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샤를 합시다3’에서 먹방을 빼면 멜로밖에 없다는 건

먹어도 너무 먹는다. 물론 애초부터 <식샤를 합시다>는 먹방을 소재로 했던 드라마였다. 그러니 음식이 등장하고, 그걸 먹는 장면이 나오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그 분량이 상상 이상이다. 7회에 등장한 청춘시절 구대영(윤두준)이 이지우(백진희)와 떡볶이집에서 만나 한바탕 떡볶이 먹방을 하는 장면은 무려 8분 가까이 이어졌다. 

이지우는 구대영에게 떡볶이와 튀김은 물론이고 다 먹은 뒤 밥을 볶아 먹고는 후식으로 팥빙수를 먹는 것까지 그 노하우들을 설명했다. 떡볶이에는 계란 후라이를 넣어 노른자를 풀어 먹으면 기름이 잘 섞여 더 고소하고, 튀김은 떡볶이 국물이 아닌 마요네즈에 찍어 먹어야 눅눅하지 않고 더 맛있다고 했다. 밥을 볶은 데는 단무지를 잘게 잘라 넣어 아삭한 식감과 새콤한 맛을 더하고, 매운 음식을 먹었으니 후식으로 시원한 팥빙수를 먹어줘야 제 맛이라는 것. 

그 장면만 놓고 보면 이게 드라마인지 아니면 먹방 프로그램인지가 헷갈린다. 음식 먹는 노하우를 아주 자세히 구체적으로 설파하면서 간간히 구대영과 이지우 사이에 오가는 썸을 슬쩍 슬쩍 드러내는 것. <식샤를 합시다>가 어떤 정체성을 가진 드라마인가를 이 장면은 잘 보여준다. 드라마도 드라마지만 일단 먹방이 갖는 감각적인 요소들을 통해 시청자들의 욕망을 끄는 드라마가 바로 <식샤를 합시다>다. 

그래서 먹방을 빼놓고 보면 도대체 이 드라마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것인지가 애매해진다. 물론 본래 의도는 살다보니 ‘입맛을 잃어버린’ 이지우 같은 삶에 지친 이들에게 음식을 통해 청춘시절의 설렘을 찾아 되살려보겠다는 것. 그래서 입맛도 살리고 살맛도 나게 하겠다는 게 이 드라마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아니었던가. 하지만 먹방이 점점 전면에 내세워지고 본격화되고는 있지만 새롭게 느껴지지는 않는 멜로 구도 속에서 그 애초 의도는 점점 흐릿해져간다. 

보험왕으로서 영업을 하던 구대영은 바로 그런 직업적인 요소가 얽혀 그가 보여주는 음식을 먹는 장면에도 묘한 페이소스 같은 걸 만들었다. 하지만 시즌3에서 보험회사를 그만두고 선우선(안우연)의 회사에 스카웃되어 본격적으로 자신의 먹는 노하우를 설파하기 시작한 구대영에게서는 그런 직업적인 배경의 그림자가 잘 보이지 않는다. 다만 교통사고로 갑자기 죽어버린 옛 여자친구와 새로 관계를 맺어가는 이지우와의 엇나가고 만나는 멜로적 상황들이 놓여 있을 뿐이다. 

그래서 7회 한 편의 이야기를 먹방을 빼고 보면, 여자친구가 있는 줄 알고 구대영을 피했던 이지우가 그 여자친구가 사고로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 정도가 전부다. 청춘 시절에 회고담으로서 시험기간에 벌어졌던 일들이 다뤄졌지만 시트콤적인 해프닝 그 이상은 아니었다. 

