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자>, <부러진 화살>에 <도가니>를 더한 듯

 

마치 <부러진 화살>과 <도가니>를 합쳐놓은 듯한 공분이다. 수차례 자동차로 깔아뭉개져 살해당한 수정(이해인)의 범인 PK준(이용우)의 재판에서 수정은 오히려 상습적으로 마약을 복용했다는 오명이 덧붙여졌고, PK준은 단지 사고였지만 그래도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는 식의 거짓 발언으로 양식 있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심지어 PK준을 추종하는 팬들은 그의 진술에 눈물까지 흘렸고,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수정은 악플로 두 번 죽음을 당했다.

 

 

'추적자'(사진출처:SBS)

수정을 위해 뭐든 돕겠다던 학교는 아마도 상부로부터의 압력을 받은 듯, 수정의 탄원서를 거부했다. 수정의 엄마 송미연(김도연) 앞에서 곤혹스러운 얼굴로 서 있는 교사에게 뒤편에 선 교장이 고개를 가로젓는 모습은 저 <도가니>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만들었고, 법정에서 진실이 유린되고 피해자와 가해자가 뒤바뀌는 이 기막힌 장면은 저 <부러진 화살>을 떠올리게 했다.

 

인권은 사라지고 권력이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 세상에서 힘없는 억울한 서민들을 바라보는 건 힘겨운 일이다. 자신이 대선에 나가기 위해 이 사건을 덮으려는 인면수심의 강동윤 의원(김상중)이 마치 세상을 구하기라도 하겠다는 듯 노숙자들 앞에 나서는 모습이나, 복직 투쟁을 위한 촛불 시위를 하는 자리에 나서 "권력이 생기면 단 한 줄의 법 조항만 바뀌면 모두 복직할 수 있다"며 기부쇼를 통해 후원금을 모으는 모습은 보는 이를 답답하게 한다.

 

"저의 친구가 되어 주십시오." 라는 그 말에 속아 심지어 피해자의 아버지인 백홍석(손현주)마저 믿고 싶어지는 현실이라니. 인면수심의 가해자들에 의해 딸을 저세상으로 보낸 그들은 이제 그 가해자들을 보호하려는 권력자들로 인해 두 번째 가해를 당하는 중이다. 눈앞에서 자신의 딸을 죽인 PK준이 병보석으로 풀려나는 모습을 보는 아버지의 마음이 어떨까. 억울하고 안타까운 마음에 자꾸만 눈앞에 죽은 딸이 보이는 엄마의 마음은 또 어떻고.

 

자신의 출마가 서민들을 위함이라고 강변하는 자들은 사실 권력욕에만 미쳐 피해자들을 두 번 죽이고, 서민들은 너무나 각박하고 힘겨운 현실에 그만 그들의 달콤한 거짓말을 믿고 싶어진다. "대한민국 정치는 국민들에게 거짓말만 해왔습니다. 저 강동윤이는 진실만을 말하겠습니다."라고 외치는 정치인의 모습이 어딘지 낯설지 않다. 진심을 알아달라고 딸의 일기장을 잔뜩 가져와 법관에게 읽어달라고 간청하는 엄마의 모습이나 죽은 딸의 억울함을 벗기 위해서라면 뭐든 하겠다는 아버지의 결연한 모습 또한 마찬가지다. 하지만 현실은 그 아버지가 무릎이 꿇고 도움을 청한 그 의원이 사실은 가해자라는 사실이다.

 

<도가니>와 <부러진 화살>이 만든 신드롬은 한편으론 씁쓸한 현실을 전제하고 있다. <추적자>는 그 현실을 낱낱이 우리 눈앞에 펼쳐 보여준다. 거기에는 대선 때만 반짝 서민의 일꾼이 되는 정치인들이 있고, 자신의 권력을 위해서는 눈앞의 진실을 호도하는 법조인들이 있다. 또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그들에게 무릎을 꿇고 간절하게 도움을 청하는 우리들의 자화상도 들어 있다.

