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아인, ‘시카고 타자기’라는 현실과 판타지의 미로를 읽는 법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판타지인가. 또 무엇이 소설이고 무엇이 현실인가. tvN 금토드라마 <시카고 타자기>는 그 모호한 경계 사이에 놓여 있다. 슬럼프에 빠진 베스트셀러 작가 한세주(유아인), 어느 날 시카고에서 보게 된 미스터리한 느낌을 주는 타자기, 그 타자기를 배달하며 그와 가까워진 전설(임수정) 그리고 슬럼프에 빠진 그에게 전속출판사 대표 갈지석(조우진)이 은근히 제시한 유령작가 유진오(고경표). 이들의 이야기는 현실과 판타지 사이에 걸쳐 있어 모호한 느낌을 준다. 

'시카고 타자기(사진출처:tvN)'

슬럼프에 글이 써지지 않는 한세주가 마감 스트레스에 차를 몰고 나왔다가 사고를 당하고, 그를 마침 전설이 구해주는 이야기는 현실적인 느낌이 별로 없다. 그런 큰 사고를 당하고도 살아있는 게 놀라운 데 마침 그 시각에 하필이면 아버지 기일에 맞춰 별장을 찾은 전설이 그를 발견해 구해내는 것도 지나친 우연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그러고 보면 한세주의 첫 번째 팬이었던 전설이 그 미스터리한 타자기를 다름 아닌 한세주에게 직접 배달하게 되는 상황도 우연이다. 문을 열어주지 않는 한세주의 집 앞에서 커다란 개를 만나고 그 개로 인해 그의 집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전설의 이야기 역시 개연성이 아닌 우연적인 사건이다. 

드라마는 이런 우연적 사건들을 계속해서 터트리면서 코미디를 통해 그 우연을 봉합하려 한다. 즉 전설이 한세주의 집으로 들어가게 되는 시퀀스는 개가 소설파일이 있는 USB를 먹는 상황이 만드는 왁자지껄하고 과장된 코미디로 처리되어 있다. 또 자동차 사고를 당한 한세주를 전설이 구해내는 장면 역시 영화 <미저리>의 패러디를 덧씌워 우스운 장면들로 연출된다. 

이런 우연적 사건들의 반복은 그 비현실성 때문에 그것이 실제로 벌어진 현실인지 아니면 한세주의 판타지거나 상상 혹은 환상인지를 의심하게 만든다. 즉 한세주와 전설 사이에 계속 벌어지는 우연은 마치 오래 전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엮어진 운명처럼도 이해될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슬럼프에 빠져 정상적인 상태가 아닌 작가 한세주의 환상이나 판타지처럼도 보인다. 

유령작가 유진오의 등장 또한 마찬가지다. 사고를 당해 마감을 할 수 없었던 한세주 대신 유진오가 ‘시카고 타자기’의 첫 회 소설을 내보내지만 한세주는 그것이 자신이 쓴 것이고 자신은 잠시 단기기억상실을 겪은 것이라 합리화한다. 물론 갈지석이 유령작가 이야기를 운운한 건 맞지만 그것이 실제 유진오를 지칭하는 것인지도 모호하다. 결국 한세주는 자신이 집을 비운 사이 그 의문의 타자기로 소설을 쓰고 있는 유진오를 마주하게 된다. 그런데 그것 역시 실제인지 아니면 한세주의 환상인지가 애매하다. 

그것은 한세주가 문득 문득 보게 되는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전설과 유진오가 엮어가는 어떤 사건들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진짜 한세주와 전설 그리고 유진오가 과거부터 엮어진 어떤 운명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한세주의 환상이며 그가 지금 쓰고 있는 ‘시카고 타자기’의 소설 내용일 수도 있다. 

이런 현실과 환상 사이의 애매함은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안개처럼 시청자들의 시야를 가린다. 시청자들은 그 안개 속에서 호기심을 느끼며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상인가를 궁금해 하지만, 동시에 그 낯선 이야기의 미로 속에서 머리가 복잡해질 수도 있다. 이것은 <시카고 타자기>가 가진 신선함이면서 동시에 대중성의 한계로 지목된다. 

사실 이 안개 같은 흐릿한 미로의 끝이 어디로 갈지 전혀 종을 잡기가 어려운 드라마가 바로 <시카고 타자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애매모호한 걸음을 앞으로 나가게 하는 건 다름 아닌 한세주라는 인물과 그를 연기하는 유아인이라는 배우의 몰입 덕분이다. 사실 논리적으로 접근해 해석해보려 하면 이 드라마는 한없이 복잡한 미로를 들이밀지만, 한세주라는 캐릭터가 가진 심리적인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면 그리 어렵지 않게 이 길을 걸어 나갈 수 있다. 

