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로가 전문직을 끌어안을 때

동경의 대상이 되는 직업군의 남녀들이 삼각 사각으로 엮이던 전통적인 멜로드라마가 시청자들에게 외면 받으면서 등장한 것이 전문직 장르드라마다. 그만큼 직업에 대한 디테일을 요구하기 시작했던 것. '멜로는 이젠 별로'라는 인식이 자리하면서 변화가 시작됐다. '파스타'는 그 하나로서 멜로드라마가 거꾸로 전문직의 요소들을 흡수하면서 나타난 새로운 경향이라고 볼 수 있다.
  
멜로드라마는 그 오랜 전통으로 볼 때, 드라마가 가진 본질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결국 드라마란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이루어지는 극적인 결과이기 때문에 그 속에 사랑과 이별이 빠질 수는 없다. 즉 전통적인 멜로드라마의 추락은 그 본질적인 요소의 추락을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시대에 걸맞게 변화하지 못한 점이 문제로 지적되는 것이다. 무늬만 전문직인 캐릭터들과 천편일률적인 신데렐라 스토리에 돌고 도는 복잡한 삼각 사각관계의 멜로드라마는 그 내적인 장치를 모두 시청자들에게 들킴으로 인해서 식상해져 버렸다.

그 해법은 멜로드라마의 추락과 함께 부상한 전문직 장르 드라마에서 발견되었다. 팽팽한 긴장감을 유발하는 전문직의 세계, 권력과 욕망과 자기 성장이 부딪치는 그 세계 속에서 전문직 장르 드라마는 멜로드라마가 보여주지 못했던 흥미진진한 일의 세계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전문직 장르 드라마는 호평을 받았지만 대중적인 성공은 거두지 못했다. 화제성으로 주목받았던 '하얀거탑'이 20%대의 시청률에 머문 것은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그 후 멜로드라마와 전문직 장르 드라마의 결합이 실험적으로 이루어졌다. '뉴하트' 같은 드라마는 의학 드라마와 멜로드라마가 적절히 엮어지면서 시청률에도 성공하는 전문직 장르 드라마가 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전문직 장르드라마가 재미적인 요소의 한 부분으로서 멜로를 활용하는 것이지, 멜로드라마의 화려한 부활을 알리는 것은 아니었다. 여기서 가능성을 보인 것은 '커피 프린스 1호점'이다. 이 드라마는 청춘 멜로를 다루면서 전문직이라고는 할 수 없어도 일의 세계를 이야기의 중심으로 다루었다. 커피 전문점이라는 공간과 그 금녀의 공간에 남장여자로 들어가는 고은찬이라는 캐릭터는 모두 직업적인 바탕이 깔려 있는 것이다. 그 위에서 이 청춘 멜로는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파스타'는 그 연장선에서 좀 더 직업적인 전문성이 확장된 경우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라스페라라는 파스타 전문점에서 쉐프를 꿈꾸는 여성 요리사 서유경(공효진)과 새롭게 부임한 마초 쉐프 최현욱(이선균)의 밀고 당기는 멜로를 그리는 이 드라마는, 그 멜로의 틀 속에 직업적인 세계를 모티브로 활용하고 있다. 주방에서의 쉐프의 사랑은 자칫 요리사들에 대한 형평성을 잃게 할 수도 있다는 발상은 이 멜로가 갖는 장애요소의 독특함을 만들어낸다. 즉 직업이 사랑의 장애요소로 작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랑에만 빠져 직업을 등한시하던 과거적인 멜로드라마와는 다른 양상이다.

'파스타'는 막내 요리사와 쉐프의 사랑을 그리면서 또한 여성 쉐프의 꿈을 꾸는 한 여성 직업인의 성장드라마를 담아내고 있다. 이로써 멜로드라마는 성공적으로 전문적인 직업의 세계를 끌어안을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 서유경이라는 캐릭터가 가진 자기 직업에 대한 사랑은 이 멜로드라마를 팽팽하게 해준다. 사랑 앞에서 직업을 포기하지 않는 여성의 모습은 현대 직업여성들이 가질 수 있는 일과 사랑 사이의 리얼리티를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 멜로드라마는 이로써 '파스타'를 통해 한 단계 진화하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 분명하다.

