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의 품격>, 판타지는 달콤하지만...

 

신사되기 참 어려운 시대다. 그러니 품격을 갖추기는 더 어렵다. 하루하루 밥 벌어 먹기도 힘들어죽겠는데 신사? 품격? 아마도 많은 지금의 중년남자들에게 더 마음에 와 닿는 글귀는 '아플 수도 없는 마흔'일 것이다. 물론 이 글귀 역시 엄살이 너무 심하다는 느낌은 있다. 어쨌든 <신사의 품격>에 등장하는 잘 나가는 중년 4인방과 아마도 그 시간에 TV 드라마를 보고 있는 남자들 사이에는 그만한 거리가 있다는 얘기다. 당연하다. 여기 등장하는 꽃중년 신사 4인방은 여성들의 판타지니까.

 

 

'신사의 품격'(사진출처:SBS)

잘 나가는 건축디자이너 도진(장동건), 그 건축사 사장 태산(김수로), 변호사 최윤(김민종), 그리고 카페 사장이자 한량 이정록(이종혁). 먼저 직업부터가 누군가에 간섭을 받지 않는 전문직들이다. 직원이 거래처 사장에게 맞았다고 무려 2억의 손해를 감수하며 계약서를 찢는 도진이나, 프로 골퍼인 여자 친구에게 좋지 않은 기사가 떴다고 그걸 볼까봐 휴대폰을 발로 밟아버리는 태산, 건물 하나가 아니라 한 거리를 통째로 갖고 있는 아내를 둔 덕에 2천5백만 원짜리 피트니스 클럽을 끊고 호시탐탐 다른 여자들에게 눈을 돌리는 정록까지 이들에게 현실의 그늘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그들이 사는 곳이 우리와 같은 곳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들은 이국적인 문화 속에서 산다. 수시로 모여 브런치를 하며 수다를 떨고 술을 마신다. 집에서 가족들이 둘러앉아 된장찌개를 먹는 그 흔한 장면 하나가 이 드라마에는 없다. 그들은 대신 레스토랑에서 친구들끼리 둘러 앉아 스테이크를 썬다. 이곳이 <섹스 앤 더 시티>의 뉴욕이라고 해도 무방할 듯싶다. 아니 어쩌면 그 뉴욕의 라이프스타일을 따라하고 싶어 생겨난 거리와 상점들로만 이들의 발길이 머무는 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이 현실의 냄새가 없다는 것이 바로 이 신사들에 대한 판타지가 생겨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이들은 뭐하나 구질구질하게 굴지도 않고 마음 내키는 대로 살아간다. 심지어 남녀 관계에 있어서도 지독할 정도로 쿨하다. 당사자의 일이지만 마치 남 일을 대하듯 한다. 도진의 말투, 이른바 '걸로체'는 이 쿨한 이들의 대화를 잘 표징하는 어법이다. 속내를 직접 표현하지 않고 ' ∼걸로'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이 아닌 타인이 말하는 것처럼 객관화하는 방식이다. 여러모로 <신사의 품격>은 현실에서 좀체 찾기 힘든(찾아보면 또 있을 지도 모르겠지만) 멋진 중년 남성들에 대한 여성들의 판타지가 녹아있다.

 

드라마가 꼭 현실을 대변할 필요는 없다. 그러니 판타지를 그린다는 게 잘못된 일도 아니다. 다만 판타지를 그릴 때도 현실적인 접점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것이 없다면 그저 공중에 붕붕 떠버린 우리와는 상관없는 이야기가 되어버린다. 그것이 <섹스 앤 더 시티>처럼 아예 뉴욕의 일이라 치부한다면 문제가 없다. 하지만 <신사의 품격>은 바로 여기 우리가 사는 곳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이럴 때 필요한 건 이 판타지적인 인물들을 바라보는 좀 더 현실적인 눈높이다. 대부분의 신데렐라 이야기에서 신데렐라가 바로 이 눈높이를 맞춰주는 역할을 한다.

 

많은 이들이 신데렐라 스토리를 주로 신분상승의 관점으로만 바라본다. 하지만 신데렐라 이야기에서 더 중요한 점은 그 도달하기 어려운 판타지와 현실을 이어주는 고리로서의 신데렐라라는 존재다. 평범한 신데렐라가 있기 때문에 그녀가 바라보고 이뤄가는 판타지에 대중들이 몰입할 수 있고, 판타지적인 존재로만 있던 왕자님이 알고 보니 우리와 같은 사람이었네 하는 인식에 도달할 수 있다. <시크릿 가든>에서 초재벌인 김주원(현빈)이라는 판타지를 현실적으로 만들어주고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시선으로 하루하루를 온몸을 던져 살아가는 길라임(하지원)이라는 신데렐라가 있었듯이.

