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호동에게 약간의 시간을 줘야 하는 이유

 

강호동이라는 이름은 육중하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잠시 예능을 떠나있는 동안이 오히려 강호동의 이름을 더 육중하게 만들었다. 기대감만 더 커진 셈이다. 하지만 그가 복귀했을 때 바로 이 육중한 기대감은 강호동은 물론이고, 강호동이 출연하는 프로그램에게마저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맨발의 친구들'(사진출처:SBS)

<스타킹> 8.5%, <무릎팍 도사> 5%, <달빛 프린스> 4%, <우리동네 예체능> 7.5%, <맨발의 친구들> 4.7%. 강호동이 출연한 프로그램의 시청률은 낮아도 너무 낮다. 그래서 항간에는 강호동이 한 물 갔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강호동 출연 프로그램의 낮은 시청률이 오롯이 강호동만의 잘못일까.

 

먼저 <스타킹>과 <무릎팍 도사>의 시청률 추락은 강호동과는 그다지 상관이 없다. <스타킹>은 이미 강호동이 있던 시절에도 내리막을 걷던 프로그램이다. 각종 오디션 프로그램들이 쏟아지면서 일반인 스타를 찾던 <스타킹>은 차별성을 잃어버렸다. 제 아무리 놀라운 재주를 가진 일반인들이 나와도 마치 동네 경연 같은 느낌을 주게 된 것. 화려하고 한 가지 종목에 집중되어 더 전문화된 오디션 프로그램들의 영향이다.

 

<무릎팍 도사>는 강호동의 트레이드마크나 다름없는 토크쇼지만, 연예인 토크쇼 트렌드가 지나버린 지금 사실상 그 누가 맡아도 어려운 프로그램이 되었다. 발군의 유재석도 <놀러와>의 추락을 버텨내지 못했듯이. <스타킹>과 <무릎팍 도사>의 추락은 이런 변화하는 트렌드를 읽지 못하고 그저 강호동이라는 MC에 기대보려 했던 방송사들의 패착인 셈이다.

 

그렇다면 새롭게 런칭한 프로그램들은 어떨까. 일찌감치 폐지된 <달빛 프린스>는 새로운 시도는 좋았지만 책이라는 소재의 한계를 쉽사리 뛰어넘지 못했다. 무엇보다 강호동과는 소재적으로도 잘 맞지 않는 옷이었다. 오히려 이것이 기획 포인트라고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이 갖고 있는 정적인 분위기는 강호동의 동적인 장점을 살려내기는 무리였다.

 

<우리동네 예체능>은 복귀한 강호동으로서는 가장 효과를 발휘하고 또 기대해볼만한 프로그램이다. 시청률이 7% 대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지만 반응도 좋은 편이고, 확장가능성도 많은 프로그램이다. 동네 스포츠의 다양함은 물론이고, 동네의 숨은 고수들은 거의 무한대로 많다. 여기에 조달환이나 이병진처럼 미친 존재감들이 가세하면서 끊임없는 추동력을 만들어낸다.

 

4연승을 하면 동계올림픽에 가고 싶다는 소원은 동네 스포츠에서 국가대표 스포츠까지를 아우르겠다는 야심마저 보인다. 무엇보다 든든한 조력자 이수근과 합이 잘 맞는 강호동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예능과 체육이라는 옷을 제대로 찾아 입은 셈이다. 주말에 훨씬 어울리는 아이템을 주중에 편성시킨 것이 하나의 오점처럼 보이지만 그것마저 역발상으로 뒤집을 수 있다면 전체적으로 침체된 주중 예능의 기폭제가 될 가능성도 있다.

 

<맨발의 친구들>은 그 맨발로 뛰겠다는 의지는 좋으나 포인트를 잘못 잡았다. 이미 <런닝맨>이나 <정글의 법칙>을 통해 해외로케 예능의 가능성을 제대로 본 것은 맞지만 중요한 것은 거기에 우리네 대중의 정서를 담지 못했다는 점이다. <런닝맨>의 해외로케는 정규적인 것이 아니고 가끔 나가는 데다 예능 한류가 주는 자긍심이 있다. 또 <정글의 법칙>은 어떤 정글이라는 공간이 주는 고생에 대한 의미화가 분명하다. 거기에는 환경과 공존의 의미가 있다.

