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과 나’가 보여주는 정치세계

‘왕과 나’가 본격적인 정치색(?)을 띄면서 캐릭터의 되살이(뿌리를 잘랐으나 다시 살아나는 것)를 시도하고 있다. ‘왕과 나’의 가장 큰 문제는 왕인 성종(고주원)과 나인 김처선(오만석)의 캐릭터가 조치겸(전광렬)이란 권력형 내시의 빛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던 것. 그러자 드라마는 궁중여인들의 암투극으로 흐르면서 본래 하고자 했던 방향성을 잃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 ‘왕과 나’는 예종독살설이 불거져 나오면서 판내시부사인 조치겸의 탄핵설이 등장하고, 이러한 원로내시들의 전횡에 맞서는 김처선의 내시부 개혁과 쇄신이 진행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잘만 하면 이 정치적 사건들을 통해 그간 살아나지 않았던 왕(성종)과 나(김처선)의 캐릭터가 되살이될 수도 있게 되었다.

그 이유는 성종이 정희왕후(양미경)의 수렴청정을 벗어나 본격적인 정치의 첫발을 디디면서 우선적으로 뇌물청탁이 오가는 내시와 조정대신들의 고리를 끊는 것을 첫 과제로 삼았기 때문이며, 그 핵심에 김처선이 앞장서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왕과 나’는 두 캐릭터를 되살리고 본격적인 정치세계의 이야기로 전환할 수 있는 일거양득의 전기를 마련한 셈이다.

‘개혁, 쇄신, 탄핵, 퇴진, 뇌물청탁, 부정비리...’ 같은, 우리가 최근 몇 년 동안 뉴스를 통해 들었던 수많은 단어들을 쏟아내면서 이제 ‘왕과 나’의 이야기는 정치로 접어들고 있다. 단어들의 뉘앙스로서 알 수 있듯이 ‘왕과 나’가 보여주는 정치세계는 우리가 지난 5년 전 숱하게 들으며 염원했던 개혁이다. 김처선과 성종은 본분을 잊고 사리사욕에 빠져 전횡을 일삼는 내시부 수장들과 한명회(김종결)를 위시한 조정대신들에 대한 개혁의 칼을 들고 있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재미있는 것은 ‘왕과 나’가 보여주는 정치인의 모습이다. ‘왕과 나’의 인물들은 청렴과 부패로 명확히 나눠지지 않는 캐릭터를 갖고 있다. 조치겸은 현재 부패한 원로 내시들의 탄핵을 받는 인물이지만 그 자신 또한 청렴결백하다 할 수 있는 입장이 못된다. 드라마 상이지만 그 자신도 권력을 위해 예종을 독살하고 김처선의 아버지까지 죽인 부패한 정치인 중의 한 명이다. 조치겸은 비판에 직면할 때마다 그것이 주상전하를 위한 충정이었다는 변명만을 거듭한다. 즉 ‘왕과 나’의 조치겸이란 인물로 그려진 정치세계란 대의명분을 위해 저질러지는 악행이 받아들여지는 세계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조치겸은 변하기 시작했다. 자신을 거둬 지금의 위치까지 세워준 노내시(신구)와 정면으로 맞서면서 김처선의 개혁에 손을 들어주고 있는 것. 개혁의 중심에 자신이 서지 못하는 것은 저 스스로 떳떳한 위치에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는 아마도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 하다.

조치겸이 노내시와 척을 지고, 주상전하가 하사한 칼자루를 김처선에게 건네는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저 스스로 노내시라는 뿌리를 자르고, 김처선의 뿌리로서의 자신 역시 잘라내야 진정한 개혁이 이루어질 수 있으리라는 암시를 주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결국 이 국면의 전환도 조치겸이란 캐릭터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조치겸은 노내시 앞에 김처선을 세우고 그에게 자신까지 제거할 칼까지 건네주었기 때문이다.

