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체될수록 강해지는 인과관계에 대한 욕망

'인셉션'을 만든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아마도 에셔의 그림들 혹은 영화 속에도 나오는 '펜로즈의 계단'에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이 틀림없다. 에셔의 그림들을 한참 쳐다보고 있으면 갖게되는 느낌들, 즉 어느 것이 진짜이고 어느 것이 가짜인가가 불분명해지는 그 경계가 주는 순간적인 당혹감과 해방감을 이 영화는 잘 끄집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펜로즈의 계단'이 상승과 하강이라는 흐름을 무화시켜버렸듯이, '인셉션'이라는 영화는 꿈과 현실이라는 경계를 해체시킨다.

영화가 보여주는 장면들이나 진행되는 방식이 굉장히 복잡하게 느껴지지만, 사실 이 영화의 스토리는 그다지 복잡하지 않다. 누군가의 꿈 속으로 들어가 그 머릿 속에 숨겨진 사실을 끄집어내는 일을 하는 코브(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과거의 어떤 사건 때문에 현상수배되어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데, 부호이자 영향력이 있는 사이토(와타나베 켄)가 나타나 그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한다. 피셔(킬리언 머피)의 머릿속에 생각을 심어준다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주겠다는 것. 그래서 코브는 팀을 짜서 피셔의 꿈 속으로 들어가는데 무의식에 의해 쉽게 발각되지 않기 위해 꿈 속의 꿈으로 몇 단계를 더 들어간다.

꿈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꿈이 가능하게 하는 그 비논리성은 어떤 해방감을 주면서도 보는 이를 혼동에 빠뜨린다. 게다가 단순히 꿈 하나로 침투해 들어가는 게 아니라, 꿈 속의 꿈을 무려 다섯 단계나 들어가기 때문에 이야기는 더 복잡해진다. 첫 번째 단계인 현실에서 두 번째 단계인 꿈으로 들어가 밴을 타고 총격전을 벌이고, 그 과정에서 다시 세 번째 단계의 꿈 속 배경인 호텔로 들어간다. 그리고 거기서도 또 다시 네 번째 단계의 꿈인 눈 속의 요새로 들어가고 마지막 다섯 번째 단계인 림보(무의식의 밑바닥)까지 들어가는 이 일련의 과정은 그 액션과 일련의 놀라운 장면들의 연속으로 지루할 틈을 주지 않지만 그러면서도 마치 저 '펜로즈의 계단'을 눈으로 좇는 것처럼 혼동을 준다.

한참 꿈의 꿈 속으로 계속 파고들어가다 보면 도대체 어느 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파악하기 어려운 상태에까지 이르게 된다. 현실과 꿈을 혼동하게 될 즈음, 그것의 진위를 알려줄 수 있는 유일한 장치는 토템이다. 팽이처럼 생긴 코브의 토템은 그것을 돌렸을 때 만일 꿈이라면 영원히 멈추지 않고 돌아간다. 꿈이라는 자유자재의 상상력의 공간 속을 활보하면서도 이 영화가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혹 이것이 현실이 아니고 꿈이면 어떡하지?'하는 그 두려움 속에서 인물들은 임무를 수행해나가고 저마다 현실로 빠져나오기 위한 안간힘을 쓴다. 이른바 '킥(꿈 속에서 깨어나게 하는 장치)'의 시간에 몰두하게 되는 것. 킥은 아리아드네(영화 속 꿈의 설계자의 이름이 아리아드네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의 실타래처럼 이 꿈의 미로에서 벗어나기 위해 반드시 쥐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 꿈과 현실을 구분하려는 욕망은 영화 속 인물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런 인물들의 이야기를 바라보는 관객의 입장 역시 어떤 것이 현실이고 어떤 것이 꿈인지가 명확했으면 하는 욕망으로 이 영화를 바라본다. 영화는 꿈이 가진 공간의 힘으로 인과관계들을 마구 뒤섞어놓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그걸 바라보는 관객의 앞뒤 전후 사정을 엮어놓으려는 욕망은 더욱 커진다. 전단계의 꿈에서 보았던 작은 오브제는 다음 꿈에서 다른 형태로 나타나는데, 거기에 대해 영화가 아무런 부연설명을 하지 않더라도 관객들은 자동적으로 그것을 연결해서 생각하게 된다.

