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가 청춘들에게 던지는 작지 않은 질문

 

현재의 미래(윤은혜)가 이길 것인가 아니면 미래에서 온 미래(최명길)가 이길 것인가. <미래의 선택>이라는 로맨틱 코미디를 보는 관점은 사뭇 새롭다. 기존 로맨틱 코미디들이 주로 주인공이 누구와 결혼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 이 드라마는 그것이 그녀의 주체적인 선택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그저 운명적으로 결정된 대로 이뤄진 것인지를 관전 포인트로 다룬다.

 

'미래의 선택(사진출처:KBS)'

그래서 <미래의 선택>이라는 제목은 이중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즉 현재의 주인공인 미래(윤은혜)가 능동적으로 선택하는 삶을 살아갈 것인가의 의미와 말 그대로 ‘미래의 선택’ 즉 이미 결정된 운명에 수긍하며 살아갈 것인가의 의미를 담고 있다. 전자가 자기 삶을 개척해나가는 능동적인 입장을 말해준다면 후자는 운명론적이고 수동적인 입장을 말해준다.

 

어찌 보면 미래에서 온 미래(최명길)는 현재를 바꿔 미래 또한 바꾸려는 능동적 입장처럼 보이지만 이 판타지적인 설정에는 이미 운명론이 개입되어 있다. 즉 미래는 이미 결정된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기 때문에 이를 바꾸려 노력하는 것이다. 이 미래에서 온 미래가 바꾸려는 선택이 남편감이라는 점은 그 운명론적인 입장을 잘 말해준다. 그녀는 한 여자의 앞날이란 어떤 남편을 만나는가에 달려 있다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현재의 미래(윤은혜)는 생각이 다르다. 그녀는 자신의 앞날을 스스로 개척하고 싶어 한다. 여기에는 서른두 살이 먹도록 꿈같은 건 접어둔 채 콜센터 직원으로 하루하루를 버텨낸 그녀의 절박함이 들어있다. 늦은 나이지만 그녀는 방송작가로서 성공하고 싶어한다. 나이도 많고 학벌도 변변찮은데다 집안도 그저 그런 그녀의 스펙과 그녀가 맞닥뜨린 현실은 작금의 취업난을 겪는 청춘들을 고스란히 떠오르게 한다.

 

나이 먹고 앵커자리에서 좌천되어 아침방송 진행자가 된 김신(이동건)과 이 방송국을 소유한 이미란 회장의 손자이지만 이 아침방송의 막내 VJ로 일하는 박세주(정용화)라는 캐릭터 역시 이 운명론과 미래 개척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흥미로운 인물들이다. 김신은 과거에 얽매여 있어 여전히 자신이 앵커인 줄 착각하며 살아가지만 그래도 방송을 위해 물벼락을 맞을 각오도 되어 있는 현실 개척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이것은 박세주도 마찬가지다. 그는 재벌2세라는 위치에 군림하려 하지 않고 방송 말단직을 하며 현실을 알려고 한다.

 

이들이 서로 부딪치며 만들어내는 화학작용은 그들의 현재를 바꾸고 미래를 만들어간다는 점에서 단순한 멜로에 머물지 않는다. 미래에서 온 미래(최명길)는 운명론적인 입장을 취하지만 바로 그것 때문에 현재의 미래(윤은혜)는 비로소 미래를 생각하게 된다. 그녀는 그럭저럭 버티며 살아가는 삶 대신 보다 나은 꿈을 향해 노력하는 삶을 선택한다.

 

과거에 얽매여 있던 김신에게 미래는 현실을 알려준다. 아침방송의 진행자면 거기에 맞게 망가질 줄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김신은 그 말에 수긍하고 조금씩 현실을 받아들인다. 박세주는 팍팍한 방송 생활에 지친 미래를 위로해주고 도와주는 한편, 그녀를 통해 재벌가의 2세로 있을 때는 결코 알 수 없는 치열한 샐러리맨들의 삶을 이해하고 들여다보게 된다. 관계는 멜로로 엮여있지만 모두가 서로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며 어떤 변화를 만들어낸다.

 

잘 나가는 리포터인 서유경(한채아)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어떻게든 방송 하나라도 더 하기 위해 PD에게 애교를 부리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는 인물. 하지만 그녀에게 박세주가 “당신은 이미 방송을 할 때 멋진 프로다”라고 말해주자 그녀는 괜스레 눈물을 흘린다. 윗선의 눈치만 보며 살아가던 그에게 박세주가 어떤 변화의 동인을 제공한 셈이다.

