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전사극, 팩션... 상상력이 역사를 앞지르다

사극은 이제 역사책을 들춰보기보다는 역사의 빈 자리를 찾아다닐 지도 모르겠다. 2008년도에도 여전히 퓨전사극의 바람은 거셌다. 상반기를 주도한 ‘이산’과 ‘왕과 나’는 기존 왕 중심의 사극에서 ‘나’ 중심의 사극으로 위치이동을 실험했다. ‘이산’은 정조를 다루되, 왕으로서의 정조가 아닌 이산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사람으로서의 정조를 다루었고 ‘왕과 나’는 왕 중심이 아닌 김처선이라는 내시의 눈을 빌어 역사를 바라보았다.

이러한 시점의 위치이동은 대중들의 달라진 역사에 대한 의식을 반영한 것이었다. 왕조중심의 역사만이 정사로서 인정받는 시선에서 벗어나, 다양한 관점의 역사에 대한 관심이 그만큼 높아진 탓이다. 확실히 달라진 점은 과거라면 사극의 역사왜곡이라는 논란이 불거져 나왔을 상황이지만, 올 들어 이 같은 논란은 상당히 잦아들었다는 점이다. 그만큼 사극이 이제는 역사와 동격의 의미에서 점점 벗어나 하나의 드라마로서 굳어가고 있다는 방증이다.

그런 면에서 ‘쾌도 홍길동’과 ‘일지매’는 아예 소재 자체를 허구에서 끌어들여 무거운 역사의 갑옷을 진즉에 벗어 던지고 상상력을 향해 달려갔다. 무희들이 테크노를 추며, 상투 대신 장발을 멋지게 늘어뜨리고 선글라스를 낀 주인공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쾌도 홍길동’은 젊은 시청층을 사극 속으로 끌어들였다. 사실적인 묘사가 아닌 표현주의적인 연출을 보여주면서 ‘쾌도 홍길동’은 사극 역시 모던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한편 ‘일지매’는 서양류의 영웅담을 우리 식으로 해석한 사극이다. 자신만의 아지트를 갖고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채, 탐관오리들의 창고를 털어 배고픈 서민들에게 나눠주는 모습은 가히 한국형 슈퍼히어로를 떠올리게 했다. 촛불시위를 연상케 하는 장면들을 통해 사극 속에서 현 시대의 담론까지 담아내는 모습은, 이제 사극이 어떤 옛 이야기를 넘어서 지금 트렌드에 어디까지 근접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반기에 들어 화제를 일으킨 ‘바람의 화원’은 점점 새로운 영역으로 넓혀져 가는 사극소재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었다. 고미술을 소재로 하면서도 팩션만이 갖는 추리적인 기법을 활용해 예술적인 성취는 물론이고, 재미까지 끌어낸 ‘바람의 화원’은 올 사극 중 가장 실험적이면서 가장 완성도가 높은 작품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신윤복 신드롬까지 일으키며 사회적 파장이 컸던 만큼, 남장여자로 표현된 신윤복에 대한 학계의 반발도 거셌던 작품이다.

안타까운 건, 주말 사극 불패 신화를 이어갔던 KBS 대하사극의 고전이다. ‘대왕 세종’은 여타의 사극들과는 다르게 본격 정치사극을 표방하고 나왔지만 시청자들의 외면을 받았다. 스펙타클한 장면들에 익숙한 시청자들의 눈에는 이 작품이 갖는 심리 게임적인 요소들이 어렵게 다가갔을 수가 있다. 게다가 방영 중간에 시청시간대와 채널을 옮기는 바람에 시청률은 더 곤두박질쳤다. 하지만 작품성으로만 본다면 역시 KBS 대하사극다운 진지한 면모를 보여준 작품이라 하겠다.

또한 ‘바람의 나라’는 그 스케일에 비해 화제를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다. 김진 원작의 ‘바람의 나라’는 사실 고구려 사극의 원조격. 하지만 이미 여러 번 반복된 고구려 사극들로 인해 이 사극은 안타깝게도 뒤늦은 사극의 트렌드로 치부되고 있다. 아직은 그 향방을 예단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지만, 어쨌든 ‘바람의 나라’가 말해주는 것은 이제 사극도 어떤 트렌드를 타기 시작했다는 점일 것이다.

