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일', 드라마의 상투성과 실제 현실의 충돌

'천일의 약속'(사진출처:SBS)

'천일의 약속(이하 천일)'에서 작중인물들은 대사를 통해 '드라마'를 자주 거론한다. "그런 드라마 주인공 되기는 싫거든." 서연(수애)이 지형(김래원)이 곧 결혼한다는 사실을 듣고 이별을 통보하며 했던 말끝에 '드라마'가 거론된다. 지형의 엄마 강수정(김해숙)도 종종 '드라마'를 언급한다. 드라마에 나오는 그런 시어머니 역할 하기 싫다고 아들 지형에게 말한다. 서연이 다니는 출판사 직원들도 드라마 얘길 하며 그 인물의 현실성에 대해 논하곤 한다. 사실 이 드라마는 대사 속에 '드라마'의 비현실성을 꼬집는 얘기가 너무 많이 들어있다. 아이러니가 아닌가. 드라마가 드라마의 비현실성을 꼬집고 있다는 것이.

이러한 드라마의 상투성을 꼬집는 것은 '천일'의 대사에만 나오는 게 아니다. 작중 인물들은 모두 기존 드라마의 상투성에서 벗어나 있다. 강수정은 우리가 드라마에서 늘 봐왔던 아들을 둔 전형적인 시어머니가 아니다. 그녀는 모든 상황을 어그러뜨리고 결혼을 강행하는 아들 지형의 여자에게 달려가 머리를 쥐어뜯거나, 헤어진다는 전제 하에 위로금(?)조로 돈을 건네거나, 혹은 얼굴에 물을 끼얹으며 "감히 너 까짓 게..."라고 말하는 그런 시어머니가 아니다. 그녀는 결혼은 반대하지만 여성으로서 또 한 인간으로서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서연의 손을 잡아주는 사람이다.

서연 또한 보통의 드라마에서 사랑을 구걸하는 그런 캐릭터가 아니다. 당당하게 강수정 앞에서 또박또박 자신이 처한 상황을 얘기하고는 "제 마음이 어머니 마음과 같습니다"라고 말하는 여자다. 그녀는 오히려 아들을 걱정하고 있는 강수정을 깊이 이해한다. 이 짧은 공감의 순간에 전형적인 드라마 속의 시어머니와 며느리(물론 예비지만) 캐릭터 구도는 깨진다. 관계는 해체되고 대신 남는 건 인간으로서 서로를 이해하는 그 시점이다.

향기(정유미)라는 캐릭터는 이 드라마에서 가장 현실성 없는 캐릭터로 지목되곤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가 드라마 속에서 익히 봐왔던 캐릭터와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의 해바라기였던 지형이 파혼을 선언했을 때, 지형의 여자인 서연을 찾아가 뺨을 올려붙이거나 배신을 곱씹으며 애증으로 복수를 꿈꾸는 그런 전형적인 캐릭터가 아니다. 그녀는 곧 결혼을 한다는 얘기를 할 때조차 지형만을 바라보고, 지형이 만나는 서연을 궁금해한다. 서연이 알츠하이머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심지어 눈물을 흘리며 "오빠가 너무 불쌍하다"고 말한다.

그녀는 자신의 사랑과 지형의 사랑이 닮아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왜 그토록 자신이 지형을 사랑했는가를 이제야 알았다고 말한다. 지형의 아픈 선택에서 자신의 입장이 아니라 지형의 입장을 더 생각하며 공감하는 그 지점에서 향기라는 캐릭터는 기존 상투적인 캐릭터를 벗어난다. 향기는 심지어 "그분한테 기적이 일어나라고 매일 기도"하는 인물이다. 이것은 기존 드라마에 대한 도발이다. 늘 설정된 캐릭터 속에서 일어날 일이 반복되며 일어나는 그저 그런 드라마에 대한 도전 말이다.

