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보다 말을 선택한 정치사극, ‘대왕 세종’

대중들에게 사극이란 어떤 이미지로 자리하고 있을까. ‘조선왕조실록’으로 상징되는 과거의 정통사극은 그 중심이 대사에 있었다. 주로 편전에 모여 갑론을박을 하거나 누군가의 방에 모여 모의를 하고, 때로는 여인네들의 암투가 벌어지는 그 중심에는 늘 말이 자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하사극, 퓨전사극들이 등장하면서 말의 자리만큼 위상이 높아진 건 볼거리다. 이런 시점에 ‘대왕 세종’같은 칼보다는 말의 힘을 더 믿은 성군을 다룬다는 것은 어찌 보면 도전이 아닐 수 없다.

볼거리의 시대에 말의 사극이 갖는 한계
그렇지 않아도 현실에서의 정치는 마치 탁상공론처럼 허망하게만 느껴질 때가 많다. 그러니 가뜩이나 정치인들의 정치에 대한 혐오와 무관심이 팽배한 상황에서 본격적인 정치사극이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은 많지 않다. 오히려 정치사극을 표방하면서 정치에 대한 환타지를 심어주는 ‘이산’같은 선택이 성공 확률은 더 높을 것이다. 거기에는 적어도 현실에서 정치를 혐오하게 만드는 명명백백한 진실의 승리나 선한 선택의 존중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왕 세종’이 선택한 진짜 정치의 세계 속에서 이런 배려는 나약함과 동일시된다.

‘대왕 세종’에서 선악구도는 순진한 어린아이들의 장난처럼 취급된다. 세종(김상경)은 오히려 자신을 견제하라며 정적이었던 박은(박영지)을 집현전의 수장으로 세우고, 양녕대군(박상민)을 왕재로 세우려했던 황희(김갑수)를 최측근으로 끌어들인다. 때론 적으로 판단되었던 허조(김하균)는 결정적인 순간에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으면서 세종에게 유리한 입장이 되기도 한다. 그러니 이 ‘대왕 세종’이라는 드라마의 판은 칼 하나로 반을 나눌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각자 자신들의 입장을 가진 정치인들이 존재하면서, 특정한 사안에 대해 각자의 입장을 갖는데 이 미묘한 입장 차가 정치사극의 묘미를 만들어낸다.

인물의 선악구도가 아닌 정치의 대결구도
이 사극의 진짜 재미는 그 독특한 구도에 있다. 주인공인 세종의 마음은 늘 민심을 향해 있으나 아군이든 적군이든 자신의 밑에서 실제적인 정치를 수행하는 신하들은 민심 자체보다는 정책의 명분에 더 휩싸인다. 조선만의 역법을 갖겠다는 세종의 마음은 그것이 민초들의 궁핍한 삶을 해결해줄 것이라 믿는 반면, 이를 반대하는 조말생(정동환)은 ‘조선의 하늘은 조선인의 것’이라는 그 발상이 중국의 반발을 일으켜 결과적으로 망국으로 가는 길이라 판단한다. 한편 세종을 지지하는 신하들은 세종의 이상을 실현시켜줄 현실적인 명분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이 구도는 또한 르네상스맨으로서의 세종이 가진 과학에 근거한 민생정치와 신하들이 가진 비과학에 근거한 명분정치의 대결구도이기도 하다. ‘대왕 세종’에서 장영실(이천희)이 갖는 존재감은 바로 이 인물이 세종이 꿈꾸는 정치세계의 밑거름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르네상스가 중세의 비이성의 어둠을 물리치는 이성의 빛이 되었던 것처럼, 세종은 물난리로 인한 자연재해를 하늘에 제를 올리는 것보다는 과학의 힘으로 이겨내려 한다. ‘민심은 천심’이라는 말은 입장 차에 따라 다르게 해석된다. 반대하는 신하들이 이 말을 ‘민심처럼 하늘마저 등을 돌렸다’고 결과론적으로 활용하는 반면, 세종은 바로 그 ‘민심을 잡기 위해 천심을 바꾸겠다’는 보다 적극적인 인간중심의 철학을 내보인다.

