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미 시상식에서 4관왕을 차지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은 동익(이선균)이 사는 번듯한 2층집에 하나둘 기생하며 살게 된 기택(송강호)의 가족 이야기를 그렸다. 신분을 속이고 기택은 운전기사로, 기우(최우식)는 과외선생으로, 기정(박소담)은 미술치료 교사로, 그의 아내 충숙(장혜진)은 가정부로 들어온다. 동익이 누리고 사는 집처럼 보이지만, 알고 보면 눈에 보이지 않게 그림자 속에 숨어 살아가는 기택 가족의 세상이 된다. 하지만 캠핑을 떠나 빈집에 남은 기택의 가족이 마치 제 집처럼 술판을 벌이고 놀 던 날 그 착각은 깨진다. 마침 폭우가 쏟아지면서 동익의 가족이 돌아오자 바퀴벌레들처럼 숨게 된 것. 그리고 그 폭우는 낮은 지대에 있는 기택의 반지하 집을 덮쳐 버린다.
양극화를 메시지로 담은 작품들은 많지만 ‘기생충’이 압권이었던 건 그걸 공간을 통해 직관적으로 보여줬다는 점이다. 한국에만 있는 반지하 같은 주거공간을 가져와 지상과 반지하 그리고 지하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갈등을 블랙코미디로 담아낸 것이다. 그 공간의 차이를 통해 양극화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 장면은 바로 그 갑작스런 폭우가 내려 기택의 집이 물에 잠겨버린 상황에도 그런 일이 어디 있었냐는 듯 동익의 아내 연교(조여정)가 하는 말이다. “비가 와서 그런지 미세먼지가 없네요.”
이제 곧 여름 장마철이 시작된다. 재작년 관악구 반지하에 폭우로 인한 침수로 발달장애인 일가족이 사망하는 참변이 있었고, 지난해에도 14명의 생명을 앗아간 오송 지하차도 참사가 벌어졌다. 매해 비극이 되풀이되고 있는데 이에 대한 대비가 제대로 이뤄지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내가 안전하다고 모두가 안전할까. 약자에 대한 생각이 바뀌지 않는 한 안타까운 비극은 계속 되지 않을까. (글:동아일보, 사진:영화'기생충')
“다녀오겠습니다” 아마도 이 대사는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신작 애니메이션 <스즈메의 문단속>에 담긴 정서를 한 마디로 담은 게 아닐까. 감독이 말했듯 문은 이 작품의 중요한 모티브다. 아침마다 그 곳으로 나가며 “다녀오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저녁에 돌아와 “다녀왔습니다”라고 말하는 것. 그 평범한 일상이 재난이라는 거대한 불가항력 앞에서는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일 수 있으니 말이다.
어느 날 등굣길에 우연히 만난 사내 소타. 그는 폐허를 찾아다닌다. 스즈메는 그 사내가 마음에 걸려 자신이 알려줬던 폐허를 찾아갔다가 문을 발견한다. 그 문은 이 세계와 저 세계를 연결해주는데, 그것은 이승과 저승이기도 하고 과거와 현재이기도 하다. 별 생각 없이 문 앞에 놓인 고양이석상을 뽑아들었는데, 알고 보니 그것이 문이 열리지 않게 몸으로 봉인해온 고양이신 다이진이었다. 문이 열리면 그 곳으로부터 미나미라는 거대한 기둥이 빠져나오고 그것이 바닥으로 떨어지면 지진이 일어난다.
문을 본 후 스즈메는 다른 사람들을 보지 못하는 미나미를 볼 수 있게 된다. 그래서 거대한 미나미가 폐허에서 솟아나오는 걸 본 스즈메는 그 곳을 찾아가 애써 문을 닫으려 하는 소타를 발견한다. 소타는 미나미가 바깥으로 나오지 못하게 문단속을 하는 소임을 가업으로 물려받은 인물이다. 하지만 도망친 다이진이 소타를 스즈메 엄마의 유품인 세발 다리 꼬마의자에 가둬버리고 도망치자, 스즈메는 세발 다리 꼬마의자가 된 소타와 함께 다이진을 찾아 나선다.