 

<추적자>는 결국 사회가 보호하지 못하는 인권을 지키기 위해 한 아버지의 부성애가 거대권력과 대결하는 드라마다. 사망신고서에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아버지'라고 쓰며 애써 법을 믿었던 한 아버지가 진실이 유린되는 현실을 보고 분노하고 스스로 주먹을 들게 되는 것. 아마도 여기에 공감하지 않을 이는 없을 것이다. 학교가 외면한 탄원서를 아이들이 모아 법정에 보내지만 바로 기각되는 현실, 가해자가 본인도 괴로워하는 피해자로 둔갑하는 법정,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누군가를 지지해보지만 그가 사실은 이 힘겨운 상황을 만든 주범이라는 안타까운 현실...

 

"내가 우리 수정이가 어떤 딸인지 어떤 아인지 이 세상 사람들 다 알도록 내가 할게." 딸의 죽음에 대한 억울함 때문에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으로 쓰러져 있는 아내에게 이렇게 다짐하는 아버지 백홍석은 그래서 이 세상 모든 가난한 아버지들의 마음을 대변한다. 드라마의 내용이 현실을 자꾸만 떠올리게 만드는 <추적자>. 그래서 이 드라마만의 강력한 힘이 만들어지는 곳은 드라마 속보다는 오히려 현실이다. 답답하고 억울한 현실이 <추적자>라는 드라마에 더 집중하게 하는 것. 이것이 이 드라마를 그저 드라마로 보기 어렵게 하는 이유다.

<적도>에 이어 직진하는 사회 복수극, <추적자>

 

"힘 있는 자와 타협하지 않고 힘없는 사람들한테 고개를 숙이겠습니다. 위를 바라보지 않고 아래를 살피겠습니다. 가난이 자식들한테 대물림되지 않는 세상을 만들겠습니다. 서민들의 친구가 되겠습니다. 힘없는 사람들의 희망이 되겠습니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대한민국을 저 강동윤이 여러분과 함께 만들겠습니다." 대선 출마 선언을 하는 강동윤(김상중)의 이 연설 내용은 지겨울 정도로 전형적이다. 누구나 한번쯤 TV를 통해 봤을 법한 장면.

 

 

'추적자'(사진출처:SBS)

하지만 그 장면이 흘러나오는 TV 옆으로 억울하게 딸을 잃은 백홍석(손현주)이 스스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걸어 나오는 모습은 이 지극히 전형적이어서 이제는 따분하기까지 한 연설 내용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강동윤은 연설 내용과는 정반대로 아내 서지수(김성령)가 저지른 살인사건을 이용해 힘 있는 자인 장인 서회장(박근형)에게 압력을 가하고, 백홍석의 친구인 의사 윤창민(최준용)을 사주해 살아난 친구의 딸을 다시 죽게 만든다.

 

딸의 죽음 앞에서 백홍석의 아내 송미연(김도연)은 살아생전, 돈이 없어 딸에게 못해준 스마트폰이며 생일잔치, 학원 등록을 못해준 일들을 후회한다. 강력계 형사의 박봉에 힘없고 가난한 이들에게 돌아온 것은 억울한 딸의 죽음이다. 그것도 한 정치인의 야망에 의해 가차 없이 유린당한. 이런 세상에 희망이 있을 리 없다. 강동윤이 말하듯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나라는 애초부터 요령부득인 셈이다.

 

<추적자>는 첫 회에 이 모든 사회적인 분노의 지점을 찾아 그 도화선에 불을 붙인다. 장르적 관점에서 보면 이 드라마는 전형적인 추격전의 코스를 향해 달려갈 것이다. 이런 장르의 드라마는 굳이 새로움을 위해 장르 실험이나 뜻밖의 반전 포인트에 주저하지 않는 것이 관건이다. 오로지 대중들이 기대했던 코스를 제대로 달려 나가기만 하면 된다. 그 박진감과 속도감이 긴장감과 통쾌함으로 이어진다면 성공적인 작품이 될 수 있다.