강수정과 향기 같은 사람이 어디 있겠냐고들 말한다. 그래서 비현실적이라고 한다. 심지어는 캐릭터가 '비정상적'이라고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이들도 있다. 그런데 과연 정말 우리 주변에는 강수정과 향기 같은 사람이 없을까. 그렇게 인간적인 한계를 넘어서 아름다운 선택을 하는 이들을 과연 비정상이라고 부르는 게 합당한 일일까. 혹 이것은 드라마의 그저 그런 똑같은 상투적인 캐릭터들이 우리에게 똑같은 선택을 정당화하고 학습시킨 건 아닐까. 혹 그것도 아니라면 적어도 드라마에서라면 "저런 인물은 저렇게 행동해야 현실적"이라고 우리 스스로 금을 그어놓고 있었던 건 아닐까.

'천일'이 그리고 있는 풍경은 분명 낯설다. 그 소재와 설정은 지극히 일상적이고 심지어 상투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것이 분명한데, 그래서 쉽게 다음 상황을 예측하고 기대하게 만드는데, 이 놈의 드라마는 그 기대를 비웃기라도 하듯 계속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천일'은 그래서 김수현 작가가 지독히도 일상적이고 상투적인 드라마의 틀을 갖고 와서, 오히려 그 상투성과 한바탕 전쟁을 치르는 드라마처럼 보인다. 멜로는 늘 그렇게 결정된 결혼이 목적이 되어야만 하는 것일까. 멜로의 차원을 넘어서 인간의 차원으로 바라보는 멜로드라마 한 편쯤 괜찮은 것이 아닐까. 김수현 작가는 아마도 이 작품을 통해 상투적인 드라마들과, 그것들이 학습시킨 상투화된 사고방식과 전쟁을 벌이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이킥', 짧은 다리로 어떻게 역습이 가능할까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사진출처:MBC)

'하이킥' 시리즈는 2006년부터 2011년 현재까지 방영되며 당대의 현실을 그린다. 시트콤이 시추에이션 코미디라는 점을 상기해보면 왜 현실과 무관하지 않은 지를 눈치 챌 것이다. 시트콤이 만들어내는 상황에 대한 공감은 당대 현실과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은 과거의 하이킥 시리즈들과 비교해 어떤 현실의 풍경을 그리고 있을까.

먼저 제목을 보자. '거침없이 하이킥(2006)', '지붕뚫고 하이킥(2009)',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2011)'. 어떤 차이가 느껴지는가. '하이킥'이란 동작은 밑에서 위로 낮은 자가 높은 자를 차는 행위다. 즉 이것은 밑에서 위로 이루어지는 '수직적인' 행위다. 즉 '하이킥'이라는 시트콤의 기본 바탕은 이 수직적인 사회가 갖고 있는 권위나 계층적이고 세대적인 갈등을 깔고 있다는 얘기다.

그래서 '하이킥'의 캐릭터 설정은 이 수직적인 체계를 통해 시트콤이 만들어내는 웃음의 방식을 잘 설명해준다. '거침없이 하이킥'과 '지붕뚫고 하이킥'에는 이른바 기성세대를 대변하는 이순재나 나문희, 그리고 김자옥 같은 캐릭터가 있었다. 그들을 거기 세워둔 이유는 분명하다. 이 가부장적인 수직적 체계의 캐릭터를 세워두고 그 권위를 깎아내리거나 무너뜨림으로써 웃음을 만들기 위함이다. '야동순재'는 바로 이 수직적 체계를 무너뜨리는 웃음의 코드에서 탄생한 것이다.

그런데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에는 딱히 권위라고 할 수 있는 기성세대가 등장하지 않는다. 안내상이나 윤유선이 연장자로 등장하기는 하지만 시트콤 내에서 어떤 권위를 대변하는 인물은 아니다. 안내상이 어느 날 갑자기 주눅이 들기 시작하면서 윤계상의 눈치를 보고 가장의 자리를 버거워하고 쪼그라드는 모습에서는 그 어떤 권위를 발견하기가 어렵다. 대신 안내상이라는 캐릭터가 보여주는 건 궁상 그 자체다. 이 시트콤에서 안내상은 청년백수 백진희와 거의 비슷한 수평적인 위치에 서 있다.