말하는 고양이이자 신이 등장하고, 이 세계와 저 세계를 오가는 문이나 저주를 받아 꼬마의자가 된 사람이 나오는 <스즈메의 문단속>은 판타지지만, 이 작품이 담고 있는 지진이라는 재난상황은 일본에서는 트라우마가 될 정도로 아픈 현실적 상처다. 실제로 이 작품은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을 모티브로 했다. 이 작품은 그래서 대지진이라는 수많은 인명을 앗아가고, 아름다운 마을을 폐허로 만드는 재난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스즈메와 소타의 이야기를 통해, 이 지진이 남긴 상처들에 대한 위로를 담고 있다.
스즈메는 어린 시절 대지진으로 인해 엄마를 잃었고, 며칠을 엄마가 살아있다며 울며 찾아다닌 기억이 있다. 그래서인지 소타가 하는 이 일을 자기 일처럼 받아들이고 앞장선다. 문을 닫기 위해서 그 문이 있던 자리가 폐허가 되기 전 사람들이 나눴을 이야기들을 떠올리고 그래야 문을 잠글 수 있는 열쇠구멍이 생겨난다는 설정은, 여러모로 재난이 파괴해버린 일상의 소중함을 떠올리게 하는 장치다. “다녀올게”라는 말은 그래서 이 순간에는 더더욱 강렬하게 마음을 뒤흔든다.
영화는 스즈메와 소타가 사라진 다이진을 찾아나서는 로드무비 방식을 택하고 있는데, 여정 중 도처에서 열린 문으로 미나미가 튀어나오는 걸 두 사람이 막는 긴박한 스펙터클을 보여준다. 하지만 흥미로운 건, 이처럼 끔찍한 재난이 눈앞에 펼쳐지기 직전까지 보이는 두 사람의 여정은 너무나 아름답고 따뜻해 마치 즐거운 여행길을 보여주는 것만 같다는 점이다. 그 여정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사람들은 저마다 스즈메를 챙겨주고 도와주는 인간적인 온기를 전해준다.
즉 이 이중적인 변주가 <스즈메의 문단속>이 전하고 있는 ‘일상의 아름다움’이나 ‘삶의 의미’ 같은 메시지를 강화한다. 즉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미나미가 보이지 않아 너무나 평화롭게 살아가는 정경은 아름다우면서도 슬픈 정조를 띤다. 그것은 곧 벌어질 비극을 모르는 이들의 평화와 행복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그것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빛의 마술사라는 칭호에 걸맞게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이 일상에 깃든 작은 빛들마저 축복처럼 느껴지게 구현해낸다. 심지어 도시나 자연이 주는 평화로움이나 설렘, 두려움 같은 감정들까지 그가 그려낸 영상을 통해 전해질 정도다.
반면 스즈메와 소타는 앞으로 벌어질 비극을 모르는 사람들이 진짜 비극을 맞이하지 않게 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리고 심지어는 자신을 희생하려는 선택까지 하게 되는데, 그것은 스즈메가 어린 시절 지진 때문에 엄마를 잃은 그 충격과 연관되어 있다. 그가 소타에게 그토록 집착하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소타가 마침 세발 다리 꼬마의자가 되는 저주는 그래서 엄마가 만들어준 꼬마의자라는 점에서 엄마와의 연결고리를 갖는다.
세발 다리 꼬마의자는 뒤뚱거리며 걸을 수(?)밖에 없어 재밌는 장면들을 연출하기도 하지만, 그 불안정함과 그럼에도 누군가 그 위에 앉으면 애써 버텨내는 소타의 모습을 통해, 재난이라는 언제 닥칠지 알 수 없는 불안정한 삶과 그럼에도 이를 이겨내려는 인간의 의지를 은유한다. 또한 여러 사람들이 왁자지껄하게 스즈메의 여정 속으로 들어와 함께 여행하는 과정은 언제든 닥칠 수 있는 비극 같은 허망함 앞에서도 우리가 살아가는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가를 말해준다.
