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카고’, 시청률 아쉬웠어도 더할 나위 없는 수작인 이유

tvN 금토드라마 <시카고 타자기>가 종영했다. 물론 시청률은 만족스러울만한 수치가 아니다. <시카고 타자기>는 한때 1%대 시청률까지 떨어지기도 했지만 평균적으로 2% 시청률대에 머물렀다. 하지만 이 작품을 단순히 시청률만으로 평가하기는 어렵다. 작품의 완성도를 두고 볼 때 <시카고 타자기>는 최근 방영된 어떤 작품보다 높은 수준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시카고 타자기(사진출처:tvN)'

타자기에 깃든 유령 유진오(고경표), 그리고 그 유령이 작가 한세주(유아인)와 함께 써나가는 소설, ‘시카고 타자기’. 그리고 그들 사이에 과거와 현재 그리고 동지와 사랑으로서 운명처럼 들어와 있는 전설(임수정). 일제강점기라는 전생의 이야기가 2017년 현생의 이야기와 교차되며 어떻게 역사와 기억이 조응하는가를 ‘소설’이라는 틀로 보여준 진수완 작가의 놀라운 상상력. 게다가 더할 나위 없는 연기로 이 상상의 작품에 생명력을 부여한 유아인, 임수정, 고경표라는 배우들의 아우라까지. <시카고 타자기>는 한 마디로 더할 나위 없는 수작이었다. 

<시카고 타자기>는 한 베스트셀러 작가의 소설 집필기로 시작하지만 그 이야기의 끝을 보면 놀랍게도 일제강점기에 조국 해방을 위해 싸우다 장렬하게 산화한 청춘들에 보내는 헌사를 담고 있다. 그 소설이 사실은 전생에 독립투사들이었던 자신들의 기억을 재구성하는 과정이었던 것. 당시 조국을 위해 싸우다 비극적인 끝을 맞이했던 그들은 통일된 조국의 후생을 기약했고, 그렇게 환생한 이들이 잊혀져 가는 당시 청춘들을 기억해나간다는 설정은 지금 현재 우리의 역사를 되돌아보게 만들었다. 

<시카고 타자기>는 그래서 일제강점기라는 역사를 현재의 관점으로 다시 들여다보는 역사적 시각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그들의 아프고 찬란했던 사랑 이야기까지 담았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판타지 설정의 이야기들은 많았지만, 이처럼 재미적 요소만큼 의미 또한 남달랐던 작품도 드물 것이다. 

무엇보다 <시카고 타자기>의 완성도가 높다고 여겨진 건, 이 판타지가 그저 재미를 위한 인위적 설정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나아가 문학적 상징으로까지 이해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사실 이 작품은 그 안에 전생을 기억해나가고, 유령과 대화하고 교감하는 판타지를 담고 있지만, 그것은 ‘소설’을 쓰는 작가의 상상력을 상징화하는 것처럼 읽힐 수도 있었다. 즉 이 작품 전체가 한세주라는 작가가 일제강점기의 청춘들을 상상하며 받은 영감으로 쓴 소설이라고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카고 타자기’라는 소설을 끝내고 그 소설 속에 유진오를 영원히 봉인시킨다는 이야기는 그래서 흥미롭다. 소설가들이 자신의 작품 속 인물을 마치 실제 인물처럼 몰입하는 일은 흔한 일이다. 그리고 그런 영감을 주는 인물이 작품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은 소설가 같은 창작자들에게는 마치 신비 체험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일이기도 하다. 

작품은 전생과 현생을 넘나들었던 것처럼, 새드엔딩과 해피엔딩을 동시에 묶어냈다. 즉 전생의 삶들은 결국 모두 죽음을 맞이하는 비극이었지만, 그 비극은 현생의 삶으로 이어지며 궁극적인 해피엔딩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카고 타자기>의 종영은 그 느낌이 독특하다. 새드엔딩과 해피엔딩이 겹쳐져 어딘지 쓸쓸하면서도 위로를 받는 듯한 행복감 또한 그 안에 담겨진다.

되돌아보면 현생과 전생을 넘나드는 청춘 멜로에 소설과 현실을 뛰어넘고, 판타지와 실제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들어내면서 하나의 굵직한 주제의식을 잃지 않고 끝까지 밀어붙인 <시카고 타자기>라는 드라마의 탄생은 실로 놀라운 성취가 아닐 수 없다. 또한 전생과 현생의 인물들을 넘나들며 사실상 1인2역을 해낸 연기자들의 공적 역시 박수 받을 만하다. 시청률은 아쉬웠지만 그것만으로 평가받는 건 더욱 아쉬운 작품이 바로 <시카고 타자기>였다.

