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과천선>의 김명민, 우리들의 불편한 자화상

 

역시 김명민이다. 그가 연기하는 MBC 수목드라마 <개과천선>의 김석주라는 변호사는 특별한 구석이 있다. 첫 회부터 일제에 강제 징용당한 어르신들의 반대편에서 서서 일본기업을 변호하는 김석주는 피도 눈물도 없는 로펌 변호사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또 재벌 2세의 강간치상을 변호하면서 피해자 여자 연예인의 치부를 드러내 자살시도까지 하게하고 결국 그녀가 살인까지 저지르게 만든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이렇게 지독한 악마지만 그에게서 왠지 모를 연민이 느껴지는 건.

 

'개과천선(사진출처:MBC)'

<개과천선>의 로펌 변호사는 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변호인>의 변호사와는 너무나 다르다. 그것은 인권변호사냐 아니냐의 차이가 아니라 고용 변호사냐 아니냐의 차이다. <개과천선>에서 김석주가 다니는 차영우펌은 돈 되는 재벌 그룹들을 주 의뢰인으로 상대하는 로펌이다. 차영우펌의 직원이랄 수 있는 김석주는 따라서 이들 재벌 그룹들의 갖가지 귀찮고 더러운 일들을 처리해주며 살아가야 한다.

 

재벌들이 이러한 로펌에 변호사들을 자신들의 일에 대리하는 이유는 자신들의 손을 더럽히지 않으려는 것이다. 그 일은 때로는 무고한 샐러리맨들의 생활터전을 빼앗는 일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재벌2세들의 여자 문제 같은 뒤치다꺼리를 해주는 치졸한 일이 되기도 한다. 그 일들은 양심에 불편함을 준다. 따라서 로펌 변호사들이 그 불편함을 대리해주는 대가로 돈을 받는 것이다.

 

김석주라는 변호사가 피도 눈물도 없는 악마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연민이 느껴지는 이유는 그가 결국은 차영우펌이라는 조직에 고용된 샐러리맨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물론 개인적인 욕망이 존재하겠지만 그도 그런 일들을 겪으며 불편함을 느낀다. 자신이 변호사라는 직업을 갖고 있어 조직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개인으로 돌아오면 죄책감이 없을 수 없다. 바로 그 죄책감이야말로 그가 돈을 버는 대가이기 때문이다.

 

김명민의 연기가 주목되는 지점은 김석주라는 인물에서 악마 같은 직업인의 모습과 언뜻 언뜻 숨겨진 인간적인 고충이 적절히 드러난다는 점일 게다. 김석주는 악명 높은 변호사로 극화되어 있지만 확장해서 생각해보면 우리네 샐러리맨들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조직의 생리는 결국 돈을 버는 것이다. 따라서 돈을 벌기 위해서 때로는 누군가에게 피해를 입히는 일을 하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직업과 생계라는 이름으로 죄책감이 상쇄된다. 김석주는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불편한 자화상이다.

 

과거 <하얀거탑>에서 장준혁이라는 끝없는 욕망을 가진 천재외과의사가 과오를 저지르고도 대중들이 그에게 연민을 보낸 까닭 역시 그 인물에게서 샐러리맨의 비애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끝없이 오르기 위해 뭐든 저지르지만 결국은 제 몸 하나 망가뜨리는 결과에 처하는 안타까운 삶. <개과천선>의 김석주라는 인물에게서는 그래서 그 장준혁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흥미로운 건 이 김석주가 사고를 통해 전혀 다른 인물로 말 그대로 개과천선을 한다는 설정이다. 이건 어쩌면 혹여나 조직원이라는 이름으로 누군가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을까 하루하루를 불편하게 살아가는 샐러리맨들에게는 하나의 판타지가 아닐까. ‘모든 걸 다 잊고 새로 시작하고 싶다는 건 그 불편한 삶의 끝단에 서면 누구나 떠올리는 소망일 게다. 이 변신과정에서 김명민이라는 배우의 저력은 여지없이 드러날 가능성이 높다. 피도 눈물도 없는 데드마스크가 심지어 바보처럼 실실 웃는 얼굴로 바뀌는 그 과정이 주는 통쾌함이란.