물론 모든 드라마가 진지할 필요는 없지만, <식샤를 합시다3>가 아쉽게 느껴지는 건 그 좋은 소재, 이를테면 ‘음식을 통한 삶의 위로 혹은 회복’ 같은 이야기를 너무 평이하게 풀어내고 있다는 점이다. 오해로 빚어진 남녀관계의 소원함이 실제사실을 알고 풀어지는 그런 단순한 멜로 그 이상을 담기는 어려운 것일까. 너무 길어진 먹방만큼 단순한 해프닝과 입맛을 자극하는 장면들 그 이상의 ‘삶의 허기’를 담아낼 수는 없는 걸까.(사진:tvN)

‘미스터 션샤인’, 눈물 났던 당대 의병들의 숭고한 선택들

“작금의 조선에 조선의 것이 없다.” 구동매(유연석)에게 붙잡힌 이름 모를 아무개, 의병은 칼날이 자신의 목줄기에 닿아 있는 와중에도 의연함을 잃지 않는다. 구동매는 그 의연함이 궁금하다. 자신을 돈이 되는 일에 목숨을 걸지만, 이들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거는 걸까. 그래서 묻는다. 그 이유를. 

그러자 이 아무개가 조선의 사정들을 줄줄이 읊어 놓는다. 열강들이 수탈해간 조선의 모든 것들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하는 것”이란다. “이런 나라라도 빼앗기지 않으려고.” 다른 이를 발고하면 살려주겠다는 제안을 해놓은 구동매는 적이 당황한다. 그 아무개는 “내게 단 한 명의 이름도 듣지 못할 것”이라며 스스로 칼날을 목으로 당긴다. 가까스로 자결하는 걸 막은 구동매가 “미쳤냐”고 묻자, 아무개가 말한다. “들키면 튀고 잡히면 죽는다.” 그리고 백 번을 잡아도 자신의 동지들 누구든 그렇게 할 거라고 일갈한다. 칼자루는 구동매가 쥐었지만 그는 아무개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처참하게 베인다. 자신의 삶이 새삼 보잘 것 없어지는 그런 느낌.

tvN 주말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이 짧은 장면은 구동매에게 앞으로 일어날 심경의 변화를 예고하는 것이지만, 그 안에는 그렇게 아무개로 남을 그들의 숭고한 선택에 대한 뭉클함이 들어 있다. 그것은 아마도 이 작품이 진정 하려는 이야기일 게다. 그 중에는 지체 높은 애기씨도 있지만 이름 모를 촌부들도 있고, 노비에 백정 출신도 있으며 무엇 때문에 이런 위험한 일에 뛰어들었는지 알 수 없는 아낙네도 있다. 

주인공들은 그 많은 아무개로 남은 의병들을 대변하는 인물들로 서 있다. 머슴이었지만 부모가 처참하게 살해당하고 미국으로 넘어갔다 미국인의 신분으로 돌아온 조선인, 백정의 아들로 일본에서 칼잡이가 되어 돌아온 일본인 조선인, 그리고 악덕 지주양반의 아들로 태어나 방탕한 삶으로 자신을 저주하듯 살아가는 룸펜 조선인, 아버지의 손에 의해 일본인에게 팔려가듯 결혼해 남편이 죽자 돌아와 호텔사업을 하는 일본인 조선인 여인, 미군들과의 전투에서 죽은 아버지에 대한 아픈 기억을 안고 포수로 위장해 의병활동을 하고 있는 조선인 등등. 

그 중 유진 초이(이병헌)와 구동매 그리고 김희성(변요한)은 서로 다른 국적을 갖고 있지만 묘한 관계로 얽힌다. 어느 주점에서 한 자리에 앉아 술을 마시는 그들에게 주인이 ‘동무’냐고 묻자 그들은 모두 아니라고 답한다. 하지만 김희성이 자신들을 “미국인인 조선인, 일본인인 조선인, 잘생긴 조선인”이라고 농담처럼 표현한 것처럼, 그들은 조선인이라는 하나로 묶여져 있다. 그리고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걸 자꾸만 일깨우는 한 인물이 존재한다. 바로 고애신(김태리)이다. 고애신이 선택한 쓸쓸하지만 숭고한 그 선택 앞에 세 남자는 “같은 길을 함께 걸어갈까” 고민 중이다. 

유진이 애신에게 “꽃으로만 살아도 될 텐데. 내 기억 속 사대부 연인들은 다들 그리 살던데”라고 묻자 애신이 하는 말이 가슴을 서늘하게 만든다. “나도 그렇소. 나도 꽃으로 살고 있소. 다만 나는 불꽃이오. 거사에 나갈 때마다 생각하오. 죽음의 무게에 대해. 그래서 정확히 쏘고 빨리 튀지.... 양복을 입고 얼굴을 가리면 우린 얼굴도 이름도 없이 오직 의병이오. 그래서 우리는 서로가 꼭 필요하오. 할아버님껜 잔인하나 그렇게 환하게 뜨거웠다가 지려 하오. 불꽃으로. 죽는 것은 두려우나 난 그리 선택했소.”

