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이언트'가 소화한 것, 다양한 장르, 시청층, 연기

실로 '거인'다운 소화력이었다. 드라마는 전형적인 시대극이지만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었고, 그 장르들의 문법들을 꿀꺽꿀꺽 삼켜버렸다. 중요한 건 '삼켰다'는 것이 아니라 그걸 '소화해냈다'는 것. 시청자들이 원하고 필요한 것이라면, 그리고 흥미와 구미를 당길 수 있는 것이라면 어떤 것이든 삼켜서 기어이 소화해내고 마는 세계, 그것이 바로 '자이언트'의 세계였다.

시대극은 넓게 보면 사극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다른 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아주 가까운 역사를 다룬다는 것. 이것은 사소한 것 같지만 작품에는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낸다. 가까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역사의 평가에 민감할 수 있다는 것이고 또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에 있어서도 어떤 한계를 지운다는 의미다. 그래서 '자이언트'는 초반부터 특정 정치인을 옹호하는 드라마로 오인 받았다.

하지만 '대조영'을 겪은 장영철 작가의 뚝심은 여전했다. 시대극이라는 특성에 걸맞게 실제 사건들을 작품 속으로 끌어들이면서도 장영철 작가는 그 속에 인물들의 대결에 좀 더 과감한 허구적 상상력을 끼워 넣었다. 인물들에게 끊임없이 제기되는 미션과 그 미션의 해결과정에 부딪치게 되는 대결구도는 사극의 장르적 특성처럼 '자이언트'의 꺼지지 않는 에너지원이 되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시대극이 부여하는 현실감에 머무르지 않고 끝없이 상상력을 펼쳐나간 점은 초반의 오인을 뒤집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역시 드라마는 드라마라는 인식을 갖게 만든 것이다. 결국 이 뚝심은 오해마저 삼켜버리고 소화시키는 저력을 발휘했다.

하지만 초반의 시청률 부진은 단지 이런 오해 때문만이 아니었다. 사극적인 대결구도와 치밀한 심리전으로 흘러가다 보니 정서적인 공감대가 따라오질 못했다. 물론 남성들은 이 사극적인 특징에 매료되었지만, 여성들은 그렇지 못했다. 그래서 '자이언트'가 어떤 전환점이 된 것은 뿔뿔이 흩어졌던 강모(이범수)와 성모(박상민) 그리고 미주(황정음)가 다시 만나게 되면서부터다. 이때부터 '자이언트'는 빠른 사건 전개와 반전이 주는 특유의 스릴러적인 특징으로 남성 팬들을 사로잡으면서, 동시에 가족드라마적이고 멜로드라마적인 요소들을 덧붙임으로서 여성 팬들까지 끌어들였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마치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서로 원수가 되어버린 가족들 속의 인물들이 서로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강모는 다시 만난 정연(박진희)과 사랑에 빠지고, 미주는 민우(주상욱)와 사랑에 빠지지만, 결국 그 아버지들이 원수라는 걸 알게 되고 헤어지게 된다. 다분히 작위적인 느낌이 있지만 말 그대로 이 멜로와 가족드라마적 요소들은 시대극이 궁극적으로 끌고 가려는 하드보일드한 이야기들 위에서 말랑말랑한 매력을 첨부했다. '자이언트'는 자칫 특정 세대로만 집중될 수 있었던 시청층을 삼키고는 대중성을 확보했다.

