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로, 현대물보다 사극에서 빛나는 이유

멜로가 사극과 바람이 났다. 전통적으로 현대물과 조우하던 멜로드라마는 좀처럼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정통 멜로의 부활을 예고했던 ‘못된 사랑’은 출연진들의 호연에도 불구하고 틀에 박힌 설정과 스토리로 오히려 ‘못된 드라마’라는 오명을 쓰고있고, ‘불한당’은 애초에 기획했던 휴먼드라마보다는 멜로드라마의 성격을 보이면서 여전히 시청자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

반면, 현대물들이 성공적으로 그려내지 못하고 있는 멜로는 오히려 사극 속에서 더 빛나고 있다. ‘이산’의 이산(이서진)과 성송연(한지민) 그리고 효의왕후(박은혜)의 삼각 멜로가 그렇고, ‘쾌도 홍길동’의 홍길동(강지환)과 허이녹(성유리) 그리고 이창휘(장근석)의 삼각 멜로가 그렇다. 무엇보다도 이런 변화가 감지되는 것은 현대물에서 보여지는 멜로가 식상한 느낌을 주는 반면, 사극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드는 것일까.

멜로드라마는 왜 늘 식상하다 욕먹나
멜로드라마는 그 성격상 사랑을 중심에 두고 그 빗나감과 마주침을 연속적으로 만들어가면서 극을 발전시켜나간다. 중요한 것은 이 흐름 속에 웃음과 눈물을 교차시켜나가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어떤 공식 같은 것이 생겨버렸다. 특정한 상황 속에서 눈물이 터져 나온다는 것을 감지해버린 작가들은 의도적으로 그 상황을 처음부터 만들어가거나 몰아가는 경향이 있다.

‘못된 사랑’의 처음 1,2회는 이것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나인정(이요원)의 몰락의 과정을 보여준 이 2회분에는 사실상 작품 전체가 앞으로 어떻게 굴러갈 것인지를 예측할 수 있는 모든 단서들이 놓여져 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 부분이 꽤 빠른 속도로 진행되며 보여졌다는 점이다. 중요한 것은 그 이후다. 이 예측된 흐름 위에 새로운 어떤 틀이 마련되지 않고 예측한 대로 흘러갔을 때, 드라마는 식상한 것이 되어버린다. ‘못된 사랑’이 가진 문제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

사실상 이런 문제는 대부분의 멜로가 가미된 현대물들이 안고 있는 것이다. 어느 정도의 시청률을 확보한 ‘뉴하트’같은 작품에도 마찬가지다. 이은성(지성)과 남혜석(김민정)의 멜로가 이미 의학드라마 속 멜로의 전통 속에서 익숙한 구도이기 때문에 ‘뉴하트’는 긴박한 병원이야기가 돌아갈 때는 참신함을 느끼다가(물론 이것이 ‘뉴하트’의 경우는 익숙한 스토리가 많다), 멜로로 돌아올 때는 무언가 축축 쳐지는 느낌에 빠져들게 된다. 멜로와 전문직의 봉합이 이루어졌을 때 ‘무늬만 전문직’이란 비아냥이 등장하게 되는 이유는 전문직의 디테일을 잘 못 살려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멜로 또한 천편일률적인 구도로 흘러가기 때문이다.

사극 속의 멜로가 다른 이유
하지만 이러한 멜로도 사극을 만나면 상황이 달라진다. 먼저 몇 가지 제한점이 생겨난다. 사극은 기본적으로 멜로드라마 자체로는 만들어지기가 어렵다. 시청자들의 인식 자체가 사극은 역사적인 이야기의 재미를 가진 드라마로 굳어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랑 이야기는 양념이 될지언정 본 재료는 어디까지나 역사적인 사건이 된다. 이러한 사극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되는 제한점으로 인해 사극의 멜로는 스토리와 함께 굴러갈 수밖에 없게 된다.

‘이산’의 성송연과 이산 사이에 벌어지는 멜로가 이를 정확하게 잘 보여준다. 이 둘은 신분상의 거리만큼이나 서로 만나기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다. 그러니 그 사랑의 감정을 전하기 위해서 보여지는 것들은 직접적인 대사보다는 사건 속에서 인물의 행동으로 처리된다. 이산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자기 일처럼 안타까워하면서 미거한 힘이지만 그 일을 해결하려 성송연이 뛰어다닐 때 그 멜로는 자연스럽게 만들어진다. 또한 성송연이 이국 땅으로 떠났을 때, 이산이 말을 달려 그녀를 쫓아간다거나, 그 먼 길을 오로지 이산만을 생각하며 걷는 성송연은 그 자체로 시청자들에게 사랑의 강도를 전한다. 그 둘은 서로 만나지 않아도 멜로가 이루어지는 셈이다.