 

<맨발의 친구들>이 추구한 것이 없는 건 아니다. 이 프로그램은 이문화 교류라는 기치를 내걸었다. 베트남이나 인도네시아에 가서 그들과 똑같이 하루를 살아보는 체험은 그들과 맨발로 부딪치는 문화교류라는 의미를 찾아내려 하지만, 대중들에게는 그만큼 절절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눈물 나는 진짜 생고생이 아니라면 해외로케는 서민들에게는 그 자체로 배부른 얘기로 여겨지고 있다는 것이다. 더 힘겨워진 현실 때문이다.

 

하지만 앞서 얘기했듯이 <맨발의 친구들>은 그 의지가 나쁜 건 아니다. 따라서 이를테면 체험을 국내로 돌리고 진정으로 어려운 삶을 살거나 문화적으로든 나이로든 빈부의 격차로든 서로 섞이기 어려운 서민들 속으로 들어간다면 새로운 가능성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맨발의 진심이 아니겠는가.

 

문제는 강호동을 세우고 새롭게 런칭한 예능 프로그램에 대한 조급증이다. 한때 <1박2일>로 40%가 넘는 시청률 기록의 사나이인 그에게 시청률 4%, 5%는 일찌감치 ‘글렀다’는 속단을 불러온다. 하지만 <1박2일>도 처음부터 40%는 아니었다는 것을 상기해보라. 강호동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이 만들어내는 조급증은, 될 프로그램도 안 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강호동은 여전히 육중하다. 그리고 그 육중한 몸을 더 열심히 놀리고 있다. 부담은 몇 배다. 프로그램이 안 되면 오로지 그 탓이 자신에게 온다는 걸 스스로 알고 있어서다. 또 자신 때문에 프로그램에 대한 관대함도 상대적으로 적다는 것 또한 알기 때문이다. 조금만 기다려보자. 그에게도 어느 정도의 시간은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그가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죽을 힘을 다해 맨발로 뛰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만이 그 육중함을 이겨낼 유일한 방법, 바로 진정성을 끌어낼 수 있는 길이라는 걸 그는 알고 있다.

진정성 찾은 '정글', 이젠 재미를 찾아야

 

<정글의 법칙> 뉴질랜드편은 여러모로 많은 아쉬움을 남기고 끝을 맺었다. 박보영의 소속사 대표가 페이스북에 올린 글 몇 줄이 지금껏 <정글의 법칙>이 진정성으로 쌓아놓은 공든 탑을 하루아침에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뉴질랜드편은 진정성을 의심할만한 조금치의 의혹도 남겨서는 안 되는 상황에 놓여졌다.

 

 

'정글의 법칙'(사진출처:SBS)

편집은 투박해질 수밖에 없었다. 첫 회부터 사전 답사하는 장면을 미리 보여줘야 했고 중간 중간에도 자막 등을 통해 ‘관광이 가능한 지역이나 전문가이드가 반드시 따라야 함’ 같은 고지를 붙여야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또 누구나 다 갈 수 있는 관광지나 여행하고 왔다는 식으로 호도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똑같은 관광지를 간다고 하더라도 그 곳을 어떤 방식으로 체험하느냐에 따라 그 강도나 결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그것을 제대로 보여준 것이 바로 채텀섬에서 초심으로 돌아가자며 병만족이 한 석기시대 체험이다. 그 섬은 물론 관광이 가능한 곳이고 또 살고 있는 주민도 있는 곳이지만 그들은 말 그대로 석기시대로 돌아가 야생 그대로를 보여주었다.