 

<신사의 품격>은 그러나 초반 이 역할을 해야 할 서이수(김하늘)가 우리네 서민들의 눈높이를 보여주기보다는 저 판타지 속 남자들의 세계에 그냥 동화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교사라는 직업을 가진 서이수가 좀 더 서민적이고 현실적인 눈높이를 보여줬다면, 이 드라마 속 왕자님 4인방이 그렇게 딴 나라 사람들처럼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것이 초반 <신사의 품격>이 비현실적이라 비판받은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이 판타지의 주인공들이 다른 면모를 보이기 시작한다. 자신들도 잘 빠진 여자를 보면 여전히 눈길을 멈출 수 없고, 누군가의 수영복 사진을 몰래 훔쳐보기도 하며, 소녀시대 멤버들을 갖고 누가 더 낫다며 논쟁(?)을 벌이기도 하고, 당구장을 살 수도 있는 재력의 소유자들이지만 게임비 얼마에 목숨을 걸기도 한다. 이렇게 신사 4인방이 친절하게도 판타지적 세계를 벗어나 현실로 저벅저벅 걸어 내려오자 드라마는 비로소 대중들과 눈높이를 맞추게 된다.

 

<신사의 품격>이 최근에 와서 대중적인 지지를 다시 회복하고 있는 건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신사와 품격이라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실적인 중년남성들에게는 지극히 이질적인 단어들이 주는 괴리감은 여전하다. 여성들의 판타지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 판타지 속에서 이 땅의 어떤 남성들은 소외감 심지어 박탈감을 느낄 수도 있다. 사실 사람의 품격이라는 것이 어디 재력과 외모에서 나오는 것인가. 어쩌면 내가 아닌 타인의 현실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닌가. <신사의 품격>이 주는 판타지에 잠시 빠져 있다가도 불쑥 불쑥 드는 생각이다.

멜로, 가족 없이도 선전하고 있는 <유령>

<유령>은 기존 우리네 드라마와는 다른 점이 많다. 우선 우리 드라마에 반드시 있기 마련인 멜로가 두드러지지 않는다. 같은 사이버 수사팀에 김우현(소지섭)과 유강미(이연희)가 있지만 이들 관계는 멜로라기보다는 서로 돕는 관계에 가깝다. 유강미는 김우현의 비밀(사실은 박기영(최다니엘)이라는)을 알고 그를 적극적으로 돕지만 두 사람 사이에 멜로 같은 화학반응은 없는 편이다.

 

 

'유령'(사진출처:SBS)

이 드라마의 또 하나의 특징은 주요 인물들의 가족 관계가 중요하게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김우현의 아버지나 조현민(엄기준)의 아버지는 물론 이 드라마의 사건에 깊이 관계 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일반적인 우리 드라마의 가족관계와는 다르다. 유강미나 박기영의 가족관계는 다뤄지지 않는다. 따라서 부모들이 등장해 주인공의 감정을 뒤흔들거나 영향을 주는 그런 장면들은 등장하지 않는다.

 

멜로와 가족관계가 별로 드러나지 않는 <유령>은 그래서 쿨하다. 이것은 사랑과 가족애 사이에서 끈적끈적한 정에 휘둘리는 우리네 전형적인 드라마와는 다르다. 오히려 미드나 일드를 닮았다. 인물들의 관계보다는 사건과 에피소드 중심으로 흘러가고, 감정의 늪에 빠지기보다는 아드레날린을 자극하는 서스펜스와 속도감 있는 스토리 그리고 반전의 힘에 더 의지한다.