 

물론 <미래의 선택>은 잘 만들어진 로맨틱 코미디다. 등장하는 인물들이 서로 부딪치고 가까워지는 과정은 달달한 로맨틱 코미디의 정서를 충분히 만들어낸다. 하지만 그것만이었다면 이 드라마는 어딘지 허허로운 느낌을 지울 수 없었을 게다. 사실 요즘처럼 젊은 세대들에게 치열해진 현실 속에서 멜로니 결혼이니 하는 얘기는 때로는 사치처럼 여겨질 때가 많다. <미래의 선택>이 괜찮은 드라마라는 건 바로 이 현실적인 문제를 로맨틱 코미디라는 장르 속에 제대로 녹여내고 있기 때문이다.

 

불투명한 미래.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현실. 이 앞에서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태생적으로 이미 미래가 결정되는 사회가 주는 그 암담함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답답한 마음에 미래의 운명을 보기 위해 점집을 찾아가기도 하지만 우리들은 결국 그 점집 문을 나서면서 다시 현실과 마주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미래가 어떻든 두려워하지 말고 현재를 실컷 살아보는 건 어떤가. 즉 미래란 결정된 어떤 것이 아니라 현재가 하나하나 쌓여 생기는 것이 아닐까. <미래의 선택>은 이 결코 작지 않은 질문들을 던지고 있다.

반인반수 영웅으로 재탄생된 이승기의 구미호

 

왜 <구가의 서>가 다루는 우리네 민초들의 영웅은 반인반수로 태어났을까. 이승기에 의해 재탄생된 구미호는 우리가 <전설의 고향>에서 보던 “서방님 하루만 더 참았어도...”하며 원망의 눈길을 보내던 그 구미호가 아니다. 우리네 전설에서 구미호라는 존재가 한이 내면화된 민초들의 억압에서 탄생한 존재라면, <구가의 서>의 반인반수 최강치(이승기)는 안으로 꼭꼭 숨겨두는 한보다는 겉으로 터져 나오는 분노에서 탄생한 존재다.

 

'구가의 서'(사진출처:MBC)

확실히 지금은 조선시대의 수동적인 구미호의 신파가 감흥을 잃은 시대다. 아마도 70년대 가부장적인 가족체계 내에서라면 이른바 고부갈등과 시집살이에 꾹꾹 눌려진 억압이 구미호의 신파적인 변신만으로도 눈물로 풀어져버렸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달라진 시대는 달라진 구미호를 요구한다. 최강치가 그려내는 구미호 이야기는 그래서 신파가 아니라 활극에 가깝고, 내면화된 욕망을 풀어내는 공포가 아니라 좀 더 겉으로 드러내는 판타지에 가깝다.

 

“다 죽여버릴거야!”라고 외치는 분노의 최강치는 그래서 그 최대의 적이 바로 자신이다. 물리적인 힘으로는 도무지 그 누구도 그를 이길 수 없지만, 바로 그런 엄청난 반수의 힘은 어느 쪽으로 사용되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진다. 마치 핵을 가지고도 누가 사용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듯이, 최강치는 지금 왜구의 침략에 대비하여 거북선을 만들려는 전라좌수사 이순신(유동근)과 백년객관을 빼앗고 왜구들과도 결탁해 무언가를 꾸미고 있는 희대의 간웅 조관웅(이성재) 사이에서 줄다리기가 되고 있는 존재다.

 

조선시대의 구미호 전설을 재해석하고 있지만 <구가의 서>는 그래서 무수한 현대의 영웅담과 판타지물의 흔적들이 들어있다. 분노하면 반수로 변신해 자신도 모르게 모든 적을 살상하는 그 모습은 헐크를 닮았고, 다른 존재로서의 외로운 영웅의 모습은 스파이더맨이나 슈퍼맨을 닮았으며, 영웅의 인간적인 고뇌는 배트맨을 닮았다. 그래서인지 이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전라도는 배트맨의 고담시처럼 고립된 인상이 짙고, 그걸 장악하는 조관웅은 고담시나 뉴욕을 꿀꺽 삼키기 위해 테러를 일삼는 악당을 닮았다.

