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파’라는 용어에는 부정적인 의미가 더 많다. 그 용어는 주로 최루성 멜로물, 자극적인 설정 남발, 뻔한 소재와 스토리 전개처럼 구태의연하고 식상한 스토리텔링을 지칭할 때 사용된다. 그러니 현재의 작품을 얘기할 때, 신파적이라는 말은 절대로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하다. 이 부정적인 의미의 신파 코드들이 여전히 문화 전반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고, 때로는 호평받는 작품 속에서도 발견되며, 심지어는 이 코드를 버리고서는 대중성을 얻기가 어렵다고까지 말한다.

시청률 45%를 넘긴 국민 드라마 <찬란한 유산>을 흔히들 착한 드라마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 호칭은 작가 스스로도 밝혔듯이 애매한 구석이 많다. 이 드라마는 물론 주제가 착하지만, 드라마의 극적 구성으로 보았을 때 여타 자극적인 드라마와 크게 다르지 않은 탓이다. 아무리 계모라 해도 남편이 죽자(실은 살아있지만) 자식을 내치고 그 유산을 가로채고, 그것도 모자라 정신지체인 은성의 동생 은우까지 멀리 내다버리는 것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막장 드라마’에 견주어도 모자라지 않은 자극이다.

그런데 이 극과 극을 치닫는 대립의 세계 속에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이른바 신파 코드(이것은 신파라기보다는 신파적인 코드들을 활용하는 것을 지칭한다)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이다. 계모에 의해 버려졌지만 착한 심성으로 하늘이 도와 결국, 잘 살게 되는 이야기 구조는 우리네 고전적인 이야기 속에 단골로 등장하는 것으로, 신파의 전형적인 스토리텔링의 하나로 볼 수 있다. <찬란한 유산>의 고은성이 계모 백성희로부터 버려지지만, 그 착한 심성으로 거의 신적인 존재인 장숙자 여사(반효정)의 구원을 받는(게다가 왕자님인 선우환(이승기)까지!) 이야기는 소재적으로나 극적 구성에 있어 신파 코드를 잘 활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신파 코드의 활용은 이미 우리네 드라마에서 흔한 것들이다. 대표적인 신파 코드인 출생의 비밀은 최근 드라마들만 예로 들더라도 쉽게 발견된다. 시대극을 표방한 <에덴의 동쪽>이 그렇고, 다시 리메이크된 <미워도 다시 한 번> 역시 그러하며, 심지어 최근 방영되는 사극 <선덕여왕>이나 블록버스터 드라마를 표방하고 있는 <태양을 삼켜라>에서도 이 코드는 여전히 유용하게 활용된다. 그 이유는 그 신파적인 코드가 자극적인 감정 분출을 쉽게 끄집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한때 유행했던 막장 드라마는 바로 이 자극적인 감정 분출의 상황을 만들어내기 위해 신파적인 코드들, 예를 들면 출생 비밀, 불륜, 불치 같은 소재들을 섞어 심지어 개연성을 무시하고 나열했던 드라마들이다.

한때 이러한 신파 코드들이 활용되는 드라마들이 외면받았던 적이 있었다. 이른바 트렌디물이라 불리던 멜로 드라마들의 퇴조와 미국 드라마(미드) 열풍으로 일어난 전문직 장르 드라마의 환호가 그것이다. 그런데 이것으로 과연 신파적이고 트렌디한 멜로 드라마는 사라졌을까? 잠깐 그런 것처럼 보였지만 상황은 다시 역전되었다. 전문직 장르 드라마에 대한 호평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의 호응은 낮았기 때문이다. 즉, 이성적으로는 감정 과잉 드라마가 식상하다고 얘기하고 있었지만, 감성적으로는 바로 그러한 드라마에 마음이 움직였다는 것이다. 현재 이른바 전문직 장르 드라마들은 이제 미드식의 장르 드라마를 구사하면서도 그 안에 우리식의 신파 코드를 반드시 끼워 넣는다. <카인과 아벨>은 의학 드라마에 가정 비극(이 코드는 <찬란한 유산>과 유사하다)을 넣었고, <태양을 삼켜라>는 액션 드라마에 트렌디한 멜로 구조를 끼워 넣었다.

