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연예인과 대중을 싸잡아 비하하나

광우병이 의심되는 미국 쇠고기 수입에 대해 연예인들이 자신의 의견을 블로그나 카페에 올린 것을 가지고 언론들은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것 같다. 이유는 연예인들의 이성적이지 않은 감정적인 대응이 대중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것이다. 몇몇 언론들은 이 연예인들이 대부분 최근 활동이 뜸하다는 점을 들면서, 연예인들의 이런 대응을 마케팅의 일환으로까지 몰고 가는 형세다.

물론 어느 정도 그런 면은 없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간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았던 연예인이라면 이러한 민감한 사안에 대해 거침없는 의견을 내보이는 것으로 시선을 끌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꼭 그런 식으로만 보아야 할까. 달라진 미디어 환경 속에서 연예인들이 자신의 삶과 관련된 이 사안에 대해 솔직한 이야기를 했다고 볼 수는 없을까.

중요한 것은 이 자체가 설혹 마케팅의 요소가 끼여들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결국은 대중과의 공감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연예인의 발언은 그것이 인기발언이든 아니면 진심이든 모두 대중의 정서를 따라서 한 것이다. 즉 언론들이 걱정하는 것처럼 영향력 있는 몇몇 연예인(이들의 논리로 보면 활동도 뜸했기에 영향력도 별로 없다)의 힘으로 대중 정서가 움직인 것이 아니라, 대중정서와 함께 연예인이 동참한 것뿐이라는 점이다.

오히려 이들 연예인들의 발언에 대한 몇몇 언론들의 불쾌한 심사는 다른 곳에 있는 것 같다. 이들 언론들은 ‘연예인-블로그-인터넷’을 어떤 비슷한 수준으로 몰아대는 경향이 있다. 즉 ‘가볍고 천박한 그 무엇’으로 치부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폭발적으로 확산되는 인터넷의 영향력을 보는 눈에는 스타로서의 연예인을 보는 눈과 비슷한 지점이 있다. 강력한 힘을 발휘하지만 낮게 보고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득권을 가진 기관이나 언론들이 대중을 보는 눈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권위와 신뢰’를 운운하면서 언론이나 정부기관들은 아직도 자칭 어른으로서 아이 같은 이 가벼운 존재들에게 회초리를 꺼내들기 일쑤다. 맞다. 이들은 참 아이 같다. 그래서 어른들처럼 이성적으로 판단하기보다는 감정적으로 나오기 일쑤며, 품위 있고 정제된 논리 정연한 글보다는 과격하게만 보이는 비문 가득한 글들을 쏟아낸다. 함부로 글들을 긁어다가 여기 저기 도배를 해놓는 건 일상이고, 그걸 가지고 대단히 창조적인 방법으로 괴담에 가까운 확대재생산을 해내기도 한다. 기득권을 가진 자가 스스로를 어른이라 자처하며 그 눈으로 삐딱하게 보면 대중들은 통제하기 어려운 불량아가 된다.

그러니 어른이라 자처한 자들은 이 아이 같은 대중들을 이해시키고 설득시켜야할 의무가 있다. 그것이 아니라면 강제만을 통한 독단의 길이 될 수밖에 없다. 미국 소고기 수입에 대한 갑작스런 결정은 아무런 설득도, 사전 이해도 구하지 않은 채, 마치 불도저식으로 저지르고 보는 개발시대의 그것을 닮아있다. ‘정했으니 따라 오라’는 것이 그 때의 논리였다. 그 때 연예인들은 어떤 역할을 했던가. 불행히도 그 때의 역할이란 오락과 재미로 대중들의 정치에 대한 무관심을 유도하는 것이었다. 그 때와 비교하면 지금 연예인들의 행동은 굉장한 진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니 그 시대를 경험했고 아직도 그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착각하는 기득권층들에게 연예인들의 정치적 성격을 띨 수도 있는 이러한 발언이 얼마나 위험하게 비춰질지 알 수 있는 일이다. 아직도 그들에게 정치란 생활이 아닌 국회에서 하는 일이고, 몇몇 엘리트들에 의해 결정되고 대중들은 따라오는 것이라 믿고 있는 건 아닐까. 마치 ‘연예인은 연예나 하라’는 말처럼 들리는 일부 언론들의 반응은 또한 ‘대중들은 1%의 기득권 엘리트들이 한 결정을 따르라’는 뉘앙스로도 읽힌다. 연예인도 TV가 아닌 자기 삶의 문제로 돌아오면 언제나 대중의 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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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 전반에 충격을 주고 있는 학력논란이 ‘또 연예인 카드인가’하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신정아 전 동국대 교수의 학력위조 사건 이후 불거져 나온 학력논란은 문화계, 종교계, 교육계, 연예계 등등 사회 전반에 걸쳐 터져 나왔다. 기자들에게 이것은 때아닌 특종 어장으로 인식되면서, 경쟁적인 검증이 시작됐고 하루 자고 일어나면 ‘누구누구 학력파문’하는 기사들이 일상처럼 보도되고 있다.

