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 패러디 소송 논란, 핵심은 진정성

 

<짝>이 <SNL코리아>에 민사소송을 걸었다. 이유는 <SNL코리아>의 짝 재소자 특집이 <짝>의 저작권을 침해했다는 것. SBS는 <SNL코리아> 짝 재소자 특집이 <짝>이 갖고 있는 형식인 ‘-호’, ‘도시락 선택’, ‘데이트권’ 등을 그대로 따라했다고 주장했다.

 

'짝'(사진출처:SBS)

따라한 것은 맞다. 다만 그것이 모방인지 아니면 패러디인지는 구분해야 할 것이다. SBS의 행보에 많은 네티즌들의 반응이 싸늘한 것은 바로 이 점 때문이다. 만일 이것이 하나의 사례로 남는다면 무수한 패러디들은 모두 소송의 대상이 될 것이다.

 

<무한도전>이 했던 짝 패러디도 여기서 예외일 수 없다. 또 그렇게 생각하면 <무한도전>이 시도했던 미션들 중 하나에서 가지가 나와 생겨난 <1박2일>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오리지널리티를 따지고 들어가면 문제는 굉장히 복잡해진다. 작금의 방송 프로그램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완전히 새로운 창조로 만들어진다기보다는(이건 어찌 보면 불가능하다) 있는 것들의 새로운 조합으로 만들어진다고 보는 편이 맞다.

 

이렇게 엄밀하게 바라보면 <짝>이라는 프로그램 역시 그 오리지널리티를 주장하기 애매해진다. 이것 역시 해외의 리얼리티쇼 형식을 가져온 것이고, 그 안에 <사랑의 스튜디오> 같은 짝짓기 프로그램 형식을 덧붙인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무조건 베낀 것은 표절이 맞지만 그 형식을 가져와 거기에 새로운 요소를 덧붙여 창조적으로 해석한다면 그것을 표절로 몰아붙이기 힘들다. 또 패러디라는 것은 애초부터 원본을 전제하는 것이다. 누구나 패러디를 보면 그 원본을 떠올린다. 그 원본과의 비교점에서 패러디의 진가가 나오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SNL 코리아>의 짝 패러디는 말 그대로 흔하디 흔한 패러디 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노골적인 베끼기가 아니라 원본을 가져와 비트는 형식일 뿐이다. 따라서 정규 프로그램도 아니고 일회성의 콩트를 갖고 저작권 침해 운운하는 것에는 어딘지 과도한 느낌이 묻어난다. 왜 이런 민감한 반응을 일으키게 되었을까.

 

사실 이번 소송 논란에서 핵심은 표절이나 모방이라기보다는 ‘진정성 훼손’으로 보인다. <짝>의 패러디가 문제가 된다기보다는 그것이 ‘진정성을 훼손하는’ 악의적인 느낌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그럴 수 있다. <SNL 코리아>에서 다룬 <짝> 패러디 속에는 재소자들을 내세워 성을 희화화한 면이 있다. 게이, 스님, 강간범 등이 등장해 성희롱을 하는 장면들이 패러디 속에는 들어 있다.

 

그렇다면 <짝>은 왜 이렇게 진정성에 목숨을 걸게 되었을까. 이런 모습은 이미 프로그램의 진정성을 훼손했다며 33기 여자3호와 31기 남자7호를 명예훼손과 계약위반으로 고소하면서 드러난 바 있다. <짝>이 진정성에 집착하는 것은 이 프로그램의 존재 근거가 바로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기획의도에서 밝혔듯이 이 프로그램은 ‘현재 짝 없는 남녀가 짝을 찾아가는 실제 만남과정을 통해 한국인의 사랑을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고 ‘가장 소중한 짝에 대한 희생과 배려와 그리고 사랑을 돌아보는 것’이 그 존재이유다. 이 진정성이 흐트러졌을 때 프로그램은 자칫 자극적인 남녀 짝짓기 행태를 포착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따라서 기획의도와 달리 특정 목적을 갖고 홍보를 위해 출연하거나 아예 자신의 과거를 속이는 식의 출연자들이 최근 계속 등장하면서 생겨난 논란들은 <짝>에게는 심각한 위협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사실 <SNL코리아>의 패러디조차 그저 한번 웃고 넘길 문제로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상황은 <짝>이 그만큼 작금의 진정성 논란이 만든 위기상황에 여유조차 갖기 힘들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진정성을 회복하기 위해 소송을 한다는 것이 과연 얼마나 효과가 있을까. 대중들은 이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과연 이것이 <짝>의 진정성 회복을 위한 노력으로 비춰질까. 진정성은 그런 식으로 회복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프로그램이 대중들에게 주는 정서적인 방식으로 해결될 문제이지, 소송 같은 법적인 판단으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프로그램의 진정성은 그 프로그램과 대중들 사이의 교감과 소통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오리지널리티를 내세워 패러디조차 모방으로 치부하는 폐쇄성으로 대중들은 과연 <짝>에서 소통과 진정성을 느낄 수 있을까.