막상 만난다 하더라도 신분상의 차이가 있기에 하는 대사 또한 우회적이다. 성송연이 돌아와 죽을 고비를 넘겨 깨어났을 때, 이산이 그녀에게 말하는 “네가 가고 나는 버티지 못한다는 것을 몰랐더냐”는 대사는 직설어법이 아닌 간접어법으로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 이런 점은 ‘쾌도 홍길동’에서 홍길동과 허이녹의 관계에서도 나타난다. 코믹이라는 장르적 옷을 입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들은 직접적으로 서로를 향해 애정행각을 벌이는 낯간지러운 대사는 하지 않는다. 오히려 홍길동이 허이녹에게 ‘멍청이’이라고 말할 때, 먼 길 떠나는 길에 어머님의 무덤가 흙을 조잡하게 수놓은 주머니에 허이녹이 퍼담아 줄 때 그 사랑의 마음이 전해진다.

무엇보다도 사극이 멜로를 제대로 품어줄 수 있는 것은 멜로드라마가 그리고 있는 운명적인 사랑이 현대의 가치관으로는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사극은 그 시점을 과거로 돌려 운명적 사랑의 시대에 맞춰준다. 물론 지금의 가치에는 맞지 않지만 어느 정도는 ‘사극이니까’하는 마음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멜로, 그 진화의 길들
이러한 사극과 멜로가 만나는 것은 멜로드라마의 입장에서 보면 또 하나의 진화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현재 멜로드라마가 처한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한 방법이기도 하다. 이제 우리는 운명적인 사랑에 호소하는 순전한 멜로드라마에 공감하기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니 멜로드라마는 그 순혈주의를 고집하지 않고 타 장르와 몸을 섞는 실험이 필요하며 그것은 사극에서 볼 수 있듯이 이미 시작되었다. 그러면 이것은 사극만 가능한 일일까. 그렇지 않다.

멜로드라마가 현대물로서 진화의 몸부림과 가능성을 보여준 것은 이른바 휴먼드라마이다. 작년 ‘고맙습니다’가 그 첫 번째 길을 열었고, 그 이후 ‘인순이는 예쁘다’가 그 계보를 이었다. 현재 방영되고 있는 ‘불한당’ 역시 휴먼드라마를 표방했지만 그 진화의 계보가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휴먼드라마가 가진 가능성은 멜로드라마의 구도가 가진 남과 여의 만남을 사회적인 이슈로까지 확장시켜나간다는 점이다. ‘고맙습니다’의 영신(공효진)과 기서, 그리고 ‘인순이는 예쁘다’의 인순이(김현주)와 상우(김민준)의 만남은 멜로드라마로서의 남녀의 만남이기도 하지만, 몰이해와 편견을 넘어서는 과정이기도 하다.

또한 멜로드라마는 미스테리와 몸을 섞어 전혀 새로운 스타일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완벽한 이웃을 만나는 법’은 사랑을 넘어 사람을 포착하는 멜로드라마로서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사극이 끝없이 진화의 길을 걸어오는 것처럼, 장르드라마가 늘 새로운 도전을 하려 하는 것처럼 이제 멜로드라마도 변화하지 않으면, 실험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다. 그것이 장르적인 퓨전이든 아니면 전혀 새로운 방식이든지 간에 분명한 점은 멜로드라마도 진화해야 산다는 것이다.

이순재, 우리 시대의 아버지를 연기하다

도대체 이순재 연기의 끝은 어디일까. 현재 ‘이산’의 영조 역할 하나만 봐도 그렇다. 우리가 역사책을 통해 막연히 알고 있던 영조는 카리스마 넘치는 성군의 이미지. 하지만 이순재라는 연기자를 통해 드러나는 영조의 모습은 한 가지로 설명할 수 없는 복합미를 갖고 역사 속 박제된 인물에서 살아나고 있다. 때론 자애가 넘치는 모습을 보이다가도 일순간 추상같은 불호령을 내리고, 때론 인간적인 부족함을 드러내기도 하는 인물이다. 게다가 매병(치매)을 앓는 모습 속에서도 진지함을 잃지 않는 영조의 면면은 실로 천변만화의 얼굴을 순간적으로 바꾸면서도 전혀 어색함이 느껴지지 않는 이순재라는 연기자를 통해서만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리고 이순재의 연기가 늘 그러했듯이 거기서 발견되는 것은 여지없는 우리 시대 아버지의 모습이다.