정교한 논리적 장치로 해체된 만큼의 인과관계를 관객들이 스스로 연결하려는 욕망에 시달리다 보면 어느새 영화의 마지막 순간에 도달하게 된다. 그리고 그 부분에서 명확해졌다고 생각되는 인과관계, 꿈과 현실은 다시 오리무중 상태로 바뀐다. 꿈과 현실을 알려줄 토템 팽이가 그 진위를 알려주지 못하고 돌아가는 상태로 영화가 끝나버리기 때문에 관객들은 끊임없이 이 놀란 감독이 구축해놓은 '펜로즈의 계단'을 순환해서 뱅뱅 돌며 꿈과 현실에 대한 나름의 해석들을 내놓을 수밖에 없다.

이것은 '인셉션'이라는 영화만이 가진 관객을 끌어들이는 독특하면서도 강력한 매력이 된다. 마치 'A특공대'나 '매트릭스'를 보는 것 같은 장르적 재미가 그 재미의 근간을 만들어내면서도, 그 위에 꿈과 현실을 혼동시킴으로서 만들어낸 복잡한 인과관계는 관객으로 하여금 결과에 맞는 원인을 찾아다니게 만든다. 그만큼 우리 생각이 가진 인과관계의 욕망이 크다는 이야기다. 논리에 맞지 않는 장면이나 그림이 등장했을 때, 그 당혹스러움을 우리는 나름의 인과관계의 고리로 묶는다. 호텔 장면에서 무중력 상태로 액션을 벌이는 비논리적인 장면을 보면서 '아 그래 저건 전 단계의 꿈에서 지금 밴이 다리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그 상태이기 때문이야'하고 생각하듯이.

하지만 어디 세상의 모든 일들이 어찌 인과관계로 엮여져 있을까. 영화를 보러 가기 전 누군가는 갑자기 도로 한 가운데서 벌어진 자동차 사고를 목격했을 수도 있다. 그 충격적인 사건과 영화를 보는 일에는 아무런 연관관계가 없다. 그저 벌어진 사건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본능적으로 이 두 각각의 사건을 엮어 하나의 이야기로 구성하려는 욕망을 갖게 된다. 이것은 수많은 컷들과 신으로 사실은 툭툭 끊어져 있는 필름들이 하나로 편집되어 이야기를 구성하는 영화라는 장치의 가장 근원적인 작동원리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보면 놀란 감독은 바로 이 점 영화가 가진 작동원리를 영화적인 문법을 가지고 뒤집는 시도를 한 것이다. 마치 에셔가 그린 '펜로즈의 계단'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 시도의 완성자는 놀란이 아니고 관객이다. 관객은 이 혼동의 영화 속으로 들어가 영화가 논리로서 오히려 해체해놓은 환상적인 장면들에 당혹스러워 하면서도, 영화를 보러온 자로서 익숙한 인과관계 엮기의 노력을 통해 오히려 꿈과 현실을 구분하려는 노력 자체가 무위에 이른다는 것을 알게 된다. 즉 누군가 바라보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이 '인셉션'이라는 내적 논리의 세계는, 그걸 바라본 관객들에 의해 비로소 완성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복잡한 영화(사실은 복잡해 보이는)에 이토록 많은 관객이 든 것은 바로 이런 이 영화만의 독특한 작동방식 때문이다. 우리는 영화를 보며 놀라운 장면에 당혹스러워하고, 그 당혹스러움을 넘어서기 위해 끊임없이 인과관계를 스스로 만들어내다가, 어느 순간 그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고 극장을 나서게 된다. 만일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자신이 들어왔던 그 극장의 분위기가 어딘지 낯설게 여겨졌다면 그것은 바로 이 에셔의 그림처럼 뱅뱅 도는 ‘인셉션’이라는 영화의 의도가 제대로 먹혔다는 반증일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장황한 이 글 역시 그 의도대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더러운 세상, '제중원'과 '추노'의 동상이몽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박성광이 개그콘서트에서 외친 이 말은 이제 유행어가 됐다. 반 농담처럼 앞에 각자의 답답한 심사를 수식어로 붙이고 "~하는 더러운 세상!"이라 말하면 빵빵 터지는 세상이다. 그 실체가 무엇인지 저마다 다르겠지만 이 유행어는 작금의 세상에 대한 불만, 특히 힘 있는 자는 잘되고 힘 없는 자는 안되는, 잘 사는 사람은 더 잘 살고 못 사는 사람은 더 못 사는, 게다가 이것이 태생적으로 결정되고, 빈부에 따른 교육에 의해 확정되는 세상에 대한 불만을 담아낸다.

