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인'이 멜로에 빠지지 않은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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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인'(사진출처:SBS)

마지막회에 와서야 왜 '싸인'이 많은 시청자들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멜로를 발전시키지 않았는지를 알 것 같다. '싸인'의 현실 인식은 섬뜩할 정도로 비장하다. '산 자는 거짓말을 하고 망자가 진실을 말한다'는 말은 그저 하나의 수사가 아니라 이 드라마가 가진 비정한 세상에 대한 시각이다. 모든 명확한 심증과 정황을 갖고 있으면서도 권력의 힘을 빌어 증거를 인멸하고 살아남는 범법자들에게, 윤지훈(박신양)이 스스로 '진실을 말하는' 증거로 죽음을 선택한 것은 '싸인'이 전하는 세상에 대한 준엄한 경고다. 이렇게까지 해야 겨우 진실을 드러낼 수 있는 절박한 상황에, 멜로에 빠지는 것 자체가 너무나 한가하고 심지어 이 땅의 수많은 억울한 망자들에게는 죄스럽게까지 여겨졌을 일이다.

따라서 멜로 없이도 20% 이상의 시청률을 기록한 '싸인'의 성공은 오히려 그 멜로가 없을 수밖에 없는 작품의 진정성이 통했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는 죽어나가고 있고, 누군가는 그 죽음을 덮으려고 하는 상황에서, 망자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은 그들밖에 없다. 그 속에서의 사랑타령은 배부른 일로 비춰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윤지훈이라는 캐릭터의 진지함은 바로 이런 작품의 분위기 속에서 창출된 것이다. 그에 대한 고다경(김아중)의 마음이 사랑 그 이상의 존경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물론 이 멜로의 부재는 작품의 장르적 완성도를 위해서도 필요했을 것이다. 즉 첫 번째 사건이 마지막 사건으로 이어지는 이 작품에서 그 사건의 해결방식으로서 윤지훈의 죽음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마지막 죽음에 증거를 남긴다는 그 강렬한 설정만큼 이 드라마의 주제를 드러낼 수 있는 것을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죽음이 예정된 윤지훈이 고다경과의 멜로를 너무 깊게 끌고 가게 되면 그것은 제작진에게도 부담이 됐을 수밖에 없다. 우리네 드라마에서 멜로란 시청자들의 감성에 의해 가장 좌지우지되기 쉬운 설정이 아닌가.

이것은 거꾸로 윤지훈과 고다경이 깊은 멜로 관계를 그렸을 때, 마지막 회 초반부에 일찌감치 윤지훈의 죽음이 드러나는 그 장면에서 느껴졌을 당혹감을 떠올려보면 쉽게 이해될 수 있는 일이다. 윤지훈은 이제 자신이 죽게 될 사실을 알고 마지막을 정리하듯 고다경과의 마무리를 한다. 그리고 이것은 어쩌면 시청자들과의 마무리이기도 할 것이다.

한 법의학자의 죽음에 이르러서야 권력의 심층부와 연결된 살인사건이 해결되는 이 상황이 말해주는 건 명백하다. 그만큼 권력의 시스템은 공고하고 심지어 살인을 저질러도 권력의 힘으로 그것마저 덮어버릴 수 있는 사회에서 그것을 넘어서고 정의를 살리기 위해서는 그 위치에 있는 누군가의 희생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 희생이 '싸인'에서처럼 굳이 죽음이 되어야 한다는 얘기는 아닐 것이다. 망자들의 이야기를 좀더 가까이 듣기 위해 국과수를 나와 실제 현장으로 뛰어드는 윤지훈처럼 다만 자기의 이권마저 버리는 그 희생의 정신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단초가 된다는 얘기다.

'싸인'이 멜로 없이도(어쩌면 멜로가 없어서)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것은 그 속에 깔려진 깊은 진정성 때문이다.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망자들의 이야기들 속에서 사랑타령마저 사치이자 호사로 여기는 그 태도. '싸인'의 작품적 완성도와 성공은 바로 그 태도가 보이는 진지함에서 비롯된다.

예능 프로그램, 무엇이 공익일까

이른바 공익 예능프로그램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오고 있다. ‘1박2일’은 애초 기획의도에서부터 일정부분 공익성을 담고 있었다. 바로 우리네 관광자원의 발굴과 오지에 대한 조명 등이 그것이다. ‘무한도전’은 초기 도전을 통한 성장 버라이어티로 시작해서 점점 성장의 정점에 이르자, 그 도전의 공익적 성격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도전하는 국내 봅슬레이팀들을 위해 그 스포츠의 세계로 뛰어드는 것이나, 한식의 세계화를 위해 뉴욕으로 달려가는 것, 혹은 각종 사회적 이슈들은 소재 속에 녹여내는 방식은 ‘무한도전’ 특유의 공익을 보여준다.