‘왕과 나’가 지금 다루고 있는 정치개혁의 이야기는 이 사극이 보여주는 뿌리를 자르고 된 내시들의 이야기와도 잘 맞아떨어진다. 뿌리를 자르면서 욕망(사리사욕)을 버려야 했던 내시들이 오히려 부귀영화라는 잿밥에만 관심을 가지면서 족벌이라는 또 다른 뿌리를 만들어내는 상황. 이것을 개혁하고자 조치겸은 노내시라는 뿌리를 자르고, 김처선은 조치겸이란 뿌리를 잘라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 뿌리를 자른다는 행위는 죽을 수도 있는 위험을 가지지만 분명 해볼만한 가치가 있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부패의 고리로서의 뿌리를 뽑아내는 개혁의 이야기가 어찌 내시가 등장하는 사극 속의 허구라고만 할 수 있을까. 약해 보이기만 했던 김처선이란 인물이 강한 면모를 보이면서 단행하고 있는 개혁 속에서 좀더 강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은 작금의 정치현실과 내통한 심사가 편치만은 않기 때문이다. 드라마가 본래 대중들이 희구하는 환타지를 기본적으로 담고 있다면 ‘왕과 나’의 그것은 이제 몇 일 남지도 않은 투표일을 앞두고 최선책보다는 차선책을 찾아야 하는 절망감에서 비롯된다 할 것이다. 드라마 속에서라도 김처선이란 캐릭터가 되살이되어 개혁을 이루는 모습을 보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드라마를 이끄는 힘, 입체적 인물

MBC 사극 ‘이산’에서 위기에 빠진 이산(이서진)에게 홍국영(한상진)이 절실한 것처럼, 요즘 드라마들은 홍국영 같은 입체적 인물을 필요로 한다. 드라마가 만들어내는 극적 상황 속에서 흔히 빠지기 쉬운 선악대결구도는 요즘 시청자들의 눈길을 잡아끌지 못한다. 현실이 더 이상 권선징악으로 설명될 수 있을 만큼 단순하지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감 가는 캐릭터는 오히려 선과 악으로 단순히 나누어지는 전형적 인물이 아닌 양측을 포괄하거나 그 선을 왔다갔다하는 입체적이고 복합적인 인물이 되었다. 중요해진 것은 선악이 아니라 인물을 움직이는 욕망, 혹은 인물의 목표이다.

홍국영에 쏟아지는 관심, 왜?
그런 점에서 홍국영에 쏟아지는 공감은 당연하다. ‘이산’이란 드라마는 오히려 선악구도가 너무나 명확한 드라마다. 이산을 중심으로 한 성송연(한지민), 박대수(이종수), 남사초(맹상훈) 같은 인물군들은 모두 선이며, 이산의 반대편에 선 정순왕후(김여진), 화완옹주(성현아) 같은 인물군들은 악이다. 모두 선악이 분명한 인물들이다. 여기서 악은 강하고 선은 약하기에 드라마가 생긴다. 하지만 이런 단순구도로는 이병훈 PD 특유의 미션 해결 구조의 드라마가 쉬 지루해질 수 있다. 그것은 결과가 뻔하기 때문이다.

이럴 때 필요해지는 인물이 선악으로 구분되기 어려운 복합적인 성격의 인물이다. ‘이산’의 초반부에 이런 역할을 해온 인물은 영조(이순재)다. 그는 이산의 할아버지면서도 이산의 강력한 시험으로 자리잡았고, 그 힘은 대결구도의 단순함을 무마해주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미 영조가 이산의 손을 들어버렸고, 그의 시험이 좀더 강력한 군주의 탄생을 위한 조련과정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이 즈음에서 홍국영이란 인물의 등장은 적확하면서도 효과적인 장치라 할 수 있다.

홍국영은 캐릭터로 보면 이산의 착한 인물들(?)을 대신해 손에 피를 묻히는 인물이다. 그는 처음부터 대의만을 내세워 이산 밑으로 오지 않았다. 정후겸(조연우)과 이산의 양 갈래 길에서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고민했던 인물이다. 그만큼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캐릭터인 홍국영은 이산이 하지 못하는 일들을 도맡아 한다. 정치적인 대의를 중시하는 군주 이산의 현실적인 측면을 보강해준 것이다. 홍국영은 지금의 입장이 이산의 든든한 두뇌 역할이기 때문에 선의 한 측면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정후겸과 같은 부류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어찌 보면 냉철하게 자신의 욕망을 추구해나가는 인물이지만 드라마는 단순히 홍국영을 야심가로서의 한 측면만을 조명하지 않는다. 때론 ‘꼴통’이니 ‘개소리’같은 리얼리티쇼를 방불케 하는 거친 현실감이 넘치는 대사들을 쏟아내면서 서민적이고 서글서글한 모습까지 갖게된다. 홍국영의 출연은 대의 중심의 단순한 대결구도를 벗어나, 욕망 중심의 대결구도를 새롭게 만들어낸다. 사실상 입장만 다를 뿐, 똑같이 욕망을 추구하는 홍국영과 정후겸의 두뇌게임이 본격화되는 것이다.