신파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세련된 느낌을 주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그 신파가 주로 다루는 감정의 분출을 근간으로 삼는 콘텐츠들은, 드라마는 물론이고 연극, 소설, 대중음악 등에서도 하나의 지류를 이루고 있다. <친정 엄마와 2박3일> 같은 연극은 암에 걸린 딸이 친정 엄마를 찾아가 마지막 시간을 보내는 전형적인 신파조의 극으로 연일 매진 사례를 이루고 있다. 이렇게 된 데는 신파가 가진 부정적인 의미들 즉, 틀에 박힌 대사나 연출 등을 벗어나 같은 소재라도 새롭고 진지한 접근을 하려는 노력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한편, 2009년 상반기 최고의 베스트셀러로 꼽히는 신경숙 작가의 <엄마를 부탁해>의 성공 역시 바로 이런 시각으로 읽어낼 수 있다. 신파적인 소재를 다루면서도 그 신파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는 신경숙 작가의 스토리텔링에 대중들의 마음이 움직인 것이다. 또한, 대중음악에 있어서 신파적인 코드들은 주로 외환위기 시절에 활용되었었다. 조성모의 <아시나요> 같은 곡이 대표적이다. 나중에 등장한 이른바 소몰이 창법들의 창궐과 퇴조는 신파 코드가 가요에 있어서 어떤 변화를 겪었는지를 대변해 준다. 현재 발라드 가수들은 여전히 신파 코드가 담겨진 노래를 부르고 있지만 예능 프로그램 출연 같은 웃음의 코드를 동시에 들고 있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가수가 트리플 크라운(드라마, 가요, 예능 프로그램)의 주인공인 이승기라고 할 수 있다. 여러 분야 진출은 다양한 감정의 분출을 통해 캐릭터의 균형을 잡아준다. 이것은 마치 <찬란한 유산>이 구사한 감정의 양면 전략과 유사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드라마는 물론이고, 연극, 소설, 대중가요에까지 신파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늘 어떤 시기에 새로운 옷을 입고 우리에게 얼굴을 내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신파가 가진 어떤 힘이 우리네 문화 속에서 그 끈질긴 생명력을 가질 수 있게 하는 것일까. 우리는 흔히 ‘한국식’이라는 수식어를 즐겨 사용한다. ‘한국식’ 블록버스터, ‘한국식’ 액션, ‘한국식’ 의학 드라마 등등. 그런데 여기서 ‘한국식’이라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여기에는 우리네 정서 속에 자리한 특유의 ‘감정 중심 문화’와 ‘특유의 끈끈한 관계의 문화’가 들어 있다. 우리는 아직까지 할리우드식의 아드레날린 과잉의 드라마나 영화에 익숙하지가 않다. 그것보다는 오히려 끈끈한 관계에서 비롯되는 감정의 폭풍, 혹은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는 콘텐츠에 더 익숙하다. 외국의 문화 콘텐츠들이 하드보일드한 감정 배제의 스토리텔링을 할 때, 우리는 끝없이 감정을 터뜨리고 끌어올리는 스토리텔링에 천착한다. 이것은 볼거리 위주의 콘텐츠들이 갖는 대규모의 투자와 대규모의 소비로 이루어지기가 어려운 우리네 문화 산업의 특징과도 연관이 있다. 우리는 볼거리보다는 그 속에 있는 인물에 집중함으로써 물량 투자가 갖는 한계를 극복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작품은 물론이고 작품을 제작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에게 문화 콘텐츠는 여전히 인력에 의지하는 산업이다.