새롭게 주목받는 그들의 까칠 훈훈 리더십

'하얀거탑'에서 장준혁 역할의 김명민은 성공을 위해 뭐든 할 수 있다며 욕망을 불태우는 인물이었고, 최도영 역할의 이선균은 착하기는 하지만 어딘지 칼바람 나는 세상에서 버텨내기에는 연약한 인물이었다. 그 후 김명민은 '베토벤 바이러스'의 강마에로 오합지졸 오케스트라를 이끌어내는 까칠하지만 그 속에 훈훈함을 숨긴 인물로 돌아왔다. 이선균은 '커피 프린스 1호점'과 '트리플'에서 특유의 훈훈함을 강화하더니, '파스타'에서는 까칠함까지 더한 최현욱 셰프로 돌아왔다.

강마에와 최현욱은 여러 모로 비슷한 점이 많다. 강마에가 마이너 냄새가 물씬 풍기는 인물들에게 "똥덩어리"라고 말하면서도 뒤에서는 그들을 지원하고 챙겨주는 것처럼, 최현욱도 주방에만 들어오면 요리사들을 잡아먹을 듯이 요리(?)하면서도 그들을 스스로 생존하게 해준다. 주방에서의 최현욱이 손님의 주문 폭풍 앞에서 요리사들에게 일사분란하게 주문을 하는 장면은 마치 강마에가 오케스트라 단원들을 이끌어 하나의 하모니를 만들어내는 장면을 연상시키곤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두 캐릭터가 비슷한 것은 그 리더십이다. 그들은 좀체 자신들의 팀원들을 친절하게 대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오히려 욕을 해대고 모욕을 주면서 그들을 강하게 담금질한다. '파스타'의 최현욱은 부주방장이 스카우트 제의를 받은 사실을 알면서도 그를 회유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더 강하게 밀어붙인다. 그는 "부주방장에서 쉐프가 되는 그 시기가 가장 어려운 시기"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레스토랑 사장과 쉐프라는 자리는 건설적인 긴장관계가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도 잘 안다. 그래서 그를 직접 도와주기 보다는 그 스스로 자신을 넘어서라고 말한다. 결국 부주방장을 강하게 밀어붙이는 것은 그 줄다리기를 가르치기 위함이다.

주방 보조인 막내가 그만두겠다고 하자, 겉으로는 그러라고 하지만 그는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주방 보조란 자리가 하루에도 몇 번씩 사표를 쓰는 자리라는 걸 그도 경험을 통해 알고 있기 때문이다. 새롭게 셰프로 온 오세영(이하늬)이 개발해낸 육수가 훨씬 괜찮다는 것을 알면서도 무조건 반대만 해온 이태리파 요리사들을 그는 옥상으로 데려다가 벌을 준다. 자신이 스카우트한 요리사들이지만, 요리 앞에서는 정직해야 한다는 원칙을 지키는 것이다.

이들의 까칠 훈훈한 리더십은 멜로를 통해서도 나타나는데 그 멜로의 양상 또한 두 드라마가 비슷하다. '베토벤 바이러스'의 강마에는 단원으로서의 두루미(이지아)를 혹독하게 이끌지만, 멜로의 대상으로서 그녀를 알게 모르게 돕는다. '파스타'는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주방에서는 쉐프와 요리사의 관계로 있다가 주방 밖으로 나오면 연인관계로 돌아간다. 최현욱은 일을 할 때는 아무리 연인이라도 모질게 대하고, 욕을 먹으면서도 그것을 서유경(공효진)은 웃으며 받아들인다. 일과 사랑에 있어서 이들은 그만큼 쿨하다.

재미있는 것은 최근 들어 까칠 훈훈한 리더십이 드라마 속에 자리하면서 어떤 공감을 일으키고 있다는 점이다. 이 새로운 리더십을 보여주는 캐릭터는 '외과의사 봉달희'의 안중근(이범수)이 이른바 버럭 범수로 주목받을 때부터 지금까지 진화를 거듭해오고 있다. 무엇이 이처럼 까칠하면서도 훈훈한 캐릭터의 리더십에 주목하게 만드는 걸까. 그것은 아마도 그만큼 사회생활이 혹독해졌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일 것이다. '외과의사 봉달희'의 병원이나, '베토벤 바이러스'의 공연장, 그리고 '파스타'의 라스페라라는 공간은 모두 현실 사회의 축소판으로서 그려진다.