 

동굴에서 자고 석기만을 써서 물고기나 흑전복을 잡거나 웨카라는 날지 못하는 새를 잡아먹으며 지내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게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정글의 법칙>이 정글을 체험하는 방식이라는 것은 이번 뉴질랜드편을 통해 확실히 보여준 셈이다. 이미 전 지구 어느 곳이든 들어가지 못할 곳이 없는 시대에 완전히 외부로부터 차단된 곳은 찾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나마 야생이 살아있는 곳으로 들어가 야생 그대로의 삶을 체험하는 것이 더더욱 의미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조금치의 오해도 만들지 않기 위해 선택한 편집은 결과적으로 극도로 스토리텔링이 자제될 수밖에 없었다. 찍어온 촬영분에 적절한 편집과 스토리텔링을 덧붙여야 하나의 맥락이 생기고 재미가 생길 수 있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 자유로운 스토리텔링을 할 수 없는 뉴질랜드편은 상대적으로 상당 부분의 재미를 포기한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재미를 뽑을 수 있는 부분이 사냥을 하거나 그 잡은 것을 같이 먹는 장면이었을 게다. 이번 뉴질랜드편이 <정글>판 최고의 먹방이 된 것은 그런 이유다. 흑전복에서부터 웨카 같은 새, 각종 물고기, 거대 뱀장어, 웨타나 후후 애벌레 같은 벌레에 이르기까지 뉴질랜드편은 끝없는 식탐을 주 스토리텔링의 재료로 삼았다.

 

결과적으로 나온 장면들을 종합해볼 때, 아마도 진정성 논란이 없었다면 뉴질랜드편은 굉장히 다채로운 스토리가 가능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채텀섬에서의 석기시대를 거쳐 쥐라기 숲을 지나 빙하를 보고 마지막으로 <반지의 제왕>이 촬영된 영화 속을 체험하는 일련의 과정이 거기서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들을 좀 더 자유롭게 스토리로 이을 수 있었다면 시청자들로서는 훨씬 재미있는 <정글의 법칙> 뉴질랜드편을 즐길 수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이번 논란을 계기로 <정글의 법칙>은 확실히 자기들만의 진정성을 제대로 보여줬다고 생각된다. 그러니 이제는 좀 더 과감한 스토리텔링을 통해 재미를 만들어낼 필요가 있다. 만일 그래도 논란이 걱정된다면 사전 방지 차원에서 프로그램 시작 부분에 ‘재미를 위해 약간의 스토리텔링을 했다’는 식의 고지 정도를 넣어주는 편이 낫지 않을까. 진정성도 좋지만 예능 프로그램으로서의 재미를 어떻게든 복원해야 한다. 이젠 좀 더 과감해질 때다.

27년만에 다시 행진하는 들국화

 

들에서 모진 바람을 버텨온 탓일까. 국화 향은 더 진해졌고 더 강렬해졌다. ‘그것만이 내 세상’을 외치고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로 사라졌던 들국화. ‘인제는 돌아와 대중 앞에 선’ 들국화는 서정주의 절창만큼이나 원숙해졌다. 젊은 시절 거칠었던 야성은 그 긴 시간을 거치며 그 강렬한 힘 속에 부드러움을 갖추게 되었고, 그들이 노래하는 가사는 도발적이면서도 인생의 깊이가 더욱 느껴졌다. 합정동 인터파크 아트홀에서 열린 ‘다시 행진’이라는 콘서트(4일-14일)는 그 제목처럼 들국화를 27년 만에 돌아와 다시 출발점에 서게 했다.

 

'들국화'(사진출처:컴퍼니F)

가사의 진정성이란 가수의 삶이 거기에 그대로 겹쳐질 때 담겨지는 법. ‘나의 과거는 어두웠지만-’ 콘서트의 첫 곡 ‘행진’은 그들이 살아낸 삶을 미리 예시한 곡처럼 그 가사가 새록새록 피어났다. 아마도 1985년 발표됐던 젊은 시절 들국화의 이 노래에 발을 동동 굴리며 그 행진의 설렘을 느꼈던 팬들이라면 그 가사가 들국화의 이야기면서 동시에 자신들의 이야기라고 여겼을 것이다. 30여 년의 세월을 단숨에 꿰뚫는 힘. 그것이 바로 노래의 힘이 아니던가. ‘헤어진 후에’, ‘제발’, ‘사랑일 뿐이야’, ‘그것만이 내 세상’ 같은 명곡들은 그 세월의 벽을 허물어뜨렸다.

