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근같은 입, 백성을 자식처럼 보는 마음

MBC 월화 사극 ‘이산’에서 앞으로 정조가 될 세손 이산(이서진)은 할아버지 영조(이순재)가 준 전권을 갖고 개혁을 시도한다. 그간 호시탐탐 자신을 암살하려는 자들과 싸워왔던 이산으로서는 그 갑작스런 전권이 부담스러울 수 있었겠지만 절치부심 칼날을 집어든다. 제일 먼저 칼을 대는 곳은 시전상인들이 틀어쥐고 있는 경제다. 

정치란 사실 경제적인 뒷받침이 되지 않으면 말만 무성하고 실제 백성은 곤궁함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니 만큼 방향은 제대로 잡은 셈이다. 그들과 부패한 신하들의 정경유착은 난전상인들과 같은 백성들의 상업을 뿌리째 흔들어왔다. 게다가 백성들에게 가야할 경제적 혜택이 부패한 신하들에게 가면서 그렇게 얻어진 경제적 힘을 바탕으로 자신을 압박하는 상황이니 이산으로서는 이것이 일거양득의 기회가 아닐 수 없다.

명분도 확실하고 백성들의 마음도 이산에게 기울어진 상황, 그러나 그 속에서 영조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다. 영조는 이미 이산이 시도하는 개혁이 어려울 것이란 점을 알고 있었던 셈이다. 이산은 시전상인들이 자신들의 물건을 태워버리고, 외부에서 들어오는 물건들을 매점매석 해버리자 난항에 빠진다. 경제가 돌지 않는 것이다. 백성을 위한다고 했던 일은 백성을 더욱 곤궁에 빠뜨리고 결국 이산은 모든 전권을 영조에게 다시 돌려주게 된다.

그 때 영조가 하는 말이 인상적이다. 그 이야기의 요지는 ‘자신도 시전상인들이 깡패 같은 자들이라는 걸 잘 알지만, 정치란 무릇 백성을 자식처럼 긍휼히 여기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그러니 그 깡패 같은 자들도 또한 자식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나쁜 자식도 저마다의 능력은 갖고 있는데 그 나쁜 짓을 나무란다고 능력까지 빼앗는 것은 부모가 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정조의 시전상인들이 가진 금난전권 혁파 시도와 실패 그리고 거기에 대한 영조의 대사는 작금의 정치가 보여준 개혁이라는 명분과 현실과의 괴리를 다시금 떠올리게 만든다. 무수히 많은 개혁에 대한 이야기들과 염원이 있었지만 실상 이루어진 것이 얼마나 있으며, 설사 이루어졌다 해도 그것이 진정으로 국민들의 곤궁함을 풀어주었던가. 혹 못 가진 자들을 위한 개혁의 대의명분이 앞서 가진 자들의 숨통만 조였던 것은 아닌가. 대선을 치르는 현재, 가지고 못 가지고를 떠나 모든 이들의 입에서 경제를 제일 우선으로 내세우게 된 것은 그 여파가 국민 모두에게 미쳤음을 방증한다.

물론 이런 상황이 연출된 데는 개혁을 하려는 자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거기에 만만찮은 반대가 있었고, 그것은 ‘이산’에서 보이듯이 무엇 하나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이산의 상황과 다르지 않았을 수도 있다. 결국 이 어려운 상황을 만든 것은 이 끝을 알 수 없는 대결구도라고 밖에 볼 수가 없다. 정작 있어야할 국민의 자리는 사라지고 당의 이익만을 위해 ‘반대를 위한 반대’, ‘찬성을 위한 찬성’으로만 점철된 ‘저들만의 리그’가 만들어낸 결과가 아닐까.

영조는 늘 백성들을 그 가장 높은 자리에 두고 정치를 펴나간다. 신하들의 감언이설에 잘 넘어가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다. 백성이 상전이다 보니 정치적으로 적과 아군을 나누는 것은 무의미하다. 백성을 위하는 것이면 어느 쪽이든 손을 들어주어야 한다. 그는 말 그대로 ‘깡패 같은 아들까지 보듬는 가슴’을 가지고 있다. 그는 또한 섣불리 가볍게 입을 열지 않는다. 자신이 직접 명령하기보다는 신하들이 스스로 얘기하게 만드는 화법을 구사한다. 영조가 보여주는 일련의 정치적 행보가 하려는 말은 이런 것이다. ‘임금이란 참으로 무서운 자리이다. 자신의 말 한 마디에 수많은 백성들이 사지로 몰릴 수 있으니.’ 이 말은 지금에도 해당되는 말이다. 누가 당선되든 국민들을 진정 자식처럼 여길 수 있는 영조 같은 정치인이 되길 기대한다.