연기자 이순재는 우리에게 아버지의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다. 그것은 아마도 1991년 김수현표 드라마라는 호칭이 붙었던 ‘사랑이 뭐길래’의 대발이 아버지라는 캐릭터 때문일 것이다. 대발이 아버지는 아무리 짜도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치약을 가까스로 짜내고는 ‘아직도 일주일은 더 쓰겠네’하고 말할 정도로 절약정신(?)이 생활화된 조금은 궁상스러우면서도, 가장 보수적이고 엄격한 아버지였다. 그 전까지 드라마 상에서 드러나는 아버지상이 ‘전원일기’의 김회장(최불암)처럼 인자하고 털털한 모습이었다면, 이순재가 연기한 아버지상은 이중적인 모습을 드러내면서 엄격함이나 고집 이면에 포착되는 궁상으로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조금씩 달라져 가는 세상 속에서 젊은 세대들에게 고집스런 아버지, 가부장적인 아버지로 비추어졌던 당대의 아버지들의 모습은 그러니까 ‘아껴야 산다’거나 ‘부지런해야 잘 산다’는 식의 사고방식이 생활이 된 경제 개발 시대를 살아온 당대 아버지들의 이 양면성 때문이기도 하다. 이순재는 바로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때론 이빨 하나 들어가지 않는 엄격함으로, 때론 한없이 부드러워지는 아버지의 모습을 오가며 연기했고 그것으로 시청자들에게 열렬한 공감을 얻어냈던 것이다.

하지만 시대는 계속 변해 아버지들의 고개는 점점 더 숙여졌다. IMF라는 파고를 넘으면서 권위는 추락했고, 구조조정과 조기퇴직이란 칼날 아래 그 어깨는 더 작아졌다. 반면 여성들의 사회진출이 활발해지면서 가족 내 여성들의 목소리는 더 커졌다. ‘거침없이 하이킥’의 이순재는 이렇게 달라지고 있는 아버지상을 다시 보여주었다. 가족 내에서 여전히 호통을 치  
   만 그 권위의 힘은 사라진지 오래다. 며느리인 박해미가 늘 ‘OK’를 연발하는 당당함을 보이는 반면, 이순재는 ‘야동순재’ 같은 굴욕의 모습을 보여주는 아버지가 되었다.

‘야동순재’라는 조어는 당대 달라지고 있는 사회와 아버지의 모습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야동’이라는 인터넷 사회를 대변하는 용어와 아버지상을 대변하는 ‘순재’가 만나자 권위적인 아버지상은 사라져버렸다. 또한 젊은이들의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문화를 기웃거리는 아버지의 모습은 수많은 젊은 세대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면서 이 시대의 아버지를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순재의 아버지 연기는 여기서 그친 것이 아니다.

‘거침없이 하이킥’에서 한없이 무너지던 모습을 통해 친근한 아버지상을 만들었던 이순재는 ‘이산’의 영조 역할로 오면서 권위를 되찾았다. 추상같은 말 한 마디로 대소신료들을 어쩔 줄 모르게 만드는 그 권위는 카리스마 자체였다. 그 앞에서 이산(이서진)은 물론이고 부인인 정순왕후(김여진)나 며느리인 혜경궁 홍씨(견미리)는 한없이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순재는 영조를 그저 권위적이고 카리스마 넘치는 인물로만 만들지 않았다.

자애로운 눈길로 이산의 가녀린 어깨를 두드려주기도 하며, 자신의 인간적인 과오를 한없이 뉘우치기도 한다. 이러한 ‘이산’의 아버지상은 좀더 현대 사회가 희구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그려낸다. 즉 ‘거침없이 하이킥’의 이순재가 무너져 내리는 아버지를 현실적으로 포착했다면, ‘이산’의 아버지, 영조는 그 시대를 과거로 돌려 다시 세워지는 아버지에 대한 환타지를 끄집어냈다. 강하면서도 자애로운 모습으로의 복권을 희구하게 된 것이다.