결국 스즈메는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넘어가는 문을 열고 들어가 자신의 트라우마를 마주한다. 폐허 위에서 엄마를 찾으며 울고 다니는 어린 스즈메를 끝내 안아준다. 그리고 아이에게 밝은 미래가 펼쳐질 거라는 희망을 선사한다. 그 상황은 미래에서 온 스즈메가 과거의 어린 스즈메에게 하는 이야기이지만, 동시에 과거의 어린 스즈메가 엄마가 죽었다는 걸 알면서도 그걸 애써 부정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현재의 스즈메가 마주하고 인정하고 나서야 비로소 트라우마를 벗어나 미래로 갈 수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엉뚱한 이야기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이 동일본 대지진을 모티브로 한 작품을 보면서 한국인들은 아마도 우리 식의 해석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세월호 참사부터 이태원 참사까지 우리에게 벌어졌던 그 많은 인재들을 대입해보면, 제대로 된 과거의 진실을 마주하지 않는 한 미래의 문은 열리지 않는다는 뜻으로 다가올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러한 관점은 최근 첨예한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과거사 관련 문제에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제대로 된 과거를 마주하지 않고 과연 미래의 문은 열릴까. 나라마다 다른 국가적 트라우마가 있게 마련이다. 그걸 넘기 위해서는 저마다 과거에 벌어졌던 그 일들의 진실을 알아야 하고 또 그것을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한다. 거기서 비로소 과거의 문이 닫히고 미래의 문이 열릴 테니까. (사진:영화'스즈메의 문단속')
인간은 왜 지옥이라는 종교적 개념을 만들어냈을까. 물론 이런 질문은 논쟁적이다. 지옥의 실재를 믿는 종교적 신념에 대한 의심이 그 질문 안에 담겨 있어서다. 그래서 연상호 감독의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지옥>은 논쟁적이다. 미리 말해두면 이 드라마에 흔히 불길이 치솟는 아비규환으로 그려지곤 하는 그런 진짜 지옥은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지옥의 사자’라 불리는 괴 존재들이 등장한다. 갑자기 유령처럼 어떤 차원을 뛰어넘어 나타난 이들은 사전에 ‘지옥행’을 ‘고지’ 받은 사람들에게 나타나 다짜고짜 폭력을 가해 피와 살점이 튀는 처참한 광경을 마치 보여주려 작정한 것처럼 ‘시연’한 후, 손을 모아 만들어내는 빛 속에서 순식간에 뼈의 형상 정도만 남겨놓는 재로 만들어버린다. 그건 물론 괴 존재에 의해 만들어진 끔찍한 광경이지만, 그저 하나의 사건으로 본다면 일종의 ‘재난’에 가까운 일이다. 즉 어느 날 길을 가다 갑자기 날아온 벼락에 맞아 온몸이 타버리며 죽는 그런 일과 그리 다르지 않다.
그런데 이 재난이 지옥이 되는 건,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그 하나는 그런 일이 벌어질 걸 사전에 고지 받는다는 사실이다. 어떤 이들은 한 시간 후에 어떤 이들은 일주일 후 혹은 10년 후에 지옥행을 고지 받는다. 자신이 끔찍한 죽음을 맞이하고 그것도 지옥에 간다는 사실을 미리 알게 된다는 건 그의 삶을 지옥으로 만든다.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 없는 죽음도 그렇지만, 자신이 지옥에 간다는 사실은 그의 삶조차 치욕스럽게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재난이 더더욱 견디지 못할 지옥이 되는 건, 그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이 벌어지는 일이라는 걸 알았을 때다. 재난 자체가 무슨 이유가 있고, 원인이 있을까. 갑자기 난데없이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는 건 그래서 삶의 의미를 지워버린다. 그래서 아무 의미 없고 맥락도 없는 죽음 앞에서 인간은 지옥을 창조한다. 그가 죽은 건 그냥 벌어진 일이 아니고 죄를 지었기 때문이며, 그래서 생전 나쁜 짓을 저지르면 지옥에 가게 된다는 논리가 만들어진다. 정반대로 착한 일을 하면 천국에 간다는 서사도 만들어진다. 결국 지옥이란 불가항력의 운명이나 죽음 앞에서 모든 것이 무의미해질 수 있는 인간이 살아내기 위해 만들어낸 개념일 수 있다.