올 초부터 일련의 사극들이 저마다 천민의 삶에 집중하면서 어떤 문제제기를 하고 있는 것이 우연이 아닌 것처럼 여겨지는 것은, 작금의 세상이 점점 벌어지는 '삶의 격차'에 대해 그만큼 민감해져 있음을 실감하기 때문일 것이다. '제중원'이 구한말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고, '추노'가 병자호란 이후의 극심한 혼란기를 배경으로 하는 이유는 그 시기가 모두 신분의 격변기였기 때문이다. '제중원'은 천민 백정으로 한계 지워지는 더러운 세상에 태어나 의사가 되는 신분 상승의 사극이며, '추노'는 반대로 천민으로 전락한 자들이 '더러운 세상'과 저마다 부딪치는 사극이다. '제중원'이 긍정의 드라마라면, '추노'는 부정의 드라마다.

'제중원'은 백정과 양반이 다른 동네에서 살아가는 조선사회에 선교사 알렌을 등장시켜, 양반 백정이 똑같은 의생의 제복을 입고 의학을 공부할 수 있는 제중원이라는 공간을 만들어낸다. 이것은 변화의 가능성이다. 이미 왕은 서양 문물에 호의적이며 어떤 면에서는 이 계급사회가 변화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모습을 보인다. 석란(한혜진)에게 "정진하라"고 왕이 말하는 장면은 조선사회에서 여성에게까지 사회적으로 쓸모 있는 일을 권장한다는 측면에서 파격적이다.

이미 '제중원'이 그리는 시대는 양반 상놈의 계급 구조가 흔들리고 있었고, 중인으로서 역관인 유희서(김갑수) 같은 인물이 왕과 독대하는 시대였다. 따라서 이 백정이 의사가 되는 성장과정에 주목하는 '제중원'이, 성장 또한 태생이나 배경으로 결정되어버리는 작금의 상황에 어떤 판타지를 제공한다는 것은 놀라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시대는 어쩌면 거꾸로 흘러 왔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좀 더 그 이전의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추노'로 가면 천민이 양반이 되는 성장의 판타지 따위는 사라진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우는 건 수 세기의 세월을 건너왔지만 또다시 마주하게 되는 절망적인 현실이다. "사극은 과거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그리는 것"이라고 말한 것처럼, 곽정환 감독은 '추노'라는 수 세기 전에 벌어졌음직한 이야기 모티브를 통해 작금의 상황을 다차원적으로 들여다본다. 그것을 쳐다보고 있는 것은 잔혹한 현실을 바라보는 것만큼 힘겹다.

송태하(오지호)와 이대길(장혁)이 서로 칼과 주먹을 휘두르며 싸우는 장면은 이 사극이 가진 비극성을 잘 드러내준다. 송태하는 "왕을 바꾸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꾸려는 것"이라는 소신을 갖고 있는 인물이며, 이대길은 한 때 종이었던 혜원(이다해)을 사랑하며 "함께 살 수 있는 세상"을 꿈 꿨던 인물이다. 하지만 송태하는 혜원이 종이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정도로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아직까지 잘 모르고 있으며, 이대길은 절망 속에서 그 꿈을 묻어둔 지 오래다. 그러니 그들은 정작 자신이 칼을 겨눠야 할 장본인을 찾지 못한다. 이대길이 송태하를 잡아오고, 그런 이대길을 이경식(김응수)이 다시 잡아들이는 설정은 토사구팽의 전형을 보여준다. 토끼와 사냥개는 어쩌면 같은 옥사에서 자신들이 싸워야 될 공통의 적, 즉 사냥꾼을 찾게 될 지도 모른다.