흔히들 신파라고 말하면 부정적인 인상을 갖게 마련이다. 그 상투적인 설정과 뻔한 스토리, 게다가 그런 스토리에 저도 모르게 눈물까지 흘리고 나면 이성적인 문화의 소비자들은 도리어 기분이 나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감정에 치중하는 우리식의 문화 경향을 모두 후진적인 것으로 치부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스토리텔링이란 그 나라의 문화적 특징을 부정하면 실패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감정 중심의 스토리텔링이 갖는 힘을, 어떻게 하면 우리가 흔히 신파라고 했을 때 갖게 되는 부정적인 인상을 제거하면서 활용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더 발전적인 것이 아닐까.(이 글은 시사저널에 게재된 글입니다)

경계, 위험지대에서 가능성의 지대로

이승기가 처음 '1박2일'에 출연했을 때, 그는 이미지를 관리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한겨울 얼음장 같은 물로 머리를 감고, 야생의 생활(?) 속에서도 피부관리를 하는 그의 모습은 가수로서의 이미지를 지키기 위한 안간힘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과거라면 아이돌 가수가 예능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것 자체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신비의 베일에 가려 있어야할 아이돌 가수가 맨 얼굴에 눈곱이 낀 채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모습이라니!

하지만 시대는 이미 바뀌어 있었다. 이승기가 들어왔을 때, 이미 한때(?) 아이돌가수였던 은지원은 은초딩으로 캐릭터를 잡고 있었다. 이승기는 그렇게 예능에 적응해나갔고, 2년여가 지난 지금 드라마에서도 주목받으면서 가수, 예능, 드라마까지 이른바 트리플 크라운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그런데 이것은 단지 이승기 개인의 성공에 그치는 것일까. 이승기의 성공 과정은 현재 달라진 스타들의 롤모델을 가장 잘 보여주는 현상이 아닐까.

달라진 롤모델의 가장 대표적인 것은 한 스타가 과거라면 도무지 용납되지 않을 상반된 이미지들을 다양하게 갖는 것이 오히려 득이 된다는 점이다. 한 편에서는 정극에 출연하면서 시청자들을 울리는 이승기는, 다른 한 편에서는 버라이어티쇼에 등장해 소녀 같은 가발을 쓰고 정각이 될 때마다 거리에서 시각을 외치는 모습으로 시청자들을 웃긴다. 어떻게 이게 가능한 걸까.

신비주의의 시대가 가고 친숙한 이미지가 대세가 된 현재, 다채로운 이미지는 그 자체가 진정성이 된다. 한 사람에게서 한 가지 이미지만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가식이 된다. 하지만 여러 이미지를 보여줄 때, 그것은 오히려 그 사람의 속에 있는 다양한 모습들은 리얼하게 드러내는 것으로 인식된다. '1박2일'에서 멜로의 중심에 선 이승기를 벌칙수행을 통해 예능의 중심으로 세우는 것은 오히려 이승기에게는 득이 되는 일이다. 과거 상반된 이미지의 겹치기가 용납되지 않던 시대와 달라졌다는 것을 이승기를 통해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이승기를 통해 볼 수 있는 것은 '잘 하는 것'이 성공하기 위한 필수조건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승기가 '찬란한 유산'에서 선우환 역을 잘 소화해내고 있는 것은 물론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배우로서 완벽하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실제로 초반부에 이승기는 여러 모로 어색한 연기를 선보였다. 하지만 이 '잘 하지 못하는 것'을 오히려 뒤집은 것은 '열심히 하는 모습'이었다. 차츰 나아지는 연기를 보면서 이승기는 성장하는 이미지를 가질 수 있었다.

