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괴물의 대결, <추적자>

 

“내 옆에는 사람들이 있어 물론 네 옆에도 사람들이 있겠지. 총리 자리면 신념도 버리는 대법관도 있고 돈이면 뭐든지 하는 사람들도 있겠지.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은 다르다. 법을 지키기 위해서 가족의 손에 수갑을 채우는 검사, 진실을 알리기 위해서 형부와 맞서는 기자, 사고를 당하고 자기 목숨이 위험한데도 나를 걱정해주는 형사. 강동윤. 이게 사람이다. 이게. 내가 아는 사람이다.”

 

'추적자'(사진출처:SBS)

딸이 죽고 아내가 죽고 탈옥을 하고 경찰에 쫓기며 밀항을 하려는 사람, 백홍석(손현주)은 강동윤(김상중)에게 “넌 참 불쌍한 놈”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백홍석이 사는 세상과 강동윤이 사는 세상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추적자>가 보여주는 두 개의 대한민국의 자화상이다. 사람이 사는 나라와 괴물들이 사는 나라. <추적자>는 결국 이 두 나라의 대결처럼 그려진다.

 

괴물들이 사는 나라가 인간 백홍석에게 주는 시련은 참혹하다. 법정에 선 백홍석의 변론을 맡은 최정우(류승수)가 사건을 하나 하나 플래시백으로 되짚는 과정은 그 괴물들이 사는 나라의 참상을 드러낸다. 딸이 사고를 당하고 그 딸이 깨어나길 간절히 바랐지만 결국 30억이라는 돈에 사주당한 친구에 의해 죽음을 맞게 되는 현실, 범인을 잡겠다는 딸과의 약속을 지켜내지만 그렇게 잡은 범인을 경찰이 놔주는 현실이 그렇다.

 

위증과 조작된 증언을 서슴지 않는 법정, 탄원서조차 거부하는 학교, 친구들이 모아온 탄원서조차 채택하지 않는 법정, 그리고 조작되는 현실에 죽음을 맞이한 아내, 오로지 진실을 밝히기만을 원했지만 진실은 오히려 덮여지는 현실, 그를 도와주기는커녕 회유하려는 변호사, 피해자를 비아냥대는 검사, 힘 있는 자의 목소리만 듣는 언론, 결국 억울하게 죽은 딸이 원조교제에 마약을 하는 딸로 만들어지는 현실... 이것이 괴물들이 사는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다.

 

백홍석과 그 주변인물들이 사람이 사는 나라의 표징으로서 하나의 유사가족을 형성한다면, 강동윤과 그 주변인물들은 괴물들이 사는 나라의 파편화된 가족을 보여준다. 백홍석이 말한 것처럼 그는 가족을 모두 잃었지만, 대신 마치 아버지나 형님 같은 황반장(강신일)이 있고 여동생 같은 조형사(박효주)와 막내 같은 박용식(조재윤)이 있다. 마치 동료처럼 도와주는 검사 최정우가 있고, 심지어 자신의 가족의 틀을 넘어서 정의를 지키려는 기자 서지원(고준희)이 있다. 그들은 사적인 이익이 아닌 인간애와 정의를 위해 백홍석을 돕고 나선다.

 

반면 강동윤은 버젓한 가족을 갖고 있지만 이것을 가족이라 부르기 민망한 수준이다. 장인 서회장(박근형)은 자신의 권력과 이득을 위해서는 심지어 딸도 버릴 수 있는 인물이다. 이것은 백홍석과 대비를 이룬다. 서회장의 딸인 서지수(김성령)는 아버지를 버리고 남편 강동윤을 선택한다. 강동윤의 비서인 야심가 신혜라(장신영)는 자신의 야심을 실현시키기 위해 서회장과 강동윤 사이에서 저울질을 한다. 서회장의 아들인 서영욱(전노민)은 강동윤에게 복수하기 위해 동생 서지수와 맞선다. 이건 가족이 아니다. 한 사람의 생명보다 권력욕이 우선인 삶, 괴물들의 삶이다.

 

법정에서 백홍석의 무죄를 주장하는 최정우에게 당사자인 백홍석은 그저 “열심히 살았을 뿐”이라고 말한다. 죄가 뭔지도 모르지만 “거기에 맞는 벌을 받겠다”고 한다. 이 모든 일들이 “죄는 지었으되 벌은 안 받으려다가 생긴 일”이라는 그의 진술은 이 괴물들이 사는 나라의 추악한 얼굴을 끄집어내 보인다. 가해자는 자신이 도리어 피해자라고 거짓을 말하고, 피해자는 자신이 가해자가 맞다며 진실을 말한다.