개화기 혼돈의 시대이기는 하나 그 나라를 위해 초개같은 자신의 삶을 던졌던 청춘들 역시 어찌 사랑이 없었을까. 애신의 유진을 바라보는 사랑이 가득한 눈빛과 그러면서도 의병의 삶을 향해 불꽃처럼 달려갈 거라는 그 말의 교차는 그래서 더더욱 가슴을 저리게 만든다. 거기에서는 의연함과 쓸쓸함이 묻어난다. 

그리고 그런 이들의 선택은 그래서 나비효과를 만들어내며 주변 사람들을 움직인다. 어느 아무개 의병의 말 몇 마디에 구동매가 칼날보다 더 아픈 상처를 입었듯이, 애신의 불꽃 같은 몇 마디 담담한 이야기는 유진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참 못됐습니다. 저는 저 여인의 뜨거움과 잔인함 사이 어디쯤 있는 걸까요. 다 왔다고 생각했는데 더 가야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불꽃 속으로. 한 걸음 더. 요새 전 아주 크게 망한 것 같습니다.’ 유진의 이 읊조림은 그가 이 여인의 삶 깊숙이 들어가게 될 것임을 암시한다. 

그것은 애신이 말했듯 출신도 성차도 뛰어넘는 숭고한 대의다. ‘얼굴을 가리면’ 그들에게는 조선이 그토록 신분과 계급으로 짓눌렀던 억압을 뛰어넘어 ‘다 같은 아무개’가 된다. 추운 겨울 꽁꽁 언 얼음길을 애신과 유진이 함께 걸으며 유진이 자신을 노비신분이라 털어놓는 장면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살 얼음길 같은 그 ‘함께 가는 길’에 유진은 그 신분차이가 큰 장벽이라 여기지만 과연 애신도 그럴까. 죽음을 향해 기꺼이 달려가는 불꽃같은 삶에 그건 아무런 장벽이 되지 못하지 않을까. <미스터 션샤인>은 이름 없이 등장했다 사라져간 의병들이 어떻게 그 어려운 선택을 하게 되고 어떻게 불꽃처럼 살다 스러져 갔는지를 애신과 유진 같은 인물들을 통해 아프게도 그려내고 있다.(사진:tvN)

‘꽃할배’ 막내 김용건, 스스로 청춘임을 증명하는 할배

박근형이 손주들을 위해 사놓은 선물 보따리를 숙소 앞 노상카페에 두고 온 걸 뒤늦게 알아차리자, 갑자기 입술에 립밤을 바르고는 김용건이 나선다. 자신이 가져오겠다는 것. 박근형은 자신이 가겠다고 옷을 챙겨 입으려 했지만, 김용건은 자신이 가겠다며 슬쩍 ‘문 여는 연습’을 핑계로 댄다. 백일섭이 화장실이 급하다며 숙소로 올라왔지만 자신이 문을 따는 게 영 익숙지 않아 문 앞에서 그를 힘겹게 했던 게 마음에 걸렸다는 거다. 물론 진짜 그런 마음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박근형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려고 댄 그럴듯한 핑계였다. 

제작진들이 둘러앉아 시원한 음료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카페에 간 김용건은 거기서 또 ‘농담 본능’이 터지기 시작한다. 그 선물 보따리 때문에 박근형이 옷을 주섬주섬 입으셨다며 “그러니 뭐 나이 어린 내가 내려와야지”하고 말한다. 나영석 PD는 “선생님도 칠순이 넘으셨는데”라며 막내가 된 김용건의 상황에 웃음을 터트린다. 그러자 김용건의 하는 말이 기막히다. “글쎄 말이야. 그런데 오랜만에 하니까 또 괜찮네-” 그 말에 제작진들은 웃음을 터트리고 김용건은 기분 좋은 듯 ‘농담 주머니’를 열기 시작한다.