송태하와 이대길이 전락한 위치에서 자신들의 적을 바라보지 못하고 있을 때, 그 명확한 적을 보여주는 인물들은 상놈의 세상을 만든다는 취지로 모인 노비들의 모임이다. 그들은 업복이(공형진)를 저격수로 세워 '더러운 세상'을 만들어낸 양반놈들을 저격한다. 그런데 여기서 업복이의 의구심은 이 사극이 단지 '세상을 전복하는 낭만적인 혁명의 판타지'를 꿈꾸지는 않는다는 것을 말해준다. 업복이(공형진)는 초복이(민지아)와 함께 밤길을 걸으며 묻는다. "양반 상놈이 뒤집어지는 세상보다 양반 상놈 없는 세상이 더 나은 것 아니냐"고.

업복의 말은 이상적이지만 그것이 어찌 쉬울까. 그 말에 초복은 "그것도 좋지만 그 전에 (자신과 가족이 당했던) 복수는 하고 싶다"고 말한다. 이것은 감정을 가진 인간이면 어쩔 수 없이 갖게 되는 마음일 것이다. 혁명이 어려운 것은 뜻을 모으는 것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그렇게 모인 뜻에 인간의 감정과 욕망이 뒤섞이기 때문이라고 '추노'는 말하는 듯 하다.

가까운 과거를 다루는 '제중원'에서 판타지를 느끼고, 더 먼 과거를 다루는 '추노'에서 오히려 작금의 현실을 느끼는 상황은 어딘지 잘못되어 있다. 그것은 마치 세상은 점점 나아지지 않고, 그대로이거나 악화되고 있고, 그래서 더더욱 판타지에 열광하게 되는 '역행하는 시대'를 거기서 발견하기 때문이다.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젊은 세대들에게 G세대라고 일컬으며 그 영광의 판타지를 일반화하는 동안, 한편에서는 여전히 취업의 문 앞에서 좌절하고, 그 문 안에서도 88만원의 비정규직으로 살얼음판을 걸어가야 하는, 이 시대에도 여전히 천민 취급 받는 세대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아결녀'와 '섹스 앤 더 시티'

'섹스 앤 더 시티'를 보며 우리는 무엇에 열광했을까. 그녀들의 일과 사랑에 대한 절절한 공감일까. 아니면 뉴욕이라는 먼 거리에 있는 도시공간이 제공하는 로맨틱한 판타지일까. 아마도 후자에 가까울 것이다. 뉴욕은 서울이라는 현실공간이 갖지 못하는 판타지를 준다. 화려하고 세련된 패션과, 파티와, 모닝 커피와 브런치. 그리고 당당한 여성들의 일자리와 능력있는 남자들과의 로맨스. 물론 그것은 완전한 현실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이역만리에서 매일매일 일과 결혼에 부대끼며 살아가는 이 땅의 여성들에게는 선망의 공간이다.

'아직도 결혼하고 싶은 여자(이하 아결녀)'는 '섹스 앤 더 시티'의 한국판이다. 서른 네 살의 전문직에 종사하는 노처녀 셋이 일과 사랑 사이에서 좌충우돌하는 드라마. 거기에는 방송국 기자라는 선망의 직업을 가졌지만, 나이든 여자라는 이유로 퇴출 일순위로 몰리는 이신영(박진희)이 있고, 동시통역사로서 세계를 비행하며 능력을 보이지만 늘 남자에게 채이는 정다정(엄지원)이 있으며, 한 때 한 남자의 뒷바라지만을 하며 살아오다 문득 자기 자신을 위한 삶으로 선회한 김부기(왕빛나)가 있다.