이순재의 연기인생을 들여다보면 거기서 우리 시대의 아버지들을 만날 수 있다. 그것은 도무지 이해되지 않을 것 같은 고집과 권위를 내세우던 아버지이기도 하고, 한없이 권위가 무너져 내리던 아버지이기도 하며, 우리가 드라마 속에서라도 발견하고 싶은 강한 아버지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이순재의 아버지 연기는 그 겉모습에 머물지 않고 그 고집이나 굴욕 이면에 숨겨진 아버지들의 속내를 잡아낸다는 점이다. 그래서일까. 이제는 이순재의 얼굴 표정 하나를 살피는 것으로 이 시대 아버지들을 이해하게 되는 것은. 모쪼록 이순재의 얼굴이, 아니 이 시대 아버지들의 얼굴이 환하게 웃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선호세대 다른 드라마와 시청률

방송 3사 드라마의 나이는 어떻게 될까. 이것은 물론 각 방송사별로 성공하는 드라마를 만든 주력 세대가 누구냐는 질문이다. 천편일률적으로 세대를 나눌 수는 없지만 대체로 MBC는 3,40대가 주 시청세대이며, SBS는 4,50대로 그보다 시청세대가 높다. 반면 KBS는 3,40대에서부터 5,60대까지 고른 시청층을 보유하고 있다. 어느 방송사의 드라마이건 10대와 20대는 이제 TV 시청률에서 그 중요성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이른바 ‘닥본사’보다는 TV 이외의 다른 매체를 통해 보는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이들 현재 방송사별 드라마들의 나이에 따라 주중과 주말에서 시청률의 희비쌍곡선이 만들어진다는 점이다. 주중에는 주로 3,40대의 시청층이 드라마 시청률을 좌우하고 있는 반면, 주말에는 그 보다는 윗세대인 4,50대의 시청층이 그 역할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 주중에 ‘이산’이나 ‘뉴하트’ 같은 MBC 드라마들이 인기를 끌고, 반면 주말에는 SBS ‘황금신부’나 KBS ‘대왕 세종’같은 드라마들이 인기를 끄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주중 드라마 3,40대가 좌우
주중 드라마의 수위를 차지하고 있는 MBC 드라마들의 최근 특징은 그 타깃을 3,40대 여성에 맞추고 있다는 점이다. AGB 닐슨의 세대별 시청률 백분율 자료(1월1일∼1월20일)에 의하면 주중 드라마를 이끌고 있는 ‘이산’과 ‘뉴하트’ 모두 3,40대 여성의 분포도가 가장 높았다. ‘이산’은 3,40대 여성이 30%(30대 16%, 40대 14%)였고, ‘뉴하트’는 31%(30대 17%, 40대 14%)였다. 여기에 같은 세대 남성들까지 포함하면 ‘이산’은 총 51%(30대 남성 11%, 40대 남성 10% = 21%), 즉 반 이상의 시청자가 3,40대라는 얘기가 된다. 마찬가지로 ‘뉴하트’도 총 48%(30대 남성 9%, 40대 남성 8% = 17%)로 반 수에 육박한다.

SBS의 ‘왕과 나’는 이에 비해 시청층이 더 높은데, 최근 들어 완성도에 대한 비판이 높아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시청률이 14% 내외를 유지하는 비결은 이 드라마가 사극이라는 점도 있지만 장년층 시청자들의 충성도가 그만큼 높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한 SBS의 ‘불한당’ 역시 주 시청층이 4,5,60대 여성으로 이 시청세대가 41%(남성까지 포함하면 무려 61%다)나 되는 반면, 30대는 10%(남성 포함해도 16%)에 불과했다. 역시 주중 드라마를 이끄는 주 시청층이 3,40대라는 걸 말해주는 대목이다.

한편 주중 드라마로서 MBC의 아성을 공략하는 유일한 드라마는 KBS의 ‘쾌도 홍길동’이다. 이 사극의 세대별 시청률은 특이한데, 남성 시청층은 적은 반면(40대 10%가 최고치), 여성 시청층은 30대부터 60대까지 고루 분포(30대 12%, 40대 12%, 50대 9%, 60대 9%)하고 있다. 여러 모로 사극의 진화와 맞물려 시청층이 다양해지고 있다는 반증인 셈이다.