그가 갖고 있는 자존심과 막막함 그리고 창작에서 오는 극심한 스트레스와 그럼에도 창작자이기에 어디서든 튀어나오는 뮤즈 같은 창작의 단초들. 그런 의식의 흐름들은 현실과 환상 사이에 걸쳐져 있지만 그래도 한세주라는 인물에게는 모든 것이 당장 눈앞에 닥친 현실일 수 있으니.

‘자체발광’ 고아성, 호모인턴스 현실의 자화상

스펙이 이게 뭐냐는 노골적인 면접관 앞에서 그녀는 말문이 막힌다. 성적은 좋지만 면접관은 ‘성적만’ 좋다고 폄하한다. 즉 성적은 기본이라는 것이고 그 위에 갖가지 스펙이 더해져야 비로소 면접 볼 자격이 있다는 식이다. 매일 같이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느라 또 다른 스펙을 쌓는다는 건 언감생심이고 그나마 그 와중에도 좋은 성적을 유지했다는 걸 봐주는 면접관은 없다. MBC 수목드라마 <자체발광 오피스>의 은호원(고아성)은 그렇게 무려 100번째 면접을 보고 떨어졌다. 

'자체발광 오피스(사진출처:MBC)'

그런데 101번째 면접에서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하필이면 이전 면접에서 그녀의 스펙을 노골적으로 비하한 면접관 서우진(하석진)이 옮긴 회사에서 또다시 그와 면접을 보게 된 그녀는 사실상 포기상태로 할 말을 하고는 면접장을 빠져나온다. 그대로면 결코 합격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이 회사의 2세이자 의사인 서현(김동욱)이 그녀를 계약직 인턴으로 뽑아준다. 병원에서 시한부 판정 이야기를 듣고는 탈출한 그들에게 왠지 모를 정을 느꼈다는 것. 

이런 일은 사실 현실에서는 일어나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취업전선에서 거의 죽고 싶을 정도의 절망감을 느끼는 은호원이라는 인물이 주는 공감대는 이러한 비현실적 판타지마저 지지하게 만든다. 인턴으로 들어와 갖가지 잡무로 하루를 뛰어다니고 그러면서도 계약직이라며 정규직과 비교되고 비하되는 상황. 게다가 회사에서는 하청업체를 불러다 버젓이 접대를 하게 만들고 성희롱에 가까운 술자리에서조차 버텨내야 그나마 인턴직이라도 유지되는 상황. 

그래서 비장하게 사직서를 쓰지만 왜 자신이 잘못한 것도 없는데 사직서를 써야 하는가에 대한 부당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인턴. 은호원은 그간의 일들을 하나하나 메일에 담아 상사에게 보내지만 전체 메일로 잘못 보내 온 회사가 발칵 뒤집힌다. 부장이 접대를 받았다는 사실까지도 적혀 있었던 것. 내부자 고발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그러나 은호원은 또다시 절망하는 상황을 맞닥뜨리게 된다. 그건 같이 인턴으로 들어온 장강호(이호원)가 그녀의 고발을 모두 부인하는 거짓말을 한 것이다. 둘도 없이 챙기던 인턴끼리도 어쩔 수 없이 경쟁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은호원이라는 인턴이 스스로 죽음을 앞두고 있는 시한부라 생각함으로써 회사의 갖가지 갑질과 부당한 대우에 똘끼를 발휘하는 모습은 그래서 의외로 통쾌하면서도 슬프다. 결국 그렇게 부당한 대우에 엉뚱한 똘끼로 대적하는 장면은 속이 시원하지만 그렇게 할 수 있게 되는 순간이 죽음이라는 끝을 상정해서야 비로소 가능하다는 무거운 현실이 거기서 느껴지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청년 실업을 말해주는 다양한 신조어들이 탄생하고 있다. ‘호모인턴스’, ‘호모알바스’라는 신조어가 그것들 중 하나다. 인턴만 거듭되는 인생. 심지어 정규직이 되지 못하고 계속되는 인턴생활로 부장만큼 풍부한 경험을 쌓은 인턴을 ‘부장인턴’이라 부르기도 하고, 휴지처럼 쓰다 버려지는 처지를 빗대 ‘티슈인턴’이라는 지칭도 나온다. 