 

물론 여기에는 한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그 반복적일 수 있는 장르의 흐름에 대중들이 공분하고 공감할 수 있는 작금의 현실을 제대로 얹어 놓아야 한다는 점이다. 백홍석이 당한 그 고통과 억울함이 대중들에게 공감되고, 백홍석의 딸을 죽음에 이르게 한 PK준(이용우)이나 그것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강동윤, 그리고 그의 사주를 받은 친구 윤창민의 행각에 공분을 갖게 되는 건, 그것이 안타깝게도 작금의 현실을 그대로 재연하고 있기 때문이다.

 

<추적자>를 통해, 외면되는 정의와 진실에 대해 질깃질깃한 복수극의 끝장을 보여주었던 <적도의 남자>가 떠오르는 건 자연스러운 일일 게다. 이 두 드라마는 모두 돈과 권력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현실을 복수극의 형태로 보여주었다. 무엇보다 <적도의 남자>는 좌우의 우회길을 살피지 않고 '직진하는 드라마'로서의 저력을 보여주었다. 이미 첫 회부터 거두절미하고 부조리한 현실을 툭 던져놓고는 그 안에 백홍석을 달리게 하는 <추적자>는 그런 점에서 <적도의 남자>의 직구 승부를 닮은 점이 있다.

 

과연 <추적자>는 <적도의 남자>가 그랬던 것처럼 차츰 시동을 걸어 점점 깊은 긴장감과 속도감을 만들어낼 것인가. <추적자> 첫 회의 마지막 장면, 즉 백홍석이 복수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 나오고, TV 화면으로 버젓이 누군가의 삶을 짓밟고 그 위에 올라선 강동윤의 연설 장면이 오버랩 되는 그 장면은 그래서 이 작품의 제대로 된 착화점이 되는 셈이다. <추격자>는 <적도의 남자>가 보여준 그 통쾌하면서도 아픈 사회극이자 복수극의 또 다른 그림을 그려낼 것인가.

왕의 판타지보다 강한 <적도>의 현실

 

지난 3월21일 수목극은 동시에 첫발을 내딛었다. 그 첫 승자는 <더킹 투하츠>였다. 당연한 결과였다. 누가 봐도 <더킹 투하츠>가 가진 자원이 타 방송사의 두 드라마에 비해 월등했기 때문이다. 이승기와 하지원이 주연으로 캐스팅되었다는 사실과, <태릉선수촌>, <베토벤 바이러스> 등으로 이미 손발을 맞췄던 이재규 감독과 홍진아 작가가 연출과 대본을 맡았다는 점만으로도 이 작품의 신뢰감은 그 어느 것들보다 높을 수밖에 없었다.

 

 

'적도의 남자'(사진출처:KBS)

실제로도 <더킹 투하츠>는 연출, 대본, 연기 그 어느 것 하나 떨어지는 것이 없는 완성도 높은 작품인 것만은 분명하다. 다만 문제는 소재가 낯설다는 것. 남북 간의 화합을 남녀 간의 문제로 풀어낸다는 점과 입헌군주제로서 왕이 존재한다는 가상설정은 잘 만들어진 작품의 완성도와는 별개로 이 드라마를 실험적으로 만들었다.

 

이런 사정은 <옥탑방 왕세자>도 마찬가지다. 이 작품 역시 조선의 왕세자가 현재로 넘어온다는 타임리프 설정의 참신함과 그 시간적 간극이 만들어낼 수밖에 없는 <개콘>보다 재밌는 코미디로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왕세자와 그 신하들(?)이 현재에 적응하기 시작하면서 코미디적 요소가 조금씩 빠지고, 본격적으로 드라마적 요소들이 전면에 등장하면서 아쉽게도 전형적인 재벌집 아들과 신데렐라 이야기로 회귀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킹 투하츠>나 <옥탑방 왕세자>는 모두 높은 완성도를 지닌 작품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대중적인 측면만을 높고 <적도의 남자>가 맨 꼴찌에서 시작해 두 왕(?)을 물리치고 맨 꼭대기에 서게 된 이유를 찾아보면 무엇을 다뤘는가 하는 소재적인 문제가 차지하는 비중을 무시할 수 없게 된다.