이런 다양한 장르의 공존이 가능했던 것은 장르를 잘 이해하는 유인식 감독의 공만이 아니다. 거기에는 뭐든 해낼 수 있는 든든한 배우들이 있었다. 이 작품의 배우들은 어느 한 장르의 결을 연기했다기보다는 주어지는 모든 장르를 소화해내야 하는 위치에 있었다는 점에서 쉽지 않았다. 미주 역할을 한 황정음은 신파적이기까지 한 가족드라마의 여동생에서 갑자기 비운의 줄리엣이 되는 멜로드라마의 여자로 변신해야 했고, 그 후에는 가수로 성장해가는 성장드라마의 여성을 연기해야 했다. 민우 역할의 주상욱은 피도 눈물도 없는 악역에서 여자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멜로 연기를 소화해야 했다. 박소태를 연기한 이문식은 적과 친구를 넘나드는 연기를 선보여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누구보다 재발견된 배우는 정보석과 박상민이다. 정보석은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악역으로 처음부터 마지막회까지 혼신의 연기를 보여주었다. 아무리 궁지에 몰아도 절대로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 강한 카리스마는 이 드라마가 마지막까지 힘을 잃지 않은 원동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박상민은 액션연기에서부터 맏형으로서의 애틋한 가족애를 선보이며 주목받았고, 고문을 당하는 장면이나 마지막 부분에 뇌손상을 입은 모습까지 말 그대로 연기자로서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주었다. '장군의 아들' 이후 밋밋하게까지 느껴졌던 그의 이미지는 '자이언트'를 통해 확고하게 연기자로서의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자이언트'는 이처럼 연기자들 속에서 끄집어낼 수 있는 연기의 극점까지 낱낱이 끄집어내 삼켜버렸다.

그래서 거의 모든 장르를 삼키고, 시청률을 삼키고는, 연기자들의 거의 모든 연기까지 끄집어낸 '자이언트'가 결국 소화해낸 것은 강남과 개발로 축약되는 한 시대의 모습이었다. 누군가는 끝없는 욕망에 사로잡혔고, 누군가는 복수하듯 처절하게 살아왔던 그 시대의 끝자락에서 우리가 발견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꼭대기에 선 자의 처절함과 쓸쓸함'이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그토록 뛰어왔던가. '자이언트'가 결국 돌아가는 길은 가족이다. 성모가 저 세상으로 떠난 후에 마치 그 자리를 메워주듯 막내가 찾아오고, 강모는 집으로 돌아간다. 그 길은 아마도 살아남기 위해, 성공하기 위해 기나긴 개발시대의 터널을 지나와서야 겨우 알게 된 행복의 의미를 찾아가는 길이 아니었을까.

사극을 넘어선 시대극의 저력과 그 문제점

시대극 전성시대다. ‘제빵왕 김탁구’가 7,80년대의 암울했던 시대적 분위기를 넘어서 성장해가는 김탁구를 시대극의 틀 안에서 그리며 50%에 육박하는 시청률을 기록했다면, ‘자이언트’는 강남 개발이라는 소재를 시대극으로 풀어내며 경쟁 작품이었던 사극 ‘동이’의 시청률을 앞지르는 이변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새롭게 시작한 ‘욕망의 불꽃’은 엄밀히 말하면 시대극이라고 하기가 어렵지만, 시대극이 갖는 장치들을 백분 활용하면서 연일 시청률 고공행진을 거듭하고 있다. 도대체 무엇이 이들 시대극을 막강하게 만드는 걸까.

한때 시대극은 실패작의 전형처럼 여겨지곤 했다. 과거 방영되었던 ‘사랑과 야망’은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켰지만, 다시 리메이크된 ‘사랑과 야망’은 그다지 성공하지 못했다. 그 후에 이어진 ‘로비스트’나 ‘에덴의 동쪽’ 그리고 ‘태양을 삼켜라’ 같은 시대극도 거의 모두 실패했다. 이유는 당연하다. 과거 시대극들이 갖는 성공에 대한 집착이 어딘지 시대착오적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미 드라마들은 성공이 아닌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하나의 대세가 되고 있었다.