김용건은 백일섭이 화장실이 급한데 문이 안 열려 당황했던 이야기를 하며 “그래도 노력을 해서 잘 열었어”라고 말하고, 나영석 PD는 그 “노력을 해서”라는 말이 우스운 지 그 말을 되새기며 웃는다. 그리고 자리를 떠나면서도 “이것도 내가 계산할게...”라고 툭 농담을 건넨다. 나영석 PD는 그 농담을 받아 “700억”이라고 말하고 분위기는 다시 화기애애해진다.

이번 tvN 예능 <꽃보다 할배>에서 김용건은 ‘신의 한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이번 여행의 활력소이자 윤활유가 되고 있다. 어르신들에게 걷는 일이 많은 여행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김용건이 하는 ‘막내 짓’이 어르신들을 웃게 만들고, 그래서 여행에 활력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젊은 제작진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나이 차이를 무색케 하는 김용건의 무차별적인 농담 공격 속에 제작진들마저 빠져들고 있으니.

아침을 먹으러 가서 별 생각이 없다며 내려오지 않은 백일섭이 “커피 한 잔 하고 싶다”고 했던 그 말을 떠올린 김용건은 대뜸 아메리카노를 시켜 방까지 배달(?)을 해준다. 씻고 침대에 앉아 있던 백일섭은 갑자기 들어와 커피를 건네는 김용건을 보며 기분이 좋아져 파안대소를 터트린다. 김용건은 거기에 생색을 더해 분위기를 다시 띄워놓는다. “따끈따끈해. 막 뛰어왔어.” 그 모습은 영락없이 형에게 칭찬받고픈 막내의 모습이다.

다른 여행지로 이동하는 날 아침 한 자리에 모인 할배들 속에서 김용건은 백일섭의 말대로 “놀라운 기억력”으로 그 옛날이야기들을 풀어놓는다. 자신들을 다 잊고 있었던 일들이 김용건의 이야기로 새록새록 피어나면서 할배들은 순간 나이를 잊는다. 그 때 그 시절로 금세라도 돌아간 듯 서로 그 때의 이야기들을 꺼내놓는다. 신구는 “난 웃느라고 정신이 없어”라며 “듣고만 있어도 즐겁다”고 말한다. 백일섭이 “응답하라 199× 같다”는 말이 실감난다. 하지만 김용건은 오히려 “그 때 그랬어요,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행복하냐”고 말했다.

나이 73세에 심부름을 도맡아 하고 끝없이 허허로운 농담을 던지고 분위기 메이커를 자처하는 막내가 된다는 건 쉬운 일은 아닐 게다. 하지만 형들과 함께 하고 있어 그게 그렇게 행복할 수 없다는 김용건. 또 제작진과 이야기할 때면 항상 존칭을 쓰는 그에게서 느끼는 건 ‘청춘’이다. 이준익 감독은 영화 <변산>의 제작발표회에서 “청춘은 젊음을 일컫는 게 아닌,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행위”라고 말한 바 있다. 73세 막내로서 행복하다 말하는 김용건은 스스로가 청춘임을 끊임없이 증명하고 있다. 그가 사랑받는 진짜 이유다.(사진:tvN)

'버닝'이 담아낸, 청춘과 부조리 그리고 예술

(본문 중에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저는 뭐를 써야 될 지 모르겠어요. 세상은 수수께끼 같거든요.” 문득 벤(스티븐 연)이 무슨 소설을 쓰고 있냐고 묻자 종수(유아인)는 그렇게 답한다. 그는 알 수 없는 혼돈과 분노에 사로잡혀 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청춘들이 느끼는 혼돈과 분노에 맞닿아 있다. 혼란스럽고 화가 나지만 도대체 왜 그런지는 잘 보이지 않는 안개 자욱한 길을 헤매고 있는 듯한 그런 느낌. 이창동 감독의 영화 <버닝>은 이 청춘들이 느끼는 복잡한 감정들과 그 감정을 만들어내는 부조리한 세상, 그리고 그 안에서 예술은 얼마나 가녀리면서도 또한 희망을 주는 것인가를 담았다.