 

우리가 <추적자>를 보며 강동윤의 거짓에 분노를 보내고, 백홍석에게 깊은 동정을 하게 되면서도 그것이 보여주는 지독하고도 리얼한 현실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안타깝게도 우리가 그 괴물들이 사는 나라에 발을 딛고 있다는 얘기는 아닐까. 막판 대선에서 투표장으로 달려온 유권자들이 판세를 뒤집을 때 느꼈던 그 카타르시스를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이 드라마 같지 않은 드라마가 우리에게 전하는 진중한 메시지일 테니. 괴물들이 사는 나라에서 우리는 괴물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인간을 선택할 것인가.

<적도>에 이어 직진하는 사회 복수극, <추적자>

 

"힘 있는 자와 타협하지 않고 힘없는 사람들한테 고개를 숙이겠습니다. 위를 바라보지 않고 아래를 살피겠습니다. 가난이 자식들한테 대물림되지 않는 세상을 만들겠습니다. 서민들의 친구가 되겠습니다. 힘없는 사람들의 희망이 되겠습니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대한민국을 저 강동윤이 여러분과 함께 만들겠습니다." 대선 출마 선언을 하는 강동윤(김상중)의 이 연설 내용은 지겨울 정도로 전형적이다. 누구나 한번쯤 TV를 통해 봤을 법한 장면.

 

 

'추적자'(사진출처:SBS)

하지만 그 장면이 흘러나오는 TV 옆으로 억울하게 딸을 잃은 백홍석(손현주)이 스스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걸어 나오는 모습은 이 지극히 전형적이어서 이제는 따분하기까지 한 연설 내용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강동윤은 연설 내용과는 정반대로 아내 서지수(김성령)가 저지른 살인사건을 이용해 힘 있는 자인 장인 서회장(박근형)에게 압력을 가하고, 백홍석의 친구인 의사 윤창민(최준용)을 사주해 살아난 친구의 딸을 다시 죽게 만든다.

 

딸의 죽음 앞에서 백홍석의 아내 송미연(김도연)은 살아생전, 돈이 없어 딸에게 못해준 스마트폰이며 생일잔치, 학원 등록을 못해준 일들을 후회한다. 강력계 형사의 박봉에 힘없고 가난한 이들에게 돌아온 것은 억울한 딸의 죽음이다. 그것도 한 정치인의 야망에 의해 가차 없이 유린당한. 이런 세상에 희망이 있을 리 없다. 강동윤이 말하듯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나라는 애초부터 요령부득인 셈이다.

 

<추적자>는 첫 회에 이 모든 사회적인 분노의 지점을 찾아 그 도화선에 불을 붙인다. 장르적 관점에서 보면 이 드라마는 전형적인 추격전의 코스를 향해 달려갈 것이다. 이런 장르의 드라마는 굳이 새로움을 위해 장르 실험이나 뜻밖의 반전 포인트에 주저하지 않는 것이 관건이다. 오로지 대중들이 기대했던 코스를 제대로 달려 나가기만 하면 된다. 그 박진감과 속도감이 긴장감과 통쾌함으로 이어진다면 성공적인 작품이 될 수 있다.

 

물론 여기에는 한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그 반복적일 수 있는 장르의 흐름에 대중들이 공분하고 공감할 수 있는 작금의 현실을 제대로 얹어 놓아야 한다는 점이다. 백홍석이 당한 그 고통과 억울함이 대중들에게 공감되고, 백홍석의 딸을 죽음에 이르게 한 PK준(이용우)이나 그것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강동윤, 그리고 그의 사주를 받은 친구 윤창민의 행각에 공분을 갖게 되는 건, 그것이 안타깝게도 작금의 현실을 그대로 재연하고 있기 때문이다.

 

<추적자>를 통해, 외면되는 정의와 진실에 대해 질깃질깃한 복수극의 끝장을 보여주었던 <적도의 남자>가 떠오르는 건 자연스러운 일일 게다. 이 두 드라마는 모두 돈과 권력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현실을 복수극의 형태로 보여주었다. 무엇보다 <적도의 남자>는 좌우의 우회길을 살피지 않고 '직진하는 드라마'로서의 저력을 보여주었다. 이미 첫 회부터 거두절미하고 부조리한 현실을 툭 던져놓고는 그 안에 백홍석을 달리게 하는 <추적자>는 그런 점에서 <적도의 남자>의 직구 승부를 닮은 점이 있다.

 

과연 <추적자>는 <적도의 남자>가 그랬던 것처럼 차츰 시동을 걸어 점점 깊은 긴장감과 속도감을 만들어낼 것인가. <추적자> 첫 회의 마지막 장면, 즉 백홍석이 복수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 나오고, TV 화면으로 버젓이 누군가의 삶을 짓밟고 그 위에 올라선 강동윤의 연설 장면이 오버랩 되는 그 장면은 그래서 이 작품의 제대로 된 착화점이 되는 셈이다. <추격자>는 <적도의 남자>가 보여준 그 통쾌하면서도 아픈 사회극이자 복수극의 또 다른 그림을 그려낼 것인가.