드라마 속, 알파걸을 밀어주는 알파보이들

‘커피 프린스 1호점’의 최한결(공유)은 알파보이다. 재벌집 아들에, 다 허물어져 가는 왕자다방을 커피 프린스로 둔갑시킬 만큼 능력 있고, 잘 생긴데다가 다정다감하기까지 하다. 그런 알파보이가 소녀가장으로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일을 할 정도로 가난한 데다, 선머슴처럼 생긴 외모에 털털하기 그지없는 성격으로 남자로 오인 받는 고은찬(윤은혜)을 사랑한다. 더 중요한 사실은 이 알파보이가 고은찬이란 여자의 숨은 재능을 키워내 알파걸이 되게 적극 밀어준다는 점이다.

‘커피 프린스 1호점’의 인기요인 중 한몫을 차지한 것은 바로 이 일하는 여성들이 갖는 환타지이다. 많이 변했다고는 하나 외국유학의 시간동안 묵묵히 기다리며 그녀의 성공을 빌어주는 남자는 아직까지는 드라마 속에서나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고은찬은 물론이고 한유주(채정안)-최한성(이선균) 커플을 통해서도 보여진다. 이미 둘 다 알파걸, 알파보이인 이 둘은 일과 사랑 사이에서 갈등한다. 결국 드라마가 보여준 것은 그 둘 다를 가지는 워킹우먼들의 환타지이다.

이런 알파걸을 밀어주는 알파보이는 현대물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극 속으로 들어온 알파보이 이산(이서진)은 장차 알파걸이 될 성송연(한지민)을 적극 밀어준다. 그는 성송연에게 “왜 자신이 가진 재능을 살려 화원이 되려 하지 않느냐”고 되묻는다. 조선시대라는 역사적 시점에 그것도 왕이라는 신분까지 감안한다면 이 제안은 실로 파격적이고 충격적이라 할만하다. 지금 시대에도 하기 어려운 것을 남녀차별이 일상화되었던 조선시대에 한 셈이니 말이다.

그것은 단지 사탕발림의 말만이 아니다. 이산은 보다 적극적으로 이 일에 뛰어든다. 당시로서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기회, 즉 다모가 화원이 되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다. 게다가 이것은 단지 성송연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당대 모든 여성들의 사회진출을 밀어주기 위한 본보기로서 이 일을 벌인 이산은 어찌 보면 진정한 현대적 시각을 갖춘 남성이라 할만하다. 반면 대부분의 현대남성들이 그러하듯이 편견에 가득한 남정네들은 성송연과의 경합에서 자신들이 졌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어렵다. 그러니 저편에서 성송연의 사회진출을 그윽하게 바라보며 미소짓는 남자, 그녀의 알파보이 이산이 매력적이지 않을 수 있을까.

여성의 사회진출을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드라마 속 남성들에게 쏟아지는 찬사는 당연하다. 그만큼 현실의 남성들이 가진 편견과 싸우면서 당당히 사회 속에 제 자리를 찾아가는 알파걸들이 점차 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찌 보면 신데렐라 콤플렉스의 또 다른 양태로도 보인다. 하지만 그렇게만 치부할 수 없는 것이 남성들이 제시하는 것이 물질적인 부나 지위가 아니라 그녀들이 진정으로 잘 하고, 또 하고싶어하는 일을 뒤에서 묵묵히 밀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시대는 남성이 일방적으로 여성을 신데렐라로 만드는 이야기가 여성들에게 더 이상 매력이 없어질 정도의 세상이 되었다. 현대여성들은 종속적인 신분상승이 아닌 자아성취를 지지해주는 남성과의 동등한 만남을 원한다. 그것이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간 사극 속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현실여성들의 환타지가 스며든 드라마 속 여성 캐릭터의 변화는 또한 남성 캐릭터들의 변화까지 만들어내고 있다. 현대여성들은 자신을 알파걸로 알아주고 지지해주는 알파보이를 원한다.