정의 없는 세상, ‘파수꾼’의 판타지가 만들어지는 지점

“니들이 못 잡고 안 잡으니까 내가 대신 잡았잖아!” MBC <파수꾼>이라는 드라마가 하려는 이야기는 아마도 이 조수지(이시영)가 던지는 한 마디 속에 압축되어 있을 것이다. 검찰이 있고 검사가 있지만 그들은 범인을 잡으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검장의 아들이 조수지의 아이를 살해한 혐의를 받자 검찰은 그 아들을 무혐의로 만드는 것으로 지검장에 줄을 서려 한다. 결국 아이가 희생되자 조수지는 법 정의가 이 사회에서 무력하다는 걸 실감하고 스스로 총을 든다. 하지만 그 결과는 그녀가 살인미수로 현상수배범이 되어 쫓기며 살아가는 것이었고, 그 지검장은 검찰총장이 되어 그녀를 더더욱 궁지로 몰아넣는다. 

'파수꾼(사진출처:MBC)'

법이 정의의 편이 아니라 가진 자들의 편이라는 걸 담은 드라마들은 꽤 많았다. 대부분의 법정을 다루는 드라마들이 이런 테마들을 담고 있다. 최근 방영되고 있는 SBS <수상한 파트너>에서도 가진 것 없는 여주인공이 엉뚱하게 살해 용의자가 되었다가 남주인공에 의해 가까스로 풀려나지만 그 후로 이 남녀의 미래는 가시밭길이 되어버린다. 법 정의가 진실을 찾으려 하기보다는 가진 자들을 비호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면서 생겨난 현실들이다. 

<파수꾼>은 그래서 아예 법 바깥에서 스스로 정의를 구현하려는 가상조직을 판타지로 그려낸다. 조수지를 끌어들인 이 조직은 장도한(김영광)을 수장으로 서보미(김슬기)와 공경수(키)가 함께 모여 비뚤어진 법 정의를 바로잡는 일을 음지에서 한다. CCTV를 통한 감시와 해킹을 통한 정보 수집 등을 서보미와 공경수가 한다면, 조수지는 몸으로 부딪쳐 임무를 수행하는 행동대원이다. 

그래서 <파수꾼>의 관전 포인트는 시작부터 보여졌던 이시영의 액션이 그 첫 번째다. 오토바이로 자동차를 추격하며 아슬아슬한 액션을 선보이는 이시영의 걸 크러시는 그래서 이 드라마에서 가장 많이 화제가 되는 포인트가 되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이 드라마가 가진 겉모습일 뿐이다. <파수꾼>이 가진 실제의 힘은 여기 등장하는 인물들의 숨겨진 분노와 울분 속에 들어 있다. 

이시영이 연기하는 조수지라는 인물은 딸을 잃는 그 과정을 통해 그 울분을 드러내지만, 시작부터 어딘지 출세에 눈먼 속물 검사처럼 연기를 하고 있는 장도한은 더 큰 분노를 숨긴 채 와신상담하는 중이다. 그는 정의를 향해 직진하려 애쓰는 김은중(김태훈) 검사에게 말한다. “너처럼 하면 절대 저들을 못 잡아.” 정면 승부로는 승산이 없다는 걸 알고 있는 장도한은 그래서 검찰 조직 속으로 들어온 언더커버나 마찬가지다. 보통 조폭들 속으로 들어간 형사들의 언더커버가 그려지는 것과 달리, 검찰 조직을 상대로 들어온 검사의 언더커버가 의미하는 건 이 법 정의를 구현해야할 집단에 대한 불신을 담고 있다. 

그래서 <파수꾼>은 법 집행을 하는 검찰과 싸우는 은밀한 조직의 이야기가 된다. 누군가의 사적인 정보들을 캐내고 그것을 통해 협박을 하기도 하는 이 파수꾼들은 그래서 법 바깥에 존재한다. 그것은 거꾸로 말하면 범죄행위가 포함된 사투지만 더 큰 악과 싸우다는 점에서 용인된다. 

어찌 보면 단순한 대결구도다. 하지만 이 단순함이 의외로 힘이 세지는 건 지금의 대중들이 느끼는 법에 대한 정서가 이 불씨를 불길로 만들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무수히 쏟아지는 법비들과 싸워나가는 법정드라마들은 돈 없으면 무고해도 죄인이 되어버리는 현실을 담고 있다. 이들의 액션이 그저 통쾌하기보다는 어딘지 짠하게 다가오는 건 이렇게 해서라도 잠깐이나마 속이라도 풀어보겠다는 정서가 그 안에서 느껴지기 때문이다.