 

물론 여기에는 영웅담 이외에 판타지물의 흔적도 담겨 있다. 지리산을 지키는 신수 구월령(최진혁)과 소정법사(김희원)는 <반지의 제왕>의 요정과 마법사를 떠올리게 하고, 담여울(수지)과 최강치의 관계 설정은 일본 만화 <이누야사>를 닮았다. <구가의 서>는 이처럼 그간 <전설의 고향>이 다루던 전통적인 구미호와는 확연히 다른 캐릭터다. 우리만의 특수성을 가진 구미호라는 캐릭터를 전 세계 보편적인 변신 캐릭터들(이를테면 뱀파이어나 늑대인간에서 현대적인 슈퍼히어로에 이르는)로 그리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달라진 구미호 최강치는 민초들에게 어떤 영웅일까. 과거의 구미호 텍스트들은 구미호보다 더한 인간의 모습을 그려내는 것으로 당대의 신분구조가 주는 억압을 해체시켰다. 양반과 상놈의 신분구조는 인간과 구미호로 치환되었고, 구미호는 공포의 존재가 되어 인간을 깨우치는 이야기로 그려진다. 2000년대가 넘어 재탄생된 구미호 이야기들은(이를 테면 <여우누이뎐>같은) 구미호보다 심지어 더 공포스런 인간들을 비판한다. <구가의 서>가 그리는 구미호도 다르지 않다. 여기에는 인간이지만 반인반수보다 못한 조관웅이 등장한다.

 

하지만 최강치라는 새로운 영웅이 하려는 것은 조관웅을 죽이는 사적인 복수에 머물러 있지 않다. 이순신이라는 존재가 굳이 등장한 이유다. 이 반인반수의 영웅은 임진왜란과 무적의 이순신이라는 존재 옆에 생겨난 판타지다. 그런 점에서 <구가의 서>의 구미호는 사회적 억압이 만들어낸 공포의 캐릭터가 아니라, 사회적 분노가 만들어낸 영웅에 가깝다. 권세에 기대 뭐든 갖고 싶은 것을 취하려는 조관웅은 그래서 사회적 분노를 일으키는 공공의 적이 된다.

 

최강치라는 새로운 구미호는 현대인들의 분노가 응축되어 만들어진 캐릭터다. 분노에 의해 만들어진 그의 강력한 힘은 이미 신분체계의 벽을 넘어선다. 하지만 괴물과 싸우면서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스스로가 괴물이 되지 않는 일이다. 최강치에게 남겨진 문제는 그래서 그 힘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가 된다. 현대인들이 갖고 살아가는 분노가 그러한 것처럼.

송승헌의 전쟁 같은 사랑, 연우진의 시 같은 사랑

 

남자의 사랑, 뭐가 달라서 <남자가 사랑할 때>라는 제목을 붙인 걸까. 임재범은 ‘너를 위해’라는 곡에서 남자의 사랑을 이렇게 표현했다. ‘내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과 그걸 지켜보는 너. 그건 아마도 전쟁 같은 사랑- 난 위험하니까 사랑하니까 너에게서 떠나줄 거야. 널 위해- 떠날 거야.’ 아마도 송승헌이 연기하는 한태성이라는 남자의 사랑이 이럴 것이다. 남자의 사랑은 팩을 하고 인증샷을 찍어 보내달라는 여자 친구 앞에서 당황하는 것만큼 어색하고 면구스러운 그런 것이 아닐까.

 

'남자가 사랑할 때'(사진출처:MBC)

남자가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은 그래서 여자들이 사랑을 통해 받고 싶은 표현과는 동떨어질 때가 많다. 한태성에게 짐짓 다가와 자신의 딸 미도(신세경)가 피아노 치는 남자를 멋있어한다며 슬쩍 귀띔을 해주듯이 여성들이 원하는 사랑의 표현방식은 현실적이기보다는 로맨틱한 어떤 것일 게다. 따라서 여성들을 주 타깃으로 삼는 멜로드라마에서 그려지는 남자의 사랑이란 현실적이기보다는 여성들의 판타지가 묻어난 것일 때가 많다.

 

그런 점에서 <남자가 사랑할 때>는 이 판타지와는 조금 결이 다른 남자의 사랑을 전면에 내보인다. 한태성의 사랑은 첫눈에 반한 미도에게 달려가 사랑고백을 하는 그런 식이 아니다. 그는 미도의 뒷바라지를 하고 그 집안을 돕고 가끔은 현실에 찌든 삶을 털어낼 여유를 제공하며 앞으로의 미래와 꿈을 돕는다. 물론 가끔 얼굴에 진짜 팩을 붙이고 인증샷을 보내거나, 시집의 한 문구를 그녀의 집 앞 칠판에 적어놓기도 하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그녀가 좋아할 거라는 생각 때문이지 그의 사랑의 진짜 얼굴은 아니다.