이것은 '1박2일'에서도 마찬가지다. 이승기는 예능과 어울리지 않는 이미지로 초반부 이물질 같은 느낌을 주었지만 차츰 형들 사이에서 자신의 위치를 세워나갔다. 특별한 개인기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고 드러나는 대로 보여주는 것이 이승기의 좋은 이미지를 만들었다. 허당이라는 캐릭터는 바로 이 '열심히'와 '어색한'의 사이에 서 있는 캐릭터다. '잘 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열심히 하는 것'이란 걸 이승기는 예능에서는 물론이고 드라마에서도 보여주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승기를 통해 달라진 현재의 스타들의 롤모델을 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그 팬층이 특정 세대에 머물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승기는 어린 아이에서부터 중장년층에 이르기까지 팬층이 넓다. '1박2일'에 출연하기 전까지는 '누나들 사이에서의 이승기'였지만, '1박2일' 출연 후에는 '형들 사이에서의 이승기'가 되었고, '찬란한 유산'에 출연하고는 '부모들 사이의 이승기'까지 되었다. 그는 거의 전 세대를 아우르는 팬층을 갖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된 것은 이승기가 본성처럼 갖고 있는 고급스런 이미지 위에 다양한 이미지들(허당으로서의 이미지나, 까칠한 이미지 같은)을 겹치는 전략이 주효했기 때문이다.

이승기가 현재 스타들의 아이콘이 된 데는 이처럼 경계의 지대에 잘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경계는 분야의 경계이기도 하고, 이미지의 경계이기도 하며 프로와 아마추어의 경계이기도 하다. 과거라면 위험지대가 되었을 경계가 가능성으로 바뀌었다는 것, 그 변화를 가장 잘 보여주는 스타가 바로 이승기다.

귀공자에게서 발견하는 서민적 모습, 이승기

'1박2일'에 처음 이승기가 출연한다고 했을 때 대부분의 시청자들은 고개를 갸웃거렸을 지도 모른다. 이승기가 가진 귀공자 이미지가, 거친 야생을 표방하는 '1박2일'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기묘한 이미지의 엇갈림은 '1박2일'에서 이승기만의 독특한 매력을 끄집어내게 했다. 그것은 아무리 야생에서 생고생을 하면서도 꼭 냉수라도 머리는 감아야 하며, 얼굴 관리는 반드시 해야 하는 이승기에게 그루밍족(자기을 가꾸는데 적극적인 남자)의 이미지를 오히려 강화시켰다.

김C나 이수근처럼 도무지 관리를 할 것 같지 않은 캐릭터들과의 대비효과 또한 클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이승기는 자신의 이미지를 강화하면서 동시에 이 짓궂은 형들 사이에서 새로운 이미지를 추가했다. 그간 '누님들 사이에서의 이승기'라는 이미지에서 '형들 속에서의 이승기'라는 이미지를 갖게 된 것이다. 이로써 이승기라는 캐릭터가 가진 인물의 스펙트럼은 고정된 틀에서 벗어나 확장되기 시작했다.

'돌아온 일지매'의 캐스팅이 거론되었을 때가 이승기의 최대 고비였다. 사실 일지매라는 역할은 이승기에게는 무리수가 될 수 있었다. 아직 연기를 해본 경험이 일천한 상황에서 연기자들도 어려워하는 사극 연기는 연기자로서의 첫발로서는 위험하기 그지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지매가 갖는 고독한 이미지는 '1박2일'로 넓혀온 그의 이미지를 자칫 다시 고정된 이미지로 한정시킬 가능성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보자면 이승기가 '돌아온 일지매'를 고사하고 '찬란한 유산'을 첫 연기(이전에 연기를 하기는 했지만 사실상의)의 발판으로 선택한 것은 현명한 처사였다 할 수 있다. 그것은 이승기가 확보해놓은 이미지의 연장선으로서 '찬란한 유산'의 선우환을 그려낼 수 있기 때문이다. 선우환이 이 드라마를 통해 변화해가는 과정은 저 '1박2일'에서의 이승기의 변화과정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재벌집 상속자로서 황제의 삶을 살아온 선우환이 모든 기득권을 포기당한 채, 서민들의 삶 속으로 들어오는 과정은 저 '1박2일'의 이승기라는 캐릭터가 가진 매력과 연결된다.