하지만 현재 방영되고 있는 시대극들은 이들 작품들과는 궤를 달리한다. 물론 성공에 대한 집착이 그 속에도 꿈틀대지만, 이들 작품들은 거꾸로 그 집착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가에 더 집중한다. 따라서 현재의 시대극들 속에 성공에 집착하는 인물들은 주인공이 아니라 대부분 악역들이다. ‘제빵왕 김탁구’의 구마준(주원) 혹은 서인숙(전인화)이나, ‘자이언트’의 조필연(정보석) 같은 인물들을 끝없는 성공에 대한 욕망을 보이지만 그것이 결국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제빵왕 김탁구’가 ‘행복’을 주제로 빵을 만드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것은 ‘욕망의 불꽃’도 마찬가지다. 이 작품은 나영이라는 성공하기 위한 욕망에 불타오르는 캐릭터가 바로 그것 때문에 얼마나 처절한 불행을 맞이하는가를 바라보는 드라마다.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언니의 자리까지 빼앗아 버린 그녀는 결국 정점에 도달하지만 그 과정에서 생겨난 수많은 죄들이 고스란히 부메랑으로 돌아온다. 이것은 개발시대가 남긴 아픔을 이 욕망의 불꽃을 가진 캐릭터를 통해 보여주는 것이다.

작금의 시대극이 과거의 가치관에 머물지 않고 현재적 의미를 확보하게 되면서 오히려 시대극이 갖는 장점이 부각된다. 그것은 폭넓은 시청세대의 가능성이다. 과거는 넘어서야 할 막장에 가까운 시대의 장벽이지만 한 세대에게는 향수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는 과정에서 보여지는 성장드라마는 젊은 세대들의 판타지가 된다.

물론 시대극의 힘이 이처럼 막강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모두 반갑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이런 시대극은 특성상 과거의 드라마들이 가진 자극적인 설정들을 끌어오게 마련이다. 그 설정들 자체가 시대의 아픔을 표현하는 소재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설정들이 지나치게 자극으로 흐른다는 비판이 나올 수밖에 없다. ‘욕망의 불꽃’에서 낙태나 강간, 뺑소니 게다가 아이의 자살시도 장면이 등장하고, ‘자이언트’에서 납치와 폭력 수위가 높은 장면이 등장하는 것은 그 의미는 이해가 되지만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막장이라는 비판은 이런 부분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시대극은 과거 어느 때보다 그 힘이 막강해졌다. 하지만 시대극이 본래의 목적인 시대의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노력보다 자극에만 더 치중하게 될 때, 그것은 자칫 시대극의 동반추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 자극은 더 큰 감각적인 자극을 요구하게 될 것이고, 결국 그것이 어떤 한계수위에 도달해 충족되지 않을 때 자칫 달라진 시청자들의 입맛을 만족시키기 어려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멜로는 드라마의 독? 멜로에 대한 갈증은 여전

멜로는 여전히 드라마의 독일까. 트렌디 드라마들의 퇴조와 함께 멜로의 시대도 끝났다고 생각되던 때가 있었다. 실제로 멜로드라마들이 시청률 40%대를 구가하던 건 이젠 옛말이 된 지 오래다. 이른바 전문직 장르 드라마의 출현은 멜로를 피해야할 어떤 것으로 치부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본격적인 멜로드라마가 줄어들었다고 해서 멜로가 사라졌을까. 멜로는 전문직 장르 드라마는 물론이고 사극, 시대극 등 다양한 장르 속으로 침투해 들어갔다. 그리고 실질적인 드라마의 성패를 뒤흔드는 존재로까지 부상하게 되었다.

'동이'와 '자이언트'의 시청률 곡선을 보면 멜로가 드라마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흥미로운 결과를 발견할 수 있다. '동이'의 초창기 시청률을 끌어올린 장본인은 단연 동이(한효주)와 숙종(지진희)이 궐 밖에서 만나 벌이던 일련의 멜로 시퀀스다. 이른바 깨방정 숙종의 등을 밟고 담을 넘는 동이의 이야기는 이 사극에 힘을 부여했다. 그 후로 숙종이 정체를 숨긴 채 동이와 마음을 나누는 장면들이 시청자들을 설레게 했다. 하지만 동이가 숙종의 정체를 알게 되고 궐 내로 들어오면서부터 멜로는 주춤하기 시작한다. 대신 억울하게 궐 밖으로 내쳐진 인현왕후(박하선)를 복귀시키려는 동이와 장옥정(이소연)과의 대결구도로 이어지면서 시청률은 급하락했다.