 

<더킹 투하츠>나 <옥탑방 왕세자>는 그 접근방식이 다를 뿐, 왕(자)과 신데렐라에 대한 판타지의 변형이라고 얘기할 수 있다. <더킹 투하츠>는 남한의 왕 재하(이승기)와 북한의 특수부대 교관(남자를 만나고 싶어 하는) 사이에 벌어지는 멜로가 핵심적이다. 물론 이 안에 복잡한 남북 간의 정치적 상황들이 들어서지만 그 근간은 멜로임이 분명하고, 또 그럴 수밖에 없다(남북문제를 전면에 세우는 건 더 낯설게 될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이것은 <옥탑방 왕세자>가 타임 리프라는 설정과 두 건의 살인사건을 갖고 있으면서도 결국은 이각(박유천)과 박하(한지민)의 멜로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이유와 같다.

 

하지만 <적도의 남자>는 결국 멜로로 귀결되는 두 작품과 비교해 좀 더 진지한 사회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차별점을 가진다. 겉으로 보기에 <더킹 투하츠>나 <옥탑방 왕세자>가 어딘지 비현실적인 느낌을 주는 반면, <적도의 남자>가 보다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건 그 사회적인 지점들이 좀더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적도의 남자>는 시각장애라는 설정을 통해 정의에 눈 먼 사회를 에둘러 보여주었다. 물론 그러면서도 그 안에 복수극과 멜로라는 익숙한 장치를 포기하지 않았다.

 

<더킹 투하츠>가 왕가의 이야기를 다루고, <옥탑방 왕세자>가 재벌가 이야기로 회귀할 때 <적도의 남자>의 선우(엄태웅)는 눈이 먼 채 어두운 방에서 절규하고 있었다. 태생적으로 정해진 두 왕의 이야기와 달리, 이 적도 같은 불모의 바닥에 내쳐졌지만 굴복하지 않고 일어서는 선우의 이야기는 그만큼 대중들에게 작금의 현실을 떠올리게 했는지도 모른다. <적도의 남자>가 두 왕들을 물리친 비결은 바로 이 왕의 판타지보다 강할 수밖에 없었던 <적도의 남자>가 보여주는 지독한 현실 때문이 아니었을까.


사람들은 왜 ‘더 로맨틱’해지지 않을까

'더 로맨틱'(사진출처:tvN)

감미로운 음악, 이국적인 풍경, 달콤한 속삭임, 기적 같은 만남... 도대체 우리를 그토록 로맨틱하게 만드는 건 뭘까. 때론 이성적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행동들을 하고, 현실과는 유리된 사람처럼 실제적인 시공간의 차원을 잠시 떠나버리는 이 로맨틱한 상황들. 그리고 그 안에서 만나게 되는 사랑이라는 감정. 그 놀라운 화학작용은 어떻게 일어나는 걸까. 신개념 러브 리얼리티쇼 tvN의 ‘더 로맨틱’이 흥미로워지는 지점은 바로 이 비현실적으로 여겨지는 반짝반짝 빛나는 순간들이 카메라에 지극히 현실적인 장면으로 담겨질 때다.

터키. 동서양의 문명이 교차하는 곳. 그래서인지 그 오묘한 풍광처럼, 이질적인 두 존재가 만나서 어쩌면 가장 아름다운 합치점을 찾아내기엔 가장 적합한 장소처럼 여겨지는 그런 곳으로 열 명의 남녀가 여행을 떠나는 건 바로 그 우리에게 유일하게 허락된 ‘비현실적 경험’ 즉 로맨틱한 상황을 찾아내기 위함이다. 돈과 삶과 생존과 생계 속에서 마치 없는 것처럼 치부하며 살아왔던 그것. 그래서 때로는 바라보는 것마저 손발이 오그라드는 느낌을 가지게 되었던 바로 그것. ‘더 로맨틱(The Romantic)'을 찾아서.

