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패션왕>에 빠지는 이유

 

그럼에도 불구하고 <패션왕>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다. 이 불안한 청춘들의 끝없는 방황이 못내 이해되기 때문이다. 이가영(신세경)을 사랑하면서도 끝내 그녀를 밀어내고 최안나(유리)의 접근을 허용하는 강영걸(유아인)을 이해할 수 없다가도, 그 성공에 대한 뜨거운 욕망과 사랑하면서도 버려질 것을 두려워하는 강영걸의 트라우마는 이 모든 걸 이해하기 해준다.

 

 

'패션왕'(사진출처:SBS)

"무서웠어. 누가 날 사랑한다는 게 무서웠어. 너한테 상처주고 너한테 상처받을까봐." 뉴욕출장에서 만나 뜨거운 키스로 마음을 확인한 이가영이 왜 자신을 돌아오지 말라고 했냐고 묻자 강영걸은 그렇게 답한다. 어린 시절 바람난 엄마가 자신을 버리고 떠나고 여동생도 죽게 된 것에 대한 트라우마를 가진 그는 마음을 열지 못하고 사랑을 하지 못한다. 엄마처럼 자기를 버릴까봐, 여동생처럼 자기를 떠날까봐.

 

이것은 가난이 만들어낸 왜곡이다. 불우한 어린 시절의 경험은 사랑마저 늘 불안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그를 만들었다. 그래서 그는 이미 성공한 디자이너이고 심지어 가영의 마음을 확인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불안해한다. 정재혁(이제훈)의 회사에서 이가영이 디자인 팀장이 되고 개인 사무실에 차까지 선물 받게 되자 강영걸은 그녀가 '저들의 세계'로 편입될 것 같은 불안감에 휩싸인다.

 

이가영 역시 강영걸을 사랑하지만 당장 눈앞의 작은 배려와 대접에 마음이 흔들린다. 그녀는 부유함에 대한 이중적인 감정을 갖고 있다. 갑자기 부모님이 교통사고로 모두 돌아가시자 모든 것을 가로챈 조사장(장미희) 밑에서 굴욕적인 삶을 살아온 그녀는, 그 돈이 만들어내는 권력적인 상황에 진저리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 욕망에 흔들린다. 그래서 그녀는 강영걸이 뭐든 해주고 싶다며 집과 차를 사주겠다고 하자 "갑자기 딴 사람이 된 것 같아요"하며 불안해한다. 하지만 정작 정재혁의 회사에서 디자인팀장으로 승진하고 개인 사무실과 자동차까지 선물 받자 기쁨을 감추지 못한다.

 

한편 정재혁은 겉으로는 모든 것을 다 가진 것 같은 황태자지만 사실은 아무 것도 갖지 못하고 사랑을 갈구하는 어린아이 같은 인물이다. 그가 이가영에게 빠져드는 것도 바로 자신과 똑같은 결핍을 그녀에게서 발견하기 때문이다. 아무 것도 없이 조사장 밑에서 굴욕적인 삶을 살아가는 이가영은, 모든 게 부모의 뜻에 의해 휘둘리며 살아가는 정재혁에게는 또 다른 자신인 셈이다.

 

이런 동병상련의 감정은 사랑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병적이다. 정재혁은 그래서 때론 어린아이로 퇴행된 듯한 모습을 보이곤 한다. 이런 동병상련의 병적인 감정을 보이는 또 한 명의 인물이 최안나(유리)다. 그녀가 강영걸을 찾는 이유는 그가 자신과 같은 성공에 대한 욕망과 좌절을 가진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런 욕망을 가진 최안나를 강영걸은 역시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친구로 받아들이지만, 최안나는 이것을 사랑으로 착각한다.

 

그녀의 성공에 대한 욕망은 성공 그 자체를 사랑과 동일시하게 만든다. 그녀의 애초 목표가 자신의 성공이 아니라 '정재혁과의 결혼'이었다는 사실이 그것을 말해준다. 정재혁에게 한 번 버려지고 나서 다시 돌아온 이유를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버려졌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기 때문"이라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실패하기가 두려운 것이다. 그녀의 성공에 대한 욕망은 사랑마저 왜곡되게 만들었다.