 

20대 청춘들에게나 이제는 머리가 희끗해진 중장년들에게나 들국화의 노래는 여전히 청춘의 힘을 느끼게 해주었다. “꿈이 있으면 나이는 아무 것도 아니에요”라고 말하는 전인권은 여전히 꿈꾸는 소년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다시 꿈을 꾸고 다시 모여 다시 무대로 돌아오고 다시 행진하는 데는 긴긴 시간이 필요했다. 너무 강렬한 힘을 가진 와인은 바로 따면 거칠고 쓰기만 하지만 오랜 시간 묵혀두고 꺼내면 한없이 부드러워지고 깊어지는 것처럼, 들국화는 어쩌면 그 대기만성의 시간을 기다려왔던 것처럼 보였다.

 

전인권의 목소리는 여전히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듯 읊조리는 듯한 저음에서 쇳소리를 느낄 수 있는 고음까지 단번에 치솟아 오르는 쾌감을 선사했고, 최성원의 부드러움은 여전히 속삭이듯 관객의 귀를 간지럽혔으며, 주찬권의 드럼은 여전히 마치 장작을 쪼개듯 강렬하면서도 절도가 있었다. 하지만 그 ‘여전히’ 속에는 원숙미가 더해졌다. 공연 중간 중간 툭툭 던지는 농담 속에마저 인생의 깊이가 묻어나듯.

 

“예전에 다투고 헤어졌던 거 후회하지 않으세요?” 한 관객의 질문에 주찬권이 던진 “헤어진 후에, 이별이란 없는 거야.”라는 답이나, 한 젊은 관객이 “젊었을 때 꼭 하지 않으면 후회할 게 있을까요?”라는 질문에 전인권이 “고생하세요”라고 던진 답변이 관객들을 공감시킨 것은 거기에 자신들의 삶을 통과한 진심이 담겨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찌 말 뿐이랴. 들국화의 곡들은 마치 부흥회의 연설처럼 강하고 따뜻한 위로와 격려가 담겨있었다. 27년만의 신곡 ‘노래여 잠에서 깨라’는 그래서 우리네 가요계에 던지는 도발이면서도 그 안에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 대한 꿈과 희망이 들어있었다.

 

다시 돌아와 행진하는 들국화의 이 노래를 요즘 시쳇말로 떠도는 ‘힐링’으로 표현하기는 어렵다. 너도 나도 ‘힐링’이라 떠드는 탓에 그 단어가 가진 힘이 희석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들국화의 노래 속에는 넘어진 이들을 다시 일어서게 하는 힘이 느껴진다는 점이다. 그것은 위로이고 힘이고 격려이며 도전이고 꿈이다. 들에서 오래도록 시간을 기다려온 국화꽃이 피었다. 그 향기는 더 진해졌다.

<정글>의 초심은 다큐가 아니라 예능이다.

 

<정글의 법칙(이하 정법)> 뉴질랜드편의 짧은 예고 속에서는 이번 논란의 시발이 되었던 박보영이 “언니 나 이거 안하면 안돼?”라고 하는 말이 짧게 삽입되었다. 아마도 뉴질랜드라는 우리들이 생각하기에 멋진 풍광의 지상낙원에서 뜻밖의 상황을 맞이한 그들이 겪게 되는 고생담이 이어질 것이란 예고다. 부제도 ‘뜻밖의 여정’이다. 뉴질랜드를 배경으로 피터 잭슨 감독이 찍은 <호핏 : 뜻밖의 여정>에서 따온 부제겠지만, <정법>이 뉴질랜드에서 맞닥뜨린 뜻밖의 상황을 말하는 제목이기도 할 것이다.

 

'정글의 법칙'(사진출처:SBS)

어딜 가든 여전히 힘들고 고생스러운 것은 아마도 <정법>의 현실일 게다. <정법> 아마존편의 마지막회에서 제작진들의 고생담을 편집해서 보여준 것은 이번 논란에 대한 제작진의 안타까움이 묻어난다. 정글에서 넘어지면서도 카메라를 놓지 않고 끝까지 촬영에 임하고, 때론 온몸이 긁혀 피가 나도 촬영을 포기하지 않는 제작진의 모습 속에는 논란에도 불구하고 그 고생담이 진짜라는 걸 보여주고픈 <정법>의 안간힘이 느껴진다.