 

그래서 신사의 모습으로 사랑 앞에 어린아이처럼 쑥스러워하는 한태성이 그에게 도발하는 구용갑(이창훈)에게 야수성을 목격했을 때 미도는 놀랄 수밖에 없다. 그녀 앞에서는 한없이 어린아이 같지만 그것은 사랑 앞에 모든 것이 무장해제 된 남자의 모습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 남자는 저 전쟁터 같은 세상에 나가면 또 치열한 싸움을 벌일 것이다. 가족을 위해서 혹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것이 남자들의 사랑 방식인 셈이다.

 

하지만 <남자가 사랑할 때>에는 전쟁 같은 사랑을 하는 한태성이라는 인물과 대척점으로서 여성들의 판타지를 충족시켜주는 이재희(연우진)라는 인물도 있다. 한태성이 보내준 해외출장에서 ‘인생에 가장 행복한 순간’을 경험하게 해준 인물. 본래 인생에서의 판타지란 이처럼 현실적인 공간에서 몇 시간은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야 겨우 얻을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짧지만(어쩌면 짧기 때문에) 더 강렬한 한 때의 추억은 어쩌면 여자들이 사랑에 빠지는 이유일 것이다.

 

이재희는 그래서 짧지만 긴 여운을 남기는 시 같은 사랑을 하는 캐릭터다. 칠판에 ‘이 봄이 좋아. 네가 있어서’라고 적어 놓은 그에게 미도의 아버지가 “그게 끝이냐?”고 묻자 그는 “내가 봄을 불렀어. 너를 주려고.”하고 그 시의 뒤를 말해준다. 젊은 시절 문학을 했다는 미도의 아버지는 “유치하니 좋구만.”하며 이재희에 대한 호감을 드러낸다. 이재희는 퀸의 앨범이나 대학의 티셔츠 하나로 마음을 전하는 그런 사랑을 하는 존재다.

 

한태성과 이재희의 사랑은 이렇게 극과 극으로 갈린다. 한태성이 남자의 사랑을 보여준다면, 이재희는 여자들이 갖는 판타지의 하나로서의 남자의 사랑을 보여준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이재희가 이러한 판타지적인 사랑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한태성과 이재희의 형인 이창희(김성오)의 전쟁 같은 삶을 통해 그에게 주어진 여유 덕분이다.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가지만 우리가 누군가를 심지어 판타지에 빠진 것처럼 사랑할 때 그 밑에는 누군가의 현실적인 희생이 있기 마련이다. 미도에게 그래서 한태성의 사랑은 연인보다는 아버지 같은 느낌일 때가 많다.

 

그렇다면 남자의 이 전쟁 같은 사랑은 결실을 보게 될 것인가. 어쩌면 한태성은 저 임재범이 부른 ‘너를 위해’의 노래가사처럼 ‘위험하니까 사랑하니까’ 떠나주는 사랑을 할 지도 모르겠다. 미도의 행복을 위해 그녀의 판타지를 깨지 않고 든든히 지켜주는 현실적인 테두리로 남을 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남자가 사랑할 때>의 진짜 모습이라고 이 드라마는 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네 아버지들이 저 뒷전에서 남모르게 해왔던 것처럼. 어딘지 옛사랑의 느낌이 묻어나는 건 사실이지만, 그래서 <남자가 사랑할 때>의 사랑은 천편일률적인 판타지 멜로와는 확실히 차별화되는 것만은 분명하다.

<나 혼자 산다>, 잘 나가는 이유? 남자들에 있다

 

설 특집으로 방영된 <남자가 혼자 살 때>가 정규편성 되면서 굳이 몇 번의 제목을 고치더니 <나 혼자 산다>가 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다. <남자가 혼자 살 때>의 뉘앙스가 어딘지 소극적이고 궁상맞은 느낌을 주었던 반면, <나 혼자 산다>는 좀 더 당당하고 즐기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기 모인 무지개 회원들은 구호를 굳이 이렇게 외친다. “나 혼자 산다! 자알-”

 

'나 혼자 산다'(사진출처:MBC)

