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씨부인전

토일드라마 ‘옥씨부인전’이라는 사극이 그리는 건 왕이나 장군 같은 영웅이 아니다. 그렇다고 양반 자제들의 풋풋한 사랑 이야기도 아니고, 중인들의 성장드라마도 아니다. 이 사극의 주인공은 구덕이(임지연)라는 노비다. 구더기처럼 살라고 주인이 지어준 이 참혹한 이름의 주인공은 어린 시절 눈앞에서 병든 어미가, 바로 그 병들었다는 이유로 주인의 명에 의해 아버지의 손에 버려지는 걸 봤다. 그리고 그녀 역시 주인인 김낙수(이서환)의 딸 김소혜(하율리)와 혼담이 오가던 송서인(추영우)과 놀아났다는 누명을 뒤집어쓴 채 멍석말이를 당하고 급기야 김낙수의 수청을 들게 되자 그를 해하고 도망 노비의 신세가 된다. 

 

사극이 노비들의 삶을 다루고 있다는 건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그 첫 번째는 역사가 소외시킨 노비들의 삶을 사극이라는 허구적 장치를 통해 조명한다는 의미다. 역사는 노비들이 어떤 처참한 삶을 살아왔는가가 구체적으로 나와 있지 않고, 또 이름을 남긴 이들도 거의 없다. 왕 같은 권력자들의 전유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에 허구를 덧대는 장치를 가진 사극은 이처럼 소외됐던 이들을 담기 시작한다. ‘대장금’ 같은 작품이 궁녀이자 의녀의 삶을 재조명했고, ‘추노’가 노비들의 역사를 다시 그렸다. ‘육룡이 나르샤’ 같은 작품은 조선 건국에 이성계나 이방원, 정도전 같은 역사적 인물만이 아니라, 분이나 땅새 무휼 같은 민초들의 역할이 있었다는 ‘육룡’에 그들을 참여시키는 것으로 그려냈다. 마찬가지로 ‘옥씨부인전’은 조선사회에서 소외되고 핍박받았던 구덕이라는 노비의 삶을 따라간다. 

 

노비의 삶을 다루는 사극이 갖는 두 번째 의미는 그것이 현재적 관점에서 우리의 삶과 연결되고 또 공감대를 갖는다는 것이다. 조선이라는 계급 사회 속에서 태생적으로 노비의 삶을 살게 되는 이들의 아픈 이야기는, 현재의 자본으로 계급이 결정되어 살게 된 낮은 서민들의 삶과 공명한다. 그래서 이토록 핍박받는 구덕이가 양반가의 딸 옥태영(손나은)과의 운명적인 만남을 통해 그녀의 삶을 대신 살게 되는 서사는 지금의 서민들에게도 강력한 흡인력을 갖는다. 비록 거짓이고 가짜의 삶이지만 그렇게라도 다른 신분의 삶을 열망하게 되는 건 모든 성장의 사다리가 끊겨버린 현실에서 인지상정으로 받아들여진다. ‘옥씨부인전’이 극적 몰입감을 갖는 이유다. 

 

하지만 ‘옥씨부인전’은 그렇게 거짓으로라도 신분의 상승 욕구만을 그려내는 사극은 아니다. 구덕이와 연인 관계로 발전해갈 송서인은 정반대로 양반집 자제에서 벗어나 저잣거리 전기수의 삶을 욕망하는 인물이다. 그는 자신이 기생에게서 난 서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집을 떠나 예인의 삶을 선택한다. 아버지 송병근(허준석)은 그런 있는 그대로의 그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래서 송서인은 천승휘라는 예인의 이름으로 살아간다. 구덕이가 노비라는 개돼지보다 못한 삶을 벗어남으로써 진정한 자신의 삶을 찾으려 한다면, 송서인은 껍데기에 불과한 양반이라는 계급을 벗어버리고 저잣거리로 나와 사람들과 어울리며 살아감으로써 자신의 진짜 삶을 찾으려 한다. 결국 ‘옥씨부인전’이 구덕이와 송서인을 통해 그리려는 건, 신분 상승 욕구 같은 것이 아니라 ‘자신으로서 살아가는 주체적인 삶’이다. 그리고 이건 지금의 대중들이 원하는 것이기도 하다. 대단한 부귀영화가 아니라 나로써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삶.