드라마는 입체적 인물의 힘으로 굴러간다
이러한 드라마 속 입체적 인물들의 역할은 단지 ‘이산’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왕과 나’의 조치겸(전광렬), ‘태왕사신기’의 서기하(문소리)는 물론이고 현대극 속에서 ‘얼렁뚱땅 흥신소’의 백민철(박희순)까지 그 사례가 될 것이다. 먼저 ‘왕과 나’를 이끌어 가는 힘의 중심 축으로서 조치겸(전광렬)이 서 있는 이유는 그 복합적이고 능동적인 캐릭터 때문이다. 조치겸은 ‘욕망 하는 내시’로서 희대의 역적처럼 보이지만, 또 한 편으로는 군주와 백성 사이에 그 어떠한 사특한 무리들도 용납하지 않는다는 대의를 가진 충신처럼 보이기도 한다.

또한 ‘태왕사신기’의 서기하는 사랑하는 사람인 담덕(배용준)과 동생 수지니(이지아)와 맞서게되는 운명을 가진 복잡한 캐릭터다. 이 역시 담덕과 사신으로 대변되는 선과 연씨 집안으로 대변되는 악의 단순구도를 깨는데 일조한다. 시청자들은 서기하의 행동들을 이해하면서도 분노하게 되는 묘한 입장에 처하게 된다. 한편 ‘얼렁뚱땅 흥신소’의 백민철은 조폭이면서도 순간 희경(예지원)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인물이다. ‘치매를 갖고 있는 어머니’ 같은 개인적인 사연이 많은 그는 흥신소의 인물들과 부딪치면서도 묘한 매력을 느끼게 하는 복합적인 성격의 인물이다.

드라마는 실로 주인공의 힘만으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조역들이 있어 주연이 힘을 발하는 것이며, 그 조역들의 캐릭터가 입체적이고 복합적일 때 드라마는 더 깊은 재미를 주게 된다. 당연한 일이지만 이들 입체적 인물을 연기하게 되는 연기자들은 베테랑일 경우가 많다. 그만큼 연기하기가 녹록치 않기 때문이다. ‘왕과 나’의 전광렬이 그렇고 서기하 역의 문소리가 그렇다. 문소리는 캐스팅 논란이 일었지만 사실상 이런 어려운 심리묘사를 할 수 있는 연기자로 그녀 만한 인물을 찾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최근 ‘세븐데이즈’로 영화에서도 주목받고 있는 박희순은 바로 이러한 입체적인 캐릭터를 타고난 연기자로 보인다.

드라마의 저변이 넓어지면서 이제 한번 보면 그 행동을 다 짐작할 수 있는 단순하고 전형적인 인물이 드라마에 설 자리는 좁아졌다. 대신 능동적인 욕망이 꿈틀대면서 언제든 변화할 수 있는 입체적 인물들이 그 자리를 차지해가고 있다. 요즘 드라마는 때론 아이 같은 천진함을 가졌지만, 때론 욕망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전략가의 모습을 보이는 홍국영처럼 여러 개의 얼굴을 가진 인물을 원한다.

SBS 드라마, 예능, 뉴스의 문제점과 해법

SBS의 최근 시청률 성적표(11월5일-11일 AGB 닐슨 집계)를 보면 특이한 점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전체 시청률 상위 20위권에 들어있는 SBS 프로그램은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18.7%)’가 11위에 랭크된 것을 빼고는 전부 드라마 일색이라는 점이다. ‘황금신부(23.5%, 5위)’, ‘왕과 나(20.2%, 8위)’, ‘조강지처클럽(14.1%, 14위)’, ‘아침연속극 미워도 좋아(13.6%, 18위)’가 그 드라마들이다. 물론 전체적으로 드라마가 대부분 상위 랭킹에 들어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래도 각 방송사별로 몇몇 예능프로그램이 자리하고 있는 점을 보면 이례적이라 할 수 있다.