주말 드라마 4, 50대 이상이 좌우
주중 드라마에서 3,40대 시청자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수위를 차지한 MBC 드라마. 하지만 주말 드라마의 성적표는 그다지 좋지 않다. 주말에 예능 프로그램으로서 ‘무한도전’이 드라마만큼의 시청률을 얻고 있는 것에 반해, 정작 드라마는 시청률 경쟁에서 멀어져 있다. 과거에 주말 드라마 하면 MBC를 떠올릴 정도로 강세였지만 그것은 옛말이 되었다. ‘깍두기’가 종영한 ‘며느리 전성시대’에 눌려 빛을 보지 못했고, ‘겨울새’는 조기종영 얘기까지 흘러나오고 있을 정도다.

반면 주중에서 별다른 힘을 쓰지 못했던 SBS는 주말 드라마에서 활짝 웃고 있다. 대표적인 드라마가 ‘황금신부’. 이 드라마의 주 시청층은 4,5,60대(전체의 38%)여성으로 이 세대의 남성 시청자까지 합치면 59%나 된다. 한편 전통적으로 강세를 보이고 있는 KBS 대하사극 ‘대왕 세종’은 주 시청층이 40대 이상 남성(33%)으로 여성 시청층까지 합치면 61%를 차지하고 있다. ‘대왕 세종’ 의 특이한 점은 시청률의 미세한 차이가 있지만 60대 시청자들의 높은 지지를 얻고 있다는 점(남 11%, 여 10%)이다.

시청률과 달라진 생활 패턴의 상관관계
이처럼 주중 드라마와 주말 드라마의 선호 세대가 다르고, 각 방송사별 드라마의 나이가 다른데서 현재의 시청률 등락을 이해할 수 있다. 주중 드라마를 이끄는 3,40대 시청층과 잘 맞아떨어진 주중 MBC 드라마들의 나이는 시청률 수위를 차지하게 하는 힘이며, 상대적으로 드라마 나이가 높은 주중 SBS 드라마들이 고전하는 이유가 된다. 반면 이런 상황은 주말에 와서는 역전된다. 그만큼 달라진 주말 생활 패턴과 맞물려 주말 드라마 시청층의 주 세대가 장년층이 되었다는 걸, SBS 드라마나 KBS 사극이 말해준다.

방송사의 드라마 성격이 특정 세대를 공략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드라마는 그 방송사의 이미지를 만들기도 하는 상황에서 이렇게 한 세대에 국한되는 이미지를 형성하는 것은 그다지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다. 이것은 어떤 면으로 보면 특정 세대에 대한 쏠림 현상을 말해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타깃 세대가 고정되면 당장은 시청률을 확보할 수 있겠지만 향후에는 비슷비슷한 톤의 드라마들이 등장할 것이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한 방송사에서도 여러 세대들이 향유할 수 있는 다채로운 프로그램과 드라마가 다양하게 포진되길 기대한다.

‘대왕 세종’과 ‘이산’, 닮았다

KBS ‘대왕 세종’과 MBC ‘이산’은 서로 닮았다. 먼저 사극에서 주로 다루었던 전쟁이 없다는 점이다. 대신 그 자리는 정치가 차지했다. 이것은 이제 전쟁과 같은 거대담론보다는 현실정치가 피부에 더 와 닿기 때문이다. 어디서 어떤 국지전이 벌어지고 있다고 해도 당장 목구멍이 포도청인 세상에서, 그것도 살얼음판 같은 사회 생활에 지쳐 돌아와 이제 TV 앞에 앉은 시청자에게는 남의 나라 얘기 같은 전쟁 영웅의 환타지보다 성군에 대한 희구가 더 간절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대왕 세종’과 ‘이산’이 그리고 있는 성군은 도대체 어떻게 탄생하는 것일까.