누구보다 더 주목받을 수밖에 없는 이들은 연예인들이다. 직업이 얼굴을 늘상 대중들 앞에 내미는 것이기에 그렇다. 게다가 연예인들은 사실상 이미지를 통해 먹고사는 직업인지라, 거짓이 밝혀지는 순간 그 반향도 상대적으로 클 수밖에 없다. 타 직업 종사자들보다 충격이 크다는 얘기다. 거짓이 밝혀졌을 때 조금이라도 변명을 했다손 치면, 더 많은 뭇매를 맞을 수밖에 없는 게 연예인들이다.

거짓을 거짓이라 밝힌 기자들이나, 그것이 미필적고의라 하더라도 거짓에 대해 당사자인 연예인이 사과하고 응당의 처분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이 일련의 과정이 충격적이어서 주목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왜 매맞는 연예인이 희생양처럼 느껴지는 것일까. 학력논란의 핵심은 정부나 교육기관 같은 기관들의 교육인증시스템이 잘못됐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이 부분은 슬쩍 넘어가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는 걸까.

학력논란은 실력이 아닌 학력이 잣대가 되는 사회가 양산한 기형아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사회를 만들어낸 원인제공자들은 왜 얼굴을 숨기고 있을까. 사실 대학은 연예인들의 얼굴을 활용해 자신들의 학교를 홍보한 전력이 있다. 실상 대학들에게 유명 연예인의 입학이 일반인들과 똑같은 기준으로 허용되었는가를 묻는다면 여기에 당당할 곳이 있을까. 그런 면에서 대학과 연예인들은 상당부분 학력사회에 공조해왔다고 할 수 있다.

연예인들의 얼굴에 학력이란 이미지를 부가시켜 대학의 얼굴로서 활용하기도 했던 것이다. 대학이 가진 교육인증시스템의 문제는 이들 연예인 혹은 연예인에 가까운 유명인사들을 자신들의 대학에 검증 없이 세웠다는 데서도 드러난다. 그들 중에는 물론 학력은 거짓일망정 충분한 실력을 갖춘 이들도 있었지만, 대학이 그들을 강단에 세운 이유는 명백하게 그 얼굴이 필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한 학기에 적게는 4백만 원에서 많게는 6백만 원까지 등록금을 받아 가는 대학은 학력사회와 맞물려 이제 가난한 자들이 더 가난해질 수밖에 없는 여건을 제공하고 있다. 혹자들은 대학이 학력 장사하는 곳이 되었다 개탄하기도 한다.

물론 어느 순간부터 사회의 얼굴로서 기능하기 시작한 연예인들이 거짓을 말한 그 도덕적 해이는 용서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문제가 드러나자 그 얼굴만을 내세우고 뒷전에서 “그런 일이 있었는지 몰랐다”는 투로 일관하는 교육기관들 역시 거짓 변명하는 연예인만큼 비판받아 마땅하다. 어차피 문제가 된 이상, 이 문제를 학력사회에서 실력사회로 넘어가는 계기로 만들 필요가 있다. 그러려면 이에 대한 많은 논의들과 대안들이 사회 각계에서 만들어져야 한다. 지금처럼 한 때 마녀사냥식의 몰아치기, 그것도 연예인들에게만 집중되는 논란은 자칫 본질을 흐릴 위험이 있다.