<불후2>, 음악으로 즐길 수 있는 최대치

 

어쩌면 이렇게 소박하고 단출할 수가 있을까. <불후의 명곡2(이하 불후2)> 현철편에서 소냐가 부른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 얘기다. 아마도 이 편곡은 그간 수많은 오디션 프로그램들에서 쏟아져 나온 곡들 중 가장 소박한 곡일 게다. 샘리의 기타가 유일한 반주였고 그 위에 소냐 역시 특별한 기교를 얹지 않은 곡이었으니. 하지만 이 가장 소박하고 단출한 곡은 결국 관객은 물론이고 가수들, 그리고 시청자들까지 감동하게 만들었다.

 

 

'불후의 명곡2'(사진출처:KBS)

그것은 진정성의 힘이었다. 현철이 부르던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이 아내 혹은 연인을 떠올리게 하는 고정관념에 묶여있었다면 소냐는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부르기 전 ‘할머니를 위한 편지’라고 전제함으로써 이 곡에 소냐만의 진심을 담았다. 어머니가 일찍이 암으로 돌아가시고 해외 입양을 기다리던 중 손을 내밀어준 할머니. 그런데 친구들과 다른 외모 때문에놀림을 당해 원망했던 할머니. 그리고 가수의 꿈을 이루게 될 무렵 떠나신 할머니에 대한 사랑과 고마움을 담은 편곡은 이 노래를 소냐의 진심으로 해석하게 만들었다.

 

노래에 담긴 진심이 있으니 다른 것이 뭐가 필요할까. 소냐는 고음을 지르는 창법도 화려한 퍼포먼스도 필요 없었다. 그저 낮게 읊조리듯 가사 하나하나에 마음을 담는 것만으로 관객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대기실의 가수들은 모두 소냐에게 공감했고 에일리는 눈물을 흘렸다. 관객들도 울었고 이 노래의 주인인 현철도 눈물을 흘렸다. 소냐의 무대는 그 어떤 자극도 목청대결도 아닌 진심 하나를 얹은 것이었지만 모두에게 감동을 주었다. 물론 이현과의 대결에서 소냐는 떨어졌지만 그건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소냐가 준 감동은 승패와는 상관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만일 승패에 집착하는 오디션이라면 이런 무대가 가당키나 한 것이었을까. 이것은 <불후2>만이 가진 힘이자 가능성이다. 승패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사라진 무대이기 때문에 소냐는 그 무대를 ‘할머니를 위한 편지’로 만들 수 있었고 그랬기 때문에 음악이 줄 수 있는 또 다른 즐거움을 줄 수 있었다. 이런 부담은 사라지고, 새로운 시도에 대한 열의가 가득한 무대는 <불후2>만의 경쟁력이다.

 

홍경민은 ‘사랑은 나비인가봐’를 갖고 동요 ‘나비야’에서부터 김흥국의 ‘호랑나비’까지 다양한 나비 노래를 마치 메들리처럼 이어 붙여 흥겨운 무대를 연출했고, 울랄라세션은 ‘사랑의 이름표’를 강렬한 갱스터 힙합으로 해석해 전혀 다른 느낌의 무대를 실험적으로 보여주었다. 무엇보다 슈퍼주니어의 려욱은 신동, 은혁과 함께 화려한 퍼포먼스로 전혀 다른 ‘봉선화 연정’을 들려주었다. ‘내 마음 별과 같이’로 원곡이 전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새로운 노래를 만들어낸 인피니트의 성규나, 폭풍성량과 화려한 퍼포먼스로 ‘청춘을 돌려다오’를 부른 이현, 또 특유의 카리스마로 부르는 에일리의 ‘싫다 싫어’는 또 어떻고.

 

이들은 오디션을 경쟁한다기보다는 자기만이 가질 수 있는 무대의 한계치를 실험하는 듯 보였다. 그러다 보니 그 무대 하나하나가 음악이 줄 수 있는 다양한 즐거움들을 보여줄 수 있었다. 속삭이듯 부르지만 그 진심에 울게 되는 소냐의 무대나, 군무의 퍼포먼스가 한없이 즐거워지는 슈퍼주니어의 무대, 또 재치와 자신감으로 새로운 해석의 묘미를 전하는 홍경민의 무대 등등. 그들의 무대는 음악으로 즐길 수 있는 다양성의 최대치를 끄집어낸 것들이었다. 아마도 현철이라는 이름과 그 트로트가 익숙하지 않은 젊은 세대들조차 그 속에 담긴 가사들을 다시 음미하게 되는 무대가 되지 않았을까.