 

<패션왕>의 반복되어 엇갈리는 남녀를 멜로의 관점으로만 바라보면 그 복잡함에 진저리가 쳐지게 된다. 심지어 이 끝없이 변하는 관계의 변주곡은 세속적인 '어장관리'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다. 이 복잡한 <패션왕>의 멜로의 늪에 빠져들면 좀체 헤어 나오기가 힘든 것은 말이다. 이것은 <패션왕>이 그리는 세계가 단순한 멜로가 아니라 그 멜로를 통해 그 바탕에 깔려있는 이 불안한 청춘들의 욕망과 트라우마이기 때문이다.

 

왜 그들은 편안하게 누군가를 사랑하지 못하는가. <패션왕>은 관계 속에서 끝없이 불안하게 흔들리는 인물들의 감정을 통해 그 사랑을 방해하는 그 무엇을 거꾸로 드러내는 드라마다. 그것은 사회가 만들어낸 계급적인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기도 하고, 기성사회가 청춘들에게 강요하는 압력 때문이기도 하며, 어쩌면 비뚤어진 기성세대의 욕망이 만들어낸 왜곡된 세상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프레임 안에 끝없이 얽혀있는 멜로만을 보여주는 듯한 <패션왕>은 어쩌면 거꾸로 프레임 바깥의 무수한 사회적인 문제들을 드러내주는 드라마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네 명의 청춘 남녀들이 겪고 있는 이 사랑과 욕망의 변주곡이 그저 감정게임에 머물지 않고 빠져나올 수 없는 늪처럼 눈을 사로잡는 이유는 그 비뚤어지고 엇나간 이들의 사랑이 이상하게도 이해되기 때문일 게다. 그리고 이러한 이해는 당연하게도 이들의 사랑을 둘러싸고 있는 현실적이고 사회적인 문제들을 우리가 공감한다는 얘기다. <패션왕>은 이처럼 멜로만을 가지고 멜로 바깥의 사회적 프레임을 가져온다는 점에서 독특한 성취를 하고 있는 작품으로 생각된다.

<은교>, 사멸해가는 존재에 대한 연민

 

"할아버지. 뾰족한 연필이 슬퍼요?" 열일곱 살 소녀 은교(김고은)가 칠순이 다된 국민시인 이적요(박해일)에게 묻는다. 이적요는 어린 시절 학교 갈 때 필통에서 달각거리던 연필 이야기를 통해 연필이라도 각자의 기억에 따라 '이승과 저승만큼의 거리'를 가진 이미지로 다가올 수 있다는 걸 말해준다. 은교가 "그게 시인가요?"하고 되묻는 것처럼 시란 그저 하늘에 반짝이는 별이라도 저마다의 의미로 새로워질 수 있는 가능성과 다름 아닌 것이다.

 

 

사진출처: 영화 <은교>

<은교>에 대한 홍보 마케팅 포인트가 이 영화가 가진 진면목과 이승과 저승만큼의 거리를 갖는다는 건 그래서 아이러니다. 마치 19금 영화로 치부되고, 나이든 할아버지가 어린 여고생을 탐하는 변태적이고 성적인 영화인 것처럼 오인되는 시선이 관객들을 영화로 끌어들이려는 하나의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는 것. 실제로 이 영화는 개봉 이전부터 성기나 음모 노출 같은 노출 수위에 대한 이야기들이 주로 많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똑같은 벗은 몸이라도 그것을 성적인 노출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과, 하나의 나이 들어가는 육체로 바라보는 시선은 하늘과 땅 차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멸해가는 몸에 대한 서글픈 인간의 조건을 다룬 <은교>에서 노출은 어쩌면 당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적요의 벗은 몸은 그 쓸쓸함을 담아내고, 은교의 벗은 몸은 청춘의 생기를 담아내며, 서지우(김무열)의 벗은 몸은 외로움과 욕망을 담아낸다.