‘대왕 세종’은 칼의 현란함을 추구하는 시대에 말의 대결을 보여주는 정치사극이다. 이 사극이 그다지 시청률에서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단순히 시간대와 방송사를 옮겼다는 것에 이유가 있는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 이유는 이 사극이 정치의 너무 적나라한 부분을 보여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현실 정치가 우리가 생각한대로 바람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면 이 진창을 그대로 보여주는 정치사극의 묘미는 더욱 깊었을 지도 모른다. 반대로 현실 정치가 진창으로 비춰지고 있었기에 이 본격적인 정치사극은 그 반복으로 느껴지지 않았을까. 하지만 실제 정치의 세계에서든, 아니면 정치사극 속에서든 그 본질은 말(대사, 대화, 협상)이지 칼이 아니다.

드라마, 초반 시선을 잡아야 성공한다

영화에 ‘5분의 법칙’이 있다면 드라마에는 ‘첫 회의 법칙’이 있다. 첫 회에서 시선을 잡아끌지 못하면 성공하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따라서 드라마 속 하이라이트 부분을 맨 앞에서 먼저 보여줘 시선을 잡아끈 다음, 회상 신으로 돌아가 극을 전개시키는 방식은 하나의 전형이 되었다. 멜로드라마에서 해외로케를 통해 이국적인 풍광을 보여주고, 사극에서 스펙터클한 액션장면을 보여주거나, 전문직 장르 드라마에서 충격적인 사건이나 긴장감 넘치는 상황을 첫 회에 제시하는 건 그 때문이다.

사극의 첫 회, 지붕 위를 걷다
‘일지매’는 첫 회에서 갑의를 착용한 일지매(이준기)가 전각지붕 위를 바람처럼 달려나가고 왕실의 보물창고인 내수고에 침입해 보물을 훔치는 장면을 말 그대로 스펙터클하게 보여주었다. 일지매가 담을 넘어 탈출하면서 매화나무 아래 안착한 후 카메라가 일지매의 눈으로 쑥 들어가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그것은 첫 번째 시선을 잡아끄는데 성공한 ‘일지매’의 면면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제 시청자들은 그 붙잡힌 시선에 이끌려 이 멋진 일지매가 되기까지의 과정, 즉 겸이에서 용이가 되고 용이에서 일지매가 되는 그 과정을 보게 된다.

궁을 배경으로 한 액션 신으로 시청자의 눈을 사로잡는 것은 사극의 첫 회 공식처럼 자리잡았다. ‘이산’에서 궁중연회 도중 갑자기 영조(이순재)를 향해 총을 쏘는 군졸들에 의해 아수라장이 된 연회장을 빠져나가 도망치는 영조 앞을 사도세자가 가로막는 장면은 물론 영조의 꿈이지만 시청자들의 눈을 빼앗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이것은 저 ‘대왕 세종’의 첫 회를 화려하게 장식했던 자객들의 궁궐 침입 시퀀스와 유사하다. 이 장면 역시 실제 상황이 아닌 궁궐 내의 훈련 상황이었던 점을 보면, 이런 첫 회의 액션 신들은 다분히 의도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방송 드라마의 첫 회, 방송의 이면을 보다
최근 한 트렌드처럼 등장하고 있는 이른바 ‘방송 드라마’들이 첫 회에서 보여주는 것은 방송의 이면이다. ‘스포트라이트’는 첫 방에서 남편의 불륜사실을 알게된 앵커가 방송도중 눈물을 흘려 자칫 방송사고가 될 뻔한 상황을 보여준다. 우리가 뉴스를 볼 때 봐왔던 수면 위의 장면들, 그 아래 숨겨진 숨가쁜 발놀림을 보여주는 것으로 우리의 시선을 잡아끈다. 그 아찔한 상황 속에서 서우진(손예진) 기자는 순발력을 보여주면서 자연스럽게 자신의 캐릭터 선보인다.