이것은 물론 이 대결구도가 이미 여러 다른 사극에서 반복되었던 전형적인 틀을 그대로 답습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락하던 시청률을 다시 다잡은 것이 멜로로의 복귀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깨방정 숙종'이라는 캐릭터는 바로 이 '동이'라는 사극의 정체성이나 마찬가지가 되었다. 왕이지만 서민적인 소탈한 모습은 동이와의 멜로를 통해 가장 극적으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천민 출신을 사랑한 왕의 인간적인 모습은 이 사극이 가진 또 다른 축, 예를 들면 추리적인 요소 같은 것들을 소소하게 만들만큼 강력하게 다가온다.

한편, '자이언트'가 초반부 긴박하게 흘러가던 사건의 연속에도 좀체 오르지 않던 시청률을 끌어올린 것은 강모(이범수)가 어린 시절 헤어졌던 가족들인 성모(박상민)와 미주(황정음)를 만나면서부터이다. 물론 이 만남은 멜로가 아니지만, 이 두뇌게임을 치르는 것 같은 드라마에 어떤 감정을 부여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또한 이 당시 생겨난 강모와 정연(박진희)의 애틋한 멜로가 이어지면서 시청률은 급물살을 탔다. 현재 이 드라마에서 사건의 흐름보다도 더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이 미주와 민우(주상욱)의 멜로라는 사실은 특기할만한 사항이다.

멜로는 늘 반복되는 삼각 사각으로 이어지는 관계, 항시 존재하는 신데렐라 이야기, 부모의 반대로 겪게 되는 혼사장애, 우연한 만남의 남발 등등으로 비판받아온 것이 사실이다. 멜로의 이런 경향은 작금의 드라마들 속에서도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다양한 장르와 소재들로 다채로운 이야기들이 드라마로 그려지고 있는 현재에도 여전히 멜로에 대한 갈증은 남아있는 것으로 보인다. 멜로는 이제 드라마의 윤활유로서 자리하고 있다. 멜로는 과도하면 식상하지만, 적절하면 드라마에 윤기와 촉촉함을 더해준다. '동이'와 '자이언트'가 보여준 일련의 시청률 등락은 이런 멜로의 힘을 잘 말해준다.

입체적인 캐릭터로 겉껍질을 깨버린 주상욱

악인의 아들은 어떤 모습일까. "그냥 지겨워서. 그냥 다 털어버리고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고 싶어서." 미주(황정음)의 무릎을 베고 누운 조민우(주상욱)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이렇게 말한다. '자이언트'에서 미주가 나타나기 전까지 조필연(정보석)이라는 절대악의 아들인 조민우 역시 그 아버지의 그 아들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조민우가 미주를 만나면서 그의 사적이고 내밀한 모습이 보여졌고, 그제야 조민우가 가진 진짜 캐릭터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최근 조민우를 연기하는 주상욱이 주목받는 것은 드디어 본 매력을 드러낸 캐릭터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잘 생긴 얼굴에 분위기 있는 눈빛을 가졌지만, 주상욱이 지금껏 연기한 캐릭터들은 그의 매력을 한껏 끄집어내지 못했다. '그저 바라보다가'에서 그가 연기한 김강모는 지나치게 전형적인 부잣집 아들 역할이었다. 돈이면 뭐든 된다 생각하고 사랑하는 여자를 그렇게 얻으려 하지만 결국에는 좌절하고 마는. 그래서 조금은 비열한 짓들을 하게 되는. '선덕여왕'에서의 월야 역할은 물론 '그저 바라보다가'보다는 나았지만 그 존재감이 적었다. 덕만(이요원)을 도와 그녀를 여왕의 자리까지 올리는 역할이었지만, 유신(엄태웅)이나 비담(김남길) 같은 굵직한 캐릭터들 속에서 월야는 또 하나의 전형적인 캐릭터로 남았다.