 

<개과천선>은 그래서 팍팍한 삶을 살아가는 샐러리맨들의 판타지가 될 가능성이 높다. ‘아무리 힘들어도 괴물은 되지 말자던 젊은 날의 마음이 생계를 위한 밥벌이와 무한 경쟁 속에서 서서히 희석되어 어느 새 괴물이 되어버린 자신을 발견할 때, 우리는 어쩌면 처음으로 돌아갈래하고 외치게 되는 지도 모른다. 그래서 <개과천선>의 김석주라는 인물에게서 우리는 삶에 희석되어 없는 것처럼 치부하던 일상인들의 불안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과연 잘 살아가고 있는 걸까.

제대로 던진 SBS드라마의 승부수, 그 의미

 

SBS 드라마가 제대로 승부수를 던졌다. 지금껏 월화수목 드라마에서는 좀체 보기 힘들었던 본격 장르물을 연달아 라인 업시킨 것. <신의 선물-14>은 스릴러에 타임슬립이 덧붙여진 드라마이고 <쓰리데이즈>는 추리극적인 요소가 가미된 액션 스릴러다.

 

'신의 선물 14일''쓰리데이즈'(사진출처:SBS)

미드에 익숙한 시청자라면 우리도 이런 드라마를?”하며 반색할 만하다. 흔히들 장르라고 하면 정해진 문법이 있게 마련이지만 우리네 장르드라마는 일종의 변칙을 보여 왔던 게 사실이다. <응급남녀> 같은 의학드라마를 해도 멜로가 빠지지 않고 가족이 빠지지 않는다. 아니 이 드라마는 사실상 자세히 들여다보면 의학드라마가 아니라 멜로, 즉 로맨틱 코미디에 가깝다. <별에서 온 그대> 같은 복합 장르 드라마도 일단 메인은 멜로다. 화제가 됐던 <상속자들>도 그렇고 심지어 <감격시대> 같은 남자들의 드라마에서도 멜로는 빠지지 않는다.

 

어찌 보면 장르물들에 대한 요구가 생겨나고 있는 지금까지도 멜로드라마는 우리네 드라마의 근간이자 전부인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된 데는 장르 드라마의 시도를 통해 얻게 된 일종의 타협의 결과다. 한때 <하얀거탑>이 나왔을 때 대중들은 멜로 없이도 재밌다는 얘기를 꺼내며 이른바 전문직 드라마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다. 하지만 이런 기대감은 시청률로 옮겨지지 못했다. 멜로 없이 본격 장르물로 달린 <하얀거탑>은 그래서 호평에도 불구하고 저조한 시청률로 종영했다.

 

이 학습효과는 즉각적으로 나타나 이후에 나온 장르물들은 여지없이 멜로와 가족을 끼워 넣었다. 한 때는 가운 입고 연애만 한다는 무늬만 의학드라마에 대한 비판으로 장르물에 대한 갈증이 생겼지만 막상 장르물이 시도된 이후에는 역시 멜로를 넣어야장사가 된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물론 지금은 알고 보니 멜로였다고 해도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세련됨을 보장하는 적당한 장르물과 드라마에 빠지게 해주는 익숙한 멜로의 교집합을 오히려 즐기는 시청자들이 더 많아졌기 때문이다.

 

이런 일련의 흐름과 사정을 두고 보면 <신의 선물-14>이나 <쓰리데이즈>를 월화수목에 배치한 것은 시청률면에 있어서는 무모해 보인다. 이들 본격 장르물은 기존 드라마 시청 패턴과는 사뭇 다른 관전 포인트를 요망하기 때문이다. 이 두 드라마가 드라마라기보다는 영화 같다고 여겨지는 것은 기존 우리네 드라마 시청 패턴의 독특함을 말해준다. 극장과 집이라는 공간의 차이 때문에 드라마는 확실히 영화만큼 몰입이 떨어지는 게 사실이다. 따라서 한 시도 눈을 뗄 수 없는 본격 장르물이 가진 이야기의 촘촘함은 시청자들에게 낯설 수밖에 없다.

 

하지만 최근 들어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의 패턴도 점점 달라지고 있다. 이것은 기존 지상파들의 방영 패턴이 수동적인 본방사수에서 점점 선택적 시청으로 바뀌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IPTV나 티빙 같은 모바일 시청은 직접 선택해서 원하는 시간에 본다는 점에서 몰입도가 훨씬 높다. 물론 극장이라는 몰입을 극대화한 공간을 가진 영화만큼의 몰입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그저 채널 돌리다 무심코 세워두고 보는 시청과는 다르다는 점이다. 게다가 현재는 안방극장이 점점 시스템화되어가는 추세다. 점점 대형TV가 일반화되어가는 건 이런 변화를 잘 말해준다.