각종 시상식은 방송 드라마의 볼거리 중 하나이다. ‘온에어’의 첫 회가 시상식의 이면을 잡아내면서 나눠주기식 시상식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그려냈던 것처럼, ‘태양의 여자’는 상해에서 벌어진 아시안TV페스티벌에서 ‘원더우먼쇼’로 상을 받는 아나운서 신도영(김지수)에 대한 장면부터 시작한다. 이 시상식이라는 시퀀스는 일단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하면서, 시청자들에게 익숙한 장면과 동시에 그 이면이라는 낯선 그림을 통해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점이 있다. ‘태양의 여자’는 이 첫 회를 통해 해외로케와 시상식이라는 볼거리를 보여주면서 앞으로 벌어질 신도영의 상황, 즉 ‘원더우먼’으로서 잘 나가는 아나운서이지만, 무언가 내면적인 문제가 있는 그 정황을 모두 잡아낸다.

첫 회에 대한 집착, 문제는 없나
이 밖에도 가족드라마 같은 경우에는 대개 문제를 내포한 가족들의 면면을 일상을 훑어가며 보여준다. ‘엄마가 뿔났다’의 첫 회가 영수(신은경)와 종원(류진)이 함께 침대에서 깨어나는 장면에서 시작하는 것은 장면 자체가 갖는 시선 끌기의 목적도 있지만 앞으로 벌어질 이 드라마 속의 갈등상황(이 사실을 안 엄마가 뿔나는)을 예고해준다. ‘행복합니다’의 첫 회 장면은 이질적인 두 집안을 병치해서 보여주는데, 준수(이훈)네 집은 침입한 도둑을 쫓는 에피소드로 우스꽝스럽게 연출된 반면, 그와 결혼할 재벌집 서윤(김효진)네 집은 연말을 보내기 위해 홍콩으로 떠나는 화려함을 대비시킨다. 이것은 후에 벌어질 계층 갈등 상황을 예고하는 것이다.

이러한 첫 회에 대한 드라마들의 집착은 우후죽순 쏟아져 나오는 드라마들 속에서 시선을 잡아끌기 위해 당연한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문제점도 양산한다. 최근 월화극에 대한 편성전쟁으로 그 첫 회가 월요일이 아닌 화요일에 방영되게 된 것은, 바로 이 첫 회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그 피해는 고스란히 시청자들에게 전가된다. 게다가 이 초반부에 눈길을 잡아야 승부를 낼 수 있다는 강박관념은 자칫 하이라이트를 너무 앞으로 배치해 중반부터 긴장감이 풀어지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물론 앞으로 어떤 새로운 에피소드들이 나올 지는 예측할 수 없지만, ‘스포트라이트’는 초반에 연쇄살인범 장진규 에피소드라는 초강수를 쓰면서 오히려 새로운 에피소드에 대한 압박에 시달리게 되기도 했다.

이러한 현상, 즉 하이라이트를 앞으로 빼놓아 드라마 중반이 허전해지는 상황은 최근 드라마의 한 경향처럼 반복되고 있다. ‘일지매’도 초반부 강력한 액션 신으로 한껏 기대를 가지게 되었지만 그만큼 다음 에피소드들의 소소함에 부담이 갔던 것도 사실이다. ‘대왕 세종’ 역시 초반의 화려한 볼거리에서 중반의 대사 중심의 정치 이야기로 들어서면서 시청률이 하락하는 결과를 낳았다. 따라서 ‘대왕 세종’은 이제 대마도 정벌이라는 아이템으로 볼거리를 잡아내려 노력하고 있다. ‘드라마 첫 회의 법칙’은 분명 이전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드라마의 한 경향으로 자리잡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첫 회에 대한 지나친 집착 또한 드라마에는 독이 될 것이다. 첫 회가 매력적이어야 하는 건 분명하지만, 그만큼 중반 진행과 후반 마무리도 중요하다는 것이 간과되지는 않아야 한다.