MBC는 ‘무한도전(21.9%, 7위)’, ‘황금어장(15.3%, 12위)’의 예능과 ‘태왕사신기(29.5%, 3위)’, ‘이산(22.5%, 6위)’같은 드라마가 고루 포진해있고, KBS는 미니시리즈가 어렵다고는 하나 일일연속극의 절대 강자 ‘미우나 고우나(32.5%, 1위), 대하드라마 ‘대조영(32.2%, 2위), 그리고 주말드라마 ‘며느리 전성시대(26.9% 4위)’가 굳건하고, 전통적으로 강한 ‘KBS 9시 뉴스( 19.1% 10위)’가 있으며 여기에 다채로운 예능프로그램들(비타민, 해피투게더, 우리말 겨루기, 퀴즈대한민국, 개그콘서트)이 20위 권에 들어있다.

하지만 기대주였던 ‘로비스트’와 ‘왕과 나’의 시청률이 떨어지면서 현재 드라마마저 하향세를 보이기 시작하고 있는 상황, SBS는 인정하기 어려운 뼈아픈 일이지만 총체적인 난국을 겪고 있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개국부터 새로운 도전정신과 시도로 독특한 컨셉의 프로그램들을 만들어내는 저력을 보였던 SBS. 능력은 있으되 그 능력을 펼치지 못하는 SBS의 상황은 저 ‘왕과 나’의 김처선이 갖고 태어났다는 삼능삼무(三能三無)의 운명을 떠올리게 만든다. 도대체 무엇이 SBS를 삼능삼무의 상황으로 몰고 왔을까.

일능일무(一能一無) - 기획은 창대하되 완성도가 떨어지는 드라마
SBS의 드라마 기획은 방송3사를 통틀어 가장 도전적이고 도발적이다. 그것은 현재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들의 면면을 보기만 해도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다. 라이따이한을 등장시켜 다문화 사회가 되고 있는 우리 사회의 변화상을 제대로 포착한 ‘황금신부’, 왕조중심의 사극에서 탈피해 내시의 시각으로 역사를 재조명한다는 취지의 ‘왕과 나’, 대작드라마로서 로비스트라는 독특한 직업세계를 시각적으로 그려낸 ‘로비스트’ 등은 그 기획만 가지고 본다면 대단히 야심찬 시도라 할만하다.

이러한 독특한 기획의 성공은 사실상 SBS 드라마들의 최대 장점이다. 전문직 장르 드라마와 우리네 멜로드라마를 성공적으로 봉합시킨 ‘외과의사 봉달희’는 물론이고, 대부업(쩐의 전쟁)이나 교육문제(강남엄마 따라잡기) 같은 주로 사회적인 문제나 이슈들을 소재로 끌어들이면서 사회적 관심까지 유도하려 했던 사회극들은 그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이 기획의 장점은 실제 기획대로 드라마가 구현되지 않으면서 오히려 단점으로 부각되고 있다. ‘왕과 나’가 가진 기획 포인트인 내시의 시각은 사극 속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있으며, ‘로비스트’는 과도한 볼거리에 스토리가 매몰 당한 형국이 됐다. 그나마 ‘황금신부’가 선전하고 있지만 이것은 애초 기획의도와는 상관없이 전통적인 드라마들의 코드들(출생의 비밀 같은)을 잘 엮어낸 결과이다. 역대 가장 뛰어난 완성도를 보여주었던 ‘연애시대’가 SBS의 드라마였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 SBS 드라마는 최근의 시청률 하락을 통해 이제 시청자들이 원하는 건 기획의 창대함보다는 내실 있는 완성도라는 걸 알아야 할 것이다.