 

사실 국내에서 1박2일로 여행을 간다 해도 그것이 촬영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면 그 자체도 고생일 수밖에 없다. 하물며 해외에서 20여일 가까이 강행되는 촬영은 오죽할까. 하지만 제 아무리 고생이라고 해도 그 안에서 느끼는 행복감도 있기 마련이다. <정법> 아마존편의 마지막회는 정글 속에서 오히려 느끼는 행복을 잘 보여주었다.

 

마지막날을 위해 김병만이 민물새우를 어떻게든 잡으려는 그 의지는 이미 가족이 된 병만족에 대한 그의 애정이 그대로 묻어났고, 그렇게 잡은 새우와 사유지 주인이 제공한 통돼지로 바베큐 파티를 벌이는 장면이나, 박솔미가 한 자 한 자 적어 보낸 진심어린 편지를 읽는 장면에서는 정글이기 때문에 더 느낄 수 있는 행복이 있다는 걸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것은 어쩌면 <정법>이 작금의 논란을 넘어설 수 있는 길처럼 보이기도 했다. 물론 제작진에게 정글에서 겪는 고생담은 상상을 초월할 수 있지만 적어도 프로그램에 있어서는 고생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주는 것. 정글에서도, 아니 정글이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행복감을 알려주는 것은 <정법>이 지금 현재 처한 현실에서 어쩌면 꽤 중요한 일이 될 수 있다.

 

다큐적인 요소와 예능적인 요소가 섞여있는 것이 바로 <정법>만의 특징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그 둘 중 어디에 더 가까운가를 말하라면 아마도 예능일 것이다. 그 곳이 정글이라고 해도 우리는 여전히 김병만과 병만족을 통해 어떤 웃음을 기대한다. 사실 이 부분은 <정법>만이 갖는 특별한 매력이기도 하다. 처음 <정법>이 아프리카의 악어섬에 들어갔을 때도 우리를 놀라게 했던 것은 그 힘겨운 상황이 아니라 그 상황 속에서도 심지어 콩트에 가까운 예능을 선보이던 김병만의 모습이었다. 정글에서도 여전한 달인의 모습에 <정법>에 대한 기대감도 커졌던 것.

 

그 진위가 어떻든 이미 진정성이 훼손되어버린 상황에서 <정법>의 고생담은 어쩌면 시청자들에게 그다지 어필하지 못할 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실제로 겪은 고생담을 의도적으로 편집해낼 수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거기서 실제 고생한 출연진과 제작진에 대한 예의가 아닐 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정법>이 작금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 어떤 돌파구를 찾기 위해서는 그것이 고생담만이 아니라 그 안에 즐거움과 설렘, 심지어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요소들이 함께 했다는 것을 균형 있게 보여주는 일이다.

 

고생을 강조하다 보면 자칫 다큐적인 요소가 전면에 강조될 수 있다. 이것은 작금의 <정법>에게는 그다지 좋은 선택이 아닐 수 있다. 고생 보다는 ‘뜻밖의 여정’에서도 느낄 수 있는 행복감과 여유를 동시에 보여줘야 한다. 그리고 물론 고생스럽기는 하지만 이것이 결국은 예능이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드러내줘야 한다. 그러려면 그간 공개되지 않았던 정글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할 때 갖게 되는 휴식조차 프로그램의 일부로 끌어들이는 과감함이 필요하지 않을까.

 

고생과 휴식의 자연스러운 병치는 그 자체로 다큐와 예능의 상승효과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정글의 야생과 고생만을 집중해서는 정글이 또한 제공할 수 있는 행복감을 놓칠 수 있다. 마치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웃음을 전하려 애쓰던 영화 <인생의 아름다워>의 로베르토 베니니처럼, 혹은 달인이 되기 위해서 그토록 고생을 하면서도 그 고생담을 얘기하기보다는 대중들에게 오히려 웃음을 제공해왔던 김병만처럼, 정글 속에서도 웃음과 행복감을 전해 주려할 때, <정법>의 훼손된 진정성은 어쩌면 회복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속으로는 울고 있어도 겉으로는 웃음을 주는 예능의 정신으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진정한 <정법>의 초심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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