 

이런 드라마 스타일은 한때 멜로와 가족 드라마에 식상해한 대중들의 요구에 의해 등장했던 전문직 장르 드라마의 계보라고 볼 수 있다. 늘 삼각 사각 멜로들이나 출생의 비밀이 난무하는 가족드라마들이 양산되면서, 그 새로운 탈출구로서 미드나 일드를 통해 발견한 장르적인 접근을 시도하게 됐던 것. 하지만 이러한 전문직 장르 드라마들은 차츰 사라지거나, 기존 우리 드라마의 요소들 즉 멜로나 가족관계 등과 섞여지기도 했다. 드라마 주 시청층인 중장년층들에게 낯설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런 흐름에서 보면 <유령>은 다분히 도발적이다. 더 엄밀한 전문직 장르 드라마의 계보를 잇고 있기 때문이다. 멜로도 가족관계도 드러나지 않는데다가 소재적으로도 쉽지 않다. 해커들이 벌이는 사이버 테러의 양상은 그 용어들이 생소할 수밖에 없다. 상세한 설명 자막이 있다고 해도 시청자들이 웬만큼 집중하지 않으면 따라가기가 어렵다. 그만큼 <유령>은 쉽지 않은 소재를 쉽지 않은 방식으로 풀어내고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놀라운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적인 지지도가 높은 편이란 점이다. <각시탈> 같은 누가 봐도 이야기 흐름을 쉽게 알 수 있고 전형적인 우리네 드라마 형태인 멜로와 가족관계의 이야기가 분명한 드라마가 15%(agb닐슨)의 시청률을 내고 있는 와중에, <유령>이 12.2%의 시청률을 낸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도대체 어떤 점이 주효한 것일까.

 

먼저 특유의 속도감을 지목하지 않을 수 없다. <유령>은 보통 우리네 드라마였다면 몇 회 분량이 되었어야 하는 에피소드를 단 한 회에 쏟아 부을 정도로 압축적이다. 그만큼 속도가 생길 수밖에 없다. 이제 6회를 방영했을 뿐이지만, 박기영이 김우현으로 페이스오프한 상황은 거의 밝혀지고 있다. 또 일찌감치 좀 더 거대한 사건과 연루된 것이 분명한 신효정 살인사건의 범인이 조현민(엄기준)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이것은 이 드라마가 스토리나 아이디어면에서 차고 넘친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하지만 사건들이 그저 먼 나라 얘기처럼 여겨졌다면 이 속도감 넘치는 롤러코스터에 선뜻 시청자들이 동승할 수 없었을 것이다. <유령>은 우리에게 익숙한 연예인 루머라든가, 타진요 사건, 디도스 공격 같은 사이버 범죄를 먼저 소재로 끌어냄으로서 대중들의 관심을 얻을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지목하고 싶은 건, 이런 사건들의 에피소드로 꾸려지는 드라마들이 가진 맹점인 툭툭 끊어질 수 있는 이야기 흐름을 <유령>은 전체를 꿰뚫는 사건을 통해 잘 봉합하고 있다는 점이다. 연예인 자살사건과 디도스 공격에 이은 국가 주요기관 시스템 공격까지 에피소드들이 나눠지지만, 그것은 또한 조현민이라는 김우현이 쫓는 유령(팬텀)으로 다시 모아진다. 각각의 에피소드와 전체 드라마의 흐름을 잘 조화시키고 있다는 것은 이제 이 김은희라는 작가(그녀는 <싸인>의 작가이기도 하다)가 본격적인 전문직 장르드라마의 틀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사실 <유령>은 다른 드라마들에 비해 쉽지 않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대단히 매력적이다. 쉽다는 것은 우리가 부지불식간에 드라마라고 하면 그저 그런 것의 반복이라고 스스로 인정하기 때문은 아닐까. 왜 드라마는 새로운 소재를 다루고 새로운 시도를 하면 안 되는 것일까. <유령>은 그런 점에서 비슷비슷한 우리네 드라마들 속에서 유령 같은 존재가 아닐 수 없다. 그것도 대단히 바람직하고 반가운.

먹먹한 <닥터 진>, 막막한 현실에서 나온다

 

<닥터 진>은 허구다. 이 사극의 핵심 장치인 타임 리프(시간을 뛰어넘는 것)가 그걸 말해준다. 그러니 조선시대에 괴질(콜레라)로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수액을 주사하기 위해 링거(?)가 등장한다거나 천재적인 신경외과의 진혁(송승헌)이 끌과 정으로 뇌수술을 하고, 인공호흡으로 사람을 살리는 그런 장면들에 리얼리티를 운운한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다. 중요한 것은 이 이야기가 뭘 말하려고 하는가 하는 점이다. <닥터 진>이 이 조선시대까지 날아가서 하려는 이야기는 조선에 있지 않다. 바로 현재 우리들이 살아가는 현실에 있다.