이능이무(二能二無) - 시작은 했으나 조기에 문닫는 예능 프로그램
한 때 SBS는 예능 프로그램의 강자로 군림했었다. 대표적인 프로그램들이 ‘야심만만’, ‘진실게임’, ‘X맨’등이다. 하지만 현재를 보면 초라하기 이를 데 없다. 최강자로 군림했던 ‘X맨’이 종영하고 나서 그 멤버들은 타 방송사의 프로그램 속으로 편입되었다. 현재 예능프로그램의 최강자로 자리잡은 MBC ‘무한도전’의 유재석과 ‘무릎팍도사’와 KBS‘1박2일’에서 활약하고 있는 강호동은 모두 ‘X맨’이 배출한 스타들이었다. 리얼리티쇼가 대세가 되고 있는 현재의 예능프로그램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되는 캐릭터의 형성에 ‘X맨’이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현재의 SBS 예능프로그램의 난항은 그 후속 프로그램을 개발하지 못한 자책의 결과라는 걸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런 자책감의 결과일까. 최근 SBS의 예능 프로그램들은 두 방향에서 압박을 받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하나는 ‘기다리지 못하는 조급증’이다. 최근 들어 ‘SBS의 예능 프로그램은 모두 파일럿’이라는 비아냥이 나올 정도로 프로그램들이 몇 달(심지어는 몇 회)을 넘기지 못하고 폐지되고 있다. ‘X맨’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한 안간힘은 저 ‘슈퍼바이킹’ 같은 컨셉트 부재의 프로그램까지 등장하게 만들었다. 최근 ‘하자고’, ‘작렬 정신통일’, ‘옛날 TV’, ‘대결 8대1’, ‘스타킹’등등의 예능 프로그램의 조기종영(?)은 이 조급증이 극에 달했다는 걸 보여준다.

반면 또 하나의 압박은 ‘야심만만’, ‘진실게임’같은 장기 방영된 예능 프로그램이 좀체 현재에 맞는 옷을 입지 못하고 과거의 틀에 매여 있다는 점이다. 연예인들의 홍보 프로그램논란이 나왔을 때부터 ‘야심만만’의 문제는 지적되었다 보아야 한다. 하지만 ‘야심만만’은 과거나 지금이나 연예인들이 등장해 신변잡기를 논하고, 홍보의 장으로서 활용되고 있다. ‘진실게임’의 경우는 그 구태의연한 포맷에 더해서 심각한 소재부족의 한계에 다다른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같은 제목이라도 계속해서 발빠르게 새로운 포맷을 시도하는 타 방송사(‘지피지기’같은)와는 너무 다른 행보라 할 수 있다.

SBS의 예능프로그램들은 지금 예능의 지존이 된 ‘무한도전’이 걸어온 길을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무한도전’은 초반 시청률 4%에서 시작해 현재 25%에 육박하는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다. 물론 그렇게 자리잡기까지 꽤 오랜 세월이 흘렀다. 그만큼 오랜 시간을 기다려준 결과가 ‘무한도전’이라는 점이다. 또한 중요한 건 그 시간 내내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무한도전’은 ‘무리한 도전’, ‘무모한 도전’ 같은 다양한 포맷실험을 통해 현재 위치에 서게 되었다. 쏟아져 나오는 예능프로그램 속에서 필수적인 건 실험적이고 도전적인 정신이지만, 또한 그것이 정착될 때까지 기다려주고 변화가 필요할 때 변화를 만들어주는 끝없는 노력이 없는 한 예능 프로그램의 성공은 점치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삼능삼무(三能三無) - 도전적 뉴스 시간대, 참신함이 없는 뉴스
200여명에서 많게는 300명에 이르는 보도국이 만들어내는 뉴스의 시청률이 10% 이하에 머물고 있다는 점은 지금 방송사들의 최대 고민이 아닐 수 없다. 심지어 일각에서는 뉴스를 이대로 존속시켜야 하는가 하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물론 뉴스는 반드시 있어야 하지만 그것을 자체적으로 소화하느냐 아니면 외주로 만드느냐는 점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에서 자유로운 방송사는 KBS 뿐이다. 공영방송이라는 이미지 탓이기도 하지만 그 시간대에 뉴스를 관성적으로 틀어놓는 시청자들의 패턴 속에서 KBS는 확실히 타 방송의 뉴스보다 우위를 갖는 장점이 있다.