‘윤식당’, 자동차가 없는 그 곳에서 살고 싶다

만일 자동차가 없는 곳에서 산다면 어떨까요? 당장 불편할 것 같지만 사람들 사이의 관계나 함께 살아가는 삶은 자동차가 있는 세상과는 완전히 다르지 않을까요? 현실성 없는 이야기라고요? tvN 예능 프로그램 <윤식당>이 보여주는 발리의 작은 섬이 그런 곳입니다. 자동차는 없고 대신 마차를 이용하고 사람들은 다 똑같이 자전거를 타거나 걸어 다니죠. 

'윤식당(사진출처:tvN)'

우리나라에서 종종 갑질 고객 이야기가 나오는 뉴스나 드라마의 공간이 주차장입니다. 한 백화점에서 주차요원을 무릎 꿇리는 장면이 대표적이죠. 그 장면의 배경처럼 보이지만 갑질 고객의 뒤편에 서 있는 고가의 자동차는 사실은 그 상황의 주역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자동차에는 ‘내가 이런 정도의 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이야’, 하는 과시와 그러니 ‘이런 서비스는 당연히 받아야 돼’ 라는 비뚤어진 의식이 담기기도 합니다. 어쩌다 우리나라에서 자동차는 그 사람의 위세를 알리는 상징처럼 되어버렸죠.

하지만 <윤식당>이 있는 그 곳에는 그런 자동차가 없습니다. 물론 여행지로서 환경을 지키기 위해 자동차를 없앤 것이지만, 이렇게 하자 그 곳의 풍경 또한 완전히 달라집니다. 다 같은 눈높이에서 자전거를 타고 지나는 사람들은 서로에게 눈빛을 보냅니다. 혹여나 정유미 같은 외지인이 자전거를 타고 가다 스카프를 떨어뜨리면, 소년이 그걸 주워서 자전거를 타고 쫓아와 무심한 듯 건네주고 갑니다. 

가진 것이 위계가 되지 않는 그 곳에는 일하는 사람이나 손님이나 늘 밝은 얼굴입니다. 만나는 것 자체가 굉장한 스트레스가 되기 십상인 우리네 풍경과는 너무나 다르죠. 식당을 찾는 손님도 또 식당에서 일하는 이들도 서로에 대한 존중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식사 전에 먼저 패들 보드를 빌려 타고 싶다는 손님에게 선선히 보드를 빌려주고, 손님은 약속을 잊지 않고 늦은 점심을 먹으러 찾아옵니다. 

자동차가 없다는 사실은 또 다른 걸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그 곳의 삶 자체가 돈 벌기에 대한 욕망 그 자체보다 삶을 즐기는 쪽에 맞춰져 있다는 것이죠. 자동차가 의미하는 속도나 능률, 효율 같은 것들은 대부분 ‘돈 벌이’와 무관하지 않은 것들입니다. 물론 그 곳에도 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윤식당은 일과 놀이의 접점에 있는 곳처럼 보입니다. 눈앞에는 언제든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바다가 펼쳐져 있고 그 곳에는 바다거북이가 찾아와 헤엄을 치곤 하죠. 로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처럼 일터가 놀이의 공간과는 완전히 분리된 채, 일종의 전쟁터처럼 되어 있는 곳하고는 완전히 다르죠.

모든 일이 그렇듯이, 돈을 벌려고 하는 일들은 스트레스를 주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윤식당은 돈을 벌려고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손님들 한 명 한 명을 말 그대로 소중한 손님으로 대하고 그들이 내놓은 음식을 맛있게 먹어주면 그게 또 행복합니다. 손님이 많이 몰려와 일이 많으면 버겁지만 그래도 웃음이 나오고, 또 손님이 전혀 없어 일을 놓고 있을 때도 허전하긴 하지만 그래도 손님을 기다립니다. 큰 돈을 벌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행복하게 살만큼의 돈을 벌 것 같습니다. 그건 일을 한다기보다는 마치 식당 소꿉놀이를 하는 느낌이죠.

<윤식당>이 이토록 우리에게 판타지를 주는 건 그 곳이 일하는 사람들이나 노는 사람들이나 모두가 즐겁고 행복하기 때문이죠. 일이 많아도 걱정, 적어도 걱정이지만 그 행복감을 바탕으로 하면 일이 많아도 행복, 적어도 행복일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자동차라는 위계의 상징이 없는 그 곳은 위계에서 시작해 위계로 끝나는 우리네 삶의 공간과는 너무나 다르게 다가옵니다. 우리에게 이런 놀이터 같은 일터는 요원한 꿈일까요?

