 명문가 Robert Mondavi社가 만났으니 그것은 칼리테라(Caliterra : ‘la calidad de la tierra’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quality(calidad)와 the finest land(tierra)를 의미한다)라는 칠레 와인의 아이콘 지역과 몬다비라는 명성과 노하우의 만남이 분명했을 터입니다. 아마도 Arboleda 시리즈의 까베르네 소비뇽 혹은 쉬라는 훌륭한 맛을 낼 것이 틀림없습니다.

멜로 85%에 까베르네 소비뇽 8%, 까르메네르 5%, 쉬라 2%의 이 와인은 멜로의 부드러움과 적절히 강한 까베르네 소비뇽의 거침, 그리고 달콤한 까르메네르의 초콜릿 향과 무거운 쉬라의 묵직함이 잘 조화된 와인임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뿐 이 와인만이 갖는 특별함을 찾기는 좀 어렵습니다. 너무도 착한 캐릭터의 느낌을 주는 것이죠.

그렇더라도 이 와인은 너무 강한 개성의 와인들을 주로 접하셨던 분이라면, 그저 편안한 친구와의 부담 없는 자리에서 내놓기 좋은 와인입니다. 특히 특별한 와인의 보조역으로 그만인 와인이죠. 그만큼 개성을 내세우지 않으니까 말입니다. 선물을 보내기 전 간단하게 마시는 와인이나, 두 병 정도의 와인을 마시는 자리에서 먼저 내놓는 와인으로 괜찮을 것입니다. 3만6천원대. 알코올은 14.2%입니다.

Posted by 더키앙

서민적이고 친근한 캐릭터, 시대의 요구

요즘 고현정의 변신에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쌍소리는 물론이고 망가지는 연기에서부터 거친 대사를 천연덕스럽게 소화해내는 새로운 면모들까지 고현정은 싹 달라졌다. 과거 우리의 머릿속에 남아있던 우아하고, 청순했던 이미지는 보이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고현정 스스로 그런 이미지를 깨려고 작정한 듯 하다.

‘봄날’ 이후 1년여의 장고 끝에 선택한 홍상수 감독의 ‘해변의 여인’ 역시 무엇보다 화제가 된 것은 고현정의 변신이다. 영화 속에서 고현정은 그간의 공백기간을 단 몇 마디의 꾸미지 않은 말과 거침없는 행동으로 채워버렸다. “차가 귀엽네요”라는 말에 “똥차예요”라고 답변하고,  “키가 크다”는 말에 “잘라버리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그녀에게서는 신선한 충격마저 느껴졌다. 기자시사회에서 그녀의 변신에 대한 기자의 질문에 “그런 건 일상용어 아니냐”고 되받아 칠 정도로 그녀는 자신의 맨 얼굴을 드러내고 싶어했다. 이러한 고현정의 변신은 ‘해변의 여인’이 주는 영화적 재미에서 상당부분을 차지하면서 동시에 영화가 전하려는 메시지에 일조했다. 홍상수 감독은 본인이 이 영화를 통해 전달하려고 했던 ‘상투적인 이미지에 대한 전복’을 고현정이라는 연기자가 가진 이미지의 파괴를 통해서도 보여주었다.

‘해변의 여인’의 이미지가 채 가시기도 전에, 그녀는 ‘여우야 뭐하니’로 다시 맨 얼굴을 내밀었다. 영화 속의 털털하고 화장기 없는 고현정이 이제는 TV로 들어온 것이다. 드라마 속에서의 고현정은 ‘해변의 여인’과 마찬가지의 파격을 보여주었다(아마도 영화를 보지 않았던 시청자라면 그 느낌은 배가 됐을 것이다). 그녀의 이러한 연속적인 행보는 다분히 의도적으로 보인다. ‘해변의 여인’에서 작품에 딱 맞는 연기자가 고현정이라는 인물이었듯이, 고현정에게도 ‘해변의 여인’은 자신의 이미지 변신에 딱 어울리는 작품이 분명하다.

지금 고현정이 하고 있는 작업은 귀족적이고 우아하며 청순한 과거의 이미지에서 보다 서민적인 이미지로의 귀환이다. 그것은 고현정 개인에게 의미 있는 일이다. 10년 전 정상의 자리에서 은퇴하고, 재벌가 며느리로의 변신한 그녀는 언론과의 끊임없는 숨바꼭질 끝에 결국 이혼하고 본업으로 돌아왔다. 그 10년 간 연기자가 아닌 고현정 개인으로서의 이미지는 서민과는 거리가 먼 상류층의 그것이었다. 물론 이것은 그녀가 만든 것이 아니다. 그녀를 보는 대중들의 막연한 상상으로부터 생긴 것이다. 따라서 그녀는 연기라는 친정으로 귀환하면서 먼저 이러한 자신의 이미지부터 부수기로 작정한 듯 하다.

이러한 고현정의 변신, 즉 청순하고 우아한 이미지의 파괴는 극중 캐릭터의 진정성이 잘 살아있는 작품 하에서만 가능하다. 다행히도 홍상수 감독의 ‘해변의 여인’은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다. 공감이 가는 작품 속 이야기에서 우리는 고현정의 파격을 ‘리얼함’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것은 드라마 ‘여우야 뭐하니’에서도 마찬가지다. 과거 ‘내 이름은 김삼순’이란 드라마에서 파티쉐라는 익숙하지 않은 직업을 리얼하게 드러냈듯이 ‘여우야 뭐하니’에서도 곳곳에 이런 리얼함이 엿보인다(잡지사, 산부인과 등등). ‘성담론’이라는 자칫 오해될 소지가 많은 소재가 오히려 당당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 ‘리얼함에서 오는 진정성’이 확보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속에서 고현정이 거침없이 얘기하는 속내는 마치 ‘섹스 앤 더 시티’의 ‘캐리’를 보는 듯 하다. 성 칼럼니스트로서 ‘섹스 앤 더 시티’의 캐리가 당당하고 적극적이면서도 귀엽고 발랄한 현대미국여성들이 요구하는 이미지를 잘 소화해냈듯이, 고현정이 연기하는 고병희는 우리 식의 적극적인 여성상을 통해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보다 서민적이고 친근한 캐릭터는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스타의 이미지이기도 하다. 과거 ‘선망’의 대상이었던 스타는 이제 ‘질투’의 대상이 될 정도로 시청자와 수평적인 관계를 요구한다. ‘비호감 연예인들의 인기’와 ‘연예인 생얼에 대한 뜨거운 관심’은 바로 스타와 시청자간의 새로운 관계를 말해주는 징후들이다. 이것은 ‘솔직함’ 혹은 ‘털털함’에 대한 시청자들의 요구와 연예인 스스로의 ‘자신감’이 잘 맞아떨어진 결과이다. 시청자들은 더 이상 연예인에게 ‘인형 같은 카리스마 혹은 신비감’을 요구하지 않는다. 대신 ‘바로 내 주변에서 살아있으면서도 여전히 아름다운 인간’을 요구한다. 그런 면에서 보면 고현정의 서민으로의 귀환은 당연하고도 잘 된 선택임에 분명하다. 그녀는 한없이 망가질 것이나 여전히 귀엽고 바로 내 옆집에 사는 여자 같으면서도 여전히 선망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Posted by 더키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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