 

콘텐츠의 수용패턴은 전적으로 시청자들의 기호나 취향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미디어 환경에 의해 적지 않은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지금의 미디어 환경 변화 속도를 보면 이제 TV 시청 패턴이 바뀔 날도 머지않았고 이미 이 변화는 시작되었다. 다만 미디어 변화에 맞지 않는 시청률 추산의 문제만 남아 있을 뿐이다.

 

<신의 선물-14>이나 <쓰리데이즈>의 시청률은 당연히 낮다. 이들 콘텐츠가 과거의 시청패턴을 반영하는 현재의 시청률 추산 시스템에서 좋은 시청률을 내는 드라마는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마도 IPTV와 다운로드를 포함한 현재의 미디어 환경에 맞는 시청률 추산을 다시 내본다면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올 가능성이 높다.

 

당면한 시청률이 광고 수익으로 연결되는 마당에 이런 시도가 결코 쉬울 리 없다. 하지만 향후 이 본격 장르물에 대해 SBS 드라마가 던진 승부수는 분명 시청률 그 이상의 기대효과를 낼 것으로 예상된다. 이미 중국에서 <쓰리데이즈>의 인터넷 방영 판권이 사상 최고치의 가격으로 판매되었다는 것은 국내외를 막론해 달라지고 있는 방영 패턴의 징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이다.

 

누가 새로운 콘텐츠를 먼저 시도하느냐는 문제는 그래서 향후의 방송사 콘텐츠 헤게모니 전쟁에도 중요한 일이 될 수밖에 없다. 현재의 시청률에 목매 과거에 기대고 있을 것인가. 아니면 미래를 위해 투자할 것인가. 결코 쉽지 않은 선택이지만 어떤 것이 바람직한 것인가는 이미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일 것이다.

<굿닥터>가 보내는 어른들에 대한 준엄한 경고

 

“이제껏 내가 본 박시온은 로봇이었어. 무조건 환자를 고쳐야 함. 이 프로그램이 입력된 로봇.” <굿닥터>의 소아외과 부교수 김도한(주상욱)은 서번트 증후군으로 천재적인 의학적 지식과 진단 능력을 소유한 박시온(주원)을 로봇이라고 말한다. 즉 박시온이 오직 환자를 고쳐야겠다는 생각만을 가진 것은 이성적인 판단이나 확신에서 우러나오는 게 아니라 “훈련으로 나오는 기계적인 반응일 뿐”이라는 것.

 

'굿닥터(사진출처:KBS)'

이런 김도한의 생각은 병원이라는 곳이 뛰어난 의술만으로 생존하기 어려운 공간이라는 걸 에둘러 말해준다. 즉 부교수로서 레지던트들의 책임을 져야 하는 김도한에게 박시온처럼 앞뒤 안 가리고 환자만을 고치겠다는 순수한 영혼은 위험 그 자체다. 병원은 나름의 위계질서 시스템으로 인해 굴러가는 조직이기 때문이다. 소아 외과장 고충만(조희봉)이 접대 골프를 받으러 간 사이, 담당 소아환자가 죽을 위기에 몰려도 함부로 손을 댈 수 없는 곳이 바로 병원이라는 곳이다.

 

물론 박시온에게 이런 시스템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껍데기일 뿐이다. 병원이라는 곳이 시스템 지키려고 환자를 죽이는 곳이 되어서야 되겠는가. 하지만 현실은 더 냉혹하다. 환자를 고치는 것은 때로는 환자를 위한 일이 아니라 담당 의사의 실적이기도 하고, 반대로 과실은 피해와 고통을 입은 환자보다 해당 의사의 책임회피에 더 몰두하게 만들기도 한다. 병원은 저 <하얀거탑>이 이미 보여준 바 있는 권력 투쟁의 장이 되기도 한다. 이럴 때 환자는 자칫 의사들의 권력 투쟁을 위한 소모품이 되는 경우까지 발생한다.