과거 수직적인 체계에 대한 조롱이나 해체를 다루던 시기의 '하이킥'은 그래도 어떤 희망이 엿보였다. 적어도 그 동작이 '거침없었고', 심지어 '지붕을 뚫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이제 우리가 처한 현실은 저 위를 바라보는 것조차 버거운 현실이다. 적어도 위를 바라볼 수 있는 여유는 바로 눈앞에 도래하는 하루하루를 생존해야 하는 현실 속에서 사라져버렸다. 게다가 이러한 현실은 태생적으로 고착된다는 점에서 더 비극적이다. '짧은 다리'라는 태생적 한계는 제 아무리 하이킥을 날리려 해도 당도하지 않는 비극적 현실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래서 이 우울한 시트콤이 다루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위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현실이 힘들어도 저 위를 바라보며 희망하던 시절이 지나고, 이제 '짧은 다리'들이 서로 살아남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이 현실 속에 우리는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의 캐릭터 구성은 수직적인 체계가 아니라 수평적으로 펼쳐져 있다. 고만고만한 캐릭터들이 양적으로도 더 많이 포진하고 있는 건 그런 이유다. 그들은 상승을 꿈꾸기보다는 하루하루 교사생활을 버티며 그저 그런 고시생 남자친구와 만나면서 그럭저럭 부딪치며 살아내고 있을 뿐이다.

그래도 유일하게 이 우울한 세계에서 하나의 희망을 만들어주는 건 바로 '땅굴'로 표상되는 일종의 소통체계다. 한없이 바닥을 치고 결국은 땅굴로 주저앉은 그들이 그 밑바닥에서 서로와 서로를 연결시키는 이 밑그림은 처절하지만 '짧은 다리'들이 역습을 꿈꿀 수 있는 유일한 길처럼 여겨진다. 마치 출구 없는 청춘들이 네트워크를 통해 묶여지고 연대하고 있는 것처럼. 그래서 때로는 '짧은 다리의 역습'이라는 이 우울한 제목의 의미를 중의적으로 읽고 싶어진다. 다리가 발을 뜻하는 게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하는 그 다리였으면 하는 생각. 그것이 비록 짧게 느껴지더라도 그 수평적인 연결고리들이, 이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듯 구축되어 있는 저들만의 수직적인 세상을 지반으로부터 무너뜨릴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

지붕 뚫던 '하이킥', 바닥 뚫은 이유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사진출처:MBC)

먼저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이라는 이 시트콤의 화자가 이적이라는 점을 생각해보자. 그는 대장항문과 의사로 줄곧 항문만 바라보면서 살아온 인물. 이 설정은 이 시트콤의 냉소적이고 풍자적인 시각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때론 더럽고 때론 힘겨운 현실을 마치 항문을 들여다보듯 보고 있다는 얘기다. 얼마나 기가 막힌 시점인가! 아마도 작가는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현실을 바라보는 것이 항문을 바라보듯 지독한 구석이 있다고 여기는 것 같다.

극 초반에 주목된 두 캐릭터, 백진희와 안내상은 이 현실을 잘 말해주는 캐릭터다. 대학을 나와도 취직이 되지 않는 청년백수에, 등록금 때문에 진 빚에 허덕이며 고시원을 전전하는 백진희는 이 시대 암울한 청춘의 자화상이다. 그녀의 악몽 같은 현실은 꿈에서조차 잊혀지지 않는다. 꿈속에서 윤계상이 면접관으로 나와 그녀를 면접하는 '취집시험(취업+시집)'은 여성들에게 있어서 두 가지 로망인 일과 사랑, 그 무엇에서도(이 둘은 사실 연결되어 있다) 철저히 루저가 되어버린 청춘의 한 단상을 그려낸다.

백진희가 이 시대 청춘들의 힘겨운 자화상이라면, 안내상은 이 시대 가장들의 힘겨운 자화상이다. 친구의 야반도주로 하루아침에 파산해버린 그는 말 그대로 집도 절도 없는 홈리스가 되어버린다. 그래서 처남인 윤계상 집에 얹혀살면서도 여전히 반찬 투정을 하는 옛 삶에 머물러 있다. 그의 자화상이 비극적인 것은 그가 왜 파산했고 왜 그런 처지에 있게 되었느냐는 이유 때문이 아니다. 그의 비극은 그런 처지에 있으면서도 그가 아무런 변화나 노력을 시도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는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다. 이 시대에 갑자기 권위를 잃어버린 가장들처럼.