 

산장처럼 깊숙한 숲속에 놓여진 이적요의 집은 이적요 자신처럼 고적하고 쓸쓸하기 이를 데 없다. 그 속에 쌓여진 책들 속에 앉아있는 이적요의 모습은 마치 책들의 무덤에 둘러싸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결국 책이란 유적처럼 남는 것이 아닌가. 그 이적요 자신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은 그 집에 어느 날 느닷없이 은교가 들어온다. 은교는 그 낡은 마룻바닥을 청소하고 서재 곳곳에 놓여진 찻잔들을 치우고, 먼지가 낀 유리창을 깨끗이 닦는다.

 

사실 은교의 노출이나 섹스보다 더 가슴을 살랑이게 하는 것은 바로 이 낡은 이적요의 공간에 풋풋한 은교가 들어온다는 그 사실일 것이다. 이적요는 차츰 낡아져가는 자신으로 인해 잊고 있었던 '청춘'의 설렘을 되찾는다. 그리고 그가 할 수 있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은교에 대한 사랑을 표현한다.

 

이적요의 옆에 젊은 베스트셀러 작가인 서지우가 있다는 것은 이 사랑의 아이러니를 잘 대비시켜준다. 젊은 서지우와 은교가 서로의 몸을 탐하는 것은 '외로워서'이다. 젊은 그들은 육체의 욕망에 눈 멀어 사랑을 보지 못하고, 나이든 노구의 시인은 사랑을 느끼나 이미 늙어버렸다. 훗날 은교가 벽을 향해 등 돌리고 누워 있는 이적요에게 쏟아내는 그 눈물이 그토록 가슴 아프게 다가오는 건 그 등 돌림 하나가 거대한 시간의 장벽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은교>는 벗은 몸의 에로티시즘보다 그 생기발랄한 몸이 주는 생명력과 사멸해가는 몸의 비통함이 더 느껴지는 영화다. 극 중에 서지우가 이적요에게 "이건 사랑이 아니라 추문"이라고 얘기했을 때, 이적요가 분노하는 건 마치 이 영화에 대한 오독을 경계하는 말처럼 들린다. 스캔들이 아니라 하나의 사랑이 분명한 <은교>는 그래서 야하다기보다는 슬프다.

스펙사회에서 생존하려는 청춘들의 몸부림

 

‘패션왕’의 강영걸(유아인)은 우리가 흔히 드라마에서 보던 그런 주인공과는 다른 지점에 서 있다. 주인공이라고 하면 주로 선의 입장에 서 있게 마련이고, 겉으로는 까칠하게 굴어도 여성을 보호해주는 인물이며, 심지어 복수를 할 때조차 누군가의 뒤통수를 친다거나 하는 비열한 짓은 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주인공으로서의 정당성(적과는 다른)이 흐려지기 때문이다.

 

 

'패션왕'(사진출처:SBS)

하지만 강영걸은 자신에게 모든 걸 의탁하고 지지하는 가영(신세경)을 사장이라는 명분으로 이용하기도 하고 때론 지나친 명령을 내리기도 한다. 또 재혁(이제훈)에게 복수하기 위해 겉으로는 협력하는 척 가영을 그의 회사에 파견근무 보내고 거기서 안나(유리) 대신 디자인을 하게 시키지만, 결국 가영이 한 디자인을 자신이 상표등록 하는 방식으로 재혁의 뒤통수를 친다. 그는 결코 우리가 흔히 봐왔던 드라마의 주인공과는 다르다. 그래서 한때 강영걸은 민폐 캐릭터로 불리기까지 했다. 도대체 왜 강영걸은 이렇게 물불 안 가리는 캐릭터가 되었을까.

 

여기에 대한 해답은 강영걸과 정반대에 서있는 인물들에게서 찾아진다. 재혁의 아버지인 정만호(김일우)는 자식에게조차 실적이 우선인 인물이다. 그는 자식이 사업에 실패해도 ‘자기 돈’ 아까운 것만 생각하는 사람이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인간이 뭔지 알아? 능력도 없으면서 열심히 하는 인간들이야.” 이렇게 말하는 그는 노력이나 과정이 아니라 결과만으로 판단하는 인물이다. 모든 것이 결과로 드러나는 이른바 ‘스펙사회’의 전형.