 

 

'닥터 진'(사진출처:MBC)

'이 여인은 말에 치였던 그 때 아들을 구하고 죽었어야 하는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역사는 한번 정해지면 결코 변하지 않고 흘러가는 것일까. 하지만 저 사람들에게 역사니 운명이니 그런 거창한 말은 아무 의미도 없다. 그저 살아남아야 하는 사람들을 모른 척 할 수 없다. 핑계를 댈 수도 없다. 나는 이 아픔을 치료해야 한다. 그것이 내 운명이다.'

 

진혁의 이 내레이션은 이 드라마가 가진 생각을 잘 말해준다. 도성에서도 밀려나와 토막이라는 빈민촌에서 그저 죽지 못해 살아가는 가난한 이들. 진혁의 말처럼 이들에게 역사니 운명이니 하는 거창한 말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더 중요한 것은 생존해야 한다는 것. 드라마가 굳이 조선까지 가서 그렇게 누군가의 손길 한 번 제대로 받지 못하고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을 가난한 이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것은 이 판타지가 주는 감흥이 현재의 현실에도 그만한 울림을 주기 때문이다.

 

죽음보다 사는 게 더 두려운 토막촌 사람들, 저들끼리는 호의호식하면서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는 가난한 이들을 보살펴주기는커녕 격리하고 급기야는 마을 전체를 불질러버리는 권력자들. 이 가난한 자는 더 가난해지고 권력자들은 더 권력을 누리는 이야기적 정황은 작금의 현실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청춘들은 성장의 사다리가 끊겨버린 현실에 절망하고(이 드라마의 김경탁(김재중)이란 서출을 떠올리게 한다), 현실에서 밀려난 우리네 가장들은 차라리 죽는 게 나을 성 싶은 고통스런 삶 속에 내몰려 있다. 그럼에도 정치인들은 저들 살 궁리만 한다. 민생은 없고 권력욕만 있다.

 

이 드라마 속 진혁이란 인물은 그래서 이 암흑의 현실 속으로 뛰어 들어온 메시아 같은 판타지다. '상것들'이라 천대받으며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벌레 같은 삶에 뛰어든 이 진혁이란 인물은 제 온 몸을 던져 그들을 살려내려 한다. 그러다 정작 자신이 괴질에 걸려 쓰러지자 그는 그들이 느낀 고통과 두려움을 실감한다. '이런 것이었어. 이것이 바로 콜레라였어. 그들이 느꼈던 고통, 두려움이 몸 안으로 들어온다. 무섭다. 미치도록 무섭다. 이렇게 죽고 싶지 않아..' 이런 공감은 진혁이 얼마나 인간적인 메시아인가를 드러낸다.

 

이 강한 현실에 대한 판타지는 이 드라마의 떨어지는 리얼리티를 상쇄하고도 남는다. 본래 판타지란 현실에 부재한 것을 꿈꾸는 것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가진 자들이 호의호식하면서 말 한 마디로 서민들을 죽음으로 내몰 때, 그들을 돌보는 것은 가진 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천대받는 낮은 자들이다. 토막에 쌀가마니를 챙겨오는 기생들이나, 많은 약재들을 남모르게 갖다 놓는 홍영휘(진이한) 같은 혁명가들,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로부터 밀려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한량처럼 살아가는 이하응(이범수) 그리고 몰락한 양반집 규수로 아버지를 잃고 어렵게 살아가는 홍영래(박민영) 같은 이들이 그들이다. 그들은 이 희망 없는 현실에 작은 촛불을 든다.

 

"민심은 보살피는 것이 아니라 다스리는 것이다"라며 토막을 불태우라 명령하는 김병희(김응수)와, 다 타버린 집들을 내려다보며 "집들이 불타고 사람이 죽어나가는데도 저 안(도성. 한양)에서는 아무 것도 뵈지도 들리지도 않는가 보이."하고 한탄하는 이하응의 대조적인 모습은 그래서 우리네 현실에도 울림이 적지 않다. 이것이 어디 조선시대의 이야기인가.

 

진혁이라는 가상의 판타지적인 인물이 조선까지 날아가 링거에 주사까지 만들어 서민들을 살리는 이 황당한 이야기가 왜 먹먹하게 느껴질까. 그것은 이 정도로 황당한 판타지를 꿈꾸게 하는 현실의 막막함 때문은 아닐까. 진심으로 사람을 살리기 위해 온 몸을 던지는 진혁 같은 메시아가 나타나기를 기대하는 마음. 정녕 판타지에 그치고야마는 그런 현실을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는 얘기일까. <닥터 진>이 주는 먹먹함의 실체는 그래서 이런 막막한 현실을 전제하고 있다.