물론 그렇게 각박한 세상에 각박한 인물들만 있는 건 아니다. 박하선과 윤계상은 이 시트콤에서 천사표 캐릭터다. 그런데 이 시트콤이 바라보는 이들 천사표들은 착하기는 하지만, 그래서 늘 당하는 존재거나, 아예 현실을 잘 모르는 존재다. 박하선이 그 착한 캐릭터로 이 시트콤에서 웃음을 주는 방식은 한없이 망가지는 것이다. 그녀는 선의로 한 일이지만 세상은 그런 그녀를 눈물짓게 만든다. 윤계상은 물론 망가지는 캐릭터는 아니지만, 현실과 유리되어 있는 인물이다. 착하지만 그는 현실에 대한 실제적인 이해가 부족하다. 그래서 어떤 상황에서는 '웃으면서 회 뜨는' 모습을 보이곤 한다. 이 각박한 현실이 그저 '착하게 산다'는 것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보여주는 캐릭터들이다.

'거침없이 하이킥'에서 이순재는 한방병원 원장이었고, '지붕 뚫고 하이킥'에서 이순재는 학교에 급식을 납품하는 중소기업 사장이었다. 어느 정도 잘 사는 가족이 이 시트콤들의 배경이었던 것. 물론 힘겨운 현실을 반영한 캐릭터가 없었던 건 아니다. '거침없이 하이킥'에서는 빈둥빈둥 백수가 되어버린 가장 이준하(정준하)가 등장하고, '지붕 뚫고 하이킥'에서는 이순재네 집에 더부살이로 들어온 신세경과 신신애(서신애) 자매가 등장한다. 하지만 이들 두 시트콤에서는 이렇게 어려운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끌어안는 가족애 같은 것이 바탕에 깔려 있었다.

하지만 애초부터 집을 잃고 길바닥에 나 앉게 된 안내상네 가족이나 청년 실업으로 오갈 데 없는 백진희를 안아주는 건 그런 가족이 아니다. 그들은 현실상황에 의해 파탄 나버린 채, 너무 착하거나 현실을 너무도 모르는 박하선 혹은 윤계상의 집에서 불안한 더부살이를 해나간다. '거침없이 하이킥'이나 '지붕 뚫고 하이킥'의 인물들이 그래도 여전히 성장을 꿈꾸는(때로는 신데렐라를) 상승하는 캐릭터들이었다면,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의 인물들은 현실에 짓눌려 한없이 바닥으로 하강하는 캐릭터들이다.

도대체 무엇이 달라진 걸까. 한때는 거침없었고, 한때는 지붕을 뚫던 '하이킥'은 왜 바닥을 뚫기 시작한 걸까. 빚쟁이들에게 몰려 우연히 발견된 지하 땅굴이라는 특이한 공간은 지금의 '하이킥'이 바라보는 지독한 현실을 그대로 상징한다. 기껏 탈출구라고 뚫은 것이 옆집 화장실이었다는 시퀀스 역시 이들의 우습지만 웃을 수만은 없는 상황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이런 절망감뿐일까. 바로 그 바닥을 뚫고 들어간 지하 땅굴이 그동안 소통되지 않던 힘겨운 자들을 연결해주는 소통의 장이 되고, 때로는 '실크로드'가 되는 장면은 이 시트콤의 작은 희망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물론 그 짧은 다리의 역습은 현실적이지 않은 판타지가 되거나, 지극히 현실적인 비극이 될 수도 있겠지만.


 '보스', 속이라도 시원하게 풀어보자

'보스를 지켜라'(사진출처:SBS)

이것은 현실에서는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C그룹 회장 아들 지헌(지성)이 취업을 못해 전전긍긍하다 간신히 비서로 들어온 노은설(최강희)을 졸졸 쫓아다니는 일. 그러면서 "난 네가 좋다"는 간지러운 말을 입에 달고 다니는 짓. 그런데 노은설을 좋아하는 건 지헌만이 아니다. 지헌의 사촌인 C그룹 실세 본부장인 무원(김재중)도 그녀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노은설은 거꾸로 어느 쪽을 선택했을 때 다른 한쪽이 상처 입을 것을 걱정한다. 이 신데렐라가 거꾸로 왕자를 거느리는 이야기에 비하면 진짜 신데렐라 이야기는 판타지 축에도 못 끼는 셈이다.