연장방영에 변칙편성까지 시청률에 경도된 ‘이산’

‘이산’은 소재로 보나 특유의 시각으로 보나 훌륭한 기획의 사극임이 분명하다. 조선조 22대 임금으로 파당정치를 뒤엎고 개혁을 단행해 태평성대를 이루었던 성군. 게다가 이 정조는 끊임없는 암살 위협에 시달렸던 임금이다. 이런 되는 소재를 가지고 ‘이산’은 왕과 개인으로서의 정조를 모두 다루는 독특한 사극의 한 장을 열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기획의 창대함을 두고 볼 때, ‘이산’이 얻은 것은 그 기대치에 한참 못 미치고 있다. 물론 초기 너무 과도한 의도를 세워놓은 것 자체가 잘못이지만, 작품은 뒤로한 채 시청률에 경도된 연장방영이나 변칙편성은 오히려 초반부 ‘이산’의 참신한 기획마저 색 바래게 만들고 있다. 도대체 왜 ‘이산’은 보다 깔끔하게 끝내지 못하는 걸까.

창대한 기획에서 빗나간 초반부
‘이산’의 기획의도를 다시 들추어보면 그 창대한 기획의 면면들을 읽어낼 수 있다. 그 기획의도에는 파란만장한 개인사를 가진 정조는 물론이고, 파당정치를 해소한 정치인으로서의 정조, 실물경제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조선경제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이룩한 정조, 다양한 실학파 인재들을 등용해 문화와 과학에 꽃을 피웠던 정조, 그리고 한 여인을 사랑했던 정조까지를 다루려 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이산’은 그저 왕조의 정치사만을 그리려 한 것이 아니라, 정조 시대의 정치, 경제, 문화, 군사 등을 모두 한 편의 화폭에 담아내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종영을 앞둔 ‘이산’이 다룬 것은 이 중 그 어느 하나도 만족시킬만한 결과를 보이지 못했다. 탕평책을 시행해나가는 정조의 에피소드도 구체적인 것이 거의 없었고, 실물경제를 살리기 위한 에피소드도 금난전권 철폐라는 발표로 그친 격이 되었다. 애초 기획의도에 들어있던 성송연(한지민)의 조상계(조선시대 상인들의 조직) 에피소드는 어찌된 일인지 아예 다루어지지도 않았고, 또한 군제 정비나 병기 연구 과정 에피소드의 하나로서 ‘무예도보통지’ 같은 무예책자 역시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이렇게 된 것은 이산이 정조가 되는 과정에 너무 많은 부분을 할애했기 때문이다. 이산이 비로소 정조가 된 것은 45회에서다. 애초 계획이었던 60회에서의 종영은 이 상황에서는 불가능한 것이 된다. 정조의 업적이나 애초 의도에 들어있던 정조시대의 정치, 경제, 문화 같은 것들은 아직 시작도 안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계획이 어그러진 것은 정순왕후(김여진)를 위시한 노론벽파의 끊임없는 암살시도(이것은 거의 마지막까지 다시 반복된다)와 영조(이순재)의 시험 속에서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이산의 모습을 과도하게 반복했기 때문이다.

연장방영, 그러나 정조는 여전히 보이지 않고
이 과정 속에서 오히려 초반부 이산보다 더 주목된 것은 영조와 홍국영(한상진)이었다. 즉 이 위기의 상황 속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이로써 영조와 홍국영(때로는 성송연)이 부각되면서 오히려 드라마를 끌어가는 중심 힘이 위치이동을 한 것이다. 영조의 매병(치매) 설정이 그토록 오래도록 지속되었던 것은 사실 정조를 다루기에도 벅찬 ‘이산’으로 보면 이해될 수 없는 것이다. 대신 시청률이란 잣대로 보면 이 상황은 이해될 수 있다. 극의 힘을 이끌고 가는 것이 영조였기 때문이다.

중반 이상을 지나오면서 정조가 아닌 영조에 집중된 ‘이산’에 있어서 MBC의 16부 연장방영 결정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것은 또한 시청자들의 바람이기도 했으니까. 연장 결정의 이유로서 MBC가 내세운 것도 “정조의 업적과 개혁정책을 자세히 보여주기 위해서”와 “이산과 송연과의 멜로 라인 등 그 밖의 다루지 못한 부분으로 이산 시청자들을 찾아가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시작된 연장방영 속에서도 여전히 정조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부각된 것은 홍국영이다. 홍국영의 끝없는 욕망과 그 추락에 대한 에피소드가 지속되었고, 본래 기획의도에서는 도화서에서 나와 조상계(조선시대 상인들의 조직)에도 들어가는 등 능동적인 캐릭터였던 성송연은 궁중 시집살이(?) 에피소드가 거듭되면서 수동적인 존재가 되었다. 홍국영의 죽음과 성송연의 장결병이란 불치병 에피소드로 채워지는 동안, 정조의 업적은 규장각 인물들과 정약용(송창의)의 간간한 ‘보고’로 처리되었다.