사극만도 못한 정치판, 민생은 어디로

MBC 월화 사극‘이산’의 이산(이서진)은 노론 벽파의 강한 저항 앞에서도 결코 개혁의 고삐를 늦추지 않는다. 이산이 보는 조선의 정치는 썩었다. 조정대신들은 금난전권이라는 특혜를 시전상인들에게 주는 대신, 그들로부터 뇌물을 받아 정치자금으로 활용한다. 금난전권(난전을 금할 권리)을 가진 시전상인들은 생계를 위해 난전을 차릴 수밖에 없는 상인들을 핍박한다. 이러니 양극화 현상이 가중된다. 조정대신들과 시전상인들의 곳간은 넘쳐나고 난전으로 살아가는 백성들은 배를 곯는다.

영조(이순재)에 의해 전권을 위임받은 이산이 그 첫 번째 개혁으로 금난전권을 폐하려는 것은 그 때문이다. 시전상인들과 조정대신들의 검은 고리를 끊어 정적들의 돈줄을 죄는 한편, 백성들에게 편하게 장사할 수 있는 권리를 주기 위함이다. 사정이 이러니 여기에 가만히 있을 시전상인들과 조정대신들이 아니다. 자신들이 쌓아놨던 물품들을 불태우고 상점을 문닫아버리며 도성으로 물건들의 유입을 막자, 난전은 활기를 잃는다. 이를 틈타 조정대신들은 영조 앞에 나아가 난전의 허가를 물리라는 압력을 넣는다.

‘이산’이 보여주는 역사적 사건들의 일면들은 몇 백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다지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대기업의 정관계 로비 의혹이 불거지고 있는 요즘, 정경유착과 특혜비리의 고리는 과거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민생들만 곤궁한 삶을 살게되는 그 시스템 속에서 개혁을 해달라며 뽑아놓은 정치인들이 오히려 검은 돈과 유착해 자신들을 뽑아준 국민들을 곤궁에 빠뜨리는 이 아이러니한 상황 속에서 분통을 터뜨리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이런 상황은 비단 ‘이산’에서만 등장하는 게 아니다. ‘왕과 나’에서 수렴청정을 벗어난 성종(고주원)이 맞닥뜨리는 현실도 마찬가지다. 뇌물과 비리와 청탁이 오가는 조정대신들과 유착된 내시부의 개혁을 먼저 하려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부패한 내시부 수장들과 원로내시들의 결탁으로 이루어진 조치겸(전광렬) 판내시부사의 탄핵과 거기에 맞서는 하급내관들의 충돌은 몇 년 전 있었던 일련의 사건들을 연상시킨다. 비리를 파헤쳐야 할 감찰부가 원로내시들의 명분과 근위부의 무력을 쥐고 전횡을 일삼는 것 역시 어딘지 낯설지 않은 그림들이다. 성종이 김처선(오만석)을 앞세워 이런 개혁을 진행하는 이유 역시 바로 이런 전횡 속에서 곤궁해진 백성들을 보듬기 위함이다.

대선의 막바지에 있는 현재, 후보들의 면면을 보면서 국민들은 암담하기만 하다. 일찌감치 선두권을 확보한 후보는 각종 부정시비에 휘말렸고, 그를 견제해야할 다른 진영은 아직까지 누가 그 후보가 될지 정해지지 조차 못했다. 이런 와중에 이미 몇 차례 국민의 냉정한 평가를 받고 고배를 마셨던 후보가 슬그머니 등장했다. 다양한 공약들이 쏟아져야할 판에 정치공세가 난무하는 오리무중 정국 속에서 국민들의 관심은 저만치 밀쳐진 지 오래다. 국민들은 그런 정치가 지겹고 피곤하다. 적어도 자신들의 목소리에 진심으로 귀를 기울여주는 정치인이란 사극 속에서나 존재할 뿐이다. 국민들이 원하는 것은 민생뿐이다.

수시로 궁을 빠져나와 도성을 직접 살피는 이산의 백성을 향해 내미는 손이 따뜻하고 감동적으로 느껴지는 건 그 때문일 것이다. 자신들의 이권만을 챙기며 그 헤게모니를 놓지 않으려 반대를 위한 반대만을 일삼는 대신들 앞에서 조목조목 준비한 논리의 칼을 내세우는 이산이 속시원한 건 그 때문이다. 자신에 대한 암살기도가 언제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도 직접 그 위험 속으로 뛰어드는 이산이 진정한 백성들의 지도자로 보이는 건 그 때문이다. 가장 높은 위치에 있으면서 가장 낮은 자를 두려워하고 긍휼히 여기는 이산이 더 높게 느껴지는 건 그 때문이다. 과연 이런 사극 속의 정치인들은 환타지에서나 존재할 뿐일까.