 

흥미로운 건 ‘스펙사회’가 만들어내는 공포는 또 다른 사회적인 문제를 야기한다는 점이다. 재혁은 그런 아버지 정만호를 거의 공포의 대상으로 여기는데, 또 다시 실패하지 않기 위해 가영의 디자인을 안나가 한 것처럼 돈으로 사려고 한다. 누군가의 아이디어를 돈으로 가로채는 이런 방식은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문제들을 환기시킨다. 과정이 없고 결과만을 보는 스펙사회가 만들어낸 일그러진 자화상이다. 정만호와는 달리 재혁이 그나마 괴로워하는 건과정을 만들어내고 있는 가영이란 청춘이 눈에 밟히기 때문이다. 그는 스펙사회의 공포에 질려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청춘의 순수함을 갖고 있다.

 

앞뒤가 꽉 막혀버린 이 ‘스펙사회’의 틀을 놓고 바라보면 강영걸의 과도해 보이는 행동들이 이해된다. 도대체 공정하고 정의로운 공자님 같은 방식으로 이 스펙사회와 대적할 수가 있을까. 그래서 강영걸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걸 동원한다. 비열해져야 한다면 비열해지는 것이다. 그것이 결국 이 싸움에서 이기는 길이고, 그래야 가영 같은 자신만을 바라보는 주변 인물들도 챙길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이란 걸 그는 알고 있다.

 

재혁과 안나가 이 스펙사회의 기득권자로서 과정 없이 결과에만 집착하는 한계를 드러낸다면, 거꾸로 영걸과 가영은 애초부터 출구가 막혀 결과를 내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낸다. 재혁과 안나는 과정을 찾아야 하고, 영걸과 가영은 결과를 만들어내야 한다. 이 한계를 넘으려면 재혁과 안나는 과정 자체를 즐겨야 하는 반면, 영걸과 가영은 스펙사회에서 몸에 새겨져 버린 패배주의를 넘어서 자신들만의 자존감을 되찾아야 한다. 이미 능력이 입증되었지만 여전히 ‘짝퉁 인생’을 살아가는 그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

 

강영걸이 그토록 비열하게까지 그려지고, 재혁과 안나의 무표정한 얼굴이 그토록 안쓰럽게 여겨지며, 가영의 언제든 건드리면 터질 것 같은 눈물이 가슴 한 구석을 먹먹하게 만드는 건 이 모든 풍경들이 우리네 스펙사회 청춘들의 자화상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본래 ‘장치나 프로그램을 만들 때 필요한 성능’ 따위를 지칭하던 ‘스펙’이란 말이 공공연히 인간에게 사용되고 있는 이 사회. ‘스펙사회’는 그래서 그 자체로 이 사회가 얼마나 인간을 사물화하고 대상화하고 있는가를 드러내준다. ‘패션왕’을 보다보면 이 끔찍한 스펙사회에서 질식당하고 있는 이 땅의 청춘들의 처절한 몸부림을 실감하게 된다.

 '패션왕', 가슴 먹먹한 청춘들의 자화상

'패션왕'은 우리네 출구 없는 청춘들의 자화상 같은 드라마다. 비는 마치 그들의 처지처럼 추적추적 내리고 가영(신세경)과 영걸(유아인)은 우산도 없이 길바닥에 내쳐진다. 얼굴에 훈장처럼 상처를 달고 그들은 지금 맨바닥에서 몸부림치는 중이다. 살아남기 위해. 모욕감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버린 조마담(장미희)의 부띠끄에 의탁한 가영을 찾아온 영걸이 그녀에게 손을 내민다. 버스 안. 주머니에 있는 단돈 몇 천원. 속절없이 흐르는 눈물. 그 막막함. 아마도 지금의 청춘들이라면 이들이 흘리는 그 눈물에 가슴 한 켠이 먹먹해졌을 것이다.