<자체발광 오피스>는 은호원이라는 좌충우돌 똘끼 충만 인턴을 통해 우리네 청년 실업의 자화상을 그려내고 있다. 물론 그 절절한 절망을 그리면서도 그것을 코믹한 풍자에 담아냄으로써 그 무게에 짓눌리게 하지 않는 방식은 이 드라마가 발랄해지는 이유다. 하지만 웃고 나면 남는 어떤 먹먹함 같은 것이 있다. 그것은 한껏 제 뜻을 펼쳐나가야 할 은호원이라는 인물이 느끼는 현실의 벽 같은 것에 대한 깊은 공감대에서 비롯되는 일일 게다.

‘그레이트 월’, 퓨전과 짬뽕의 경계는 종이 한 장 차이

영화 <그레이트 월>은 예고편만 보면 정말 엄청난 기대감을 갖게 하기에 충분하다. 제목에서 묻어나듯 이 영화는 중국의 미스터리로까지 남겨진 만리장성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그 감독은 거장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장예모인데다, 주인공은 맷데이먼이다. 그러니 예고편에서 맷데이먼이 마치 판타지 영화 속 아처의 형상으로 만리장성 위에서 활을 쏘아대는 모습만으로도 기대가 될밖에.

사진출처:영화<그레이트 월>

<그레이트 월>은 그러나 그 기대감 안에 담겨져 있는 불안요소들을 좀체 넘지 못한다. 즉 영화적 배경은 중국의 만리장성이고 감독은 장예모인데, 그 주인공은 서양인인 맷데이먼이고 그가 중국인 배우 경첨과 유덕화와 함께 싸우는 적은 외계에서 온 알 수 없는 ‘진격의 괴수들’이다. 좋게 이야기하면 동서양의 퓨전이고 중국 무협과 서구의 판타지의 만남이며 만리장성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고 여기에 외계 생명체와의 대결이라는 에일리언적 요소들까지 가미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면 이들 요소들은 너무 많은 이질적인 것들이 겹쳐져 있어 그것이 하나로 융합되지 않고 겉도는 느낌이 더 강하다. 무엇보다 장예모 감독의 거대한 화면에 채워지는 미술적인 연출에 대한 기대를 하는 관객이라면 그저 상업적인 틀에 머무는 영화에 실망할 수 있고, 맷데이먼의 눈으로 보여주는 액션이 아닌 내적인 응어리 같은 걸로 더 강한 폭발력을 내는 액션을 기대하는 이들에게는 너무 볼거리 위주의 액션에 실망할 수 있다. 

판타지와 무협의 퓨전이라는 것도 어찌 보면 그 합이 더 엄청난 시너지를 만들기보다는 판타지로서도 또 무협으로서도 부족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래서 이러한 퓨전은 상업영화로서의 마케팅적인 결합처럼 보인다. 즉 맷데이먼이 중국영화 속으로 들어온 것은 중국 관객들을 겨냥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지고, 여기에 만리장성이 일종의 지구를 지키는 최종방어선처럼 그려지는 것 역시 중국인들의 민족주의를 건드리는 마케팅적 장치로 보인다. 

물론 영화가 이러한 황당해 보이는 이질적인 요소들의 결합 통해서 담으려는 메시지는 명백하다. 그것은 서역에서 검은 가루(화약)을 찾아 이 동양에까지 다다른 윌리엄(맷데이먼)과 외계의 적과 맞서고 있는 린 사령관(경첨)이 “우리는 너무 다르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후에는 “우리 생각이 틀렸다. 우리는 비슷하다”는 결론으로 바뀌는 그 과정이다. 거기서 지구를 구하는 두 패권이 손을 잡는다. 하나는 중국이고 또 하나는 서구의 힘이다. 물론 거기서도 실질적으로 과시되는 건 제목에 등장하듯 ‘만리장성’의 위용이지만. 

그래서 영화는 여러 이질적인 것들이 하나로 합쳐져 엄청난 적들과 대결해나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지만 사실 이건 저들에게 설득되는 이야기들일 뿐, 우리처럼 그들의 세력다툼에 휘둘려오며 변방을 치부되어온 관객들에게는 그다지 큰 감흥을 줄 수 없다.

그래서 그저 남는 건 스펙터클이다. 하지만 이 스펙터클 역시 ‘대륙의 상상력’은 한계가 없다고 말할 때 갖게 되는 조금은 비하적인 느낌을 갖게 만든다. 기상천외한 상상력들이 스펙터클로 보여지지만 그것이 너무 나가있어 관객이 몰입되기보다는 헛웃음이 나오는 그런 느낌. 장예모에 맷데이먼, 유덕화 그리고 만리장성까지 만나는 그 이질적인 조합은 그래서 시도는 좋았을지 몰라도 공감 가는 퓨전보다 이질적인 것들이 마구 뒤섞인 짬뽕에 가까운 결과물이 되었다.