결혼에 대한 양가의 반응 역시 보통의 드라마들과는 정반대의 양상을 보여준다. 즉 재벌가 자제와의 결혼이라면 응당 그쪽에서 집안이니 학력이니 등을 내세워 반대하기 일쑤지만, 이 드라마에서는 노은설의 아버지 노봉만(정규수)이 지헌의 아버지인 차회장(박영규)을 찾아와 "결혼을 허락할 수 없다"고 선언한다. 노봉만은 자칭 무림고수라고 하지만 현실적으로 보면 사회부적응자에 가깝다. 그런 그가 차회장에게 으름장을 놓는 장면은 어딘지 속 시원한 구석이 있다. 이른바 스펙사회에 대한 신랄한 풍자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차회장이 처음 아들인 지헌과 노은설의 교제를 허락하지 않는 장면도 기존 전형적인 멜로드라마와는 다르다. 차회장은 노은설에게 안타까운 마음을 담아 "그러니 좀 잘 나지 그랬어!"하고 말한다. 이 말 속에는 마음으로는 반대하지 않지만 기업 후계자의 배우자로서 맞닥뜨릴 수 있는 주주들의 반발에 안타까워하는 속내가 들어있다. 즉 교제 반대를 얘기하는 이 장면 속에서마저 은근한 스펙사회에 대한 비판이 들어있는 셈이다.

남녀 간의 사랑에 늘 등장하기 마련인 경쟁자로서 서나윤(왕지혜)의 모습도 기존 드라마들과는 다르다. 그저 안하무인격의 재벌가 딸내미가 아니라 심지어 귀엽기까지 한 모습은 그녀가 과연 사랑의 라이벌이 맞나 싶을 정도다. 가출한 그녀가 노은설의 집에 얹혀사는 설정 역시 전혀 현실성은 없지만 보는 이들을 즐겁게 만든다.

이것은 기존 신분상승의 판타지를 그리던 신데렐라 이야기를 완벽하게 뒤집어놓은 것이다. 노은설이 말하는 것처럼, 이 땅에는 두 개의 세계(빈부로 나눠지는 계층)가 있는데 기존 드라마들이 재벌집 왕자님들에 의해 신데렐라가 구원(?)받는 판타지를 그렸다면, 이 드라마는 거꾸로 아무 것도 없지만 마음이 건강한 신데렐라에 의해 재벌가 사람들(왕자님은 물론이고 그 아버지, 주변 사람들까지 모두)이 구원받는 이야기다. 노은설이 그쪽 세계가 부담된다며 이곳에 남겠다고 하자, 지헌은 "내가 그쪽으로 갈께"하고 말하고, 무원은 "이쪽을 당신이 올 수 있게 바꿔놓겠다"고 말한다.

물론 어디 현실에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현실은 노은설이 늘 떠들고 다니던 것처럼 '정직원, 파격승진, 월급인상'이 샐러리맨들의 로망일 것이다. 하지만 '보스를 지켜라'는 마음껏 상상해보기로 작정한 듯하다. 세상을 한껏 뒤집어보기도 하고, 그렇게 돈과 권세로 위세 떨며 군림하던 이들을 '서민의 힘'으로 쥐락펴락하고픈 것이다. 스펙 사회로 태어날 때부터 낙인찍혀 살아가는 답답한 세상에 속이라도 시원하게 풀어보자는 것이다.

"아주 볼수록 물건이네 이거." 가끔씩 차회장은 노은설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리고 그 표정에는 '정말 대견하다'는 애정이 듬뿍 들어있다. 차회장의 그런 모습은 이상적인 기업인의 판타지를 만들어낸다. 대외적으로는 조폭회장으로 불리지만 속내는 한없이 정이 많고 특히 자식사랑에 있어서만큼은 보통사람과 전혀 다를 바 없는 부정을 드러내는 인물. 그리고 무엇보다 스펙이 아니라 그저 사람 됨됨이를 통해 '물건'을 알아보는 인물. 그런 판타지는 현실이 되지 못하는 걸까. 이 드라마가 '볼수록 물건'처럼 보이는 이유는 적어도 이런 세상 사람들의 답답한 소회를 제대로 꿰뚫어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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