시청률이 ‘이산’의 완성도를 떨어뜨렸다
결과적으로 보면 ‘이산’은 성군으로서의 정조를(특히 정치인으로서의 면모) 제대로 그려내지 못했다. 여러 번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아쉽게도 ‘이산’이 선택한 것은 완성도보다는 시청률이었다. 완성도를 생각했다면 초반부 그렇게 질질 끌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고, 어쩔 수 없이 연장방영을 하게 되었다면 그 이유에 걸맞게 완성도를 보충해나갔어야 한다. 300회가 거듭되는 동안 이제나저제나 정조로서의 면모를 기다리고 기다려왔던 필자 같은 시청자들로서는 이 대책 없는 후반부의 허무함을 성송연의 죽음, 정조의 죽음 같은 감성적 충격 혹은 화성 원행 같은 스펙타클로 채워야 하는 입장이다.

게다가 최근 ‘이산’의 종영을 두고 벌어진 ‘오락가락 편성’은 그 마지막 끝나는 길까지 이 드라마가 시청률의 희생자이자 가해자가 되고 있는 것 같아 씁쓸함을 남긴다. 이유야 어쨌건 두 차례의 스페셜 프로그램과 한 주에 한 번씩 띄엄띄엄 편성된 ‘이산’의 종영은 확실히 정상적인 끝맺음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비정상적인 끝맺음을 함으로써 시청률로 보면 ‘이산’은 마지막 가는 길까지 방송사에 최대의 이익을 남겨준 드라마가 되었다. 용두사미가 되어버린 ‘이산’은 바로 그 시청률을 위해 완성도를 포기한 지점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이제 종영하는 마당에 ‘이산’의 이런 문제들을 시시콜콜 끄집어내는 것은 이것이 자칫 성공하는 드라마의 한 전형으로 굳어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다. 최근 들어 드라마들은 초반부 경쟁이 치열해지면서(편성 전쟁의 진짜 얼굴은 이것이다) 초반 시선잡기에 대부분의 힘을 쓰는 경향이 있다. 물론 이 초반의 힘이 끝까지 지속된다면야 문제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초반의 과도한 힘주기는 대부분 중반 이후부터의 긴장감 저하 같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다반사다. 용의 머리만큼 중요한 것이 용의 몸통이자 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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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을 사적인 존재로 다루는 이점과 한계

‘이산’은 정조라는 왕이 아닌, 이산이라는 한 인간에 더 주목한 사극이다. 어린 시절, “이름을 불러다오”하고 이산이 요청하고, 거기에 대해 어색하고 수줍은 목소리로 성송연이 “산아”하고 답하는 장면은 이 사극의 입장을 집약적으로 드러내준다. 이러한 왕이라는 공적 존재에서 이산이라는 사적 존재에 주목함으로써 ‘이산’은 조선시대라는 위계질서 속에서도 수평적 관계 같은 현대적 맥락을 가져갈 수 있었다.

왕이 되기 전까지 사적인 존재로서의 이산의 행적 자체만을 다루는 것은 별 무리가 없으며 오히려 장점이 된다. 실제로 끊임없는 암살의 위협 속에서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이산(이서진)의 몸부림과 그런 이산을 돕는 여러 인물들의 등장은 이 사극이 주는 재미의 핵심이기도 했다. 이 과정 속에서 도화서의 다모로 일하는 성송연(한지민)이 그림을 통해 이산을 돕는 설정 같은 것들은 이 사극만이 줄 수 있는 묘미가 분명하다.