과거 어느 때보다도 어려워진 그 현실에서 팀원들이 살아나가게 할 수 있는 방법은 그들의 아픔을 위로해주는 소극적인 방식이 아니다. 오히려 그 팀원들이 더욱 강하게 만들어 자신이 없어도 스스로 버텨낼 수 있는 자생력을 키우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일과 사랑을 동시에 그려내는 우리식의 전문직 장르 드라마들의 새로운 선택이기도 하다. 일에 있어서는 까칠함을 그리고 사랑에 있어서는 훈훈함을 전하는 것이 드라마가 현실의 빈자리를 채워 넣는 방법인 이상, 그것을 동시에 할 수 있는 캐릭터로서 까칠 훈훈한 인물이 창조되고 있는 것. '베토벤 바이러스'의 강마에, '파스타'의 최셰프는 어쩌면 지금 우리가 혹독해진 현실이 새롭게 요구하는 리더십의 한 단면일 수 있다.

‘카인과 아벨’, 의드의 경계를 넓히다

의학드라마가 힘을 발하는 이유는 도시 속에서 그 병원이라는 공간이 주는 특별한 의미 때문이다. 야생의 도전을 인공의 안락함으로 변모시킨 도시적 삶 속에서, 생과 사의 문제가 가장 치열하게 드러나는 공간이 바로 병원이다. 과거 야생에서 삶을 도전 받았던 삶과 달리, 도시인들의 삶은 병원에서 시작해 병원에서 끝난다 해도 이제는 그다지 틀린 얘기가 아닌 시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의학드라마라고 하면 병원이라는 공간에 포획되는 것이 당연할까. 어찌 보면 당연해 보이는 이 질문은 그러나 ‘카인과 아벨’을 만나면 한갓 고정관념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카인과 아벨’은 병원 밖에서도 의드의 묘미를 느끼게 해주는 드라마다.

이초인(소지섭)의 전공이 응급의학과라는 사실은 이 의드가 그리는 공간이 단지 병원 내 응급실이라는 공간을 넘어선다는 것을 암시한다. 병원 밖에서도 얼마든지 응급 상황은 있게 마련이고 그것은 의드가 주목하는 생과 사의 긴박한 순간들을 응급실 바깥에서도 그려낼 수 있게 해준다.

바로 이 점은 그다지 중요한 것처럼 느껴지지 않지만, 실상은 여러 장르들이 뒤섞이게 되는 ‘카인과 아벨’에서는 매우 중요한 포인트가 아닐 수 없다. 만일 이초인이 중국에서 기억상실의 시간 속에 액션 드라마를 보여주고 있을 때, 그가 가진 응급의학이라는 경력이 없다면, 한편으로 병렬적으로 이어지는 국내에서의 병원이야기(그리고 앞으로도 이어질)와의 봉합은 매끄럽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초인은 중국의 야생 상황에서도 병원에 갈 수 없는 탈북자인 오영지(한지민)를 수술해주고, 기억상실이 된 채 탈북자 신세가 되어 쫓기는 상황에서도 동료를 야생에서 수술해준다. 그는 병원 바깥에서도 여전히 의사라는 입장을 버리지 않고 있으며, 수술대 앞이 아니라도 메스를 든다.

재미있는 것은 바로 그의 사람을 살릴 수 있는 능력은 거꾸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능력으로 변모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중국 공안에 잡혀 수용소에서 거구와 벌이게 되는 죽음의 대결에서 오강철(박성웅)은 이초인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같이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사람은 절대로 때려서는 안 되는 곳이 있지. 거길 때려라.” 이것은 의드의 새로운 변용이다.

물론 ‘카인과 아벨’은 후에 다시 병원이라는 공간으로 돌아와 본격적인 의드의 이야기를 이어갈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이초인의 응급의학이라는 전공은 형인 이선우(신현준)의 뇌의학과 병원 내 권력 구도를 두고(물론 그 밑에는 복수극의 전제가 깔릴 것이 분명하다) 각을 세울 것이다. 이 점에서도 응급의학이라는 이 의드의 새로운 선택은 탁월했다 생각된다.