이정향 감독의 '오늘', 용서란 무엇인가

사진출처: 영화 '오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마이클 샌댈의 조금은 진지한 인문서적이 우리 사회를 뒤흔든 적이 있다. 물론 엄청나게 책이 팔린 것과 많이 읽힌 것에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우리 사회에서 '정의'라는 문제에 대해 대중들이 그만큼 민감해하고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미술관 옆 동물원', '집으로...'의 이정향 감독이 들고 온 신작 '오늘'은 여러모로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이렇게 묻고 있다. 정의는 무엇이고 또 용서란 무엇인가.

"용서하고 나니 편해?" 영화는 자신이 사랑하던 사람을 죽게 만든 소년을 용서한 다혜(송혜교)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녀는 정말 용서하고 나서 편해졌을까. 멀리서 바라보면 아름다워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보면 심지어 끔찍한 것이 삶이다. 용서했다는 사실만으로 만족하며 '멀리서 바라보는 삶'을 살던 다혜는 어느 날 자신이 용서한 소년이 누군가를 죽였다는 그 끔찍한 사실을 눈앞에 목도하게 된다. 그러자 자신의 편안함(?)이 사실은 자기 기만적인 위안에 불과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즉 용서란 가해자가 진심으로 참회하고 사죄할 때 해줄 수 있는 일이지, 피해자가 저 혼자 용서한다는 것은 어쩌면 거짓이며, 나아가 정의의 시점으로 보면 또 다른 죄악이 될 수도 있다는 것. '오늘'이 파고드는 건 바로 이 지점들이다. 끔찍한 사건을 당한 피해자에게 제대로 된 사죄도 없이 스스로 '용서'할 것을 종용하는 사회. 그래서 용서했으니 죄도 가볍게 사해주는 사회. 하지만 제대로 된 사죄 없이 용서받은 그들이 다시 죄를 짓게 되는 현실. 잘 살겠지 하며 용서해줬지만 살인을 저지르고 소년원에 들어간 소년을 찾아간 다혜는 '소년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피해자와의 대면조차 하지 못하게 하는 법을 맞닥뜨리게 된다. 이 즈음에서 정의는 애매해진다. 법은 피해자를 위한 것인가 가해자를 위한 것인가.

이 영화가 보여주려는 것은 사실 다혜가 극중 인물로 다큐멘터리를 찍는 감독이라는 장치 속에 들어있다. 이 액자구조는 어쩌면 다혜라는 가상의 주인공이 겪는 심경의 변화가 바로 이정향 감독 자신이 이 문제를 바라보는 시점의 변화라고 말해주는 것만 같다. 영화가 마치 심층다큐나 토론 프로그램처럼 여겨지는 건, 이 '피해자들의 고통스런 세계'를 감정적인 접근이 아니라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사회적인 맥락에서 바라보려는 감독의 노력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오늘'이라는 영화가 건조하기만 한 영화라는 얘기는 아니다. 거기에는 이정향 감독 특유의 멜로적인 선이 들어가 있고, 가족적인 코드도 들어가 있다. 그래서 마치 멜로드라마와 다큐가 섞인 듯한 이 영화는 찡한 눈물과 우리의 이성을 두드리는 둔중한 질문이 공존한다.

하지만 이 '피해자들의 풍경'은 실로 처절하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도 어려운데 그를 죽인 자를 용서한다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일까. 하지만 자신에게 직접 찾아와 사죄도 하지 않은 그들을 세상은 모범수라는 이름으로 용서해준다. 피해자가 진정으로 용서하지 않은 자를 국가는 무슨 자격으로 용서하는 것일까. 다혜는 피해자들을 찾아가 용서의 모습을 찍으려 하지만, 피해자들은 거꾸로 용서할 수 없는 상황들을 늘어놓는다. 즉 다혜가 찍으러 다니는 인터뷰는 거꾸로 다혜에게 질문한다. '용서하고 나니 정말 편하냐'고.

이 영화는 피해자들이 겪는 고통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으로 이 질문에 대답한다. 그 '불편한 진실'을 관객들에게 끄집어냄으로써 '사과 없는 용서'라는 허울 좋은 세상의 밑그림을 보여준다. 그래서 이 영화는 '오늘'이 바로 가해자들이 처참하게 빼앗은 피해자들의 미래라는 것을 아프게 말한다. 당신이 숨 쉬고 있는 그 오늘이 당신이 빼앗은 피해자들이 그토록 바라고 간절하게 여긴 그 시간들이라는 것을.