올 한 해의 사극들을 통틀어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이제 정통사극은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점이다. 퓨전사극의 등장으로 역사보다는 상상력에 더 기대는 사극들이 나온 지는 꽤 되었지만 올해처럼 다양한 소재로 실험적인 시도가 이루어진 적은 일찍이 없었다고 보여진다. 이것은 이제 사극의 흐름이 온전히 역사와 결별해 어떤 그 시대의 트렌드와 조우하는 상상력을 만날 것이라는 것을 예감케 하는 사건이다. 사극, 이제 더 이상 정통은 없다.

2008년도 드라마를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용두사미’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드라마들이 기대한 만큼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시청률에서 성공하면 완성도에서 떨어졌고, 완성도에서 어느 정도 성공하면 시청률이 난항을 겪었다. 또 시청률도 괜찮고 완성도도 괜찮다 싶은 드라마는 초반의 모양새를 끝까지 유지하지 못하고 중반 이후부터 어그러지기 일쑤였다. 물론 최근 들어 시청률과 완성도가 반비례로 가는 경향이 있다고 해도 이처럼 극과 극으로 치닫는 것은 올해 드라마들의 한 특징이 될 것이다.

먼저 완성도에서 성공적이었지만 시청률이 그만큼 따라주지 못한 드라마로 최근 종영한 ‘베토벤 바이러스’와 ‘바람의 화원’을 들 수 있다. 그나마 ‘베토벤 바이러스’는 김명민 파워를 통해 어느 정도의 시청률을 거두었지만 ‘바람의 화원’은 그 훌륭한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끝내 시청률을 얻지 못했다. 어찌 보면 이 두 드라마는 애초부터 마니아적인 성격을 띄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클래식이나 고미술이라는 소재 자체가 그러했다. 하지만 이 비대중적인 소재를 대중적인 틀 안으로 끌어온 그 시도는 좋은 결과를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한편 소재에 있어서 대중적일 것이라 생각되었던 ‘그들이 사는 세상’ 역시 이 범주를 향해 가고 있다. 방송가에 대한 진지한 접근이 완성도를 높였지만 그만큼 대중성을 확보하지 못하게 만든 것이다. 이들 드라마들이 보여주는 것은 역시 드라마는 소재 자체가 아니라 그 소재를 어떻게 요리하느냐는 것이 관건이 된다는 점이다.

다음은 완성도는 떨어지지만 시청률은 높았던 드라마들이다. 대표적인 예로 ‘조강지처클럽’이나 현재 방영중인 ‘에덴의 동쪽’을 들 수 있다. 완성도로만 보면 앞뒤가 맞지 않는 억지설정에 과장된 캐릭터들, 흐름의 비일관성, 앙상한 주제 등등, ‘조강지처클럽’은 전형적인 욕하면서 보는 드라마의 계보를 이으면서 시청률 고공행진을 이어갔다. ‘에덴의 동쪽’은 상대적으로 세련된 외피를 입고 있지만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조강지처클럽’의 다른 줄기라고 보여진다. 역시 과장된 캐릭터들과 인물설정 등이 시대극을 표방하면서(전혀 그러나 시대극은 아니다) 시청자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이 드라마들의 특징은 주로 과거 드라마들이 했던 문법들, 그 중에서도 특히 신파를 그 바닥에 깔고 간다는 점이다. 이것이 현 어려운 현실과 맞아떨어지면서 향수마케팅과 함께 TV의 실 시청자로 자리하고 있는 비교적 나이든 시청층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던 점이다. 이들 드라마들이 말해주는 것은 드라마의시청률이 그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공감지수는 아니라는 점이다. 어찌 보면 드라마 시청률은 단지 상업적인 의미로서 존재하며, 따라서 업계가 불황이 되면 될수록 완성도로의 접근은 더 요원하다는 점이다.