 

‘옥씨부인전’의 이 만만찮은 서사는 1542년 프랑스에서 벌어진 남편이 뒤바뀐 실제 사기 사건을 판사 장드코라스가 기록한 ‘마르텡게르의 귀환’과 1607년 조선 선조 때 실제 벌어진 가짜 남편 사건을 모티브로 백사 이항복이 쓴 소설 ‘유연전’을 재해석해 탄생했다. 고전이지만 그 사건들이 모두 실제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인지라 그만큼 생생한데다, 이를 또다시 현재적 관점으로 재해석해낸 지점에서 작가의 만만찮은 야심이 느껴진다. 무엇보다 구덕이 역할에 미친 몰입감을 만들어내는 임지연의 연기가 압권이다. 진짜 노비 그 자체가 된 듯한 임지연의 연기는 사극이 처음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보는 이들을 울리고 웃게 만든다. 상대역할로 1인2역을 선보이는 추영우의 매력도 빼놓을 수 없다. 이들의 매력적인 연기는 시청자들로 하여금 ‘연민’의 감정을 파고들게 만들고 그들을 응원하게 만든다. 이들의 평범하지만 행복한 삶을 허락해 달라고. (글:일간스포츠, 사진:JTBC)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로 하려고 했던 이야기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글 중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새 작품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소년 마히토가 화재로 인해 어머니를 잃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 화재가 왜 발생했는지는 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무렵이라는 시기는 그것이 그냥 발생한 화재라기보다 폭격의 여파라는 걸 상상하게 한다. 마히토는 그 불길을 향해 달려가지만 어머니는 거대한 불기둥 속으로 사라진다. 

 

전쟁 상황과 화재라는 충격, 그리고 어머니의 부재에 대한 상실감은 그래서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작품이 갖고 있는 판타지의 전제가 된다. 판타지는 결국 현실의 결핍이나 충격에 의해 촉발되어 이세계(異世界)로의 통로를 통과하기 마련이다. 2차 세계대전 중 아이들이 장롱을 통해 나니아라는 곳으로 떨어지며 벌어지는 모험을 다룬 C.S.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가 대표적이다. 전쟁이라는 충격, 장롱이라는 통로, 그리고 이세계의 모험. 이건 판타지의 중요한 구조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려온 판타지의 세계들을 보면 그래서 터널을 통과하는 이야기가 많다. <이웃집 토토로>에서 메이가 처음 토토로를 만나게 되는 것도 무성한 수풀의 터널을 통과하면서였고,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도 치히로가 판타지 세계로 넘어가게 된 것 역시 수상한 터널을 통과하면서였다. 터널은 일종의 판타지의 통과의례로, 미야자키 하야오는 그 장치를 가져와 이세계로의 모험을 풀어간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역시 어머니가 화염 속에서 죽는 충격을 겪은 마히토가 어머니의 고향으로 와 말을 하는 왜가리의 인도를 받아 이세계로 넘어가는데 역시 터널을 통과한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판타지에는 어머니에 대한 서사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그건 아마도 실제 자신이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었던 경험 때문으로 보인다. 사라진 어머니를 찾거나 구하는 주인공의 이야기는 그래서 <이웃집 토토로>에서는 요양원에 있는 엄마를 회복시키고 싶은 아이들의 욕망으로 그려지고,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는 이세계에서 음식을 먹고 돼지가 된 부모들을 구하려는 치히로의 절박함으로 그려진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도 마찬가지인데 여기서 특이한 건 어머니의 죽음 때문에 갖게 된 충격과 상실에 더해져 고향에서 만나게 되는 새엄마에 대해 마히토가 복합적인 감정을 갖는다는 점이다. 이미 뱃속에 아이까지 가진 새엄마에 대해 마히토는 반가워하지도 그렇다고 분노하지도 않는다. 거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데, 그렇다고 무감정한 건 아니다. 특히 금세 새엄마를 들인 아버지에 대해 갖는 마히토의 감정은 이중적이다. 겉으로는 예의를 다하지만 그 속에는 분노 또한 감춰져 있다. 

 

전쟁 상황에 전투기 덮개를 제조해 납품하는 공장으로 큰돈을 벌고 있는 아버지. 어찌 보면 어머니의 죽음은 아버지가 하고 있는 일과 무관하지 않을 테다. 전쟁은 결국 그런 무기들의 개발, 제조와 관련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본의 막부 시대가 저물고 메이지유신을 촉발시킨 쿠로후네 사건만 봐도 알 수 있다. 결국 미국의 페리 제독이 서양의 신식 증기선 전함을 끌고 와 일본의 개항을 요구했던 이 사건의 이면에는 새로운 무기 기술이 바탕이 되지 않았던가. 