 

그러니 최고의 의술을 가진 의사지만 김도한에게 박시온은 위험한 존재다. 서번트 증후군을 앓는 박시온을 이사회에서 레지던트로 받아들여준 건 사실 그를 천거한 최우석 병원장을 밀어낼 구실을 찾는 병원 내의 적들(?) 덕분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다. 따라서 최우석 원장을 스승으로 모시고 있는 김도한에게 박시온이 고울 리가 없다. 그는 박시온에게 ‘의사정신’이 없다고 말한다. “서번트 신드롬? 천재성? 아니 이건 뇌의 역기능이고 부작용이야. 자폐의 또 다른 방식이고.”

 

이것은 <굿닥터>가 가진 독특한 문제의식이다. 서번트 증후군을 앓는 소아과 의사는 이론적으로는 가능할 지 몰라도(극중에서 박시온은 끊임없는 치료로 최종 정상판정을 받은 캐릭터로 나온다)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다. 의사가 환자라는 설정은 이미 <하얀거탑>이나 <외과의사 봉달희>에도 나왔고 <브레인>에서도 극대화되어 보여질 정도로 관습화된 설정이다. 하지만 <굿닥터>는 서번트 증후군이라는 질환의 독특한 특징이 박시온이라는 소아 외과 의사의 긍정적인 캐릭터를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서번트 증후군을 앓는 박시온은 뭐든 다 외워버리는 천재적인 의학지식을 갖춘 데다 판단력도 뛰어난 소아 외과 의사지만, 그 마음은 여전히 어린 아이의 그것이다. 즉 의학적으로는 뛰어난 의술을 가졌지만, 그 어떤 어른들의 세계, 이를 테면 권력욕이나 성공에 대한 욕망 같은 것들이 전혀 끼어들지 않은 순수한 상태라는 점이다.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한 의사는 그래서 환자들에게는 하나의 희망일 수밖에 없다.

 

아파서 병원에 가본 서민들이라면 그 마음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게다. 돈 없고 가난한 이들이 진료를 받는 것과 돈 많고 권력 있는 자들이 진료를 받는 것이 얼마나 다르다는 것을. 그것은 단지 서비스의 차원에만 머무는 것이 아닐 게다. 누군가는 그래서 의술이 없어서가 아니라 단지 돈 없고 백 없어 죽는 곳이 병원이기도 하니 말이다.

 

레지던트로 들어와 의국에서의 첫 날을 지내고 돌아온 박시온은 잠결에 어린 시절 먼저 저 세상으로 떠난 형(아이의 모습)이 자신의 등을 두드려주는 꿈을 꾼다. 어린 아이가 다 큰 어른의 등을 두드려주는 이 장면은 그래서 <굿닥터>의 메시지를 드러내는 상징처럼 보인다. 박시온은 그 어떤 어른들의 세계가 어지럽게 펼쳐지는 병원이라는 공간에서도 여전히 아이 때 누군가를 살리려 했던 그 마음 그대로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서만 노력하겠다는 것.

 

따라서 <굿닥터>가 앞으로 보여줄 상황들은 이 박시온이라는 아이의 마음을 가진 인물이 어떻게 어른들의 세상과 한 판 승부를 벌이는가 하는 점이 되지 않을까. 박시온이 일으키는 성원대학병원 소아 외과의 일대 소동들은 그래서 우리네 어른들의 세계를 되돌아보게 만들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을 갖게 만든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굿닥터>에 쏟아지는 호평은 그래서 저 심지어 참담하게까지 여겨질 때가 많은 어른들의 세상에 대한 준엄한 경고에서 비롯되는 지도 모르겠다.

<세계의 끝>, 종편이라 안 봐? 그렇다면 지상파는?

 

사실 종편이기 때문에 거부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일 게다. 이것은 그간 종편의 모체인 보수 언론들이 기득권 세력으로 인지되는 한, 또 그 언론과 종편 채널이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을 거라는 생각이 있는 한 바뀌기 어려운 정서일 지도 모른다. 그래서 종편에서 방영되기 때문에 무조건 안 본다는 시청자들의 마음도 이해가 간다. 하지만 정서를 빼놓고 콘텐츠만 놓고 볼 때 어떤 경우에는 이런 생각이 무색해질 때가 있다. JTBC에서 새로 시작한 <세계의 끝> 같은 드라마가 그렇다.