태평성대? 피 바람 부는 난세!
우리는 흔히 태평성대의 전형처럼 일컫는 세종 시대와 영ㆍ정조 시대를 생각하며 그 시대를 연 왕들 또한 평탄한 삶을 살았으리라 착각하곤 한다. 하지만 우리가 두 드라마를 통해 포착하는 것은 그들의 삶이 한 발 잘못 내디디면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생존의 삶이었음을 알게 된다. 물론 드라마로서 극화된 부분이겠지만, 이산(이서진)은 노론벽파의 끝없는 암살의 위협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고, 훗날 세종이 되는 충녕대군 역시 어린 시절 양녕대군 추종세력의 자신을 제거하려는 위협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이산 정조가 그 상황에 몰리게 되는 것은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노론벽파들의 무고로 인해 죽게 되기 때문이다. 정조는 실로 비극적인 가족관계를 갖게 되는데 그것은 할아버지인 영조(이순재)가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게 했고, 그것의 배후세력이었던 고모인 화완옹주(성현아)와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김여진)가 자신까지 제거하려 들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은 ‘대왕 세종’에서도 유사하다. 왕자의 난으로 형제의 피를 묻히고 등극한 태종 이방원은 왕이란 대의를 위해 자기 아들이나 형제까지도 죽일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게다가 양녕대군의 추종세력들은 충녕대군을 호시탐탐 죽음으로 몰아넣으려 하며, 거기에는 충녕대군의 외척인 민씨 형제도 포함되어 있다.

난세 속에서 만난 백성들
그러니 이산과 충녕대군은 태생에서부터 가시밭길을 걸을 운명을 타고 난 인물들. 하지만 그 난세 속에서 친인척마저 믿을 수 없는 이들의 눈이 당도한 곳은 다름 아닌 백성들이다. ‘이산’의 성송연(한지민)과 박대수(이종수)는 바로 그 백성이란 이름의 상징적인 인물들인 셈이다. 그 운명적인 혹은 어찌 보면 당연한 만남 속에서 이산은 그들과 동무의 관계를 가진다. 즉 만 백성의 어버이인 왕이 되기 이전까지, 이산은 백성들의 동무처럼 한껏 시선을 낮추고 있었다는 말이다.

‘대왕 세종’에서 백성의 상징처럼 대변되는 인물은 장원(조재완)이라는 충녕대군의 내관이다. “나는 너의 왕자야. 너는 나의 백성이고. 왕자가 백성을 지키는 거다.”라는 대사가 그걸 말해준다. 하지만 1,2회를 통해 보여준 충녕대군과 장원의 관계는 주종의 관계이면서도 형제 같은 끈끈함을 보인다. 장원의 아버지가 해수병으로 고생한다 하자 약을 손수 지어 주고, 자신 때문에 매맞아 죽게 된 장원 앞에서 피눈물을 흘린다. 충녕대군은 단 한 명의 백성도 귀하게 여길 줄 아는 훗날의 세종대왕의 면모를 그 때부터 갖게된 셈이다.

순수한 정치를 실현시키다
그 때 만났던 백성들 앞에서 무엇 하나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던 이산과 충녕대군이 훗날 성군이 된 것은 바로 그 초심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드라마 상에서 그려지는 정치 대결은 극명하게 두 축으로 나뉘어진다. 한 축은 이상적인 정치, 즉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펼치는 정치의 세계이고, 반대 축은 권력과 세도를 잡기 위한 현실 정치의 세계이다. 이상적인 정치는 궁극적으로 가야할 정치의 길이지만, 현실 정치의 힘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공염불이 되고 만다. 어린 시절, 순수한 뜻만 갖고 펼치던 이산의 금난전권 철폐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는 이유가 그 때문이고, 충녕대군의 의기에만 기댄 태종 앞에서의 충언이 거꾸로 억울한 자들을 물고 나게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니 이 순수하기만 한 두 학구파가 자신의 순수정치를 실현시키기 위한 방법은 오로지 철두철미한 준비를 통한 다양한 인물등용에서 비롯될 수밖에 없다. 이 난세 속에서 가장 많은 인물들이 배출되게 된 것은 권력을 위해 자신을 죽음의 위기에 몰아넣은 조정의 썩은 물보다, 저 바깥 세상 가장 낮은 백성들이 사는 곳에서조차 반짝반짝 빛나는 옥석을 찾아내는 왕들의 초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발탁된 인물들은 가장 많은 업적들을 남겼고 그것은 훗날 이 시대를 태평성대로 부르게 만드는 이유가 되었다. 난세 속에서도 백성을 가장 높은 자리에 위치시킨다는 애초의 초심을 잃지 않고, 그 순수한 마음을 철저한 준비와 끈기로 실현시킨 것, 성군의 탄생은 거기에서 비롯된다. 비록 본래 역사와 다른 점이 있지만 그 드라마 안에서라도 이러한 성군을 찾는 마음은 조선시대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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