 

재해석이 극대화된 즐거움, 이것은 <불후2>가 <나가수>의 짝퉁에서 청출어람이 된 이유다. <나가수>가 최고라는 음악적인 위치에 도취되어 있을 때, <불후2>는 스스로를 낮추고 음악이 대중들에게 줄 수 있는 최대치의 다양한 즐거움을 주기 위해 노력했다. <나가수>가 보여준 절정의 가창력 앞에 대중들은 고개를 숙였을지 모르지만, <불후2>의 즐거움 위에서 대중들은 함께 즐길 수 있었을 것이다. 오디션이라는 경쟁시스템. 도대체 음악에서 경쟁이나 순위가 뭐가 그리 중요할까. 이제 음악을 제대로 듣게 된 대중들은 경쟁 그 자체보다 음악이 주는 보다 많은 즐거움을 원한다. 청출어람 <불후2>는 그런 점에서 <나가수2>가 보여주는 한계와 문제점에 이제는 그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미스 리플리', 드라마가 거짓이 될 때

'미스리플리'(사진출처:MBC)

드라마는 현실일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거짓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허구의 장치를 가져오더라도 그것이 진실을 전할 때 드라마는 진정성을 갖게 된다. 그렇다면 '미스 리플리'의 진정성은 무엇일까. 어린 시절 불우한 삶을 살았다면 거짓말로 살아도 된다는 것? 제 아무리 거짓말을 했어도 사랑한다면 눈 감아 줄 수 있다는 것? 거짓말한 당사자보다 거짓말 하게 만든 부모의 잘못이 더 크다는 것?

그게 아닐 것이다. '미스 리플리'의 기획의도 속에는 이런 문구가 있다. '그녀에게 사회는 여전히, 거짓말을 권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세상의 정의를 과연 흔들림 없이 믿고 사는 걸까? 정직과 성실만이 세상의 성공과 출세를 보장한다고 의심 없이 외출 수 있는가? 이 드라마는 그 질문에 관한 답변이다.' 구구절절 가슴에 와 닿는 공감 가는 문구다. 한 여자의 거짓말. 하지만 그 거짓말로 인해 삶이 바뀌는 그 모습 자체가 이 사회의 모순을 드러낸다는 얘기다.

그러니 이 드라마의 애초 의도는 거짓말 하는 장미리(이다해)가 아니라 장미리에게 거짓말을 하게 만드는 사회를 드러내는 데 있다. 그런데 우스운 것은 후반부에 드러나는 장미리가 원래 그토록 그녀와 아들(배다른 자식) 유현(박유천)의 결혼을 반대하던 이화(최명길)가 버린 딸이라는 반전이다. 이렇게 되자 이야기의 초점은 장미리와 그녀를 거짓말 하게 하는 사회가 아니라, 그녀를 거짓말 하게 한 '출생의 비밀'로 옮겨간다. 사회적인 문제를 개인사로 환치한 것이다. 이것은 반전이 아니라, 아예 본래 메시지를 파괴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왜 이런 황당한 반전이 생겨난 걸까. 그것은 애초의 인물 구도에서 좀 더 명확하게 캐릭터를 규정하지 못한데서 생긴 일이다. 기획의도가 살려면 장미리는 대중들이 공감할 만큼 좀 더 처절한 거짓말의 동기를 가졌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대본을 통해서도 연기를 통해서도 잘 보이지 않았다. 또 장미리의 주변인물들, 예를 들면 장명훈(김승우)이나 송유현(박유천)이 그렇게 멋있게 폼을 잡아서는 안 된다. 물론 실제 상황이라도 왜 거짓말 하는 여자에 대한 순수한 연정이 없었겠냐마는 드라마는 현실이 아니라 확고히 짜진 메시지를 드러내는 또 다른 세계다.

이 세 명의 중심인물의 구도가 메시지를 정확히 살려내지 못했기 때문에 이야기는 바깥에서 다른 잔재미를 찾아야 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즉 결혼을 반대하는 시어머니, 그런데 알고 보니 시어머니가 친 어머니라는 식의 전형적인 출생의 비밀 코드가 들어가게 된 것이다. 중간에 갑자기 캐릭터가 바뀐 히라야마(김정태) 역시 황당한 반전이다. 장미리를 사랑했다는 식으로 뒷부분에 바뀌었지만, 그렇다면 첫 장면에서 왜 그는 장미리를 강간까지 하려 했던 것일까. 그게 그가 사랑하는 방식인가.