<버닝>의 첫 장면은 트럭으로 보이는 차 뒤에서 조금씩 피어나오는 담배연기로 시작한다. 누군가 그 뒤에 존재하기는 하지만 보이지 않는 존재. 다만 한숨처럼 피어나는 담배연기가 그 존재를 증명하는 듯한 종수가 그 주인공이다. 그는 트럭에서 짐을 꺼내들고 인파 속으로 걸어들어 간다. 시장통으로 보이는 그 곳에서 그는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런데 그 곳에서 그를 알아보는 이가 있다. 바로 한 가게 앞에서 춤을 추며 호객을 하고 있는 나레이터 모델 해미(전종서)다. 어린 시절 종수와 파주의 같은 동네에서 살았던 해미. 그들은 그렇게 만나 그날 밤 함께 술을 마신다.

술자리에서 해미는 이야기를 하며 손으로 귤을 까먹는 듯한 마임 동작을 해보인다. 그냥 재미로 배우고 있다는 마임. 해미는 마임을 잘 하려면, 귤이 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귤이 없음을 잊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건 해미라는 존재와 그가 살아가는 삶을 압축해서 설명한다. 그는 가진 게 몸뚱어리 하나밖에 없고, 카드빚에 쫓겨 집으로 돌아가지도 못하는 존재다. 하지만 그는 아프리카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 그 곳에서 ‘리틀 헝거’와 ‘그레이트 헝거’를 춤추는 원주민을 만나겠다는 것. ‘리틀 헝거’가 배고픈 자들이라면, ‘그레이트 헝거’는 삶의 의미에 대한 허기를 느끼는 자들이란다. 그는 ‘리틀 헝거’지만 ‘그레이트 헝거’를 추구한다.

아프리카로 떠나 집이 빈 동안 해미는 종수에게 보일러실에 버려져 ‘보일이’라고 부르며 그 집에서 키우고 있다는 고양이에게 밥을 챙겨달라고 부탁한다. 상처가 깊이 방에 있다고는 하지만 모습을 보이지 않는 보일이. 그리고 북향이라 하루에 단 한 번 남산타워에 반사되어 빛이 들어오는 그 방은 모두 해미를 또 종수를 닮았다. 존재가 있지만 존재가 보이지 않고, 마치 청춘이기에 없는 희망을 꿈꾸긴 하지만 그것의 실체를 손에 쥐지는 못하는 그들이다.

해미가 없는 사이 그 집에서 어디 있는 지도 모르는 보일이에게 밥을 주는 종수의 헛되어 보이지만 희망을 꿈꾸는 그 손짓은 그래서 처연하다. 아무도 없는 그 집에서 저 편에 거대하게 압도하듯 발기한 채 서 있는 남산타워를 바라보며 자위를 하는 종수의 모습은 허망하다. 해미나 보일이처럼 그도 방 같은 세상에 누군가 던져주는 밥 한 끼가 없어 배고픈 이들이지만, 청춘이라는 아직도 한참을 더 살아야 하는 나이에 삶의 의미에 대한 헛된 허기를 느낀다. 그 간극은 너무나 커서 아직 세상의 이 비정함과 부조리함을 온통 이해하지 못한 이들을 알 수 없는 분노의 불길로 들끓게 만든다. 언제 폭발할지 알 수 없는 불꽃이 그 속에서 타들어간다.

아프리카에서 돌아온 해미가 거기서 만난 벤(스티븐 연)을 알게 되면서 종수는 점점 더 세상이 수수께끼 같다고 여긴다. 나이 차이는 얼마 나지도 않고 번듯한 직장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지만 포르쉐를 끌고 다니며 럭셔리한 집에서 비슷한 동류의 친구들을 불러 파티를 하고 클럽에서 춤을 추는 그들의 삶은, 북한의 대남선전방송이 들려오는 파주에서 소똥을 치우며 법정에서 선고를 기다리는 아버지와 집나가 소식이 없다가 어느 날 갑자기 전화를 걸어와 자신의 빚 이야기를 하는 어머니를 마주하는 종수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다가온다. “우리나라에는 개츠비가 너무 많다”는 말은 그래서 이 청춘이 마주하고 있는 단단한 세상의 벽을 실감하게 만든다.