‘천하무적 야구단’은 전형적인 스포츠 버라이어티지만 사회체육의 활성화라는 측면에서도 그렇고 야구라는 스포츠의 저변을 알리는 측면에서도 그 공익적인 성격을 무시할 수 없다. 야구협회측에서 이 예능에 적극적인 지원을 해주는 것은 그 때문이다. ‘청춘불패’ 같은 신생 버라이어티쇼 역시 대단히 공익적이다. 아이돌 걸 그룹이 유치리라는 작은 동네에 정착해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이 프로그램은 실제로 이 동네 분들을 위해 일하고 봉사하는 내용들을 담고 있다.

쌀집 아저씨, 김영희 PD 체제로 다시 돌아오는 ‘일요일 일요일 밤에’도 거의 전면에 공익을 내세웠다. '대한민국 생태구조단 헌터스'는 개체수가 늘어난 멧돼지를 어떤 방식으로 처리할 것인가에 대한 논란의 불씨가 남아있지만 결국 주창하고 있는 것은 생태 살리기라는 공익이다. 이것은 고개 숙인 우리 시대의 아버지 기 살리기라는 미션을 통해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담을 것이라는 '우리 아버지'도 마찬가지다. 또한 '단비'는 여기서 한 차원 더 나아가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다른 나라에서 봉사하는 공익 버라이어티를 표방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공익을 내세운 예능 프로그램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 또한 만만찮다. 도대체 예능 프로그램에서 무엇이 공익인가 하는 점이 그 질문이다. 무언가 출연진들이 감동적인 일을 하고, 사회에 봉사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공익일까. 혹자들은 이러한 공익이 전면에 포진한 예능 프로그램에 진저리를 치기도 한다. 예능에서의 이른바 억지 춘향식의 감동은 때때로 역풍을 맞기도 한다. 한 마디로 웃기기나 잘 하라는 얘기다. 이러한 관점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 “예능 프로그램이 줄 수 있는 최대의 공익은 웃음”이라는 것이 이 관점을 대변해주는 문구가 된다.

그런데 이 말은 언뜻 보기에는 그럴 듯해 보이지만, 한 번 더 깊게 생각해보면 또 다른 관점으로도 읽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예능의 최대 공익이 웃음’인 것은 맞지만, 그 웃음에도 다양한 층위가 있다는 점이다. 그저 웃기기만 하려고 갖은 자극적인 방법들만 끌어 모은 예능을 가지고 우리는 공익을 운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보면 때론 진정성이 있는 감동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는 예능 프로그램이 주는 훈훈한 웃음이라는 층위는 분명 인정해줘야 할 대목이다. 그러니 ‘예능의 최대 공익이 웃음’이라 주장한다면, 그 웃음이 과연 공익에 맞는 진정성을 담고 있는가를 들여다 봐야할 것이다.

혹자는 과거 공익을 내세운 예능 프로그램들이 가져왔던 부작용들을 언급하면서 섣부르게 예능이 공익을 추구하려는 시도가 오히려 무책임한 짓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에는 예능의 목적이 결국에는 공익이 아니라 웃음이기 때문에, 어떤 도움을 주었다고 해도 그것이 결국에는 일회적인 것에 머물러 오히려 문제를 발생시키기도 한다는 시선이 담겨있다. 즉 감동적인 장면을 포착하기 위해 처음에는 뭐든 다 줄 것처럼 포장되어 방송이 되지만, 방송이 끝나고 나면, 일정한 웃음과 감동을 가져간 프로그램들은 다시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이것은 사후관리가 되지 않는 부작용으로 나타나게 된다. 감동이 주는 카메라 앞과 뒤의 온도차는 이처럼 크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들에도 또 다른 시각은 존재한다. 즉 초창기 공익을 주창한 예능 프로그램들은 그 낯선 시도 위에서 문제를 드러내기도 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는 얘기다. 디지털 혁명으로 열려진 매체 환경 속에서, 그것도 리얼을 주장하는 예능 프로그램이 공익의 사후관리를 등한시 한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점이다. 실제로 ‘1박2일’ 같은 경우, 한 번 방문해 인연을 맺은 지역주민들에게 지속적인 관심을 보여주기도 하고, ‘청춘불패’ 같은 프로그램은 아예 한 곳에 정착하기 때문에 이런 문제는 아예 발생할 수가 없다.