'싸인'은 현실과 어떤 연결고리를 맺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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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인'(사진출처:SBS)

세상은 좁고, 사건은 넘쳐난다(?). '싸인'의 스토리 구조를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이렇지 않을까. '싸인'은 법의학을 그 중심소재로 다루고 있지만, 그 스토리는 법의학에만 머물지 않는다.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사건사고들을 정치권과 검찰, 경찰, 법의학자 등의 역학관계를 통해 다차원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한 회에 두 개의 사건을 병렬적으로 그려내면서, 이 많은 입장들이 들어가기 때문에 드라마는 느슨해질 여유를 주지 않는다. 끊임없이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스릴러과 추격전, 추리의 연속이 '싸인'이라는 드라마의 진면목이다.

어두운 밤길, 급하게 귀가하는 여자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지고 그 뒤를 쫓는 그림자의 발길도 빨라진다. 그리고 결국 벌어지는 살인의 현장. 이 묻지마 살인이 환기시키는 것은 사건사고가 넘쳐나는 현실이다. 그런데 이 사건이 여주인공 고다경(김아중)의 동생이 당한 사건과 연관되어 있다. 드라마지만 어찌 보면 이 설정은 지나치게 우연적이다. '싸인'이 보여준 일련의 사건들이 대부분 이렇게 주인공들과 연관되어 있다. 한 회사에서 벌어지는 독극물에 의한 연쇄살인은 윤지훈(박신양)의 아버지의 죽음과 연결되어 있었고, 그것은 또 그 아버지를 부검한 정병도(송재호)와도 관련되어 있었다.

또 윤지훈이 수사하고 있는 가수의 의문사 사건은 그가 국과수에서 밀려나게 되었던 사건이기도 하다. 왜 '싸인'은 개연성을 어느 정도 양보하면서까지 사건과 인물들을 밀접하게 그리는 걸까. 이유는 명백하다. 검찰과 경찰, 법의학자가 사건을 파헤치는 그 동기부여를 좀 더 강하게 그리려는 의도다. 그저 억울하게 죽게 된 사람들의 사인을 밝혀내는 것보다, 죽게 된 가족의 억울함을 풀어내는 주인공의 이야기가 훨씬 극적이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런 주인공과 계속해서 연루되는 사건들은, 세상에 벌어지는 사건사고가 그리 먼 이야기가 아님을 드러내기도 한다. 스릴러가 갖는 스토리 구조의 비결은 비일상적인 사건을 긴장감 넘치게 그리면서, 그것이 일상적인 내 이야기일 수 있다는 여지를 남기는 것이다. '싸인'에 등장한 사건사고들이 우리가 현실에서 봐왔던 사건들을 연상시키는 것 역시 다분히 의도적인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드라마와 현실은 어떤 연결고리를 갖게 된다.

게다가 사건을 수사해가는 과정에서 그 당사자들 역시 위험에 처하게 된다. 정우진(엄지원) 검사는 게임 시나리오대로 살인을 저지르는 살인범에게 공격당하고, 공범이 등장하면서 잡혔던 용의자가 풀려나면서 그 위협은 다시 고다경에게로 향한다. 본격적인 멜로는 아니지만 정우진과 사랑하는 관계가 된 강력계 형사 최이한(정겨운)은 이 묻지마 살인이 이제 자신과 직접적으로 연루된 사건으로 변모한다.

사건을 계속해서 터지고 현장을 발로 뛰는 평검사와 강력계 형사, 심지어 지나치게 정치적인 되어버린 국과수를 나와 현장으로 뛰어든 법의학자의 목숨을 건 사건 추격이 이어지지만, 이 상황에서 정치권은 사건의 해결을 도와주기보다는 오히려 은폐하기 바쁘다. 드라마 시작과 함께 명시되는 '이 드라마는 특정 기관과 관련이 없다'는 문구는 거꾸로 이 드라마가 그저 드라마에 머물지 않는다는 얘기를 해주는 것만 같다. 국가가 정의를 세워주지 않는 상황에서 판타지로서의 영웅들이 탄생한다. 세상은 좁고, 비정하고 사건은 우리 주변에서 벌어질 만큼 넘쳐난다.

'싸인'의 숨 막히는 스릴러는 물론 능숙한 장르 운용의 힘이다. 하지만 장르라는 건 콘텐츠 내에서 뚝딱 만들어지는 그런 게 아니다. 장르는 당대 현실과 작품과의 조우에서 합의되는 것이다. 물론 현실과 거리가 있는 드라마적 극적 구성으로 이뤄지고 있지만, '싸인'은 바로 그 현실과의 접점을 제대로 짚어내고 있다. 세상은 '싸인'이 보여주는 것처럼 심지어 공포 영화의 한 장면 같지만, 그 정의를 세워야할 기관들은 모두 정치적인 입장만을 반복하며 이를 외면한다. 국과수를 지키기 위해 국과수 밖으로 나오는 아이러니한 영웅의 탄생은 이처럼 현실에 깔려있는 어두운 공기들을 포착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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