 

'패션왕'(사진출처:SBS)

'패션왕'의 가영과 영걸이 태생으로부터 성장의 사다리가 끊겨 있는 인물이라고 해서 이 드라마를 단순히 계급적 차이에 의한 빈부의 대립이나, 그 빈부를 뛰어넘는 신데렐라 스토리로 오해할 필요는 없다. 전혀 다른 계급에 속해보이는 재혁(이제훈)과 안나(유리) 역시 출구가 보이지 않는 건 마찬가지니까. 겉보기엔 무엇 하나 부러울 것 없는 재혁이지만 그는 바로 그 태생의 덫에 걸려 있는 청춘이다. 그는 부모라는 이유로 재혁의 삶에까지 관여하는 정만호(김일우)와 윤향숙(이혜숙)의 그늘에서 숨 막혀 한다.

재혁은 엄마인 윤향숙을 CEO처럼 생각한다. "CEO 전에 네 엄마야."하고 말하는 윤향숙에게 재혁은 "엄마면 이래도 되는 거야?"하고 되묻는다. 그들은 편의에 의해 때론 부모 자식임을 내세우지만 재혁이 사업에 실패하자 가차 없이 뺨을 날리고는 "내 돈 함부로 굴리지 말라"는 엄포를 놓는 그런 CEO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인물들이다. 과장된 면이 있지만 돈과 물질 만능은 때론 자식마저 하나의 물건처럼 보게 만들기도 하나 보다. 그런 부모일수록 출신성분에 집착하는 법. 마치 물건 고르듯 출신성분을 따지는 그들에게 안나가 눈에 들어올 리가 없다.

일찍이 부모가 이혼하고 할머니 밑에서 자란 안나는 어떻게든 노력해 그 기득권자들의 세계로 들어가려 하지만 그것은 출신성분이라는 꼬리표에 의해, 또 부족한 실력에 의해 좌절된다. 마치 내세울 거라곤 그것밖에 없다는 듯 끊임없이 마이클이라는 명품 브랜드 디자이너가 자신의 디자인을 인정했다는 것을 자랑하는 영걸에게 안나는 "좋겠다. 마이클이 인정해줘서..."라고 자조 섞인 푸념을 내뱉는다.

'패션왕'이 태생적으로 갈라진 두 개의 삶, 즉 영걸과 가영의 가난한 청춘과 재혁과 안나의 부유한 환경의 대립으로 보이지 않는 것은 이 두 삶 모두 그다지 행복해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참을 보다 보면 재혁의 그 까칠함 이면에 놓여진 우수와 힘겨움이 보이고, 안나의 꼿꼿함 이면에 숨겨진 안간힘이 보인다. 이 네 명의 청춘은 지금 모두 현실에 질식 당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들을 숨 막히게 하는 것은 뭘까. 그것은 기성세대로 대변되는 부조리들이다. 실력이 아닌 태생으로 결정되는 삶, 돈이면 뭐든 다 된다는 식의 물질 만능주의, 가진 자가 못 가진 자를 당연하다는 듯 밟고 서는 사회 시스템, 심지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그 관계의 굴레 혹은 폭력... 이것이 진짜 '패션왕'이 대결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태생과 빈부가 다른 네 명의 청춘들이 각자 위치는 달라도 마치 한 배를 탄 듯한 느낌을 주는 건 그 때문이다.

영걸이 은행에서 자금 대출을 하려 하자 대뜸 "담보 없어요?"하고 물으며 난색을 표하는 은행 직원. 그러자 영걸이 "중소기업 지원자금도 7천억이 풀렸다고 하는데 어디로 간 거예요?"하고 묻자 돌아오는 "고객님은 해당사항 없습니다" 라는 절망적인 답변. "그럼 저 같은 사람은 고리사채나 쓰라는 겁니까?"라고 외치는 영걸의 항변이 예사롭지가 않다. 또 정반대로 "엄마면 이래도 되는 거야?"하고 묻는 재혁의 목소리도 남달리 들린다. '패션왕'이 특별한 지점은 이 서로 다른 계급적 위치에 서 있는 청춘들이, 바로 그 청춘이라는 지점 하나로 기묘한 연대의식을 가질 때다. 재혁이 가영에게 우산을 씌워주는 장면이나, 영걸이 술 취한 안나의 신발을 벗겨주는 장면이, 가영과 영걸의 그 깊은 절망감을 보여주는 버스에서의 장면만큼 깊은 감흥을 주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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