진정성이 있는 웃음을 주는 것인가, 아니면 그 웃음 속에 사회 참여적인 부분들을 포함시켜야 하는 것인가. 예능 프로그램의 어떤 것이 공익인가 하는 문제는 제작자들이 갖는 관점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거기에 대한 정답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대중들이 어느 쪽에 더 공감하느냐가 이 공익 예능에 대한 앞으로의 방향을 열어줄 것이라 생각된다. 확실한 것은 예능이 공익을 얘기할 정도로 과거와 그 위치가 확연히 달라졌다는 점이다. 그 공익이 어떤 것인지는 차치하고라도, 프로그램이 공익적인 부분까지 들여다보고 실제로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어쩌면 이제 예능 또한 가져야 하는 책무가 되고 있다.

‘인터뷰 게임’폐지, 불황기 TV의 선택 옳은가

‘인터뷰 게임’이란 글자가 새겨진 커다란 마이크, 그 마이크를 들고 어색하게 서서 역시 어색한 목소리로 화면을 보고 말하는 일반 출연자. ‘인터뷰 게임’의 외형은 세련되지 않다. 깔끔하게 구성된 화면과 자연스러움을 강조하기 위해 되도록 숨겨진 마이크, 그리고 인터뷰어의 능수 능란한 리드로 매끄럽게 진행되는 인터뷰에 익숙한 분들이라면 이 프로그램의 어색함은 낯설기 그지없었을 것이다.

‘인터뷰 게임’과 ‘절친노트’, 그 서로 다른 진정성
하지만 그 어색함은 ‘인터뷰 게임’에 오면 진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리얼리티 전략의 일환으로 사용된다. 화려한 외형은 견고한 껍질과 같아, 그 내면을 바라보는데 오히려 장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인터뷰 게임’은 이처럼 외형에 집착하는 프로그램들의 틀을 과감히 깨고, 오로지 출연자의 내면에만 집중하는 독특한 형식을 갖고 있다. 이 프로그램 속에서는 출연자의 떨리는 손이나, 말실수 같은 것들은 옥의 티가 아니라 진정성을 드러내는 하나의 표현으로 포착된다.

이러한 형식 속에서 설정이란 불가능에 가깝다. 카메라는 세트(특정 공간을 포함하여)에 머무르지 않고 직접 그 출연자의 일상으로 들어가고, 그의 시선과 마음 줄을 따라간다. 자신이 알고 싶은 사람의 마음을 알아보기 위해 출연자는 그 주변을 탐문하듯 좇는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 출연자가 알고싶은 그 마음이 먼 거리에 떨어진 완전한 타인의 그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 프로그램은 가장 가까운 사람의 속내를 알고 싶어한다.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소통의 문제를 다루는 것은 ‘절친노트’도 마찬가지다. 그 기획의도는 ‘인터뷰 게임’의 그것처럼 소원해진 관계의 회복을 목적으로 하고 그 바탕에 진정성을 태도로 깔고 있지만, 이 두 프로그램은 그 형식의 차이로 인해 전혀 다른 프로그램으로 인식된다. 일단 ‘절친노트’는 예능 프로그램이며, ‘인터뷰 게임’은 시사교양 프로그램이다. 전자가 오락에 초점을 맞춘다면, 후자는 교양에 초점을 맞춘다.

그밖에도 차이는 많다. ‘절친노트’는 세련되게 설정된 공간(절친 하우스 같은) 속에서 일반인이 아닌 연예인이 출연하며, 인위적으로 제시되는 미션을 통해 관계의 회복을 꿈꾼다. 절친송의 “우리는 절친입니다”라는 선언은 실제상황이 아니라 “그래야 한다”는 당위와 기대의 표현이다. 초기 이 프로그램은 실제로도 잘 알려진 김구라와 문희준의 껄끄러운 관계를 통해 그 정체성을 확보했다. 그 후에도 이지혜와 서지영, 이성욱과 성대현이 출연해 그 진정성을 이어갔다.