‘터널’, 최진혁이 30년을 뛰어넘은 진짜 이유

시간의 터널 저 편으로 간 사람들은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걸까요. OCN 드라마 <터널>은 아마도 이런 질문에서부터 시작했을 겁니다. 터널을 통과해 30년의 세월을 뛰어넘은 박광호(최진혁)는 왜 하필 30년 후 김선재(윤현민)와 신재이(이유영) 앞에 나타난 걸까요. 김선재가 과거 박광호가 추적하던 연쇄살인범에 의해 살해된 피해자의 아들이고, 신재이가 다름 아닌 박광호 자신의 딸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현재, <터널>이 30년을 뛰어넘는 판타지가 어디서 비롯됐는가를 우리는 이제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게 됐습니다. 

'터널(사진출처:OCN)'

생각해보십시오. 어느 날 집을 나선 가족 중 한 사람이 살해를 당하거나 혹은 실종되어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그 먼 길을 떠나버렸다면, 남은 피해자의 가족들이 느낄 상실감을. <터널>은 그렇게 집을 떠난 이들의 이야기고, 떠나간 그들이 있던 자리에 덩그러니 남겨져 결코 그들을 잊지 못하는 가족들의 이야기입니다. 김선재는 살해된 어머니 때문에 미친 듯이 연쇄살인범을 추적하는 형사가 되었고, 신재이는 범인을 추적하다 실종된 아버지와 그 아버지를 기다리고 그리워하는 삶을 살다가 결국 사고로 숨진 어머니로 인해 섬뜩할 만큼 냉철한 범죄 심리학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30년의 세월을 뛰어넘은 박광호는 그들의 정체를 알게 되면서 자신이 왜 그렇게 시간의 터널을 통과했는지에 대한 소명의식 같은 걸 갖게 되죠. 연쇄 방화범에 의해 홀라당 타버린 건물에서 가스가 새며 폭발할 위기에 처하자 몸을 날려 김선재를 구한 박광호는 말합니다. “우리가 범인 못 잡았어도 저 새끼까지 다치게 하면 너무 면목이 없잖냐.” 박광호에게는 과거 자신이 연쇄살인범을 끝내 잡지 못해 피살된 피해자에 대한 죄책감이 남아있었던 거죠. 

게다가 신재이는 시간의 터널 저편으로 넘어가 결국 돌아오지 못한 아버지 때문에 마음 깊숙이 자리한 상처를 그 무심한 얼굴로 가리고 있습니다. <터널>의 이야기는 그래서 3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서라도, 하다못해 시간을 뛰어넘는 터널이라는 판타지를 통해서라도 가족에게 돌아가려는 실종자의 간절한 마음이면서, 동시에 그렇게라도 돌아오길 바라는 가족의 마음이 담겨져 있죠. 

<터널>은 연쇄살인범이 등장하는 스릴러 형사물이면서도 동시에 우리 시대의 피해자들을 위한 위로와 치유를 담은 휴먼드라마적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사건들은 끔찍하지만 그 사건을 추적하는 형사들이나 범죄 심리학자, 법의학자는 단순히 살인범을 잡는 데만 혈안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에게 느끼는 연민과 생명에 대한 안타까움 같은 따뜻함을 드러내죠. 

어찌 보면 늘 범죄 현장에서 사체들을 봐야 하는 형사나 범죄 심리학자 같은 이들이 왜 그토록 험한 일에 소명을 다하고 있는가 하는 그 이유 역시 <터널>에서는 남다른 동병상련의 ‘공감’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걸 보여줍니다. 오빠의 죽음을 목격하고 입을 꼭 다물어버린 아이에게 신재이는 다름 아닌 자신 역시 겪었던 그 상처를 드러냄으로서 입을 열게 하죠. 군대에서 구타로 죽은 아들 때문에 아내까지 잃게 되자 결국 그 살인자를 감정에 못 이겨 살해한 한 아버지에 대해, 김선재는 자신이 겪었던 어머니의 죽음과 그래서 갖게 된 범인에 대한 살의 같은 동질감을 느낍니다.

<터널>이 우리를 집중하게 하는 건 단지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끔찍한 살인사건의 현장들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것보다 ‘시간의 터널’ 저편으로 간 사람과 남은 사람 사이에 놓여진 커다란 상실감과, 그래서 가질 수밖에 없는 그들이 돌아와 다시 만나게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 그런 것들이 우리를 이 심상찮은 드라마에 빠져들게 합니다. 3년 전 4월 16일, 그 날 이후 돌아오지 못하는 아이들이 지금도 돌아오길 바라는 그 마음들처럼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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