그녀들은 겉으로 바라보면 저 '섹스 앤 더 시티'의 주인공들처럼 어떤 판타지적인 동경의 대상들이다. 그들은 이미 전문직종에서 뛰고 있는 인물들이고, 그녀들의 라이프 스타일, 즉 패션이나 파티문화, 멋진 음식들 같은 것들은 보는 이를 충분히 설레게 만든다. 그녀들은 서른 네 살이라는 나이의 미혼이라는 사실이 외롭고 힘겨운 것처럼 얘기하지만, 그것은 어찌 보면 여유 있는 삶 속에서 여전히 로맨스를 꿈꾸는 배부른 소리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녀들은 남자를 만나 결혼하고 싶어 하지만 서른 네 살이라는 나이와 오히려 전문직 종사자라는 점이 그것을 방해한다고 말한다. 또래의 미혼 남자라면 능력 있는 나이 많은 커리어우먼보다는 그저 평범해도 더 젊은 여자를 원하기 마련이라고 이 드라마는 말한다. 게다가 그 나이까지 버텨온 캐리어우먼의 직장생활이 그다지 순탄한 것도 아니다. 그러니 이 여성들은 자신들의 삶이 힘겹다고 토로한다.

여기에는 이 드라마가 가진 현실과 판타지 사이의 거리감이 존재한다. 보여지는 삶은 판타지인데, 그녀들은 현실이 힘겹다고 말한다. 도대체 왜 이런 거리가 생겨나는 걸까. 이것은 우리가 '섹스 앤 더 시티'를 바라보는 그 마음과 일치한다. 어쩜 저렇게 살아갈 수 있을까, 하고 동경하는 마음. 그리고 그 마음 한 구석에 그 판타지를 몰아내는 자신이 서 있는 서울이라는 현실 공간의 힘겨움. 뉴욕의 로맨스를 꿈꾸지만 부모들의 차가운 눈 아래 어쨌든 결정해야 하는 이 땅의 결혼이라는 현실.

그런데 이 드라마는 안타깝게도 배경이 뉴욕이 아니다. 바로 현실 공간 서울이 그 배경이다. 그러니 그녀들이 꿈꾸는 판타지는 현실이라는 무게감에 짓눌릴 수밖에 없다. '아결녀'는 일과 사랑 사이에 서서 현실과 판타지를 오가는 드라마지만, 뉴욕만큼의 거리를 둘 수 없는 한계 때문에 그 판타지에 쉽게 빠져들기 어렵다. 그래서 현실을 자꾸 떠올리다 보면, 심지어 '아결녀'의 전문직 여성들이 힘겹다고 토로하는 부분이 엄살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어쨌든 그녀들은 일에서 성공한 여성들이고, 그녀들 주변에는 여전히 한의사, 파일럿, 가수같은 직업을 가진 잘난 남자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그래서 아마도 아직 결혼은 못했지만 결혼을 꿈꾼다는 의미의 이 '아직도 결혼하고 싶은 여자'라는 제목은 몇 가지 다른 뉘앙스로도 읽힌다. '아직도 결혼하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인 여자', 혹은 '그렇게 성공했는데도 아직도 결혼이라는 걸 굳이 하고 싶어하는 여자'.

이처럼 '아결녀'는 깊이 현실을 생각하면서 바라보면 공감하기가 어렵지만, 그저 하나의 판타지로서 바라보면 꽤 괜찮은 재미를 선사하는 드라마다. 문제는 작금의 취업난이나 정리해고 같은 직장의 현실이 너무 첨예해 언뜻 언뜻 그 판타지 속에서도 자꾸만 현실을 떠올리게 된다는 점이다. 하지만 바로 이런 현실과 판타지 사이의 거리가 바로 우리네 성공한 커리어우먼들이 갖는 그대로의 현실일지도 모른다. 능력 있고 당당한 그녀들은 뉴욕의 삶을 꿈꾸지만 여전히 결혼이라는 틀 속에 가둬두는 현실.

현실+판타지+실용 > 논란

‘공부의 신’이 가진 현 교육제도에 대한 태도는 많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천하대(사실상 서울대의 다른 말이나 마찬가지다)를 가기 위해 만들어진 특별반은 전형적인 우리네 교육 정책의 엘리트주의를 그대로 답습한다. 특별반에 들어온 네 명의 아이들은 그래도 선택받은 아이들이지만 나머지 병문고 아이들은 거꾸로 버려진 아이들과 마찬가지다. 물론 천하대 특별반을 만드는 강석호(김수로) 변호사는, 늘 그 엘리트들이 만들어놓은 룰 속에서 패배자로 남지 않고 그것을 넘어서 룰을 바꾸기 위해서 천하대에 가야한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을 위해 엘리트 교육 시스템을 답습하는 것은 아이러니다.