영화나 드라마 속 로맨틱한 만남의 장면 중 하나를 선택(이른바 ‘취향셔플’로 불린다)하고 같은 선택을 한 이와 똑같은 설정으로 떨리는 첫 만남을 갖게 하는 건 일종의 오리엔테이션인 셈이다. 아마도 서울이라는 생계의 공간에서 살아오면서 그 남녀들은 비행기 안에서의 우연한 만남이나, 낯선 거리에서 서로를 발견하는 경험, 모두가 다른 생각 다른 감정으로 서 있는 곳에서 단 둘만이 온전히 같은 음악으로 연결되는 로맨틱한 체험, 거리에서 전화기 저편에 들려오는 상대방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를 찾아 나섰던 그 설렘 같은 ‘비현실적’인 감정들은 잊고 살아왔을 테니 말이다. 이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로맨틱한 세계로 들어가는 일종의 입구에 영화나 드라마 속 장면이 오리엔테이션처럼 자리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로맨틱을 허용하는 거의 유일한 공간이 바로 이 영화와 드라마라는 반증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것은 과연 그저 비현실적인 것일까. 그래서 영화 속의 또는 드라마 속의 주인공들이 대리해주는 것을 통해 경험할 수밖에 없는 어떤 것일까. 그렇지 않다는 것이 ‘더 로맨틱’이라는 프로그램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다. 누구나 그런 이국적인 공간과 이색적인 시간들 속에 던져지면 갖게 되는 지극히 현실적인 감정. 그것이 바로 ‘더 로맨틱’이다. 잠시 간의 눈 맞춤과 몇 마디의 대화, 그리고 슬쩍 스치는 손끝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로맨틱해지는 그런 존재라는 것. 그러니 왜 당신은 ‘로맨틱’한 감정을 비현실적인 것이라 치부하며 살아가고 있느냐는 것. 한 땀 한 땀 로맨틱한 순간들로 직조된 영상들은 우리에게 그런 질문들을 던진다.

연애와 신혼의 로맨틱한 시간들이 지나고 나면 마치 유통기한 지난 통조림처럼 마음 한 구석에 처박아두었던 그 로맨틱한 감정들을 다시 끄집어내게 만드는 이 놀라운 프로그램의 도발은 그래서 그 자체로 도전적인 위치에 서게 된다. 도대체 누가 현실적인 것만을 강요했는가. 무엇을 위해서 우리는 스스로 그 강요를 몸에 각인시켰던가. 아니 그 누가 이것을 ‘비현실적’인 것이라 치부했던가. 한참을 바라보다보면 ‘나도 저런 경험을 하고 싶다’는 감정이 치솟아 오르고, 그래서 마음 한 구석에 처박아 두었던 그 감정의 상자를 다시 끄집어내 떨리는 마음으로 열게 만드는 그런 경험.

카메라가 우리의 일상 속으로 들어오면서 이전에는 포착될 수 없었던 인생의 찬란한 순간들도 이제는 영상 속에 담겨질 수 있게 되었다. 이 지극히 현실적이고 리얼한 영상이 그래서 가장 비현실적인 것으로 치부되던 ‘로맨틱한 순간들’을 발견하고 끄집어냈다는 것은 놀라운 아이러니다. 그래서 이 비현실적 시공간 속에 놓여진 남녀들의 화학작용이 지극히 현실적인(리얼한) 것이라 여겨질 때 그것은 마치 기적 같은 느낌을 준다. 사람들은 왜 더 로맨틱해질까. 이런 질문을 던지게 하는 것만으로도, 그래서 더 로맨틱한 삶의 가치를 느끼게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의미를 전하는 프로그램, ‘더 로맨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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