뉴스의 존폐를 운운하는 것은 너무 성급한 판단이라 생각되지만, 관심을 끌지 못하는 뉴스가 더 이상 뉴스의 기능을 하고 있는가 하는 고민은 해야될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보면 저녁 8시라는 도전적인 뉴스 시간대로 시작한 SBS가 왜 현재는 최하위의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는지 이해하기가 어렵다. 여러모로 9시라는 뉴스 시간대보다 1시간 빠르다는 점은 엄청난 이점을 갖는다. 선 보도라는 장점 이외에도 8시라는 다른 시간대는 뉴스의 좀더 자유로운 포맷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8시 뉴스는 기존 9시 뉴스의 틀을 반복하는 수준에서 그치고 있다. 오히려 ‘MBC뉴스데스크’는, 좀더 시각적인 뉴스 포맷이나 주말 뉴스판의 여성 앵커 기용 등의 도전을 하고 있는 형국. 현재 고작 20여명이 만드는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가 20%에 육박하는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는 반면, ‘SBS 8시 뉴스’ 시청률이 7, 8%에 머물고 있는 점을 잘 새겨볼 필요가 있다. SBS에 의해 초기 도전적으로 시도되었던 VJ(비디오 저널리스트)시스템은 ‘순간포착’에서 볼 수 있듯이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도 뉴스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될 가능성이 높다. 8시 뉴스는 그 시간대가 말해주는 초심으로 돌아가 거기에 맞는 도전적인 참신함을 되찾아야 할 것이다.

가장 늦게 공중파에 합류한 SBS는 도전적인 자세로 가장 안정적인 삼각경쟁구도를 만들어낸 방송사다. 따라서 충분히 그러한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저력을 갖고 있다. 하지만 능력이 있어도 제대로 쓰여지지 않으면 자칫 삼능삼무의 무위에 그칠 수도 있다. 위기는 기회라는 점에서 지금의 위기를 제대로 직시하는 것은 문제 해결의 발판이 될 것이다. 부디 삼능삼무(三能三無)가 삼능삼능(三能三能)으로 바뀌기를 기대한다.

‘여인천하’가 되어가는 ‘왕과 나’의 문제

정한수(안재모)의 소개로 궁에 들어와 엄귀인(이지현)을 만나는 설영(전혜빈)의 모습은 어딘지 낯이 익다. 엄귀인은 한명회의 뒷배를 받아 장차 교태전의 주인이 되려는 야심을 가진 인물. 충성을 맹세하는 설영의 모습에서 언뜻 ‘여인천하’ 정난정(강수연)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신분상승을 위해 못할 짓이 없는 이 여인네들로 인해 지금 ‘왕과 나’는 갑작스레 ‘여인천하’로 방향을 트는 느낌이다.

‘왕과 나’가 ‘여인천하’의 틀을 가져가고 있던 것은 이미 오래 전이다. 그것은 윤소화(구혜선)가 궁에 들어간 후부터 줄곧 인수대비(전인화)와 대결구도를 벌이면서 부터이다. 한명회와 손을 잡은 인수대비는 정실이 아닌 윤소화를 궁 밖으로 내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 이유들은 실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윤소화가 중전이 되기 위해 자작극을 벌였다는 한갓 정한수 같은 말단의 내시가 하는 거짓말에 인수대비가 휘둘린다는 건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왕과 나’가 ‘여인천하’가 보여준 여인들의 궁중암투로 가고 있다는 것은 새롭게 등장한 엄귀인과 정귀인(윤혜경)의 출연으로 구체화되고 있다. 이들은 먼저 궁에 들어온 윤소화와 정현왕후 윤씨(이진) 앞에서 “성종의 신임을 업고서 위세를 부린다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하고, “사내의 마음은 나비와 같아 아름다운 꽃을 찾아다닐 수 있으니 긴장하라”고 말한다. 역시 아무리 사극이라도 이해하기 어려운 대사들이다.