‘절친노트’의 판타지, ‘인터뷰 게임’의 리얼리티
하지만 그 인위적인 구성 때문일까. 절친하지 않은 연예인들이 프로그램의 전제가 되어있는‘절친노트’는 실제 그런 상황의 연예인들을 섭외하는 데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게 된다. 따라서 절친의 의미는 그 무게감을 잃어버리고 조금은 가벼운 의미로 변질된다. 그리고 결국 끼여들게 되는 것은 설정의 유혹이다. 절친 하우스에 모인 출연자들은 초반부에 어떻게든 소원하고 어색한 관계를 보여주기 위해 과도한 설정도 마다하지 않는다.

신지, 솔비의 설정 논란은 이 진정성이 점차 휘발되던 시기에서부터 이미 예고된 일이다. 프로그램의 상업적인 속성이(실로 요즘은 진정성도 상업적으로 포장되는 시대다) 진정성을 압도할 때, 문제는 불거지게 된다. 이 상황이 되면 진정성과 리얼리티는 사라지고 대신 그 자리에 상업성과 판타지가 자리하게 된다. 절친은 상업적인 목적을 위한 하나의 판타지로 제시될 뿐, 그 어떤 진정성도 발견하기 힘든 상황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반면 ‘인터뷰 게임’은 그 어떤 판타지도 발견하기 힘들다. 100% 리얼리티이기 때문에 진정성이 주는 감동은 발견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시청자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억지로 출연자들의 화해를 유도할 수는 없다는 얘기다. 물론 소통의 욕구를 가진 이 프로그램이 그 소통의 욕구를 채워주지 못했을 때, 시청자들은 어떤 안타까운 실망감을 가질 수도 있다.

‘인터뷰 게임’폐지, 진정성보다 상업성을 선택한 방송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프로그램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 속에 있는, 소통을 원하는 마음을 굳게 믿고 있다는 점이다. 소통에 실패해도 또 다른 사람에게 마이크를 넘기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진정성의 힘을 믿는 이 태도는 사실상 프로그램 속에서 소통을 이루거나 실패하는 출연자들의 에피소드보다 더 중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놀라운 것은 이 재미를 포기한 듯한 ‘인터뷰 게임’의 시청률이 교양 프로그램으로서는 꽤 높은 10%대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TV를 보는 시청자들 역시 그 진정성의 태도를 바라보고 싶어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재미와 의미를 모두 담보한 ‘인터뷰 게임’의 폐지는 그만큼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시청자와 제작자가 동시에 꿈꾸며 연결하려 해온, 진정성을 바탕으로 한 소통의 욕구가 상업적인 잣대로 인해 끊어져버린 것이기 때문이다. ‘절친노트’의 진정성 논란과 거의 동시에 불거진 ‘인터뷰 게임’의 폐지논란은, 이제 진정성 마저 상업적으로 포장되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씁쓸한 방송환경을 바라보게 만든다. 방송이 진정성과 리얼리티를 버리면 남는 것은 자극과 판타지뿐이다.

홍보와 진정성 사이, 토크쇼의 딜레마

지금 토크쇼들은 딜레마에 빠져있다. 토크쇼는 MC가 게스트를 초청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기본 포맷. 여기에는 쇼의 입장과 게스트의 입장이 적절히 반영되기 마련이다. 쇼의 입장은 게스트들에게서 재미있는 이야기나 그동안 몰랐던 사실들을 끄집어내는 것이다. 연예인의 사생활은 그 중에서도 가장 시청자들의 구미를 당기게 하는 요소다. 반면 게스트의 입장은 쇼를 통해 자신을 알리는 것이 주목적이다. 영화나 드라마를 시작한다면 토크쇼라는 자리는 자연스러운 홍보의 기회를 제공하는 자리가 된다. 하지만 현재 이 쇼의 입장과 게스트의 입장은 상충된다. 쇼의 입장만 내세우다가는 출연할 게스트를 찾기가 어렵게 되고, 게스트의 입장을 맞추다보면 쇼가 자칫 홍보의 장으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야심만만’, ‘야심만만2’와 무엇이 달랐나
‘야심만만’이 훌륭했던 점은 바로 이런 게스트의 입장과 쇼의 입장을 설문조사라는 공적인 방식으로 적절히 절충했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소재를 게스트의 입장에 맞추는 직설적인 방식을 피하고 설문이라는 우회의 방법을 통하자, 이야기에 대한 공감의 폭이 넓어졌다. 영화나 드라마 속 설정을 보통사람들에게도 벌어질 수 있는 상황으로 일반화시키자 출연진들은 누구나 그 이야기에 동참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영화나 드라마 홍보를 하려는 당사자들, 즉 게스트의 입을 반드시 통할 필요도 없게되었다. 누구나 얘기하고 회자되는 이야기 속에서 홍보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새롭게 시작된 ‘야심만만2’에서 게스트의 이야기를 끌어내기 위해 채택한 방식은 ‘올킬’이라는 시스템이다. 그 누구도 해보지 못한 경험을 출연자가 얘기하고 다른 출연자들이 그 경험이 모두 없으면 ‘올킬’이 되고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노킬’이 되는 식이다. 올킬이 되면 그 경험을 얘기하는 출연자에 대한 주목도가 높아지며, 반면 노킬이 되더라도 그 노킬을 외친 이의 경험이 덧대질 수 있기에 이 시스템은 일견 유용한 것처럼 보인다.