<지옥>에서 새진리회라는 신흥 종교를 만들어낸 정진수(유아인)는 그 자신도 10년 전 지옥행 고지를 받은 자로서 이런 일들이 ‘죄’와는 무관하게 벌어지는 재난에 가까운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던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지옥행을 ‘신의 의지’라 설파하면서 사람들을 새진리회로 끌어들인다. “신이 왜 그런 기괴한 일을 벌이는 걸까요? 저는 10년이 넘는 시간동안 생각하고 또 생각했어요. 근데 그걸 알 수가 없었어요. 이런 기괴한 일이 벌어지는데 아무런 이유가 없으면 사람들이 버틸 수 있을까요? 아마 엄청난 폭동과 정신적인 공황이 찾아올 거예요. 이유가 있어야 돼요. 이런 기괴한 일들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벌어지고 있다...” 정진수는 그렇게 신과 종교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종교는 과연 인간을 구원했을까. 지옥행이 벌어지는 그 끔찍한 장면들은 ‘시연’이라는 이름으로 생중계되고, 이런 공포를 이용해 새진리회는 세력을 키워간다. 지옥행을 당한 이들은 죄인으로 손가락질 받고 그 가족들의 신상마저 공개되어 새진리회 광신도 단체인 화살촉 단원들의 테러를 당한다. 하지만 거짓의 증거들이 곳곳에서 조금씩 등장하기 시작하자(죄가 없는데도 지옥행 고지를 받는 이들이 등장한다) 그 진실을 가리기 위해 새진리회는 유지사제(류경수) 같은 행동대장을 동원해 폭력을 행사한다. 마치 현재까지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종교전쟁이나, 종교를 내세운 폭력의 공포로 세력을 키워가는 급진 무장단체들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결국 진짜 지옥은 저 갑자기 나타나 무작위로 사람들을 죽이는(이건 아마도 우리 모두가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은유하는 것일 게다) 그 상황이 아니라, 그것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인정할 수 없어 만들어낸 거짓으로부터 탄생한다는 걸 <지옥>은 보여준다. 물론 종교는 삶의 또 다른 선택으로서 존중받아 마땅한 것이다. 하지만 죽음의 공포를 내세워 인간을 미혹하는 사이비들이 판치는 세상이야말로 진짜 지옥이라고 드라마는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단지 종교만이 아닌 정치나 경제에서도 똑같이 해당하는 이야기일 게다.(글:PD저널, 사진:넷플릭스)
이제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 MBC 월화드라마 <카이로스>가 그 정체를 드러냈다. 밤 10시 33분 단 1분 간 전화로 연결되는 한 달 전의 한애리(이세영)와 한 달 후의 김서진(신성록). 이 판타지 설정을 통해 드라마가 하려는 이야기는 어떻게든 과거로 돌아가 향후 벌어질 비극을 막을 수 있는 '기회'가 부여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 위함이다.
애초 이야기는 아이가 유괴 살해되고 아내 강현채(남규리)마저 이를 비관해 극단적인 선택을 함으로써 절망에 빠진 김서진이 한 달 전을 살아가는 한애리를 통해 자신에게 벌어진 비극을 막으려 하는데서 출발했다. 그렇게 과거와 미래가 연결된 김서진과 한애리는 그 1분을 통해 위험에 빠질 수 있는 서로를 구해내려 한다. 김서진은 한애리에게 미래에 그가 어떤 장소에서 살해된다는 사실을 경고함으로써 그를 구해내고, 한애리의 어머니 곽송자(황정민)가 살해된 걸 발견하고 이를 알려줌으로써 그를 살려낸다.
한애리는 김서진에게 닥친 비극을 되돌리기 위해 주변인물들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그 사건의 진실을 마주한다. 즉 그 비극은 강현채와 믿었던 부하직원 서도균(안보현)이 꾸민 거짓 사건이었고 죽은 줄 알았던 강현채와 그의 딸은 살아있었다. 하지만 김서진이 그 진실을 마주하는 순간 죽을 위기에 처하게 되자, 한 달 전을 살아가는 한애리가 아이의 유괴 사건을 애초에 막아버림으로써 이 모든 비극의 씨를 지워버린다.