 

그래서 어머니가 사망하고 아버지가 새 엄마를 들이고 심지어 동생까지 임신하게 된 데 대해 갖는 마이토의 복잡한 감정은, 그 개인서사를 넘어서 그 이면에 담긴 전쟁 같은 역사적 사건들과 연결된다. 어머니의 고향에 있는 학교의 첫 등교 때부터 자동차를 끌고 가 시골 아이들의 기를 꺾으려는 아무 생각 없는 아버지는 무기가 되기도 하는 기술과 그걸로 갖게 되는 힘을 낙관하는 인물이다. 심지어 희생이 따르더라도. 

 

하지만 마히토는 아버지가 공장에서 만든 전투기 덮개를 보며 감탄하고, 자신 또한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아 칼로 나무를 깎아 활과 화살을 만드는 재능을 보이지만 그러면서도 어딘가 상처와 죄책감 같은 걸 느끼는 인물이다. 영화에서는 대사 없이 원거리 샷으로 동네 아이들과 마히토가 실랑이를 벌이다 싸우는 장면이 등장하지만 그건 당연히 아버지와 관계된 갈등 때문이라고 보인다. 그 동네의 유지지만 무기 제조를 해서 전쟁에 일조한다는 사실이나, 어머니가 죽고 곧바로 새엄마를 들인 사실은 마히토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 아닐까. 그래서 동네 아이들과 싸우고 나서 그 이유를 그는 아버지에게 말하지 않는다. 대신 돌멩이 하나를 들어 제 머리를 찧고 피를 흘린다. 

 

마히토가 가진 아버지와 새엄마에 대한 양가적 감정은, 새로운 기술과 그 혁신을 통해 만들려는 새로운 체제에 대해 미야자키 하야오가 갖는 양가적 감정 그대로다. 그것에 매혹되거나 이끌리면서도 동시에 그것이 파괴한 것들(어머니)에 대한 회한과 안타까움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 양가적 감정은 마히토가 이제 사라진 새엄마를 찾아 하늘에서 떨어졌다는 탑으로 들어가는 통로를 통해 모험하게 되는 이세계의 풍경들을 만들어낸다. 

 

마히토가 만나게 된 이세계는 이질적인 것들이 겹쳐져 있다. 삶과 죽음이 겹쳐 있고, 인공과 자연이 뒤엉켜 있으며, 창조와 파괴가 동시에 일어난다. 그 세계를 인도하고 그 세계를 채우고 있는 존재들이 왜가리, 펠리컨, 잉꼬 같은 새들이라는 점도 그렇다. 새는 하늘과 땅의 경계를 오가는 은유적 동물이다. 마히토가 만나는 새들은 그래서 자유의 상징처럼 하늘을 유영하는 듯 보이지만, 동시에 먹을 것이 없어 저세계의 생명으로 변화할 와라와라까지 잡아먹는 생존에 구속된 존재로도 또 떼로 몰려다니며 본능에 휘둘리는 존재로도 그려진다. 

 

와라와라를 구하기 위해 불길을 솟구치게 해 펠리컨을 공격하는 히미 역시 펠리컨만을 떨어뜨리지는 않는다. 그 과정에서 와라와라들도 불타 죽게 되는 것. 불을 만들어내는 무기로도 활용되는 기술은 그렇게 무차별적이다. 심지어 선의조차 누군가에게는 악의가 될 수밖에 없다. 이세계로 표현되는 마히토의 감정은 그래서 아버지가 낙관하는 기술에 대한 회의와 의심을 드러낸다. 

 

결국 그 세계로 들어간 새엄마와 뱃속의 동생을 구하기 위한 모험에서, 마히토는 그 곳에서 거대한 바위가 공중에 떠 있는 그곳에서, 도형으로 된 블록을 쌓아 균형을 맞추려는 오랜 선조인 외할아버지를 만난다. 그 할아버지는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탑에 매혹되어 그 탑을 둘러싸는 건물을 짓고 그 안에 책 속에 파묻혀 살다가 사라진 인물이다. 아마도 막부 시절 막강한 부와 권력을 누렸을 것으로 보이는 이 인물의 등장은 서구 열강의 등장으로 서구의 과학기술과 사상을 통해 메이지 유신을 하려했던 그 혁신의 끝단이 과연 성공할 수 있는가를 묻는다.