여기에는 다분히 최근 예능 프로그램이 연예기사의 산실이 되고 있는 점을 간파한 제작진들의 노림수가 들어있다. 연예인 ‘누구누구가 어떤 일을 한 적이 있다’는 건 예능 프로그램이 끝난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기사로 뜨는 제목들이다. 강호동이 가끔씩 “이 얘기 내일 인터넷에 쫙 뜨겠다”고 말하는 건 그저 농담이 아니다. ‘올킬’시스템은 그 자체로 예능 프로그램의 연예 기사 양산 시스템을 지원(?)하는 형식을 갖추고 있다.

올킬 시스템이 가진 문제점
하지만 여기에도 문제는 있다. 현재 토크쇼의 추세인 집단 MC체제에 발맞춰 고정 MC들이 많아지면서 매번 새롭게 출연하는 두 명의 게스트에게만 ‘올킬 제안’이 이뤄지는 사이 이들 고정 MC들은 꿔다 논 보릿자루가 될 공산이 커지기 때문이다. 또한 게임이라는 형식에서 게스트에게만 집중되는 ‘올킬 제안’은 그 자체로 게스트 출연의 이유를 홍보 그 자체로 인식되게 만들 수 있다. 그렇다고 게스트를 출연시켜놓고 고정 MC들에게 계속 ‘올킬 제안’을 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야심만만2’의 문제는 매번 토크쇼에서 다루어질 이야깃거리가 공급되는 시스템이 없다는 점이다. ‘야심만만’은 그 의제를 설문을 통해 공급했지만(물론 그것이 홍보의 수단이 되기도 했지만), ‘야심만만2’에서는 게스트가 가져오는 ‘올킬이 될만한’ 경험이 이야기의 전부다. 따라서 전적으로 토크쇼의 이야깃거리가 게스트에 의존하게 되는 상황이 된다. 제작진들 또한 이 부분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오지호의 수학경시대회에서 수상을 한 경험을 이야깃거리로 끌어내기 위해 전진을 앞세우는 것은 그것이 너무 의도적인 느낌을 지우기 위한 방편이다.

진정성과 홍보사이, 토크쇼의 고민
“야심만만2”는 ‘야심만만’의 인기를 이어가기 위해 새로운 포맷으로 ‘예능선수촌’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걸었다. 첫 회에서부터 타방송사의 예능 프로그램들을 거침없이 얘기하고 출연진들 또한 방송3사 예능프로그램에 걸친 이들을 끼워 넣음으로써 그 캐치프레이즈는 기대감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마치 방송3사의 예능 프로그램 대표선수들이 모여서 대결하는 듯한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몇 회가 지난 지금 이런 색채는 벌써부터 사라지는 듯 하다. 대신 고개를 드는 것은 홍보성 이야깃거리들로 채워지는 토크쇼의 고질적인 방향전환이다.

이제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야심만만2’는 아마도 지금 안정되지 않은 다양한 시행착오를 겪는 중일 것이다. ‘예능선수촌’이라는 캐치프레이즈에 걸맞는 좀더 혁신적인 토크 시스템을 구상해볼 필요가 있다. 어차피 방송사의 경계를 허물고 예능이라는 이름으로 경쟁구도를 토크쇼 안에 넣었을 바에야 차라리 여러 예능 프로그램들의 각축장으로 토크쇼를 활용해보는 건 어떨까. 만일 올킬 시스템을 유지하겠다면 게스트에게만 집중되는 의제를 다양화시킬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고민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야심만만2’가 가진 딜레마는 지금 진정성과 홍보 사이에 서있는 모든 토크쇼들이 고민해야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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