마지막은 용두사미가 되어버린 드라마들이다. ‘스포트라이트’, ‘이산’, ‘왕과 나’, ‘타짜’같은 드라마들을 비롯해 현재 방영되고 있는 ‘종합병원2’나 ‘바람의 나라’같은 드라마들도 이 경향을 띄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방영 이전부터 화제가 되었다가 방영과 함께 고꾸라진 경우도 있고, 또 방영 초기에는 화제를 일으켰지만 차츰 그 불씨가 가라앉은 경우도 있다. 올해 특히 이런 드라마들이 많이 양산된 것은 드라마가 거꾸로 마케팅이나 기획쪽에 더 많이 힘이 실렸었다는 반증이다. 따라서 소재로 치면 누가 봐도 관심을 가질 만한 것들을 끄집어오고, 또 출연진들도 기대감을 불러일으키는 스타들을 배치했지만 결과적으로 그 요소들을 작품으로 끌어안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는 점이다. 한 마디로 포장은 요란했지만 그 내용물은 볼품이 없었다는 말이다. 올해 유난히 이런 작품들이 많았던 것은 그만큼 우리네 드라마 제작에 거품의 요소들이 실체로 드러났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이렇게 보면 최근 박신양 사건을 계기로 드라마 제작에 대한 거품을 걷어내자는 여론이 일고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로 보여진다. 완성도는 높지만 시청률이 떨어지는 마니아 드라마 경향과, 시청률은 높지만 완성도는 떨어지는 퇴행적인 드라마 경향, 그리고 초기에는 창대했지만 결과물은 앙상해지는 용두사미 드라마 경향. 이것은 올해 우리네 드라마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이자, 내년 드라마들의 숙제가 될 것이다.
(이 원고는 스포츠칸에 게재되었던 칼럼입니다.)

주연보다 센 카리스마의 조연들, 그 이유

‘왕과 나’의 조치겸(전광렬), ‘이산’의 영조(이순재), 그리고 ‘뉴하트’의 최강국(조재현)은 어떤 공통점을 갖고 있을까. 그들은 모두 각각의 드라마를 이끌어 가는 힘의 원천이라는 것이다. 조치겸은 우리네 사극 속에 권력형 내시라는 새로운 캐릭터로 특유의 카리스마를 선보였다. ‘이산’의 영조는 주인공인 이산을 위기에 빠뜨리기도 하고 또 구원해주기도 하면서 지금껏 드라마의 힘을 만들어온 사실상의 주역이었다. ‘뉴하트’의 최강국 역시 마찬가지. 그는 지금껏 이 흉부외과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사건들을 정리하는 해결사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이들은 진정한 의미로 드라마의 주인공은 아니다. 주인공이 아니면서 왜 드라마는 이런 캐릭터들을 필요로 할까.

성장하는 주인공의 멘토 혹은 후원자
요즘 드라마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가 성장하는 주인공이라는 캐릭터 설정이다. 이것은 특히 권력과 욕망을 두고 전개되는 드라마 속에 자주 등장하는데, 그것은 이미 성장해 권력을 잡은 무소불위의 주인공은 시청자가 감정이입할 여지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이보다는 쉽게 감정이입이 되는 평범한 주인공이 점차 권력의 정점을 향해 가는 성공의 과정은 보는 이에게 충분한 대리충족을 시켜주게 된다.

이런 성장 캐릭터가 등장하는 드라마의 문제는 그 초반부에 있다. RPG게임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겠지만 캐릭터가 성장하는 과정을 바라보는 건 때론 지루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초반부 드라마 전개는 자칫 무미건조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카리스마 부재의 문제를 해결해주면서 동시에 주인공에게 그 카리스마를 연계해줄 캐릭터들이 필요하게 된다. 즉 주인공의 멘토 혹은 후원자가 필요해지는 것이다.

조치겸이나 영조, 그리고 최강국이라는 캐릭터는 이러한 필요에 의해 세워진 것이다. 이들은 주인공은 아니지만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지고 드라마 전체를 휘어잡으며 시청자들의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는 특징이 있다. 드라마 초반부에 이러한 힘은 드라마 성공에 있어 절대적이라는 점에서 캐스팅에 있어 주인공 못지 않은 비중을 차지한다. 전광렬이나 이순재, 조재현은 누구나 그 연기력을 인정받는 대배우들이다. 이들 대배우들의 호연은 드라마에 더욱 힘을 불어넣는다.