 

이세계로 넘어와 서구의 사상과 기술을 받아들여 완벽한 세계를 꿈꿨지만 그 결과는 금세라도 무너질 것처럼 아슬아슬한 균형 아래 놓여있다. 그걸 상징하듯 도형모양으로 쌓여 아슬아슬하게 세워져 있는 블록의 균형을 맞추는 일을 할아버지는 마히토에게 제안한다. 자신이 실패한 것을 후대가 완성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나타난 펭귄 대왕이 휘두른 단칼에 그 블록이 무너져 내리고 그래서 이세계가 무너지는 광경은 그것이 얼마나 위태롭고 허망한 일인가를 드러낸다.

 

결국 판타지는 떠났던 자가 그 환상의 세계로부터 다시 현실로 복귀하는 서사 구조를 갖는다. 마히토는 이세계의 대혼돈을 경험하고 그 곳에서 새엄마를 찾아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그런데 떠나기 전 마히토가 가졌던 그 복잡한 심경들은 이세계의 모험 과정을 통해 정답은 아니지만 어떤 해답을 찾아낸다. 새엄마를 구하기 위해 찾아 나선 모험이지만 그 곳에서 만나게 된 소녀였던 엄마가 결국 훗날 화염 속에서 죽을 걸 알면서도 현실로 돌아가는 그 선택을 통해서다. 그건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갈구나 혁신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일들이 아이러니하게도 세상을 파괴하기도 하는 이 혼돈 속에서도 판타지라는 환상에 빠지기보다는 현실을 직시하고 외면하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혹자들은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군수업자 아버지의 모습이나, 펠리컨이 와라와라를 잡아먹으며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다는 대목 등을 통해 이 작품이 일본의 군국주의를 미화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보다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실제 겪었던 어린 시절의 사적 경험들을 모티브로 해서 막부 시대에서 메이지유신으로 넘어오는 일본의 역사적 변화가 만들어낸 현재를 판타지를 통해 담아낸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즉 그건 군국주의 미화보다는 그런 선택이 결국은 실패했고 그러니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묻는 것에 가깝다. 친절한 작품이 아니고 은유와 상징이 많이 들어 있어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해석도 호불호도 나뉠 수 있는 작품이지만, 사적인 이야기와 역사 그리고 지금껏 해왔던 판타지의 세계까지 하나로 품어낸 야심작이 아닐 수 없다. (사진:영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부진했던 JTBC 드라마들과 ‘재벌집 막내아들’은 뭐가 달랐을까

재벌집 막내아들

올 한 해 JTBC 드라마는 “부진했다”는 표현이 정확할 게다. 물론 작품성이 뛰어난 드라마가 없었던 건 아니다. 대표적으로 도드라지는 작품이 박해영 작가의 <나의 해방일지>다. 이 작품은 올해 기억될 드라마라고 해도 될 법한 깊이를 보여줬지만, 그렇다고 대중적으로 성공한 작품이라고 말하긴 어렵다. 입소문으로 6%대(닐슨 코리아)에 이르는 시청률을 거뒀지만 두 자릿 수 시청률은 요원했다. 

 

이런 사정은 작년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괴물>, <구경이>, <인간실격> 같은 완성도 높은 작품이 있었지만 세 드라마 모두 최고 시청률은 각각 5.9%, 2.7%, 4.1%에 머물렀다. 그간 <밀회>나 <부부의 세계>, <SKY캐슬> 같은 완성도도 높고 대중성도 확보했던 드라마들을 내놨던 JTBC로서는 너무나 타율이 떨어지는 성적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새로 시작한 JTBC 금토일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은 그 편성부터가 공격적이었다. 주 2회 편성인 보통의 경향과 달리, 금토일 3회 편성을 시도했다. 그만큼 작품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겠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이러한 공격적인 편성은 첫 주에 이미 효과를 거두었다. 첫 회 시청률 6%에서 2회 8.8% 그리고 3회에 10%를 돌파하며 드라마를 궤도에 올려놓은 것. 