그런데 이 즈음에서 생각해봐야 할 것이 있다. 내시의 삶과 운명적인 사랑의 이야기를 다루겠다던 ‘왕과 나’는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왕과 나’는 기획에서부터 왕이라는 절대권력과 나라는 개인이 등가의 위치에서 그려지는 새로운 시각의 사극을 꿈꾸었다. 하지만 지금 현재 ‘나’의 위치에 서야할 김처선(오만석)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는 윤소화의 뒤편에 서서 아련한 눈길로 쳐다보며 눈물을 짓는 역할을 보일 뿐, 사극 속 사건들의 중심에 서지 못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왕과 나’는 처음부터 김처선의 캐릭터를 전혀 세우려 하지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 사극의 흐름을 보면, 초반부 아역배우들이 등장했을 때는 멜로 라인을 구축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부족했던지, 조치겸(전광렬)을 내세워 왕(예종)과의 대결구도를 세운다. 성인배우들로 교체되면서도 사극은 조치겸을 중심으로 흘러간다. 멜로가 힘을 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유는 그 멜로의 구도가 신파의 차원에 머물러 있었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궁을 한다는 설명하기 어려운 설정을 스토리가 충분히 납득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멜로가 가라앉자 남은 것은 대결구도 뿐이다. 조치겸과 왕의 대결이 끝나자, 다시 극은 조치겸과 한명회, 인수대비, 정한수의 대결구도로 흘러간다. 그러다 윤소화가 궁내로 들어가자 이제 방향은 윤소화와 인수대비, 한명회의 뒷배를 받고 있는 엄귀인, 정귀인의 대결구도로 바뀐다. 설영의 등장은 바로 이 대결구도를 첨예화시키려는 의도다. 어디에도 김처선의 이야기는 안착하기 어려운 구조로 되어 있다. 내시라는 독특한 시각의 ‘왕과 나’라는 초기 기획은 완전히 용도폐기 되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혹 내시라는 인물 자체를 가지고 사극을 그리는 것이 한계였을까. 절대로 그렇지 않다. 오히려 이 사극은 내시를 중심에 두겠다는 그 기획포인트로 인해 더 관심을 끌었던 것이 사실이다. 내시양성소라든지, 자궁하는 장면들, 권력형 내시 같은 것들은 이 사극이 보여준 진짜 재미와 가치 중 하나이다. 문제는 대본에 있다. 김처선이 부각되지 않는 것은 작가가 이 캐릭터에 공을 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작가는 김처선이라는 인물에게 능동성을 부여하지 않았다. 그저 바라보고 끌려가는 캐릭터로서는 아무런 매력을 느끼게 할 수 없다.

이런 상황은 성종(고주원)도 마찬가지다. 실제 성종이 이 사극을 보았다면 무덤에서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사극은 성종의 여인들 이야기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아무리 성종의 사적인 부분을 다룬다고 해도 성종은 왕이다. 왕의 면모가 묻어난 연후에 사적인 부분을 건드려줘야 왕의 사생활이라는 또 다른 신선함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지금 그려지는 성종은 아쉽게도 여성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는 마마보이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대본의 스토리가 철저하게 짜여져 있지 않은 것은 사극의 전개가 어떤 연결고리를 갖고 흘러가지 않는 것을 통해서도 보여진다. ‘왕과 나’에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은 주로 이벤트성으로 흘러가는 양상을 보인다. 인수대비에 의해 궁지에 몰린 윤소화가 갑자기 회임을 하면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이 사극의 스토리가 우연과 억지에 얼마나 기대고 있는지를 말해준다. 긴장감을 풀어주기 위해 갑자기 설정한 듯한 최참봉(강남길)과 탄실네의 이야기는 극 스토리와 전혀 상관없이 흘러간다. 왜 이들이 이런 슬랩스틱 코미디를 하고 있는지 드라마 내에서는 이해할 길이 없다.

‘왕과 나’가 애초의 초심을 잃고 ‘여인천하’가 되가는 것은 작가의 대본에 대한 장악력이 떨어지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사건이 일회적으로 흐르면서 유기적인 짜임새를 보이지 않고, 그 속에서 캐릭터는 스토리와 겉돌면서 세워지지 않으니 사극은 말 그대로 익숙한 볼거리가 지닌 자극으로만 가게 된다. 앞으로 좀더 먼 길을 가야 하는 ‘왕과 나’가 지금이라도 초심으로 돌아가길 바란다.

김처선이 제자리를 찾기 위해서는 그 착한 캐릭터가 요즘시대에는 먹히지 않는다고 한탄할 것이 아니라, 그 착한 캐릭터를 부각시킬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왕의 남자’에서 일개 광대들이 왕과 대결하는 방식은 여기에 많은 단서를 줄 수 있을 것이다. 왕이라는 무소불위의 힘, 그리고 그 힘 주변으로 달려가는 무수한 욕망의 화신들 속에서 어찌 초탈한 듯 서 있는 김처선이란 캐릭터의 자유로움이 신선하게 다가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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