‘푸른 바다’, 멜로와 현실은 어떻게 공명했을까

잊지 말아야 될 기억은 어떻게 보존될 수 있을까. SBS 수목드라마 <푸른 바다의 전설>은 허준재(이민호)의 기억을 지우고 바다로 돌아간 인어 심청(전지현)이 다시 돌아와 사랑을 이어가는 것으로 해피엔딩을 그렸다. 허준재는 청이 자신의 기억을 지웠지만 자신의 심장에 새겨진 사랑은 지울 수 없었다며 그녀를 기억하고 기다려왔다는 사실을 털어놨다. 

'푸른바다의 전설(사진출처:SBS)'

그런데 여기서 허준재가 지웠졌던 기억을 다시 복원하는 그 방식이 흥미롭다. 그는 훨씬 이전부터 이런 일이 있을 거라는 걸 예감이라도 한 듯, 청이와의 일들을 일기로 기록해놨다고 했다. 결국 청이가 그의 기억을 지웠어도 그는 다시금 그 일기를 통해 그녀와의 추억들을 되새길 수 있었다. 

이건 전형적인 멜로물의 해피엔딩처럼 보이지만, 그간 기억에 대한 문제를 지속적으로 다뤄왔던 <푸른 바다의 전설>에서는 조금 달리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기는 엔딩이다. 물론 멜로물로서 바다와 육지로 각각 태어난 서로 다른 존재가 헤어질 수밖에 없는 운명을 맞지만 다시금 돌아와 둘 사이에 생명을 잉태하고 그 존재가 바다와 육지 사이의 소통자 역할을 한다는 이야기는 로맨스 판타지물의 이야기로도 충분히 완결성이 있는 엔딩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작금의 우리네 현실과 마주하면 또 다른 해석이 가능해진다. 바다와 기억으로 환기되는 세월호 참사의 이미지들은 이 엔딩이 ‘진실을 담은 아픈 기억’에 대한 메시지로 다가오게 하기 때문이다. 바다에서 조난당했다 살아 돌아온 이들의 소식이 들릴 때마다 그것이 인어 심청의 도움이라고 생각하며 바다를 찾았던 허준재의 그 마음은 어쩌면 여전히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희생자들의 가족들이나 그들을 위해 기도해온 많은 대중들의 바람과 똑같은 것이 아닐까. 

그래서 희미해지는 기억을 아파도 애써 기억해내려는 허준재의 사랑 또한 남다르게 느껴지고, 그것을 ‘기록’으로 남겨 절대 잊지 않으려는 노력은 우리가 ‘역사’라고 부르는 ‘기억의 기록’이 갖는 무게감을 새삼 떠올리게 한다. 그렇게 사랑의 기억 같은 진실을 잊지 않고 보존한다면 그 애끓는 사랑은 영원할 수 있다고 마치 이 드라마는 말하고 있는 듯하다. 

그 기록으로 영원히 남을 기억은 차츰 그 아픈 상처들이 의미하는 바가 바로 사랑이라는 걸 말해준다. 드라마 속 지나가는 듯한 에피소드의 대사로 등장했던 “아파도 사랑할 수 있으니까” 기억하겠다던 한 엄마의 절규처럼, 아픔은 사랑의 증명이나 마찬가지다. 반면 영원한 벌로서의 기억 또한 존재한다. 계모 강서희(황신혜)의 기억에 잊혀지지 않을 아들의 자살이 그것이다. 강서희의 기억은 사랑이 아니라 죄의 기억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다르다. 우리에게 기록으로 남는 기억이란 이처럼 어떤 것은 바람직한 사랑으로, 어떤 것은 또 다시 벌어져서는 안될 반면교사로서의 죄로 남겨진다.

허준재는 전생에서 바닷가 마을에 지방관으로 부임했던 담령으로 인어를 만났던 그 때의 기억 그대로 이생에서의 심청과의 미래를 준비한다. 육지와 바다의 경계에 있는 바닷가 마을에 함께 살 집을 마련하고, 검사가 되어 지방검찰청에서 일하며 심청과 ‘소소한 삶’을 꿈꾼다. 사실 우리네 삶이 꿈꾸는 것들은 그리 대단한 것들이 아니다. 그저 사랑하는 사람과 소박하고 소소하지만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것. 그런 기억들을 많이 남기는 것일 테니. 그것조차 하지 못하는 현실은 그래서 더더욱 아픔으로 다가오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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