 

<재벌집 막내아들>에 대한 이러한 확신은 작품을 보다보면 금세 고개가 끄덕여진다. 이 작품은 최근 웹툰이나 웹소설에서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하고 있는 ‘회귀물’이다. 죽은 이가 과거로 되돌려져 다시 살아가게 되는 판타지 장르. 이른바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어)’ 정서를 자극하는 이 장르는 인생 자체를 리셋해서 다시 살아보고픈 이 시대 민초들의 마음을 건드린다. 이른바 ‘수저계급’이 이야기 될 정도로 태생적으로 삶이 결정되는 현실이 아닌가. 

 

윤현우(송중기)는 순양그룹 미래자산관리팀장이라는 그럴 듯한 직책을 갖고 있지만, 실상은 오너가의 갖가지 리스크들을 관리하고 해결해주는 머슴에 가깝다. 그런 그가 회사의 숨겨진 자산을 회수하기 위해 해외에 나갔다가 괴한들에게 납치되어 살해당한다. 보통의 드라마라면 여기서 비극적인 엔딩이어야 하지만 회귀물은 여기부터가 시작이다. 죽었던 그가 1987년으로 회귀해 순양그룹 오너가 진양철(이성민) 회장의 막내 손자 진도준(김강훈)으로 깨어난 것. 

 

이미 한 번 살아봤기 때문에 당대에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다 알고 있고, 순양그룹의 속사정 또한 속속들이 알고 있는 이 꼬마는 놀라운 감으로 진양철 회장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1987년 6.29 선언 이후에 직선제로 치러진 대선에서 노태우가 당선될 걸 알고 진양철 회장에게 직접 비자금을 전달하라 조언하고, 대한항공 폭파 사건에서 죽을 위기에 처한 진양철 회장을 메모 하나를 남김으로써 구사일생으로 살아남게 해준다. 진양철 회장에게 그 보상으로 대신 분당에 땅을 받은 그는 몇 년 만에 그 부동산으로 240억을 벌어들인다. 회귀물이 갖고 있는 다시 사는 삶이어서 뭐든 해낼 수 있는 그 판타지가 시청자들을 사로잡는다. 

 

이 작품에는 8,90년대에 대한 복고가 끌어내는 정서적인 매력 또한 담겨 있다. 아날로그적인 영상과 당대를 떠올리게 하는 음악, 스타일 등이 지금의 ‘뉴트로’ 트렌드를 자극한다. 이를 세련되게 보여주는 배우 송중기나 신현빈의 역할도 빼놓을 수 없다. 게다가 이성민부터 김현, 윤제문, 김정난, 김남희, 조한철, 서재희, 김신록, 김도현, 정희태, 허정도 등등 만만찮은 중견 배우들이 포진해 극에 긴장감을 높이고, 이들 속에서 종횡무진 활약하는 어린 주인공(김강훈에서 송중기까지)들의 대결구도는 흥미진진해진다. 

 

무엇보다 극의 중심을 잡아주는 이성민의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단단한 카리스마와 그 단단함을 순식간에 풀어내 껄껄 웃게 만드는 송중기의 천진함이 묘한 긴장감과 훈훈함을 오간다. 이러니 드라마가 확신을 가질만하다. 판타지가 있고 시대극적 요소와 복고가 더해진데다 삶을 재설계하는 스토리가 주는 묘미가 있다. 여기에 윤현우와 다시 태어난 진도준 모두 누군가의 사주에 의해 살해당했다는 사실은 이 문제를 주인공이 향후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에 대한 궁금증 또한 불러일으킨다. 일종의 복수 서사도 더해져 있는 것. 

 

3회 연속 편성에는 그만한 자신감이 있었다고 보인다. 그러고 보면 <재벌집 막내아들>이라는 다소 평이한(어찌 보면 일일드라마 제목 같은) 제목도 그런 자신감의 표현처럼 보인다. 어쨌든 약 2년간에 걸쳐 부진의 늪에 빠져 있던 JTBC 드라마가 단 3회 만에 부활했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JTBC측에서 ‘대중성’을 중심에 놓고 라인업을 세우겠다고 했던 그 말들이 진심이었다는 게 실감나는 결과다. 과연 <재벌집 막내아들>은 어디까지 나갈 수 있을까. 이제 시작에 불과하지만 벌써 어떤 성과를 거둔 작품이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사진:JTBC)

'유퀴즈'가 소개한 김동우 사진작가가 보여준 역사란

 

그는 기자라는 직업을 접고 2년 간 전 세계를 돌면서 독립운동 유적지를 찾아다니며 사진을 찍었다고 했다. 김동우 다큐멘터리 사진가의 이야기다. tvN <유 퀴즈 온 더 블록>이 8.15 광복절을 기념해 특집으로 기획한 '남겨진 이들의 역사'편에서 그는 그간 찍었던 사진들을 하나하나 보여주며 거기 담겨진 숨은 역사의 이야기들을 들려줬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해외의 독립운동의 이야기들도 있었지만, 너무나 생소한 이야기들도 적지 않았다.