사실 혼자 사는 남자들의 이야기가 뭐 그리 재미있을까 한번쯤 의구심을 갖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지금껏 그런 이야기를 방송을 통해서(특히 예능에서) 본 적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방송이 조명하는 남자들의 이야기란 여행을 가거나(1박2일) 특별한 도전을 하거나(무한도전, 남자의 자격) 게임이나 스포츠를 하는(우리동네 예체능) 식이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방송은 이 남자들이 지금껏 보여주지 않았던 면들을 보여주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아빠 어디가>는 대표적이다. 이 프로그램에서 아빠들은 지금껏 바쁘다는 핑계로 좀체 시간을 함께 보내지 못했던 아이들과 1박2일의 추억 여행을 떠난다. 처음에는 아내 없는 아이와의 여행이 어색하기도 하고 영 적응이 안 될 정도로 낯설기도 했지만, 몇 주가 지난 지금 아빠들은 아이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잠이 들고 스스로 척척 아이들의 아침밥을 차려낸다. 조금 투박하긴 해도 아빠와 함께 놀고 아빠가 차려주는 밥을 맛있게 먹는 아이들의 이야기는 그래서 새롭다. <아빠 어디가>의 성공은 아이들이라는 순수의 지대가 일등공신임에 분명하지만 거기 새로운 남자들의 이야기가 주는 호기심 또한 빼놓을 수 없는 관전 포인트인 셈이다. <일밤>이 남자들의 군대이야기를 새롭게 시작하는 것도 같은 의도가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이 새로운 남자들의 이야기가 핵심적인 재미를 만들어내는 프로그램은 <나 혼자 산다>가 아닐까 싶다. 이 프로그램의 남자 이야기가 새로운 것은 지금껏 우리가 잘 보지 못했던 남자들의 수다와 놀이(그것도 남자들끼리 놀거나 혼자 노는)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사실 노홍철과 김태원, 이성재, 서인국, 김광규, 데프콘 같은 너무나 다른 색깔을 가진 남자들이 카페 같은 공간에 둘러앉아서 신나게 수다를 떠는 모습은 그 자체로 우습다.

 

<우리 결혼했어요>에 나간다면 누구랑 나가고 싶냐는 노홍철의 질문에 김태원이 강수연을 얘기하고, 서인국이 김혜수를 떠올리며, 김광규가 김완선을 지목하는 것보다 더 재미있는 건 이렇게 남자들끼리 둘러앉아서도 쉴 새 없이 터져 나오는 이야기꽃이 주는 새로움이다. 그 누가 수다를 여성들의 전유물이라고 했던가. 누군가와의 정이 그리울 수밖에 없는 이 혼자 사는 남자들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모였을 때 끊임없이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심지어 이성재처럼 프로그램이 끝나고도 자리를 뜨는 것이 아쉬울 정도로.

 

그리고 또 한 가지의 재미는 이들의 놀이다. 서인국의 집을 방문한 노홍철이 그 구질구질한 방에서 삼겹살을 구워먹으며 그 방에 동화되는 즐거움을 느끼거나, 노홍철의 제안으로 한강변에서 야경을 즐기는 장면은 그것이 너무나 일상에 닿아있어 지금껏 여타의 예능에서 보지 못했던 새로운 감흥을 만들어낸다. 여행이나 도전 같은 특별한 계기가 아닌 다음에야, 지극히 일상적인 공간에서 남자와 남자가 함께 노는 장면은 그리 흔하지 않다. 기껏해야 남자들의 만남이란 술자리에서 시작해 술자리로 끝나기 일쑤가 아닌가. 그만큼 우리네 남자들은 일할 줄은 알아도 놀 줄은 잘 모른 채 살아왔던 게 사실이다.

 

김광규의 집을 방문한 김태원이 즉석에서 기타를 조율해 주고 레드 제플린의 곡을 연주하며 노는 모습이나, 데프콘의 집을 방문한 이성재가 힙합 리듬에 맞춰 어색하지만 즉석에서 랩을 하는 장면은 그래서 흥미롭다. 수다 떠는 남자들이나 저들끼리 노는 남자들의 모습은 어쩌면 과거와는 갑자기 달라진 시대에 어쩔 줄 몰라 하는 남자들에게는 하나의 판타지가 되기도 한다. 왜 남자들이라고 그렇게 한가롭게 수다를 떨거나 놀고 싶지 않겠는가. 다만 그렇게 사는 남자가 무능력하고 무책임하다 교육받아온 탓이 클 뿐이다.

 

<나 혼자 산다>는 그래서 독신자들(혹은 독거자들. 제목에서 남자를 뺏으니 여자도 출연이 가능해졌다)의 라이프스타일을 하나의 트렌드로 보여주는 프로그램이지만, 그것은 또한 달라지고 있는 가족 관계 속에서 남자들에게 새로운 삶의 방식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남편, 가장, 아빠, 회사원 같은 누군가의 관계 속에서만 늘 서왔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혼자 남겨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남자들이라면 그래서 이 프로그램을 보며 그 삶이 또한 유쾌하고 즐거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노홍철이 말한 것처럼 자신이 스스로를 아끼는 시간을 갖는다는 것이 때로는 그 어떤 즐거움보다 크다는 것을 판타지처럼 발견할 수도 있을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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