 

'세계의 끝'(사진출처:jtbc)

<하얀거탑> 같은 명품 드라마를 연출한 안판석 감독의 작품답게 <세계의 끝>은 지금껏 드라마들이 다루지 않았던 바이러스라는 소재를 가져왔다. 흔히 재난영화에서나 봐왔던 장르적 요소들을 드라마로 끌어온 <세계의 끝>은 그래서 그 자체가 도전이다. 아마도 미드나 일드에서나 볼 수 있었던 촘촘한 스토리와 구성, 드라마라기보다는 영화에 가까운 연출은 어딘지 낯선 느낌마저 든다. 그러니 늘 우리네 드라마하면 떠오르는 식상하지만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되는 코드들이나 장치들이 전무한 이 드라마는 시청률의 잣대로 보면 무모하게까지 여겨진다.

 

하지만 이런 새로운 실험작임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끝>은 조금도 서두르는 기미가 없다. 재난장르가 가진 특성에 맞게 아주 서서히 조금씩 긴장감을 높여가면서 드라마의 극적 재미를 만들어낼 요소들을 차근차근 알려준다. 질병관리본부의 셜록 홈즈로 불리는 강주헌(윤제문)의 탐정 뺨치는 치밀한 캐릭터를 세우고, 일단 감염되는 순간 누구든 포기되고 격리될 수밖에 없는 그들의 직업적 특징이 소개된다.

 

또 감염된 본인에겐 특별한 증상이 나타나진 않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바이러스를 퍼트리는 치명적인 존재로서의 장티푸스 메리의 등장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그 장티푸스 메리라는 존재가 갖는 심리까지 설명된다. 즉 가해자이지만 동시에 피해자의식을 갖기 마련인 장티푸스 메리는 누군가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그 죄책감을 자기 또한 피해자라는 자기 연민으로 넘어선다는 것. 즉 그만큼 위험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처음 2회 분량은 이 장치들을 설명하고 깔아놓는 단계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하얀거탑>에서 이미 보여주었듯이 <세계의 끝>은 본격적인 대결구도와 극적 긴장감을 높여나갈 것으로 보인다. 시청률은 알 수 없지만 그것이 적어도 이 작품에는 그다지 중요한 건 아니다. 더 중요한 건 이런 새로운 드라마적 시도를 한다는 것 그 자체다. 무엇보다 우리가 흔히 신문 한 귀퉁이에서 봤음직한 바이러스가 앞으로 일으킬 대혼란에 대한 공포감이 이 드라마에 힘을 실어줄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그 낯선 소재와 연출 때문에, 또 어쩌면 조금은 실험작으로서의 한계 때문에 이 드라마는 지루하게 여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세계의 끝> 같은 드라마가 지금껏 늘 반복된 코드들만을 보여주던 드라마들에서는 보지 못했던 새로운 요소들을 제공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런 점에서 <세계의 끝>은 늘 반복적으로 때우듯이 먹어왔던 음식이 아니라 새롭기 때문에 낯설고 또한 설레는 음식인 셈이다. 그렇다면 최근 지상파의 드라마들은 어떨까. 새로운 시도를 한다기보다는 그저 시청률에 목매고 있는 건 아닐까.

 

심지어 막장으로까지 치닫는 복수극(야왕), 한 때 새롭게 여겨졌지만 무한히 반복되면서 이젠 지겨워져 버린 미션 구조의 성장드라마(마의), 매번 출연자만 달라지는 듯한 전형적인 가족드라마(최고다 이순신), 볼거리에만 치중해 내용이 부실한 블록버스터(아이리스)... 그 밖에도 지상파 드라마라면 어디든 존재하는 출생의 비밀이라는 공식이나 신데렐라의 변종 혹은 캔디형 캐릭터 같은 흔해빠진 지상파 드라마의 코드까지. 스타급 연기자를 캐스팅하고 거기에 맞춰 비슷한 코드의 무한 반복에 머물러 있는 것이 작금의 지상파 드라마들의 현주소가 아닌지.

 

이런 지극히 보수적인 덫에 걸려 있는 지상파 드라마들을 보다보면, 종편이기 때문에 안 본다는 그 정서를 이해하면서도 <세계의 끝> 같은 드라마 앞에서 고개가 갸웃거려질 수밖에 없다. 도대체 뭐가 더 보수적인가라는 회의. 지상파는 왜 <세계의 끝> 같은 드라마를 시도하지 못하는가. 그저 기존 시청률 시스템이 제공하는 기존 시청층에 안주해 언제까지 비슷비슷한 드라마의 무한 반복에 머물러 있을 것인가. 그렇게 안주해버리는 지상파 세계의 끝은 불을 보듯 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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