설렁탕집에서 손님들 앞에 고개를 숙이는 장면이나, 고은성(한효주)에게 "주임님"이라고 말하는 장면은 시청자들에게 통쾌함을 주면서도 선우환이란 캐릭터를 연기하는 이승기의 매력을 끄집어내게 한다. 한편으로 고은성에게 조금씩 흔들리고 빠져가는 남성으로서의 이승기는 멜로의 주인공으로서의 새로운 이미지를 부가하고 있는 중이다.

무엇보다 주목할 것은 이승기의 연기가 마치 '1박2일'에서의 그 빠른 적응력처럼 빠르게 드라마에 적응하고 있다는 점이다. 초기 조금은 굳어있는 듯한 그의 얼굴은 이제 제법 화를 내기도 하고, 애틋한 감정을 드러내기도 하는 얼굴로 풀어져가고 있다. 이러한 연기의 세계 속에서의 '찬란한 유산'을 통한 이승기의 성공 역시 일정 부분, '1박2일'의 공이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자기 자신을 끝없는 도전 상황에 그저 내던지고 그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 보여주는 것은 연기자의 기본 전제가 아닌가. '1박2일'은 그간 이승기에게 충분한 그 연습상대가 되어 주었던 셈이다.

대중들은 신상 캐릭터에 목마르다

윤상현이 ‘겨울새’에 출연했을 때, 그 마마보이 찌질남 역할에 시청자들이 주목할 줄 누가 알았을까. 잘 생기고 분위기 있어 보이는 외모의 윤상현은 오히려 한없이 망가지는 찌질한 역할을 통해 스타덤에 올랐고 그 여세를 몰아 MBC 일일시트콤 ‘크크섬의 비밀’에서 그 캐릭터의 인기를 이어가고 있다. 한편 ‘엄마가 뿔났다’에서 가장 주목받는 캐릭터는 누굴까. 그건 주인공인 김한자(김혜자)도 아니고, 나일석(백일섭)이나 나이석(강부자)도 아닌 고은아(장미희)다. 이는 현재 광고계에서 타 캐릭터와 비교해 고은아 캐릭터가 더 많이 활용하고 있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김수현 작가도 스스로 밝혔듯이 이렇게 된 것은 전적으로 장미희의 연기력이 한몫을 차지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도도하면서도 때론 귀엽기까지 한 악역이란 독특한 캐릭터가 가진 힘은 부정하기 힘들다.

드라마의 신상 캐릭터, 윤상현과 장미희
확실히 ‘크크섬의 비밀’의 윤대리와 ‘엄마가 뿔났다’의 고은아는 지금껏 우리네 드라마에서 보지 못했던 캐릭터다. 이들은 악역은 아니면서 악역과 유사한 역할을 맡는다. 섬에 표류된 상황 속에서도 일 안하고 줄이나 서려 하며 아첨하고 험담하는 윤대리 역할은 함께 있는 타인들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주는 캐릭터이지만, 그렇다고 그 캐릭터가 그저 밉상은 아니다. 이것은 자신과 격이 맞지 않는다며 며느리를 구박하는 시어머니 고은아도 마찬가지다. 악역이면서도 왠지 밉지 않고 때로는 공감까지 가는 캐릭터. 드라마에서 한번도 보지 못했던 이들은 캐릭터계에 등장한 신상이다.

드라마의 신상 캐릭터에 대한 요구는 틀에 박힌 캐릭터들에 대한 비호감에서 비롯된 바가 크다. 한 때 한류바람을 타고 인기몰이를 했던 최지우, 이정재, 김희선 그리고 최근에는 김선아 같은 연기자들이 드라마에 복귀하면서 새로운 모습보다는 과거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외면 받았던 것은 바로 이 같은 대중들의 신상 요구에 부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은 복귀와 함께 신비주의를 벗고 파격적인 변신을 시도했던 고현정이 그나마 대중들에게 어필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이제 착하고, 영웅적이며, 카리스마 넘치지만 여전히 구태의연함을 못 벗은 캐릭터보다는, 차라리 악하고, 반영웅적이며, 찌질하지만 새로운 캐릭터가 더 환영받는 시대다.