'자이언트'의 초반부에서도 그 전형성은 또 반복되는 것처럼 여겨졌다. 조민우는 마치 '그저 바라보다가'의 부잣집 아들 김강모를 반복하는 캐릭터로 그려졌다. 하지만 그 캐릭터는 입체적으로 변했다. 드라마 속 부잣집 아들 혹은 악인의 아들 역시 악인일 수밖에 없다는 그 전형성을 깨면서 조민우가 살아나기 시작했다. 주상욱은 조민우를 통해 대중들에게 한 걸음 더 다가올 수 있었다. 부잣집 아들이라고 왜 고충이 없을까. 아니 야망을 위해 가족들 앞에서도 서슴없이 악행을 저지르는 아버지 조필연을 보면서 자란 아들 조민우는 어쩌면 이 드라마의 또 다른 피해자가 아닐까. 이런 이해의 시각을 갖게 된 것이다.

"귀 막아줄 테니까 눈 감고 가만히 있어봐요. 그럼 마음이 한결 편안해질 거예요." 조민우의 발견은 이렇게 그의 위로가 되어주는 미주의 시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 어떤 것에도 휘둘리지 않고 편견 없이 바라봐주는 그 시선 속에서 조민우의 힘겨움이 보였다. 첫 만남에서는 부잣집 아들의 돈 자랑에 재수 없어 하다가, 차츰 그의 가시 돋친 겉모습 뒤에 숨겨진 부드러움을 발견해가는 과정은 미주의 시선을 빌어 이 캐릭터의 속내를 대중들에게 전해주었다. 따라서 미주의 민우를 바라보는 시선의 변화는 대중들의 시선 변화를 유도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미주가 민우의 귀를 막아주는 그 행동이 사랑스러운 것은 이미 우리가 민우라는 캐릭터의 힘겨움을 미주만큼 이해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주상욱이 조민우라는 입체적인 캐릭터를 통해 깨어날 수 있었던 것은 '자이언트'라는 드라마가 가진 독특한 캐릭터 운용의 결과이기도 하다. 이 드라마는 '한번 선은 영원한 선'이라는 캐릭터의 전형성을 용납하지 않는다. 캐릭터들은 상황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들을 다채롭게 보여주는데, 조민우는 그 대표적인 사례다. 그는 주인공 강모(이범수)를 사지로 몰아넣은 장본인이면서 아버지 조필연을 돕는 악역이지만, 미주를 만나면 멜로의 주인공이 된다.

게다가 이 멜로는 이제 '자이언트'에서 유일한 것이 되었다. 강모와 정연(박진희)의 멜로는 후에 다시 등장할 것이지만 지금은 복수를 향해 달려가면서 두 사람의 꼬여버린 대결구도로 그려지고 있다. 그러니 '자이언트'라는 긴박감 넘치는 드라마 속에서 민우와 미주의 멜로는 한 줄기 숨통이 되어준다. 민우가 미주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잠시 깊은 한 숨을 통해내는 것처럼, 시청자들도 이 장면들을 바라보며 쉴 새 없이 달리는 '자이언트'라는 욕망의 전차에서 잠시 동안의 편안함을 갖게 된다. 그러니 이 둘의 멜로는 주목될 수밖에 없다. 그 중 조민우라는 캐릭터는 더더욱.

주상욱이라는 연기자가 제 가치를 드러내며 주목받게 된 것은 물론 이 '자이언트'라는 드라마가 기회로 제공한 조민우라는 캐릭터의 힘이 크다. 하지만 모든 기회가 그 자체로 성공을 이뤄주지 않듯이, 이 조민우라는 입체적인 캐릭터를 소화해낸 주상욱의 노력을 간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주상욱에게 조민우라는 캐릭터는 어쩌면 이제 본격적인 연기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 속에 얼마나 많은 다른 얼굴들이 있을 지 자못 기대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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