문제는 주인공이 그 캐릭터를 넘지 못하는 것
문제는 주인공이 이제 나이가 들어 성장한 상황에서도 여전히 그들 캐릭터의 힘이 주인공에게로 넘어오지 않는 지점에 있다. ‘왕과 나’의 조치겸은 주인공인 김처선(오만석)이 성장하기까지 내시부를 이끌며, 예종 같은 왕, 한명회 같은 조정대신, 인수대비 같은 왕실인물, 노상선 같은 내시부 구세력들과 맞서며 권력형 내시의 카리스마를 보여왔다. 그 같은 상황에 김처선이 한 것이라곤 운명적인 사랑의 굴레 속에서 허우적대는 것이었으니, 드라마의 재미는 주인공이 아닌 조치겸으로 기울어질 수밖에. 결과적으로 카리스마는 김처선에게 전수되지 않았다.

‘이산’의 영조는 이산(이서진)의 가장 강력한 위협이면서 동시에 가장 가까운 협력자로서 카리스마를 발휘해왔다. 이산을 위기에 빠뜨리는 것은 어찌 보면 노론 벽파 세력이라기보다는 영조 자신인 경우가 더 많았다. 그래서일까. 긴박하게 도무지 해결될 것 같지 않게 흘러가던 상황도 영조가 등장하면 그걸로 끝이었다. 이미 영조가 붕어한 상황이니 이제 그 카리스마는 온전히 이산이 차지해야 하나 그것이 효력을 발휘할 지는 미지수다. 위기에 빠뜨려 성장하게 만들었던 영조는 사라졌고, 또한 노론 벽파 역시 거의 궤멸 직전까지 간 상황에서 이산의 카리스마가 제대로 세워질 수 있을까하는 의구심이 들기 때문이다.

한편 ‘뉴하트’의 최강국은 이제 주인공을 도와주는 역할에서 아예 주인공의 역할을 맡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드라마의 갈등구조가 결국 병원 내의 권력구도에서 비롯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최강국을 멘토로 성장드라마를 엮어가야 할 이은성(지성)은 좀체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드라마의 갈등은 최강국이 풀어내고 이은성은 남혜석(김민정)과의 멜로 라인을 엮어내는 병렬적인 역할을 맞고 있는 상황이다.

배우의 문제가 아닌 작가의 문제
이것은 배우들에게도 큰 도전이 아닐 수 없다. 대배우들의 그늘 속에서 주인공을 맡은 자신이 정작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이 그다지 바람직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이 배우들의 문제라고 판단하기는 어렵다. 이것은 배우의 문제라기보다는 작가의 문제가 더 크다.

작가는 주인공 속에 주제의식을 심어 넣기 마련인데, 주인공이 아닌 다른 인물에 집중되지 않는 이런 상황은 결국 시청률 앞에 작가의 주제의식이 흔들리고 있다는 반증으로 밖에 볼 수 없다. 시청률을 올리는데 일조했던 그 캐릭터와 그 캐릭터가 만들어냈던 극적 상황들을 과감하게 버리고, 본래의 기획의도로 돌아간다는 것은, 시청률이란 잣대 위에서 보면 무모한 일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조치겸이나 영조, 최강국 같은 카리스마 넘치는 조연들이 극 속에서 주인공 이상의 비중을 차지하게 된 이유가 된다.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나, 바람직한 것은 아닌 것 같다. 그 속에서 꿈틀대는 시청률 지상주의라는 괴물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사극이 사랑을 그리는 방식

사극이 사랑에 빠졌다. ‘이산’의 이산(이서진)과 성송연(한지민)이 그렇고, ‘왕과 나’의 성종(고주원)과 어을우동(김사랑) 그리고 윤소화(구혜선)가 그러하다. 그런데 똑같은 사랑이지만 그 양상은 사뭇 다르다. 사극과 만나 빛을 발하고 있는 멜로라고 해도 어떤 것은 호평을 받고 어떤 것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섬세한 사랑, ‘이산’
이산과 성송연의 사랑은 가까이 앉아 속삭이는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궁 하나를 두고 있는 거리에서의 사랑이며, 세손과 다모라는 신분이 말해주는 거리에서의 사랑이기도 하다. 둘이 가까워지는 것을 저어한 혜경궁홍씨(견미리)에 의해 심지어 성송연은 그것도 모자라 이역만리 청국으로까지 보내진다. 이렇게 먼 거리를 두면서 그들은 어떻게 사랑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일까.