또한 ‘학문이나 기술을 배우고 익힘’이라는 본래의 뜻을 갖고 있는 ‘공부’라는 말이 이 드라마가 내세우고 있는 ‘공부의 신’과 잘 어울리는지도 의문이다. 항간에는 ‘공부의 신’이 아니라 ‘입시의 신’이 더 맞는 표현이라는 비아냥도 있다. 실제로 이 드라마에서는 학문이나 기술을 배우고 익히는 것을 보여주기 보다는 입시를 위한 문제풀기의 방법을 익히는 과정을 주로 보여준다. 문제풀기와 실제 배움에는 큰 차이가 존재한다.

그렇다면 이런 논란거리들에서 자유롭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이 드라마가 대중들의 열렬한 지지를 얻는 이유는 뭘까. 그것은 거꾸로 현실에서 찾아진다. 아마 드라마가 우리네 교육 현실을 실감나게 다루지 않고 그저 뜬구름 잡는 이상만 떠들어댔다면 어땠을까. 그것이 이상적일지는 모르지만 아무런 공감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네 교육현실은 한창 꿈꾸어야 할 아이들이 하루 네 시간씩 자며 입시경쟁을 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있다.

그러니 이 참담한 교육현실을 외면하고 교육을 다루는 드라마를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공부의 신’은 바로 그 현실을 그대로 가져와 드라마의 바탕으로 깔아놓는다. 그리고 이 현실 위에 판타지를 그려 넣는다. 만일 현실을 현실 그대로 리얼리티를 바탕으로 그려냈다면 ‘공부의 신’은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공부를 해야할 시간에, 혹은 아이들 공부할 시간에 굳이 이 드라마를 보며 현실의 씁쓸함을 곱씹을 시청자가 얼마나 있을까.

하지만 이 드라마는 현실 상황 위에 그것을 넘어서는 판타지를 집어넣음으로써 시청자들이 현 교육현실에서 얻을 수 없는 것을 대리 체험하는 쾌감을 제공했다. 물론 ‘수학의 신’ 차기봉(변희봉) 선생이나, 춤과 노래를 하는 앤써니 양(이병준) 같은 영어 선생이 학교에서(아마 학원에서는 가능할 것이지만)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어쨌든 천하대 특별반에 있는 네 명의 아이들이 저마다의 사연을 갖고 있고, 그 사연을 넘어서 도전하는 모습과 이를 도와주는 선생들의 이야기는 지친 수험생과 부모들에게 드라마가 주는 작은 위안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여기에 ‘공부의 신’은 보다 강력한 양념을 하나 더 추가했다. 그것은 판타지 위에 지극히 실용적인 공부의 방법(문제 푸는 방법이 더 많지만 이것이 더 실용적이다)들을 제공한 것. 영어문장을 독해할 때, “단어를 모르더라도 찾아보지 말고 일단 때려 맞춰라”라는 방법이나, 수학문제를 풀 때,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서로 문제를 내보는 방식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그러니 이 실용적인 정보들은 판타지와 만나면서, 판타지를 더욱 강화하는 힘을 부여한다. 저렇게 공부하면 나도 천하대(사실은 명문대)에 갈 수 있지 않을까. 물론 현실은 다르지만.

‘공부의 신’의 성공방정식은 ‘현실+판타지+실용 > 논란’이다. 즉 현실을 바탕으로 제시하고 그 위에 판타지를 그려 넣은 후, 추가로 실용적인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스토리가 강력한 힘을 발휘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 힘은 이 드라마가 “기존 잘못된 교육정책을 결국은 인정하고 심지어는 부추기고 있다”는 그 논란의 불씨마저 압도한다. 그래서 이 드라마에 대해 우리는 양가감정을 갖게 된다. 드라마의 내용에 강력히 공감하면서도(현실적인 공감), 뭔가 잘못되어 있다는 그 마음. 드라마의 성공이 그만큼 현실의 실패를 말해주는 그 씁쓸한 상황, 이것이 ‘공부의 신’의 성공이 우리에게 환기시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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