돈더미 앞의 금나라 혹은 연예인들

역시 돈의 위력은 대단하다. 드라마 ‘쩐의 전쟁’은 마동포(이원종)가 사무실 지하비밀금고에 숨겨둔 돈더미로 첨예한 긴장을 유발하고 있다. 숨기려는 자와 찾으려는 자의 두 욕망이 부딪치면서 시청자들은 돈에 대한 은밀한 쾌감을 만끽하는 중이다. 마동포가 숨겨놓은 돈이 몇 장의 수표도 아니고, 은행계좌의 수치도 아닌, 만 원짜리 돈더미란 점은 금나라(박신양)가 그 돈을 찾는 이야기를 자본주의라는 섬에서 보물을 찾는 이야기로 환원시킨다. 돈 다발이란 구체적인 돈의 형태는 수치로 포장된 자본주의 사회의 속살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봐야 할 것이 그것은 보물이 아니고 돈이라는 점이다. 보물이야 낭만이라도 있겠지만, 돈 다발은 무언가 어둡고 음침한 구석이 있다. 그것도 사채업으로 서민들의 고혈을 짜내서 모아진 돈 다발은 더욱 그렇다. 비공개적인 돈의 흐름이 가능한 돈 다발에는 사실 그 돈을 벌기 위해 떨어진 땀 냄새보다는 누군가 흘린 피 냄새가 더 진동한다. 그 돈더미 앞에서 금나라는 갈등한다. 아니 그 어느 누구라도 그 앞에서는 갈등하게 될 것이다.

마동포가 서민들의 희망을 짓밟아가며 지하 비밀금고에 쌓아놓은 돈 다발의 적나라함은, 연예인들의 이미지를 덧씌운 대부업체 광고의 포장을 벗겨버린 이 드라마의 적나라함을 고스란히 닮았다. 손만 뻗으면 자기 손에 잡히는 그 돈 다발 앞에서 갈등하는 금나라의 모습은, 대부업체들의 광고 앞에 선 연예인들을 연상케 한다. “무이자 무이자-”를 외치며 유혹하는 돈은 자칫 이미지 실추라는 살인적인 이자로 되돌아올 판이다.

적어도 ‘쩐의 전쟁’을 두고 드라마는 그저 드라마일 뿐이란 얘긴 하지 못할 것 같다. 연예인들은 줄줄이 대부업체와의 광고 계약을 거절하거나, 취소했고, 대부업체들은 벗겨진 실체로 인해 추락된 이미지를 금리인하라는 최후(?)의 방법으로 넘어서려 하고 있다. 정치권에서도 살인적인 이자율에 대한 제도적인 장치가 필요하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쩐의 전쟁’의 인기는 이런 현실까지 움직이는 리얼한 스토리, 연출, 연기 때문이거나, 드라마가 그리는 현실 자체의 지독함 때문이다. 혹은 그 둘 다일 수도 있다.

이 드라마는 그저 ‘쩐’을 다루는 게 아니고, ‘쩐의 전쟁’을 다룬다. 즉 쩐에도 ‘좋은 쩐’과 ‘나쁜 쩐’이 있어서 서로 전쟁을 벌인다는 말이다. 이것은 단순한 선악구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돈이란 욕망에서 얼마나 자유로운가가 그걸 구분하는 기준이다. 금나라는 바로 그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물이다. 드라마 속 대사대로 “법보다는 주먹이 앞서고, 주먹보다는 돈이 앞서는” 세상에서 돈의 욕망을 포기한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드라마가 그리는 쩐의 전쟁의 승리자는 아마도 그 욕망으로부터의 자유를 얻은 사람이 아닐까. 돈더미 앞에 앉아 갈등하는 금나라도, 많은 연예인들이 광고라는 유혹의 쩐의 전쟁 속에서 포기함으로써 승리한 그 어려운 길을, 걸어가게 될까.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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