<추적자>에 이어 <유령>까지, 사회극 선전의 이유

 

'네 손이 일 년 전에 지은 죄를 기억해.' '오페라의 유령(The Phantom of the Opera)'의 음악이 장중하게 흘러나오면서 모니터 화면에 써지는 글귀, 그리고 살인, 현장 온 벽면을 가득 메운 저주의 글자들... 사이버 범죄를 소재로 다루는 <유령>의 이 장면들은 이 드라마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을 해준다. <유령>은 사이버 범죄에 대한 복수극이다.

 

 

'유령'(사진출처:SBS)

일상적으로 올리는 댓글 하나, 추측에 의한 근거 없는 소문의 양산, 끝없는 루머로 행해지는 스토킹에 가까운 집단행동들... 사실 사이버 세상에서 매일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이 많은 일들이 어떤 실제 결과로 이어지는가에 대해 사람들은 둔감하다. "설마 악플했다고 사람을 죽입니까?" 한영석(권해효) 경사의 이 대사에는 악플이라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회적 분위기가 들어가 있다.

 

'신효정 놀이 동영상'이 말해주듯 누군가에게는 죽음이 누군가에게는 놀이가 된다. 이것은 또 거꾸로 누군가의 놀이(댓글 같은)가 누군가에게는 죽음이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신효정에게 진실을 요구한다'는 이른바 신진요 카페는 우리가 타블로 사건에서 봤던 '타진요'의 드라마적 재현이다. 제 아무리 사실과 그 증거자료를 내놓아도 그것이 오히려 끊임없는 루머로 재생산되며 피해자를 고통스럽게 했던 그 사건.

 

<유령>의 가해자, 팬텀(Phantom)은 이 상황을 거꾸로 되돌려 놓는다. 손가락 몇 번 놀리면 누군가에게 저주를 퍼부을 수 있는 노트북이 거꾸로 그 당사자에게 저주를 쏟아 붓는다. '네 손이 일 년 전에 지은 죄를 기억해', '죽어' 같은 글귀들이 모니터에 떠오르면서 자신의 저주가 똑같이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공포의 경험, 그리고 살인. 살인 현장 벽에 써진 댓글들은 마치 이 죽어가는 가해자(누군가를 죽게 한)이자 피해자(살해당한)의 상황조차 비웃곤 하는 인터넷 상의 댓글들을 닮아 있다.

 

<유령>의 팬텀이 저지르고 있는 빗나간 복수극은 그런 의미에서 가해자와 피해자의 역할 바꾸기를 드라마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악성 댓글에 시달리다 누군가는 스스로 목숨을 버리고 마는 그런 일들은 사실 우리네 현실에서 이미 여러 번 목도되었다. 하지만 그 사건을 접하면서도 '뭐 그렇다고 목숨을 버려?'하고 또 다른 의구심을 품었다면, <유령>은 그 의구심에 뒤통수를 치는 드라마다. 저들의 사건이자 저들의 불행으로 여겨졌던 것들을 우리들의 사건이자 불행으로 되돌리는 작업.

 

흥미로운 건 본격적인 사회적 코드를 보여주면서 <유령>에 대한 관심도 급상승하고 있다는 점이다. 처음 2회 동안 수목극 꼴찌의 시청률을 기록하던 <유령>은 3회만에 <아이두 아이두>를 넘어섰다. 이것은 저 <추적자>가 그랬던 것처럼 사회극이 갖는 힘이다. <추적자>가 우리네 정의의 현실을 끄집어냄으로써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다면, <유령> 역시 우리 사회가 가진 디지털 세상의 뒤안길을 아프게 들여다봄으로써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사회극이 선전하는 건, 아프게도 우리가 처한 현실이 그리 녹록치 않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아이두 아이두>나 <신사의 품격> 같은 달달한 멜로들이 고개 숙이고 있는 건 사회극이 제시하는 현실 앞에 이런 멜로들은 너무나 비현실적인 세계처럼 여겨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쨌든 <추적자>에 이어 <유령>까지 이어지는 사회극에 대한 깊은 대중들의 관심은 이제 드라마에 있어서도 허황된 이야기보다는 좀 더 사회현실을 함의할 수 있는 다양한 소재를 요구하고 있다는 얘기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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