이산이 처한 생존의 상황 속에서 그에게 성송연이란 어린 시절의 순수함으로의 회귀이다. 칼바람이 도는 현실의 무거움 속에서 신분도 잊고 그저 동무라 부를 수 있었던 시절이 그리운 것이고 그 그리움은 성송연이라는 인물로 실제화되어 나타난다. 따라서 아무리 격무에 시달리던 이산이라도 성송연 앞에 가면 그 목소리가 애틋하게 변하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그것이 동무로서의 그리움인지 아니면 연인으로서의 그리움인지를 알게 되는 것은 성송연이 청국으로 떠난 이후이다. 사랑의 표현이 극도로 우회적인 수밖에 없는 이 두 인물의 신분적 거리로 인해서 사랑은 더 애틋하게 표현된다. 이산은 갑자기 일을 작파하고 청으로 떠난 성송연을 붙잡기 위해 말을 타고 달리며, 성송연은 이산만을 생각하며 그 수만 리 길을 걸어 되돌아온다. 만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직접적인 대사를 통한 사랑표현은 극도로 절제된다.

‘이산’이 그려내는 사랑은 따라서 사극으로서의 역사적 사건들과 조우하면서 커다란 무리 없이 흘러간다. 세손과 일개 다모의 사랑이야기에 공감이 가게 되는 것은 물론 그 자체가 가진 판타지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사랑을 다루는 방식이 극도로 섬세하기 때문이다. 그 키워드는 ‘애틋한 그리움’으로 축약된다.

자극적인 불륜, ‘왕과 나’
이산이 아내인 효의왕후(박은혜)를 두고 성송연을 사모하는 것이나, ‘왕과 나’에서 성종이 본처인 윤소화를 두고 어을우동과 사랑에 빠지는 것은 어찌 보면 비슷하다 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전혀 다른 양상으로 다가오는 것은 그 사랑을 다루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왕과 나’ 다루는 사랑은 순수함보다는 육체적인 욕망으로서의 사랑이다. 성종이 어을우동에게 끌리는 것은 그 도발적인 자태가 불지른 욕망 때문이다. 가지 않으려 해도 자꾸만 찾아가게 만드는 그것은 우리가 흔히 현대물에서 말하는 그 불륜이다. 이 불륜이라는 단어에는 육욕의 뉘앙스가 늘 포함된다.

따라서 상황은 자극적으로 치닫는데 이것이 실제로는 새롭게 보이지 않는다. 이미 현대물에서 목도한 장면들의 사극 버전 정도로 보이기 때문이다. 윤소화가 일개 어을우동 앞에서 무릎을 꿇는 장면은 불륜드라마에서 본처가 애첩에게 사정하는 장면처럼 보인다. 왕의 용안에 상처를 내는 장면 또한 마찬가지다. ‘왕과 나’가 사랑을 그리는 방식은 이처럼 자극적이고 통속적이다.

이것은 ‘왕과 나’가 가진 태생적인 한계이기도 하다. 내시의 사랑을 다룬다고 했을 때, 혹자는 그것이 정신적인 플라토닉사랑을 그릴 것이라 예측했겠지만 사실은 정반대다. 거세된 자의 사랑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육체적 사랑을 마음껏 하는 왕의 모습이 대비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닐까. 사랑의 감정으로 봤을 때, ‘이산’이 손 한번 잡는 것으로 설렘을 만들 수 있었다면 ‘왕과 나’는 합궁에서조차 그런 감정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극에 있어서 그것도 왕과 연결된 멜로를 그림에 있어서 특히 주의해야할 점은 자칫 왕의 권위 자체를 흠집 내버릴 수 있는 위험성을 피해야 한다는 점이다. 연출에 있어서 왕이 버젓이 불륜행각을 벌이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면 그것은 아무리 퓨전사극이라 해도 좀 지나친 것이 아닐까. ‘왕과 나’의 경우 그 초점이 왕이 아닌 나에게 아무리 맞춰져 있다 해도, 있지도 않는 사건까지 끌어들여 실존인물인 왕의 권위를 실추시키는 것은 무리가 있다. 물론 그 자체로 어떤 재미를 준다면 모르겠지만, 실상은 그다지 재미도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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