순수한 동심 vs 살벌한 어른들 세상

MBC 월화드라마 ‘이산’에서 이산(이서진)은 어린 시절 지워지지 않는 트라우마를 갖고 있다. 그것은 할아버지(영조)가 아버지(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인 것이다. 어린 이산은 아무도 다가가지 못하게 한 뒤주 앞에 와서 아버지의 손을 잡고는 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아버지의 죽음은 그것이 끝이 아닌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살아남은 불씨가 된 이산은 끝없는 암살 위협 속에 살아가야 한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힘겨운 일은 아버지를 죽게 한 할아버지 영조(이순재)가 자신을 끝없이 시험에 빠져들게 한다는 점이다. 그 시험에서 탈락하는 순간, 이산은 자신도 저 버려진 아버지의 운명이 될 거라는 점에 몸서리친다.

게다가 자신을 죽이려하는 암살자들이 바로 이산의 고모인 화완옹주(성현아)라는 사실은 절망감을 더 깊게 한다. 아직까지 이산에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 음모의 몸통에는 영조의 계비이자 이산의 할머니가 되는 정순왕후(김여진)가 있다. 서로 죽고 죽이게 되는 이 잔인한 가족사는 저 고대 그리스의 비극이나 셰익스피어의 비극만큼 비장하기 이를 데 없다.

이 살벌한 어른들 세상 속에서 이산은 생존하기 위해 강해지고 노련해진다. 하지만 이것은 이산이 원하던 것이 아니다. 이산은 늘 어린 시절 우연히 만나 운명의 여인이 되어버린 성송연(한지민)과, 평생의 동무가 된 박대수(이종수)를 그리워한다. 이 숨가쁘게 돌아가는 궁 속의 음모들 속에서 이 세 사람 즉 이산과 성송연, 박대수가 만나는 장면은 과거로 과거로 시간을 되돌려 놓는다. 현실이 아닌 어린 시절의 동무로 돌아간 그들은 실로 어린아이들처럼 말하고 웃고 수줍어한다.

이것은 동화의 세계이다. 동화가 가진 세계와의 대결의식은 늘 순수한 동심과 잔인한 어른들의 세계를 병치시킨다. 이산은 그 깊은 트라우마가 생기기 이전의 시간을 희구하지만 현실은 자꾸만 어른들의 세계 속으로 그를 인도한다. 성송연과 박대수는 그 캐릭터 자체가 어린이에 머물러 있고 그것은 잔인한 어른들의 세계를 잘 알고 있는 이산이 늘 고개를 돌리게 만드는 이유가 된다.

이 어른과 어린이의 대결 속에서 홍국영(한상진)이란 인물이 차지하는 위치는 절묘하다. 홍국영은 어른들의 세계를 철저히 이해하고 있는 인물. 그는 때론 어린이 같은 마음을 드러내기도 하는데 그가 이산의 옆에 자리하면서 드라마는 그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게 만든다. 홍국영은 그 목적이 어떻든 이산과 그 동심을 지켜내는 파수꾼 역할을 맡게 되는 것이다.

시청자들이 ‘이산’에 깊이 빠져드는 이유는 바로 이 아이들의 세계를 가진 이산과 성송연, 박대수를 저 잔인한 어른들의 세계에서 지켜주고 싶은 측은지심 때문이다. 현실 세계의 무거움 속에서 어린 시절의 순수함을 그리는 건 누구나의 인지상정 아닌가. 그러니 이 한 가족이 서로를 죽이고 죽는 잔인한 동화의 세계는 동심에서 어른의 세계 속으로 편입되는 일련의 성장과정을 내포한다. 때론 그것이 퇴행적으로 보이지만 그 어린 시절의 순수로 되돌아감이 현실과의 대결구도를 이룬다는 점에서 이산이 그리는 동화는 그 가치를 발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산의 정치란 결국 이전투구의 진흙탕 정치세계를 넘어서 어린아이의 순수한 마음으로 백성을 긍휼히 여기는 그 곳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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