지금까지 의드의 선택은 거의 대부분이 그 중심에 외과(그 중에서도 흉부외과)를 두고 있었다. ‘하얀거탑’이 ‘외과의사 봉달희’가 그리고 ‘뉴하트’가 그랬다. 이렇게 된 데는 외과가 가장 생명과 직결되고 힘겨운 과이면서도, 바로 그렇기 때문에 외면받는 과로서 의학의 본령을 건드릴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 의드의 계보를 세울 수 있을 정도가 된 상황에서 의드는 어떤 변화가 필요한 게 사실이다. 그것은 새로운 장르와의 결합이 될 수도 있고, 의학의 새로운 분야가 될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카인과 아벨’은 이 두 가지를 응급의학의 선택을 통해 넘어서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의학, 멜로, 액션, 정치, 휴머니티까지 봉합하려는 ‘카인과 아벨’

장르 속에서도 새로운 것을 찾기 때문일까. 아니면 완전히 새로운 장르의 시도가 갖는 리스크를 줄이기 위한 백화점식 나열일까. 장르 드라마들은 한 가지 이상의 장르를 봉합하며 진화해 왔다. ‘하얀거탑’은 의학드라마에 법정드라마와 정치드라마를 칵테일했고, ‘외과의사 봉달희’는 의학드라마에 멜로드라마를 성공적으로 봉합했다. ‘개와 늑대의 시간’은 액션드라마에 가족드라마의 관계망을 접목해 한국형 느와르를 선보였다. 그렇다면 ‘카인과 아벨’은 어떨까. 놀랍게도 이 드라마는 이 모든 장르 드라마들의 디테일들을 하나로 끌어 모으고 있다.

‘카인과 아벨’에는 ‘하얀거탑’이 가진 권력대결구도가 있다. 그것은 이초인(소지섭)으로 대변되는 응급의학 센터와 이선우(신현준)로 대변되는 뇌의학 센터 건립을 두고 벌어지는 권력의 충돌이다. ‘하얀거탑’에서 긴장감 넘치게 그려졌던 투표 장면은 이 드라마에서도 여전히 효력을 발휘한다. 한편 ‘카인과 아벨’은 의드로서 ‘외과의사 봉달희’가 가진 멜로드라마와 휴먼드라마의 요소도 숨겨져 있다. 형제의 한 여자를 두고 벌어지는 삼각관계와 새롭게 멜로의 축으로 들어올 오영지(한지민)가 멜로드라마의 구도를 이루고 있고, 한편으로는 인술을 향해 달려가는 이초인의 휴머니티가 기술에 편향된 이선우와 대결구도를 이룬다.

‘카인과 아벨’에는 또한 ‘개와 늑대의 시간’의 그림자도 어른거린다. 이 드라마는 의드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그 권력 대결구도의 극한으로 끌어올려지면서 액션드라마와 복수극의 양상을 띄기도 한다. 재미있는 것은 여기에 기억의 문제를 끼워 넣었다는 것이다. 이초인의 탄생이 교통사고로 뇌사상태에 빠진 어머니로부터 꺼내지는 것이나, 자신을 아버지처럼 키워준 이종민 원장(장용)이 뇌사상태에 빠져있었던 것, 그리고 자신도 음모에 빠져 기억상실에 빠지는 것이 그렇다. 무엇보다 이 의학드라마에서 그 분야로 잡고 있는 것이 뇌 의학이라는 점은 이 드라마가 그만큼 기억에 천착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물론 ‘개와 늑대의 시간’이 그려낸 기억의 문제와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겠지만, 일정부분 모티브가 연결되어 있는 것은 부정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카인과 아벨’은 이처럼 꽤 많은 장르 드라마들의 속성들을 끌어들이고 있으며, 그 봉합은 현재까지는 꽤 성공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판단된다. 화두로서 제시했듯, 이렇게 많은 장르적 요소들을 한 틀 안으로 끌어 모은 데는 이제는 장르적 재미에만 머무는 것만으로는 어딘지 부족하게 되어버린 현 드라마 소비층들의 높아진 안목에서 기인된 것일 수도 있고, 어쩌면 장르 드라마라는 아직까지도 여전히 낯선 그 틀에 전통적인 드라마의 형식을 접목하면서 생겨난 것일 수도 있다. 모쪼록 그 장르 실험이 백화점식 나열에 그치거나 용두사미로 끝나지 않기를 기대하는 것은 그 시도가 작금의 정체된 장르 드라마들에 꽤 괜찮은 의미를 던져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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