그 파주에 있는 종수의 집을 어느 날 해미와 함께 찾아온 벤은 그 포르쉐가 주차되어 있는 냄새나는 집 마당에서 와인을 마시며 지는 해를 바라보는 언발란스한 풍경을 보여준다. 문득 대마초를 꺼내 함께 피운 벤은 자신의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취미’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것은 엄염한 범법행위가 아니냐고 종수는 말하지만, 벤은 그건 마치 비가 내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지 어떤 선악의 의미가 들어있는 행위는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곳에 온 것도 비닐하우스 하나를 태우기 위한 사전답사라고 말한다.

해미는 문득 그 파주에 있었던 자신의 집과 그 집 근처에 있던 우물에 대해 이야기한다. 지금은 사라져버렸지만 그 우물에 자신이 빠졌었고, 종수가 자신을 발견해 구해줬었다는 것. 종수는 그런 일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런 일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갖는다. 마치 지금 해미가 벤을 만나 처한 사정이 바로 그 우물에 빠진 상황과 같다고 느끼며 그를 자신이 구해냈으면 하는 욕망을 갖게 된다.

벤이 그렇게 말하고 떠난 후, 종수는 비닐하우스에 그리고 사라진 우물에 집착한다. 버려진 비닐하우스 하나가 불타버려도 경찰이나 그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는다는 그 말은 마치 종수 자신의 ‘있지만 없는 존재’의 이야기처럼 다가온다. 그리고 사라진 우물의 존재가 원래 없던 것이 아니라, 본래는 있었던 것이라는 걸 발견하는 일이 그 ‘있지만 없는 존재’인 자신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일이 되어버린다.

그 날 벤과 함께 온 해미가 술에 취해 대마초에 취해 마당에서 지는 노을을 보며 상의를 벗고 저편 날아가는 철새들처럼 춤을 췄을 때, 그것은 도취된 해미에게는 하나의 마임 같은 ‘행위예술’로 느껴졌을 것이다. 하지만 문득 음악이 사라지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 울음소리에 깨어난 해미는 그 갑작스런 현실에 당혹스러워하고 슬퍼한다. ‘없는 것을 잊으며’ 자신은 삶의 의미에 허기를 느끼는 사람이라 치부하며 살아온 그에게 갑자기 현실이 닥쳐온다. 사실은 그저 배가 고픈 청춘일 뿐이라는 것. 그런 그에게 종수는 아픈 말을 한다. 그렇게 옷을 마구 벗는 건 “창녀”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그 아픈 현실을 꺼내 놓은 후 종수 앞에서 해미는 마치 있지만 없는 보일이처럼 사라져버린다. 그것이 벤에 의한 것이라 의심하는 종수는 그를 미행하며 해미를 애타게 찾는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해미는 나타나지 않고, 대신 해미 같은 또 다른 배고픈 청춘이 벤의 옆에 나타나 해미가 걸어갔던 그 길을 걷고 있다는 걸 종수는 목격하게 된다.

가진 자들은 있는 것을 마치 제물처럼 즐기며 살아가고, 못 가진 자들은 없는 것을 잊으며 마치 있는 것처럼 살아가려 몸부림친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 알 수 없는 분노를 어찌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버닝>은 날카롭게도 우리네 청춘들이 처하고 있는 ‘없지만 있는 것처럼’ 치부하며 버텨내는 그 안간힘을 포착해낸다. 유아인이 당혹스러운 그 얼굴로 표현해내는 청춘의 초상이 못내 아프게 다가온다.

충격적인 엔딩은 그것이 실제로 벌어진 일인지, 아니면 이 종수라는 인물이 또한 ‘없지만 있는 것처럼’ 그려낸 상상 혹은 소설의 일부분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그 엔딩이 담고 있는 예술의 허망함 혹은 그나마 존재하는 희망의 양면은 역시 이창동 감독다운 예술에 대한 깊이있는 시각을 드러낸다. 예술은 ‘없지만 있는 것처럼’ 하는 행위이고, 그래서 허망해보이지만 때론 그것이 세상을 인식하게 해주고 그래서 변화하게 해줄 수도 있는 희망일 수 있다는 것이다. <버닝>이라는 영화가 그러하듯이.(사진:영화 '버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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