초반의 이 에피소드들은 <카이로스>가 과거와 미래가 연결된 두 사람을 통해 서로를 구해내는 전형적인 타임 판타지가 아닐까 생각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후반부로 오면서 <카이로스>는 드디어 진짜 하려던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그건 19년 전 유중건설이 참여한 태정타운 붕괴사고의 진실이었다. 당시 붕괴사고 최후의 생존자였던 김서진은 그 일에 비관해 극단적인 선택을 한 아버지를 잃었고, 한애리 역시 아버지를 잃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유중건설 유서일(신구) 회장은 바로 그 사고가 있었던 태정시를 신도시로 개발하겠다는 야심으로 김서진에게 사업을 맡긴다. 유서일은 마치 그 사업이 태정타운 붕괴사고의 유가족들을 위해 새 터전을 만들어주는 것처럼 포장하고, 김서진은 자신 또한 그 사고의 피해자였다는 걸 드러냄으로써 그 개발사업에 반대하는 이들의 마음을 누그러뜨린다. 하지만 유서일은 당시에 피해자였던 김서진마저 이용하려 한 것이고, 사실상 과거 태정타운 붕괴사고의 배후였던 인물이다. 그 사고로 유중건설은 업계 선두로 올라섰다.
김서진은 태정시 개발사업을 맡게 되면서 유족들을 찾아가 설득하는 과정에 그 진실들을 하나씩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그건 사고가 아니라 어쩌면 범죄였고, 자신의 아버지는 자살한 게 아니라 그 범죄의 증거를 갖고 있어 타살된 것이며, 그걸 주도한 건 유서일 회장이었고 자신 또한 피해자지만 그의 꼭두각시로 이용되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다. 한애리의 엄마 곽송자가 계속 도망 다닌 이유도 밝혀진다. 그건 김서진의 아버지가 그에게 맡긴 증거 때문이었다. 유서일 회장은 김서진의 수행비서인 이택규(조동인)에게 명령해 그 증거를 찾게 했던 것.
<카이로스>가 놀라운 건 과거와 미래를 연결해 시간을 중첩시킴으로 만들어내는 타임 판타지 스릴러에 머무는 게 아니라, 이를 통해 우리에게 벌어졌던 무수히 많은 재난들을 다시금 돌아보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재난이라는 이름으로 마치 천재지변이나 되는 것처럼 사고로 치부됐던 그 비극이 어째서 계속해서 비슷한 양상으로 터졌는지에 대한 질문이 그것이다.
김서진과 한애리가 하루 단 1분 간 연결된 과거와 미래의 시간을 통해 그들은 비극을 막으려 노력하지만 그것은 양상만 달라질 뿐 멈추지 않는다. 결국 김서진도 한애리도 깨닫는다. 보다 근본적인 사건의 진실을 아는 것만이 이 비극을 제대로 막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무너진 것을 밀어내고 다시 세우는 것으로 비극은 지워지지 않고 멈춰지지도 않는다. 제대로 된 진상규명과 책임자에 대한 처벌이 이뤄져야 향후에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는다는 걸 <카이로스>는 타임 판타지를 통해 담아내고 있다.
우리는 무수히 많은 참사들을 겪었다. 그 때마다 안타까운 비극에 눈물 흘리고 분노했지만 그 비극들에 제대로 된 진상규명이 이뤄지지 않은 것들도 적지 않다. 비교적 최근 벌어진 세월호 참사도 그 중 하나가 아닐 수 없다. <카이로스>는 우리가 사고로 치부했던 일들이 어쩌면 범죄일 수 있는 사건이라고 경고한다. 그래서 제대로 된 진상규명이 이뤄지지 않으면 어떤 식으로든 또 다른 비극이 벌어질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심지어 과거와 미래의 시간을 연결하는 비현실적인 일이 가능하다고 해도 말이다.(사진:MB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