이 과정에서 사극에 힘을 준 인물은 이산의 할아버지인 영조(이순재)와 홍국영(한상진)이다. 영조는 이산을 시험에도 빠뜨리는 인물이면서 동시에 그 문제를 해결해주는 역할도 한다. 또한 노론 세력들의 위협이 점점 노골적으로 드러나면서 영조의 역할만으로는 이산을 보호해줄 수 없는 입장이 되자, 급부상하는 인물이 홍국영이다. 이 착하기만 한 이산을 돕기 위해 기꺼이 진흙탕 속에 뒹굴 수 있는 홍국영은 현실적인 인물로서 주목받는다.

하지만 문제는 영조가 죽고 이산이 정조라는 왕이 되었을 때부터 불거진다. 아무리 사극이 조명하는 것이 이산이라는 개인이라 하더라도 왕은 어쩔 수 없는 공적인 존재로서 기능할 수밖에 없다. 즉 이제 정치를 해야하는 상황에 도달하게 되는데, 정치란 사적인 행적으로는 다루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만일 정조의 정치 자체를 이렇게 사적인 얘기로 풀어낸다면 자칫 조선시대 한 성군의 치적을 정치적 개혁과 타협의 성과가 아닌 끝없는 음모론과 밀실정치로 전락시킬 수도 있다. 즉 사적인 약점들을 캐내고 그걸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는 측면만 강조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산’은 이 부분에 대해 고민을 한 흔적이 역력하다. 왕이 아닌 이산이라는 개인을 다루겠다고 할 때부터 ‘이산’은 정치드라마가 얼마나 복잡하고 어려운가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정치적 사안에 대한 미묘한 입장들이 서로 부딪치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변수들이 나타나 실제 정치적 결과로 이어지는 복잡한 상황들은 저 ‘대왕 세종’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 정치 이야기에 재미를 느끼는 사람이라면 열광을 하겠지만 대부분의 시청자들은 정치라는 단어 자체에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것이다.

‘이산’이 정조가 즉위한 이후부터 다루는 정치적인 이야기가 주로 경제적인 문제(예를 들면 금난전권 폐지 같은)에 더 중점을 둔 것은 바로 그러한 정치에 대한 시청자들의 혐오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새로이 등장하는 박제가, 이덕무 같은 실학파 인물들이 사극의 중심으로 오지 못하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이들은 그저 ‘이산’이라는 사극에서 이산이 정조가 되었기에 반드시 해야할 정치적 책무들을 복잡한 정치 이야기가 아니라 그 인물들의 면면으로 쉽게 해결해주는 역할을 할 뿐이다. 이러한 상황은 새로 등장한 정약용(송창의)을 보면 알 수 있다. 정약용은 정치인으로서의 면모라기보다는 오히려 발명가나 과학자의 면모로서 더 부각된다.

왕이 되었으나 사적인 얘기에 천착함으로써 ‘이산’이 사극 후반에 집중한 것은 홍국영과 성송연이다. 홍국영의 개인적인 야심을 부각시켰고, 그것이 정조와 부딪치면서 벌어지는 권력 투쟁에 더 집중했으며, 성송연의 의빈으로의 성장과정과 아들이 세자로 책봉되고 또 죽음을 맞게 되는 비극적인 상황에 사극의 대부분이 할애되었다. 정조의 왕으로서의 정치적 업적은 전면에 등장하지 않으나 막연히 규장각 인물들이 하고 있거나 열심히 일하는 정조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처리되었다.

‘이산’이 후반부에 와서 초반의 힘을 잃어버린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왕이 되었기 때문이다. 굳이 이산이라는 인물에만 집중하려 했다면 정조로 즉위되는 그 순간까지만을 사극으로 다루었어야 하지 않을까. 혹은 정조가 되는 그 순간부터는 이야기를 좀 다른 패턴으로 끌고 갔어야 했다. 사적인 이야기를 풀어내더라도 새로운 실학파 인물들과의 관계를 더 주목하면서 거기서 자연스럽게 정치적 업적이 드러나게 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이 사극의 연장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런 아쉬움들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그 아쉬움은 이러한 결과로 ‘이산’에서 더 주목된 인물들은 정조보다는 영조, 홍국영, 성송연이 되었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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