 

이런 역사들이 어째서 기록으로 남아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았을까. 사실 김동우 사진가가 이 일에 뛰어든 것 역시 바로 이런 안타까움을 충격적으로 접하고 나서였다고 한다. 인도 델리의 레드포트라는 곳을 찾아갔다가 그 곳에서 1943년 아홉 명의 광복군들이 파견되어 영국군들과 같이 훈련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런 사실을 전혀 몰랐던 데 놀랐다는 것이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군의 요청에 보내진 그들은 적은 숫자지만 훈련 후 실제 미얀마 전선에 파견되어 일본군에 대항해 큰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들이 참전한 데는 전후 연합군 참전국 지위를 얻어 독립을 주장하기 위함이라는 중대한 이유가 있었다. 그 사실을 접한 김동우 사진가는 너무 놀랐고 자신은 이런 역사를 "왜 교과서에서 배우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고 그것이 다큐멘터리로 이 작업을 하게 된 계기가 됐다고 했다.

 

멕시코 살리나 크루즈 해변에서 수평선 저편을 바라보고 있는 자신을 찍은 사진은 1905년 제물포에서 멕시코로 떠난 1033명의 한인들의 아프지만 숭고한 역사가 담겨 있었다. 우리에게는 '애니깽'으로 잘 알려져 있는 그 역사. 마침 경술국치로 돌아갈 고국이 사라진 이들은 그 곳에서도 고국을 그리워하며 그들만의 방식으로 독립운동을 이어나갔다.

 

그가 어스름 해가 떠오르기 직전에 찍은 에네켄(애니깽이라는 말이 여기서 나옴)이라는 선인장 사진은 새벽 5시면 나와 일을 했던 당시 선조들의 고단한 삶이 묻어났다. 그분들은 계약기간이 끝난 후에도 숭무학교라는 독립군 양성학교를 만들었고, 독립운동을 후원하는 모금 운동도 해나갔다고 한다.

 

그는 전 세계의 독립운동가 후손들을 만나 사진을 찍기도 했는데, 그 사진들 속에는 인물을 흐릿하게 지워지는 형상으로 담겨 있었다. 그것은 역사에 대한 우리의 기억이 그러하지 않을까 하는 걸 표현한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우리는 교과서에 담겨있는 역사들조차 잘 기억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하물며 기록에조차 남겨져 있는 역사라면 어떨까.

 

만주 왕칭현의 동굴 벽에 그려진 태극기 사진도 그렇게 기록하지 않으면 지워질 지도 모르는 역사가 아닐 수 없었다. 첩첩산중을 힘겹게 오르고 올라야 마주하는 그 동굴 벽에서 김동우 사진가는 그 태극기 벽화와 대한독립군이라는 지칭 아래 적힌 이름들을 마주하곤 목이 메었다고 한다. "나라가 뭐하고 이렇게 하셨을까 싶은데 그분들 덕에 지금이 있는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교과서를 통해서만 접하던 당대의 역사는 만주와 상해만을 독립운동이 벌어졌던 곳으로 기억하게 만드는 면이 있다. 김동우 사진가가 사진을 통해 보여준 것처럼 하와이 같은 곳에서 벌어졌던 우리네 최초의 공군을 시도했던 현장들에는 푯말 하나 남아있지 않아 그 역사 자체가 지워질 위기에 놓여 있었다.

 

김동우 사진가의 사진은 그래서 우리가 봐온 역사가 얼마나 반쪽짜리였던가를 새삼 깨닫게 해준다. 그런 기록과 이를 통한 기억이야말로 지금의 우리가 어떻게 이 자리에 이런 모습으로 서 있을 수 있게 된 것인가를 제대로 알 수 있는 일이 아닐까. 김동우 사진가의 사진에 담긴 그 노력의 가치 앞에 유재석도 조세호도 깊은 공감을 하게 된 이유다.(사진: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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