드라마가 본래 의도를 상실하고 거짓으로 치닫게 될 가능성이 높은 것은 그것이 단편이 아니라 몇 주에 걸쳐 계속 이어지는 장편이기 때문이다. 시청률이 떨어지면 그것을 회복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게 되고 그러다보면 본래 의도는 사라지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미스 리플리'처럼 본래 기대를 망가뜨리는 드라마는 비록 시청률은 조금 얻었다 하더라도 비난에서 자유롭기는 어려울 것이다. 낮은 시청률에도 꿋꿋이 본래 하고자 하는 이야기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드라마들도 얼마든지 많지 않은가(그래서 호평 받고 해외에서 성공한 드라마도 많다). '미스 리플리'는 거짓말을 소재로 한 드라마가 거짓말이 되어버린 아이러니를 보여주었다.


모든 예능이 '무한도전'이 된 까닭

'무한도전'(사진출처:MBC)

'나는 가수다'는 음악을 소재로 하지만 음악만큼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도전'이다. 가수들은 자신이 지금껏 해왔던 자신의 음악스타일을 넘어서 새로운 영역에 도전한다. 복불복식으로 회전판을 돌려 걸리는 곡이 자신과 전혀 맞지 않는 댄스곡이거나, 심지어 트로트라고 해도 그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YB가 소녀시대의 '런 데빌 런'을 부르고, 김범수가 남진의 '님과 함께'를 부르며 장혜진이 카라의 '미스터'를 부른다. 이 스타일 차이의 간극이 멀면 멀수록 그 도전의 강도는 강해지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걸 넘어서는 무대로 승화시키면 그 감동도 깊어진다.

가수들은 1주일 내내 주어진 곡을 갖고 여러 스타일로 편곡을 하고 자기 곡으로 소화하기 위해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며 심지어 퍼포먼스까지 곁들인다. 경연의 무대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5분 남짓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엄청난 노력과 땀의 결과인 셈이다. 한 회 분의 프로그램을 찍기 위해 일주일 내내 매달린다고 해서 출연료를 더 주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그들은 도전을 멈추지 않는다. 바로 이 점이 '나는 가수다'가 주는 감동의 또 다른 실체다.

우리는 이 감동을 일찍이 '무한도전'을 통해 경험한 적이 있다. 봅슬레이를 하기 위해 위험도 마다하지 않고 연습에 몰두하고, '댄스 스포츠' 경연을 위해 몸치에도 불구하고 스텝 연습을 멈추지 않으며, '프로레슬링' 경기를 위해 엄청난 심적, 육체적 고통을 감내한다. 현재 도전하고 있는 '조정' 경기는 연습한대로 결과가 나오는 정직한(?) 종목이라는 점에서 멤버들의 더 많은 노력을 요구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방송분량이 노력한 만큼 많이 나오는 것도 아니다. 다만 노력의 강도가 있기 때문에 방송의 밀도가 높아지고, 감동이 커질 뿐이다.

각종 오디션 프로그램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지금껏 당연한 것처럼 여긴 '무한도전'의 숨겨진 땀이다. 누가 더 출연료를 주는 것도 아니고, 그 노력하는 장면이 모두 방영되지는 않기 때문에 누가 그 노력을 알아주는 것도 아니지만 묵묵히 뿌려온 그 땀의 가치. '댄싱 위드 더 스타'에서 김규리의 온통 멍든 다리에서 그 노력의 흔적을 발견하고, '키스 앤 크라이'의 김병만이 무대를 끝내고 서 있을 수조차 없어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뭉클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오디션 같은 리얼 예능 프로그램이 대세가 되면서 진정성은 예능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 되었다. 그저 그럴듯하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진짜를 보여주는 것. 이것이 아니라면 이제 대중들은 더 이상 눈길을 주지 않는다. 이미 진짜 꽃을 본 대중들이 조화를 보며 감흥을 느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지금의 예능에서 노력에 흘린 땀만큼 진정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건 없다.

그래서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져 나오는 오디션 프로그램들의 홍수 속에서 모든 예능들이 마치 '무한도전'의 또 다른 버전으로 보이는 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누군가는 하와이로 날아가 단 한 명이 남는 서바이벌 게임을 벌이고, 누군가는 지금껏 한 번도 타보지 않았던 피겨 스케이트를 타며 수백 번 동작을 반복함으로써 TV에서나 봐왔던 놀라운 기술을 선보인다. 또 몸치에 박치인 누군가는 피나는 연습으로 그것을 극복하며 춤을 추고, 또 누군가는 자신이 지금껏 한계로 여겨온 노래와 무대를 뛰어넘는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바야흐로 '무한도전' 예능의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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