예능의 신상 캐릭터, 서인영, 이효리, 이승기, 대성, 이천희
이러한 신상 캐릭터(?)에 대한 주목은 드라마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이미 캐릭터라이즈드 쇼(Characterized Show)가 되고 있는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신상 캐릭터들은 확실한 지지도를 얻고 있는 상황이다. 서인영은 ‘싸가지’와 ‘당당함’을, 이효리는 ‘섹시함’과 ‘털털함’을 하나로 묶는 독특한 캐릭터를 선보였다. 언뜻 연결될 수 없을 것 같은 이 이질적인 요소를 하나로 묶는 순간, 캐릭터는 양극단을 오가는 아슬아슬한 묘미를 제공하면서 대중들의 지지를 얻었다.

한편으로는 신비화 전략을 구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탈 신비화하려는 복합 캐릭터 전략은 지금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대부분의 가수, 배우들이 취하고 있는 것. 이승기는 무대에 오르면 누나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목소리의 가수지만, ‘1박2일’에서는 엉뚱한 언동을 일삼는 허당이다. 빅뱅의 대성은 노래를 할 때는 아이돌 스타지만, ‘패밀리가 떴다’에서는 여지없이 망가지는 덤앤더머 캐릭터로 변신한다. ‘대왕 세종’에서 장영실로 진중한 연기를 보이는 이천희는 역시 같은 프로그램에서는 엉성하고 구박받는 천데렐라로 변신한다. 이 드라마에서의 모습과 예능에서의 모습이 다른 이중적인 캐릭터는 하나로 합쳐지면서 독특한 신상 캐릭터를 구축한다. 지금까지는 없던 새로운 영역을 갖게 되는 것이다.

신상 캐릭터에 대한 갈증, 캐릭터 소비 빨라진다
대중들의 새로운 캐릭터에 대한 갈증이 커질 대로 커진 요즘 그만큼 캐릭터의 소비는 더 빨라졌다. 연기자들이 매번 드라마를 통해 무언가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강박은 과거 어느 때보다 더 높아졌다. 어디서 본 듯한 캐릭터들이 포진한 드라마들은 그만큼 대중들에게 외면 받기 쉬워졌다. 반면 잘 창조된 캐릭터들은 주연이 아니라 하더라도 조명을 받으며, 드라마를 이끌어 가는 주요 동력이 된다. 종영한 ‘일지매’에서의 쇠돌(이문식)이나 공갈아제(안길상) 같은 캐릭터는 주연 못지 않은 캐릭터의 힘을 과시했다.

한편 예능에서의 캐릭터들은 상황이 더 좋지 않다. ‘무한도전’의 캐릭터들이 최근 들어 조금씩 시들해지는 것은 그만큼 오랫동안 같은 캐릭터를 유지해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최근에 폭발적으로 증가한 신상 캐릭터 인구 때문이기도 하다. 드라마는 물론 각종 이벤트에 투입되고, 케이블을 통해 무한 재방영되며 심지어 타방송사의 프로그램에서도 같은 캐릭터로 무한소비되는 상황에 피곤해진 캐릭터들이, 자고 일어나면 새롭게 생겨나는 캐릭터들의 홍수 속에서 더 이상 버티기는 쉽지 않게 되었다. 이것은 ‘1박2일’에도 똑같이 해당되는 이야기다.

어디든 눈만 돌리면 넘쳐나는 욕망들이 거리를 가득 메우는 소비의 시대, 대중들의 TV 속 캐릭터 소비가 빨라지는 것은 당연하다. 이 시점에서 중요해지는 것은 TV 속 캐릭터의 변화 속도가 대중들의 소비 속도를 잘 따라잡고 있느냐는 점이다. 새로운 상품이 그 시대의 기호와 트렌드를 잘 반영하고 있듯이, 새로운 캐릭터 역시 그 시대를 고스란히 반영한다. 따라서 급속한 소비로 피곤해진 캐릭터들을 어떻게 재빠르게 보완하고 변신시키고 창출하는가는 드라마나 예능의 당면과제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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